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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합평회

씨네톡(영평):<자유의언덕>성진수, 박태식, 이대연, 이수향, 정재형, 민병선

참석자: (첫 발표 순서) 성진수, 박태식, 이대연, 이수향, 정재형, 민병선

 

성진수 : 오늘은 홍상수 감독의 최근 신작 <자유의 언덕>을 가지고 함께 얘기를 나눠 볼 텐데요, 누가 먼저 말씀 하시겠습니까?

 

성진수 : 그럼, 제가 먼저 이야기를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시사회를 봤기 때문에 본 지가 상당히 오래 됐더라고요. 그래서 다시 영화를 보지 않고 정리를 해보려고 하니까 구체적인 사례들이 ‘확실하게 맞나?’ 의문이 드는 부분들이 있는데, 거시적인 측면에 있어서 이 영화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보도록 할게요. 이 영화에 대해서 제가 본 감상이라든지 영화에 대한 저의 평을 이야기하면서 동시에 <자유의 언덕>을 같이 이야기를 나눈다고 했을 때 가장 궁금했던 건, 정말 다른 분들은 어떻게 보셨는지 너무 궁금했어요. 영화를 다 보셨기 때문에 영화의 줄거리나 형식이 어떻게 이루어져있는지는 다 아시니까 그 부분은 생략하고 바로 말씀을 드릴게요.

 

일단 이 영화가 기존의 선형적인 시간순서에 따라 내러티브가 흘러가는 영화와는 달리, 시간 순서를 뒤섞은, 이야기의 순서에 있어 시간순서를 뒤섞어서 보여주고 있다는 게 형식적인, 이색적인 측면이었죠, <자유의 언덕>이. 그렇지만 기본적으로 저는 이 영화가 기존의 홍상수 감독의 영화에서 보였던 특이성 안에 있다고 보이고요, 그런 형식이 사실 새롭다고 느껴지진 않았고, 오히려 어떻게 보면 어느 정도 홍상수 감독이 계속 비슷한 주제와 비슷한 형식을 영화에 가져오면서 ‘지금쯤은 시간도 한번 섞어보겠다’ 라는 생각에 도달한 것이 자연스럽지 않나 라는 생각도 들어요. 그 이유는 제가 이 영화를 쭉 보고 또 기존 홍상수영화의 기존 영화들의 특징과 만나는 부분들이 어느 지점인지 생각하는 것과 관련이 되는데요, 일단 홍상수 감독이 많은 영화에서 사소한 것의 중요성, 인과관계의 플롯보다는 순간의 상황이나 인간의 관찰로 이루어진 영화라는 점, 우연히 마주치게 되는 예상치 못한 상황이라든지, 그런 인물들의 반응이 만들어내는 부조리함에서 유발되는 웃음 코드 이런 것들이 홍상수 감독의 영화에 기존에 많이 등장했는데, 그것이 그대로 거의 들어가 있는 영화라고 보고요. 그래서 사실 좀 의문도 들었어요. 왜 굳이 이 영화에서 시간을 이렇게 뒤섞는 그러한 표현방식이 필요했을까 라는 의문도 들었습니다. 그 측면은 영화의 내용이 기존 영화와 같다는 측면도 있지만, 사실 애초에 홍상수 감독 영화가 그다지 선형적으로 흐르는 시간의 흐름하고 크게 상관없는 영화들이고 굉장히 느슨한 영화들이기 때문에 굳이 이렇게까지 섞어야 했나 라는 생각도 들고 또 한편으로는 ‘아, 지금쯤 자기가 가지고 왔던 그런 느슨함을 확 풀어헤쳐버리는, 이제 그러한 모습을 한번 시도를 해봤다’라는 생각도 들고 그렇게 보였어요. 그래서 한편으로는 이 영화가 보여주는 이러한 시간의 배열방식, 선형적이 아닌 배열방식이 그다지 큰 의미가 없다는 생각도 들어요. 동시에 또 한편에서는 어떻게 영화를 감상하는가에 따라서 홍상수 감독의 영화에서 보이는 어떤 특징들을 더 뚜렷이 감상하게 해주는 측면도 있지 않나 생각도 들었습니다.

 

저는 이 영화를 보는 감상 방법이 두 가지라고 보이는데요. 하나는 이게 시간이 뒤섞여져 있기 때문에 각 순서 배열 없이 나타나는 시퀀스들을 하나하나 보면서 자기 머릿속에서 순서를 재배열하는 방법이 있을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렇게 하게 되면 엉클어져 있는 이야기를 재발견해가는 재미 같은 것들을 느낄 수 있을 것 같고요, 또 한 가지 방법은 아예 이 영화가 시간을 뒤섞어 놨다는 건 시간의 선형적인 흐름이 그리고 시퀀스와 시퀀스간의 인과관계가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주장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접근을 하는 겁니다. 굳이 재배열하는 과정 거치지 말고 각 시퀀스들을 독립적으로 그냥 감상하는 방법도 있을 것 같은데, 저는 후자의 방법, 각 시퀀스라든지, 그 장면들을 독립적으로 감상하는 방법이 어쩌면 이 영화를 감상하는데 더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이 들어요. 그렇게 감상하게 되면 인과관계 안에 그 시퀀스를 넣지 않고 그 장면이라든지 시퀀스들이 보여주는 그러한 사건, 상황이라는 그러한 그 이미지가 가지고 있는 물질성을 더 관찰하고 거기에 더 집중하게 되는데, 그러면서 사실 홍상수 감독의 영화에서 보이는 사소한 것의 재발견들이 그러한 독립적인 관찰에서 더 잘 이루어지는 측면이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듭니다. 그런 의미에서 한편으로는 이 시간 배열의 새로운 형식적 시도가 굳이 필요했나 라는 생각이 들었죠. 이 영화의 어떤, 인과적인 시간 배열 문제라든지 선형적인 시간 배열의 문제라는 게 영화뿐만 아니라 다른 서사 장르가 됐든 많은 예술에서 이미 깨진 게 오래 됐잖아요. 20세기 초반에 들어서 이미 다 깨졌고 영화에서는 알랭 레네 같은 경우가 그런 것을 훨씬 더 깨트렸는데, 그런 큰 측면에서는 지금 시점에 나온 이 영화가 그렇게 영화적으로 대단한 가치가 있나 의문은 들었어요. 홍상수 감독의 영화세계를 이해하는 데는 하나의 도움이 되지만 영화적으로 그렇게 큰 가치가 있나 라는 생각이 한편 들었습니다.

 

 

 

오히려 제가 이 <자유의 언덕>에서 그런 시간 배열이라는 형식의 문제를 벗어나서 이 영화가 더 좋게 느껴졌던 지점은 기존의 다른 홍상수 감독의 이전의 영화보다 굉장히 따뜻한 영화라고 느껴졌어요. 그게 사실은 저 개인적으로는 더 좋았던 점이에요. 그게 왜 따뜻할까 생각을 했는데 이게 인물관계라든지 모든 그런 시퀀스 시퀀스에서 보이는 사건 사고들이라든지 상황들 이런 것들이 카세 료(모리 역)를 중심으로 인물관계가 마치 거미줄처럼 방사형으로 구성이 돼있어요. 이 사람이 완전 중점, 중간에 있는 거죠. 근데 이 인물자체가 굉장히 타인에 대한 관심, 소통배려 이런 것들을 발산시키는 인물이다 보니까, 그 인물 특징으로부터 시작되는 따뜻함이 아닌가 영화에서 보이는 게, 그런 생각을 했었고요. 그게 저는 다른 영화에 비해서 이 영화를 봤을 때 기분 좋게 봤던 측면이었고 그 이외에 연기 같은 부분에 있어서는 많은 홍상수 감독의 영화에서 보이는 많은 배우들처럼 일단 홍상수 감독은 연기를 잘하는 배우를 쓰기 때문에 연기에 대해선 말할 것도 없이 훌륭했었고, 영화에서 외국어를 계속 쓰는 그런 행위도 눈에 띄는 영화였는데, 저는 그 점에 대해 조금 부정적이었어요. 인물의 한 두명 정도가 외국어를 썼을 때에는 그 외국어를 사용한다는 것 자체, 한국 사람이 외국어를 사용할 때 풍기는 독특한 뉘앙스, 이런 것들이 영화적으로 의미를 발산하는데 이 영화에서는 그런 것들은 좀 부족하지 않았나, 오히려 한국말 대사를 하면서 보이는 연기의 자유로움, 이런 것들이 오히려 억제된 측면이 있지 않나 라는 생각을 조금 해서, 그 부분은 꼭 긍정적인 영향이 미치지 않았다고 저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정도가 제가 <자유의 언덕>을 보면서 느꼈던 점, 영화를 보면서 생각했던 내용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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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식 : 선생님이 이야기하셨듯이 영화가 시간을 흩으러놓고 배열하고 그런 것들을, 편지를 읽다가 편지가 흐트러지잖아요. 편지 하나하나마다 다르게 읽으면서 그것을 짜 맞춰 간다는 건 아주 재미있는 착상이라고 생각을 했어요. 그러니까 편지 하나하나마다 여러 장면이 나오는데 그 하나하나마다 새로운 시작과 새로운 끝을 갖는 에피소드들이 연결됐고 나중에 묶어내는 그런 재미가 있었죠. 그런 건 이미 많은 감독들이 그런 걸 하고 소설에서도 그런 걸 하지만 그런 재미가 있었고, 그리고 난 저번에도 보니까 홍상수가 북촌에 대한 상당한 그게 있더라고요. 북촌에 대한 집착은 아니지만 뭐가 있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영화에서 봤던 데가, 제가 집이 그 근처라서 산책을 하는 데예요. 이를테면 중앙고등학교 옆으로 나와서 올라가던데 거기 예쁜 집들이 있거든요. 그런데 산책하면서 봤던 느낌이 영화에서 있으니까 영화는 굉장히 정겨웠다, 그런데 여기서 왜 영어를 썼을까 저는 그 이유를 한번 이렇게 생각해봤어요. 

 

처음에 미국인하고 한국인하고 부부가 하는 맥주집이 나와요. 그래서 그 두 사람이, 아주 허접하게 서있는 이상하게 서양사람 하나 나오잖아요, 미국 사람. 그리고서는 맥주가 오늘 안와서 맥주 못 먹겠네요, 어쩌구 저쩌구 그래서 그렇게 하는걸 보니까, 아 이게 북촌이라는 공간이 이 사람 생각하기에는, 말하자면 열린 공간으로서 다문화? 국제적인 공간으로 생각을 한다라는 느낌이 들었어요. 내가 왜 그 생각을 했냐면 80년대인가 그때 내가 일본에 한번 갔었어요. 일본에 가서 신주쿠라는 데에서 료깡이 묵었는데 거기 진짜 외국 애들 많더라고. 거기에서 이루어지는 여러 가지 이야기들은 그 료깡이라는 일본식, 말하자면 집이죠. 그런 집에 있는 사람들이지만, 국제적인 거예요. 그래서 나는 모리라는 사람을 여기에 불러들여서 이 사람을 통해서, 말하자면 무언가 열려진 공간에서 새로운, 옛날에는 그랬었는데 지금은 잃어버린 것들, 이런 것들을 이 사람을 위해서 한번 보여줘서 외국인이 한번 한국을 경험하게 함으로써, 이를테면 뭐라고 해야 하나, 한국을 잘 아는 듯 모르는 듯,하는 그 사람을 통해서, 그래서 그 사람이 어떤 것은 이상하게 생각하고 어떤 거는 괜찮고 이런 거 있잖아요. 왜, 밥은 주는데 안주면 서운한, 왜 쟤는 밥을 주냐, 뭐 그런 질문도 그렇고 중간에 이민우인가? 그 지나치게 참견을 하니까 또 얘랑 밥 못 먹겠다고 나가버리고, 나중에 걔 한 대 줘 팼잖아요. 그렇죠? 그거 나오진 않았지만. 그리고 강아지를 찾아주고, 그리고 문소리가 그 모리한테는 자유로움을 느낀 것 같아요. 모리를 통해서 이게 참 예의 바르고 기존의 한국남자랑은 좀 다른, 좀 새로운 멋있는 남자. 그리고 또 이 남자가 순정파에요. 그리고 또 나중에 와서 권이라는 여자를 데리고 일본 가서 잘 살았다 마지막에 멘트가 그렇게 나오던데 그런 등등. 그래서 이제 홍상수 감독이 북촌이라는 공간을 통해서 세계와 대화를 해보려는 게 아닌가, 내가 너무 지나친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점을 좀 느꼈어요. 

