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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아름] ‘괴물’에 대한 예의를 권하며 ― 영화 <희생부활자> 속 RV의 사장(死藏)에 대해

인간이 만든 괴물의 잠재성 

공포영화의 컨벤션이 결국 공포영화의 자멸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메타적으로 보여주었던 영화 <캐빈 인 더 우즈>(2012)에는 서구의 시각으로 본 동양귀신에 대한 흥미로운 해석이 포착된다. <캐빈 인 더 우즈>는 인류의 평화를 위해 고대 신에게 인간의 피를 바쳐야 하고, 각 나라마다 이를 위한 방법을 고안하는 시스템이 존재한다는 것을 기본 설정으로 한다. 이곳에서 제물로 삼은 인간들은 시스템의 조작에 따라 지하에 갇혀 있는 괴물들을 스스로 불러들여 죽음을 맞이하고, 그 피는 고대 신의 분노를 잠재우며 인류의 안녕을 보전할 수 있는 제물이 된다. 이때 인간을 쉽게 죽이기 위한 방법으로 늘어놓고 있는 것이 바로 공포영화의 컨벤션들이다. 
 
  
▲ <캐빈 인 더 우즈>(2012)

가령, 미국의 경우 5인 이상의 젊은 남녀들(이들의 성격은 우리가 익히 보아온 그것이다)을 추적하며, 위험하다는 이의 말을 무시한 채 깊은 산속의 산장으로 들어가게 하고, 그 집 지하실에 숨겨진 물건들 중 하나를 골라 괴물(가령 좀비)을 깨우도록 한다. 섹스를 하도록 그리고 술과 마약에 찌들도록 하여 괴물이 그들을 죽일 정당성을 부여하고, 그렇게 죽임을 당한 그들의 피는 제물이 되어 인류를 구원한다. <캐빈 인 더 우즈>는 공포영화의 익숙함을 이렇게 활용한다. 그리고 여기에서 동양으로 대표되는 일본의 시스템에서 등장시키는 것은 10대의 여자 아이에 놓인 여귀이다. 처음 여귀는 아이들을 위협하지만 결국 여귀를 달래는 아이들의 노래에 그 누구의 피도 얻어내지 못한 채 평온을 찾고(귀신은 해사한 빛을 받으며 개구리로 변한다), 제물 바치기는 실패한다.
 
  
▲ <캐빈 인 더 우즈>(2012)

그들은 일본의 귀신이 인간들에게 쉽사리 위로를 받고 제물을 마련하지 못한 것에 매우 분노하지만, 동양 전반의 괴물로 확대할 수 있는 여귀에 익숙한 우리의 눈에는 그 실패가 그리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동양의 귀신은 스스로 죄인을 응징하기보다는 늘 인간에게 도움을 청하여 사건을 해결해왔고, 그것이 잘 해결됐을 때에는 해원(解寃)하고 깨끗한 모습으로 승천하는 것이 그들의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캐빈 인 더 우즈>에서 우스꽝스럽게 지나갔던 이 장면이 인상 깊게 남은 것은 바로 이런 차이가 동서양의 괴물의 존재방식을 가르는 데에 매우 중요한 지점이며, 더 나아가 이것은 각 문화의 정체성을 위협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진단할 때 매우 유용한 매개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대체로 괴물은 그 모습의 비정상성이나 그것이 등장하는 장르의 폄하와 함께 내려앉는다. 괴물의 무가치성은 늘 그것의 이질성에서 비롯되는 것이지만 우습게도 괴물의 이질성조차 그것을 폄하하는 이들이 굳이, 그것도 매우 열심히 상상하여 탄생시켰다는 태생적 아이러니의 흔적이 된다. ‘우리’라고 합의된 집단에서 배제된 대상, 보통 타도해야 할 외형이나 성질을 지니며 인간과 유사할수록 더욱 끔찍한 것으로 간주되는 것을 괴물이라 할 때, 바로 그 외형과 특징, 그리고 그것을 없애는 방법까지를 고안한 것은 결국 인간이다. 전염을 유발하는 좀비나 뱀파이어는 머리를 날리고 심장에 말뚝을 꽂아야 사라지며, 인간을 괴롭히는 귀신은 그의 억울함을 풀어주어야 하고, 무자비한 살인마는 순결한 여성(virgin)과 대결하여야 한다.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을 무엇인가를 만들어 위험에 뛰어들고 그것의 구체적인 소멸을 꾀하여 안정을 찾는 인간들의 습속에서 괴물은 탄생했다. 괴물이 인간사를 경유하여 한 사회의 정체성까지를 논하는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은 이 때문이며, 함부로 다루지 말아야 할 이유 역시 여기에 있다.

