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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상자료원_구술사아카이브_정창화감독

구술자정보
구술자 정창화
분야 감독
출생년도 1928
채록연구자 박선영
구술면담일 2008년 09월 20일 ~ 2008년 09월 30일
구술연구결과물 구술채록자료집: 본원[071.9106/P8/6]
구술자해제문
구술자해제문

정창화

 

 구술자 정창화는 1928년 11월에 태어나 서울에서 자랐다. 영흥실업주식회사라는 무역회사를 운영하셨던 부친은 아들이 사업을 이어받기 원하셨지만 오히려 음악에 재능을 보여 서울음악전문학원에 입학, 성악을 공부하다가 최인규 감독의 <자유만세>(1945)를 본 뒤 영화감독이 될 것을 결심한다. 최인규 감독의 형이자 고려영화주식회사의 사장이었던 최완규와 친분이 있으셨던 아버지의 덕분으로 최인규 감독의 문하에 들어가게 된 구술자는, 강하고 근성 있는 감독을 길러내고자 했던 최인규 감독의 뜻에 따라 힘든 조감독 생활을 거치게 된다. 이 시기 구술자는 카메라의 작동법, 편집의 기술 등을 현장에서 직접 체험하며 배웠고 콘티를 공개하지 않았던 최인규 감독의 성격 탓에 스스로 콘티를 그려가며 영화감독이 되기 위한 수업을 해 나갔다. 또한 이때 함께 조감독 생활을 했던 홍성기, 신상옥 감독과의 인연은 이후로도 오랫동안 지속된다.

 구술자는 전쟁 이전 <유혹의 거리>라는 데뷔작을 준비하였으나 전쟁 통에 화재로 원판이 소실되고, 이후 일본으로 유학을 가기 위해 남하하던 중 대구에서 국방부 정훈국 촬영대에 들어가게 된다. 입대한 지 1년 반이 지났을 무렵, 다대포에서 부모님이 사고로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받고 제대한 뒤, 유산으로 부산에서 <최후의 유혹>(1953)을 찍어 개봉하는데 흥행에서는 성공하지 못한다. 전쟁 후 서울로 돌아온 뒤 <장화홍련전>(1956)의 연출을 제의 받게 되고, 이 영화의 흥행 이후 <풍운의 궁전>(1957), <사랑이 가기 전에>(1959) 등 다양한 장르 영화 연출을 통해 형식을 실험하는 한편 <망향>(1958)을 비롯한 한국•홍콩 합작 영화들도 만들기 시작한다.

 구술자가 액션영화 연출에 재능을 발휘하기 시작한 것은 <햇빛 쏟아지는 벌판>(1960)에서부터였다. 이때부터 속도감 있는 내러티브 전개와 빠른 편집, 다양한 특수 효과와 강렬한 메시지를 바탕으로 하는 ‘정창화표 액션’이 등장했고 관객들은 환호했다. 액션영화 연출에 대한 애착은 <노다지>(1961), <지평선>(1961), <수색대>(1964), <사르빈 강에 노을이 진다>(1965) 등 이 시기의 주요 작품들로 이어져 구술자의 창의적이고 깊이 있는 영화 세계는 빛을 발했다. 뿐만 아니라 <위험한 청춘>(1966), <위험은 가득히>(1966), <조용한 이별>(1967) 등 청춘영화와 멜로드라마 등의 장르영화에서도 구술자는 당대의 관객들과 조우할 수 있는 신선한 감각과 짜임새 있는 이야기 구조를 보여주었다.

