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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합평회

씨네톡 1부_한공주_정재형, 박태식, 민병선, 윤성은, 이수향, 이대연, 안숭범, 성진수

박태식  

내가 한 2-3일 전에 보고 나서, 평을 써봤어요. 이 영화가 배경은 2003년의 밀양사건이잖아요. 아까 얘기랑 너무나 공통적인 것이 있죠. 우리가 그 사건을 너무 외적으로, 법적으로, 구조적으로 처리하느라고 그 아이의 목소리는 못 듣는 부분이 있잖아요. 그 아이의 목소리를 가능한 살려보려고 했다는 건 아주 굉장히 좋고. 그래서 이창동의 <시>, 그리고 옛날에 <피고인>이라고 조디 포스터가 여우주연상 받았던, 조엘 카프란이라는 옛날 사람이 만든 영화도 생각나고 해서, 저는 아주 영화를 야, 오랜만에 진짜로 괜찮은 한국 영화 봤다.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정재형  

또 계속 돌아가고, 다시 돌아가고 이슈에 대해서 이야기하죠.

 

민병선  

오늘 공교롭게도 영화 두 편이, 그 미성년자의 성폭행이 이제 어떤 그걸 중심으로 하는 이야기들이 공교롭게도 중심이 되었는데, 요즘 트렌드적으로도 그런 것 같더라구요. 사건을, 사건이 벌어지고 그 사건을 어떻게 치유할 것이냐 그걸 누구의 시점으로 바라볼 것이냐에 따라서 아버지의 이야기도 되고, 개인의 이야기도 되는, 그런게 있고. 그래서 <방황하는 칼날>도 일본 작품이랑 <한공주>도 보면 유사점이 어떤 사건 자체를 부각시키려고 하지 않으면서 사건을 어떻게 보면, <한공주>도 그런 것 같아요. 그 사건을 앞에 너무 까버리면 거기에 시선이 매몰이 되고 집중이 되어서 자기가 하려고 했던 이야기, 한 소녀의 이야기 섬세하게 따라가려고 했던 이야기들이 묻힐까봐 그런 것을 감추면서 가고 <방황하는 칼날>도 사건들을 일본판은 아예 배제해 버리더라구요. 그러니까 여자가 그냥 숲에 죽어 있고, 어떤 그런 사건을 디테일하게 보여주지 않고 그것을 끌고 가는, 그런 식으로 구성들도 요즘은 좀 트렌드적인 것 같기도 하고 그런 게 있는데 근데 이제 한국판 <방황하는 칼날>은 역으로 처음에 막 다 까고, 부산하게 하고 이러면서 좀 문제가 있는 것 같은데 <한공주>는 하여튼 사건을 감추면서 사건을 보여주지 않으면서 우리가 그 한 소녀에 좀 집중할 수 있게 해가지고, 결국은 그 한 소녀에 집중하다 보니까 문제가 뭐냐 도대체. 이것을 어떻게 치유할 것이냐의 문제가 정말 어른들이나 우리 사회가 좀 비겁하지 않느냐 겁쟁이들이 아니냐 우리가, 내가 그런 사건에 닥쳤을 때 우리 들의 어떤 반응들, 그것이 한 소녀에게는 어떤 화학작용을 일으키고 소녀가 어떤 영향을 미치고 이런 것들을 객관적으로 보여주는 그 시선들이 굉장히 좋더라구요. 그런 시선들을 결국은 한 소녀가 물이라고 하는 메타포를 이용해가지고 결국은 끝에 가서 보여주는 그 결론은 참 탁월하다. 참 감동이 대단하다 그런 면에서 굉장히 좋게 봤습니다.

 

윤성은  

네. 저도 주인공, 피해 당사자의 입장에서 이야기를 끌어간 점이 너무 좋았고, 이것이 치유라는 그런 부분에 있어서 일단 사건은 벌어진 다음이고 그 다음에 어떻게 수습할 것인가 하는 부분에 집중해서, 그런 부분은 약간 이준익 감독의 <소원>과 비슷한 것 같아요.

그래서 상처를 받은 가족들과 당사자가 어떻게 극복해나가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 굉장히, 어떻게 보면 희망적일 수 없는 이야기인데 희망적으로 맨 마지막 부분에 그렇게, 네 저도 최근 몇 년간의 독립 영화중에서 가장 강렬한 결말이 아니었나 싶거든요. 그래서 뒷부분이 너무 좋았구요, 그리고 두 번째는 현재와 과거를 넘나드는 편집이 굉장히 자연스러워서 그 점이 독립영화에서 보기 힘든 세련된, 그런 영화적인 연출이 아니었나 싶은데요. 저는 <역린>을 봤을 때, <역린>이 되게 기술적으로 완벽하다 싶을 정도로 너무 잘 찍었는데, 편집 부분에 있어서 굉장히 좀 촌스러운 부분이 눈에 띄었거든요. 좀 거슬렸는데 그것과 좀 대비가 되면서 그런 것들이 이 영화를 웰 메이드하게 만들어서 해외에서도 좋은 평가를 받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수향  

