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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합평회

카트 합평회

참석자: 이대연, 민병선, 정재형, 이지현, 이수향, 성진수, 양경미


카트 (부지영, 2014)


성진수: 정신 줄을 놓고 <거인> 얘기 듣다가 제가 할 말을 하나도 정리 못했네요. (웃음) 연대 얘기가 잠깐 나오면서 <거인>에서 <카트>로 자연스럽게 넘어 왔는데... 연대가 나와서 그 말부터 한다면, <카트>의 인물 구성을 보면 연대에 대한 생각을 하게 하는 점은 있습니다. 영화의 고전적인 이야기 문법이 선악 대립의 구도라고 한다면, 이 영화는 악이 존재하지만 악의 형상화를 적게 하면서, 선 쪽의 인물들, 즉 약자들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영화이거든요. 그래서 연대에 대해서 이야기가 되는 부분이 있다고 봅니다. 하지만 저는 이 영화에서 연대는 그렇게 크게 와 닿는 부분은 아니었어요. 이 영화가 나름 한국 상업 영화에서는 다루지 않는 소재를 다룬 것은 확실하고, 그 다루지 않는 소재를 꽤 정공법으로 보여줬다는 측면에서는 저는 좋은 영화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근데 제가 이 영화를 보면서 딜레마에 섰던 지점이 있는데요, 그것은 이 영화에 대해 아쉽다고 생각하는 지점이기도 합니다. 말씀드렸던 고전적인 영화들은 항상 피해자가 있으면, 그 피해를 만들어낸 악이 형상화 되거든요. 그러면 영화를 보는 사람들이 그 영화 안에서 느껴지는, 즉 피해자를 봄으로 인해 생기는 어떤 공분이라든지 이러한 경험들을 영화 속에 있는 악에 쏟아 붓게 되죠. 그게 사실은 가장 고전적인 영화의 방식이고 그런 영화들은 어떤 면에서는 한편 비판받기도 하죠. 너무나 선악 대립적으로 나온다는 측면에서. 이 <카트>라는 영화의 주요 인물들을 피해자, 희생자의 상황에 놓이도록 만든 원인이 되는 적대자, 인물이든 혹은 시스템이든, 조직이든, 무엇이 됐든 그것을 대변하는 하나의 캐릭터가 영화 속에 너무 부재하다 보니까, 이 영화가 파헤치고 보여줘야 될 현실을 너무 반쪽만 보여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 영화를 보면서 미국영화 중에 <마진 콜>이라는 영화가 떠올랐는데, 두 영화는 마치 대칭을 이루고 이는 것처럼 보여요. <마진 콜>은 <카트>와 반대로 월 스트리트에서 전 세계 경제를 휘두르는, 그러면서 동시에 그들의 이익만을 챙기는, 소위 말해서 <카트>에는 형상화 되지 않았던 자본주의의 한 측면의 사람들만 형상화되고, 그들에게 영향을 받는 다른 한 쪽은 형상화가 안 되죠. 그러면서 그 세계를 굉장히 차가운 시선으로 보여주는 영화죠. 저는 <카트>가 자본주의 사회의 양 측을 다 다루는 단계까지 가면서 차가운 시선을 유지했으면 어땠을까 생각해요. 전체 구조를 좀 파헤쳤더라면, 영화가 좀 깊이 들어다봤다면 좀 더 총체적으로 더 많은 생각을 할 수 있게 하는 영화가 되지 않았을까라는 아쉬움이 영화를 보고나서 좀 남았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차가운 시선으로 영화를 그려도, 실제 사건을 극화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선과 악의 대립이 생기면서 지금보다 더 멜로드라마적인 영화가 될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래서 이 영화에 대한 저의 아쉬움이 곧 딜레마로 다가왔어요.


양경미: 저는 영화를 보기 전, 비정규직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점, 크라우드 펀딩을 통한 영화제작 등 약간의 정보만을 접했을 때, 이 영화가 상업영화가 아닌, 저예산 독립영화쯤으로 생각했는데요, 영화에 대한 정보를 조금씩 접하게 되면서부터는 어떻게 영화를 만들었을까 궁금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영화를 관람하면서는 들었던 생각은 “아, 그저 상업오락영화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또 한 가지 제작자가 영리하게 영화를 제작한 것 같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그동안에 주류 상업영화에서는 사용하지 않았던 노조에 관한 문제, 비정규직에 대한 문제 등의 소재 등을 가지고 오면서 영화를 풀어가는 과정에서는 굉장히 감성적으로 접근하는 즉 상업영화가 사용하는 내러티브 구조로 풀어가면서 감성을 자극해 눈물을 빼게 하는 그런 영화라고 생각했어요, 뭔가 한방 있을 것 같기도 했는데 기대에 못 미쳐 약간은 배신감 같은 마음도 들었고 상업영화치고는 아쉬운 면도 있고 등등 이러저러한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습니다. 뭐 어찌 되었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를 내린다면 첫째, 이제는 트렌드가 되어버렸는데, 상업영화 안에서 사회적인 문제, 사회고발을 다루는 문제를 집어넣었다는 점과 둘째, 남성중심의 영화 구조 속에서 여성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는 점 그리고 크라우드 펀딩을 통해 관객이 직접 영화제작에 참여할 수 있는 통로를 제공했다는 점을 좋은 점으로 평가하고 싶어요. 국내에서 크라우드 펀딩을 통한 영화제작은 그리 성공적이라고 할 수 없는데 이 작품은 초기 5천 만 원이었던 목표금액을 훌쩍 넘어서 1억 원을 달성한 성공적인 사례가 되었고 이를 계기로 지금은 다른 영화들이 크라우드 펀딩을 통해 영화를 제작하려고 하는 움직임이 있거든요...


민병선: 한국 사회에 부당함이 많이 있잖아요? 좀 뭔가 불평등이 있고, 또 양극화가 있고, 그런데 이제 그거를 어떤 방식으로 다루느냐에 대해서는, 이게 다큐멘터리나 시사 고발프로는 아니니까, 영화적이라는 툴 안에서 어떻게 해석할 것이냐의 문제가 있잖아요? 이제 그런 면에서는 그렇게 잘 빠졌다, 훌륭하게 완성도가 높다, 이렇게 보이진 않았어요, 솔직히. 일단은 뻔하다는 생각을 제일 많이 했던 것 같아요. 이야기도 뻔하고, 표현하는 방식도 뻔하고. 그래서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더라고요. 왜냐하면 이게 한국영화의 한 트랜드적인 측면이 그것이 근대사든, 현대사든, 역사 속에서 뭔가 자꾸 부당했다고 생각하는 부분의 지점을 소재화해서 다시 재현하는 방식의 영화들이 계속해서 나오잖아요. 얼마 전에 <제보자> 라든지, <카트>는 에이젠쉬테인의 프로파간다 영화 같은 느낌을 받았거든요. 선동을 하는데, 촌스럽게 선동을 하더라고. (웃음) 그러다가 문득 마스크 쓴 얘들이 우르르 지나가고. <거인>같은 영화도 사회의 모순을 다루지만 좀 더 영화적인 방식으로 보여져요. 어느 한 편에 무게중심을 둔 게 아니라 그 이해관계를 찾아가잖아요. <거인>의 주인공은 이방인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고. <카트>라는 영화가, 물론 이 제작사가 <파업전야>라는 이전의 뿌리도 있지만, 이야기를 극화하는 방식에 있어서, 아쉬움이 많이 남았습니다.