 1960년대 한국영화계의 관객들을 영화관으로 끌어들이며 다양한 장르영화를 소화했던 구술자를 홍콩 쇼브라더스(Shaw Brothers)에 스카우트 되게 했던 것은 <순간은 영원히>(1966)였다. 혼잡한 홍콩 시가지에서 박진감 넘치는 액션신을 보여준 구술자의 연출력에 감동한 쇼브라더스의 란란쇼(Run Run Show) 사장은 구술자에게 당시 최고의 개런티를 제시하며 스카우트를 제의했고, 무엇보다 쇼 무비타운의 광대한 규모와 체계적인 제작 시스템에 매혹된 구술자는, 검열과 열악한 제작환경으로 어려웠던 한국영화계를 떠나 보다 넓은 곳에서 감독으로서의 꿈을 마음껏 펼쳐보고자 홍콩으로 향하게 된다. 쇼브라더스에서 구술자는 첫 작품이자 홍콩 영화 최초로 유럽에 수출된 작품인 <천면마녀>(1969)를 시작으로 액션물은 물론, <여협매인두>(1970), <아랑곡>(1970) 등 중국 감독들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무협물에서도 큰 성공을 거두면서 입지를 단단히 하게 된다. 또한 중국 전통 무술인 쿵푸를 창조적으로 재해석하고 원치 않는 살인에 대한 고뇌를 표현하면서 삶과 죽음에 대한 철학적 메시지를 담은 영화로 완성시킨 <죽음의 다섯 손가락>(1972)은 홍콩에서는 <천하제일권>이라는 제목으로, 미국에서는 <죽음의 다섯 손가락(Five Fingers of Death)>으로, 영국을 비롯한 유럽에서는 <킹 복서(King Boxer)>라는 제목으로 개봉하면서 대단한 성공을 거두게 된다. 특히 미국에서는 개봉 첫 주 흥행 1위를 차지하고 그해 개봉 영화 흥행 10위 안에 드는 뛰어난 성적을 거두면서 구술자의 이름을 세계적으로 알리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그러나 쇼브라더스와의 인연은 계속 되지 못했는데, 제작 총책임자였던 레이몬드 쵸우우 대신 총 책임자로 들어온 모나팡(Mona Fong)과의 불화 때문이었다. 영화에 대한 이해가 전무하다시피 했던 모나팡 때문에 전속 감독들은 쇼브라더스를 떠나기 시작했고, 구술자는 이때 소규모 제작사를 차려서 독립한 레이몬드 쵸우(Ramond Chow)의 스카우트 제의를 받고 골든하베스트(Golden Harvest)로 이적하게 된다. 골든하베스트는 당시 신생 회사였기 때문에 쇼와 같은 시스템을 갖추지는 못했으나 이소룡을 영입하면서 차츰 성장하는 과정에 있었으며, 이 과정에 구술자 역시 일익을 담당하면서 <흑야괴객>(1973), <염굴신탐>(1975) 등 4편의 영화를 연출했다.

 홍콩에서 큰 성공을 거두고 있을 때, 당시 문화공보부 장관 김성진은 구술자에게 영화적 지원을 약속하면서 귀국할 것을 권유, 오랜 외국 생활로 지쳐있던 구술자는 10년 만에 한국으로 돌아오게 된다. 귀국한 후 구술자는 화풍흥업주식회사를 차리고 홍콩의 선진적 제작시스템을 도입하여 전문 PD를 양성하는 등 영화계에 활력을 불어넣기 위한 의욕을 보였다. 그러나 화풍흥업주식회사는 영화사 등록제 시스템 하에서 기존 업자들의 반발과 정권의 교체 등으로 인해 재정적인 어려움에 처하게 된다. 양질의 영화를 수입하고 홍콩과의 합작 영화를 추진하며 우수영화를 제작하는 등 꾸준히 작품 활동을 하고자 했으나, 결국 1986년 <수렁에서 건진 내딸2>(김호선)을 마지막으로 작품 제작에서 손을 떼게 된다. 그리고 2003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회고전을 통해 재조명되면서 구술자는 “한국 액션영화의 전설”로 귀환한다.

