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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합평회

씨네톡_방화하는 칼날_정재형, 박태식, 민병선, 윤성은, 이수향, 이대연, 안숭범, 성진수

 

정재형     

그럼 오늘 합평회를 어떻게 할까요? <방황하는 칼날>부터 할까요? 

 

성진수      

<방황하는 칼날>은 영화적이라는 표현이 어떨지 모르겠지만, 영화관객으로서 순수하게 영화를 봤을 때,  영화가 매력적이거나 흥미진진하게 와닿지는 않았어요. 또  <방황하는 칼날>도 그렇고, 나중에 다루게 될 <한공주>도 그렇고, 이런 류의 소재들이 인디영화계 뿐만 아니라 상업영화계에서도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현상이 있는데, 여기서 소위 말하는 소셜프로블럼 필름이라는, 스티브 닐이 헐리우드 메이져 장르라고 했던 사회문제 영화, 이러한 장르에서 생각해보게 됐었는데, 추후에 더  얘기를 나눴으면 좋겠구요. <방황하는 칼날>은 원작소설을 샀는데 다 읽지는 못했어요. 4분의 1 정도 봤는데, 소설에서 포커스를 맞추고 있는 일본 사회의 문제, 청소년 범죄자에 대한 법적인 처벌의 문제라는 것이 영화화 되었을 때 포커스가 흐려졌다는 생각이 들고, 또 한편 영화를 보는 내내, 영화가 정재영이 연기하는 아버지의 고통, 슬픔, 이런 것에 초점을 맞추고 전시를 하는데 많은 시간이나 노력을 할애하고 있어서, 이 영화에서 좀 더 강조되고 감독이 의도했던 것이 정확하게 무엇이었는지 파악하 는 데 굉장히 애로사항이 있었어요. 그런 것들이 너무 흐려지지 않았나. 간단히 말하면 메시지가 너무 흐려지지 않았나. 영화가 전반적으로 힘을 잃지 않았나,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대연  

저도 비슷한데요. 전반부는 재밌게 봤는데, 후반부 가니까 좀 지루한 느낌이 들더라구요. 강원도 대관령 눈 덮인 설산이나 설원이 나오는데, 설원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협소한 느낌? 아마 이게 일본 작가가 홋가이도나 이런 쪽에 생각하고 한 것 같은데, 그런 느낌이나 정서가 다가오기에는 답답하고, 거기다 스키장도 나오니까 삭막하고 답답하고 정서적으로 안 어울리는 느낌이 들더라구요. 또 하나는 정재영이라는 배우가 아주 젊은 것은 아니지만, 젊고 건강한 사람인데, 그런 배우가 하기에는 약간 무기력한 역할이라서 잘 이해가 안 되는 점이 있었어요. 영화의 온도가 계속 높잖아요. 복수를 향해서 가고. 다시 대관령에 오면 뭔가 거기서 수도승같은 분위기, 고행의 분위기, 이런 것을 풀어주려고 그러는데, 굳이 그랬어야 되나 생각이 듭니다. 오히려 후반을 도시쪽으로 그냥 가져가서, 어차피 상업적으로 정의하려고 했으면, 도시쪽에서 추격전을 하는 게 차라리 나앗겠다,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아쉬움이 많이 남았어요.

또 하나는 이 영화가 하는 질문 자체가 간단히 말해서 사적인 복수냐, 아니면 공적인 법질서에 따르는 처벌이냐, 이런 건데 그걸 묻기에는 영화자체가 강압적인 느낌이 드는 것 같았어요. 일본영화가 있어서 봤는데, 일본영화는 몇 가지 질문들이 나오거든요. 폭력이라든가 아니면 공포라든가 이러한 몇 가지 질문들을 던지면서, 그와중에 법과 사적인 복수에 대해서 나오는데, 한국영화는 그런 걸 다 건너뛰고, 끝에 가서만 그런 질문을 하는 느낌이 들어서. 선택을 강요하는데, 그 강요가 탐탁치않은 느낌도 많이 들었던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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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향  