 

 

 

그래서 모리라는 사람이 전혀 다른, 일본에서 온, 우리랑 비슷하지만 다른, 그 사람을 통해서 이제 북촌이라는 공간이 세계화된 공간, 영화를 통해서 세계를 한번 보여주고자 한 게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그리고 모리를 봤더니 아주 괜찮은 사람이에요. 강아지도 찾아주고 문소리도 구원해주고, 또 상원이 술 마시자고 할 때마다 좋은 친구가 돼주고, 또 구옥이라는, 윤여정이 일본 사람은 예의 바르다 깨끗하다 어쩌구 할 때, 그러면 진실은 없다, 그런데 자기는, 이 사람도, 더구나 진실도 있잖아요? 그래서 나중에 둘이 포옹하는 장면 등등. 그래서 낯선 땅에서 온 해결사 같은 사람이라는, 그리고 행복을 발견한 후 표표히 떠나요. 홍상수 영화 중에 이런 식으로, 아까 이제 성선생이 말한 것처럼, 해피엔딩 따뜻하게 끝나는 게 별로 없었어. 옛날에 뭐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인가 거 왜 마지막에 칼로 찔러 죽이고, 마지막에 항상 홍사우 영화를 보면 뭔가 약간 남았었거든요. 깨끗하지 않았어. 그런데 이거는, 나는 아주 잘 깨끗하게 끝난 것 같다 느낌이 들었어요. 그리고 내가 하나 질문하고 싶은 건 그, 정은채하고 기주봉은 왜 나온 건지, 내가 지금 그 두 사람이 나온 건 뭔가 얘기를 하려고 하는 걸텐데, 인물위주로 봤거든요. 인물들을 봐서 인물과 하나하나 캐릭터를 봐서 솎아내 보자, 그래서 그 인물 따로따로 좀 보자, 영화가 길지 않아서 가능한 거죠. 67분이더라고. 기주봉하고 정은채가 딱 나온 게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가, 뭐를 담아내려고 했는가, 그게 제 의문입니다. 여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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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연 : 저는 일단 영화가 길지 않아서 좋았고요, <경주>볼 때 그 생각이 나가지고... 그런데 상업적으로 보면 또 어떤면에선 <경주>하고 닮아있기도 하고, 뭐 좀 그런 생각도 들었는데, 일단은 저도 처음에 보고 나와서는 거의 생각하기를 포기를 했었거든요. 뭔가 좀 이해가 안가서. 그러다가 좀 있다가 생각이 든 게, 결국은 처음에 들어가게 되는 게 시간의 문제더라고요. 시간의 문제인데 결국 왜 이런 구성을 했느냐, 왜 이런 편집 방식을 만들어가지고 시간을 뒤죽박죽 해버렸는가 생각해보니까, 결국은 이렇게 되어버리니까 저는 이 순서를 재배열을 잘 못하겠던데, 그러다 보니까 인과가 없어지는 결과가 나오더라고요. 그러니까 영화 전체에서 인과가 별로 중요하지 않은 그런 게 돼버린 것 같고, 그랬을 때 인과가 없는 것은 어떤 시간이라는 건 연속성이 있고 지속성이 있는 건데 인과가 없어진다는 건 그 시간 속에서의 연속성이라고 그럴까요, 이런 게 없어진 것 같거든요. 그러니까 바로 그 순간이나 상황 그 자체 뭐 이런 거에 되게 집중하는 게 아닌가 생각이 들었는데, 그거하고, 그러면서 생각이 든 게 약간 좀 꿈같다. 그런 얘기를 하죠, 사건이 이제 모리가 문소리의 개를 찾아줬잖아요. 근데 그 개 이름이 꿈이잖아요. 그러면서 나중에 하는 얘기가 개를 찾는 데는 숙달 돼있다 라고 얘기하잖아요. 그러니까 뭔가 이 사람이 잘 할 수 있는 건 꿈을 찾고 뭐 이런 행동인 것 같아요. 그 꿈이라는 게 어떤 비전의 의미라기보다 꿈 자체, 드림으로써. 사람들이 계속 물어보거든요. 너 왜 여기 왔어? 비즈니스냐, 플레져로 왔느냐 라는 걸 항상 물어보는데, 얘는 아무것도 아닌, 누군가를 만나러 온건 데 이런 얘기를 하고, 너 직업이 뭐냐, 항상 자꾸 물어 보잖아요. 그런데 이 캐릭터가 독특한 게 뭐냐면요, 직업도 특정돼 있지 않고, 이 사람이 잘할 수 있는 게 직업이 되지 않고 이 사람이 잘할 수 있는 건 아주 무의미한 꿈을 찾는 어떤 그런 것 같다 라는 생각이 들면서 이거 자체가 꿈에 대한, 홍상수가 꾼 꿈이 아닌가 생각이 들었고요. 

 

좀 여담으로 이야기를 하자면, 소설습작들을 할 때 연습하는 것 중 하나가 꿈을 기록하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이제 우리가 꿈을 꾸고 나면 인과도 없고 순서도 없고 막 뒤죽박죽 돼 있잖아요. 장면만 남고. 꿈을 기억한다는 건 순서를 다시 재배열하는 과정이고 거기다 인과를 부여하는 것이기 때문에 소설적인 구성이나 인과를 연습하는데 있어서 좋은 훈련이 되기 때문에 많이 연습을 하는데 마치 그런 과정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관객이 극장에 들어오는 순간부터 꿈을 꾸기 시작해서 극장을 나오는 순간 어 영화가 어떤 내용이었지 되돌아보면서 마치 꿈을 상기하는 것처럼 자기가 스스로 인과를 부여할 수밖에 없는 상황들을 만들어 내는 거 아닌가 생각이 들었고요. 또 하나는 외국어에 대한 문제인데 저는 이 영화 보면서 제일 많이 들었던 생각은 저 동네 사람들은 영어를 다 잘하는 구나라는 생각이었거든요. 그런데 거기 보면 한국 사람들도 많고 왜 저 사람들은 다 영어를 잘 쓰고 저렇게 해야만 해야 할까. 아까 성진수 선생님이 말씀하셨던 것처럼 왜 한국말을 좀 더 자연스럽고 편하게 소통하고 연기하면 더 좋았을 것 같은데 그러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 드는데, 그게 굉장히 의도적인 것들이 있을 것 같아요. 가만히 생각해보면 영어라는 게 우리 모국어가 아니잖아요. 근데 거기 가만히 보면 저 사람들 중에 영어를 모국어로 하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보면 그 맥주집 그 사람 정도, 그 사람도 유럽 사람일수 있으니까 모르겠고. 그런데 그 사람은 오히려 한국말을 또 되게 잘하고, 결국은 소통을 원활하게 하고 관계를 부드럽게 하기위한 매개로써 기능하는 언어가 소통을 되게 부자연스럽게 만들고 있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특히 관객하고 영화하고 사이에 있어서, 그래서 결국은 이게 어떤 말 자체를 낯설게 보게 만드는 효과가 있지 않나. 우리말이지만, 그 말들을, 우리가 사용하는 말법들인데, 너 한국에 왜왔어, 직업이 뭐야, 우리가 항상 묻고 그러는 건데 그런 걸 영어로 다시 봤을 때 굉장히 이상하고 어색하게 들리는, 이런 것들이 있는 게 아닌가 생각이 들고, 역시 이것도 좀 전의 얘기하고 같이 엮어서 생각하면 그럴 때 있지 않나요? 꿈속에서 꿈을 영어로 꾸지 않나요? 영어를 못하는데도 불구하고 꿈속에서 영어를 다 쓰고 영어가 다 이해가 되고 나도 영어로 얘기하고 이런 꿈은 가끔 있는 거 같은데, 마치 그런 느낌이 들어가지고... 예, 그랬었고. 

 

 

 