저는 이 영화를 보면서 저도 마찬가지로 <방황하는 칼날>과 비교하기에 굉장히 좋은 영화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구요, 가장 재미있게 좋게 봤던 것은 그런 한 개인의 아픔을 다루는데 있어서 제일 일차원적이고 유치한, 선정적으로 보여주는 그런 부분을 배제를 했고, 과장되거나 과도한 감정을 배제를 했고, 그래서 오히려 여중생의 일상이라는 측면에서 억지스럽지 않고 굉장히 평범하고 소박한 것의 소중함을 강조하려고 했던 감독의 의도가 굉장히 잘 드러나서 그 부분을 굉장히 좋게 봤습니다. 근데 영화 전체적으로 봤을 때, 이 앞에 있는 영화와 연결이 또 될 것 같은데, 근래에 들어서 많이 얘기되는 성폭행이라는 소재에 대해서 어떻게 우리가 봐야 할 것이냐 라는 게 저는 고민이 많이 되었는데, 성폭행이 하나의 소재주의가 되고 있는 일련의 흐름들이 있지 않는가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우리의  ‘시선의 윤리’가 문제가 되는데, 제가 되게 일차원적으로 이것을 어떻게 해야 되냐 봤을 때 사람들에게 그러면 우리가 이 영화를 왜 관객들한테 보여줘야 되고 봐야하느냐 라고 말을 시켰을 때, 첫 번째로 이런 진실을 알아야 된다. 두 번째 단계로 그런데 이 영화 자체가 재밌다, 세 번째 단계로 영화를 보고 반성을 시킨다. 네 번째 단계로 우리가 뭔가 실질적인 활동에 동참을 시킨다 이런 여러 가지 단계나 반응들을 기대한다고 했을 때, 이런 영화들은 관객 반응의 측면에서 어떤 것을 노리고 있느냐 라는 부분이 굉장히 요새 들어서 있는 이런 소재주의에 밝혀져야 할 부분이고 많은 분들이 논의를 해봐야 되지 않나 라는 생각을 했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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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개인적으로 이 영화가 그런 면에서 장점을 가지고 있는 게 알아야 한다는 일차원적인 목적을 넘어서서 진실 이면에 그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어떻게 그 고통을, 우리는 신문에서 보고 끝나버리지만, 그들이 살고 있는 일상에서 그게 어떻게 현현이 되는가를 굉장히 잘, 자연스럽게 표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장점이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또 결말을 굉장히 신선하게 봤는데, 사실 이 결말이 아니었다면 이 영화가 가진 그 밀도와 장점이 굉장히 많이 줄어들지 않았을까 이런 생각이 드는데, 물고기처럼 유연하게 헤엄치고 있던 결말의 여주인공이 <방황하는 칼날>에서 그저 사적 복수에 끝나 버리고 그것마저 잘 이루어지지 못했던 아버지가 끝맺었던 지점과 비교해봤을 때 감독이 정말 더 많이 고민한 부분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사적 복수에 끝나버리고 나 개인의 원한에 끝나버리면 너무 신문에 그냥 나오고 잊혀져버리는 하나의 소재가 되니까 그것에 비하면 공주에게 새로운 희망과 더 나은 미래를 조금이나마 기약해볼 수 있게 감정적인 여운을 남겨뒀다는 점에서 이 영화가 가진 장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안숭범   

저도 비슷한데요, 이 영화가 미성년자 집단 성폭행 사건이라는 점, 그 다음에 피해 당사자를 향한 윤리적인 입장을 관객에게 요구한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제가 이들 영화에서 본 것은 ‘애도의 윤리’입니다. 사회적으로, 공적으로 피해자의 죽음을 해석해야 한다고 봐요. 그러니까 <한공주>의 경우 공주가 자살하면서 부재의 자리가 생깁니다. 따라서 영화가 끝날 때 관객은 그 부재의 자리로부터 리비도를 전환해야 하는 숙제를 얻게 되죠. 이 같은 관객 체험의 측면에서 보면, <한공주>는 <시>와 아주 흡사하다고 보여집니다. <시> 같은 경우에는 피해자가 일찍 죽죠, 그 후 가해자의 할머니 미자가 등장하죠. 주목할 것은, 사건이 터지고 난 후, 지방지 신문기자라든지, 교사라든지, 아니면 가해자의 다른 학부모들은 빨리 합의해버리자, 그래서 이 사건을 묻어버리자, 하는 쪽에만 관심을 갖습니다. 왜냐하면 자기 자식들의 장래도 있고 하니까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이고 산 사람은 살아야 하는 논리를 펴는 거죠. 사실 이게 ‘병리적인 애도’거든요. 한 마디로 살아있는 자가 죽은 자의 빈 자리를 함부로 해석해서 빨리 없애 버리는 것. 사실 이걸 우리말로 하면 ‘입사(introjection)’거든요. 없애버리는 것. 빨리. 합리화를 시키버리는 것 말이예요. 이건 사실 부당한 폭력이죠. 이때 주목할 것은 미자의 시 쓰기 행위입니다. 그녀는 시창작 교실에서 김용탁 시인의 강의를 듣습니다. 실제 김용택 시인이 그 연기를 하는데요. 그는 ‘본다’는 것을 강조하죠. 시를 쓰기 위해 미자는 ‘본다’는 것의 의미를 생각하게 되는 겁니다. 항상 진실을 보려고 해야 하는 거죠. 그러니까 마음속에 고통이 생기는 거예요. 애도의 요청이 있는데 애도를 제대로 할 수 없는 그 역설적인 상황 속에 처하게 되는 거죠. 그래서 나중에 그런 공적인 폭력으로서 입사에 저항하는 미자가 등장합니다. 고통스럽게 진실을 마주하려 하는 거죠.  <한공주> 같은 경우는 피해 당사자가 직접 나오잖아요. 피해당사자가 직접 나와서 조금 더 직관적으로 애도의 윤리를 사회적, 공적으로 요청하고 있는 그런 영화인데요. 아까 <시> 같은 경우는 시라는 도구적인 매개물이 있기 때문에 미학적으로 접근해서 그것을 가져간 반면에 이 영화는 한공주라는 인물의 내면에 초점을 맞춰가지고 풀고 간 점, 그래서 관객의 입장에서는 상대적으로 더 대중적인 영화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감독의 문제의식에서 비롯된 질문을 영화관 바깥으로 가져가게 하는 데에 자연스럽게 공명점이 생기죠.  