‘새롭다’는 수식의 함정이 낳은 안일함

한국영화는 많은 괴물, 그러니까 다양한 종류의 귀신들을 등장시켰던 것처럼 보이지만 이것이 그리 중요하게 다루어지지 않거나 비슷비슷하게 간주되었던 것은 귀신의 외향이나 설정의 변화 그 이상으로 나아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괴물이 각 문화권의 정체성을 위협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지시한다면 괴물이 변화한다는 것은 이 위협의 대상이나 원인이 분명하게 바뀌었다는 것까지가 포함되어있어야 한다. 귀신이 어떻게 등장하는지, 어디에서 등장하는지, 어떤 모습으로 등장하는지 등은 괴물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데에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하지만, 지금까지 한국의 귀신들이 집착한 것은 바로 이 부분들이다. 당연히 이는 공포와 괴물을 그리 중요치 않게 다루어 온 창작자들의 상상력의 부재에서 기인한 것이며, 관객들이 외면한 이유이기도 하다(물론 치정관계에 얽혀 있던 귀신들을 학생, 이후에는 젊은이들의 삶을 위협하는 것으로 세대적 전환을 꽤했던 기념비적 작품 <여고괴담>(1998) 속 진주(최강희)는 기억해야 한다).

‘새롭다’는 단어를 가득 달고 홍보했던 영화 <희생부활자>(2017)에서도 역시 이러한 인식이 드러난다. 스릴러 영화에 독특한 설정의 괴물을 등장시켜 미스터리를 유도하겠다는 의지처럼 놓인 ‘새롭다’는 단어는 전혀 엉뚱한 방향을 향하고 있었고, 나름대로의 변화를 지녔던 RV는 그렇게 사라졌다. 좋은 배우들의 열연에도 이 영화가 빛을 발하지 못한 것은 RV의 명확한 함의를 규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니 영화는 애초부터 이에 대한 큰 고민이 없어 보인다. RV의 어디까지를 ‘새롭다’고 설정할지 그리고 그것이 흔들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 그것에 인간은 어떠한 대처를 해야 하는지 등에 대해 어떠한 해답도 내놓지 않은 것, 여기에서 <희생부활자>의 안일함이 드러난다.
 
  
▲ <희생부활자>(2017)

사실 <희생부활자>의 RV는 우리나라 원귀(寃鬼)의 그 흔한 정통성을 가장 중요한 축으로 둔다. 괴물과 윤리의 문제는 늘 따라붙는 것이지만 우리나라의 귀신만큼 인과관계, 그 중에서도 인(因)에 대해 강박을 가지고 있는 괴물도 드문데,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는 속담은 우리나라의 귀신의 특성과 그것이 등장하는 이유, 나아가 한국인의 사상적 패러다임을 설명하면서도 귀신에 달라붙은 강박을 해명할 수 있는 좋은 재료이다. 우리나라에서 귀신의 말이 결코 틀리지 않는다고 간주되는 것은 그가 ‘죽은 자’이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가장 억울한 처사인 죽음을 당한 이가 거짓말을 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 공포영화의 주인공들은 귀신이 지시하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고 물론 귀신 역시 거짓말을 하지 않았기에, 귀신의 말을 듣는다면 주인공은 천하의 나쁜 놈을 처벌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만약 가해자가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나는 살아있었을 것’이라는 귀신의 전제는 살아있는 이들에게 자신의 억울함을 고스란히 받아들일 수 있게 하는 매우 중요한 알리바이가 된다.
 
  
▲ <희생부활자>(2017)

<희생부활자>의 RV는 정확히 이 지점을 관통한다. 억울하게 죽은 자가 복수를 위해 돌아온다는 것. RV의 핵심 설정은 우리에게 익숙한 원귀의 복수 서사이며, 그것은 도덕적 단죄에 대한 굳건한 옹호를 벗어나지 않는다. 흥미로운 것은 바로 다음의 설정들이다. 돌아온 RV들이 적절한 처벌을 받지 않은 가해자 앞에 나타나 ‘직접’ 그를 죽인 후 ‘스스로’ 사라진다는 것. 바로 이것이 RV라는 새로운 괴물이 자신의 정체성을 통해 현재를 위협하고 있는 불안을 가장 잘 드러내고 있는 설정인 것이다. <희생부활자>가 주목해야 했던 것은 바로 이 부분의 함의를 적절하게 해소하여 스크린에 풀어내는 일이었을 것이다.

