고객센터

customer center

070.8868.6303

영화 합평회

<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 합평회 (참석자: 안숭범, 박태식, 성진수, 정재형)

 

<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 합평회

날 짜: 2016년 1월 27일

참석자: 안숭범, 박태식, 성진수, 정재형

 

성진수 : <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 합평회 시작하겠습니다.

 

박태식 : <레버넌트>는 우선 기본적으로 카메라 움직임이 정말 대단했습니다. 곰하고 생사를 다툰 그 장면이 대단했어요. 보면서 ‘기억에 남을 만하다’하는 영화들이 몇 개 있어요. 예를 들면 <벤허>의 전차경주 , <닥터 지바고>에서 기차의 대륙횡단 장면이 있어요. 또, <반지의 제왕 3>에 나오는 한 시간 가량의 전투, <아바타>에서 제이크가 이크란을 타고 날았던 첫 비행. 난 여기에, 조금 과장해서 평가한다면, 처음에 인디언들이 들어와서 싸우는 장면들 있잖아요, 모피 사냥꾼들하고. 그 장면하고 곰하고 싸우는 장면이 역사에 남을만한 작품인 것 같아요. 감독이 왜 이게 가능했냐면, 전작인 <버드맨>에서 한 번 해보고 나서 이걸 한번 서구개척시대로 옮겨서 하겠다, 라는 생각이 들어보니까 이 사고의 흐름을 알 수 있더라고요. 난 그게 우선 대단히 좋았어요.

그렇다고 이 영화가 반드시 그것만 얘기하려고 영화를 만든 건 아니겠죠. 영화를 통해서 표현하고자 하는 바인데, 이 영화에서 굉장히 중요한 건 뭐냐면 피츠제랄드하고 휴 글래스 사이의 갈등이에요. 난 그 둘의 아주 다른 인간성을 봤는데, 나중에 피츠제랄드를 잡으러 간다고 하면서 글래스가 어떤 식으로 도망갈지에 대해 얘기하더라고요. 야크처럼 도망을 갈 것이다, 깊이 숨을 것이다. 왜 그렇게 알 수 있느냐하면, 피츠제랄드는 탐욕이 있기 때문에 그렇다는 거예요, 탐욕. 그래서 일행이 글래스에게 너는 어떠냐고 물으니까, 이 사람이 하는 얘기가 재미있어요. ‘I'm not afraid to die anymore.', 난 죽는 게 두렵지 않아. 'I'm already.', 나는 이미 죽었다. 이 사람은 그러니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이면서 보통 사람과는 완전히 차원이 다른 사람이 돼 버린 걸 얘기하더라고요. 실제로 이 영화에서 그가 거쳐 온 이 행적들을 보면 조금 황당해요. 처음에 말의 내장을 빼내는데, 아 저 안에 들어가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 정도로. 이 사람이 생존해왔던 노력들을 쭉 보는데 진짜로 기사회생과 같은 것들이 보이더라고요. 아 이 사람이 가지고 있는 세계관, 휴의 세계관과 피츠제랄드의 세계관이 완전히 다르겠구나. 그럼 감독은 둘을 비교해서 보여주는 것 아니겠어요? 그래서 그런 점들을 재미나게 봤어요.

그리고 휴 글래스라는 사람의 실화라더군요. 그런 사람이 실제로 있었대요. 그 사람이 쓴 편지를 가지고 상상력을 동원해서 만들었겠죠. 그 사람이 전설의 인물이었대요. 험한 자연을 깨치고 나온 사람. 이냐리투 감독이 그런 사람을 하나 발견해낸 거예요. 옛날에 있었던 아주 독특한 사람 하나를 발견해내서 우리한테 선보였다, 그런 점들이 좋더라고요.

마지막으로 한 마디만 더 하면, 고대 그리스 역사가 중에 대표적인 사람이 두 사람이 있어요. 헤로도투스하고 투키디데스. 헤로도투스는 기술적인 역사관이고, 투키디데스라는 인간의 역사를 통해서 교훈을 얻어요. 그래서 이 사람은 교훈적인 역사관을 만들어냈어요. 그래서 고대 그리스의 두 가지 역사관이 있는데, 교훈적인 역사관이 뭐냐면 인간이 자연을 어떻게 극복하고 그것을 어떻게 후손에게 남겼는가, 그걸 전달해주는 사람을 역사가라고 평가했거든요. 이건 말하자면 교훈적인 역사관의 전형적인, 특히 자연을 극복하고 자연을 이겨내는 것 그런 것들이죠. 역사를 보는 시각을 자기 혼자 개발해냈겠어요? 아카데미상을 억지로라도 줘야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어요.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한테. 이제는 불쌍한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성진수 : 이 영화에서 연기 잘하던데요.

