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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합평회

합평회 후기 - 군도 and 명량 (and 해적)

합평회 후기 - 군도 and 명량 (and 해적) -

 

<군도>와 <명량>, 그리고 <해적>까지, 열흘 동안 그토록 기다렸던 세 편의 한국 블록버스터 시사회를 모두 마스터하고 합평회에 참석했다. 우선, 이 영화들을 보기 전에 필자가 마음 속으로 다짐하고 또 다짐했던 것들이 있다. 철저히 상업주의적 관점에서 관람해야 한다는 것. 취향대로 영화를 읽지 말 것. 작가성이나 완성도에 있어서 큰 기대를 하지 말 것. 이들이 대중적 코드를 얼마나 잘 살리고 있는지에 집중하고, 그것의 성패를 판단할 것. 평론가가 제정신이냐고? 뭐, 내가 이성적인 인간이었다면 21세기에 영화평론을 업으로 하고 있을까 싶다. 하지만 남의 돈 150억으로 영화를 만드는 감독들이 본전을 생각하지 않았다면, 제작자가 그런 감독을 그냥 놔두었다면 그들 또한 제정신은 아닐 것이다. 필자는 모든 영화에는 ‘목적’이 있다고 생각한다. 블록버스터의 목표는 일차적으로 돈을 벌어들이는데 있다. 작가적 스타일을 보여주거나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은 부차적인 것이다. 물론 두 마리의 토끼를 다 잡을 수만 있다면, 그리고 그 신의 저울에 균형을 맞출 수만 있다면 그 영화는 걸작이 되고, 감독은 단번에 명장이 될 것이다. 그러나 처음부터 그런 것을 기대하지는 말자는 것이 제정신 아닌 평론가의 자세였다.

이런 다짐의 결과, 세 작품에 대한 나의 평가는 동일하게 대략 ‘성공’이었다. 컨텍스트적 맥락에서 더욱 긍정적으로 생각했던 점은 이들이 지향하고 있는 대중적 코드가 완전히 다르다는 것이었다. 비슷한 시기에 개봉하고 스타와 거대자본이 투입되었다는 점에서 너무 비슷한 색깔을 보여주지는 않을까 하는 우려를 불식시킨 것이다. 또한, 다양한 입맛을 가진 관객들에게 각기 다른 매력으로 어필한다는 것은 문화컨텐츠 측면에서도 긍정적인 면이 많다. 상반기 주목했던 한국영화들이 줄줄이 실망스런 모습을 보인 탓에 상대적으로 세 작품이 훌륭해 보였던 연유도 있었겠지만, 필자는 일찌감치 이들 작품들에 대해 모자라고 아쉬웠던 점을 부각시키기 보다는 각 영화에서 집중해야 할 관람의 포인트를 잡아보는 것으로 방향을 정했다.

그러나 이런 마음가짐으로 참여했던 합평회는 언제나 그랬듯 역시 필자가 예상하지 못했던 방향으로 흘러갔는데, 다들 한국영화가 잘 되길 바라고 평균 이상의 작품이라는 데에는 동의하면서도 부족한 점들이 먼저 지적되면서 염려와 다소간의 실망을 떨쳐내지 못하는 분위기였다. 그래서 필자는 본격 평론 보다는 그 날, 그 곳에서 나왔던 여러 논쟁점들과 그에 대한 생각들을 정리해 보기로 했다.

그러므로 아래 내용은 평론이 아닌, 합평회 후기의 성격을 띠고 있음을 밝혀둔다.

 

 