뭐 그, 다음에 그런 정도 말씀드리고 싶은데, 한 가지 더 얘기를 하자면 등장인물들이 다 담배를 피우는 게 신기했거든요. 앞으로 담뱃값도 인상이 되는데 그것에 대한 약간의 항의 같은 느낌도 들고 ..애연가로써 굉장히 공감이 가고 북촌 가서 살고 싶은 생각이 들었는데... 옛날에 그런 얘기 들은 기억이 있거든요. 시각장애인 있잖아요, 그중에서 앞을 완전히 못 보는 사람들은 점맹이라고 이야기를 하는데 그분들은 담배를 안 피운데요. 우리가 생각할 때 담배는 입과 맛으로 피우는 것 같은데 담배에 대한 핵심적인 요소는 시각적인 것에 있다고 하더라고요 그 연기에 대한 것, 피어오르는 연기를 보는 것 자체가 담배를 피는 행위에 있어 핵심적이라고 하는데 근데 그게 몽환적이잖아요, 다 흩어져 사라져버리는, 응축되지 않고, 잡히지 않고 사라지는 그런 것들인데 이 영화의 어떤 그런 장면 있잖아요. 기웃거리고 골목도 왔다갔다 거리고 하루 종일 걸었다 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그런 것들이 몽환적으로 왔다갔다 아지랑이 피는 것처럼, 담배라는 것과, 헤비스모커들이 많은데 담배 피는 행위가 그런 것들과 연결되는 것은 아닌가 생각이 들면서도 뭐 그냥 ...담배에 대한 저기였나요? 그 정도 얘기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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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향 : 저도 원래 홍상수 감독 영화는 제가 보긴 다 보는데 항상 뭔 말을 해야 하는지 잘 모르겠어요. 왜냐하면 이게 뭐 그렇게, 소셜 프로브럼 필름처럼 그런 게 뭐 뚜렷한 것도 아니고, 그러니까 시간성이나 공간에 대한 것은 너무 뚜렷해서 더 이상 덧붙일 얘기도 없는 것 같고, 약간 이런 느낌인데, 사실 이 영화는 씨네톡을 해야 하니까 열심히 봤어요. 봤는데, 이대연 선생님 착상이랑 비슷하게 생각되는 부분이라면, 저도 이 모리가 잠을 잔다는 부분을 되게 주목을 많이 했습니다. 거기서 문소리가 키우는 개가 나오잖아요, 개 이름이 꿈인데 , 꿈의 드림이다 뭐 이런 얘기가 나와요. 모리가 여기서 계속 심하게 늦잠을 자잖아요, 아무리 깨워도 일어나질 않고 이상하게 취해있는 사람처럼 그러고, 나중에 개울물에서 사실이 아닌데 막 그녀와 만나기로 했다 이런 꿈도 꾸고 이렇게 되죠. 그래서 그리고 중간에 개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면서 저 개가 되게 잘 잔다, 그래서 쟤 이름이 또 꿈이다 뭐 이런 얘기를 하는 장면도 나와요. 그래서 이 잠과 꿈 이런 것들이 굉장히 영화를 핵심적이게 하는 그런 부분인데, 또 굉장히 오버슬립이라고 하는 부분, 늦잠을 자는 그 부분이랑 연결을 시켜서 외국에선 온, 외국에서 여자를 찾으러 온 사람이 계속 방에서 늦잠을 자버리는 태도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이런 걸 좀 더 생각을 해본다면, 또 하나의 키워드가 저는 예술가라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예술가라는 말이 이 영화에서 여러 번 호명이 되요. 부정적이고 긍정적인 여러 가지 다양한 의미로 호명이 되는데, 부정적인 경우라면 제일 처음에 나온 게 이민우가 자기가 그 여자 친구인 문소리가 친절하게 대하는 게 꼴 보기 싫으니까 저 외국인에게 약간 시비를 거는 쪽으로 뭐하러 왔냐, 뭐하시는 분이냐 막 이렇게 물어보다가 뭐 아무 일도 안 한다 이랬더니, 어우 그러면 예술가네, 뭐 이런식으로 되게 빈정거리거든요. 그래서 이민우 같은 사람이 보기에 모리는 되게 이상한 사람인거죠. 뭐 아무것도 안하고 와가지고 직업도 없고 뭐지? 이런 식으로 하는데, 또 이 예술가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이야기하는 부분이 그 김의성이 정은채한테 말시켰다가 정은채가 히스테릭한 반응을 보이잖아요, 미친 여자같이 막 이렇게 얘길할 때, 그때 김의성이 막 욕을 하면서 아 지가 무슨 예술가라도 되는지 알아, 왜 저래? 뭐 이런식으로 얘기를 해요. 그럴 때도 예술가는 굉장히 부정적인 기표로 쓰이고 있죠. 일반인과 같지 않고 굉장히 신경질적이면서 냉담하고 현실 감각 없으면서 이런 식의 느낌으로 쓰이는데, 유일하게 예술가를 긍정적인 느낌으로 발현이 되는 때가 김의성의 입에서 나오는데 모리를 보고 어, 당신 수염이 예쁘게 낫다, 난 그런 수염이 나고 싶다, 굉장히 예술가같다 라고 얘기를 해요. 여기선 분명히 김의성이 모리에게 굉장히 좋은 감정을 느끼고 있거든요. 그런데 그걸 예술가라고 표현을 하는 거죠. 그래서 저는 여기서 이 예술가라는 기표가 꿈이라는 상황과 함께 맞물려서 뭔가 감독이 얘기하고 있었던 어떤 지점이 아니었을까 생각이 들었었고요, 그렇다면 여기서 얘기하는 좋은 사람, 예술가 라는 게 무엇이냐 봤을 때 모리가 이런 얘기를 해요, 김의성이 너 좋은 사람 보인다 이러니까 모리가 어 저는 별로 좋은 사람이 아닌데, 자꾸 사람들이랑 싸운다 그리고 자기는 정직하지 않은 사람들을 굉장히 싫어한다, 이런 얘기들을 굉장히 자주해요. 그런 사람들과 많이 싸운다 이런 얘기를 하는데 여기서 자꾸 싸운다 라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가 라고 생각해보면, 

 

또 모리의 입으로 자기가 굉장히 뭐랄까 성격이 유하고 부드러운 사람인데 유일하게 두 번 조금 심하게 화를 내는 게 하나는 아까 얘기했던 이민우가 자꾸 옆에서 시비를 거니까 겁쟁이 이러면서 나가요, 나가면서 겁쟁이라고 얘길 하잖아요. 자길 예술가라고 호명한 사람한테 너는 겁쟁이야 라고 이야기를 하고, 또 하나는 윤여정이 자기에게 굉장히 잘해줌에도 불구하고 갑자기 밥을 자기한테 안차려줬는데 자기 네퓨한테 차려주니까 또 화가나가지고 이건 공정하지 않다고 이야기를 하잖아요. 왜냐하면 모리가 생각하는 어떤 좋은 사람과 가야할 방향의 입장은 굉장히 뚜렷한 것 같아요. 그런데 이 영화에서 그걸 강조하는 뜻이 무엇일까 생각을 해봤을 때 <북촌방향>이라는 영화가 떠올랐었는데 거기서 퇴물 영화감독이자 영화과 교수인데 서울에 딱 삼일 머물면서 여기서 아무것도 남지기 않고 깔끔하게 지나가야지 라고 생각하지만 거기서 또 특유의 홍상수 감독의 주인공들처럼 여자를 만나고 술 먹고 사연을 계속 만드는 찌질한 남주인공이 여자를 또 말로 꼬시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런 얘기를 막 들어요. 근데 뭐 아무 상관없는 얘기 이런 물질이 우리 앞에 있는데 인과가 어떻고 말도 안되는 얘기를 했을 때 남자들은 어우, 쟤 저런 얘기를 왜 해 이런 반응일 때 여자들은 이사람 내 마음을 알아주는 것 같다 라고 이야기를 하고 심지어 송선미는 어 당신 되게 똑똑해 보여요 라는 얘기를 굉장히 여러 번 반복을 해요. 

 

똑똑해 보인다 그랬을 때 저는 어떤 느낌이 들었냐면 똑똑해 보인다? 계속 꿈을 꾸고 있는 사람에게 좋은 이미지를 부여한다? 라는 데에서 자꾸 사유한다 라는 것이 무엇이냐 꿈이라는 게 원래 우리는 몽상같이 느끼지만 오히려 일상과 좀 멀어져서 그 지점에 딱 멈춰서 좀 더 깊게 생각이 들어가고 일상과 상관없는 생각을 하는 게 더 높은 층위의 사유가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어서, 그런점에서 저는 굉장히 재미가 있었습니다. 또 하나 이야기를 하자면, 저도 외국어에 대한 게 굉장히 이 영화에 특징적이라는 생각을 했는데 이 외국어 영어 대사가 굉장히 어떤 느낌이 들었냐면 저한테는, 말씀하신데로 한 두명이 하는 게 아니라 전부가 다 하니까 이상하게 자막을 보면서도 영어를 듣게되요 왜냐하면 영어가 어려운 영어가 아니거든요 그래서 듣게 되면 어떤 느낌이냐면 아까 말씀하셨듯이 너가 여길 왜왔니 라고 물어봤을 때 우리가 그냥 어 무슨일로 오셨어요 라고 느꼈을때는 되게 명백했는데 너가 여기 플레져로 왔냐 ,비즈니스로 왔냐 이렇게 물어보니까, 그러니까 같은 얘기 같지만 의미의 결락같은게 있는거죠. 

 

 

 

우리가 한국어로 느끼는 마음과 영어로 표현됐을 때, 모든 대사들이 저는 다 중의적으로 들렸어요. 아유 해피라고 했을 때, 그냥 너 행복하냐라는 일상적인 얘기일 수 있지만 영어로 그걸 물었을 땐 또 다른 느낌의, 영어라서 그런게 아니라 영어라는 언어와 한국어로 이걸 인지할 수밖에 없는 우리와의 사이에서 결락이 일어나면서 의미가 굉장히 중의적으로 여러 가지 중첩된다는 느낌을 받아서, 굉장히 어떤, 외국어로 영화를 진행하고 있다는 부분이 저한텐 굉장히 재미있었고, 전 되게 명백하게 굉장히 쉬운 영어들로만 대사를 구성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별로 그렇게, 못알아들을정도의 내용이 없었다는데에서 분명히 노린 지점이 있었다는 생각이 들고, 마지막으로 남주인공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 저는 이 영화에서 남주인공을 맡은 카세 료의 연기도 물론 훌륭했었고, 되게 홍상수 감독의 영화들중에서도 특이하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홍상수 감독의 영화의 남자들은 똑같아요. 잠깐 머무르는 곳에서, 굉장히 자의식강한 남자들이 속을 알 수 없는 여자들을 만나서 잠을 자거나 꼬셔보려 하거나 싸우거나 뭐 이러면서 끝나는 대부분의 내용들에서 조금 다른점이, 성선생님 저도 굉장히 비슷한게, 굉장히 이 영화가 좀 긍정적이고 기존의 홍상수영화들보다 좀더 밝은느낌을 줬던 건 모리가 굉장히 순수한 느낌인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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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유준상이나 김상경이나 이런사람들에 비해서 찌질한 느낌이 조금 소거되고 대신, 그 사람들이 왜 찌질하냐면 겉으로 보여주는 것과 속이 다르기 때문에 우리는 찌질하지만 조소하지만 그 사람들을 이해할 수밖에 없는데 이 영화에서 모리는 겉과 속이 다른사람처럼 안느껴져요. 약간 순수 그 자체인 사람처럼 느껴져서 굉장히 조소대신에 순수성 자체에 힘을 기울이게 만드는, 우리가 그 사람의 말에 조금 더 동의하게 만드는, 이런 조소보다는 동의하게 만드는 그런 느낌이 있다는 점에서 모리가 좀 재미가 있었고, 저는 윤여정과의 대화가 재미있는게 굉장히 많았는데 그 중에서 넌 언제가 행복하니 물어봤더니 자기가 꽃하고 나무를 보는걸 좋아하는데 5분만 얘네를 뚜렷이 보고 있으면 그게 마음에 안정이 생기고 안정이 생기면 난 되게 완전해짐을 느낀다 라고 말해요. 어려운 대사가 없는데 이런 작은 기억이 나의 일상을 사는데 굉장히 안정감을 준다라는 그런 얘기를 하고, 삶에 대한 두려움을 꽃으로 완화시킨다 라는 얘기를 하는데, 이런 부분이 기존의 홍상수 영화와는 다른 굉장히 긍정적으로 삶에 대한 어떤 조소가 아니고 냉소가 아니고 그렇게 보이는 부분이 아닌가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 그래서 모리는 마지막으로 이런얘기를 해요. 나는 자기 스스로에 대해서 모리는 약간은 비관적인 것 같아요. 자기 스스로 나는 이룰수 없는걸 희망하는 사람이 아니에요 라고 말을하니까 김의성이 어 좀 슬프군요 얘기를 하는데 대신 내가 좋아하는 그녀는, 내가 권의라는 여자를 좋아하는 데 왜 좋아하냐면 그녀를 굉장히 존경한다, 왜 존경하냐면 그녀는 나보다 나은데 왜 낫나면 항상 그녀는 원하는 게 적고 상냥하고 중요한건 내가 그녀를 사랑하고 찾고있다는 거죠. 

 

모리가 굉장히 자신은 비관적으로 생각하지만 존경하는 그녀를 찾고 있다는 현실 자체는 전혀 비관하고 있지 않다라는게 영화가 얘기하고 있는게 아닐까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외국인 부부하고 만나서 그런 얘기를 하잖아요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곳에 살아야 한다 라고 확신에 찬 어조로 얘을 하는데 그런 부분이 기존의 홍상수 영화가 가지고 있었던 부분과 달라서 <자유의 언덕>이라는 영화의 느낌이 조금은 밝게 느껴지는게 아닌가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재형 : 앞에 나오는 얘기들과 많이 중복이 되는데, 일단은 꿈이라는 거고요. 현실을 꿈으로 봤다, 영화는, 현실은 꿈이다. 그 다음에, 굉장히 시간에 대한 이야기인데, 시간을 뒤죽박죽 해놨죠, 편지가 바뀌면서. 분열적인 서사방식이 있어요. 이 서사를 운반하는, 표면적으로는 모리지만 영화 속에서 나타나는 장면을 관객에게 소개하는 화자는 권이거든요 권이 편지를 읽죠. 그런데 그 편지가 계단에서 내려오면서 날짜가 뒤죽박죽이 돼버림으로 인해서 그 서사가, 영화의 서사가 시간이 뒤죽박죽이 돼버립니다. 관객이 보는 서사는. 그래서 사실은 그 얘기는 굉장히 중요한 사실을 얘기하죠. 

 

홍상수 감독은 첫째, 연속적인 시간을 구성적인 시간으로 제시를 하고 있습니다. 관객이 현실을 연속적으로 보지 말라, 연속적이지 않아도 된다, 오히려 시간이 오히려 인과관계가 없는 것을 구성을 해서 관객이 읽을 수 있다, 라는 것을 의도적으로 제시했다는 걸 알 수가 있고요, 이 서사방식을 통해서. 그래서 의미해석을 이렇게 가게 되겠죠. 그렇다면 왜 그렇게 인과적인 서사가 의미가 없다 라는 것은 무슨 의미냐 라고 질문을 할 수 있는데, 주인공 모리의 서사를 인과적이거나 연속적으로 파악하지 않고 불연속적이고 분절된 시간관계 속에서 모리의 의식을 추구했다는 것은 다시 말하면 모리의 주체가 분열돼 있다는거죠. 이 영화는 줄거리를 요약하자면, 모리는 권이라는 여자를 갈망해요, 지향하는데 그런데 그 권은 절대 만나지 못한다는 얘기에요. 그리고 그 사이에 영선이라는 여자, 아까 나왔던 미스테리한 정은채, 이런 여자들의 마음이 쏠려가지고 영선하고는 아주 깊은 관계까지 가게 됩니다. 이 얘긴 무슨 얘기냐면 모리는 주체가 분열돼있어요. 그런데 지향은 분명히 권을 하고 있어요. 이게 바로 현대인의 굉장히 실존적인 상황을 나타내는 거죠. 그래서 이 영화를 해석할 수 있는 철학적 개념은 사실은 현대인의 불안의식입니다. 그래서 뭔가. 자기가 어떤, 이 영화의 제목이 바로 그걸 상징하는 것 같아요. 아이러니하게. <자유의 언덕>이죠. 

 

자유라는 것은 피안이거든요. 불교적으로 얘기하면, 영원한 어떤 궁극적인 목적을 암시했다고 봐요. 이거는 저의 자의적인 해석이지만, 자유의 언덕이라면, 자유롭다, 자유롭다는 것은 실존주의가 얘기하는 가장, 실존주의적으로 해석할 때, 이 시간에 속박된 인간이 궁극적으로 해탈하는 지경이 바로 자유거든요. 시간에 속박된 존재에요 지금 모리라는 존재는. 그래서 끊임없이 시간에 구속 되서, 유폐 되서 한치 앞도 나가질 못하는 상태에서, 실존주의적으로 얘기했을 때, 항상 형상화된 존재, 매달려있는 존재거나 던져져있는 존재입니다. 뭔가 능동적으로 주체적으로 자기가 뭘 할 수 없는 존재에요. 이것을 소울 벨로우라는 소설가가 소설에서 그렇게 표현을 했죠. 군대 가기 전에, 몇 개월 전에 그 인간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한 남자의 의식을 그린 소설이 있는데, 그 ‘매달린 사나이’라는 소설이죠. 그 소설이 바로 그런 상황을 나타내죠. 똑같은 상황이죠, 모리가 처한 상황은 잠시 유예받은 생이에요. 그 시간동안에 뭔가 이 사람은 권에대한 욕망은 기본적으로 있지만 그것과 전혀 상관없는 식의 분열된 주체를 보여주거든요. 그래서 결국 내가 누구인가 라는 거에 대해서 답을 할 수 없게끔 돼있어요. 

 

 

 

모리는 권을 사랑하고 지향한다고 하지만 사실은 영선하고 잠을 자고, 다른 생각들을 계속 하는 그런 아주 부도덕한 그런 사람이죠. 그래서 저는 이 영화가 바로 그런 주제를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이제, 모리의 언덕? 모리가 기댈 수 있는 언덕은 굉장히 불안한 것이고요, 궁극적으로는 홍상수의 언덕이 있죠. 홍상수가 지향하고자 하는 언덕을 보여주는데, 굉장히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거거든요, 결국은 이게. 그 다음에 관객이 이런 생각까지 하게 되요. 만약에 그렇게 흩어진 시간이라면, 우리가 영화를 본다면 도대체가 마지막에 나오는 영선과의 잠자리에서 깬 것만을 꿈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그동안에 나왔던 어느 부분도 또 꿈이었는데 우리가 모르고 지나갔단 말인가 라는 생각까지도 하게 된다면, 사실은 홍상수가 얘기하고자 하는 궁극적인 메시지는, 영화의 구성이라는 것은 시간에 대한 것, 우리의 현실이라는 것은 어디까지가 현실이고 어디까지가 꿈인지 알 수 없게끔 뒤섞여 있는 것이다, 그 자체가. 우리는 그런 질문을 이 영화를 통해서 자각하게 되는 그런 체험을 하게 된다고 봅니다. 여기까지 말씀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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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병선 : 저도 아까 어떤 분 말씀처럼 많이 난해하고 아리까리하고 이런 측면들이 많이 있는데요, 그런 생각은 해봤어요. 홍상수 감독의 세계관이랄까요? 인물의 퍼스낼러티 라고 할까요? 그거는 일관되게 유지가 예전부터 계속 돼온 것 같아요. 그런데 좀 변화하는 지점들이 보이는 것 같아요. 예를 들어 얘기들이 나왔지만 톤앤매너라고 할까요, 그 분위기라던지, 톤이나 정서는 좀 많이 달라진 것 같은 게, 요 근래 영화들 보면, 이게 16번째 영화라고 그러던데요, 몇 번째 영화부터 그런 양상이 보이는데, 일단 특징적으로 딱 눈에 띄는 게 예전에는 장소를 일상에서 벗어나서 여행을 가듯이 좀 떠나는 느낌이 있었거든요. 그게 아마 중기 영화? 

 

홍상수 영화의 중반 좀 되는 영화, 초창기 말고 중반에 영화들 보면 어딘가로 좀 떠나거든요, 일상에서 벗어나는 영화들을 지향했는데, 근데 그때에 많은 비판들이, 초반에 많은 칭찬과 극찬을 많이 받던 감독들이 일상이 어떻고 뭐가 어떻고 뭐 이런 얘기를 통해서 뭐 감독이 결국은 중산층의, 지식인의 허위와 이런 걸 막 다루던 사람이 끝에 가서 남은 게 뭐냐, 네가 도달한 지점이 뭐냐에서 갑자기 섹스적인 측면으로 빠지거든요, 그러니까 다 이런 노골적인, 뭔가 허위의식과 이런 걸 벗어나서 도달하려는 어떤 지점을 가보니 굉장히 어떤 성적인 것만 남더라, 그래서 약간 퇴폐적으로 빠지고 뭐 그랬던 지점이 있는데, 그때부터 홍상수 영화가 좀 뭐랄까, 비판을 받는다고 그럴까요,  좀 이렇게 예전보다는 좀 많이 낮아진 느낌이었는데, 그 후로 홍상수 감독의 영화가 이제는 어떤 공간에 집착한다는 느낌을 받기 시작했거든요. 

 

그러면서 이야기의 톤앤매너가 좀 바뀐 것 같아요. 그래서 감독의 시나리오는 제가보기엔 전작의 영화들을 복기를 한다라는 느낌을 받거든요. 그러니까 바둑에서 뒀다가 다시 또 그 과정을 쫓아가듯이, 그러니까 정은채가 나오는 것도 전 영화의 뭔가 복기하다보면 그 얘기랑 연결되는 측면도 있고, 또 영어를 쓰는 것도 전작의 어딘가에 보면 그런 것도 있고, 그래서 줄기차게 작품세계에서 나왔던 낯설게 한다 그럴까요, 약간 그런 걸로 계속 끊임없이 가져 간다라는 느낌도 들고, 그리고 영화가, 원체 이분이 시간이나 서사에 그렇게 관심이 있었나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런데 보면 솔직히 편지가 없어도 그 작은 공간 안에서의 그 모리의 이야기는 누가 설명 안해줘도 다 이해가 되거든요. 그게 뒤죽박죽인가 말할 정도로, 그냥 그런 거 아니야? 할 정도로, 그래서 아마 예전 작품들 보면 기억에 대해서 굉장히 집착을 하고 기억이 다른 문제, 내가 생각하는 기억 당신이 생각하는 기억, 뭐 이런 기억에 집착했던 문제가 지금에 와서는 그 약간 꿈이라든지 이런 쪽으로 톤앤매너가 바뀌면서 그런 쪽으로 바뀌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현실과 기억이 지금은 약간 꿈과 현실, 이런식으로 조금씩 변화를 주는 것 같아요. 그런데 그 모든 것에는 어떤 특정 공간이 있어야만 가능하지 않나, 해서 그래서 어떤 특정한 장소에 집착을 한다, 해서 요런 톤앤매너의 이야기가 나오고, 뭐 일상에서 이제부터는 판타지적인 느낌으로 좀 내가 변화를 하고 있는 거 아닌가 하는, 마지막에 상상도 못했던 해피하게, 그런 지점에서 아 좀 변화가 그래서 오는거 아닌가, 그런 생각들을 하면서 영화를 봤던 것 같아요.

 

정재형 : 저는 이제 홍상수 영화가 다른 영화들하고 어떤 차별점이 있을까 깊이 생각은 못해봤는데, 사실 시간의 뒤섞임 또는 꿈처럼 현실을 등치시키는 혼돈스러운, 현실과 초현실 경계를 왔다 갔다하는 그런 기법이 사실 <돼지가 우물에 빠진날>부터 있었고요, <오! 수정>, <북촌방향>, <극장전> 대부분 다, 심지어는 <하하하>에서도 이순신 장군 나오는 꿈이라든지 항상 이렇게 약간의 방식은 다르지만 항상 이렇게 뜨악하게 만드는, 시간이 어긋나는 현실과 초현실이 혼재돼 있는 양식을 즐겨하기 때문에 이 영화가 그런면에서 비약적인 발전을 했다 이렇게 보고 싶진 않습니다. 그래서 한때는 사실 전 홍상수 영화를 식상한 영화로 평가하기도 했어요. 똑같다, 그냥 똑같은 이야기들을 소재만 바꿔서 하는 게 아닌가 나쁘게 보면 게으르고, 발전이 없는, 좋게 보면 작가의 일관성을 갖고 있는, 일관된 의식을 보여주는 작가, 이렇게 좋게도 나쁘게도 평가할 수 있는 감독인데, 그 공통분모가 다 반복이 된다는 거죠. 홍상수의 어떤 세계가 분명해요. 이 영화가 가장 전형적인 홍상수 영화라고 봅니다. 그런 의미에서는 홍상수의 관객들은 이제 홍상수를 보면 어떻게 영화가 독해돼지는가 알게 되고 저는 그런 측면에서 영화를 봤죠.