감지하지 못한 RV의 위협과 해결되지 못한 이야기

앞서 이야기했지만 괴물은 인간이 만든 것이기에 어떤 식으로든 인간과의 관계를 설정한다. 잠들어 있던 괴물을 깨우는 것이나 그것을 없애는 것 등은 늘 인간의 손을 거쳐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인간의 카타르시스를 위한 괴물의 위협과 해소, 그것은 괴물이 등장하는 영화의 중요한 축이었다. 이런 맥락에서 <희생부활자>의 RV는 인간과의 어떠한 관계도 설정하지 않는다는 공포스러운 특징을 지닌다. RV가 직접 나서서 가해자를 찾고 그를 벌한다는 설정은 누군가를 경유하여 사건을 해결하려던 원귀들의 습성을 완전하게 벗어난다. 자신의 사연을 이해해 줄 주인공을 찾고, 자신을 두려워하는 주인공을 설득시켜야 하며, 결국 귀신을 이해하고 복수를 행하기 위해 주인공이 결심해야 하는 이 모든 시간을 RV는 삭제시킬 수 있다. 또한 복수가 끝나면 스스로 사라진다는 점에서 자신의 의지대로 움직일 수 있는 괴물이라는 것이 명확해진다. RV에는 인간의 힘이 개입할 수 없다.

사연을 들어줄 필요도 없다. 좀비처럼 누군가를 감염시키지도 않는다. 생체반응이 명확치 않은 신체를 가지고는 있지만 사람을 알아보며 기억과 의지, 지각능력을 가진다. 이러한 이유로 RV를 함부로 죽여 없애기엔 죄책감이 들며, 그렇다고 살려두기엔 너무나 위험하다. 인간으로 하여금 이도 저도 할 수 없게 만드는 RV의 설정은 인간의 손이 전혀 닿을 수 없는, 더 정확히 말해서는 인간의 힘으로 결코 제어할 수 없는 괴물의 탄생을 알리는 것이었다. 이러한 RV의 이면에는 그 어떠한 공권력도 사건을 제대로 해결해주지 못한다는 억울함, 내가 죽었으니 가해자도 다른 그 무엇도 아닌 같은 처벌로 나와 함께해야 한다는 식의 응징의 태도, 과연 어떤 상태까지를 가족으로 인정할 수 있느냐의 경계의 문제까지 도사린다. 여기에 포함된 직접적이고 물리적인 처단은 사회가 어쩌지 못한 것을 후련하게 해결하는 괴물의 힘과 분노까지가 포함된다. RV는 사회적 불안이 직접적으로 개입된 괴물의 탄생을 포착할 수도 있는 기회처럼 보였다. 그러나 <희생부활자>는 RV의 이러한 위협을 전혀 감지하지 못한다.
 
  
▲ <희생부활자>(2017)

이 영화의 중심 사건은 살인사건의 피해자 명숙(김해숙)이 RV로 돌아와 자신의 아들 진홍(김래원)을 죽이려는 데서 시작된다. RV는 한 번도 잘못된 피해자를 지목한 적이 없었다는 통계에 따라 진홍은 자신의 어머니를 죽인 이로 몰리고, 진홍은 여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을 친다. 이 이야기에는 국정원, 검찰, 경찰 등의 권력기관과 이를 감추려는 이와 들추려는 알력이 대립하지만 이 대립의 목적과 결과는 불분명하다. 만약 RV의 위협을 좀 더 상상했다면, 그러니까 만약 진홍이 주장한대로 자신은 어머니가 죽인 범인이 아니며 RV가 오류를 일으킨 것이라면 그 누구도 인간의 손을 벗어난 이 괴물을 제어할 수 없다. 때문에 전 세계적 현상이라는 이 괴물 RV의 오류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치명적이다. 영화 <희생부활자>의 원작소설 박하익의 <종료되었습니다>에서 RV를 가해자의 처벌을 위한 가상의 존재로 반전을 꾀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여기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완전무결한 힘을 지닌 이 새로운 괴물을 인간이 소멸시킬 수 있는 방법은 그것이 애초에 존재하지 않아야만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 <희생부활자>(2017)

이 오류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은, 게다가 RV의 작동방식에 전혀 개입할 수 없는 인간이 딱한 번 얻는 기회는 RV인 명숙이 도대체 왜 범인이 아닌 아들을 죽이려 했는가를 해결하는 데에 있다. 그러나 <희생부활자>는 이 ‘왜’라는 질문을 전혀 해결하지 못하며, 적절한 방식의 질문조차 하지 않는다. 즉, 죽었다가 돌아와서까지 내 아들의 죄를 뒤집어쓰는 RV의 갑작스런 모성적 변이가 문제되는 것은 식상함 때문만은 아닌 것이다. 괴물을 등장시킬 때에는 그 시작과 끝을 해결해주어야 한다는 가장 기본적인 설정에 대한 몰이해는 흥미로운 괴물의 탄생을 막았고 <희생부활자>를 이해할 수 없는 설정만이 난무한 영화로 만든다. ