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객센터

customer center

070.8868.6303

늙음에 대한 애정 어린 관조 - 강성률

강성률 _ 광운대학교 교수 


1.
사람은 누구나 늙는다. 너무도 명확한 이 명제를 모르는 이는 없지만, 이 사실을 정확히 알고 있는 이들도 드물다. 늙으면 몸이 젊은 시절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쇠퇴해지고 아프다는 것도 젊은이들은 겪어보지 않았기 때문에 정확하게 알 수가 없다. 하여 누군가는 사람이 불행한 것은 가장 불우한 시기에 죽기 때문이라고 했다. 벚꽃은 가장 화려한 시기에 져버리고, 매미는 숱한 암흑의 시간을 이기고 나와 가장 꽃다운 시기에 죽으며, 나비도 유충의 긴 시간을 넘어 우아한 날개짓을 펼치며 세상을 유영하다가 마침내 죽지만, 사람은 청년기의 아름다움을 멀리 한 채 몸과 마음이 병들고 고독해진 후에야 삶을 마감한다.

이런 자연의 섭리를 떠나, 핵가족화되고 신자유주의가 횡행하는 현대 사회에서 노년은 설 자리가 점점 좁아지고 있다. 애써 키운 자식들도 자신의 자식들과 먹고 살기에 바쁜 지금, 자식들에게 기대기는커녕 오히려 그들을 걱정해 주어야 할 판이다. 숱한 인생의 역경을 이겨낸 노년의 지혜를 배울 생각은 않고, 자신을 걱정해주는 목소리를 외면하며, 그들의 연륜을 노인의 잔소리로 생각하는 이들도 숱하다. 그들에게도 하고 싶은 일이 있고 인간의 욕망이 있다는 사실을 너무 쉽게 망각한 채 살아가고 있다.

중국의 젊은 감독 리우 하오가 연출한 세 번째 장편 <사랑의 중독>은 노년의 삶에 카메라를 차분하게 들이대고 있다. 제목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노년의 일상보다는 그들의 사랑에 대해 신중하게 논의를 전개한다. 그가 노년의 삶에 주목한 이유는 간단하다. 감독의 말은 인용하면, “<사랑의 중독>은 나이 지긋한 사람들의 삶에 대한 영화이다. 그것은 또한 우리 자신의 삶에 대한 영화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우리도 언젠가는 늙기 때문이다.” 너무도 당연한 말이다. 우리도 언젠가는 늙기 때문에 늙음을 다룬 영화는 결국 우리 모두의 영화가 되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영화는 매우 단순한 내용으로 되어 있다. 베이징의 공장에서 은퇴한 할아버지는 그의 동료 하오창과 매일 식료품 가게에 가는 것을 좋아한다. 어느 날 그는 결코 잊을 수 없는 얼굴인 첫사랑 리잉을 우연히 길에서 만나게 된다. 그녀의 전화번호를 안 그는 전화를 걸어 가끔 만나지만, 자신의 자식들도 이 사실을 반기지 않을 뿐 아니라 리잉의 딸은 자신의 집으로까지 와서 자식들 앞에서 망신을 주며 반대한다. 자식들의 눈치를 보며 몰래 전화를 하고 만나던 그들은 공식적인 어려움에 닥치게 된다. 더구나 리잉은 알츠하이머병을 앓고 있어 기억력을 점점 잃어간다. 할아버지의 사랑이 할머니에 대한 지극한 정성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할머니의 딸이 더 이상 반대하지 않아 할아버지는 할머니의 기억력을 덜 감퇴시키기 위해 다양한 놀이를 한다. 전 남편의 직장을 계속해서 묻기도 하고, 자식들의 숫자와 사는 곳을 묻기도 한다. 그러나 할머니는 결국 아들이 있는 상하이로 가면서 할아버지는 또 다시 홀로 된다.

이렇게 요약하고 나니, 마치 이 영화가 노년의 사랑만 다루고 있는 것 같은데 결코 그렇지 않다. 현대 사회의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어떻게 사랑 때문에 괴로워만 할 수 있겠는가? 영화의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할아버지에게는 걱정이 많다. 부인과 사별한 그에게는 세 명의 자녀가 있지만 그들 모두에게 문제가 있다. 고급 공무원인 큰 아들은 결혼한 지 오래되었지만 아직 아이가 없고(결국 남아를 입양하기로 한다), 딸은 남편과 이혼하려고 하며(외손자와 노는 것이 낙 가운데 하나였는데 이것도 불가능하게 되었다), 둘째 아들은 방황하다가 애인이 임신해서 마음을 잡고 공무원 시험을 준비한다(물론 합격이 쉬운 것은 아니다). 할아버지는 둘째 아들과 함께 살지만 얼굴도 보기 어렵고, 큰 아들과 딸이 집에 자주 들리는 편이지만 그들이 그리 편하지는 않다. 같이 살고 함께 밥을 먹기도 하지만 할아버지는 혼자 사는 것과 다름없다.