 

민병선 : 그런데 인물도 예전에는 아까 예술 얘기를 했듯이 지식인이나 허위, 이중성, 몸 따로 머리 따로 이런 게 있었는데, 모리라는 인물이 지식인인가, 조금씩 이제 내려오면서, 자기가 변화를 주고 싶어서 여기서 안되니까 외국에서, 어떻게 보면 제3의 인물을 끄집어 쓰나 그런생각이 들었습니다.

 

정재형 : 사실 지식인의 허위 의식이라는게 대표적인 홍상수의 트레이드마크였죠. 부도덕한 교수,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에서 나오는 남자들의 허위적인 것, 거기서 아마 교수가 제자와 성관계를 맺는 게 나오죠, 그런 것들, 대단히 위선적인, 인간의 위,선 중산층 지식인의 위선, 교수나 감독으로 대표되는 그런 세계를 줄곧 많이 그려왔죠. 그게 트레이드마크였던 건 분명한데, <옥희의 영화>같은 경우 문성근 캐릭터라든지, <오!수정>에서 피디라든지, 정보석의 캐릭터라든지, 이런것들이 부도덕하면서 위선적인 그런 면을 굉장히 까발리듯이 그리는 게 홍상수의 특기였는데, 이 영화는 그런 부분은 분명히 없어요. 제가 <자유의 언덕>이라는 애매모호하고 뜬금없는 제목에 대해서 상당히 불교철학적인 해석을 과장되게 한 이유도 이 영화는 상당히 철학적인 영화 같더라, 단순히 세태고발적인 차원에서 훨씬 더 깊이 들어가서, 더 그리고 전면적인 시간에 대한 문제, 실존적인 문제를 전경화 시켰다, 그 이야기는 굉장히 추상적이고 철학적인 테마로 들어간 게 아닌가, 이 영화 같은 경우는 그런 생각이 드네요.

 

민병선 : 그래서 기억에 대한 이런 거, 이런 부분들을 꿈이나 현실로 자꾸 조금씩 튜닝하듯이 진로를 바꿔서, 이야기를, 말씀하셨듯이 <자유의 언덕>같은 것도 그런 상징이랄까요, 추상적인거라든지, 뭔가 개 이름 조차, 그게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외국의 감독들이 대가의 감독으로 가면 약간씩 그런 흐름을 띄는데 약간 그런 느낌이 조금씩 나는것 같은 느낌이 들었어요.

 

이수향 : 그런데 저는 여기서 카세 료를 쓰잖아요. 왜 감독이 카세 료를 썼을지 궁금하더라고요. 자유의 언덕 이름도 문소리가 운영하는 카페잖아요, 카페이름인데 영어를 쓰는 주인공이 등장하는데 굳이 일본인을 주인공으로 하면서 그렇게 했을까, 저는 두 가지 생각을 해봤는데 첫 번째는 그냥 홍상수 감독이 카세료가 굉장히 훌륭한 배우라는 걸 알아채서 이 사람을 쓰기 위해서 그냥 썼을 가능성이 있고, 다른 이유가 있었을 거 같은데 그게 저는 개인적으로 궁금하더라고요. 영어를 쓰는 사람들이 나오는데 왜 굳이 카세 료를 주인공으로 했을지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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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식 : 영어를 쓰는 사람이 나올 때 영어를 진짜 미국사람하고 얘기를 해보면 이게 잘 안되요, 그런데 내가 동남아시아 사람하고 영어하면 진짜 잘 통해, 서로 이해가 진짜 잘돼요. 그런데 저쪽이 완벽하게 영어를 하면 소통이 잘 안 되는 경우가 있더라고요. 그리고 일본사람이 것이, 윤여정이 이야기를 했잖아요, 처음에. 깨끗하고 정리정돈 잘하고 일본사람의 장점이 있고, 그건 뭐 다 아는. 진심이 없다라는 게 우리가 갖고 있는 일본사람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인데 이 모리라는 사람은 내가 지금까지 봤던 홍상수 영화에서 발견하지 못했던 사람이에요. 아주 젠틀하고 그래서 진짜로, 민병선 선생님이 이야기한 것처럼 모리를 통해서 새롭게 한번 점잖고 멋있고, 항상 겉 다르고 속 다른 비열한 지식인들에게서 벗어나서 제대로 된 사람을 그려보고 싶진 않았나, 이를테면 밥을 열시에 준다 그래놓고 안주냐, 한국 사람들은 안 따지거든요, 속으로 뒤에 가서 욕을 할 순 있지만, 따지고 이런 게 멋있더라고요. 그런 것들이 홍상수감독이 새로운 인물을 한번 찾아나가는 과정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아까 나이가 들어서 그렇다는 건 , 저는 나이가 들면 사람들이 대체로 사람들이 부드러워지는, 영화를 통해 착한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하는, 젊을 때는 날이 확 서 있다가 나중에는 나이가 들면 점점 더 착해져야 한다는, 약간 그 점잖아야 된다는 강박관념같은 게 있는 거예요. 나는 여전히 궁금한 건 정은채가 나게 복기라는 말을 하니까 이해가 좀 되더라고. 나는 왜 걔가 뜬금없이 나와서 그렇게 했는가 좀 설명해주실 분이 ..

 

성진수 : 저는 솔직히, 서사 안에서 굳이 이유는 없고요. 그냥 홍상수 감독이 그냥 우연히 저런 사람 하나 만나지 않았을까, 일본사람 모리가 한국에 와서 어디에 묵었는데, 그게 사실 묵은 곳이 이러한 게스트 하우스가 아니라 모텔이면 더 많이 만나겠지만, 그런 어떤 약간의 불륜의 끼가 보이는 젊은 여자를 더 많이 만나겠지만, 뭐 그냥 그런 사람 하나 만날 수도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에서 넣지 않았을까, 특별한 이유는 없지 않았을까, 그리고 아까 이야기했던 것처럼 정은채를 한 번 더 써볼까? 그런 것도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들어요.

 

정재형 : 저는 영어이야기를 좀 정리를 하자면, 한국인과 일본인이라는 문화성인 것 같아요. 이게 사실은 인간의 보편성 같은걸 나타내려는, 다시 말하면 한국인이 한국인을 바라보는데, 한국인이 한국인을 계속 바라보는 느낌하고 비교적인 입장에서 일본인이 한국인을 바라봤을 때 느낌하고 해서 훨씬 한국인을 바라볼 수 있게 되죠. 타자를 통해서. 저는 그런 의식을 주려고 보이거든요. 그래서 그 대사에, 윤여정과의 대사에서 많이 노출이 됐던 것 같은데, 모리는 일본인이기도 하고 한국인이기도 하고 그런 것이 반복이 되거든요. 한국인일 때는 한국애다, 이런 대사도 나오고 한국과 다른 어떤 면도 나오고, 일본인은 굉장히 조용하고 정적인데 얘는 다혈질이고 그런 점에서 한국인하고 같고, 또 예의바르고 이런 면에서 한국인하고 다르고, 이런 어떤 것에서 영선이는 모리를 좋아하잖아요, 그 런면을. 그런 면은 한국인하고 다른거고, 그러나 싸움박질하고 다혈질이고 뭐 따지고 이런 건 한국인 이상으로 다혈질이어서 쟤는 어떻게 한국인같다 라는 식의 대사도 나왔던 것 같아요. 그러니까 말하자면 두 개를 섞어놓음으로 인해서 한국인이라는 특수성에서 그것을 ‘한국인 나’는 누구인가 라는 것에 대해서 보편성을, 결론을 주기 위해서 모리라는 에피소드를 전개시킨 것 같다, 그러니까 결국은 보편성으로 가는거죠. 일본인이든 한국인이든, 한국인도 나 자신의 정체성은 나만의 어떤 것이 아니라 사실은 보편적인 어떤 것이다 그러니까 한국인이 너무 한국인의 우물에만 갇혀있지 말자라는 것을 홍상수는 얘기하고 싶었던거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고, 조금 더 다른 측면에서, 아까 이야기한 것에서 모리와 영선이의 관계와, 모리와 권에 대한 관계가 두 개가 사실은  닮아있거든요. 

 

