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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은 나의 직업> - 벗어날수 없는 시지프스의 삶 : 강성률


벗어날 수 없는 시지프스들의 삶

강성률(영화평론가, 광운대 교수)


1.

정말 그랬을까? 알베르 카뮈의 말처럼 시지프스는 위대한 도전정신을 지니고 있었던 것일까? 그래서 올림푸스 산 아래에 있는 거대한 바위를 엄청난 힘과 노력을 들여 정상으로 굴러 놓으면서 기어코 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까? 아마 시지프스는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애써 정상에 올려놓으면 다시 아래로 내려가니 어찌 고통스럽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제 이 고통이 끝났구나 하는 순간 다시 물거품이 되니 그 절망의 깊이가 어찌 얕다고 할 수 있겠는가? 무엇보다 그런 형벌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 절망의 깊이는 가늠하기 어려울 것이다. 다시 굴러 놓으면 또 굴러 떨어지는 바위, 그 반복된 행동에서 가능성을 이야기하는 것은 해석자들의 유한놀음인지도 모른다. 카뮈가 시지프스의 그 수만 번의 노력을 불굴의 도전정신으로 높이 평가했지만, 그것을 하고 있는 시지프스는 저주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서 시지프스가 아무리 위대한 불굴의 도전정신을 지니고 있다고 하더라고 사람들은 그것을 저주의 형벌로 간주해 가능하며 그로부터 달아나고자 한다. 그러나 그들이 모르고 있는 것이 있다. 하루하루 다람쥐 쳇바퀴 돌듯 살아가는 현대인의 삶 자체가 시지프스의 삶을. 적어도, 육체적 고통의 극한을 맛보아야 하는 노동자들의 삶은 시지프스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죽음은 나의 직업 Death is My Profession>. 제목에서부터 이미 비극의 색채가 농후한 이 영화는 현대판 시지프스의 삶을 상징적으로 그리고 있다. 기본적으로 영화는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처절한 희생을 하는 아버지들의 몸부림을 그리고 있다. 파업 때문에 현장으로 돌아가는 것이 불가능한 세 명의 노동자가 전기탑의 케이블을 훔치려고 하지만, 불의의 사고로 한 명이 죽고 만다. 전기탑에서 갑자기 강한 스파크가 일어 그 충격으로 한 명이 죽는데, 그 시체가 높은 철탑에 걸려 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린다. 그런데 아무도 그것을 치우지 않는다. 경찰에게 잡힌 동료도 누워서 그 모습을 볼 뿐 치워달라고 하지 못하고, 경찰은 아이들이 구경을 해도 치우지 않는다. 그래서 검게 탄 시체는 계속 매달려 있다. 마치 카프카스의 바위에 묶인 채 독수리에게 간을 쪼아 먹이는 고통을 당하는 프로메테우스처럼. (그러고 보니 프로메테우스가 그런 형벌을 받은 것은 인간에게 불을 주었기 때문 아닌가. 우연처럼, 죽은 이는 철탑의 케이블을 자르다가 불의 형벌을 받아 그렇게 매달려 있다.) 이렇게 영화는 초반부터 신화의 세상을 보여준다.