정재형: <카트>는 굉장히 고전적인 영화 형식을 갖고 있습니다. 소셜리스트 리얼리즘이라고 하는 건데, 사회주의적 사실주의, 사회주의 사실주의죠. 사회적 사실주의가 있는데 그런 사회비판적 사실주의, 소셜 리얼리즘이 아니라, 소셜 크리티컬 리얼리즘이 아니라, 소셜리스트 리얼리즘입니다. 그러니까 소비에트, 당시에 동구라파, 소련을 중심으로 중국 이런 공산권에서 유행했던 방식이죠. 그런데 그것의 기본 포맷은 이래요. 사회운동에 무지한 평범한 주인공이 있고, 이 서민 주인공이 사회의 어떤 부조리한 상황 속에서 방관자로 있다가 사회적 의로운 사람들이 학대받고, 굉장히 비참한 상황에 놓이게 됐을 때 뒤늦게 눈을 떠서 가장 적극적으로, 열정적으로 그 운동에 뛰어들어서 결국은 그 운동을 조직해 나가고, 마지막에 승리로까지 변하게 하는, 그것의 전범이 되는 게 막심 고리끼의 <어머니>거든요. 그리고 푸도프킨이 만들었지만. <전함 포템킨>도 마찬가지고요, 에이젠쉬타인이 만들었지만. 20년대의 가장 유행했던 방식입니다. 우리나라의 요즘의, 서구에서 <노마 레이>라는 할리우드 영화와 아주 직격되는데, 노동운동을 미국 할리우드에서. 사실 그 당시 마틴 리트 감독은 거의 빨갱이다, 이렇게 미국에서 매카시즘의 희생자이기도 하고, 그래서 좋은 감독이지만 사회 비판적인 영화를 만들다가 거의 빨갱이라고 낙인찍힌 감독이 만든 <노마 레이>라는 영화가 79년도에 나왔는데, 이 영화가 굉장히 영향을 많이 줬죠, 미국 할리우드 내에서도. 그래서 할리우드 상업영화, 오락영화로써 그 정도의 완성도를 갖고 있는, 굉장히 사회적인 노조 운동 영화가 할리우드에도 뿌리를 내리게 됐습니다. 그런데 그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은 게 바로 <파업전야>죠, 우리나라에.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파업전야> 당시에 이은, 장동홍 등의 감독이 했었는데, 거기서는 샐리 필드 주인공의 모습을 그대로 카피했어요. 마지막에 침묵, 마스크 하고서, 360도 카메라 팬 하면서, <노마 레이>의 그 장면을 그대로 <파업전야>가 카피를 할 정도로 영향을 많이 받았죠. 지금 2014년도에 <카트>가 나오는데, 저는 그런 묘한 연관관계가 무엇을 의미하는 지 좀 의문이 들고요. 최근에 이 외에도 <변호인>이라든가, <또 하나의 약속> 이런 영화들이 대체로 이러한 전범을 그대로 갖고 있어요, 플롯구조가. 그래서 <변호인>도 마찬가지고, <또 하나의 약속>도 마찬가지고. 한 평범한 주인공이 그 상황에 전혀 무관심했다가 마지막에 그 주역이 되는 주인공으로 간다. 이건 <포템킨>에서도 우리가 구호로 나오지만 ‘하나가 다수로, 다수가 하나로.’ 이렇게 해서 소비에트의 이념을 나타내는 굉장히 중요한 미학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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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최규석 작가가 <송곳>이라는 웹툰을 네이버에 연재 하고 있죠? 저도 그것을 봤습니다만, 마트 노동자들의 노조운동을 그리고 있는데, 너무 유사해서 혹시 연관관계가 있는 지 굉장히 관심을 갖고 있어요. 이 <카트>란 영화하고 동시 발생적으로 나오고 있는데, 그것은 아마 마트 노동자의 상황 이런 부분들이 교감을 이루어서 나온 것이 아닌가 생각도 들긴 하구요. 어쨌든 지금 왜 이러한 고전적인 형태의, 사실 이미 한 물 갔다고 얘기하는 이런 형태의, 지금 혁명시기도 아니고, 이런 고전적인 것들이 한국사회를 강타하고 있는가? 제가 생각할 때 두 가지 인 것 같습니다. 하나는 여전히 80년대의 터널에 갇혀 있거나, 두 번째는 어쨌거나 그러한 소재가 국제적으로, 전 세계적인 추세로 보면 낡고 진부한 것일지라도 우리에게는 일정 정도 의미를 갖는, 우리만의 시간대에 필요한 소재다 이렇게 생각하는 시각이겠죠. 저는 사실 판단을 유보하고 싶습니다. 저는 잘 모르겠어요. 그걸 곰곰이 생각을 좀 해봐야겠는데, 둘 다 준거 가치의 근거가 있는 것 같아서.

수법은 지적하셨다시피, 저도 역시 예술영화적인 수법보다는 상업오락영화에 가깝습니다. 상업오락영화입니다. 그래서 <거인>과 비교를 해봐도, 사회 문제를 다루는 방식은 상당히 단순하게, 깊이 있게 묘사한다기보다는 일의 절차를 단순하게 짚어 나가서 엔딩까지 정확하게 보여주는, 그런 상업오락영화의 구조를 갖고 있어서 왜 이런 영화가 먹힐 수 있는가라고 한다면, 이 영화가 먹혔다면, 왜 먹힐 수 있는가에 대답을 해야 한다면 참 너무 뻔하고, 그래서 먹히지 않아야 되는데, 상업오락적으로 이런 영화를 좋아하고 한다면 그 만큼 우리 삶이 여전히 이 영화들이 다루는 그 소재들에 있어서 뭔가 공감대를 갖고 있고, 이 소재 자체에 대해서, 영화를 어떻게 다뤘던 간에. 이렇게 다루면 매우 낙후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 소재 자체에서 만이라도 여전히 그런 문제들이 풀리지 않고, 우리 삶이 참 팍팍하고, 황량하고, 너무 고통스럽기 때문에 그것이 작용하지 않는가.

사실은 상업오락영화에서 저는 개인적으로 이런 것을 반대하는 편이예요. 그래서 두 가지의 세력이 이러한 소재들을, 우리 삶의 이런 부분들을 이용한다고 보는 데, 하나는 정치권이고, 또 하나는 상업오락영화계라고 생각하거든요. 대기업, 혹은 대 자본가들이 돈을 들여서 근사하게 만들어서 관객을 끌어 모으는데, 두 집단의 목적은 하나는 정치적인 목적, 하나는 상업적인 목적, 너무 뚜렷하거든요? 저는 그래서 <또 하나의 약속>이라는 영화가 나왔을 때도 개인적으로 그런 평을 썼습니다. 이것이 결코 삼성의 어떤 지배구조를 바꾸지 못하는데, 이 영화가 마치 그 앞에서 피켓시위를 하고, 많은 사람을 끌어 모으는 운동권 영화처럼 오해가 된다면 정말 잘못 살고 있는 거죠, 우리는. 삼성의 본질을 정말 잘 모르는 거죠. 산재로 구제받은 사람보다는, 한 두 건의 구제받은 거보다는, 무수한 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보고 있는데 영화에서는 마치 그것을 굉장히 승리한 것처럼 희망적으로 그리잖아요? 그런 태도로 봤을 때는 <거인>과 같은 식으로 만들어야 하는데, 본질을 짚어내는 영화를 만들어야 되는데, 마트 노동자의 진실에 대한 것이 분명히 숨겨져 있을 텐데, 이것을 왜 이런 식으로 밖에 그리지 못하나. 그러니까 결국 제 결론은 이거는 정치적이든, 상업적이든 이용하려고 하는 그런 동기다. 저는 그렇게 보고 있습니다.


이지현: 저는 의미 있는 작품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선생님이 아까 언급하셨듯이 최규석의 <송곳>을 보면, 사실 독일 아이들은 초등학교 때부터, 다들 우리는 노동자로 살게 될 것이기 때문에 노조를 만드는 법, 단체 교섭 하는 법을 배운다, 이런 내용이 나와요. 이런 점은 우리나라와 굉장히 다르잖아요? 살기가 계속 팍팍해질 텐데 영화가 이런 얘기를 해 줘서 다시 이 사건에 대해서 찾아보는 젊은이들이 생겨날 수도 있고, 약간의 교육적인 효과도 기대할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소재의 얘기들은 앞으로 더 안하게 될 테니까. 그리고 물론 <거인>이 좋은 영화라고 생각은 하지만, <거인>은 사실 만 명 정도밖에 보지 못했잖아요. 그러니까 많이 볼 수 있게끔 하는 것도 좋다, 라는 생각을 하고. 그렇다고 영화를 잘 만들었다고 생각하진 않아요. 제가 느끼기에는 배우들 한 명 한 명의 연기력이 그 사람들의 이전 작품에 비해 중간도 못 미친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거든요. 연기 연출을 잘 못했다는 느낌이 들었는데도 불구하고 영화는 그럭저럭 흘러간다는 느낌도 들고. 그리고 울컥했다고 하셨지만 저는 영화가 과장되어 있다는 느낌을 별로 받지 못했고, 일단은 많은 결점에도 불구하고 이 소재를 다시 다뤄준 것에 의미를 부여하고 싶은 그 정도? 


이수향: 저는 이 영화를 영화 자체로 얘기할 수 있는 부분이 있고, 그 다음부터는 개인의 취향 혹은 정치적 성향이 들어갈 수 있는 부분이 있고, 두 가지로 나뉜다고 보는 데 먼저 이 영화가 가지는 특이한 지점은 분명한 것 같아요. 독립 다큐멘터리가 80년대부터 엑티비즘이라고 하죠. 일종의 정치•사회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이런 실천의식으로서 영화를 이용하는 그런 방식의 하나로써 쓰고 있다는 게 너무 명백해서 더 이상 얘기할 여지도 없는 그런 부분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또 특이한 점은 여성 자매 연대, 여성 연대에 대한 게 페미니즘의 발달과 함께 쭉 오다가 90년대까지 거의 절정이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어느 순간 여성과 자매 연대에 대해선 아무도 이야기 하지 않아요. 저는 대단한 페미니스트는 아니지만 그런 흐름이 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는 거죠. 이제 그런 측면에 있어서 이 영화가 살려낸 부분이 분명히 있고, 아무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아하는 문제에 대해서 문제의식을 가지고 굳이 돈을 들여서 상업영화로 만들었다는 점에서 가지고 있는 일정정도의 유의미성이 있다고 봅니다.

그런데 명백하게 단점은 마찬가지죠. 약자들과 그들의 상황이 서로 무조건 equal이 아니고 또 그것이 여성만의 문제가 아닌 이상 약자들의 연대를 여성으로 환원화 시킨다는 한계점은 지적될 수 있다고 봅니다. 그래서 저는 이런 프로젝트를 왜 만들었나, 이 자체가 굉장히 문제가 된다고 보는데 말씀하신 대로 이것이 영화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것이 될 수도 있고, 현실적인 상황을 너무 영화적으로 그려내서 그것으로 어떤 감정을 끌어내려고 하는 게 되게 인위적으로 볼 수 있다는 생각은 들었어요. 근데 이지현 선생님 말씀에 약간 공감하는 부분이 있는 게 사실 노동자가 파업을 하는 파업권이라고 해서 법에 규정된 기본 권리예요. 그런데 그런 부분에 대해선 여전히 우리나라에서도 아직도 굉장히 조금 발목잡기 아니냐, 이런 식으로 보는 시선이 있고, 그 부분에 대해서 정리가 안 되고 있는 이런 일반의 현실 속에서 영화라는 굉장한 대중성과 돈이 많이 들면서 예술성보다는 마치 사업가들이 장사치에 놀아나기 쉬운 약간 이런 생태에서 이런 영화를 만들어냈다는 의욕 자체에 저는 사실 조금 더 칭찬을 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 영화에 또 재밌는 점은 뭐냐 하면 우리가 이랜드 홈웨버 사태를 기반으로 하고, 홍대 청소 노동자나, 뭐 여러 가지 이야기들이 이 영화에 많이 섞여있는 데 이런 생각이 드는 거예요. 우리 저거 다큐멘터리로도 많이 보고, 뉴스에서도 많이 보고, 기사로도 많이 보고, 홍대의 청소 노동자 보면 갑자기 어느 날 해고되고, 쪽방에서, 햇볕도 안 들어오는 데서 밥 먹고 이런 거 다 알잖아요. 모르는 사람 없는데, 이 영화를 통해서 그것을 굉장히 핍진하게 그려내어 우리 눈앞에 현현이 되게 만들어 냈다는 거죠. 재현이 되면서 우리가 단순히 머리로 알고 있었던 것을 눈앞에 세세하게 나타냈을 때 우리가 가지는 감정적인 동일시라든가, 그런 부분에 대해서 이 영화가 노리고 있는 부분이 있다면 저는 성공하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또 하나를 이야기 하자면, 이 영화는 명백히 의도가 먼저냐 아니면 영화적인 포인트가 먼저냐 했을 때, 의도가 먼저 있고 그것을 전달하는 방식을 고민했던 영화라고 생각을 해요. 어떤 분이 그런 말씀을, 명필름이 마케팅적으로 되게 훌륭한, 더 잘하는 영화사다라고 했는데, 그런 부분이 있을 때 굉장히 영화사에서 마케팅을 잘 했다고 생각을 합니다. 몇 가지가 있는데 첫 번째는 이런 의도를 전달하고 싶은 것이 이 프로젝트의 목적이라면 최대한 많이 보게 해야 되죠. 많이 보게 해야 되는데, 그저 그런 독립영화로는 한계가 있어요. 그래서 대중성 마케팅을 봤을 때 먼저 하는 게, 가장 우리가 가기 쉬운 게 감상성과 최루성이예요. 눈물을 흘리게끔, 정말 울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장면이 너무 많지요, 이 영화에서. 그런 부분을 정확히 찝어 냈고, 그런 부분에서 대중이 공감을 할 수 있다면 분명히 효과적이죠. 우리는 막 노동권이라고 말하면 되게 듣기가 싫어요, 어려울 것 같고. 근데 엄마하고 아들이 있고, 엄마한테 이해 못했던 아들이 똑같이 편의점 사장한테 뺨 맞고 돈 못 받고 드디어 엄마를 이해하게 되는 그런 장면에 이르면 우리는 이 내용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는 거죠. 그런 면에서 이 영화가 노리는 지점이 어느 정도 성공을 했다고 보고 또 하나는 아까도 말씀 하셨지만 아들 역할을 단순히 그냥 뭐 신인배우를 쓰는 것이 아니라 굉장한 대중성과 유행성과 어린 아이들의 첨단일 수 있는 그 EXO의 도경수를 썼다는 점에서 10대 아이들 중에서 몇이라도 이 영화를 볼 수 있는 가능성을 높였다는 것. 그런 면에서도 이 영화가 어느 정도 화제몰이라든가 여러 가지 면에서 성공한 점이 있다고 봅니다.

사실 그 다음부터는 이 영화의 문제의식에 대한 개개인적인 취향인 거예요, 정치적으로 불편한 사람들도 있을 수 있고. 그래서 저는 어느 정도 이런 부분이 있고 그것에 대한 취향으로 맘에 안 들면 이 영화를 안 좋아 할 수도 있고, 나는 이렇게 영화를 정치적으로 쓰는 게 싫다라는 사람은 싫어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저의 개인적인 취향으로는 100가지 영화가 많은 데, 온갖 이상한 영화도 많고, 미친 영화도 많고, 막 벗고 나오고, 수백 개의 영화가 있는 데 뭐 이런 영화 정도 하나 있다고 해서 그게 문제겠어요? 저는 그냥 그런 측면에서 봤을 때 상업영화사에서 이 정도 노력을 한 게 뭐 나쁘지 않은 하나의 방법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네, 그 정도.


성진수: 정치권에서 이용하는 목적이 됐든, 상업적으로 이용하는 목적이 됐든 이용이 될 수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저는 영화가 이용이 되는 것이 문제가 된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영화는 어쨌든 누군가에게 이용될 수 있는 것이고, 그런 의미에서 그런 이용이라는 것이 누가, 어떤 목적을 가지고 하는가, 라는 것도 생각해 봐야한다는 입장이에요. 좀 전에 이수향 선생님이나 이지현 선생님 의견처럼, 어떤 의도를 가지고 이런 영화가 만들어졌는가 하는 점에서 봐야할 필요도 있다고 보고요. 저는 이 영화를 만들면서 돈을 벌 목적이 전혀 없었다고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돈을 벌 목적으로 이런 소재 영화를 만들었다는 게 더 새롭다고 생각했어요. 그렇기 때문에 저는 이 영화가 가지는 상업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별로 토를 달고 싶지 않은 부분이고요. 다른 관점에서 보면, 아까 이 영화가 상업적이다 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아이러니한 것이 굉장히 상업적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정재형 선생님께서 고전, 20년대 소비에트에서나 볼 수 있는 소셜리스트 영화의 문법을 따르고 있다는 지적을 하셨는데, 저도 이 영화에 그런 점이 있다고 봐요. 그런 의미에서 저는 이 영화가 충분히 상업적이 아니라는 생각을 했거든요. 다시 말해 이 영화가 따르고 있는 20년대 소비에트 영화의 문법들이  지금 2014년도에도 상업적인 요소인가, 너무 오래되어 상업성을 잃어버린 부분을 따르고 있는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드는 거죠.

<도가니>나 <변호사> 같은 영화와 비고해 보면 이야기 구조가 조금 틀려요. <도가니>는 정확히 선악의 이분법 캐릭터를 세우고, 관객이 영화를 보면서 공분을 일으키게 만들고, 물론 그 영화가 해피엔딩의 상업성을 갖고 있진 않지만, 영화를 보는 관객이 그 악의 캐릭터 에게 공분을 표현할 수 있도록 해주죠. 훨씬 더 현대적인 감각을 갖춘 전체적인 플롯의 구조도 있구요. 그러한 상업성을 갖추고 있는 반면, <변호인>도 그런 측면이 있는 반면에, 이 영화는 사실 상당히 순진한 상업성을 가지고 있어요, 상업성이라고 말한다면. 너무나 한물간, 특정 시기의 역사적 상황과 매우 깊이 연루된 고전 스타일의. 그래서 전 영화를 보면서 ‘아, 영화를 참 순진하게 만들었다’는 생각을 너무 많이 했고, 그런 의미에서 좀 덜 상업적이 된 것이 한편으로는 아쉬웠어요. 이걸 더 상업적으로, 돈을 벌 목적이었으면 더 상업적으로 했어야 되는 거 아닌가. 만약 상업성이 아닌 다른 특정한 목적이 있었더라도 대중화의 측면에서 그랬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렇기 때문에, 아까 이수향 선생님이 말씀하셨던 것처럼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이 그 목적이나 의도를 상업적인 것보다는 좀 다른 곳에 둔 것이 아닌가, 상업적 목적이 없진 않았겠지만, 상당한 고민을 하고 선택이 된 결과물이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영화가 좀 촌스럽죠. 촌스럽고, 눈물에 많이 호소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적인 감각을 잃어버린 상업성이라서, 과연 이 영화가 충분히 상업적이라고 비판할 수 있는 지점이 있는가 하는 의구심이 들어요. 오히려 영화적으로 비판을 받으려면 덜 상업적이고, 완성도가 떨어졌다는 점에 대해서 저는 지적을 가하고 싶습니다.

그랬더라면, 도경수라는 스타를 캐스팅하고도 겨우 백 만을 넘기는 결과는 아니지 않겠는가. <도가니>는 청불인데다 더 민감한 소재를 시각적으로 재현하고 있는데도 4~5백 만을 했는데, 이 영화가 그 정도가 안 된 이유는 이 영화가 가지고 있는, 어떻게 보면 순진함, 어떻게 보면 고민에 의한 선택, 이런 것들이 영화 속에 있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그래서 아쉬우면서도, 조금은 지지하게 만드는 영화이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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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형: 나는 사실은 굉장히 다른 생각을 갖고 있는데, 지금 그 상업오락영화라고 얘기할 때 상업성을 비판한다기보다는 오락성 자체에 대해서 방점을 두고 얘기하는 거거든요? 고거를 좀 헷갈리면 안 될 것 같고, 근데 제가 이 영화를 굉장히 비판적으로 보는 이유는 뭐냐면, 기본적으로 영화가 구조만 단순한 것이 아니라 굉장히 환영주의적인 문법미학을 갖고 있어요. 기본적으로 환영이라 함은 체제를 갖다가, 체제에 이 오락적 구조 안에서 관객에게 오락성을 심어주기 위해서 더 이상 본질을 탐구하지 않아요. 그 오락이란 것 속에서 환영을 주고 말거든요. 그래서 우리가 이제 브레히트 얘기를 할 수밖에 없는 거죠. 그리고 이것에 정 반대에 놓인 것이 무엇이냐면 정치적 모더니즘입니다. 예를 들면, 고다르라던가 브레히트의 이념이라든가. 다시 말하면 저는 그런 점에서 이 영화를 비판합니다. 왜냐하면 결국은 대한민국 영화가 지금 어떤 미학성에서 놀고 있냐면, 모든 상업을 만드는 건 좋아요, 그렇지만 오락이라는 것이 문제가 돼요. 이건 오히려 정치에 반대가 되는 겁니다. 이들은 <카트> 노동자들의 어떤 인권을 얘기하면서, 그 소재나 내용만 가지고 얘기하고 있지 전혀 형식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지 않아요. 다시 말해 현대화를 넘으면서, 영화의 가장 큰 문제는 뭐냐면 고전적 리얼리즘 텍스트가 규정되어야 된다는 겁니다. 다시 말하면 고다르가 왜 형식의 실험을 했느냐. 내용이 중요한 것이 아니거든요, 사실은. 내용 때문에 관객을 웃고 울리고 이 사회를 개선한다고 하는 거에서는 너무나 명백히 한계가 있다는 것을 깨달은 거예요. 영화는, 이 오락영화 가지고는 절대 사회를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저는 분명히 그것을 가져다 이 영화를 통해서, 지금 한국 영화를 통해서 보게 되는 데, 이 영화가 새로운 내용이 하나도 없어요, 사실은. 그러면 아까 다큐멘터리 얘기를 했지만, 다큐멘터리를 복구시키지 않습니까, 영화사가. 영화사는 자본주의 욕망을 갖고 있는 영화사지, 이 만든 영화사들이, <또 하나의 약속>이 됐든, <변호인>이 됐든, 어떤 영화사도 자본주의적인 욕망 외에는 운동적인 영화 동기를 갖고 있는 영화사가 단 한 곳도 없어요. 전부 돈을 벌고자 하는 욕망 외에는 없습니다. 그런데 소재는 굉장히 사회 정의와 개혁을 요구하잖아요. 이것이 굉장히 모순스럽다는 거죠. 그래서 형식을 변화시켜야 돼요. 관객의 마인드를 변화시킬 수 있어야 되는데, 관객에게는 비참한 그 노동자들의 현실을 가져다 보여주고, 그 자극적인 것을 통해서 눈물과 오락적 구조로만 치장할 뿐이에요. 이거는 정치에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고, 정치적인 인식을 후퇴시키는 겁니다.

김경묵 감독의 <이것이 우리의 끝이다>를 보세요. 그 영화는 똑같은 마트 노동자들의 애환을 그리지만 대단히 실험적인 방식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런 거나 마찬가지에요. 우리가 이북에, 북한의 카드 섹션이 굉장히 이념적이고, 현란하고, 굉장히 뛰어납니다. 사람들이 울고, 모든 것에 공감할 수 있어요. 그러나 그 노동자들의 삶, 거기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24시간, 예를 들면 거기에 갇혀서 훈련을 하면서 화장실도 못가고 방광염에 걸렸다는 얘기들을 취재한 어떤 기록들도 동시에 봤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이면의 진실이에요. 삶의 한 개인 개인 하나들이 갖고 있는 이면의 진실이에요. 이 영화가 카드 노동자들의 집단성과 현실에 대한 그런 어떤 이념적인 구호는 굉장히 일사분란 하지만, 개개인의 사생활에 대한 어떤 것들이 그 오락구조에서 자유롭습니까? 절대 자유롭지 않아요. 인간이 그렇게 일사분란 합니까, 현실에 대해서? 그렇지 않아요. 그들의 애환이 이 영화 속에는 녹아 있지 않아요. 하나의 단일한 어떤 이념, 메시지만을 위해서. 그런데 그 메시지가 뭐에 기여합니까? 사실은 사람들의 울분이나, 그런 어떤 공감대를 형성하기 위한 카타르시스, 환영에 맞춰져 있는 겁니다. 그거는 현실의 모습이 아니거든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그래서 그것은 노조에 대한 이론을 갖다가 어렸을 때부터 가르친다는 얘기하고는 전혀 별개의 문제예요. 그렇다면 다른 책도 있고, 모든 것이 있는데 왜 영화라는 매체를 가지고 꼭 그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합니까? 그런 어떤 절대성이라는 것은 없어요. 영화라는 매체가 가능한 것은, 노조의 교육을 어렸을 때부터 가르치는 매체 보다는, 돈을, 아주 단시간에 굉장히 많은 돈을 벌 수 있다는 자본주의적 욕망이 더 큰 장점입니다. 그래서 사실 영화를 더 선택하는 것이지 그 영화사가 과연 노조에 대한 각성을 하기 위해서 이것을 만들었을까요? 저는 절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런 부수적인 것 때문에 사실 이것의 전체를 본다고 한다는 것은 굉장히 큰 자가당착이거든요.

그런 의미에서 저는 폴리티컬 모더니즘이라는 것을 제안 하고, 한국 사회가, 왜 영화가 지금, 저는 그래서 분명히 이것에 대한 그 판단을 좀 유보하고 싶지만, 제가 갖고 있는 어떠한 그런 그 영화적 인식으로 보면 이거는 사실은 굉장히 문제가 많은 거죠. 어떤 의미에서 소재나 뻔 한 내용을 갖고, 이것을 가져다가 굉장히 대중적인 어떤 것을 통해서 한다는 것은, 제가 볼 때 오히려 그것은 사회를 개선시킨다기보다는 오히려 거꾸로 더 사람들을 탈정치화 시키면서, 오락구조 안에서 탈정치화 시키고, 그게 상업적인 이용이고요.

두 번째로는 정치가들이 이용하거든요, 결국은. 정치가들은 이러한 영화들이 바로 본인들이 정당 활동을 하는데 있어서의 가장 중요한, 특히 야권에서, 가장 중요하게 차용될 수 있는 거예요. 그래서 실제로 그런 현상이 나타나잖아요. 이런 영화들이 나타날 때마다 정치권에서 어떠한 반응을 보이는가, 그렇다면 왜 그런 것들을 무시합니까. 왜 우리는 굉장히 좋은 면으로만 이 영화를 해석합니까. 나는 사실 굉장히 심각한, 부작용이 있는 현상이라고 사실 생각을 합니다.


이수향: 네. 저는 정재형 선생님이 말씀하신 부분에 일정부분 동의를 하는 면도 있지만 반대하는 점도 있어요. 근데 저는 이게 이 영화의 제일 재밌는 점 같아요. 어떤 점이냐면 영화라는 매체나 문학이나 예술이라는 매체가 참 훌륭하고, 우리가 어떻게 손을 댈 수 없다는 생각이 드는 게, 우리가 A라는 의도를 가지고 A라고 느끼길 바라면서 만들죠. 근데 그게 뜻대로 잘 안 돼요. 이게 <변호인>을 만들면서 노대통령을 지지하는 몇 사람들에게 인기 있겠지라고 생각했던, 아니면 그것 때문에 사람들이 많이 싫어할 거라고 생각했던 그런 여러 가지 조건들이 사실은 하나도 해당이 안됐고, <명량>이 이렇게 될지 아무도 몰랐죠. 뭔가 이런 되게 복잡한, 그러니까 만들어진 이후부터는 창작자가 입할 수 없는 어떤 지점이 있다는 거예요. 예술, 특히 영화라는 것은. 이 영화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이 영화가 가진 어떤 것, 선의라면 선의, 노동자나 우리 사회의 비정규직 현실에 대한 냉정한 시선을 가지길 원하고, 어느 정도 공감대를 받기를 바라는 그런 뜻이 있었다. 그런데 이 영화를 보고 나오죠? 저도 이 영화를 봤어요. 영화를 보고 나면 어떤 생각이 드는가 하면, ‘아, 저렇게 파업하면 개인의 가정이 정말 저렇게 뿌리 채 흔들리는 구나.’ ‘얘들도 저렇게 못 챙기고, 저렇게 되다 정말 어린 자녀가 있는 부모들은 너무 이 파업 기간이 길어지면서 가정이 되게 흔들릴 수 있고, 개개인의 삶이 더 피폐하게 될 수 있고... 저럴 바에 애초에 파업 안하고 쟤는 조용히 물러난 거에 비해 뭐가 더 나았던가?’ 라는 생각을 더 하게 만든다는 거예요, 이 영화를 보면. 감상성으로 사람들을 움직이기 위해 만들었던 어떤 그런 장치들이 도리어 되게 우리에게는 ‘아, 저 파업이 얼마나 불가능한가, 저게 이뤄내기가 얼마나 힘든가’ 라는 그런 지점을 가지고 올 수도 있다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저는 이것에 대한 여러 가지 정치적 평가나 개인적인 호불호는 당연히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데, 영화라는 매체는 참 생각보다 우리의 의도와 비슷하게 맞물려서 돌아가지 않을 수 있다라는 생각이 들고, 정재형 선생님께서 지적하신 어떤 그런 의도를 가지고 만들었다면, 사실 어떤 형식적인 면에서의 진보를 전혀 이루지 않은 채 어떤 특정한 입장의 목소리를 강조하는 게 어떤 의미가 있나라는 그런 지적은 충분히 영화를 생각하는 입장에서 할 수 있는 그런 지적이지만, 의도가 꼭 그에 맞는 결과를 가져오지는 않는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네요.


이지현: 선생님이 말씀하신 <변호인>이나 고전적인, 그러니까 평범한 주인공이 나와서 다 이렇게 변하잖아요.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니까 딱 그러지 않았던 작품이 근래에 하나 있었어요. 이건 영화는 아니고. <개과천선>이라고 혹시 보셨어요?


정재형: 봤어요.


이지현: 좀 다르잖아요. 중간에서 또 외압이 들어왔죠. 그래서 작품을 그만하게 됐던.


정재형: 난 재미있게 봤었어요.


이지현: 저도 상당히 재미있게 봤었는데, 또 그래서 이런 형식이 되는 게 아닌가, 이런 생각.


정재형: <개과천선> 얘기를 잘하셨는데, <개과천선>이 일본의 <리갈 하이>라는 일본의 드라마를 한국판으로 만든 거예요. <리갈 하이>에서는 아주 나쁜 악덕 변호사가 끝까지 변화되지 않아요. 근데 그거를 똑같이 하기 뭐하니까 아마 우리는 2부인가 3부에서부터 갑자기 김영민이 갑자기 벽돌을 맞아서 과거를 완전히 잊어버린 그런 인간으로 되면서 착한 변호사가 돼버리죠. 근데 일본 것이 그런 의미에서 훨씬 더 리얼합니다. 형식은 물론 전혀 리얼리즘이 아닙니다. 완전히 황당무계한 얘기지만 끝까지 그런 악덕인 변호사가 재능이 많고, 굉장히 유능한데 굉장히 악에, 이 세상의 부조리 편에 서는 변호가가 끝까지 변하지 않으면서 결국은 아이러니하게도 이 사람이 이 사회의 어떤 정의로운 부분을 결국은 도와줄 수밖에 없는, 그런 상황이 된다는 설정이, 훨씬 한국의 <개과천선>보다 나아요, 어떤 의미에서. 그러나 지금 <개과천선>이야기를 하려고 하는 것은 아니니까, 예를 들면 그게 제가 말씀드린 취지예요.

아까 예로 든 김경묵 감독의 <이것이 우리의 끝이다>, 이런 걸 보면 거기는 이런 식의 선악의 이분법이 없어요. 다시 말하면 마트에서 노동자들이 절대 선하지 않아요. 똑같이 악한 사람도 있고요, 또 선한 사람도 있고요, 그것은 우리가 <거인>에서 봤듯이 그게 인생의 본질이라는 것을 명확한 출발선에서 보여 주죠. 근데 지금 이런 영화들은 그것에 대한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거예요. 마트 노동자들은 다 정의롭고, 더 선량하고, 다 피해자인 것처럼 그린단 말이죠. 그렇다면 어떻게 본질에 다가갈 수 있습니까? 바로 그런 거짓말을 통해서 돈을 버는 것에 또 충실해요. 돈을 벌지 않으려면 이 영화를 왜 만들었을까요, 이들은? 그런 점을 왜 간과하고 이 영화의 효과만을 갖고 생각합니까? 소위 대중성이라는 효과만. 많은 사람들이 봤다는 것만 갖고. 그게 오히려 적이 되겠죠. 단순함의 무지가, 나중에 오류가 생겨요. 노동법에 대해서 정확하게 알아야 되는데 노동법을 겉으로만 슬쩍 알아가지고 잘못된 부작용이 되면 그건, 약의 부작용은 나중에 어떻게 감당할 건가요? 정확하게 국민 한 사람 한 사람 계도시키고 계몽시켜야 하는데 그냥 무작위로 무수한 사람들에게 어떤 싸구려 약을 막 퍼트려가지고 굉장히 단순한 이분법 사회에서 살게끔 한다면 그 사람들이 나중에 다 이탈합니다. 사실을, 본질을 알았을 때 말이죠. 그래서 덕을 보는 것은 소수 정치권이에요. 어차피 또 정권을 바꿀 거니까. 그런 식으로 이용을 하고요, 영화가 프로파간다 기능을 하는 거죠, 그런 의미에서. 결국 이 영화는 프로파간다가 돼요. 실제로 <변호인>이 제야 세력에게 힘을 줬어요, 투표로 갈 것이고요. 그렇게 정권이 바뀔 수도 있는 거예요. 자, 그런 기능을 하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하지, 그것이 민주화에 대한 열망을 하는데 기능하지 않습니다, 사실은. 나중에 알고 보면. 민주화에 대한 그런 열망은 사람들이 기본적으로 갖고 있었던 것이지 그 영화를 보고 갑자기 계몽된 것이 아니에요. 그만큼 저는 이 영화를 통해서 인정할 수 있는 건 딱 하나. 우리 현실이 아직도 이렇게 바뀌지 않았다는 것에 대해서 저도 공분해요. 그런데 영화로 접근해야 하는 것은 좀 더 냉정하게, 미학적으로 접근해야 되는데 이런 고전적인 리얼리즘 텍스트로는 절대 안 됩니다. 그거는 이미 많은 지적이 됐던 것이다, 그래서 이런 환영 구조를 깨야 된다, 그래서 브레히트적 미학도 나오는 것이고. 차라리 김경묵 감독같이 굉장히 실험적으로, 원래 영화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재 정의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저는 생각 합니다. 영화라는 틀에서 벗어나고, 오히려 영화가 환영을 깨는 방식에서 얼마든지 대중에게 다가갈 수 있는 다양한 방식을 해야 되는데, 똑같은 우리 현실을 그렸으면서 전혀 다른 방식으로 했던 김경묵 감독의 실험적인 태도라든가, 이런 것들이 저는 오히려 우리 사회에서 필요한 영화적 활동이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이런 것들이 가치평가 된다는 것에 대단히 문제가 있고, 서글픈 현실이다. 왜냐? 영화라는 것은 분명히 어떤 욕망의 결산물인데 영화사는 자본주의 욕망이 작용하고 있다고 보고요. 이것을 정말 객관적으로, 본질적으로 이끄는 것은 평론가 집단이라고 생각합니다. 평론가의 욕망은 뭡니까? 평론가의 욕망은 자본의 욕망이 아니거든요. 평론가들은 영화를 사랑하고, 영화를 어떤 방식으로든지 본질적인 것들을 가져다 대중들과 접목시키기를 바라는 사람들이예요. 그런 욕망이 있다면 저는 이런 영화들은 굉장히 비판되어야 마땅하고, 그리고 그런 점에서 이런 것의 다양한 가치들을 오히려 제시해 주는 것이 맞다고 봅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이것이 우리의 끝이다>나 <거인>, 이런 영화들이 사실 대중화되기를 바랍니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대기업이라든가, 지금의 영화 제작자들이 갖고 있는 관행은 사실 전혀 반성 없이, 끝없이 자본주의 욕망을 계속 생산해 내는 그런 구조에 불과하다고 봐요. 그래서 관객들이, 혹은 사회가 개선되는 게 하나도 없다고 봅니다. 저는 단연코 그렇게 얘기할 수 있어요. 저는 이런 영화가 나왔기 때문에 노조 현실에 대해 더 많이 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영화 한편이 그렇게 바꾸지 못해요, 사실. 사회적 이슈는 만들어 낼 수 있다고 보지만. 차라리 그러면, 영화사가 그러한 책임이 있다면, 노동법과 이런 노동자들의 현실에 대한 어떤 그런 부분을 책자로 만들어서 백 만 명의 관객이 들었으면 백 만 명의 관객에게 나눠줘야 옳아요. 그 벌어들인 흥행에 상응하는 그러한 식의 홍보 캠페인을 하는 것이 옳아요. 그런 식으로 조직적인 사회 운동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저는 한계가 있다고 보는 거죠. 관객은 자기 마음대로 느낄 뿐이고, 사실은 그것은 시간이 지나면서 흩어지게 되는 것이고. 전혀 노동운동의 인식이 변하지 않아요. 왜? 자기가 체험으로 와 닿지 않는 것을 가져다 영화 한편 보고 어떻게 세계관이 바뀝니까? 말이 안 되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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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연: 영화 <카트>를 못 봐서 영화에 대한 말씀은 못 드리겠는데, 이미 <카트>의 문제를 넘어 선 것 같아서 잠깐만 좀 여쭤보려고 합니다. 지금 선생님 말씀에 대해 상당히 공감하는 부분도 있고, 좀 의문이 남는 부분도 있고, 그렇긴 한데. 질문은 뭐냐 하면 <송곳>에 대해서도 동일한 지적을 하시는 건지, <송곳>에 대해서는 좀 다른 생각을 가지고 계신 건지.


정재형: <송곳>도 비슷한 부분도 있고요, 좀 다른 부분도 있어요. 영화는 이제 너무 진부해서, 제가 굉장히 영화에 대해서는 분명히 말씀을 드리고 싶은데, 정말 너무 진부하다. 좀 벗어났으면 좋겠다, 영화는. 영화는 이렇게 가면 안 된다고 얘기하고 싶어요. 그런데 그런 미학적인 태도에 있어서는 비슷하게 보여요, <송곳>이. 굉장히 진부한 소재에다가 진부한 내용을 담고 있어요. 그런데 제가 영화와 만화는 좀 다르다고 생각 하거든요? 만화하면 굉장히, <사이비> 했을 때도 그런 말을 했었지만, 만화가 너무 아동용이다 라는 인식의 틀에 박혀있는데, 그것을 웹툰이 됐든 다른 어떤 만화가 됐든, 성인들의 이슈를 다루는 것으로 만화가 기능한다는 점에서 굉장히 환영하는 편이거든요. 그것이 노조의 문제든 뭐가 됐든 다루는 방식에 있어서 저는 거의 동일선상에 있다고 봐요. 저도 그러한 만화가 어떠한 본질을 제기하기 보다는 어떠한 하나의, 말하자면 지금 말씀드린 대로 굉장히 단순화된 논리, 그런데 미학적으로 영화하고는 질적인 차이가 있어요. 그런 환영구조 자체가 영화만큼 선동적이지 않아요, 사실은, 만화는. 만화는 그 칸 속에서 굉장히 많은 생각할 여유가 있고요, 이 두 시간 동안 짧은 집약적인 가운데에서 어떤 오락적인 환영 속에서 관객의 판단을 완벽하게 사로잡는 이런 영화적 양식이라는 것은 굉장히 질적으로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숨 쉬고 생각할 여유와 공간을 웹툰이 훨씬 많이 주죠. 그런 점에서 저는 굉장히 신선했던 것이 뭐냐 하면 과연 노조 얘기를 지금까지 어떤 만화가 했던가? 최초가 아닌가? 하는 이런 생각 때문에 너무나 좋게 봤죠. 너무 좋은 것이고.

근데 그에 비해서 제가 아까 말씀드린 대로 영화는 이미 엄청나게 많은 역사에서 정말 너무도 많이 이런 진보적인 영화를 만들어 왔어요. 그런데 그것을 가지고 관객들에게 지금 우리 사회를 설명한다고 하는 것은 저는 굉장히 문제가 있다. 결국은 관객을 오락화 시키는 태도는 하나도 변한 것이 없는데, 계속 소재만 바꿔가지고 80년대식의 투쟁적인 소재를 가지고 관객을 가져다 흥분시키면서 마치 곧 이 정권을 타도하고, 갑자기 노동자 천국을 만들어야 되는 것처럼, 그런 식의 급 선동적인 영화를 제시할 때 사람들이 그 아픔 때문에 울분을 토로하고, 눈물을 흘리고 박수를 칠지는 모르지만, 특히 그런 경험을 가진 노동자들이, 그들에게서 시작해서 일반적으로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까지 그런 공감대를 끌어낼지는 모르지만, 과연 그것이 실제로 사회를 변화하는 데 어떻게 연결이 되느냐. 저는 아니다, 전혀 연결되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좀 다르다고 생각하죠.


이수향: 저는 선생님 말씀, 기본적인 맥락을 정말 100%로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 중에 하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전혀 다른 의견 이예요. 저는 이 영화가 그러한 측면에 있어서 가지는 약점이 분명히 있는 건 너무나 다 알 수 있는 그런 점이지만, 개인 취향이지요. 여기서 취향이 갈리는 부분이라고 생각해요. 일어난 게 있고, 취향이 있고, 정치적이라든가 하는 여러 가지 입장에서 좀 갈리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하는 데

저는 상업적인 영화가 이런 방식을 택하지 않고 돈을 벌 수 있는 또 다른 방법이 많을 것 같은데 굳이 이런 방식을 택한다는 것에 대해서 저는 일정부분 개인적으로 좀 의미를 두고 싶고.

또 하나는 어떤 생각이 드냐면, 이 보도자료를 비롯하여 이 영화의 첫 장면부터 마지막 장면까지 굉장히 많은 수치를 나열해요. 지금 비정규직이 몇 만이고, 몇 퍼센트가 뭐고 어쩌고저쩌고 이런 얘기를 계속 강조하는데, 사실 이 영화는 영화적으로, 예술적으로 아주 훌륭한 영화는 아니에요. 그건 사실이라고 봅니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치를 나열하면서 까지 이 영화를 만들려고 했다면 그런 문제의식이 없다고 볼 수 없는…. 그러니까 영화라는 매체는 유난하죠. 유난히 “왜 자꾸, 그냥 웃고 넘어가는 영화면 되는데 왜 자꾸 사회적인 의식 넣고 영화를 거지같이 만들어 버리지?” 이렇게 저희가 비판을 해요. 하지만 그 감독들도 이해할 수 있는 거예요. 왜냐하면 영화라는 매체는 정말 현실하고 엄청나게 밀접하게 영향이 있고, 또 그걸 보여줘야지 정말 리얼리티가 살아 있으니까. 보여지는 배경과 화면, 색채, 사람들의 태도, 말투, 행동, 입는 옷, 지나가는 상점 간판 하나하나까지 모두 리얼리티가 살아 있어야 영화라는 매체가 우리 눈앞에 현시되는데, 막 너무 구름에 뜬 이야기만 할 수 없는 거예요.

그런 의미에서 이런 영화가 가능했다면 그 바탕에는 정말 진짜 현실이 뭐냐?라는 영화적인 고민이 있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된다는 거죠. 사실은, 우주 공간, 처녀 때로 돌아간 할머니, 이순신 장군, 감옥에 간 저능하지만 착한 아빠, 이런 얘기들이 환상적으로 재미있게 할 수 있는 부분이 있지만, 그 다른 편에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하고 살고 느끼는 것을 영화로 만들고 싶은 욕망도 가능할 수 있는 거죠. 요새 왜 애를 안 낳고, 요새 왜 불안하고, 고용이 어떻고, 이런 얘기가 사실 우리가 일상적으로 만나서 더 많이 하는 얘긴데 마냥 꿈에 젖은 얘기만 할 수가 없는 거죠. 그래서 사실 그냥 흥미위주의 영화에서도 이런 리얼리티적인 면이 들어가요. 그런데 그 부분을 재미로, 소재적인 차용에 그치느냐 아니면 전면적으로 이용하느냐, 이런 정도의 차이가 있는 거죠. 사실 저는 이 영화에서 그렇게까지 유치하고, 일차원적인 방식으로까지 영화적으로 표현할 수밖에 없었던 현실적인 문제가 분명히 있는데 그런 부분을 어떤 상업대중영화가 말해줄 수 있느냐 라고 생각했을 때 이런 영화도 있어야 된다고 생각을 하는 편이예요. 반드시 이런 영화도 있어야 된다고 생각을 해요. 저는 비슷하게 또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었냐하면 이 영화가 의미가 있다고 한다면 사실 그동안 여성과 나이 많은 사람들의 노조? 즉 중년 청소 노동자라든가 뭐 이런 얘긴 많이 했죠, 많이 했는데 그것을 좀 더 밑에까지 세대를 낮춰서 본 경우는 별로 없지 않았나 싶어요. 그냥 단순히 알바 하는 편의점 사장님한테 뺨 맞은 게 기분이 나쁜 게 아니고, 이러한 사회 구조적인 문제가 세대로 이어지고, 이것이 계속 반복될 수밖에 없다 라는, 그러니까 밑에서부터 계속 이러한 문제의식을 갖고 있어야 변화될 수 있는 어떤 의도에서 영화를 만든 거예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론적으로 말하면 이 영화가 원하는 의도가 정말 그대로 다 될까? 라고 생각했을 때, 저는 사실은 좀 의문 이예요. 이 영화가 그런, 좋은, 자기들이 원하는 방향과 입장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느끼는 사람은 천차만별이고, 그들의 의도가 성공했을 지는 잘 모르겠어요. 저 같은 경우에는 오히려 이 영화를 보면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저걸 보면서 ‘아, 저런 파업이 있으면 웬만하면 차라리 빠지는 게 속 편하겠구나’ 라는 생각을 더 먼저 하게 되지 않을까 라고 생각을 했거든요. 그래서 그들의 의도가 전달했는지 모르겠어요. 근데 저는 이런 다양한 시도 자체가, 뭐 그 자체로 너무 선동적이고 너무 입장만을 강조하고 있다라고 지적하는 것은 그다지 동의하지 않아요.


양경미: 제가 생각했던 것들을 정재형 교수님께서 말씀을 너무 잘 해주셔 들으면서 계속 공감을 하고 있었는데요, 제가 초반에도 말했지만 저예산 독립영화에서 볼 법한 소재를 썼단 말이죠. 그런데 근저에는 상업성이 깔려 있다는 거예요. 특히 감성을 자극하면서 울음을 유발시키려고 하는 노력이 그렇기 때문에 비정규직에 대한 현실적인 문제나 주인공의 캐릭터가 진정성이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고 그게 보기 불편했어요, 또한 그런 의도가 보기 싫었어요.


정재형: 진짜 싫었나보다. (웃음)


양경미: 사회적 문제를 영화로 이슈화 시키고 있지만 영화제작이 사회봉사를 하는게 아니라 그 이면에는 상업적 이윤을 달성하려는 목적이 있단 말이죠. 정말 비정규직의 문제, 노조의 실태를 파헤치려면 좀 더 현실감 있고 진정성 있게 풀어나갔어야죠, 영화를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선동의 수단으로 이용하는 게 싫다는 거죠, <카트>가 재미있게 볼 수 있는 영화임에는 맞지만 순수하고 순진하게 보이지는 않았어요.