 

안숭범 : 저는 이냐리투가 영화를 통해 내보이고자 한 야심에 주목했습니다. 이 영화에서 가장 대비되는 것은 자연과 생명, 무한과 유한, 또는 신적 섭리로서의 운명과 인간적 실존으로서의 숙명 같은 것이죠. 이냐리투는 이 영화에서 지속적, 의도적으로 위대해보이기까지 하는 자연 풍광에 집착합니다. ‘말할 수 없는 것의 현존’으로 다가오는 압도적인 숭고미가 그러한 장면들에 서려 있는데, 이때의 자연풍광은 모든 것을 지켜보는 절대적 존재처럼 느껴집니다. 그의 품 안에서 곰과 순록과 야생동물들이 싸우고, 먹고 먹히고, 그들끼리의 야생을 이루죠. 또 한 켠에선 인간의 배신과 음모, 복수의 의지 등이 흘러갑니다. 그래서일까요? 자연과의 대비를 통해서 보면 인간들 간의 갈등을 포함한 동물들의 모든 싸움이 다 똑같아집니다. 미미한 생명작용의 일부처럼 느껴지는 것이죠. 서사적으로 보면, 글래스는 결국 복수에 성공합니다. 자기 아들을 죽인 피츠제랄드를 죽이죠. 그 스스로는 자기 목숨을 가까스로 부지합니다. 인디언 부족들이 그의 곁을 지나가지만 그를 해치지 않죠. 이 모든 서사적 흐름은 그것을 지켜보는 거대한 자연 속에 약간의 예외적 생명작용처럼만 느껴집니다. 물론, 글래스의 서사적 도착점엔 의미를 부여해야 합니다. 무심한 듯 항구적 질서를 이루는 자연 속에서 그 일반적인 섭리를 거스르며 자기 의지와 대결하는 한 인간의 처절한 분투가 위대하게 느껴지는 면이 있거든요. 미약한대로 한 생명의 분투가 보여주는 충격, 그것을 주기 위해 이냐리투는 글래스를 그 자리에 도착시켰겠죠. 이렇게도 설명할 수 있겠네요. 글래스가 만든 사건들 역시 자연적 질서, 곧 산과 언덕을 덮은 하얀 설원 안에 휩쓸려서 역사 속으로 사라지질 거예요. 그러나 그가 남긴 ‘인간적’ 경이감은 ‘자연의’ 경이감과 대비되는 어떤 생동감을 주죠. 이 즈음에서 언급해야 할 것이, 자연적 질서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영적 전령처럼 느껴지는 죽은 아내의 이미지들이예요. 죽은 아내는 복수같은 것들은 신의 영역이다, 라고 말하죠. ‘신의 영역’으로 유비되는 자연적 질서에선 인간의 사사로운 갈등, 복수심 등은 아무 것도 아닌 것이죠. 그러니까 그녀는 자연적 질서의 전령이기도 합니다. 결론적으로 글래스가 자기 의지에 충일해 초극적 여정을 완수하는 과정은 자연의 경이감과 가장 먼 쪽에서 또 하나의 ‘경이감’을 보여준다 하겠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영화를 보면서 압도적인 신적 질서를 환기시키는 자연의 풍광에 집착하는 테렌스 멜릭이 먼저 떠올랐어요. 물론, 테렌스 멜릭은 성찰적인 자기 시선을 내레이션으로 다 설명하죠. 철학적인 함의를 담고 있는 관념적 내래이션은 꽤나 수다스럽습니다. 이에 반해 <레버넌트>는 언어가 거의 생략돼있어요. “으...”, “아...” 이런 신음이 언어 이전의 동물적 생명력을 보여주죠. 그러니까 좀 간단하게 요약하면 시적인 영상은 상당히 동일하고, 철학적인 성찰을 담는 시선도 비슷한데, 한쪽은 언어를 통해 자의식을 적확하게 전하고, 한쪽은 이미지의 힘만으로 끌고가려는 면이 있죠. 그리고 또 다른 영화 하나! 최근작 중에 전혀 다른 기획인데 허우 샤오시엔의 최근작 <자객 섭은낭>이 있잖아요. 이것도 떠올랐어요. 왜냐하면 <자객 섭은낭>도 중국의 압도적인 자연의 풍광들을 보여줘요. 그리고 서기가 연기한 주인공 섭은낭이 자기를 배신한 정혼자에게 복수하는 이야기예요. 굳이 비교하면, <자객 섭은낭>은 무협의 이미지 배면에 철학적 자기 발화가 있고, <레버넌트>는 서부극과 인접해 있는 서사 배면에 철학적 시선을 담고 있죠. 그런데 중요한 건, <자객 섭은낭>도 개인이 복수를 끝내 단념하면서 끝나는 이야기이지만, 그것이 자연의 섭리와 질서를 거스르는 인간적 초극처럼 느껴진다는 점이예요. 자객은 검으로 자기를 증명하는 건데, 이 영화에서 무정한 검의 질서와 자연의 질서는 서로 유비적 관계에 있어요. 냉정하고 냉혹하고 그들의 법칙 속엔 인간적인 감정이 개입될 수 없고 개입되어서도 안 되니까요. 그런데 이 섭은낭은 끝내 자기 내면 깊은 곳의 감정에 솔직해지죠. 영화는 과거의 정혼자를 살려두고 자기 거처를 옮기며 끝납니다. 이 마지막은 전혀 다른 도착점 같지만, 사실 글래스의 도착점과 중첩되는 면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박태식 : 그래, 거기서 죽였어야 되는데 못 죽이더라고요.

 

안숭범 : 그렇죠. 그런데 이건 그 자연적 질서를 향한 인간의 극복, 그러한 극복의 한 양상이라고 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똑같이 이 두 영화는 비슷한 것을 기획하고 있다고 느껴졌어요. 일단 이 정도 하겠습니다.

 

성진수 : 저도 앞에 얘기하셨던 두 분과 크게 다른 점을 보진 않았어요. 일단 누가 보더라도 자연과 인간의 대비가 일어나는 영화인 건 너무나 맞죠. 자연하고 인간이라는 대립점에 있어서 두 가지를 생각하게 했는데, 하나는 글래스라는 인물뿐 아니라 거기 나오는 모든 인물이 자연의 극복이 됐든 정복이 됐든, 자연 속에서 자신의 삶을 지키기 위해서 애쓰는 모습이 보이죠. 박태식 신부님이 극복이라는 말을 썼는데, 보통 극복한다고 하면 인간하고 자연이 대립적인 상황에서 자연을 정복하는 서사를 인간의 역사에서 많이 그려왔잖아요, 그런데 이 영화는 조금 다른 것 같더라고요. 인간이 어떤 척박한 자연환경 속에서 최선을 다해서 자기 삶을 살려고 하는 게 자연하고 어떤 대비되는 극복이나 정복의 모습이 아니라 자연의 모습으로 일치되는 것, 인간의 그러한 노력이 자연의 일부인 것으로 보지는 지점이 있는 것 같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까 안숭범 선생님께서 얘기하셨던 인간적인 것, 그건 분명히 자연하고 괴리되는 다른 부분이기 때문에 그런 인간의 행위들로 인해 하나의 서사가 이루어지는데, 그게 물론 시각적으로도 굉장히 잘 드러나 있죠. 이 영화에는 나무를 밑에서 앙각으로 잡은 숏이 종종 등장하는데, 마치 그 나무들이 인간이 조종하는 듯, 인간이 마리오네트 인형인 것 처럼 보이더라구요. 인간의 서사가 어쨌든 자연에 속해있어서 자연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것처럼 보여주는 그런 시각들이 있는 거죠.

그런데 또 한편에서 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도 같아 보여요. 제가 이 영화에 있어서 가장 흥미로웠던 것은 영화의 음악이었어요. 이 영화는 시각적으로 카메라가 자연의 광대함과 숭고함을 통해 자연의 서사를 보여줘요. 심지어는 그 안에 있는 인간도 자연의 일부분으로 보이게 만들죠. 그런데 음악은 그와 배치되는 인간의 서사를 들려주고 있다고 봤어요. 이 영화는 음악이 없는 장면이 거의 없을 거예요. 음악이 거의 다 흐르는데, 음악은 인간의 서사, 달리 말하면 인간 입장에서 경험하는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고 봐요. 곰이 나타날 때도 계속 웅- 하는 음악이 있다거나, 급격한 음악의 반전이 나타나면 곰이 습격을 한다든지, 인물들 간의 갈등에 변화 국면이 있으면 음악이 그 분위기를 제시해주는 역할을 하거든요. 그래서 영화가 대사가 없다고 했는데 없는 대사를 음악이 대신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어요. 그런 의미에서 시각적인 것과 청각적인 것을 대비시켜보면 시각이 자연의 서사를 얘기해준다면 음악이 인간들이 겪고 있는, 서로 갈등하는 인간성과 내면 그런 것들에 대한 서사를 만들고 있는 영화가 아닌가 생각해요.

많은 사람들이 촬영이 훌륭하다고 말하죠. 그건 사실이에요. 자연광을 사용했고, 롱 테이크를 사용하거나, 인물을 갑자기 클로즈업으로 들어가는 방식, 사실 클로즈업도 카메라가 움직인 건 아니고 인물들의 움직임으로 클로즈 업 되는 경우인데, 여하튼 촬영에 있어서 그 어떤 야심찬 촬영을 기획해서 찍었어요. 그래도 이 영화에서 음악의 역할을 생각하면서 저는 음악상도 받아야 되지 않나 하고 생각했는데, 음악상 후보에는 없더라고요. 골든 글로브에만 후보에 올랐었구요.

디카프리오 얘기를 잠깐하면, 아까 상을 줘도 되겠다고 얘길 하셨는데, 저도 동의해요. 전 디카프리오가 영화 찍느라고 고생만 한 줄 알았는데, 영화를 보니까 내면연기를 훌륭하게 했더라고요. 이걸로 상을 받아도 어쩔 수 없이 준 상이라고 보이지는 않겠다고 생각했어요. 다른 배우들의 연기도 너무 훌륭했어요. 톰 하디는 뭄론이고,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금발머리의 소년 병사의 연기도 좋더라고요. 영화에서 자주 본 얼굴인데 그 배우의 연기도 상당히 설득력 있었어요.