이대연  

저는 앞에서 말씀하신 것들에 동의를 하면서, 한 가지 더하자면 <방황하는 칼날>을 보면서 가족이란 것이 뭔가라는 문제가 생각이 들더라구요, 방황에서 죽은 가해자 소년의 부모가 우리 애가 죽었는데 피해자 아니냐 이런 식으로 경찰서에서 항의하는 장면도 있었는데, 여기도 가해자 부모들이 교실로 막 쳐들어오는 장면이 굉장히 공포스럽고 폭력적으로 표현이 되잖아요. 가만히 보면 한국의 가족영화라는 것들이 이런 식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거든요. 예를 들어서, 작년에 고령화가족같은 경우도, 가족끼리 불화하다가 어디 놀러가서 술 먹다가 싸움이 나는데 그건 누가 봐도 그 가족의 잘못인데 그 가족이 싸우다가 똘똘 뭉쳐가지고 싸움을 하고, 차를 타고 오면서 낄낄거리고… 그걸 가족이라고 부를 수 있는지, 저건 깡패나 양아치문화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었는데, 우리가 가진 가족 이기주의라 할 수 있는 그런 것들이 오히려 이 영화가 청소년 범죄나 성폭행의 문제가 아니라 가족의 문제가 아닌가 하게 생각하게 만드는 그런 부분들이 있는 것 같아 가지고, 그 소녀가 죽는 것도 뭐냐면 사실은 가족이 없는 거잖아요. 아버지는 알콜릭이어서 돈을 받아서 쓰고, 가족이 될 줄 알았던 아줌마도, 친구들도 버리고. 그러니까 주변에 가족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때 느끼는 절망감. 그런 절망감을 끝까 지 쭉 밀고 가니까 결국은 이 사회에서는 도저히 어떻게 해볼 수 없는 그런 결과까지 나온 게 아닌가 싶어가지고, <방황하는 칼날>의 그 소녀가 차라리 행복하지 않았나, 분노해줄 한 사람이라도 있다는 게, 아주 좀 가슴 아프고, 안타까웠던 것 같습니다.

 

성진수  

저도 사실 이 영화를 보면서 똑같이 <시>가 떠올랐었고 아까 말씀하신 것과 굉장히 비슷한 생각을 했었는데요. 실질적으로 이 영화 <한공주>에서 전학을 시키는 이유도, 아까 말씀하신 것처럼 애도를 하는 굉장히 병리적인 방식인 거잖아요. 피해자를 자기 눈앞에 사라져 버리게 하는…. 그런 점에서 굉장히 <시>와 비교해볼 만한 가치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구요. 똑같이 이 영화를 보면서 떠올랐던 또 한 편의 영화가 <마더>였거든요. 그런 의미에서 지금 이대연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어떤 가족의 또 하나의 뒤틀린 가족주의가 떠올랐어요. 또 한편으로는 한나 아렌트가 악의 평범성을 얘기를 할 때, 간단히 말하면 공감능력의 부족이라든지, 인지의 부족함 이런 것들이 어떻게 그 악이 될 수가 있는가, 쉽게 말하면 모르는 것이 악이 되는 거잖아요. 이 영화의 굉장히 많은 주변 인물들, 이 한공주를 대하는 선생님, 선생님의 어머니, 어머니의 남자친구 경찰 서장, 피해자의 부모들, 이 모든 사람들이 여기 많은 주변의 인물들, 혹은 한공주의 아버지까지도, 사실 그들이 절대 악인이라고는 볼 수 없을, 한 편으로는 이해할 수도 있는 그런 면들이 사실 있는데, 그렇다면 과연 악이라는 게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하는 거 같아요. 그것은 어떤 절대 악의 개념이 아니라, 우리가 일상생활을 살면서 누군가에 대한 공감능력이 부족하고, 거기에 대한 이해능력을 자기 스스로 발휘하는 것을 멈출 때 거기서 생길 수 있는 그런 것이 악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악의 평범성에 대한 한나 아렌트의 이야기를 떠올리게 했던 그런 영화였어요.