이 영화가 정말로 신기한 것은 철저하게 현실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으면서도 어느 순간 신화적인 이야기가 된다는 것이다. 동료의 죽음 후 한 명은 경찰에게 잡히고 한 명은 도망친다. 어린 딸을 데리고 혹독한 추위의 눈 덮인 산을 넘어가는 아버지. 그래야만 안전하게 살 수 있다고 믿는 아버지. 전기탑의 케이블을 자를 때 상처를 입어 무릎이 좋지 않은 데다가 딸도 지쳐 더 이상 걷기 힘들다. 이 장면을 카메라는 먼 거리에서 차분히 조망하기만 한다. 거대한 산과 몰려오는 구름, 그리고 피어나는 안개의 소용돌이, 그 속에서 주저앉아 있거나 기어이 일어나 꾸역꾸역 걸어가는 부녀(父女)의 모습은 어떤 고난 속에서도 앞으로 가야만 하는 시지프스를 떠올리게 한다. 그렇게 그들은 산을 향해 천천히 올라가기만 한다. 그들의 여정은 끝이 없다. 그 고통스런 추위 가운데 아버지는 자신이 살아남으려고 딸을 나무에 걸어둔 채 다시 돌아올 것이라는 거짓말을 한다. 얼마 가지 않아 아버지는 뉘우치면서 다시 돌아와 딸을 업고 가지만 이미 딸은 죽은 뒤이다. 여기서 유심히 볼 것은 나무에 걸려있는 딸의 모습이다. 마치 십자가에 걸려 있는 예수의 형상 (같기도 한 모습). 속세의 죄를 지고 죽은 예수는 어른들의 죄 때문에 혹독한 추위의 산 속에서 나무에 걸려 죽어야 하는 아이의 모습으로 대체된다. 예수는 어린 아이처럼 되지 않으면 하늘나라에 갈 수 없다고 했는데, 그런 아이를 죽이는 어른들의 비정한 세상. 예수를 배반한 베드로의 뉘우침처럼 아버지는 통곡하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경찰에 잡혀 호송되는 또 다른 노동자의 사정도 좋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어머니가 보는 가운데 끌려간 그는 호송되는 도중, 거대한 폭설 때문에 길이 끊겨 직접 경찰이 데리고 산을 넘어야 한다. 가족에게 돈을 부쳐야 하기 때문에 강제로라도 일을 해야 한다는 상관의 명령 때문에 아픈 몸을 이끌고 부하 경찰은 산을 넘지만 곧 지치고 만다. 결국 경찰은 범인의 등에 업혀, 마치 골고다 언덕에서 예수에게 짊어진 십자가의 형상처럼 끌려서 산을 오른다. 힘겹게 살아남기 위해 두 사람은 오르지만 아마 그들은 산을 넘지 못했을 것이다. 그 혹독한 산 속의 추위에 죽음을 면키 어려웠을 것이다.

영화의 오프닝도 신화적이기는 마찬가지다. 앙상한 나무가 많은, 안개 자욱한 숲을 카메라는 아래에서 위를 비추면서 서서히 이동한다. 신비주의적인 음악이 조용히 울리고, 컷 없이 연속으로 15초 동안 이어지는 카메라의 이동은 순간 신기한 기운을 만들어낸다. 영화의 엔딩도 같은 장면이다. 여러 인물의 모든 이야기가 끝난 후 갑자기 카메라는 오프닝의 모습 그대로 아래에서 위로 숲의 앙상한 나무를 비추면서, 모든 이야기의 종말을 고하는 가벼운 음악을 배경으로 컷 없이 15초 동안 서서히 이동한다. 산 속을 걸어간 두 사람의 시각에서 바라본, 그들이 걸어간 숲의 모습을 화면 속에 제시한 것이지만, 그것은 신화 속의 안개 자욱한 공간처럼 해석된다. 무엇보다 의미 있는 것은 오프닝과 엔딩 바로 앞에도 같은 장면을 배치했다는 것이다. 오프닝 뒤에 전기탑을 바라보는 노동자의 얼굴을 정면에서 클로즈업으로 보여주더니, 엔딩 직전에도 전기탑을 바라보는 다른 노동자의 얼굴을 클로즈업으로 잡아 보여주다가 그들이 전기탑을 향해 이동할 때 카메라는 서서히 뒤로 빠진다. 그러니까 영화는 처음과 마지막을 마치 수미상관처럼 형식적으로 배치해 빠져나올 수 없는 운명의 굴레에 직면한 인간의 모습과 대면하게 만든다. 그 불편한 진실과의 피할 수 없는 대면.