 

정재형 : 저는 조금 다른 시각으로 이걸 보고 싶어요. 미국영화로 보거든요, 전형적인 미국 할리우드 영화의 문맥에서 보고 싶어요. 할리우드 영화에서는 인종성이 가장 중요합니다, . 이냐리투는 멕시칸 감독이기 때문에 이런 영화를 진지하게 그렸다고 봅니다. 그러니까 미국의 인종성은 화약과 같아서, 평소에는 평온하다가도 갑자기 광분해서 미국 전체가 뒤집어질 정도로 중요한 이슈죠. 그래서 이냐리투는 이 영화가 예술적으로 만들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만든 것 같으면서, 동시에 미국을 비판적인 시각으로 그렸다고 봅니다. 일단 미국 할리우드 영화에서 인종주의의 대표적인 구호가 ‘세계의 중심은 백인이다’라는 거죠. 다양한 인종이 미국에 살고 있지만, 와스프(WASP)를 가장 중심에 놓고 보죠. 그래서 이 영화는 와스프 백인중심주의를 해체하고 혼종성 자체, 다양한 민족들이 같이 살아가야 하는 혼종성의 주제를 중시하는 영화라고 보여집니다. 이 영화 서사의 핵심은 글래스가 아들의 복수를 하는 거거든요. 처음부터 끝까지 이 영화는 그 하나의 선으로 구성이 돼 있어요. 아들은 혼혈아죠. 왜 그렇게까지 혼혈아들에 집착하는가 하는 것이 많은 사실을 숨기고 있다고 봅니다. 그게 미국이라는 나라를 기회의 땅으로 보는 멕시칸 감독 이냐리투의 시각인 것이죠. 미국이라는 나라는 땅일 뿐이지 어떤 백인 중심주의의 국가 이데올로기가 아니라고 보는 거죠. 그래서 미국 인종주의를 해체하고자 하는 겁니다. 특히 그 문제에 대해서는, 복수를 한 다음에 마지막에 엔딩의 시선을 보면 오픈 엔딩이 돼 있죠. 관객을 보면서 질문을 하는 시선을 엔딩으로 하고 끝냅니다. 현재까지도 그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있다, 이런 질문을 하고 있는 걸로 보고요. 자기가 죽일 수도 있었지만, 신에게 맡기겠다며 피츠제랄드를 강물에 떠내려 보냈는데 결국 인디언이 죽이죠. 그 얘기는, 인디언이 곧 판관의 입장이 된 거예요. 그래서 글래스는 백인이지만 혼혈의 시각, 혼종성을 갖고 싶어 했던 그런 양심적인 백인으로 해석되길 바라는 인물로 그려져 있죠. 그게 미국의 중요한 문제고 딜레마다, 이렇게 보는 거죠. 그래서 저는 그런 점에서는 구체적으로 해석을 하고 싶어요.

 

성진수 : 정재형 선생님이 이 영화를 인종적으로 보셨는데, 사실은 그 부분에 있어서 제가 이 영화가 양가적이라고 느꼈거든요. 분명히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이 영화는 미국이 가지고 있는 인종적인 문제를 건드리고 있는 게 맞는 것 같아요. 그 주인공이 혼혈아들을 두고 있고, 혼혈아들을 위해 복수를 한다는 것, 말씀하셨던 엔딩의 서사 같은 건 확실하다고 봐요. 영화를 보면서 그런 것이 표면적으로 드러나 있는 것이 확실한데, 조금 불편했던 건 이 영화가 너무 시적으로 그려지면서 자연이 굉장히 크게 부각되고 글래스의 환상으로 인디언 아내가 인간세계를 벗어난 자연과 일치된 존재로 등장하면서 인디언을 인간과 자연이라는 이분법 안에서 자연의 위치로 신화화시키는 시점이 있지 않나 싶더라고요. 그렇게 하려고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자연스럽게 영화가 그렇게 다가오는 점이 있는거죠. 그래서 이 영화가 만약 정재형 선생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미국이 가지고 있는 인종적인 문제를 표면적으로 내세우려고 했다고 한다면, 영화의 형식이 그것을 조금 무마시켜서 애매한 지점에 도달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서요.

 