한공주에서 굉장히 불편했던 내레이션 방식이 하나 있는데, 뭐냐면, 이 한공주에서 공주라는 인물이 큰 사건을 겪은 후 일상을 살아가면서 어떤 일상을 마주할 때 마치 그 순간에 떠올랐을 수도 있을 법한 인물의 억압되었던 기억으로, 즉 우리를 과거 사건의 기억으로 안내하는데요. 그것이 굉장히 조심스럽게 그런 하나의 사건을 보여주는 것 같지만, 또 한편으로는 영화가 계속 전개되어가면서 사실은 보여주는 그런 것들의 강도가 세지거든요. 보여주는 내용들이. 그러면서 관객으로서 우리가 일단 직관적으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는 알지만, 그것이 조금씩 조금씩 미스터리의 한 부분을 풀어내듯이 과거 회상을 통해서 보여주는 게, 그 방식이 점점 영화가 진행되면서 하나의 스펙타클로 처리되는 것 같은, 이야기를 전개하는 데에 있어서  관객들에게 하나의 궁금증을 유발시키고 몰입시키는 장치의 역할을 하는 듯한, 양 면성을 띠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그것에 대해서 저는 좀 불편했습니다. 이 영화를 보면서, 그러한 측면에서 떠올랐던 영화가 다르덴 형제의 <아들>이었는데, 거기에서는 피해자의 아버지가 우연히 만나게 된 가해자 학생과의 그 짧은 만남의 순간에 상당히 집중력 있게 그 감정의 폭발 같은 것들을, 시각적인 전시 없이도 과거의 사건을 알려주면서, 전달을 하거든요. 그런 의미에서 정말 이 영화가 그 공주라는 인물이 그 이후에 처한, 물에 휩쓸려가지 않기 위해서 정말 발버둥쳐 살아가는 한 인물을 보여주고 그 인물이 자기 일상 속에서 부닺히게 되는 모든 것들을 보여주고자 했다면, 그 과거의 사건들을 굳이 굉장히-그래도 굉장히 조심스럽다고 생각이 들지만-꼭 그렇게 약간의 미스터리를 풀어나가듯이 그렇게 시각적으로 전달할 필요가 있었나 라는 약간의 아쉬움 같은 것들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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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형  

저는 기본적으로 그 일련의 영화들-여성에 대한 집단 성폭행을 소재로 한 영화들이 <한공주>와 <방황하는 칼날>에서 아주 우연히 동시발생적으로 그렇게 나타났을 뿐만 아니라, -아까 <시> 얘기를 했지만-어떻게 보면 <시>로부터 시작을 한 것 같아요, 논의의 시작에 <가시꽃>이라는 영화가 있었고. 이것들을 나름대로 분석을 좀 해봤는데, 이 <한공주>는 결론부터 미리 말씀드리면, 그동안 나왔던 이러한 여성에 대한 집단 성폭행을 다룬 일련의 영화들에서 나왔던 젠더에 대한 시각을 이 영화가 좀 더 초극한다고 그럴까 그래서 특히 이창동에 관한 시각의 한계라든가 그런 시각이 이 영화엔 분명히 있다, 저는 결론적으로 그렇게 보고 싶어요. 미리 당겨서 말하자면 ‘피해자의 시각으로의 전유’, 말하자면 본인이 피해 여학생은 아니지만, 남자감독이든 여자감독이 됐든 간에 그 피해자 여학생의 시각에서 정말 논의를  해야된다라는 것으로서의 초극을 했다는 거죠, 그 전의 감독들이 그런 것들이 부족했으므로, 이 영화에서는 그런 것들을 초극한 그런 피해자 시각으로의 전유, 즉 피해자의 시각을 가져서 이야기를 하려고 했던 그런 것들이 분명히 보인다고 보는데, 왜냐하면, <시>로부터 시작된 어떤 것을 -<시>는 직접적인 피해자가 죽잖아요. 그러고서 사실 관계적으로, 간접적으로 다루고 대단히 체념적인 정서로 흘러간다고 봤거든요- 초월하는 방식에 있어서. 그런데 <가시꽃>은 또 굉장히 가해자이지만 양심적인 관찰자의 입장에서 어떤 복수를 그리고 있어요, 그래서 그 여성, 그 피해자의 입장을 양심적 관찰자의 입장에서 풀어나가고 있죠. <방황하는 칼날>은 사실은 가부장제의 몰락과 절망으로 저는 봅니다. 그래서 이 영화의 중심테마를. 아버지 입장에서 복수를 하죠. 그래서 그 대상으로 놓고 그렇게 전개를 했음에 비해서 바로 <한공주>는 피해자 자체의 후유증과 고통과 절망을 그리거든요? 결론은 절망스럽기는 하지만, 전적으로 피해자의 입장으로 그린다는 점에서 굉장히 그동안의 시각을 뭔가 극복하려고 했다, 왜 극복이라는 표현을 쓰냐면, 특히 이창동의 영화들 <시>로부터 출발해서 <오아시스>에 이르는 연관성, 무슨 얘기냐면, 왜 한공주인가, <오아시스>의 여주인공 이름이 ‘한공주’거든요. 근데 왜 <오아시스>의 ‘한공 주’의 이름을 썼을까, 이것은 저의 해석인데요, 이것은 제가 인터뷰를 본 것도 아니고 사실은 모르겠습니다만.