 구술자는 한국영화사에서 다양한 장르가 태동하던 시기에 활동하면서, 누구보다 장르에 대한 심도 있는 자의식을 가지고 영화를 만들었던 감독이었다. 한국영화의 침체 원인이 천편일률적인 이야기 구성과 정적인 구도에 있다고 파악한 그는 액션 장르에 관심을 기울임으로써 역동적인 화면 구성과 박진감 넘치는 미장센을 만들어 내기 위해 노력했다. 또한 편집의 중요성을 파악하여 빠른 장면전개로 관객들의 흥미를 이끌어내었고, 다양한 기법들을 실험하면서 사실적이고 실감나는 화면을 연출해 내었다. 새로운 이야기와 기법에 대한 구술자의 천착은 특히 액션영화 연출에서 빛을 발했다. 본격적인 액션영화 연출의 시작을 알렸던 <햇빛 쏟아지는 벌판>(1960)은 빠른 이야기 전개와 흥미로운 설정으로 관객들의 시선을 사로잡았으며, <지평선>(1961)과 <사르빈 강에 노을이 진다>(1965)에서는 각각 만주와 미얀마를 실감나게 재현함으로써 이야기의 사실성과 관객의 몰입도를 높였다. 특히 <지평선>은 만주를 배경으로 하는 독립군 이야기로, 이후 만주 대륙물의 유행에 큰 영향을 끼친 작품이 되었고 <사르빈 강에 노을이 진다>의 실감나는 미술은 현지 로케를 방불케 했다는 평을 들었다. 또한 <황혼의 검객>(1967)에서는 한국 최초로 트럼블린을 사용하여 역동적인 화면을 만들어 내었다. 이처럼 액션영화 연출에서 구술자가 보여준 독창적인 사례들은  한국 액션영화가 시도되고 정착되어 가는 과정의 실제를 보여주는 중요한 증언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이 영화들에서 시도한 새로운 기법들과 연출법, 탄탄한 내러티브, 빠른 편집과 메시지의 전달력 등은 이후 한국 액션영화들이 나아갈 바를 보여준 교본과도 같았다. 데뷔 초기에 수편의 액션 영화와 <장군의 아들>을 비롯한 뛰어난 영화들을 연출한 임권택 감독과 데뷔 이후 20년 동안 약 60여 편의 액션영화만을 고집한 김시현 감독이 구술자의 조감독 출신이라는 점도 구술자의 액션영화에 대한 열정이 이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안타깝게도 현재 한국영상자료원에는 구술자의 연출작 52편 중 20편의 필름만 남아 있다. 특히 초기 영화들은 필름은 물론, 자료조차 찾아보기 힘든데 이는 특히 동남아에서 큰 인기를 모아 수출이 잘 되었던 구술자의 영화들이 제작배급사의 열악한 상황 탓에 원판 채 수출되어 회수되지 못했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두 번째로 관련 기사나 기록을 찾아보기 힘들다는 점은 액션 장르를 당시 평론계와 언론이 외면했기 때문으로 추측할 수 있다. 그러므로 손실되어 실체를 확인할 수 없는 각 영화의 얼개와 구체적인 장면들의 연출법에 대한 구술자의 상세한 증언은 한국 장르영화사, 특히 액션영화사에 대한 재구성을 가능하게 해 준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고 하겠다.

 한홍합작영화는 <이국정원>(전창근, 1957)에서부터 시작되는데, 구술자는 합작영화 제작 초창기였던 1958년 <망향>을 연출하면서 해외의 새로운 시장의 존재에 눈뜨게 된다. 이후 홍콩으로 스카우트 될 때까지 4편의 합작영화를 연출하고 홍콩 진출 이후에도 이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인력의 수출과 영화 제작을 적극 담당했으며 한국에 돌아온 이후 쇼브라더스와 함께 몇 편의 영화를 함께 제작했다. 이와 같은 일련의 과정은 한홍합작영화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행보임에 틀림없다. 구술자는 합작영화가 열악했던 당시 한국의 영화제작상황을 타개하고 동남아를 비롯한 세계 시장을 개척할 수 있는 교두보를 마련해 줄 수 있는 기회였다는 점을 높이 평가했으며, 이러한 그의 시각으로 바라본 합작영화 제작 현장의 상황은 지금까지 부실했던 합작영화에 대한 연구를 촉발해주는 시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순간은 영원히>(1966) 이후 쇼브라더스에 스카우트 되어 활동했던 구술자의 영화제작체험과 쇼 무비타운을 비롯한 시스템과 수출 인력에 대한 기억, 그리고 쇼브라더스의 흥망성쇠에 관련된 증언 등은 쇼브라더스에 대한 연구에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해 준다. 쇼브라더스는 당시 홍콩뿐 아니라 아시아 최대 규모의 스튜디오와 제작 시스템을 갖춘 무비타운을 소유하고 있었고 이는 할리우드 스튜디오 시스템에 버금가는 시설이었다. 쇼브라더스의 제작 방식과 배급, 상영 시스템은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의 여러 국가들에도 큰 영향을 미쳤는데, 구술자의 증언은 그 영향관계의 실마리를 찾아볼 수 있게 해 준다. 또한 쇼브라더스에 이어 현재까지 홍콩의 대표적인 제작사로 자리하고 있는 골든하베스트의 초기 발전을 주도한 감독으로서 구술자의 위치는 재평가 되어야 할 부분이다. 더 나아가 한류를 중심으로 어느 때보다 아시아권의 문화교류가 활발한 요즘의 상황에 비추어 볼 때, 1960년대와 1970년대 동아시아 문화권에서 활발했던 영화와 인력의 교류에 대한 구술자의 언급과 그 자신의 활동은 ‘문화공동체로서의 아시아’에 대한 기원을 찾아볼 수 있게 해 준다는 점에서도 중요하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전술했듯이 해방 이후 약 40여 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구술자는 활발하게 영화를 연출하고 제작하면서 한국영화계의 부침을 몸으로 겪은 생생한 증인이었다. 특히 구술자가 군사정권 하에서 혁명을 정당화하는 영화를 만들라는 요청을 받았던 경험과 당시 제작사 및 감독들의 반응, 그리고 전성기를 구가하던 홍콩에서의 생활을 접고 한국으로 돌아온 이후 정권의 몰락과 새 정부의 수립을 거치며 처하게 된 어려움 등은 부침 많은 한국현대사와 함께 걸어온 한국영화계의 이면을 대변하는 것이라 할 수 있으며, 결여된 역사의 한 장면을 복구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시간 속에서 구술자가 한결같이 관객과 소통할 수 있는 영화를 고민했다는 점이다. 국가와 문화, 그리고 시간을 뛰어넘어 열정과 진심으로 다가가는 영화는 어디에서나 통한다는 진실을 믿으며 ‘영화가 천직’이라고 말하는 구술자는 언제나 영화만을 화두로 삼으면서 새로운 영화 만들기에 대해 고민하는 영원한 ‘영화청년’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구술자 인적 경력사항
구술자 인적 경력사항

1. 인적사항

성     명   정창화(鄭昌和)


생년월일   1928년 11월 1일(양력)


본     적   서울시 중구 신당동


주     소   LA Jolla, CA92037, U.S.A


2. 수련과정

 

1940    경기공립상업학교
1945   서울음악전문학교(2학년 재학 중 최인규 감독의 문하로 들어감)
 

3. 활동경력

 

 ▶ 일반활동

1928            영흥실업주식회사를 운영하시던 아버지 정위영과 어머니 김율림 사이에서 2남 3녀 중 장남으로 
                  충청북도 음성에서 출생, 이후 서울에서 성장
1940~1944    사업을 하시던 아버지의 권유로 경기공립상업학교 재학(5년제) 
1945~1946    서울음악전문학교(성악전공) 입학, 2학년까지 다니던 중에 최인규 감독의 <자유만세>를 보고 
                  영화감독이 될 결심을 하게 되었다.
1946~1949    최인규 감독의 문하로 영화계에 입문, 조감독이 되었다. 홍성기, 신상옥 등과 함께 <국민투표>
                  <죄 없는 죄인>, <독립전야>, <파시> 등의 조감독 역할을 하며 영화감독으로서의 기본적 자질을 
                  익혔다. 
1950            김성민 시나리오로 <유혹의 거리>라는 데뷔작을 준비, 촬영과 편집을 마친뒤 녹음을 준비하던 중 
                  6?25 전쟁 발발, 화재로 원판이 소실되었다.
1951~1952    부산으로 내려가던 중 대구에서 국방부 정훈국 촬영대에 입대, 강원도 정선•창녕 지역의 9사단으로 
                  배치되어 활동하던 중 적들의 포위망을 뚫고 구사일생으로 탈출, 다시 대구에서 원대복귀를 했으나 
                  부모님의 사고사로 인해 제대하게 되었다.
1953            실질적인 데뷔작이 된 <최후의 유혹>을 촬영, 부산 부민관에서 개봉했으나흥행에 성공하지 못했다.
1956~1959    <장화홍련전>을 시작으로 <풍운의 궁전>, <후라이보이 박사소동> 등 다양한 장르의 영화를 
                  연출하면서 액션영화 연출을 위한 기틀을 다졌다. <망향>을 비롯한 한홍합작  영화 연출을 시작했다.
1960~1967    <햇빛 쏟아지는 벌판>에서부터 본격적인 액션영화 연출을 시작, <지평선> 이후 만주를 무대로 하는
                  대륙물들이 쏟아지기 시작했으며, 그 외 청춘영화를 비롯하여 특히 액션이 가미된 다양한 영화들을 
                  연출했다.
1967~1972   <순간은 영원히>를 본 홍콩 쇼 브라더스사의 란란쇼 사장으로부터 스카우트 제의를 받아 홍콩으로 
                  건너간 뒤 <천면마녀>, <여협매인두>, <아랑곡> 등의 무협영화에서 성공했다.
1972            <죽음의 다섯 손가락>을 연출, 할리우드 박스 오피스에서 1위를 차지했다.
1973~1977    골든 하베스트로 이적한 뒤 <흑야괴객>, <황비홍소림권>등을 연출했다.
1978            한국으로 돌아와 화풍흥업주식회사를 설립. 1986년까지 29편의 영화를 제작했다.
1981            사단법인 한국영화제작자협회 부회장
1982            사단법인 한국영화제작협동조합 이사
1983            사단법인 한국영화제작자협회 이사 
1996            미국으로 이주하다.
2003            제8회 부산국제영화제 회고전에서 ??한국 액션영화의 전설, 정창화!?? 개최
2004            홍콩필름아카이브에서 회고전 개최, 파리인터내셔널 필름 페스티발에서 회고전 개최
2005            칸 영화제 클래식 섹션에 <죽음의 다섯 손가락> 초청됨
2007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장편 심사위원장 역임
2008            춘사영화제 심사위원장 역임

 ▶ 작품활동 (KMDb 참고)

 <감독>
1953
     <최후의 유혹>
1954     <유혹의 거리>
1955     <제이의 출발>
1956     <장화홍련전>
1957     <풍운의 궁전>
1958     <망향>, <비련의 섬>
1959     <사랑이 가기 전에>, <후라이보이 박사 소동>
1960     <슬픔은 강물처럼>, <햇빛 쏟아지는 벌판>
1961     <노다지>, <장희빈>, <지평선> 
1962     <대장화홍련전>, <대지여 말해다오>, <칠공주>
1963     <대지의 지배자>, <대평원>, <청춘산맥>
1964     <밤안개>, <부부전쟁>, <수색대> 
1965     <사르빈강에 노을이 진다>, <살인명령>, <유부녀>, <죽도록 보고싶어>
1966     <광야의 결사대>, <내 청춘 황혼에 지다>, <순간은 영원히>, <예라이샹>, <위험한 청춘>
1967     <돌무지>, <비련>, <위험은 가득히>, <조용한 이별>, <황혼의 검객>
1968     <나그네 검객 황금 108관>, <모정의 비밀>, <정염>, <허무한 마음>
1969     <천면마녀>
1970     <여협매인두>, <아랑곡(한국: <아랑곡의 혈투>)>
1971     <육자객(한국: <칠인의 협객>)>, *<래여풍>
1972     <천하제일권(미국: <죽음의 다섯 손가락>, 한국: <철인>)>
1973     <흑야괴객>
1974     <황비홍소림권(한국: <황비>)>
1975     <염굴신탐(한국: <흑무사>, 1974)>
1976     <귀계쌍웅(한국: <심판자>)>
1977     <파계>

 <기획>
1962
     <대지여 말해다오>
1985     <달빛타기>(이영실)


 <제작>
1954
     <유혹의 거리>(정창화)
1979     <불행한 여자의 행복>(변장호), <어느 여대생의 고백>(김선경), <학을 그리는 여인>(조문진)
1980     <괴초도사>(신위균), <노명검>(김선경, 계이치홍), <색깔있는 여자>(김성수)
            <소림용문방>(류자량, 김종성), <요>(김영효)
1981     <가슴깊게 화끈하게>(김수형), <그대 앞에 다시 서리라>(이원세), <나는 할렐루야아줌마였다>(김수형)
            <인터폴>(김선경)
1982     <소림신방>(고응호), <여자와 비>(김성수), <친구애인>(김송원), <흑장미>(신위균)
1983     <뇌권>(김시현), <불새의 늪>(고응호), <비호문>(이헌우), <인생극장>(최현민)
1984     <내사랑 짱구>(유진선), <지금 이대로가 좋아>(정인엽), <홍병매>(김시현)
1985     <그때 죽어도 좋았다>(김문옥), <달빛타기>(이영실), <피조개 뭍에 오르다>(양병간)
1986     <수렁에서 건진 내딸2>(김호선)


 <각본>
1962
     <대지여 말해다오>
1973     <흑야괴객>


<편집>
1956
     <장화홍련전>
1957     <풍운의 궁전>
1958     <망향>
1959     <사랑이 가기 전에>
1960     <햇빛 쏟아지는 벌판>

 

 ▶ 수상내역

1961   국제영화지 인기감독상
1963   세계영화지 인기감독상
1967   제6회 대종상 - 우수반공영화상 : <돌무지(1967)>
1989   영화의날 공로상
2003   제8회 부산국제영화제(2003년 10월2일~10일) 한국액션영화의 전설, 정창화 회고전, 핸드프린팅
2003   HONG KONG FILM ARCHIVE 감사패
2003   홍콩영상자료원 정창화 감독 회고전 개최
2004   부산국제영화제 합작영화 공로상(에르메스)
2004   필름페스티발 파리시네마(Paris Cinema) 정창화 회고전 개최
2005   칸영화제 “칸 클래식” 섹션 <죽음의 다섯 손가락> 초청 상영
2006   춘사영화제 한류영화 공로 대상
2006   제44회 영화의 날 한류영화 공로상
2007   제15회 춘사영화제 아름다운 영화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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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자관리자

등록일2013-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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