성진수: 그러면 순진하다는 표현보다는 능력이 모자랐다는 표현이 좀 더 맞겠네요. 저는 이 영화가 전혀 프로파간다적 이라고 느끼질 않았던 이유가, 이 영화가 그런 의도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이 영화는 그러기에 너무나 모자라는 영화라는 의미가 굉장히 많았거든요. 이 영화는, 이수향 선생님이 아까 말씀 하셨지만, 이 영화를 보고 나서 사회적인 어떤 움직임이 전혀 일어 날 것 같지도 않았고요, 이 영화는 프로파간다 가기에는 정말 못 미치는 영화라고 저는 생각을 했어요.


양경미: 좀 전에 이지현 선생님이 이 영화를 보면서 “교육적이라고 했고, 프로파간다적이지 않다”라고 했는데요, 사실 정재형 선생님도 말씀하셨지만 저는 교육적이기보다는 프로파간다라는 생각이 들 수 있을 것 같아요, 먼저, 사실 노동자의 부당함과 처우에 대해 노조의 움직임이 마땅하긴 하지만, 한편 정규직의 노조의 힘이 지나치게 거대해져서 정규직의 인건비가 상승했고 그에 따라 비정규직이 발생하게 된거고 그로인해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임금격차가 심해진 측면도 전혀 없진 않잖아요. 이 문제를 다루기 위해서는 비정규직 및 계약직, 비정규직의 파업과 노조만을 다룰 것이 아니라 다양한 각도로 노조를 다뤘어야죠. 한쪽 입장에서 너무 정치적으로 몰고 가는 건 위험한 시각이죠.


이수향: 이게 너무 정치적인 그런 게 될 수 있어요. 그렇게 얘기하면 안 되지 않을까요, 이 영화 얘기를 해야지.


양경미: 마치, 부당함에 대한 파업과 노조는 정당한 것이고 내 권리를 지키기 위해서는 그런 행동이 당위라고 생각을 하게 된다는 거죠.


성진수: 그게 제가 볼 때는 그렇지 않다는 거예요. 그렇게만 생각할 사람이 다가 아니라는 거예요. 이 영화를 보면 여기 노조에 가담한 사람 치고 행복한 사람이 누가 있어요. 애는 다치고, 연대를 한다고 서로 눈물겹게 밤을 새가면서 노력 했지만 결국 다 부서지고. 그래서 이 영화가 프로파간다가 되려면, 저는 솔직히 이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아, 이 영화 만든 사람은 에이젠쉬타인 영화를 다시 봐야 되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프로파간다는 그 정도는 되어야 프로파간다인데 이 영화는 오히려 굉장히...


양경미: 그러니까 상업오락적인 틀 안에 물타기를 했다는 거죠...


성진수: 그런 점이 없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그런 부분도 분명히 있지만, 그런 의미에서 저는, 제가 아까 말씀드린 순진하다는 말을 거둬들이고 오히려 모자랐다는 말을 넣고 싶단 거죠. 상업적으로도 못 미쳤고, 프로파간다적으로도 못 미쳤고.

아까 말씀하신 것처럼, 영화가 형식적인 면에서 조금 더 현실을 파악하기 위해서 환영을 일으키는 것이 아닌, 모더니즘적인 양식으로 더 치열하게 나아가야 하는 부분이 있어야 한다는 것도 동의해요. 그렇지만 아까 이수향 선생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이 영화가 그런 의미에서 정재형 선생님이 말씀하신 맥락에서 비판받아야 될 지점은 맞지만...


양경미: 그렇기 때문에 상업적으로는 좀 떨어질 수가 있어요.


성진수: 만약 이 영화가 상업적이 목적으로 환영을 만드는데 불과한 영화라고 한다면, 저는 그런 영화로서 이 영화가 실패작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결과를 점칠 순 없지만, 100만 이상의 스코어는 나오기 어려울 것 같고, 벌써 극장에서 거의 내렸거든요.


이수향: 아까 체크한 게 66만...


양경미: 단순하게 수치로만 이야기 할 수 없죠, 스크린으로 밀어붙이고 있는 다른 영화 <인터스텔라>가 걸려 있잖아요.


성진수: 다른 영화들과 경쟁에서 밀릴 수밖에 없는 이유는 관객들이 안 본다는 거예요. 이 영화의 이런 낡아 빠진 수법은 안 본다는 거예요.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는 예술적으로도 성공하지 못했고, 상업적으로도 성공하지 못한, 약간 의미만 있는 영화......


정재형: 제가 폴리티컬 모더니즘 얘기를 하면서 할리우드의 <노마 레이>로 시작해가지고, 노조원들이 승리하는 이런 뻔 한 승리영화, 현실에서 압박받는, 고통 받는 사람들의 처지에 공감했기 때문에 관객들이 오로지 울고 박수치면서 보는 이런 식의 영화가 나는 이제 종식되어야 한다는 얘기를 하는 거거든요. 근데 그것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나는 사실 이 영화를 미학적으로 다시 재단을 한다면 쿨하게 만들었어야죠. 쿨하게. 그래서 염정아를 쓰면 안 되죠. 왜 이렇게 예쁩니까, 주인공이? 이것이 할리우드 미학에서 하나도 벗어난 게 없어요. 하나도 벗어난 게 없으면서 단지 우리의 노조의 문제만 얘기하고 있는 것 뿐이에요. 그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아픈, 슬픈 눈물만 사실 이용했고, 염정아 쓰는 것부터 시작해서 하나도 개선된 게 없어요, 형식적으로 쿨하게, 굉장히 다큐적으로. 아까 이수향씬가요?


이수향: 이 영화 쿨하지 않아요?


정재형: 전혀 쿨하지 않죠. 왜냐하면 그 포맷 자체가 낡은 형식이라는 거죠. 제가 말씀드렸지만, 그 소셜리스트 리얼리즘의 형식에서 하나도 벗어난 게 아니 예요. 그러면서 환영주의적인, 관객을 동일시시키기 위해서 예쁜 여자를 주인공으로. 예쁘지 않았으면 절대로 공감 안합니다, 이 내용이 어떻다 하더라도. 그러니까 사실은 송강호가 주인공을 하는 것은 굉장히 진일보 했다고 보여져요. 전혀 매력적이지 않은 남자가 영화 속에서 그런 것들은 할리우드하고는 굉장히 상반된...


이수향: 이건 여담인데, 모 선생님은 이 영화 주인공을 염정아 썼잖아요. 아, 저렇게 안 예쁘고, 이상하고 마른 여자 썼다고 막 그러던데…(웃음). 그러니까 시각차이지 그거는.


정재형: 그래요? 그 선생은 눈이 너무 높고...


이수향: 송강호 저는 되게 좋던데, 잘생기고...

2014-11-24 22.39.20

정재형: 눈이 너무 높고, 사실은 미스코리아 출신을 그렇게 얘기하는 사람은 굉장히 눈이 높은 거죠. (웃음) 그래서 저는 거기에 동의하기는 어렵고, 사실 쿨하게 가야 된다는 것은 뭐냐면 환영구조를 깨서, 사실 쿨하게 간다는 것는 좀 다큐드라마처럼 드라마를 갔으면 훨씬 더 관객들이 리얼하게 느꼈을 거예요. 이것은 아주 오락적인 형태로 갔다는 것은 배우나 드라마를 끌고 나가는 형식 구조라든지 이런 것 자체가 전혀 개선한 게 없거든요, 사실은. 이 시대에 맞는 그러한 실험적인 요소를 가진 게 하나도 없거든요. 그런 의미에서 저는 사실 한국의 상업오락영화, 상업성과 오락성을 뗄 수 없지만, 그 상업성을 추구한다 하더라도 그 오락구조가 너무 지나치기 때문에 지금 아주 극단적인, 이분법적인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고 봐요. 그런데 사람들은 착각하고 있는 것은 뭐냐면 관객들이 마치 한국영화가 굉장히 좋아진 것처럼 착각하는 것은 현실의 숨겨진 소재들, 굉장히 파격적인 소재들을 많이 하다 보니까 정치권에도 일정부분 자극을 주고, 사람들이 사회가 굉장히 진보화되는 것과 같은 착각을 하는 거예요. 바로 그런 착각에 기여하는 것이지 전혀 진보하고 있지 않아요, 사회가. 저는 그런 의미에서 영화가 선동성만 조금 갖고 있는 것 뿐이라고 봐요, 책임지지 않는 선동성. 소비에트 사회 때는 그걸 정부가 책임졌죠. 근데 일개 영화제작사가 책임지지도 않으면서 선동성을 뿌리는 거예요. 관객들은 그래서 사회가 굉장히 다양하게 변화되는 것으로 생각해요. 저는 그런 의미에서는 <다이빙 벨>을 더 좋게 생각해요. <천안함 프로젝트>나. 왜냐? 그건 소재가 아니라 다른 시각을 보여주는 거예요. 그건 다큐멘터리로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거예요. 다큐멘터리가 바로 그런 걸 하라고 존재하는 양식 이예요. 그런 의미에서 저는 그런 것들이 훨씬 진보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정부가 그걸 탄압한다는 거에 대해서 저도 그렇다면 그런 거는 탄압하지 않아야 한다, 이런 태도를 갖고 있는거죠. 그러나 <카트>나 <변호인>, <또 하나의 약속>을 만든 것에 대해서 그것을 가져다 적극 지지할 수 있느냐? 저는 절대 지지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람들을 대단히 탈정치화 시키는 것이거든요. 그런 점에서 저는 명확히 구별을 하고 싶다는 겁니다. 양식에 대한 실험이라는 거는 굉장히 중요해요. 앞서도 언급했지만, 똑같은 현실을 다룬 그러한 상업영화가 있어요. 그게 김경묵 감독의 <이것이 우리의 끝이다>같은 영화예요. 그런 저예산 독립영화들이 많이 항진하고 있는데 그런 부분에 대해서는 대 제작사나 대 배급사들이 전혀 눈길을 주지 않잖아요. 그러면서 이런 소재를 하는 이유는 뭡니까? 명백한 거죠. 관객을 가져다 그럴 듯한 선동으로 사실은 돈을...... 정말 순진한 관객들이죠. 정의에 목말라 하는, 그리고 그 아픈, 슬픈 현실에 분노하고, 흥분하는 많은 선량한 관객들의 돈을 긁어내기 위해서 하는 거지, 전혀 사회 진보에 기여하지 않는다. 저는 이렇게 단적으로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이수향: 관객이 지금 안 순진한 거예요. 이 영화를 안 보잖아요, 지금. (웃음)


정재형: 개인적인 견해이긴 하지만 저는 분명하게 그렇게 한국영화를 보고 있습니다. 근데 이게 안 된다는 거는 왜 안 되는지 잘 모르겠네요.