<오아시스>에서 당시에 굉장히 문제가 됐던 부분이 뭐냐면, 여자 지체 부자유자, 문소리씨가 했던 역할이죠, 지체 장애인이었던 그 여자를 역시 정신지체 장애인이었던 설경구가 말하자면 강간한 것이 아니냐, 그것이 서로 동변상련적인 입장이고, 또 그러저러한 영화적인 문맥에 의해서 넘어가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현실적으로 왜 지체 부자유자인 여성에 대한 인권이 없는가. 그래서 그것은 그 당시 아카데미상에 한국영화 후보로 올라갔을 때에도 국내에서 그런 부분에 대해서 지적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였어요. 국제적인 시각에서 과연 저런 시각이 용인될 수 있을까, 그래서 영화 안에서는 설득력을 갖지만 기본적으로 저런 것은 물론 영화적인 문맥에서는 영화가 원하는 것으로 표현이 되어 있기는 하지만, 저런 것이 허용될 수 있느냐. 어떻게 보면 강간을 합리화했던, 그러니까 그게 젠더적인 이슈죠 사실은. 그 지체 부자유라는 장애인의 이슈로 포장되어서 젠더 이슈를 희석시켜버린 그 부분을 다시 한 번 상기한다고 할 때, <한공주>라는 것은 이 영화에서 굉장히 어떤 그런  한계를 초극하고자하는 의도적인 이름같이 느껴졌어요, 저에게는 개인적으로.

그래서 이것이 <시>로부터 촉발되고 이창동 감독이 문제제기했던 여성에 대한 집단 성폭행이자 젠더에 대한 이슈를 제기했다고 보는데, 그것에 대한 심화적인 이야기를 이 영화에서는 이어가면서 하고 싶었던 게 아닌가, 그런 의도에서 이 영화의 마지막 엔딩 장면은, 사실은 <시>의 첫 장면이거든요? 물 속에 여자의 머리카락이 나오는 장면이 있죠. 그 장면이 떠오르는데, 이 영화에서는 이 여자가 헤엄을 치죠. 말하자면 나름대로 죽었지만, 말을 하고 끊임없이 움직이고 살아있는 것의 모습을 보이잖아요. 다시 말하면 비록 현실에서는 죽었지만, 기본적으로 이 여자는 살아있는 듯한 몸짓을 보이면서, 뭔가 피해자가 계속 말을 하고 싶어 하는 욕망을 드러낸 다는 거죠. 훨씬 초극된 모습으로.

이창동은 <시>에서 이것을 시에서 남아있는 사람들이 체념하면서 극복해야 되는 문제로 얘기하지만, 이 <한공주>에서는 보다 적극적으로 피해자가 이 사회에서 살수 없다라는 문제를 제기하는 거예요. 계속 피해자가 살 수 있게끔 이 세상이 변하기를 바라는 굉장히 강력한 요구를 한다고 저는 느껴지거든요. 그래서 한공주가 굉장히 세게 이창동 감독을 비판하고 그런 남성가부장적인 시선, 말하자면 정말 여성 -젠더의 문제를 여자의 입장에서 지식인들이 말로는 얘기를 하지만, 사실 여자의 입장에 대해서 정말 풀어나갔는가에 대한 진지한 비판과 질문을 하는 영화라고 저는 느껴졌어요, 개인적인 생각이긴 한데.

 

이대연  

저도 선생님 말씀하신 것 들으면서 생각난 건데, 기본적으로는 젠더의 문제이지만 기본적으로 호모 사케르라고 해야 하나요 이런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시> 얘기는 생각을 못하고 있다가 말씀들 들으면서 생각난 건데, 문득 친구하고 여주인공하고 가깝게 되는 관계가 형성이 된 게 말을 통해서 형성이 된 게 아니라, 노랫소리-허밍을 듣고서 형성이 되잖아요. 그 관계가 지속되는 걸 보면, 뭔가 내밀한 것들이 왔다갔다하는 것은 거의 없는 것 같더라구요, 농담처럼 몇 마디가 오고 가는데, 굉장히 슬픈 얘기고. 각자의 내면이 오고가지는 않고, 오로지 노래로 집중이 되고 그걸 기획사로 보내고 뭔가 성공시키면 어떨까 하는데, 그게 문득 뭐같다는 생각이 들었냐면, 그 애완견에 대한 애정과 비슷하지 않았나, 방에 가서 보면 개 길렀냐- 애완견 있었는데 18년 살았다하는데 그게 마치 그 여주인공도 아마 17, 18살 되지 않았나 싶은데, 그 나이 때로 전가 되면서 마치 그 친구가 이 여주인공을 대하는 게, 그 애완견을 대했을 때의 그러한 태도 같기도 하고, 말이 아니라 노래로 시작한다는 게 <시>에 대한 어떤 부정, 아니면 <시>에 대한 조롱이나 비아냥 이런 걸로 들리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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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향  

저는 이 영화를 보고 그 은희라는 친구와 다른 애들, 심지어 가해자까지도 -감독이 굉장히 사려 깊게 만든 부분인 것 같은데- 절대 악인으로 설정하지 않기를 감독이 굉장히 노력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은희라는 친구와 다른 친구들이 마지막에 결국 외면하지만, 그게 사실 걔네들이 정말 나쁜 걸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그 나이에, 가해자들이 걔네가 저지르는 악이 뭔지도 모르고 막 저지르는데. 사실, <방황하는 칼날>에서 조두식이 ‘아저씨 그거 무릎 그대로 놔두면 짤라야 되요. 꼭 치 료하세요’라고 얘기를 하잖아요. 그러니까 절대 악인이 아닌 거예요. 그런데 걔네들이 어떠한 특정 행동에 있어서 스스로 그게 얼마나 끔찍한 짓인지를 모른다는 것, 미처 인정하거나 판단할 수 없을 정도의 애들이라는 거죠, 공주가 은근히 좋아했던 그 친구 자체도 아주 나쁘다고는 볼 수 없고, 그 나쁜 짓을 저질렀던 그 가해자 남학생들도 그들 개개인이 절대 악인이냐 라고 물었을 때 단순히 얘기할 수 없는 어떤 지점 있는데, 유치하게 얘기하자면,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 라고 하는 얘기가 있는 것처럼 영화에서 그렇게 그려지고 있다는 것이죠.

 

이대연  

그 형사가 얘기하잖아요.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죄짓는 놈들이 다 나쁜 놈들이지, 애 어른이 어디 있냐고.

 

이수향  

네, <방황하는 칼날>에서는 그렇게 얘기하잖아요, 그런데 <한공주>에서는 더더욱 그 애들 자체에 죄를 물으려고 하는 방식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윤성은  

그래서 수향씨가 아까 얘기한 부분에서, 소재주의가 이러한 social problem 가공 영화들의 목적 자체가 어디있냐 하는 것 자체가 되게 중요한 부분인데, 사실 <도가니>나 <부러진 화살> 같은 작품들이 계속 나오면서 공분을 사고, 어떤 법이 잘못 됐다거나 이런 비판 여론을 일으켰고, 도가니는 다시 재수사를 하는 일들까지 일어나는데. 사실 최근에 나온 윤간 사건을 다룬 이런 영화들은 사실 그만큼의 반향을 불러일으키지 못하고 있고 계속해서 미성년자 -애나 어른이나 죄 지으면 다 죄인인데- 그 아이들이 그것을 악용해서 자기네들 처벌이 그렇게 과하지 않다는 것을 악용해서 하고 있는 이런 것들이 영화 속에서 계속 반복해서 나옴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어떤 사회적인 파장을 불러일으키지 못하고, 사실 지금은 거의 이슈조차 되고 있지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근데 거기에는 또 한 가지 영화적인 점이 있다면 저는 윤간을 할 때, 저는 그 <한공주>에서 가장 기가 막혔던 장면이 남자애들이 거실 가득히 채우고 있는 장면을 보고 정말 한숨이 나오더라구요. 저 아이들이 그렇게 묵시적으로 성폭행에 대해서 별다른 어떤 죄의식이 없이 저렇게 하고 있을까? 그런데 모르겠어요. 정말 십대 남자애들이 성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를 저로서는 모르겠지만, 성폭행-성관계를 가지는 것에 대해서 그 남자애들은 죄의식이 없을 수도 있지만, 누군가가 죽는다는 건 정말 다른 문제잖아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런 영화들에서 그 가해자들을 다룰 때, 그 양심적인 가시꽃의 주인공인 약간 찌질한 남자애 한 명 정도를 제외하고는, 너무나 백프로 악인으로 딱 몰아가는데, 그런 부분이 나올 때 관객들은 정말 그냥 화가 나거든요? 영화를 보면서.

그런데 그렇다면 이 social problem을 다룬 영화들의 목적이 우리의 화를 돋우는 것이냐, 저는 <방황하는 칼날>을 보면서 너무 화가 났는데, 과연 감독이 원하는 것이 우리의 화를 불러일으키는 것이냐 라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들의 초점의 방향성이 어느 쪽으로 가고 있고, 어떻게 가야될 것인가에 대해 이야기를 해봐야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안숭범  

