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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산] 고은기의 <타클라마칸>, 고행의 사막을 건너는 낙타의 비애

타클라마칸은 사막이다. 사막은 통과하는 자에게는 길이지만 머무는 자에게는 무덤이 된다. 타클라마칸은 들어가면 나올 수 없는 여행자의 무덤이다. 제목에서 이미 불행의 징후가 엿보이고 죽음의 이미지가 아른거린다. 영화 <타클라마칸>은 인생이라는 사막을 걸어가는 가장 낮은 자들의 삶의 의지와 죽음의 모습을 카메라가 따라간다. 첫 장면은 드론의 가벼움으로 서울의 주변부를 멀리서 바라보면서 시간의 물결을 거슬러간다. 마지막 장면은 고통의 비등점에서 마주친 태식(조성하 분)과 수은(하윤경 분)의 불행과 억울함을 소리없이 매장하고 개발의 시계소리가 지배하는 서울의 주변부 재개발 장소로 추궁하듯 다가간다.   

이 영화는 부감에서 시작하지만 바스트 샷으로 인물의 삶과 감정을 저격한다. 부감과 익스트림 롱샷으로 조망한 서울의 스펙터클은 대도시의 위용을 드러내지만 보다 가까이 다가가면 아래층에 서식하는 인간 군상의 씨줄과 날줄로 엮어진 희노애락의 모자이크 안에 새겨진 고해의 풍경화가 또렷해진다. 이 영화는 각자의 삶의 길을 성실하게 뚜벅뚜벅 걸어가는 낙타들이 왜 행복의 출구로 나아가지 못하고 고통의 타클라마칸에서 벗어나지 못하는가에 대한 질문이자 항변이 내장되어 있다. 태식도 수은도 모두 절망의 극점에서 ‘ 대체 왜 나한테 이러는 것인가’라는 울분을 토로한다. 그의 울분이 저항의 방향성을 상실하고 개인적인 울분으로 환원되는 지점에서 이 영화는 개인적이라는 과녁을 향하게 된다. 사회적 공분을 촉발하고 변혁과 혁명의 길을 지향할 때 정치적 아방가르드와 예술의 정치화로 확장된다면 다만 개인적 울분으로 물길을 끌고가면 사적인 문제로 축소되고 수렴된다. 세상은 타클라마칸인데 낙타들은 사막을 옥토로 변화시키는 노력보다 고행의 길에 대한 의미부여와 수긍으로 타협한다. 후자의 태도와 이 작품은 조응하지만 네일아트와 아이에게 선물한 치킨이라는 오아시스를 마련한다는 점에서 일정한 낭만성을 견지한다.   

수은은 세상을 떠난 친구의 보증으로 사채업자들에게 빚 독촉을 받고 경제적 압박감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노래방의 도우미를 하면서 네일 아티스트의 꿈을 키워간다. 태식은 직장에서  퇴직한 다음 재개발구역에서 재활용 폐품 수집으로 생계를 꾸려간다. 수은은 경제적 환경으로 매춘의 상황으로 내몰리고 태식은 실직으로 폐가에 들어가서 보일러의 구리선을 채취한다. 폐가는 실직한 태식을 상징하며 그는 작업 도중 손가락을 다치며 손가락의 통증은 생의 구체적인 고통의 발신처로 가시화한다. 손톱으로 인한 고통을 보여주는 클로즈업과 손톱의 잦은 클로즈업은 태식의 고통에 대한 분명한 전시이며 수은의 손톱에 칠해진 네일아트는 그녀의 아름다움 꿈을 대변한다. 수은은 절망의 극점에서 손톱을 벽에 긁으면서 걸어가는 장면을 통해 마지막 남은 꿈을 훼손하는 자학을 보여준다. 

두 사람 모두 각자의 사막을 걷는 낙타들이며 폐가처럼 삶이 부식해가지만 내부 순환도로의 움직이는 차들을 통해 살아있음을 느낀다. 태식은 스스로 폐품을 찾아서 움직이고 아이의 학교에 찾아가면서 스스로 살아있는 알리바이를 확보한다. 수은은 사채업자에서 위협받고 희망이 없는 고행의 골목길을 오르지만 타클라마칸으로 저장된 이름의 연인과 사랑으로 삶의 환풍구를 만들고 네일아트 강습으로 사막의 오아시스를 상상한다. 

하지만 사막은 예고 없이 불행의 모래바람을 태풍처럼 몰고 온다. 수은은 노래방에서 태식을 만나고 부채 청산과 네일아트 강습료를 위해 2차를 결단한다. 하지만 태식은 소장이 아닌 경제력없는 실업자였고 수은은 매춘을 하지 않겠다는 타클라마칸과의 약속을 위반하여 결별 통보를 받게 된다. 타클라마칸과 수은은 사막 전갈의 푸른색처럼 영원히 변하지 않을 관계를 희망했지만 결국 수은의 외박으로 인해 결별의 위기에 처한다. 

각자의 길을 걸어온 두 낙타는 고통의 극점을 향하고 정점에서 만나게 된다. 이 지점이 영화의 절정이자 두 인물의 고통의 비등점이다. 그들이 만난 지점은 각자의 삶에서 고통의 수은주가 가장 높은 지점이며 이로 인해  거친 폭력적 언어가 배출되고 결국 우발적 폭력에 의한 수은은 죽음으로 마침표를 찍는다. 수은의 죽음은 재개발 지역의 철거되는 주택과 등치되며 가장 낮은 자의 불행이다. 각자 주어진 길을 버겁지만 인내로 걸어가는 이들의 불행과 고통은 인생은 사막을 걷는 것과 같다는 메타포의 눈으로 바라보면 인간의 보편적 지평과 맞닿게 된다. 고은기 감독은 관객과의 대화에서 “삶은 사막을 여행하는 것과 같다”고 했다. 우리 모두는 타클라마칸에 던져진 낙타와 여행자의 운명이다는 감독의 인생관이 영화에 직설적이지 않고 우회적으로 깔려있다. 도시 재개발로 인해 사라져간 변두리와 위협받는 하층 계급의 희망이 장소와 인물을 통해 효과적으로 포착되었다는 점에서 한국리얼리즘 영화의 계승자이다.  성실한 주인공인 사회적 타자들의 불행과 고통의 전시는 죽은 자의 귀환과 영원한 사랑의 기대로 봉합한다. 영화는 주인공을 죽음으로 내몰았던 사회적 구조에 대한 질문 대신 개인적인 울분으로 수렴하여 사적인 해결에 머물게 한다. 타클라마칸에 살고 있다는 사실의 외침도 소중하지만 타클라마칸에서 변하지 않는 푸른색의 희망에 대한 전언도 예술이 발언할 수 있는 값진 목소리의 하나다.  
 
  
 
글: 문학산
영화 평론가. 한국 독립영화와 동아시아 작가에 대한 연구를 수행하며, 저서로 ( 한국 단편영화의 이해)와 ( 한국 독립영화 감독연구) 등이 있다.

글 출처: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 르몽드 시네마 크리티크
http://www.ilemonde.com/news/articleList.html?sc_sub_section_code=S2N40&view_type=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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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자서곡숙

등록일2018-05-05

조회수3,6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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