정재형 : 오히려 거꾸로, 그 부분을 디테일하게 말씀드리면, 미국 할리우드 영화에서 항상 공간이 중요하거든요, 공간성이. 그래서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부분은, 할리우드 영화에서 인디언의 역사는 살육사거든요. 인디언이 백인에 의해 살육됐어요. 피의 역사죠. 이 영화의 오프닝 장면은 두 가지 시각을 보여줘요. 하나는 글래스의 환상 장면이고, 살육된 마을과 아내의 죽음, 그 다음에는 갑자기 이들 모피꾼들의 사방에서 몰아닥치는 화살, 공포에 사로잡힌 백인의 시선이거든요. 인디언이 엄청난 위협으로 백인들을 살육하는 공포스러운 백인의 시선, 두 가지가 처음에 제시되죠. 저는 인디언에 대한 공간이, 살육의 공간이 과거에 스탠리 큐브릭의 <샤이닝>에서 먼저 제시됐다고 봐요. 인디언을 살육했던 터에 모텔을 지어서 인디언의 악령이 출몰하는 공포의 공간이 되었던 건데, 그 메타포를 이 영화가 이어받고 있다고 보거든요. <샤이닝>이 표면적으로는 인종문제라는 걸 드러내지 않지만, 공간의 메타포를 통해 살육의 공간을 드러내죠, 그래서 ‘레드럼RedRum(거꾸로 하면 Murder)’이라고 초능력의 소년이 피를 보죠, 그 살육의 피를. 똑같은 거죠. 이 영화도 이냐리투 특유의, 보이지 않는 것을 봅니다. 그래서 아내를 보고 살육 현장을 봐요. 이 영화는 그런 의미에서 자의식의 영화거든요. 이냐리투는 그 전작 <비우티풀>이라는 영화에서부터 보이지 않는 것을 본다는 관념을 계속 형상화하고 있어요. 보이지 않는 죽음의 시체들이 천장에서 떠다니는 노동자들의 죽음이라든가 하위계층 사람들의 죽음처럼 이것도 많은 인디언들의 학살을 자연공간이라는 것에 심었거든요. 끊임없이, 아까 사운드 말씀하셨는데, 속삭임, 환청을 갖게 되고 환영을 보게 되죠. 그 사람의 시각에서만 보게 되는 거예요. 다른 사람에겐 보이지 않죠. 글래스라는 사람은 반은 백인이고 반은 인디언의 어떤, 상징적 혼혈인간이 된 거죠. 그것을 볼 수 있는, 그것이 환상이라는 형태지만, 마치 초능력자처럼 그려져 있어요. 그걸 관객으로 하여금 계속 동일시하게끔 만들거든요.

이 영화의 자연은 인디언의 공간이기도 한 거거든요. 인디언은 우주의 중심이라고 한 편으로 외쳐왔던 거죠. 인디언이 이 세상의 중심이다, 가장 선량한 인간이 인디언이다, 라는 것을 자연을 통해 대변하고 있다고 보거든요. 글래스가 현명하죠. 글래스는 길을 잘 알잖아요, 인디언의 그러한 습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사람이 위험에 빠졌을 때 지혜로운 인디언을 보여주죠. 글래스가 눈보라에 휘말렸을 때 나무를 패다가 쉴 공간을 만들어주고 치료해준 인디언. 나중에는 백인들을 만나 교수형으로 죽게 되지만, 그 길을 잃었던 인디언. 그 장면에서 인디언의 지혜를 보여주거든요. 자연이 곧 인디언의 삶인 거예요. 자연을 알기 때문에 인디언은 자연 속에서의 삶을 사는 사람들이잖아요. 백인들은 문명인이고, 자연을 정복했다고 하지만 그 백인들은 자연 속에서 굉장히 패배할 수밖에 없는 무지몽매한 인간인 거죠. 영화는 인디언을 칭송했다고 보는 거예요, 이냐리투가. 위대한 인간들인데, 백인이 굉장히 미개하다고 만들어 놨다, 백인들의 이데올로기가. 사실 백인들은 자연 속에서 길도 못 찾아가고 아무런 지혜를 갖고 있지 않다는 단순한 장면을 통해서 인디언이 곧 자연 그 자체다, 아주 위대한 인간, 휴머니즘을 가지고 있다, 등등의 모습을 그 길을 잃은 인디언과의 일련의 장면을 통해서 보여줬어요. 그리고 글래스조차도 그런 식의 지혜를 갖고 있죠.

그 장면은 어떤 영화의 패러디이죠. 폭설이 쏟아지는데 집을 만들어줘서 깨어났을 때 살아났던 장면은 아키라 구로자와감독의 <데루스 우잘라>의 한 장면이에요. 실화죠. 거기서 데루스 우잘라, 그 노인이, 러시아의 그 변방족, 몽골리안 같은 그 원주민이 러시아 장교의 위기를, 똑같은 상황에서 구해주죠. 거의 얼어 죽을 뻔한 걸 풀을 베서 집을 만들어주잖아요. 그래서 살아요. 러시아 장교의 실화, 수기에서 만들어진 영화이기 때문에 실제로 그런 부분을 굉장히 놀라워했거든요. 데루스 우잘라라는 무지몽매한 원주민 노인이 문명인인 러시아아인을 자연 속에서 살린 거잖아요. 그렇게 지혜로운 면을 가져다가 이 영화에서 패러디되면서, 인디언이 지혜롭다, 인디언이 바로 세계의 중심이 될 수 있다, 백인이 아니고, 라는 것을 백인들에게 항변하는 장면이죠. 저는 자연이라는 것을 그렇게 이해하고 싶습니다.