민병선: 상업적인 거는 저는 좀 다른 견해가 있고요. 상업적인 거는 이게 지금 우리 한국에 독점하고 있는 배급사들과는, 거기의 배급을 타는 게 아니기 때문에, 신생배급사에서 지금 극장들의 문을 많이 열지를 못하고, 소위 지금 어떻게 보면 왕따시킨다고 할까? 그래서 영화를 보려 해도 볼 수는 측면들이 있기 때문에, 상업적인 면으로 이 영화를 판단할 수는 없을 것 같고요. 그런데 이제 영화에, 아까 성진수 선생님도 그런 얘기를 하셨는데, 저도 이 영화는 감독에 문제가 있는 것 같아요. 저는 이런 영화들이 솔직히 개인적으로는 자꾸 나와야 한다고 생각하는 측면이 있는데, 문제는 잘 만들어야 되잖아요. 잘 만들어야 되는데 어설프게 만들면 이런 논란이 나올 수 있다는 거거든요.


정재형: 그래, 잘 만들면 돼.


민병선: 제가 아쉬운 면이 뭐냐면, 견해를 좀 달리해서 보자면, 이게 개별적인 문제가 아니라 한국 사회의 보편적인 문제로 확대해석 할 수 있고, 나아갈 수 있는 방향으로 영화의 방향이 좀 잡혔어야 하는데, <카트>만의 문제는 아니잖아요? <카트>의 수십 명, 수백 명의 문제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뭐 예를 들어 법이 바뀌어가지고 경비노동자 4만 명이 해고의 위기에 놓여 있고, 또 지금 학교 급식을 하시는 분들이 파업을 하고 있고, 학교 청소노동자라든지, 지금 이게 보편적인 문제로 가야되는 측면이 있는데.


이대연: 참고로 말씀드리자면 MB정권 때부터 정부 노조들의 대부분이 다 깨졌어요, 이제. 그 몇 년 동안에.


민병선: 그래서 그런 영화이기 때문에 우리가 지금 선전운동,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영화라는 예술이라는 범위 안에서, 이런 것들이 좀 더 사람들한테 다가가기 위해서는 보편성을 좀 더 많이 찾아갔어야 되는데, 하나의 <카트>의 시위의 문제, 홈에버 만의 문제가 아니라 전체 사회적인 모순과 이런 갈등과 이런 것들이 어떻게 일어나는 지에 대해서 좀 더 깊이 있는 통찰이 있었으면 이런 문제가 좀 덜하지 않았을까. 저는 그런 생각을 합니다.


정재형: 맞아요. 나 잠깐만 1분만 할게요. 지금 굉장히 중요한 말씀을 하셨는데, 저는 이게 좀 쿨하게 가야된다. 그런 시각에서, 그런 다큐드라마나, 또 염정아같은 캐릭터가 아니라 정말 평범한 사람을 세워야 더 평범하고. 그래서 이게 고다르가 <비브르 사비>라는 영화에서 이미 보여줬죠. 어떤 창녀를 그리면서 아주 쿨하게, 담담하게 갔단 말이죠. 근데 그런 식의 형식의 실험이 굉장히 필요하고요, 그리고 지금 말씀하신 것이 굉장히 중요한 건데 우리는 포커싱을 스페셜하게, 아주 국부적인 것을 잡고 있는 거잖아요? 근데 그것이 바로 함정이죠. 사실은 이들에 대한 문제는 사회 전체에 대한 문제예요. 이들이 왜 이런 상황에 놓이게 됐는가, 그 자본가들은 이들을 궁지에 몰고 대량해고 할 수밖에 없는가? 그런 것들을 아주 잘 해야 되는데, 제가 <또 하나의 약속>을 할 때도 그때도 평을 그렇게 썼는데, 너무 선악이분, 서부극같이 그렸거든요, 삼성은 악덕 기업주처럼 그리고, 노동자들, 말하자면 거기의 피해자들은 상당히 정의롭고 말이죠, 보완관들, 다 선량한. 이런 선악이분법적인 그러한 할리우드 구조를 그대로 갖고 가는 거예요. 그러면서 결국은 악당을 물리치는 거죠. 삼성을, 악당을 물리치는 거예요. 지금도 이것이 과연 여기에 묘사된 기업주라든가, 거기 나온 사람들의 묘사를 보십시오. 얼마나 천편일률적으로 막 뒤틀려있고, 막 악당이라는 게 얼굴에 써 있고. 그리고 노동자들은 참 선량하고, 굉장히 인간적으로 묘사되어 있고. 이런 식의 이분법을 가지고 환상을 만들어 내잖아요. 우리가 <거인>에서 봤듯이 한국 사회를 전혀 다르게 보고 있잖아요? <거인>이라는 사회에서는 아주 부도덕한, 50년대에 등장 할 법한, 절망적인 생존을 위해서는 아이까지 팔아먹고, 자기 아내까지도 팔고, 남편까지 팔고, 친구도 고발하고, 이럴 정도의 냉혈안적인 인간에게 동정을 하는 영화가 존재하는 반면에, 이게 한국이다 라고 얘기하는 반면에, 여기서는 완전히 선악이분법이 있어서 경영자는, 사용주는 완전히 악당들이고, 그리고 거기서 대량 해고된 사람들은 굉장히 선량하다, 이렇게 밖에 보지 못하는 거예요, 여전히. 이것은 1920년대 소셜리스트 리얼리즘이 갖고 있던 교훈에서 한발 짝도 물러나지 않고 있어요. 그러면서 이 사회를 개혁하겠다 라는, 그 많은 사람들의 열망, 관객들의 열망을 오히려 왜곡시키는 거죠, 단순화 시키고. 그러니까 그런 의미에서 완전히 역설적으로 ‘참 허망한 영화야’ 이렇게 얘기하면 할 말이 없어요. 그런데 이 영화가 조금이라도 진지함을 갖고 있다면 저는 굉장히 착각이라고 생각하는 거죠. 상업영화는 왜 꼭 왜곡되어야 합니까? 저는 그것에 대해서 반대해요. 왜 그렇게 자조적으로 얘기를 해야 됩니까? ‘상업영화니까.’ 왜 이렇게 얘기해야 됩니까, 마지막에는. 그렇지 않죠. 상업영화의 수준이 달라요. 상업영화의 수준이 여러 차원이 있어요. 이건 굉장히 낮은 단계에 있다고 보는 거죠. 굉장히 단순한 이분법적인 구도 하에 놓여 있어서 지금 민병선 선생님이 얘기하는 사회 전체 구조를 보지 못하게 만들어요, 이 영화는. 딱 요 사람들의 대립된 요걸로 단순화시키고, 거기서 마치 서부극 같은 구조를 통해서 어떤 약자에게 동정심을 갖게 만들면서 우리 사회가 그렇게 가길 바라는 딱 고선에서 끝나요. 이 사회의 굉장히 복잡한 역학관계에 대한 이해를 하지 않게 만들죠. 그렇다면 이 영화는 굉장히 역기능을 하는 거죠. 나쁜 기능을 하는 거예요. 우리사회를 굉장히 꿈의 사회로 파악하게 하는 거거든요, 살기 힘든데. 그 입장에 동조하는 것도 아니 예요, 제작자는. 저는 굉장히 비판받아야 마땅하다 라고 보는데,  정말 돈이라는 것을 통해서 자본주의라는 것의 가장 나쁜 면, 자본주의는 그냥 돈만 벌면 된다, 이런 나쁜 면을 추구하는 가장 전형적인 예죠, 지금 한국영화가 가고 있는 상황이. 저는 그런 점에서 굉장히 싫어하는 거거든요. 어떤 의식이나, 표면적인 주제 구호만 가지고 볼 것이 아니라 이 영화가 작동하는 그런 미학적인 구조나, 이런 걸 봤을 때 민병선 선생님이 얘기한 대로 전체를 보지 못하게 하는 굉장히 큰 문제가 있는 거죠. 그래서 당연히 알레고리 구조로 가야 되고요, 모든 영화는. 그래서 사회 전체를 보게 해야 되고요. 그런 점에서 <거인>은 대단히 대척점에 있는 영화예요, 사실은. 저는 그런 태도로 상업오락영화도 가야된다, 그런 측면에서 저는 대단히 비판하는 입장입니다. 얘기 잘하셨어.


민병선: (웃음) 오늘의 합평회, <거인> 대 <카트>를 여기서 끝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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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자관리자

등록일2014-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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