<군도:민란의 시대>는 많은 평자들이 지적했던 대로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웨스턴의 구조를 따르고 있는 작품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합평회에서 필자의 앞에 발표하셨던 여러 회원님들의 이야기에 크게 가감할 것이 없다. 다만, 의외였던 것은 ‘지리산 웨스턴’(명쾌한 용어다)으로서 여러 작품들의 패스티쉬로 점철된 이 영화가 시네필에게는 환호를 받을 수 있으나 일반관객들에게는 ‘잘 모르겠다’는 반응을 얻을 수 있다는 평가였다. 정말 그러한가? 물론 현재 20-30대 관객들에게 웨스턴이라는 장르는 생소할 수 있지만, 기본적으로 선악의 대립관계와 뚜렷한 캐릭터를 기본으로 한 이 영화가 전반적으로 ‘어렵다’고 느껴지지는 않을 것 같다. 아는 만큼 보이는 패스티쉬의 성격 때문에 재미가 반감될 수는 있겠지만, 이 영화를 전체적으로 조망하는데 있어 큰 단점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두 번째 논쟁점은 역시 ‘강동원’의 캐릭터 문제이다. 악역을 입체적으로 만들고 그의 미모를 부각시키다 보니 하정우의 구멍 많은 캐릭터와 발란스가 맞지 않았다는 점, 그 결과 관객들이 누구에게 감정을 이입해야 할지 길을 잃게 만든다는 점 등이 화두가 되었다. 강동원이 뜬금없이 머리를 풀어헤치는 모습은 심지어 ‘산발’로 표현되기도 했다(물론 남성 회원에게). 윤종빈은 왜 하정우를 버렸을까. 그의 전작들을 보았던 관객들이라면 ‘배신’으로 밖에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윤종빈의 영화를 좋아했던 평자들에게는 하정우 뿐 아니라 윤종빈도 보이지 않는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는 하정우를 버리면서 자신의 스타일도 버리기로 한 걸까?

여기에 대해서 필자는 상당부분 동의하면서도, 윤종빈 감독의 편에 서서 이 영화가 150억 이상이 들어간 블록버스터라는 점을 상기시켰다. (매체마다 제작비 표기가 달라서 정확하게는 알 수 없다. <명량>보다 10억 정도 더 투입되었다는 기사도 있었기 때문에 당일 인용했는데, 역시 정확치 않다.) 대중성에 대한 압박이 날로 가중되는 가운데, 감독 역시 이 영화가 이전만큼 자기주도적으로 만들어질 수는 없으리라는 것을 간파했을 것이고 그렇다면 그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그 대중성을 극대화시켜서 기대에 부응하고 상업영화 감독으로서의 재능을 보여주는 것이었으리라. 명백하게도 강동원 카드는 그러한 윤종빈의 시도 중 가장 확실하게 제작자들을 만족시켰을 만한 부분이다.

하정우와의 발란스가 맞지 않았다는 점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 모두가 이 영화를 ‘강동원을 위한, 강동원에 의한’ 영화로 말하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그것은 대부분 캐릭터 부각 측면에서의 평가이다. 배우의 무게감으로 본다면 하정우의 연기나 카리스마가 부족하지 않다. 기자 시사회에서 하정우의 등장은 곧 웃음과 기대를 유발했다. 그만큼 하정우는 이미 배우로서 스크린과 객석을 장악하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 그러나 스타가 아닌 배우로서 강동원의 입지는 그에 못 미치는 게 사실이다. 영화가 만들어준 멋진 악역 강동원의 캐릭터는 그런 의미에서 배우 하정우와 균형을 맞춘다. 과유불급, 그 정도가 넘쳤다면 연출의 무리수를 노출한 것이겠지만 속내에는 그런 계산법이 있었을 것이다.

덧붙여 필자가 이 영화에서 전반적으로 느꼈던 냉소의 분위기는 윤종빈이 이 오락 영화에 남겨놓은 체취로 보인다. 의적과 민란을 소재로 하고 있음에도 한 순간도 뜨겁지 않으려고 노력한 흔적들, 그것은 탐관오리에 대한 민초들의 심판이 즐겁기는 하되 통쾌하거나 감동적이지는 않았던 결과로 나타난다. 내레이션은 웃음을 주면서도 몰입을 차단하고 패스티쉬는 자꾸만 관련 텍스트들의 연상작용을 일으킨다. 주제 의식의 빈약함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마치, ‘이것은 오락영화일 뿐이야. 엄청난 메시지 같은 것은 기대하지 마’. 라고 외치는 것처럼. 이 부분이 <군도:민란의 시대>를 평가하는 필자의 핵심이다. <용서받지 못한 자>나 <범죄와의 전쟁>을 만들었던 윤종빈은 없지만, 그냥 뛰어난 영화감독 윤종빈으로서의 재능은 보이는 작품이라는 것.