 

안숭범 : 저는 일부 공감하면서 반대하는 의견이 있습니다. 약간 다른 부분이 뭐냐면, <샤이닝>부터 시작하면, 제 기억이 맞다면 <샤이닝>의 첫 장면은 버즈 와이드 숏으로, 그 로키산맥을 오르는 자동차를 멀리서 익스트림 롱숏으로 잡잖아요.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전지적 시점으로 시작해요. 그때 자동차에 탄 인간들을 감싸고 있는 압도적인 로키산맥의 설산은 어떤 기능을 하냐면, 허술하게 봉합된 미국인의 자기역사에 대한 나르시시즘적 자의식, 비윤리적 인식을 고발하기 위한 장치예요. 그 자동차에 탄 가족도 로키산맥 안에 자리한 호텔을 겨울동안 지키러 가는 거잖아요. 그런데 그 로키산맥 안에 자리한 호텔에서 살인사건이 반복되어 왔고, 그곳이 먼 옛날 인디언의 거처였단 거 아닙니까? 이 모든 정보들의 조각을 맞춰보면, 인디언의 피를 당연한 것으로 돌리고, 축조된 미국의 역사를 부정하는 시선이 거기에 있습니다. 로키산맥은 그 모든 비윤리적인 사태를 끌어안고 있죠. 그러니까 <샤이닝>에서의 자연은 조금 다른 것이라고 봐요. 예를 들어 <샤이닝>의 문제의식엔 스스로를 문명인이라 자처했던 백인들의 배타적 폭력 문제, 그리고 배타적 폭력을 정당화하는 계몽의 논리가 있습니다. 로키산맥은 그것을 과거의 그 비윤리적 사태를 다 알고 있는 자연적 존재죠. 그런데 <레버넌트>에서는 인디언과 백인, 문명과 야만, 또는 인간사회와 인간적 세계 바깥에 사는 야생의 기표들이 구분되는 듯 하지만, 구분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요. 그런 여러 경계들이 있지만 이런 경계들이 미미해져버리는 것이죠. <레버넌트>에 등장하는 압도적인 로키산맥의 설원이라는 것은 그런 것들을 사소한 것으로 만드는 힘이 있어요. 인간들 안에서의 경계, 선입견, 편견 그리고 그로부터 촉발된 배신, 음모, 죽음충동 등을 미미하게 만들죠. 물론 이냐리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래스의 분투와 복수를 인간적인 것의 ‘경이’로 한 축에 놓지만 말이죠. 결론적으로, <샤이닝>의 로키산맥 설산은 비윤리적인 것, 은폐된 것을 고발하는 절대적 시선주체처럼 느껴진다면, <레버넌트>의 설산은 자연의 ‘경이’를 먼저 드러내고, 그 ‘경이’가 압도적인 만큼 글래스의 분투를 또 다른 ‘경이’로 비약시키는 시적 힘이 있다고 느껴집니다. 두 영화의 설산의 기능은 다른 층위에 있는 것이죠.

 

정재형 : 동의합니다. 그 자연에 대해서 얘기한 것이 아니라, 인디언의 공간이라는 것. 자연에 대한 구체적인 비교를 한 것은 아니고, 그건 맞아요, 난 똑같이 생각해요. 이 영화가 자연을 분명히 느끼게 하는 부분이 있죠. 자연의 엄숙함, 경건함을 줬어요. 자연을 그렇게 제시한 건 저도 똑같이 생각합니다. 그런 면이 있지만, 그 자연, 또 그 한 편의 이중 공간, 그 얘기를 비교하는 거거든요. <샤이닝>의 호텔이 이중성을 갖고 있다. 그러니까 현재의 부분은 분명히 호텔 공간이지만, 그 이면에는 인디언 학살이 같이 공존하는, 악령들이 공존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여기도 아내와 인디언들의 숨결이 있는 거죠.

 

박태식 : 그 위에 또 범접할 수 없는 거대한 자연이라는 것이 있죠. 난 그래서 이 영화는 아까 얘기 안했지만 굉장히 종교적인 영화로 봤어요. 종교학 쪽에서 ‘범재신론’이라는 것이 있어요. 유일신적인 사상에서 벗어나서, 이 통합적인 우주를 다루는 질서에서 신을, 종교성을 이해하자고 했는데, 그게 놀랍게도 인디언들에게서 발견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샤먼도 그렇죠. 그 부인이 자꾸 나오잖아요. 난 상당히 종교적인 메시지가 있다고 봤습니다.

 

안숭범 : 전 아까 했던 이야기들을 다른 방식으로 한 번 말하고 싶은데요. 이 영화는 시각적인 이미지가 매우 강렬합니다. 일반적인 영화에서 익스트림 롱 숏으로 자연 배경을 보여줄 때는, 사건의 전환이나 시공간의 변화를 공지하는 의미를 갖는 경우가 많습니다. 서사적 시간은 멈춰 있는 일종의 영화적 ‘묘사’의 순간이죠. 그런데 이 영화에서 자연풍광은 그 자체가 주인공처럼 느껴집니다. 그냥 자연풍광 자체가 주피사체여서 다른 영화에선 설정숏의 기능에서 멈췄을 수많은 이미지들이 더 많은 말을 담고 있다고 여겨져요. 조금 어렵게 말하면 거기에는 일회적인 아우라가 있는 것 같아요. 눈사태가 나는 그 순간의 설산을 생각해 보세요. 그런데 이때의 자연을 인간이나 문명과 대비시켜 보면, 해석적 층위에서 항구적인 스투디움도 느껴져요. 그러다가 글래스의 어떤 처절한 순간에 자연의 질서를 담은 이미지가 각별한 푼크툼으로 다가오기도 하죠. 그런 면에서 이 영화는 다소 ‘과잉’이고 ‘허영’이라고까지 느껴지는 자연의 이미지가 있지만, 자연의 위압감이 느껴지는 프레임을 찾아서 헤맨 그 발이 상당한 성취를 이뤘다는 것도 생각해야 해요. 그래서 저는 로케이션에 상을 주고 싶다는 마음이 큽니다. (웃음)