저는 이 작품을 <한공주>와 비슷한 소재를 다룬 영화로 생각해서 관심있게 봤는데, 결론적으로 말씀드리자면 저는 최근에 나온 영화들 가운데 화제가 될 만큼의 작품인가, 라는 생각을 했구요. 이러한 결론밖에 끌어내지 못할 바엔 굳이 일본원작을 가져와서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이 정도의 스토리는 일본 원작이 아니더라도 우리나라의 웬만한 작품들에도 많이 만들어낼 수 있을 것 같아요. 원작소설엔 어떤 힘이 있었어요. 영화는 문체적인 힘이나 묘사적인 강점 같은 것을 빼고 나니까 스토리밖에 안 남는데, 그 스토리에서 감독이 어느 정도 개입을 했는가, 개입하고 나서 다시 만들어낸 작품이 어느 정도 힘을 갖느냐, 라고 봤을 때, 저는 사실 개인적으로 아쉽단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저는 크게 세 가지로 봤는데, 사적 복수의  문제, 가해자가 피해자가 되는 현실, 또 하나는 청소년범죄를 처벌하는 방법, 이 세 가지를 다 얘기하고 싶었던 것 같은데, 어느 것 하나도 그다지 뚜렷하게 나오지 않지 않았나, 라는 생각이 들어서, 좀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구요. 그나마 얘기가 좀 되는 것은 사적 복수를 어떻게 할 것이냐의 문제인데, 그건 <친절한 금자씨>에서 도 볼 수 있듯이, 사적 복수를 어디까지 허용할 것이냐, 만약 그것이 된다는 게 법치 위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이냐 인데, 그 결말이 복수의 당사지인 아버지가 원하는 대로 될 수 있는가, 라는 점에서 여전히 해결되지 못했고, 본인이 오히려 가 해자로 몰리면서 결국에는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기 때문에 영화가 노리고 있는 것이 윤리적인 시선인 건지, 아니면 관객에게 서스펜스적인 재미를 요구한 것인지,  하나의 포커스를 맞췄으면 훨씬 더 나았을 텐데, 애매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정재영의 연기나 이성민의 연기가 특별히 나쁜 것은 아니지만, 감독이 애초에 노리고자 한 지점이 어정쩡하게 표현된 작품이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들었어요.

 

윤성은  

이걸 하나의 장르로 생각했을 때 최근 몇 년동안 비슷한 영화들이 많이 등장을 해서 인디영화든 상업영화든 영화계에서 머릿속으로 자연스럽게 비교하게 되었고, <한공주>하고도 자연스럽게 비교를 하게 되었어요. <공정사회>나 봉준호의 <마더>같은 영화에서 어머니가 역할을 했다면, 이 영화에서는 아버지가 계획되지 않은 살인을 하게 되는 데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런데 그 부분이 과연 어떤 부정에 대한 복수를 하고 아버지의 심리가 잘 풀어져 있는가, 뭔가 독특하게 이 영화에서 작용했는가 생각했을 때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구요. 정말 철학적인 부분으로 깊이 들어갈 것인가 아니면 감각적인 영상으로 좀 더 상업적으로 다가올 수 있는 부분들, 두 가지 측면에서 봤을 때, 둘 다 좀 실패했어요. 사적인 복수와 공적인 법질서를 다룬 <미하엘 콜하스의 선택>이라는 영화가 개봉을 해서 화제가 됐었는데, 중도적인 철학의 인물을 다룬 것이죠. 본인의 철학을 그대로 옮길 것인가, 아니면 인간적인 선택을 할 수 밖에 없었는가, 깊게 고민할 수밖에 없는 고뇌들이 드러났는데요, 반면 <방황하는 칼날>은 그렇게도 못했고, 성적인 부분에 있어서도 중간에 너무 지루해서 10분 이상을 드러내도 괜찮을 정도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물론 그 부분이 하이라이트라고 생각하고 그 부분의 긴장감을 가져가고 싶었겠지만, 거기서 정말 이 영화가 너무 많이 늘어져서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참을성이 없게 만들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민병선  