<방황하는 칼날>은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한공주>의 경우 대중과 타협할 수 있는 지점을 잘 만들어 놨다고 봐요. 영화를 보면, 경찰 서장이 한공주에게 비윤리적인 말을 건넨 그 지점이 대중에게 필요했다고 생각됩니다. 사실, 그 장면이 있어야 해요. 그 장면이 관객에게 부채의식, 공공의식을 갖도록 적확하게 유도하거든요. 그런데 그런 의도의 장면은 그 전에도 있었어요. 아버지가 가해자들 부모의 합의서를 갖고 와서 공주더러 사인하라고 해가지고 사인했잖아요. 그 합의가 결국 아버지가 돈으로 가해자의 정신적 족쇄를 풀어준 셈이죠. 이처럼 유사 한 모티브가 전에 있었기 때문에 영화후반부, 경찰 서장이 한공주를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멘트는 일종의 반복인거죠. 물론 반복이지만, 후자가 더 결정적인 순간에 확인사살 형식으로 도착하는 것이겠죠. 그래서 그 장면이 있으므로 인해서 대중적인 메시지. 전언을  분명하게 가져가는 거죠, 마지막으로 덧붙일 것은, <한공주>의 경우 젠더 문제를 떠날 수가 없다는 사실이예요. 밀양 사건을 초점화 한 후 43명의 고릴라와 그 날의 사건들을 적나라하게 다 보여주죠. 그 때문에 이 영화의 메시지는 밀양 사건을 떠나서 다른 의미를 획득할 여지가 없어요. 젠더 이상의 문제로 해석할 수가 없는 거죠. 딱 그 문제죠. 물론, 아쉬운대로 그 문제라도 명쾌하게 보여주는 미덕이 있죠.

 

그런데 <시>같은 경우는 이런 게 있는 거 같아요. 마지막 부분 몽타주인데요. 미자는 자기가 쓴 시를 읽거든요. 거기는 어떤가요. 거기도 눈이 내리고 그러나요, 뭐 이렇게 시작했던 것 같네요. 그런 식으로 미자는 자기 시를 읽는데, 그때 미자 자신의 일상이 몽타주 돼요. 중요한 건, 시의 중간 이하를 읽을 땐, 갑자기 한 번도 등장하지 않던 소녀의 목소리로 변환돼요. 내래이터가 바뀐 거죠. 그 대목에선 소녀가 어떤 학교 교실을 벗어나 어떤 다리까지 가는 장면들이, 버스 타고 가는 장면들이 나와요. 그 장면을 기민하게 본 관객은 알죠. 그게 여중생이 자살하러 가는 데까지의 그 과정이란 것 말이예요. 이러한 화법은, 여중생 성폭행 사건, 현실에서 일어난 사건에 대한 어떤 젠더 문제를 좀 더 폭넓게 보게 합니다. 참고로 당시 이 영화가 노무현 추모하는 영화라는 설명도 있었잖아요. 이 문제는 그 몽타주나 미학적인 장치들에 의해서 살아있는 사람이 죽은 사람에 관해 자기들 편하자고 합리적인 묘비명을 세워버리는 것 자체를 성찰하게 해요. 표면적으론 ‘성폭행-자살’ 사이에서 젠더 문제를 생각하게 하지만, 이를 떠나 다층적인 해석의 지점을 만들어내는 거예요. 따라서 해석의 다양성을 열어준다는 의미에서 굳이 비교하면 <시>가 <한공주>보다 분명히 더 나은 것 같아요.

 

이대연 

전 거꾸로 생각하는데요..

 

안숭범 

그래요?(웃음) 일단 마무리 짓죠…….

 

박태식 

아까 거기에서 아주 재밌었던 장면이 25m가도 벽이잖아, 하고 친구가 그러잖아. 난 그 부분 정말 공감이예요. 25m 수영해 봤자. 벽이잖아. 난. 와…… 굉장히 좋은 대사인 거 같아요

 

안숭범 

한 가지 첨언하면, <아들> 같은 경우는 어떤 점에서 더 한 수 위였다고 느꼈냐면, <아들>은 일단 뭐, 다르덴 형제가 자연광 촬영하잖아요, 조명 없이. 그런데 꼭 카메라가 결정적인, 아까 그 장면도 마찬가지예요, 아내 만나는 장면도 마찬가지인데, 카메라가 항상 주인공의 어깨 뒤에 항상 있어요. 그리고 그 사람이 진짜 고통의 표정은 얼굴에 드러나잖아요. 그런데 얼굴을 잡지 않고 핸디핸들로, 그것도 항상 어깨 뒤에서 잡거든요. 그것은 뭐냐면, 관객의 초점을 그 사건 현장에, 그것도 자연광이니까 진짜 현실 같은. 그 사건현장에 딱 갖다 놓는 거죠. 그러니까 지금 그 장면의 목격자 증인으로서 관객을 세움으로써 굉장한 의미를 또 파생시키게 합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어떤 자기가 메시지를 전달할 때 자극적으로, 꼭 자극적이진 않은데, 43명의 뭐 이걸 다 보여주고 이렇게 하지 않더라도 그런 어떤 형식에 의해서 이미 관객을 거기 위치 지어놓는 기술, 그런 면에서 차이가 난다.

 

06

 