지금까지 자연을 잡은 정적 이미지를 말했구요. 이 영화엔 동적인 사건들도 나오잖아요, 특히 초반의 인디언 습격 씬 같은 것 말이죠. 그리고 아까 언급된 곰과 글래스의 결투 씬 같은 것도 여기에 해당하죠. 이걸 자세히 들여다보면 의외로 롱 테이크가 많아요. 자세히 보면 그 많은 움직임들, 동선들이 매우 유려해요. 카메라의 움직임도 더불어 유려하구요. 그래서 프레임 안으로 들고 나는 피사체들, 그리고 그들의 행위들을 그토록 자연스럽게 잡아내기 위해 얼마나 많은 리허설을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저는 아까 그들의 움직임을 ‘생명작용’이라 표현했는데, ‘생명작용’을 실감있게 보여주기 위한 그 계산된 롱테이크도 좋았어요. 그런 열정이 느껴져서 ‘동적 이미지’들에도 박수를 치고 싶어요. 그 부분만 덧붙이고 저는 이만 줄이겠습니다.

 

성진수 : 거기에 살짝 덧붙이자면 이 영화가 보여주는 그 롱 숏으로 자연을 담은 풍광이 다른 영화랑은 조근 다른 지점이 있다고 생각했어요. 모든 영화가 다 그렇진 않지만 우리가 흔히 자연으로 롱 숏을 담았을 때 탐미적인 무엇인가를 기대하는 것이 있거든요. 롱 숏을 잡으면 대개 한 프레임 안에 들어있는 자연풍광이 그림처럼 보이는 경우가 있어요. 그런데 <레버넌트>를 보면서 느꼈던 건 롱 숏으로 찍은 자연이 구도 잡힌 하나의 그림처럼 프레임을 잡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오히려 더 밋밋한 경우들이 많았던 것 같아요.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 구도를 잡은 게 아니라, 은근히 카메라를 그냥 들이댄 것처럼 보이는 장면들이 많았던 게 다른 영화하고 자연 풍경을 보는 느낌이 조금 달랐어요.

또 한 가지 자연을 찍은 익스트림 롱 숏의 특징은, 인간을 압도하는 힘이 없지는 않은데 그러한 것보다는 훨씬 느슨하게 느껴졌어요. 오히려 인간이 자연 안에 들어가 있는 것을 가까이서 찍었을 때 자연의 압도적인 힘이 더 느껴지더라고요. 어떤 의미를 생산하는지까지는 모르겠지만, 다른 영화에서 자연을 익스트림 롱 숏을 사용해서 보여 줄 때 감독이나 카메라 감독이 가지는 각오 같은 게 보일 때가 있잖아요. 멋있는 그림을 담아내야지 하는 각오요. 그런데 이 영화에서는 다른 것이 느껴지더라고요. 오히려 더 자연스럽게 자연을 찍고자 한 것 같다는. 자연이라는 게 항상 아름답게만 보이는 것도 아니고, 그냥 스쳐 지나는 일부 자연도 진짜 그냥 자연일 뿐인 것도 많잖아요. 그런 방식이 영화가 보여주는 풍광의 새로운 모습이었어요.

이것도 안숭범 선생님이 얘기한 것에 덧붙이는 건데, 롱 테이크로 계속 찍으면서 합이 잘 맞는 연출을 했다고 했잖아요. 그 장면에서 인위적이라고 생각되는 것이 꽤 많았어요. 곰 습격 장면이 있던 롱 테이크도 인위성이 많이 느껴졌고, 인디언이 초반 습격했을 때도 긴박하게 정신없이 행위가 진행되는 롱 테이크에서도 보여줘야 할 것과 보여주지 않을 것, A라는 것을 보여주고 그것을 다음 서사로 이어가기 위해 그 다음 것을 보여줘야 하는 것이 굉장히 구조적으로 잘 들어가 있더라구요. 그래서 롱 테이크로 사실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사적으로 굉장히 짜여졌다는 것이 오히려 잘 드러나는거죠. 그런데 그 인위성이란게 단점이라고 생각하진 않아요. 그게 우리를 서사에 몰입시키는 하나의 요소이기 때문에요. 카메라를 가지고 서사를 이끌어가는 힘도 굉장히 좋다고 봤어요.