결국 노동력을 팔아 자식들을 먹여 살려야 하는 노동자들은 모두가 시지프스들이다. 영화의 오프닝에서 죽었지만, 또 다른 이들이 나타나 또 다시 전기줄을 자르러 가야만 하는 운명을 벗어날 수 없다. 이것은 도전정신이 아니라 무서운 형벌이다. 그들은 또 사고로 죽을 것이고, 다른 이는 도망을 가고, 또 다른 이는 잡혀서 호송을 가다가 죽을 것이다. 이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의 굴레는 신자유주의가 횡행한 남한의 이야기가 아니라 이란의 이야기이다. 더 나가면 지구화된 자본이 압박한 세계의 모습이다. 신기하게도 영화에서는 노동자들이 파업을 했던 공장의 자본가의 모습은 백인으로 그린다. 이 많은, 직접적인 상징들.  


2.
그런데 이상하지 않은가? 우리가 이란 영화하면 떠오르는 것은 다큐와 극의 결합 아닌가? 그런데 왜 젊은 감독은 이렇게 신화적인 내용에 치중했는가? 아니다. 이 영화에 대한 이런 해석도 하나의 해석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다른 해석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엄밀히 말해 <죽음은 나의 직업>은 천상 이란 영화이다. 다큐와 극영화의 모호한 경계를 넘나들고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영화 속에는 그 어떤 비현실적인 요소도 개입하지 않는다. 특수효과라는 단어는 머나먼 할리우드의 용어일 뿐, 철저하게 땅에 발을 딛고 있는 인간들의 고통스런 현실에 카메라는 초점을 질기게도 맞추고 있다. 배우들도 전문 연기자라고 하기 어려울 정도로 노동자의 모습을 하고 있고, 영화 속 풍경도 거리의 모습 그대로다. 어디에도 조작의 느낌은 없다. 그리고, 안타깝지만, 어린 아이가 등장한다.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불합리한 세상에서 피해를 당해야만 하는 아이. 무엇보다 이 영화는 우리가 살아가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파업 때문에 일이 없어 위험천만한 전기줄을 잘라 팔아야만 먹고 살 수 있는 이들의 삶. 이들보다 더 벼랑의 삶을 살아가는 이들이 또 있겠는가? 때문에 영화가 다큐처럼 현실에 현미경을 들이대고 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 느슨한 이야기 구조에서도 그것은 명확하게 드러난다.

정말로 이 영화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인물들을 직조해 나가는 방식이다. 단순하지만 복잡하고 명쾌하지만 쉽지 않은 방식. 영화가 시작되면 오프닝에 이어 한 늙은 남자가 젊은 여자에게 구혼을 한다. 그러나 그녀는 냉랭하기만 하다. 늙고 가난한 그가 싫다는 것이다. 자신도 가능하면 젊은 사람과 결혼하고 싶다고 한다. 단념하고 전기탑을 자르는 현장에 그가 갔을 때, 사고로 다른 사람이 죽어 저주가 내렸다며 다른 동료가 그를 살해하고 만다. 이후 그는 영화에 등장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에게 왜 이렇게 긴 장면을 할애한 것인가? 그런데 이상한 장면이 있다. 경운기를 타고 그가 사라진 장면과, 전기탑을 바라보는 노동자들 장면 사이에 이상한 씬이 들어 있다. 카메라는 길을 보여주다가 뒤로 빠져 정면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 할머니의 클로즈업과 그 옆으로 보이는 아득한 길을 보여준 뒤, 다시 반대 방향으로 팬(PAN)해 할머니의 뒷모습과 또 다른 길의 아득한 편을 보여준다. 그녀는 누구이고 왜 여기서 등장하는가? 영화가 진행되고 나서야 우리는 그 답을 알 수 있다. 호송되는 노동자의 어머니다. 그런데 이후 아들과 어머니는 만나지 못한다. 함께 도망가는 노동자가 딸과 아버지라면, 만나지 못하면서 그리워하는 어머니와 아들은 영화 내내 어긋나면서 대구와 대조를 형성하고 있다. 이렇게 영화는 인물들의 관계보다는 그들을 화면 속에 던져 놓고 관객들이 바라보도록 만든다. 그저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이상한 것은 거대한 산을 넘어 도망가는 노동자와 호송되는 노동자는 만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때부터 영화는 두 팀의 이동을 교차 편집으로 보여주지만, 그래서 언젠가 그들이 만날 것 같은 희망을 주지만 결코 만나지 못한다. 오히려 그 사이에 또 다른 노동자와 그의 딸, 그리고 공장주인 서양인을 등장시켜 이야기를 다른 방향으로 끌고 간다. 이 모든 이야기는 결국 마지막 장면에 가서야 하나로 결합된다. 다른 이들이지만, 같은 삶을 살아야 하는 노동자의 삶. 그것이 감독이 담고자 했던 것이다. 패기만만한 감독은 이런 방식으로 마치 큐브를 짜맞추듯이 엔딩크레딧이 올라가야만 모든 이야기가 끝이 나는, 아니 이야기는 끝이 나지 않고 윤곽만 잡히는 영화를 만들었다. 그래서 현실적이면서도 애매하고 애매하면서도 현실적인 영화가 등장했다.