성진수 

왜 제가 그런 생각이 들었냐면, 제가 개인적으로도 영화를 보면서도 그런 느낌이 있었고. 실제로 제가 영화 보는데, 거기 마지막에 약을 타서 먹이잖아요. 그런데 관객이 먹으면 안돼, 먹으면 안돼, 이러는 거예요. 영화를 보면서. 그런데 그 주인공이 처하는 상황에 관객이 몰입해 가는 거예요, 서사적으로. 다시 말해서 이 영화의 미덕은 이 한 명의 피해자인 정말 어린 소녀가 현실 속에서 살아갈 수 있게, 현실이 얼마나 냉정하고 정말 이 소녀를 보호하지 못하는지에 대한, 한공주를 그 지경에 만든 청소년 애들보다는 그 주위에 있는 어른들에 나를 투영해서 반성하게끔 하는 것이 목적일 텐데, 오히려 관객들은 그 아이에게 일어난 비극적인 사건 자체에 더 집중하게 되는 그런 요소가 과거회상 씬에서 지어진다는 것이 느껴졌고, 또 한 가지 제가 <시>와 비교를 했을 때, 그런 의미에서, 다시 말해 한공주를 저는 조금 더 그 사건의 피해자와 가해자의 문제가 아니라 그 사건을 우리 사회에서, 만약에 우리 주변 에서 일어났다면, 우리는 그 사건에 대해서 피해자와 가해자에게 어떤 사람이 되어야하는가라는 문제의 측면에서 <시>라는 것이 조금 더 사실 좋았던 건, 미자라는 인물이 한 선택이예요. 미자라는 인물은, <마더>에서 보다시피 가족이라는 소위 말해서 사회적인 자신의 그 주체, 즉 사회적인 자신의 주체성인 가족으로서의 보호자로서의 그것을 포기를 하고 모든. 어떻게 너는 너 자신을 그렇게 할 수 있겠느냐는, 자기 스스로 일종의 사회적 죽음으로 몰아넣으면서까지도 가장 윤리적인 선택을 했거든요. 그리고 그것은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시라는 계속 관찰하면서 자기 스스로 터득해가고 그것을 깨달아가는 과정을 그 영화가 보여준다라는 입장에서, 아, 내가 사건의 당사자가 아닌 한 명의 제3자로서 그런 사건에 있는 피해자와 가해자들을 어떤 자세로 대해야 하는가의 문제인 측면에 있어서는 <시>가 한 발 더 나아갔다는 생각이 들고 그런 의미에서 아까 말씀하신대로 더 폭이 넓다는 생각이 들구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젠더적인 측면에서도 정말 이 두 가지가, 청소년은 어른들의 사회를 가장 가감 없이 반영하는 거울 같은 존재라고 본다면, 이 두 사건에서 보여 주는, 특히 이 두 사건은 한국의 어떤 소셜 프라블럼 필름 social problem film, 그래서 한국 사회를 보여주는 영화라고 한다면, 약자를 대하는 한국 사회의 태도. 그러면 과연 약자의 위계가 한국사회에서 어떻게 지어져있는지에 대해서 정말 보여 준다고 생각해요. <한공주>도 그렇고 <방황하는 칼날>의 그 여학생 피해자도 그렇고 일단 한부모예요. 그 다음에, 그래서 보호자가 없어요. 그리고 아버지의 직업도이 쪽. <방황하는 칼날>의 아버지 직업이 굉장히 뭐, 그렇진 않지만, 어쨌든 가장 최하급에 가까운 계급이고, 그리고 여자이고…… 라는 것이 그런 모든 조건들이 아, 한국 사회에서 구조적으로 약자는 어떻게 위계되어있는가를 영화가 보여주는 측면이 정말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보면 <한공주>에서 가해자 중 한 명의 학생의 부모는, 전화 통화로 하는 것을 보면, 경찰서장인 것으로 보이고, 그리고 또 한공주가  잠깐

좋아했던 그 남자. 가해자죠. 정확한 가해자예요. 그 가해자도 이 한공주의.....

 

박태식 

편의점 사장님 아들.

 

성진수 

고용주죠. 모든 이런 계급위계질서 안에서 사실 젠더적으로 여자. 그것도 나이가 어리고 보호할 사람이 없는 여자 어린 아이가 가장 계급의 밑바닥에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똑같은 같은 나이의 청소년 남자와 여자로 봤을 때에도 여자가 가장 밑바닥에 있다는 측면에서 보여지고, 그리고 <방황하는 칼날>에서 보면 정재영이 화가 났던 이유가 그거잖아요. 걔네 집에 갔는데 내가 몽둥이로 때렸더니 미안해요, 라고  하면서 자기가 훔친 거에 대해서 사과를 하지 죽인 건 사과를 안 한다는 건데, 그건 곧 어떤 자본을 가지고 있거나 무엇인가 돈이 될 만한 물건을 들고 있는 사람은 강자인 거예요, 이 청소년한테. 그래서 사람의 목숨은 전혀 자본의 문제보다 밑바닥에 있는, 게다가 사람이 강자라는, 자본이라는 것과 연루되지 않는. 그런 한 명의 동네를 돌아다니는 여중생일 경우에는 그 목숨이 아무것도 아닌, 그런 것들이 모두 들어가서 젠더적으로 여성이 모든 얘기에서 가장 밑바닥에 있는 사회적 위계의 모습을 강하게 느껴졌거든요. 영화가 물론 한 영화는 실화를 모티브로 하고 있긴 하지만, 그런 의미에서 분명히 젠더적인 문제도 여기서 굉장히 많이 보여주고 자본의 문제도 굉장히 많이 보여지고 그래서 한국 사회라든지 어른들의 사고의 구조가 그대로 드러나는 영화다라는 생각을 많이 들었어요.

 

박태식 

아까 무슨 말씀 하시려는……. 반대다 뭐 그런.(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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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자관리자

등록일2014-0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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