거의 생각들이 비슷한 거 같애요. 일본판 <방황하는 칼날>과 비교를 해보면, '왜' 라는 부분이 있더라구요. 한국영화와 일본영화가 같은 이야기를 해도 현지화 전략에 따라서 이렇게 다르구나 생각했어요. 일본영화는 독립영화적으로 봤구요, 한국쪽에서는 독립영화 좋은데 이렇게 했다가는 흥행이 안되겠다 생각했을 거예요. 사건의 시퀀스 자체가 별로 없거든요, 아버지가 우발적으로 범인 중 한명을 죽이고, 나머지 한 명을 죽이러 간다. 단순하지요. 한국은 제작, 배급이 다 CJ 더라구요. 투자 배급사가 영화를 만들면서 제작사를 압박할 때 분명히 돈 벌게 만들어라, 큰 압박이 왔을 거예요. 그러니까 그때부터 한국식으로 형사들은 갑자기 시끄러워지고, 부산해지고, 코미디 하게 되요. 그 다음에 없는 사건들을 만들죠. 스키장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일본영화에는 없거든요. 청솔학원 에피소드도 없어요. 사건을 복잡하고 다양하고, 더 다이나믹하게 만들어라. 해서 만들다 보니, 문제가 뭐냐 하면 원작의 작은 이야기를 크게 갑자기 바꾸려니까, 이야기 구성에서 뒷 부분을 아예 바꿔야 하는데, 그대로 놔두니까, 문제가 생기더라구요. 뭐가 방황하는 칼날일까 생각해 봤는데, 아버지의 복수를 다룬 이야기니까, 사적 복수인가, 방황인가 했는데, 법을 얘기한다, 라는 생각을 했어요. 법이 방황하고 있구나, 법이라는 게 방황하니까, 개인이 방황하게 되고, 개인이 복수를 하게 되는 어떤 과정인데, 이 영화의 하이라이트는 마지막에 딸을 죽인 범인의 몸에 총을 갖다 대고 발사하느냐, 마느냐 인데, 일본영화에서는 감동이 왔거든요. 근데 한국영화에서는 허망한 거죠. 어, 이게 뭐야, 장난한 거야? 이렇게 돼서 연출력의 차이가 난거죠. 일본영화는 힘을 빼고, 소박하지만 작게, 천천히 가서, 마지막에 큰 감동을 밀어주는데, 한국영화는 재미나 오락쪽으로 갑자기 색깔을 바꾸다 보니까, 구성쪽으로 말이 안 되더라구요. 저렇게 형사들이 살인범을 잡겠다고 하는데, 그렇게 못 잡을 수 있나. 이야기를 끌고 가야되니까, 잡을 수 있는데 안 잡는 꼴 밖에 안 되더라구요. 이래서 구성의 문제가 생기는 거죠. 일본 영화는 마지막 부분을 다 생략해 버리거든요. 총을 쏘려고 하는 지점에서, 형사들이 쏘지 마, 하고 외치는 과정에서 총소리는 나고 점프 컷이 되버리는데, 그 전에 아버지가 계속 설정으로 나오더라구요, 탕, 하고 이러면서 모호하게 가는데, 아버지가 계속 그 얘기를 하거든요, 내가 이 아이를 죽일 것인가, 말것인가 고민을 계속 하고, 그 과정에서 만난 또 다른 인물들, 이버지에게 끊임없이 물음을 던지거든요. 당신은 이렇게 하는 것이 과연 딸을 위해서 혹은 당신을 위해서 최선의 선택이냐, 이걸 묻는 지점들이 있거든요. 아버지가 되물어요. 사냥총 갖고 다니는 사람에게 만약 당신의 딸이 이런 상황이 벌어졌어, 그럼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이냐, 이걸 묻더라구요. 그 사람을 설득하려고 했던 사냥꾼이 결국은 아, 나도 당신과 똑 같은 일을 할 수 밖에 없겠구나, 하고. 그런 사건 속에서 총을 전달해주는 계기가 되는데, 한국영화는 방황하는 칼날이라는 법과 개인의 복수와의 지점을 아쉬웠다. 제대로 전개가 안되었다, 이런 생각을 많이 하면서 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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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연  

아까 말씀하신 것처럼 경찰들 하고 대치를 하면서 쏠 것이냐 말 것이냐, 일본영화에서는 이게 나중에 밝혀지지만, 포탄을 묻고 있었던 건데, 그게 설득이 되는 거지요, 이게 아버지는 그렇게 할 수 있겠다. 범인을 앞에 놓고도 실제 총알이 아니라, 공포탄으로 갈 수 있겠다, 라는 게 설득이 되는데, 정재영같은 경우는 여기서 빈총을 갖고 가는 게 잘 설득이 안 돼요. 한국영화에서 정재영은 진짜 총알을 갖고가서 한 발이 아니라 수십 발을 박아야지, 이 사람이 심리적인 상태에서 이렇게 할 수 밖에 없구나, 라는 게 설득이 될 것 같은데, 좀 실망감이 많이 들었어요. 

 

민병선

근데 아버지는 널 죽이려는 게 아니라, 너에게 죽음의 고통이 뭔지를 느껴보고 네가 반성할 수 있는 기회가 되게 하겠다, 법이 그걸 못하니까 내가 한다, 라는 거였는데, 그걸 실행하기 위한 아버지의 행동이, 일본영화에선 아버지가 노인 같고, 힘이 없어 보이고, 여려 보여서 이해가 가더라구요. 근데 정재영은 <실미도>의 정재영이잖아요. 한국영화로 버전을 바꿀 거면 차라리 죽이고 가든가 아니면 자기도 죽던가, 죽고 자기도 죄값을 받든, 뭔가 다르게 갔으면, 결론을 바꿨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대연  

법정에 서서 자기의 행위가 정당했다,라는 진술을 하면 그게 오히려 이 영화에서는 의미가 맞을 것 같아요. 살인과 의미를 납득시킴이 없이 계속 쫒고 쫒기다가 빈 총을 보였을 때, 이게 뭐지? 라는 생각이 들죠. 방황하는 것은 칼날이 아니라 연출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방황하는 칼날>이 아니라 방황하는 연출인 것 같아요. (일동 웃음)

 

정재형  

<방황하는 칼날>은 첫째, 사적 복수가 있고, 두 번째로는 성인의 자기 파괴적인 성격을 잘 드러내고 있다고 봐요. 세 번째로는 개인적인 해석인지는 모르겠지만 젠더에 대한 문제를 그리고 있다고 보여요. 엄마가 부재하고 아버지가 가부장으로서 딸의 복수를 추척해 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죠. 젠더의 문제로 보이는 것이 윤간의 문제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데요, 남성의 폭력에 관한 문제죠. 물리적으로 힘이 약한 여성을 남성이 능욕하는 소재를 다루고 있고 그것에 대한 응징이죠. 원작에서는 아버지로 상징되는 매체가 총과 칼이에요. 이는 남성 젠더의 상징인데, 첫 번째 가해자를 죽일 때는 칼로 찌르고 두 번째는 총을 사용합니다. 젠더의 문제가 영화에 상징적으로 있는데, 한국판 <방황하는 칼날>은 야구방망이를 사용해 살인을 저지르죠. 원작이 갖고 있는 젠더의 문제를 영화가 전반적으로 놓친 것이 아닌가 생각을 하게 됩니다.

방황하는 칼날의 의미도 주인공의 자기 파괴성, 절망적인 상태, 환멸적인 상태로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무력함, 가부장의 몰락 같은 상황을 그리고 있어요. 넓게 확대되면 가부장이 추적했던 상황들은 우리 사회가 가지고 있는 남성에 의한 폭력, 영화에서도 암시가 되지만 미성년자를 기용해서 윤락행위를 시킨다든가 이런 장소를 가게 되고, 넓게 확대되면 사회가 갖고 있는 폭력, 가부장적인 폭력, 국가적인 폭력으로 확대 유추할 수 있는데 그 종말이 결국은 스스로 응징을 하려고 했지만 결국 성공하지 못하죠. 과거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차이나타운>에서 봤듯이 거대한 사회 부조리를 알게 되지만 해결하지 못하는 것과 흡사하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성진수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은 추적 중심의 심리 소설이라는 인상을 받았어요. 형사가 추적을 하면서 주변인을 보는 심리상태라든지, 범인의 심리상태라든지, 혹은 심리적인 관계라든지, 사실을 알아가거나 사건이 진행되면서 인물이 겪는 심리적인 모습들이 소설의 큰 비중을 차지하죠. 그래서 흥미롭게 만들고 빠져들게 만드는데요. 영화가 사건 중심으로 가다보니까 마지막에 아버지의 심리적 방황이 느껴지지 않는 것 같아요. 일본영화는 그런 부분이 어떤지 궁금합니다.