이런 효과를 위해 감독은 카메라의 구도에 많은 노력을 쓴 것 같다. 거대한 자연 속에서 걸어가는 인간의 모습은 자주 하나의 점으로 그려진다. 화면의 전경(前景)으로는 혹독한 눈보라가 치고 중경(中景)의 저 멀리 아버지와 딸이 위태롭게 걸어가고 있다. 이때 감독은 하늘을 화면 속에 담기보다는 땅을 화면 속에 담는다. 단단히 얼어붙은 불모의 땅으로 화면을 가득 채우거나, 그런 땅이 화면의 2/3 이상을 채우고 겨우 몇 부분만 하늘이 보인다. 그 거대한 자연의 압박 속에서 도망가는 인물은 결국 그곳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영상 속에 담아낸다. 이 아이러니! 거대한 자연이 품어내는 아우라가 아름다울 수 있지만, 그 장엄한 풍광이 현실의 장애물로 다가오는 고통. 이 순간 영화 속 인물들에게는 현실의 고통이 되살아난다. 무엇보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살아가야 한다는 현실의 당위성이다.

놀라운 것은 이 영화를 연출한 감독이 겨우 28살의 젊은 감독 아미르 후세인 사가피이며, 이 영화가 장편 데뷔작이라는 것이다. 그는 이 영화가 무시당하는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주어지는 일은 어떤 것이든 해야만 하는 사람들의 몸부림에 관한 영화라고 했다. 그런데 제목이 <죽음은 나의 직업>이라니. 세상에 죽음이 자신의 직업인 사람은 없다. 왜냐하면, 지극히 당연한 말이지만, 인간의 목숨은 하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런 목숨의 희생을 전제로 한 직업을 가지고 있는 이들은 얼마나 고통스러운가? 그들이 시지프스가 아니라면 누가 시지프스겠는가?

특이하게도 감독은 어린 시절부터 감독이자 프로듀서였던 아버지 때문에 배우로 일하다가 20살에 복싱 국가 대표를 할 만큼 전문적인 운동선수였다고 한다. 운동을 하다가 영화를 다시 선택한 감독이 바라보는 세상은 어떤 것일까? 예술적 안목으로 중시 여기는 영화와, 몸으로 상대를 제압해야 살아남는 권투는 어떻게 만날 수 있을까? 이 영화를 보면, 권투 장면이 등장하지 않아도, 그 답을 어렴풋이나마 알 수 있다. 그렇다. 세상살이는 링 위의 사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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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자관리자

등록일2011-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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