반복되는 거죠. 모리의 주체가 분열이 돼있다는 건데, 말하자면, 모리의 사랑의 진심, 모리 사랑의 정체성이라는 것은 라캉식으로 말하자면 기표가 기의를 생산해내지 못하는 거예요, 계속. 그래서 권하고의 관계가 그대로 영선에게 반복이 되고 있으면서, 이제 말하자면 정신분석 용어로 반복강박이 되는 거죠. 반복강박이 되면서 그것이 바로 주체의 분열을 계속해서 시간도 분절이 돼있고, 뒤죽박죽의 시간 속에서 자기 주체가 분열돼 있으면서 그대로 가죠. 그래서 이것이 라캉이 분석했던 애드가 앨런 포의 『도둑맞은 편지』의 주체의 분열과 아주 흡사한 구조를 가지고 있어요. 저는 그런 부분에서 비교를 해보고 싶은데 그거는 영화는 아니지만 라캉이 분석했던 데로 그 편지가 계속 자리를 옮겨지면서 그 대상들이, 은닉하는 소유자들이 계속 바뀌어가면서, 그 편지라는 기표가 결국은 주체를 분열시키는 기표로 작용한다는 비유와 너무 흡사하게 맞아떨어진다, 그래서 거기서 편지가 말하자면 위치이동을 하듯이 사랑이 계속 반복강박되는, 여기서는 모리 자체가 어찌 보면 기표죠. 모리라는 시간, 모리가 점유했던 시간이 바로 하나의 기표인거예요. 그것은 자기를 형성할 수 없는, 자기의 진실한 사랑이라고 자기는 이야기하지만, 영선을 사랑한다고 하지만 사실 그 사랑은 거짓인거죠. 권을 존경하고 사랑한다고 하지만 그것이 어느 정도의 진심인지는 알 수 없죠. 왜냐하면 그렇다면 영선하고 자고 그럴 수 있겠어요, 또 정은채를 훔쳐보고. 그런 시선들을 계속 갖고 있다는 것은 이 남자의 주체는 분명히 정체성이 없는 거죠. 저는 그런 관계가 상당히 현대인의 불안의식을 잘 그려낸다. 그런데 그게 홍상수가 항상 주장해왔던 것이긴 한데 이 영화는 특히 좀 더 그런 의미에서 철학적인 영화였다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성진수 : 다른 분들의 이야기를 듣다보니 제가 이 영화가 따뜻하게 보였다고 했던 말을 거둬들이고 싶은 생각이 드는데요. 물론 그런 측면이 분명 없는 건 아닌데, 이걸 볼 수 있는 또 다른 방법이 있는 것 같아요. 분명히 여기서 외국어를 사용한다는 것, 이것이 하나의 소통의 방법인데, 언어라는 것이 타자를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가장 중요한 소통 수단이지만, 언제든지 언어는 완벽한 기의에 다다르지 못하고 비껴나가게 되잖아요. 거기에 외국어라는 것을 사용했을 때 그들의 소통은 아까 이야기했다시피 굉장히 상투적인 질의응답만 가능하게 되는 거예요. 그런 것을 통해서 과연 이들의 소통이 가질 수 있는 허위의식 같은 것을 오히려 더 보여주지 않나 싶습니다. 첫인상이나 영화에서 보이는 게 따뜻하고 바르고 이러한 사람으로 모리가 보이지만, 사실 이거는 모리의, 아까 말씀하셨듯여러 가지 본질 중 하나일 순 있지만, 여러 가지 중에서도 가장 피상적인 형태로 우리가, 관객이 보는 측면이고, 관객도 오히려 영화에서 보이는 피상적인 모습에 속는 거 아닌가 하는 거죠. 완전히 그 인물에 다다르지 못하는 거죠. 계속 비껴나가는 거죠. 그런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면서, 갑자기 모리라는 인물이 제가 처음에 부여했던 상냥함을 가진 인물이 아닐 수도 있으며, 그것은 내가 그린 허상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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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건 영화를 읽는 여러 가지 방법 중에 하나가 되는 것 같고요. 또 한 가지 제가 이 영화를 보면서 들었더 첫 번째 생각은, 여지껏 저는 홍상수 감독의 영화를 보면서 문학적이라고 생각해 본 적은 사실 없는데요, 저는 이 영화를 보면서 상당히 문학적이라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그게 왜냐하면 영화라는 매체가 애초에 처음에 나왔을 때부터 꿈과 자주 비유되고, 영화가 시간과 공간에 대한 기존의 관념을 해체하는 매체라는 측면들이 많이 부각되고, 그러한 편집이라는 영화적 기법이 영화의 특질을 살리는 중요한 기법이죠. 그런데 사실 홍상수 감독의 영화들이 편집이라는 기법이 중요하게 드러나는 영화들은 아니었잖아요. 오히려 깊은 관찰을 통해서 이런 사소한 것들을 발견해내고 그 안에 다양하게 흩어져 있는 것들을 관객들이 스스로 찾게 하는 영화였죠. 16번째 영화에 와서 이 영화의 시간을 재배열한다는 건 영화의 편집이 할 수 있는 기존의 시간에 대한 관념을 해체시키는 하나의 기법을, 쓴 거나 마찬가지인거죠. 그런 측면에 있어서 굉장히 후반의 영화에 와서 홍상수 감독이 영화를 다시 발견하고 있는 거 아닌가, 좀 뒤늦게 발견하고 있는 거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동시에 이 영화는 제게 문학적으로 다가오면서, 제가 홍상수 영화의 기존영화들도 문학적으로 다시 읽게 만드는 영화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정재형 : 문학적인 영화죠. 제 생각에 이 영화는 세 가지 정도 깊은 메타포가 있어요. 거기에는 보편적으로 느껴지는 부분이 있는데 첫 번째는 꿈이라는 개 이름, 자유의 언덕, 그 다음이 주인공 모리인데요, 모리가 죽음이라는 뜻이거든요 사실은.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해라. 모리가 잠을 많이 자잖아요. <빅 슬립>이라는 영화 보셨죠. 레이먼드 챈들러의 원작 소설에서 ‘빅 슬립’이라는 건 사실, 깊은 잠이라는 건 죽음을 의미한다 는 얘길 하는데, 잠이 굉장히 강조 돼있죠. 물론 꿈을 꾸니까 그런 거긴 하지만, 잠을 많이 자잖아요. 그래서 윤여정이 너 왜 이렇게 잠을 많이 자냐 묻기도 하고.  사실 이 사람은 죽음을 상징합니다. 그 얘기는 또 실존주의적인 주제와 연관을 갖는 거예요. 왜냐하면 결국 이 영화는 시간을 다룬 거고 시간의 덫에서 유폐되어서 결국은 한치도 나아가지 못하는, 결국 죽음과 같은 상태에 놓여있는. 어떻게 보면 죽는 게 불교적인 용어로 보면 완전히 안착하지 못하는, 떠도는 상태와 같은 걸 표현하고 있거든요. 이름이 모리에요. 주인공 이름은 상당히 많은 것을 연상하게 만들죠. 자유의 언덕도 생각을 많이 하게 되요. 이게 도대체가 뜬금없는 제목인데, 영화에 언덕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구체적으로 적시하지 않는데 상당히 메타포적으로 작용한단 말이죠. 

 

해석하기에 따라서, 해석의 자유가 있고요. 감독이 정확하게 적시하지 않았기 때문에 누구든 해석할 수 있는데, 저는 일차적으로, 카페 이름에서 왔다고 하는데 어쨌든 그것은 일상적인 계기일 뿐이고, 이것은 분명히 문학적이고 언어적인 메타포라고 보이거든요. 꿈도 마찬가지죠. 강아지 에피소드에 관련된 많은 해석들이 거기서 유발되죠. 그게 크게 어긋나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많은 이름들이 있는데 그 이름이 하필 꿈이고, 그것은 한국어의 꿈을 상징하는 이름이다 라고 해설을 했을까, 꿈은 이 영화에서 중요한 메타포거든요, 꿈이라는 것 자체가. 왜 강아지 이름이 꿈이냐, 이런 것 자체가 저는 적어도 세 가지 메타포 작용을 했는데 그런 점에서 상당히 문학적인 의식이 들어간 영화인건 분명하다 저는 그렇게 해석을 하고 싶죠.

 

성진수 : 모리에 대해서 선생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메멘토 모리로 생각할 수 있는데 일본어로 숲이라는 뜻이 있다고...

 

이수향 : 일본어로는 숲이라고, 일본어로 모리는 굉장히 흔한 성이에요. 저는 선생님 얘기 듣다가 그런 생각이 들었는데, 사랑을 반복하고 그런 태도를 투사하는 것을 반복강박이나 충동으로 보셨는데 그렇다면 더 해석이 잘 맞는게, 프로이트에 따르면 반복강박이나 충동은 결국 죽음을 향해가는 죽음충동과 연결이 되기 때문에, 그렇다면 모리가 그렇게 연결 되는 게 맞지 않나 생각이 들었고요, 저는 이 영화 보면서 왜 자유의 언덕일까 생각하다가 언덕스러운 데를 딱 한번 찾았는데, 꿈에서 마지막에 서영화랑 둘이 손을 잡고 일본으로 떠난다고 할 때 살짝 구릉 비스므리한데를 넘어 가잖아요. 말씀하신 데로 언덕이라는 건 허구적이고 환상적이고 원하는 기표인데 이루어지지 못한 것일 수 있는 게, 넘어가는데 딸 하나 아들하나 튼튼하고 ...뭐야? 이랬는데 그 부분이 꿈인 거예요. 결론적으로, 결국 자유의 언덕이라는 게 결국 이 영화에서는 이루어지지 못하고 꿈으로만 상정되는 게 아닌가 생각이 들고,  또 죽음과 잠을 생각해보니까 햄릿의 대사에서도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이러다가 나중에 죽는다는 건 잠자는 것, 영원한 꿈을 꾸겠지 어쩌구 저쩌구 하는 대사가 있어요. 그래서 그런 것도 연결이 되면서, 확실히 이 영화에는 시간과 공간이라는 기존의 홍상수 감독이 가져갔던 거에서 좀 더 나아가서 꿈이라든가 잠이라든가 죽음이라든가 하는 것들이 흩어져 있는,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겠죠. 그런 생각이 드네요.

 

민병선 : 그런데 이젠 한편으로는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저는 홍상수 감독이 되게 남의 비판이나 남의 의견을 되게 신경을 안쓸 것 같은, 쇠고집 같은, 줄기차게 똑같은 영화를 만들고 뭐 이런거, 그런데 이번 영화를 보면서 조금 생각이 바뀐 게 되게 예민한 사람 아닐까 생각이 들었어요. 보면 솔직히 그렇게 변화가 없는데, 사람들이, 여태까지 늘 들어오던 비판받아오던, 자기에 대한 그걸 살짝 바꿔놓으려 하는 그런 느낌이 받았어요. 예를 들어 <자유의 언덕>도 기존의 홍상수 감독의 9번째 10번째 영화였으면 여성의 성기를 상징 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여기서도 변화는 없어요. 그 여주인이 그런 역할을 하거든요. 그 주인공 모리한테 그런 역할을 해주고 있거든요. 어떻게 보면 약간 뜬금없이. 그리고 주인공 자체의 기존의 영화들이 가져왔던 자신의 어떤 허위의식적이면서도 그런 것 들을 여기서도 어떻게 보면 그대로 하고 있거든요. 두 여자사이에서, 솔직히 권이라는 여자를 사랑하면서도 몸은 여기 가있잖아요. 이게 7,8번째 영화였으면 문소리하고의 관계 속에 되게 집중했을 것 같아요. 그런데 그런 많은 비판을 비켜나가기 위해 권이라는 여자로 중심을 바꿔놓은 것 같아요. 어떻게 보면 영선이라는 여자는 그 역할만하고, 임무만 하고 빠져버리는 역할이 돼버리니까, 그리고 중산층, 지식인의 이런 것들도 약간 요런 제3의 인물을 통해서 좀 희석시키고, 뭔가 제가 볼 때 홍상수감독이 늘 들어온 비판을 ‘아 내가 요번에 한번 이렇게도 했는데 또 비판하나 한번 보자’ 하는 그런 작정? 이런 느낌이 좀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대연 : 전 궁금한 게 권이라는 인물이 실제 하는 인물인가요? 전 끝까지 이 여자가 실제로 있는 인물인지 없는 인물인지 잘 모르겠더라고요. 나중에 만난 것도 그렇고, 낳고 잘 살았다 그러는데, 그것도 꿈보다도 뭔가 이상하다, 사실이냐 아니냐 이게 아니라 이 장면이 되게 이상하다라는 느낌을 받았는데, 아까 정 선생님 말씀 듣고 보니까, 모리가 죽은 거 아닌가? 영화 보다보면 그런 장면이 나오잖아요. 할머니들이 돌아가셔서 꿈에 나타나는데 멀리 점점 언덕을 넘어 사라지는 이런 장면 있잖아요. 마치 그런 장면 같은 느낌이 드는 거예요, 그 언덕을 가는 게 마치 자유의 언덕을 넘어가는 그런 느낌이 나서, 그럼 모리는 살아있는 앤가, 죽어있는 앤가 라는 생각도 들고, 갑자기 머릿속에 막 그러면서 이 영화가 진짜 여기서 살아있는 사람은 몇 사람이지? 그런 생각이 ..

 

박태식 : 저는 성진수 선생님이 따뜻한 영화라고 했다가 갑자기 생각을 바꾸는 바람에 ...

 

성진수 :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라는 의미에서 (웃음)

 

박태식 : 저는 여전히 홍상수 감독이 새로운 지평을 열려고 하는 게 많이 보여요. 여태까지 해왔던 많은 인물들이 동원되는데, 사실은 이민우 같은 애들이 바글바글하게 나왔잖아요, 그런데 이민우 같은 사람이 별로 안 나오고 이제 새롭게 가려고 하는 게, 그래서 내가 옛날에 <극장전> 평을 써놓은데 한번 보니까, 딴건 모르겠고 “감독은 영화 선전 책자에서 습관화된 이상을 새롭게 인식하는 과정속에서 관객은 주체적으로 그 이상의 실체와 효과에 대해 다시한번 생각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런면에서 이 영화는 희극의 전통을 따르고 있습니다” 라고 자신의 의도를 피력했는데, 제가 뭐라 그랬냐면 솔직히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라고 써놨어요. <극장전>을 보면서 어떻게 하려고 그러지 그런 느낌이 들었어요. 근데 이 감독이 무슨 말을 할 때 너무 어렵게 하는거야, 홍상수는 굉장히 아주 편안한 사실을 말을 꽈서 아주 어렵게 만들려고, 뭔가 있는척하는 그런 느낌을 받았거든요. 그런데 그런 거에 비하면 이 영화는 나이가 들어서 이제는 옛날처럼 지식인 면에서 어려운 말 쓰고 그러려는 거에서 좀 벗어난, 그렇다고 그래서 아까 말했던 잠이라든가 그런 걸 거부하려는 뜻은 아닌데, 어쨌든 이 사람이 접근을 좀 쉽게 하도록 만드는 기제를 이제 좀 시작하는 게 아닌가, 그래서 나는 어렵게 보기 시작하면 한없이 어려운데 안 어렵게 보기로 했어요. 그리고 그렇게 머리가 좋겠어? 그런 생각도 들고요.