 

민병선  

일본영화(방황하는 칼날)에서 느낀 건 <한공주>랑 유사하다는 거예요. 인물의 심리를 다루고, 차분하게 이야기가 진행이 되면서, 진솔하게, 연출자가 이야기를 쫓아갈 때 마지막 결론에서 얻는 감동이 있었어요. 한편으로는 한국이 영화를 굉장히 잘 만드는구나. 일본판 <방황하는 칼날>은 독립영화의 패턴을 보이는데요, 일단 컷이 빠르지가 않고, 일본영화의 특징이지만 관찰을 한다던지 거리를 둔다던지, 관계성에서 이야기를 느끼게 한다던지, 그것이 효과적으로 아버지의 심리상태를 잘 좇아갈 수가 있고, 형사들도 내면적으로 아버지를 좇아가면서, 법이란 뭐지, 물음을 던지면서 감동을 끌어올리는 한국영화는 메시지 측면에서 약해요. 그러다보니 구성의 문제가 있어요. 바꾸려면 더 잘 바꿔야 하는데 바꾸다가 중간부터 흐지부지되고 결론을 똑같이 가려고 하다보니까 부조화가 생기는 측면이 있다고 봐요.

 

정재형  

일본원작과 한국영화의 각색, 빈번해졌는데, 또 원작의 일본영화도 있고, 비교대상이 되는데요, 과거 <백야행> 같은 경우도 그런 느낌을 받았어요. 원작에 충실해서 담담하게 풀어 가는데 우리 입장에서는 심심하다고 볼 수 있죠. 상업적이지 않다는 거죠. 한국영화는 다이내믹하게 가요. 홍콩영화 <천공의 눈>을 리메이크했던 <감시자들>의 경우에서도 확연하게 느꼈어요. <천공의 눈>은 담담하게 갔어요. 주변에서 이야기가 쿨하다는 얘길 자주 들었어요. <감시자들>은 다이내믹한 싸움장면을 많이 넣어서, 할리우드식 액션장면을 넣는 것이 한국적이라는 걸로 느껴지듯이 비교가 됐어요. <백야행>에서도 일본과 한국이 영화를 대하는 태도가 다르구나. 민병선씨 애기에 동의를 하는데 한국이 영화를 잘 만든다고 느끼게 해요. 아시아 시장에서도 한국영화를 오락적으로 상업적으로 보는 거 같아요. 일본영화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유한 특색이 있죠. 거리감을 두면서 사건의 이면에 심리나 깊은 사유를 상업영화에서도 포기하지 않으려고 한다는 거죠. 그런데 우리 시각에서만 보다보니까 한국영화는 할리우드랑 차이가 없어요. 일본영화는 색깔을 유지하면서 상업영화를 만드는데 한국영화는 어떠한 소재든지 할리우드 영화처럼 만든다는 거죠, 두 가지의 양면성이 있는데 한국영화 형식은, 드라마트루기나 촬영, 연기의 방식을 할리우드식으로 만들고, 사회성은 한국 사회를 모델로 가고 있어요. 그런 양면성이 있는데 관객 입장에서는 사회성을 심각하게 공감한다기 보다는 영화적 재미에 빠진다는 측면에서 할리우드 영화랑 차별성이 없어요. 일본영화가 낫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자국 영화로서 한국영화는 원작을 대하는 태도에 있어서 적어도 원작이 가지고 있는 문제의식을 주제로 깊이 있게 다루지 못하는 측면에서 반성해야 해요. 원작이랑 똑같이 만들 필요는 없지만요.