 

정재형 : 저는 어쨌든 아까 얘기한대로 이 영화를 인디언의 시각에서 보기 때문에 자연이라는 공간을 인디언의 공간, 말하자면 인디언을 자연과 동일시해서 보고 싶거든요. 인디언을 부각시키는 어떤 대상이라고 보죠. 인디언의 등가물이에요. 자연이 바로 곧 인디언이다, 인디언이 곧 인간이다, 백인은 자연을 침략한 사람들이다, 자연이 곧 인디언인데, 인간이 인디언을 학살했다, 그래서 그들은 벌을 받을 것이다, 저주받을 수 있는 대상이라든지 이런 메시지를 주고 있고, 결국엔 백인이지만 그런 인디언의 길을 존중하는 글래스의 이야기를 하는 거라고 봅니다.

롱 테이크가, <버드맨>에서도 그렇지만 안과 밖이 계속 단절이 없거든요. 항상 비약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분명히 문을 열면 밖에 길거리가 나와야 하는데 침실이 나온다든지, 침실이 나와야하는데 길거리가 나온다든지, 하는 식의 허구적인 공간으로 연속이 되는데도 계속 롱 테이크로 연결시키는 허구적인 기법을 보여줬죠. 그걸 보다보면 안과 밖이 따로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죠. 저는 그런 동일성에 대한 철학이 이냐리투가 갖고 있는 것이라 생각해요. 신화에 나오는 우로보로스(Uroboros)죠. 곰과의 사투도 결국은 자연과 사람이 하나의 일체이듯, 곰과 인간도 하나의 일체다. 예를 들면 말의 뱃속에 들어가는 장면, 그것이 출산을 하는 메타포가 됐든, 죽었다 살아났든, 말이 사람의 역할을 한 거잖아요. 어떻게 보면 동물과 사람, 그런 일체화된 어떤 것이 원시 고대의 샤머니즘 철학이잖아요. 하늘과 사람과 동물과 모든 게 다. 그래서 인디언의 풍습 중에는 사람이 죽으면 조장(鳥葬)을 하지 않습니까? 같은 관념이긴 한데 땅에 묻어 순환이 되든지 새가 쪼아서 하늘로 날아가든지 결국은 자연 속에서 같이 어우러지는 사고를 오래 전부터 해왔단 말이죠. 그러니까 그것을 서구인의, 그러나 인디언의 피가 있을 수 있는 중남미 출신 감독 이냐리투는 백인 중심의 사고에서 벗어나있고, 훨씬 더 동양적이고 중남미적인 그런 세계관을 이 영화 속에서 보여줬다고 봐요.

그런 의미에서 저는 그 연속성, 동일자, 사람과 이걸 구분하지 않는 그런 정신. 그래서 <버드맨>에서도 그런 철학이 있다고 보는 거죠, 그러니까 영화를 서구의 문법으로 봤을 때, 몽타주라는 것이 파괴적인 것이잖아요. 시간과 공간을 다 파괴해버리고 인위적으로 갖다 붙이는 연접술인데, 그런 방식과 다른 롱 테이크라는, 끊어내지 않는 방식을 어떻게 철학적으로 포장을 한 기법인 것 같아요. 그래서 의도적으로 롱 테이크라는 것을 자꾸 문맥에 맞게 쓰는 것 같아요. 곰과의 사투든 말에서 나무로 떨어져서 다치게 되는 장면이라든지 이런 것들을 의도적으로 롱 테이크로 해서 끊어내지 않는 것을 통해서 이 영화의 문맥과 일치하는 형식을 갖다가 일부로 구사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하게 되죠.

 

성진수 : 이건 주변적인 이야긴데, 이 영화가 자연광을 썼고 롱 테이크로 찍었다니까 현장에서 아주 옛날 방식으로 카메라 하나 들고 완성해낸 영화 같이 보이지만, 사실 여기에 많은 기술이 들어가 있잖아요. 그 기술을 자연스럽게 사용한 것 이게 정말 우리나라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이 좀 본받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기술을 사용할 때 그게 너무 눈에 띄게 사용하는 경우들이 있잖아요, 결국 기술에 영화가 종속돼버리는. 대표적인 사례가 <미스터 고>였는데, 고릴라는 잘 만들었는데 그거 하나를 구현하느라고 나머지 서사와 영화가 가지는 주제라든지 영화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가 다 사라져버린 거죠. <대호>는 안 봐서 어떤 측면이 다른지 모르겠지만. 물론 기술이 곧 볼거리가 되는 경우도 있어요. 그래도 많은 경우 기술은 어디까지나 영화를 구현하는 하나의 수단이지 그 수단을 전면에 내세워서는 영화가 어려움을 겪는 것 같아요. 그런데 이 영화(<레버넌트>)는 보면서 기술이 궁금해지기는 하지만 거기에 초점을 맞추기보단 영화 자체에 잘 녹아있다고 보였어요. 그런 부분도 좋게 보였습니다.

 

그러면 이쯤에서 <레버넌트>에 대한 합평회를 마치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0

추천하기

0

반대하기

첨부파일 다운로드

등록자성진수

등록일2016-02-24

조회수2,336

  • 페이스북 공유
  • 트위터 공유
  • 밴드 공유
  • Google+ 공유
  • 인쇄하기
 
스팸방지코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