때문에 할아버지에겐 은퇴한 동료와 첫사랑 할머니가 소통의 전부이자 유일한 말동무이다. 할머니도 딸과 함께 살지만 딸의 눈치를 보며 살기 때문에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다. 이들이 만나 하는 이야기도 사랑 이야기가 아니다.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이고 많은 부분은 자식들 걱정하는 것이다. 그런데 둘의 이런 만남을 자식들은 자신들의 명예와 지위 때문에 반대한다. 말로는 부모를 위한다고 하지만, 실상은 부모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있다. 너무도 당연한 이야기지만, 노년에도 사랑에 대한 기본적인 욕구는 당연히 존재한다. 그것이 육체적인 사랑일 수도 있고, 이 영화처럼 정신적인 사랑일 수도 있다. 특히 인간이라면 누구나 첫사랑에 대한 판타지를 지니고 있지 않은가. 처음 사랑을 마지막 사랑으로 만들고 싶은 두 노년의 잔잔한 욕망을 자식들은 용납하지 않고, 짧은 만남을 뒤로 한 채 과거와 마찬가지로 다시 헤어진다. 

영화에서 주인공은 단 한 번도 웃지 않는다. 친구와 만나거나 첫사랑과 만나도 웃지 않는다. 리잉과의 사랑이 자식들의 반대로 진행되지 않을 때 그는 자식들의 위로를 듣지 않고 고개를 돌려 침대에 누워 있거나 홀로 방에 들어가 나오지 않는다. 자식들이 뭐라고 독촉을 해도 들은 척하지 않는다. 그에게 유일한 낙은 리잉과 거리를 걷다가 KFC에 들어가 음식을 먹는 것이고, 손자에게 과자를 사주는 것이다. 물론 그런 삶도 딸의 이혼과 리잉의 이사로 오래 허락되지는 않는다. 여러모로 그에게는 낙이 없어진 것이다.  

2.
할아버지의 삶과 사랑을 다룬 영화에 맞게 화면은 대부분 고정되어 있고, 쇼트는 오랫동안 지속된다. 마치 카메라가 그들의 삶을 천천히 지켜보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인물들이 가는 장소는 정해져 있고 카메라는 미리 그곳에 가서 인물들이 앉을 장소까지 파악한 뒤 기다리는 느낌을 준다. 매일 아침 식료품점에 가기 위해 하오창과 만나는 곳에서 카메라는 기다리고 있다. 바쁜 생활에 쫓기지 않고 천천히 도시를 유영하듯 걸어가는 노년의 모습이 화면에 자주 담기기도 한다.

베이징의 번화가는 영화에 등장하지 않고 낡은 빌라촌이 그들의 공간이기에 그곳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펼쳐진다. 그런 점에서 영화의 첫 장면은 꽤나 의미심장하다. 영화가 시작되면 베이징의 거리 풍경을 고정 카메라로 멀리서 비춘다. 최근 몇 년 사이에 변화가 무쌍한 베이징의 거리 가운데 감독은 전경에는 낡은 주택을 잡고 후경으로는 새로 지은 높은 건물로 직접적 대비를 이룬다. 아무런 음악도 없이 단지 풍경의 한 쇼트처럼 잡은 이 장면은 이후로도 몇 번 더 등장하는데, 낡은 집을 압도하는 새로운 건물의 이미지는 점점 나약해지는 노년의 삶을 직접적으로 알레고리화한다.
할아버지가 사는 집은 매우 낡은 곳이다. 계단도 매우 낡았고 집도 오래되었다. 벽지가 아니라 페인트로 된 벽은 군데군데 떨어지거나 때가 많이 묻었다. 새해 전날 자식들은 급하게 왔다가 밥 한 끼 먹기 바쁘게 모두들 나가거나 자기 집으로 돌아간다. 홀로된 할아버지는 할머니에게 전화를 해 추운 거리에서 만난다. 그러나 그곳은 새해를 축하하는 축포로 대화가 되지 않는다. 그리고 새해 첫날 거리는 축포의 쓰레기로 지저분하기만 하다. 낭만적인 풍경이 되어야 할 그들의 만남은 결코 낭만적인 감각을 갖추지 못한다. 노년들의 삶을 사실적으로 그리기 위해 감독은 비전문배우를 기용했고, 작위적인 느낌을 주지 않기 위해 영화음악을 사용하지 않고 현장음을 살렸다. 그래서 그들의 사랑은 낭만적으로 보이기보다 겨울 추위의 슬픔으로 다가온다.