제가 아까 말한 젠더의 문제가 암시하듯, 고독한 아버지의 사적 응징이 의미하는 바가 너무도 명확하게 국가 폭력이나 윤간을 이야기하거든요. 자기 딸을 피해자로 만들고 죽음으로 몰고 간 문제, 국가 폭력과 관련이 되는데, 쌓아져 있던 가부장적인 폭력을 감독이 이대연 평론가 말처럼 방황하고 있다고 봐야죠. 실망한 이유는 주제가 감동을 주지 않아서 그런 거죠. 감독이 벌려만 놓고 암시만 했지 정확하게 매듭을 짓지 못하는 불감증이 있어요. 그래서 관객들이 허탈하게 극장 문을 나서는 거 같아요. 원작은 심리적이고 사회적인 문제를 되돌아 볼 수 있는 여지를 줬고,  일본영화도 그 안에서 주제를 깊이 있게 다루는데 한국영화는 재미만 좇다가 깊이를 놓쳐서 허탈한 영화로 만들었나, 반성을 해야 해요.

 

이대연  

아버지가 눈밭에 있는데 딸의 환영이 나와서 아빠에게 ‘이제 그만해’ 말하는데 배신감을 느껴요. 아버지의 목소리 같기도 하고, 사회의 목소리 같기도 하고, 그건 딸의 목소리가 아닌 것 같은데, 딸의 목소리로 전달하니까 가식적으로 다가왔어요. 감독이 이 지점에서 뭘 하고 있는 건지 모르는 것 같다고 느꼈어요. 이 영화에서 가장 불편한 지점이라고 느꼈어요. 그게 젠더 문제랑 관련이 될 수 있겠구나 생각이 되기도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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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형  

저는 그런 생각을 했어요. SBS드라마 <추적자> 있었는데 트렌드가 딸에 대한 아버지의 복수죠. <또 하나의 약속>도 딸을 잃은 아버지가 산재배상을 받기 위해 몰두하는 모습이라든지, <추적자>도 그렇고. 이것이 실제로 영남제분 사모님에 의해서 청부살인으로 딸을 잃은 아버지가 계속 한동안 딸의 죽음에 관한 미스터리를 추적했던 비화가 생각났어요. 현실적으로 딸을 잃은 아버지가 분투하는 게 현실에 있었고 영화에 반영되는데, 어떤 의미에서는 이 영화가 잘 만들어 질 수 있었다면 한국의 그런 현실에 맞닿아 있는 상상력이 관객에게 있기 때문에 주제를 잘 추려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사회적인 상상력으로 주제를 발전시키지 못했기에 그래서 허탈함을 느끼게 되죠. 그런 의미에서 실패했다고 볼 수 있죠.

 

이수향  

기왕에 제대로 사회적으로나 철학적으로나 깊이 있게 법과 심판의 문제를 나아가지 못할 거라면 좀 더 재미있는 스릴러 영화로 만들었으면 괜찮지 않았을까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 의미에서 남자 가해자들 중 문자를 보내주는 남학생이 있는데 걔의 존재는 뭘까 이상했어요. 가해자 편에 있는데 왜 아버지한테 굳이, 본인만 숨어있으면 되는데 정보를 보내주나 궁금했어요. 이 영화를 스릴러 적으로 잘 살리기 위해선 아버지를 도와주는 미지의 메시지, 굉장히 중요한 모티브고 잘 살렸으면 스릴러적인 효과를 극대화 할 수 있었을 거예요. 또 하나는 지적하셨던 탕! 했을 때, 총알이 없는 장면에서 유치한 감동이나 눈물이라도 흘리게 했어야 하는데 이 두 부분을 잘 못 살린 게 아쉬웠어요. 그 남학생이 굉장히 어중간한 존재가 되어버린 거예요.  마지막에 그 조두식 잡으려고 투입했는데 걔는 왜 도망갔으며, 도망갔는데 결국 그게 또 해결이 안됐죠.

 