 

정재형 : 그렇게 보면 어느 정도 동의를 하는데요, 아무래도 홍상수 감독이 30대 젊었을 때와 지금 50대 나름대로 중년, 인생을 나름대로 깨달으면서 똑같은 얘기를 하면서도, 조금 달라지는 원숙함, 그런 게 느껴진다고 볼 수 있겠죠. 그런 측면에서 보면 이게 그렇게 세태를 고발하거나 그런 취미는 없어졌고, 단지, 죽음에 직면한 인간의 실존적인 불안의식 같은 것들이 분명히 보인다는 거거든요. 이 영화의 서사가 상당히 재미있어요. 권은 사실은 완전히 단절 되있거든요. 한 번도 만나질 않죠. 옛날 <접속>같이, 차가운 인간관계처럼 두 사람은 결코 만나질 않고 있으면서 뜨거운 사랑의 대상으로 설정돼있단 말이죠. 그게 마치, 철학적인 해석을 하면 그거는 어떤 이상이거든요. 실제 몸은 이쪽에 있고, 저쪽 언덕에 있는 거예요, 언덕 저쪽, 불교적 용어로 피안이죠. 피안에 간다는 건 그대로 해탈, 죽음일수 있어요. 왜냐, 현세적인 몸으로는 결코 도달할 수 없기 때문에. 죽어서 영혼만이 정말 깨끗하게 승천할 수 있는 지점일 수 있어요. 그러니까 육신으로는 절대 만나 볼 수 없는 경지인거고 꿈에서나 존재 할 수 있고, 그것이 사실은 그 여자의 실체가 중요하지 않아요. 그래서 몸으로서 권이라는 여자가 중요하지 않아요. 분명히 객관적으로 제시되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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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서사의 화법은 객관적으로 권이 편지를 읽는 것을 보여주고, 편지를 전달받고 편지를 떨어트려서 뒤죽박죽이 된 편지를 카페에 앉아 읽고 산에 들어갔다 요양을 하고 나오고, 이런 과정들이 전혀 별개로 이루어지면서 객관적으로 서술돼 있고, 나머지는 사실 그 편지에 나타나는 이미지들을 또 서술하고 있는 거예요. 그 여자가 읽는 순서대로 서술하다보니까 뒤죽박죽 시간 속에서 분열된 모리의 주체가 나타나고 있는 거거든요. 그래서 모리의 주체는 굉장히 분열돼있죠. 분열돼있는, 굉장히 잠만 퍼자고, 죽음에 가깝게, 거의 죽은 거와 같은, 모리라는 이름은 일상적인, 일본인의 이름이지만 모리라는 것은 상징적으로 죽음이라는 의미로 차용 될 수 있기 때문에, 일본에 나카무라도 있고 많은데 왜 하필 모리냐 하는 건 중의적인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런 측면에서 굉장히, 사실은 권이라는 여자는 정말 객관적으로 나타나는 일상적 서사적 역할을 할뿐이지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봐요, 추상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이수향 : 저도 비슷하게 생각을 한 게, 아까 민선생님 하신 얘기와 정선생님 하신 얘기가 연결되는 건데, 사실 모리가 굉장히 사랑하는 권이라는 여자가 실제로 등장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끝나고 나면 별로 권이 머리에 안 남아요, 심지어 내레이터처럼 기능하고 있는데도, 그리고 오히려 홍상수 감독의 무리수 약간 이런 식으로 말씀을 하셨는데, 그런 느낌까지 주는 거는 왜냐하면 정말 이 영화가 향해있는 지점이 권이 아닌 거예요. 권은 말씀하신 데로 시간의 순서를 뒤섞기 위한 영화적인 기능으로 존재하지 여자가 직접 자신의 감정을 서술한다던가 그런 부분이 너무 없잖아요. 저는 신기하다고 생각한 게 사랑의 대상인 여자인데, 모리의 입을 통해서 이 여자가 어떤 여자인지 전해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영화가 끝나고 나면 오히려 문소리가 더 사랑스럽고 귀여운 느낌이 나지 권이라는 여자가 얼마나 사랑스러운 여자인지는 느낌이 잘 오지 않더라고요. 감독의 그리는 방법 자체가, 그 여자의 가장 큰 목적은 편지를 섞어서 시간을 엉클어트리기 위한 기제로 사용되고 있는 게 아닌가 생각이 들더라고요.    

 

박태식 : 권이라는 여자처럼 존경스럽고 멋있고 그런 여자가 있어요. 살다보면, 나는 지금도, 나는 그런 여자들이 인생에 몇 명 있었다니까, 나는 권이 너무 멋있는 것 같은데 ...

 

성진수 : 그 부분은 두 가지를 다 이야기 할 수 있는데, 영화에서 핵심은 권이라는 인물이 정말 멋있고 어떤가 하는 퍼스낼러티를 관객한테는 드러내주지 않는다는 거죠. 실제로 그럴 수는 있지만 관객한테 확인을 시켜주지 않는다는 측면에서 그 인물이 어떤 해석의 여지가 모리라는 인물에게 있어서 하나의 판타지적인 대상으로 해석할 수 있는 가능성이 충분히 있으면서, 또 한 가지는 우리한테 정확하게 보여주지 않는 이유는 존경스러운 인물이라는 걸 오히려 구체화시켜서 관객에게 보여줬을 때, “저게 뭐가 존경스러워?” 사실은 이럴 수 있는 부분이거든요. 그래서 그거는 생략함으로써 두 가지 효과를 더 잘 내주는 것 같아요. 관객의 입장에서 자기 경험에 기초해서 하나의 판타지를 내세울 수도 있는 거고, 그 영화 속에서 “저 여자는 저 인물의 판타지가 아니야?” 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 거고.

 

이수향 : 이유야 어쨌든 이 영화에서 권이라는 여자가 그렇게 살아 숨 쉬는 캐릭터로 나와 있지 않다는 건 사실이에요. 뭔가 박제화 되어있는 캐릭터처럼 나오지 자기가 정말 막 이렇게 하는 것처럼 나와 있진 않다 라는 거죠.

 

이대연 : 이게 모리로부터 편지가 오잖아요. 그건 어떻게 보면 죽음으로부터 편지가 온 거잖아요. 이 권이라는 여자는 아프잖아요. 편지를 읽다 떨어트리는 것도 현기증 때문이고, 모리라는 인물이 계속 권을 찾아서 가고 있잖아요, 그게 약간 저승사자같은 느낌이 들고 ...

 

정재형 : 이게 사실 복잡한 이야기가 아니에요. 권이라는 여자가 , 모리관점에서 여자니까, 이 영화는 모리 관점의 영화죠, 권은 객관적으로 드러냈어요. 권과 모리와의 관계를 서술하는 건 또 다른 이야기일 것 같아요. 그건 포기하고 일단 모리이야기만 집중을 했는데 모리를 통해서 현대인의 불안의식을 보여줬다고 보는데, 이 여자가 병약하고 산에 들어가서 회복을 하고 과거 사랑했던 여자고, 결국 모리에겐 간절함이 있는 거예요. 그런데 이 영화가 강조하는 것은 이 여자를 만나지 못한다는 것이죠. 그리고 그 사이에 이 사람이 계속 다른 생각을 하게 된다는 거죠. 그게 핵심이죠. 그런 게 사실은 그게 굉장히 부도덕하고 성적이에요. 이 남자의 방황이 대체로 성적인 거예요. 그러니까 그런 것에서 이 여자는 상대적으로 굉장히 맑은 이미지로 나타나거든요, 어떤 의미에서. 그런데 그거는 이 남자가 벗어나고 싶어 하는, 하나의, 자기 추악하고 더러운 육욕에 대한, 깨끗하게 벗어나고 싶어 하는 갈망에 대한 대상이에요. 그래서 그 여자하고는 깨끗한 삶을 살고 싶다는 것이거든요. 그렇다면 현세적인 삶은 굉장히 섹스로 뒤엉켜있는 굉장히 불결한 몸인 거예요. 몸의 세계는 불결하고 굉장히 화나고 잠을 많이 자는, 여러 가지 불순한 삶이죠. 그것이 바로 현세적인 삶을 홍상수가 바라보고 있는 현실이라고 보이고, 뭔가 그 언덕의, 시간에 속박돼 있는, 분열돼 있는 그런 삶에서 시간에서 해방 되서 뭔가 구원의 이상의 지점으로 가고 싶은 갈망, 그러나 그것은 결코 도달하지 못한다는 지점에서 끝내는 거거든요. 꿈에서 끝나면서 또 정은채를 바라보는 시선. 이런 시선에서 영화가 끝난다는 것은 이 영화는 도달하지 못하는 현대인의 불안의식에서 끝나고, 그러나 그것을 희망적으로 해석을 할 수도 있겠죠, 권이라는 여자를 통해서 인간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갈망을 하는 게 인간이다 그런 해석을 하는 것 같아요. 이야기하면서 순간적으로 생각해보니까 이게 홍상수의 베스트는 아니라는 생각이 드네요. 오히려 젊었을 때 만들었던 영화들, 혹은 전에 만들었던 영화들에서 더 좋은 홍상수의 메시지가 있고, 이거는 어찌 보면 평이한  거예요, 많이 여기저기에서 봐왔던 것 같은 메시지고, 그런 점에서 이제는 자신의 그동안 추구해왔던 지식인의 허위의식을 까발리고 이런 거에선 분명히 벗어났지만, 원숙하지만 메시지가 강렬하지만은 않다고 생각이 드네요.

 

이수향 : 저는 또 다른 측면이 생각이 드는 게, 꿈이, 개 하면서 생각났던 건데, 개를 잃어버렸다가 찾잖아요, 찾는데 문소리가 정말 오바 하잖아요. 어디갔니, 애기야, 난리 피잖아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저는 모리와 개가 등치되면서 똑같이 느껴졌었거든요. 계속 개가 잠을 많이 자고 꿈을 많이 꿔서 개 이름을 꿈이라고 지었다고 하잖아요. 뭔가 불안한, 예술가적인 자아든지 혼란스러운 자아가 위안을 받는 따뜻한 기제가 문소리한테 온다고 생각하는데, 그녀의 과도한 친절과 약간 주책스러운 느낌이 모리한테 그런 걸 주는데, 그게 엄마하고 자식관계처럼, 연인보다는 의사 모자관계처럼 느껴지는 게 강아지하고도 연결되서 그런느낌을 받아서, 생각해보면 그동안 홍상수 영화에서 보면 굉장히 나이가 들었지만 자리를 잡든 안 잡든 되게 단독으로 있는 개인 남녀는 많이 그려서 그들이 연애를 한다던가, 적어도 결혼을 했는데 자식 얘기는 안 나와요, 자녀 아이 이런 이야기는 한 번도 안 나왔던 것 같은데, 신기하게도 이 영화에서는 둘이 막 결혼을 해서 딸 하나 아들하나를 낳았다는 둥 엄마니 아들이니 애기니 이런 얘기가 등장하는 것도 감독의 작은 변화 중에 하나가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박태식 : 이야기를 듣다 보니까 진짜로 죽은 걸 수도 있겠다 생각이 드네요

 

이대연 : 이게 한번 고착되면 빠져나오기 힘들다는 ... 그리고 그 여자가 강원도 지리산에 들어 갔갔 나왔다 하잖아요. 그런데 얘길 하면서 목사면서 의사인 선생님한테 치료를 받았다고 그러는데, 물리적인 면도 있지만 굉장히 종교적이고 영적인 면이 있잖아요. 치료를 받았다는 것이 어떤 의미일까 생각이 들게 되더라고요. 한번 이쪽으로 가게 되니까.