 

 

<명량: 회오리 바다>에 대한 합평회의 반응에서 놀랐던 부분은 1차적으로 여성들의 평가가 남성들의 평가보다 좋았다는 것이다. 남성 평론가들 역시 ‘전체적으로는 좋았다’는 말을 덧붙였고, 대체적으로 <군도>보다는 <명량>의 흥행우위를 예측했으나 해상전투 부분에서 이순신의 전술이 없다는 점, 그리고 리얼리티의 문제성과 CG의 미흡함, 작위성 등을 간과할 수 없는 단점으로 꼽았다. 필자가 가장 먼저 놀랐던 부분은 역사 고증에 있어 리얼리티가 떨어진다는 지적이었다. (궁금한 분들은 녹음 파일을 참고하시라.) 이것은 무기에 대해 전혀 지식이 없는 필자에게 조금은 충격적이었다. 여전히 의문은 든다. 제작진들이 그런 지식도 고증도 없이 이 영화를 만들었을까. 아니면 알면서도 이것은 영화니까 모든 객관적 정보들을 다 적용시킬 필요는 없다는 결론을 내렸을까. 대부분의 관객들은 필자만큼 무기의 성격과 기능에 대해 모르기를 바라면서? SF영화를 기준으로 한다면 후자의 경우라 해도 큰 문제점으로 볼 수는 없지만, 이렇게 진중한 사극에서라면 ‘알 만한 사람들’의 몰입을 방해할 뿐 아니라 충분히 구설수에 오를 수 있다. 더욱이 이것은 영화의 전체적인 흐름이나 완성도와는 동떨어진 논쟁으로 번질 가능성이 높다. 어쨌든 이 부분은 필자가 좀 더 공부해야 하고, 나아가 무지에 대해 반성해야 할 부분이라는 생각이다.

이순신의 전술이 없다는 비판에 대해서는 조금 생각이 다른데, 필자가 이 영화에서 가장 기대했던 부분이 12척의 배로 330척의 배를 격파한 전술을 어떻게 보여주느냐 하는 것이었고, 여기에 대해서 어느 정도 만족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보자면 이순신은 다른 장수들과 소통하는 리더는 아니었지만, 뭔가 기존의 전투와는 다른 방식으로 자신의 전투를 이끌어나가고 있다. 그가 내리는 명령들의 맥락을 일반 관객들이 다 알 수 있을 만큼 친절하지는 않으나 그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지는 후에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합평회에서 이순신이 썼던 백병전은 주로 일본군의 전술이었고, 때문에 백병전으로 갔을 때 일본군에게 이긴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지적이 있었다. 그렇다면 이것 또한 고증이 잘못된 것이었을까? 아니면 실제 역사야 어떻든 드라마를 위한 설정이었을까? 이것이 해전의 전술을 잘 아는 사람들에게는 또 하나의 가시가 되어 영화에 몰입을 방해할지는 모르겠지만, 필자는 이순신의 승리가 정말 역사적 사실이었다면, 그 점을 인정한다면 드라마는 역사가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12척의 배로 330척의 왜군을 물리쳤다는 막장 드라마. 그것이 백병전에 강한 일본군들을 몸으로 물리치는 기적이 일어났기 때문인지, 다른 전술이 있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그것은 이성적이고 논리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역사는 아니었기에 영화에서 바로 그 부분을 정확히 재현해주길 바라는 것은 무리가 아닐까.

한 가지 더, 필자는 이 영화가 구조적으로 전반부에는 이순신의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주고, 후반부 해전에서는 영웅으로서의 면모를 보여준다고 언급한 바 있다. 이에 대해 이순신의 인간적인 면모는 잘 살아있다고 보지 않는다는 반론이 있었는데, 아마도 ‘인간적인 면’을 무엇으로 보느냐, 혹은 중심을 어디에 놓느냐에 따른 오해였던 것 같다. 필자가 이 영화에서 본 이순신의 인간적인 면은 그의 인생과 명량 해전으로의 출정까지가 너무나 힘겨웠다는 부분으로부터 시작된다. 다 알고 있는 사실임에도 이순신이 그가 죽자고 섬겼던 왕에게 고문당하는 장면을 보여주며 영화를 시작하는 점도 그런 의도였을 것이다. 또한, 병약해진 모습으로 어떤 명령도 내리지 못하는 회의 장면이나, 꿈에서 죽은 장수들의 모습을 보며 가슴 아파 하는 것도 후반부의 강인한 장군과 대비되는 인간적인 모습이다. 이런 이순신조차 너무 완벽해서 신격화되어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면 ‘인간적’이란 용어가 가진 주관적인 스펙트럼 때문일 것이다.