성진수  

저도 비슷한 생각을 했어요. 차라리 그 누군가 문자 보내는 것을 좀 더 스릴러로, 약간 미지의 뭔가로 만들어서 처리했다면 하는 생각을 똑같이 했는데, 그런 의미에서 그 영화가 너무 많은 것을 다루려고 했던 거예요. 그 아이도 어떻게 보면 자기또래의 한 명의 피해자인 거잖아요. 그러니까 걔는 자기가 같이 있었던 그 조두식이라는 애가 살아서 돌아오면 자기가 걔한테 죽게 될지도 모르니까 그런 행위를 하는 굉장히 복잡한 이야기 층위들을 만들어낸거죠. 그런데 그게 오히려 지금까지 얘기했던 것처럼 그 영화에서 다층적으로 다루어지지 못했고, 인물의 행위에 대 한 동기들이 그 캐릭터 안에서 살려내지 못해서 그게 굉장히 아쉬웠어요. 또 한 가지는 아까 정재형 선생님께서 우리나라에서 할리우드의 상업성을, 그 독특함을 살리지 못하느냐고 했는데, 저는 사실 좀 더 나아가서 이 영화에서 가장 아쉬웠던 건, 아예 일본 영화는 분명히, 원작을 보면 이렇게 사람들이 혼자 고민하고 생각하는 것을 중심으로 나갈 거예요. 그러면 그것을 가져와서 아 이게 뭔가 사회적 메시지도 있고, 다이나믹한 추격도 있을 것 같고, 약간의 미스터리도 있을 것 같으면 아예 더 할리우드 영화처럼 그야말로 제가 지금 막 생각나는 예를 들어서 <모범시민>이라든지 그런 것처럼 진짜 아버지가 가족 다 죽인 것으로 복수해 버리는 그렇게 더 상업적인 상상력까지 가지 못했나 하는 것이예요. 자신의 위치를 애매하게 가져간 것이 저는 굉장히 방황하고 있다고 느껴진 지점이었고, 영화에서 아쉬웠어요.

 

정재형  

지금 이게 원작하고 일본 영화는 원작에 충실하게 가서 그랬던 것 같아요. 심리적인 느낌을 가졌던 게. 왜냐하면 원작이 화자들을 나눠서 서술을 하거든요. 주인공에 해당하는 사람의 서술이 있으면 그 다음 챕터에서는 또 소년의 이야기가 들어가고, 중요한 인물 서너명이 돌아가면서 심리적 서술을 하기 때문에 독자의 입자에서 심리적 배경을 충분히 이해하면서 넘어가구요. 근데 이제 그런 부분을 일본 영화가 잘 살렸겠죠. 그러니까 심리적인 연출이라는 느낌을 받았을 텐데. 우리는 사실은 굉장히 이 서사구조 자체가 서술자의 위치가 좀 바뀌었거든요. 그래서 주인공을 분명히 뒀어요. 근데 그 표면적인 주인공은 형사입니다. 그런데 그 형사는 관찰자로 서의 화자예요. 그리고 실제로 관찰하는 사람의 주인공은, 극중 주인공은 또 아버지거든요. 그러니까 이게 그런 어떤 겹구조를 갖고 있는 거죠. 그래서 우리가 형사를 통해서 주인공에 동화가 되기도 하는 건데, 정재영이라는 이상현 역할을 했던 주인공에 동화가 되기도 하는 건데, 그러면서 뭐가 실종이 됐냐면 바로 원작이 갖고 있었던 서너명의 자기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던 심리적 배경이 거세가 되다 보니까 그 소년이 마지막에 갑자기 방향을 틀어가지고 길을 가는 장면이 있죠. 자기가 엉뚱한 길로 도망가 버리는. 그런 강박관념이 그것이 원작에서는 계속 걔의 강박관념으로 서술이 되었기 때문에 마지막에 그런 행동을 한다 할지라도 그게 납득이 됐는데, 그게 갑자기 얘는 왜 마지막에 길을 바꿨을까 하는 것이 관객한테 의문으로 남는거죠. 사실은 걔가 중간중간 비중있게 등장을 하지만 심리적으로 서술이 안됐던거죠. 연출에서. 그런 인물 중에 또 하나의 인물은 그 형사 옆에 있던 그 신참 형사도 마찬가지거든요. 그래서 이게 원래 다양하게 이렇게 무게중심을 동등하게 가지면서 심리적으로 서술됐던 원작의 분위기를 일본 영화는 많이 갖고 갔는데, 이 영화는 각색을 해서 그렇게 가지 않았다는 차이가 있는데, 결과적으로는 그게 실패했다고  생각을 하게되는거죠. 그렇다면 그 심리적인 무게감을 어떻게 실어줬어야 됐을까, 정말로 중심을, 주인공을 확실하게 갔으면 주인공 위주로 갔었어야 됐는데 왜 방계인물을 부각을 시켰을까. 이런 것들이 굉장히 어지러운, 정리되지 않은 연출이라고도 볼 수 있겠죠.