 

민병선 : 전 영화 볼 때 반대로 단순하게 생각했어요. 상징적이고 정신적인 문제가 아니고 , 이게 편지 때문에 헷갈린다고 본다면 솔직히 저는, 물리적으로 촬영을 이렇게 이렇게 했는데 이게 섞여있단 말이죠, 그런데 이게 순서편집을 다시하고 싶진 않고, 그냥 내레이션을 하나 줘서, 오래전부터 이런 생각은 있었을 것 같아요. 옛날부터 이런 수법은 많이 썼거든요. 앨범을 보다보면 앨범 순서에 따라 시간이 바뀌고, 뭐 이런 것들은 많잖아요. 아 편지하나를 주자 라고 했는데, 솔직히 문제가 뭐냐면 세상에 이런 편지가 어디 있어요, 편지 내용이 이렇게 쓰는 편지가 있나요? 이거는 솔직히 일기거든요, 내가 뭐 하고 내가 어떤 여자를 만나고 이걸 편지로 해서 전해준다는 자체가 보는 사람이 황당하고, ‘뭐야 이거 미친놈 아냐?’ 이러는 거지, 이거는 우연히 남의 일기를 봤을 때의 이야기지, ‘에이, 그냥 편지로 해’ 가지고 그냥 했는데, 편지가 아닌데 편지처럼 되면서, 권과 모리의 상관관계가 이렇게 막 이렇게 보는 시점, 포인트에 따라서 이런 문제가 생기는 것 같아요.

 

박태식 : 편지는 구도를 위한 도구지, 심오한 뭐를 담기보다. 그런데 정재형 선생님 말을 들으니까 그런가 ..? 또 생각이 들고...

 

이수향 : 원래는 시간순서대로 찍고 편집에서 다 섞었데요. 

 

 

 movie_image (12)

정재형 : 저는 사실 이런 게 홍상수 감독의 매력이라고 생각을 하는데, 홍상수 감독의 영화 만드는 특색중의 하나가 굉장히 즉흥적인 소재, 일상적인 소재, 보통 다 자기가 등장한다고 그러잖아요. 영화감독이면서 교수인 사람들은 대체로 홍상수다 이렇게도 얘기하는데, 어느 정도까지 사실인지는 모르겠지만 굉장히 영화가 동일한, 자기와 닮은 주인공들이 빈번히 등장하고, 굉장히 일상적인 <잘 알지도 못하면서>에서 소재라든가, 이런 것들을 보면 바로 자신의 이야기를 한 거와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게 홍상수 감독의 특징인 것처럼, 동시에 홍상수 감독이 잘하는 것 중 하나가 연기나 대본에 있어 약간 즉흥성을 허용한다는 거죠. 이 영화도 그런 방식의 하나의 과정으로 본다면 그걸 문제 삼을 건 없다고 봐요. 왜냐면 홍상수 감독은 바로 그게 관객이 영화를 해석하는, 본인은 그렇게 만든다는 거지 결국 해석의 주체는 관객 아닙니까, 그런데 관객이 어떻게 찍어서 어떻게 편집했던 간에, 관객이 분명히 해석할 수 있는 여지를 준다는 거예요, 홍상수 감독의 위대함은. 홍상수 감독은 그런 의미에서 그저 그런 감독이 아닌 거예요. 실수를 하는 감독도 아니고 이렇게 찍었기 때문에 그것이 이렇게 편집이 돼서 이런 실수를 하는 감독이 아닌 거예요. 그게 영화가 된다는 거거든요. 분명히 본인은 이거를 순서대로 찍었는데 얽어놔서 영화가 되게 만들든, 처음부터 의도적으로 순서를 뒤죽박죽해서 영화를 만들든 다 의도적으로 마지막에 결론을 낸다는 거죠. 그래서 결국 의도를 파악하는 거에 있어서도 홍상수는 하나의 지점을 제시할 뿐이지, 사실 관객이 자유롭게 해석 할 수 있는 거 자체도 홍상수의 메시지라고 생각하거든요. 이렇게 해석하든 저렇게 해석하든 그거는 홍상수가 관객에게 주는 메시지의 일부인 것 같아요.그래서 홍상수가 해석한 걸 포함해서 굉장히 많은 다양한 갈래의 해석을 홍상수가 제시해줬고, 그런 의미에서 자기가 느낀 데로 해석하는 게 맞겠죠, 결국은, 그게 홍상수가 괄호를 주고 각자 채우라고 제시를 했기 때문에, 저는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는 뒤죽박죽의 의미가 있는 것이지, 그것에 대한 이유를 찾는 건 별로 의미가 없을 것 같아요. 또 권이라는 것도 실체냐 아니냐 의미가 없는 것 같아요. 저는 이대연 선생님의 해석도 가능하다고 봐요. 이대연 선생님이 그렇게 믿는다면 정말 식스센스같이, 왜냐면 전 분명히 홍상수가 괄호로 남겨둔 부분이라고 생각해요, 그렇게 갈수 있는 가능성도 있거든요. 모리와 권의 관계를 구체적으로 갈수 있는 것도 있고, 또 모리자체를 다른 시각에서 연계해서 서술이 되는 걸 가정해서 재구성 할 수도 있고, 저는 사실 이게 구성의 영화지, 서사의 전략 자체가 구성을 통해서 어떤 주제를 만들어내라 라고 주문을 한 영화기 때문에 그런 구성도 가능하고, 다 가능한 영화, 그게 홍상수의 매력이 아닐까 저는 그런 건 굉장히 좋게 생각합니다.

 

이대연 : 다들 담배 피는 건 어떻게 생각하세요? 

 

박태식 : 난 좋다고 생각해요. 다들 담배피지 말라는데 멋있지 뭐.

 

정재형 : 이대연 선생 이야기 들어보면 그럴듯한 거예요. 해석을 하는 건 결국 관객의 몫인데, 지금 너무 담배를 많이 피잖아요. 김의성도 모리도, 진짜 담배 피는게 많죠. 지금 현실에서 담배가 화두가 되고 있는 건 사실이거든요. 전 세계적으로 담배에 대한 강박이 있어요. 담배가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는 대표적인 것중에 하나잖아요. 왜냐, 담배를 피우려고 하는 사람에게 담배를 못 피우게 하고 제한하는 거는 굉장한 구속이죠. 그런데 홍상수는 영화가 꿈이니까 일부러 담배를 많이 피게 했는지도 몰라요. 현실하고 거꾸로 된 방향으로, 사실 국가는 인간이 타락한 모습이라고 그것을 막으려고 하는 거잖아요. 오히려 여기서는 그런 거에 대해서 거꾸로 타락한 방향으로 나가는 거죠. 그런 식으로 담배를 못 피게 하는 현실에 반항으로 모든 캐릭터가 담배를 피는걸로 역설적으로 보여줬다면, 그런 의도가 이대연 선생 해석대로 현실의 모습을 보여주려고, 외국어를 쓰는 부분도 그런 문화성에 대한 의도가 있는 거고, 담배도 그런 의미에서 아주 중요한 장치로 차용된 것 같아요. 깊이 생각은 안 해봤는데 또 그렇게 보니까 그렇게 느껴져요. 나는 사실 홍상수가 굉장히 섬세하게 모든 장치들을 심어놓는다고 분명하게 주장할 수 있어요. <오!수정>, <강원도의 힘> 이런 영화들이 굉장히 느슨한 것 같은데 완벽하게 구성이 돼있거든요. 그래서 홍상수의 어느 영화도 그냥 물 흘러가듯이 보이는데 구성이 너무나 완벽해요 너무나 완벽하고 그것이 메타포가 되어있어요. 복선화 돼있고, 예를 들어 <오!수정>에서 자위 시켜달라던 오빠 있잖아요, 수정을 그리죠. 그 수정이 실제 수정을 그리잖아요, 그런 것들이 과연 우연이고 장난이란 말인가, 아니거든요. <강원도의 힘>에서 맨 처음장면에 기차를 타고 가죠, 거기에 오윤홍의 모습을 왼쪽에서 찍은 게 보여요. 그때는 남자를 만났지만 인식하지 못해요, 카메라가 왼쪽에서 찍었으니까. 중간에 다시 그 장면이 반복되는데 이때는 오른쪽에서 찍어요. 그럼 이런 것들은 무엇인가, 이건 완벽한 구성이죠. <오!수정>에서 두 가지의 이야기를 보여주잖아요,  이렇게도 됐으면 하는 정보석의 모습, 이렇데 됐으면 하는 모습, 그런데 두 가지 모습이 살짝 살짝 달라요. 약간 긍정적인 정보석과 굉장히 잔악한 정보석, 이렇게 두 가지 모습, 인간의 사념을 표현한 걸로 보이거든요. 이런 것들이 굉장히 계산하에 돼있다는 거죠. 똑같은 장면들이 계속 유사하게 반복이 되잖아요. 북촌방향도 유사반복적인 게 나오죠. 이런 것들이 사실은 홍상수의 트레이드마크와 같은건데, 홍상수를 왜 느슨한 감독으로 생각하냐면, 연기자체가 즉흥적으로 자유분방하게 돼있어요. 대사가 일상적이고, 드라마틱한 대사가 없어요, 사실은. 그런 것 때문에 착각을 하는 것뿐이에요. 어떤 연기는 상당히 롱테이크로 돼있고, 이러다 보니까 이게 구성 자체가 그냥 흘러가는 데로 찍은 것처럼 보이는데 절대 그렇지 않다는거죠. 굉장히 오밀조밀하다는 거죠. 그러니까 담배피는 것도 그냥 자연스럽게 담배펴라 해서 담배를 핀 것 같진 않아요. 그렇게 보면, 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담배를 의도적으로 피는것처럼 보이냐, 그건 의도가 있다는 거죠, 그걸 찾아내는 것을 애매하게 했기 때문에, 굉장히 심볼릭하게 했기 때문에 관객이 이게 뭘까 바로 딱 즉물적으로 오지 않는 것뿐이지, 해석을 하면 의도가 있을 수 있다고 볼 수 있죠. 저는 굉장히 정교하고 의도적인 영화감독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의미해석을 적극적으로 해야 된다고 보거든요. 그리고 그중에는 잘 풀리지 않는 것도 있고, 굉장히 난해한, 다 풀었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이 어쨌든 관객의 몫이기 때문에 넘어갈 수 있는 것뿐이지, 어느 정도 합의에 이르기에는 굉장히 난해한 것들이 있다는 거죠. 아주 주관적인 해석. 어찌 보면 그런 감독이 국제적으로 많잖아요. 데이비드 린치감독경우도 그렇고, 완벽하게 해석되지 않는 대가 감독들이 많아요, 그런 감독 중에 하나라는 게 분명한 것 같아요. 단지 이 사람의 과거의 작품들과 비교해 봤을때 이 작품이 베스트는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죠.

 성진수 : 시간이 상당히 길어졌습니다. 많은 이야기를 나눴으니, 오늘은 여기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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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일2014-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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