정.말. 위험한 예측이지만 <군도>보다 <명량>이 더 많은 관객에게 어필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이유는 명확하다. 이순신의 인기와 드라마 ‘정도전’으로 확인한 정통 사극에 대한 향수, 그리고 50-60대 관객들의 호기심과 취향 등. 아직은 이런 요인들이 <명량>의 드러난 허점들을 막아줄 지 미지수다. 그러나 관객들이 <명량>에서 기대하는 것이 영화의 완성도 보다 이순신 그 자체라는 점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해적: 바다로 간 산적>은 합평회의 대상 텍스트가 아니었기 때문에 합평회 이후, 이 영화에 대해 들었던 생각을 간단히 언급하고자 한다. 개인적으로 <해적>은 16부작 정도의 드라마로 만들었다면 훨씬 반응이 좋았을 작품이다. 그 많은 이야기와 캐릭터들을 집어넣기에 130분의 러닝타임은 너무 짧았고, 날아갈 듯 가벼운 유머는 스크린의 무게에 걸맞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를 보고 난 직후에는 <해적>이 전반적으로 괜찮다고 생각했다. <캐리비안의 해적>과 비교하는 것은 애초에 무리일 터. 처음부터 끝까지 코미디 영화의 정체성을 잃지 않는 이 영화는 솔직히 그냥, 웃기다. 바다와 산을 오가는 유해진의 입담은 흥행 포인트 그 자체다. 모든 오락적 요소들이 10대-20대 초반의 취향이므로 같은 연령대를 타겟으로 했던 <은밀하게 위대하게>와 비교해 보자면, 이 영화는 더 웃기고 만듦새도 훨씬 나으므로 그만한 흥행을 기대하는 것이 큰 욕심은 아니다. 물론, 웃기는 게 김수현이 아니라 유해진이라는 점은 함정이다.

하지만 합평회 때 <군도>에서 문제점으로 지적된 부분들을 곱씹어 보자면 이 영화는 재앙에 가깝도록 전락한다. 특히 ‘과잉’이라는 부분에 있어서. <군도>가 ‘과잉’이라면 <해적>은 과잉의 네 제곱 정도로 봐야 한다. 이번 합평회의 반응을 보면서 예측하건대 이 영화에 대한 전문가들의 평가는 아마도 별점 10개 만점에 6개를 넘기 힘들 것 같다.(<명량>이 별 6개이므로 이것을 기준으로 했을 때) 하지만 흥행 성적이나 관객들의 평가는 그보다는 높을 가능성이 많다.

 

덧.  

 

포스트모더니즘 시대, 평론가의 의미와 역할은 무엇일까. 포털 사이트에서 기자, 평론가 별점 따위는 없애자는 네티즌들의 글을 읽으며, 어떤 관객도 평론가의 평가를 절대적으로 여기지 않고 흥행에도 영향을 미치지 않는데 평론가들이 계속 글을 써야 하는 이유와 명분에 대해 생각하곤 한다. 초짜나 다름 없는 필자로서는 정말 모르겠고 앞으로도 생각할 시간이 많이 필요한 문제지만, 필자의 경우에 한 가지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실은, 아니었으면 한다.

관객들은 거의 인식하지 못하는 한 작품의 단점을 극도로 부각시켜 그 영화의 전부인 양 비판하는 것. 당연히 비판할 것은 비판하고 단점도 꼬집어야 한다. (필자를 포함해) 명색이 평론가 중에 독설에 자신 없는 사람이 있을까. 그런데 그것은 대단히 논리적이고, 위선이 없으며, 조심스러워야 한다. 코미디 영화 시사회 때 박장대소 해놓고 완성도가 떨어진다고 별점 2개 주면 만든 사람들은 황당할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상업영화에 대한 필자의 관점은 많이 관대한 편이다. 통찰력이 부족한 것에 대한 변명이라 비난해도 할 말은 없다. 타고나질 못했으니 평생 노력하는 수밖에. 그래도 역시, 위선은 싫다. <군도>, <명량>, <해적> 세 작품 모두 필자에겐 나름의 매력이 있었다. 이 말이 하고 싶었다.

사심 가득 취향은 사석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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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자윤성은

등록일2014-07-30

조회수1,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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