 

윤성은  

아까 말씀하셨던 그런 젠더의 문제와 연결을 시켜서 제가 지금까지 나온 <가시꽃>과 <한공주> 이런 것을 다 포함해서 이게 다 남성 연출들이 만든 영화들이잖아요. 저는 이런 걸 보면서 사실 여성 감독들이 물론, 지금 충무로에서 활동하고 있는 감독들이 그렇게 많지 않지만, 여성 감독들이 독립영화를 이런 식으로 만드는 게 아니라 남성 감독들이, 이런 소재 자체는 그렇게 신선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이런 영화를 만들어나가는 것이 굉장히 흥미로워요. 그들은 본인들이 남성이라는 어떤 죄의식이 있는 것 같아요. 그런 것들을 기반으로 해서 사실 이 때까지 <공정사회>와 <돈 크라이 마미>와 <가시꽃>을 보면 다 처벌하는 것이거든요. 이 사회의 법이 잘못되어 있고, 그렇기 때문에 누구라도 나서서 처벌을 할 것이다. 그게 부모든 아니면 그 여자를 좋아했던, <가시꽃>에서 그런 주인공이든. 그런데 이 영화는 그런 부분이 아니라 철학적인 선택의 문제를 건드리려고 했는데, 결론이 정말 우리가 계속 처음부터 방황하는 연출이라는 말이 나올 수밖에 없는게, 본인이 그 부분에 대해서 아직 좀 정리는 명확하게 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리고  또 좀 다른 문제지만, 여기서 저는 그 문자 보낸 학생을 포함해서 항상 원치 않는 데 꼬봉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 일에 가담하게 되는 남학생이 항상 꼭 나와요. 그래서 어떻게 보면은 감독도 자기도 원치 않지만 나도 남성이기 때문에 나도 같은 죄의식 하에서 이런 영화를 만들 수밖에 없는 같은 처지라는 약간의 생각도 들고, 그 캐릭터가 참 재미있는 것 같아요.

 

정재형  

저는 그래서 어느 정도 이 영화에 대해서 정리가 되었다고 보는데, 그래서 아까 제가 사적으로 그런 제안을 했잖아요. 사실은 이게 공통분모가 있다. 지금 윤성은씨가 얘기한 그 부분인데, 저도 그 윤간이라는 소재에 공통점이 있으면서 그런 캐릭터들이 또 공통이 돼요. 근데 그런 것은 물론 성급하게 제 결론을 말씀드린다면, 그것이 남성 감독들이 갖고 있는 남성의 무력함, 이 영화에서도 나타나는, 뭔가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남성 주체, 가부장 주체의 무력감하고 통하는 것이거든요. 우리 사회에서. 저는 그렇게 봤어요. 그래서 성급하게 제가 먼저 저의 얘기를 했지만, 저는 그 부분을 좀 더 심도 있게 얘기를 했으면 좋겠다. 결국은 <한공주>나 <방황하는 칼날>을 따로따로 이야기할 것이 아니라 사실 공통적인 문제가 이 두 영화에 있는데, 그 두 영화 뿐 아니라 저는 사실은 제 차례가 되면 저는, 지금 윤성은씨가 몇 개의 영화를 얘기했지만, <가시꽃>이라든지 얘기를 했지만, 굉장히 최근에 두드러지고 있는 한국영화의 한 소재의 현상이예요.

 

윤성은  

남성의 무력감이요?

 

정재형  

남성의 무력함이라고 표현해도 되고, 어떤 윤간의 소재라든지 젠더 주제를 둘러싼 윤간의 소재라든가 남성의, 가부장의 무력감을 표출하고자 하는 그런 욕망이라든지, 그런 서사 욕망이 있거든요. 그래서 그 캐릭터를 통해서 자꾸 대변하고 있는 것이거든요. 그래서 이 부분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조금 심도 깊은 얘기를 저도 듣고 싶고, 저도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있는 것 같습니다.

 

정재형  

그럼 이제 <한공주> 얘기로 넘어가 보죠. 역순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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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자관리자

등록일2014-0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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