어떻게 보면 이 영화는 오즈 야스지로를 떠올리게 한다. 이 영화가 스타일적으로 오즈 야스지로의 후기 영화들을 떠올리게 한다는, 콜롬비아대 영화학과의 댄 클레이맨의 지적은 정확하다. 이야기는 모던한 베이징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보편적인 내용을 다루고 있다. 가족 형태, 은밀한 사랑, 나이를 먹어도 사라지지 않는 열정 등에서 그렇다. 특히 가족과 노년의 문제를 다룬다는 점에서는 부정할 수 없다. 조금 더 설명을 하자면, 늙음과 가족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만춘>과 <동경이야기>를 떠올리게 한다. 딸을 시집 보내기 위해 거짓말로 재혼할 것이라고 말하는 아버지가 결국 딸을 보낸 후 텅 빈 집으로 돌아와 쓸쓸히 앉아 사과를 깎던 마지막 장면은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과 깊은 관련이 있다(이것은 단지 내용만이 아니라 스타일에서도 그렇다). <만춘>에서 아버지는 화면의 많은 부분을 메운 집의 구조 속에 갇혀 쓸쓸히 들어온다. 그리고는 사과를 깎는다. 그의 표정보다 사과를 깎는 손에 집중한다. 이윽고 사과가 떨어진다. <사랑의 중독>에도 마지막 장면은 밤이다. 딸이 떠나고 할머니도 떠난 베이징의 누추한 집의 컴컴한 밤이다. 할아버지는 돌아누워 있다. 이어 화면이 컷되면 밖에서 잡은 구도로 이어진다. 창문으로 보이는 빛이 전부이고 나머지는 온통 검은색으로 위치지어진다. 그리고 서서히 페이드 아웃되면서 현장음으로 거리의 소리와 바람 소리만 들린다. <동경이야기>에서도 모처럼 자식들이 있는 동경으로 왔지만 그들의 냉대로 온천에 갔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모습을 보면 <사랑의 중독>의 세 자녀가 부모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자신들의 입장만 강조하는 것이 보인다.

그런데 이런 내용보다 카메라의 구도 면에서 오즈의 영화와 많은 유사점을 지니고 있다. 오즈는 180도 법칙을 어기면서 종적으로 깊은 카메라 구도를 구사했는데, 이 영화에서도 조명을 통해 매우 깊이 있는 화면 구도를 선사한다. 그래서 좁은 집을 영화적 공간으로 하고 있지만, 화면 안에는 전경, 중경, 후경의 구도가 선명하게 성립한다. 비좁은 복도의 가운데에 카메라를 위치시킨 후 전경에서부터 문을 열고 멀리 보이는 후경의 부엌까지 한 화면에 잡으면서 그곳을 오가는 인물들의 동선을 보여주기도 하고, 가운데에 나 있는 좁은 복도의 양 측면에 벽으로 가려진 방을 통해 화면에 갇힌 인물의 처지를 대변한다. 이외에도 인물들의 상황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베이징의 풍경을 편집에서 자주 사용함으로써 오즈의 편집에서 자주 거론된 ‘필로우샷’을 의도적으로 변용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3.

영화에는 삶의 고난을 이겨온 사람만이 구사할 수 있는 대사들이 빛을 발한다. 자식들이 힘들어 할 때, 친구가 괴로워할 때 인물들은 이런 대사를 통해 서로를 위로한다. 가령 이런 식이다. 딸이 외손자와 함께 짐을 싸면서 남편과 이혼해 이제 돌아가야 할 것 같다고 할 때 아버지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 모든 가족은 함께 머물렀다. 아무리 작은 침대라도 우리는 모두 함께 잘 수 있었다. 너는 나의 옆에 있었고 나는 너의 옆에 있었다. 아무리 작은 사발이라도 우리는 먹을 것과 마실 것을 가지고 있었다. 너는 나의 부분이었고 나는 너의 부분이었다. 돌아오는 것은 언제든지 좋다.” 삶의 고난을 겪어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이런 말을 듣고 감동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이런 말을 듣고 힘을 내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이혼의 상처 때문에 지금 딸은 떠나지만 곧 아버지에게 다시 돌아올 것이다.

할머니의 알츠하이머병을 고치려고 할아버지는 최선의 노력을 다한다. 방에 불을 끈 채 손전등으로 왼편과 오른편을 오가면서 좌우의 감각과 단어를 잊지 않도록 한다. 자신이 사용하는 따뜻한 수건을 할머니의 허리에 대며 그녀가 쾌유되기를 바란다. 그러나 자식들이 모신다는 명분으로 그들은 헤어져야 한다. 첫사랑이 실패한 후 마지막 사랑도 실패하고 만 것이다. 이것은 노년의 운명인가. 단지 또 다른 상처인가.  

한 인터뷰에서 리우 하오 감독은 이 영화가 가을의 성숙한 감각과 비교되기를 원했다. 시든 낙엽에도 불구하고 가을은 아직 아슬아슬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렇다. 가을은 계절의 끝인 것 같지만, 그래서 냉혹한 죽음의 계절인 겨울로 가는 관문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가을은 가을만의 성숙한 감각을 지니고 있다. 봄의 태동에서 시작해 여름의 왕성함을 지나 열매 맺은 뒤 떨어지기 직전의 찰나적 아름다움이 있다. 때문에 그 시간을, 그 감각을 무심코 볼 수 없는 것이다. 우리네 인생 역시 그러하다. 감독이 의도한 것이 정녕 이것이었다면 의도는 충분히 달성된 것 같다. 

0

추천하기

0

반대하기

첨부파일 다운로드

등록자관리자

등록일2011-12-18

조회수3,791

  • 페이스북 공유
  • 트위터 공유
  • 밴드 공유
  • Google+ 공유
  • 인쇄하기
 
스팸방지코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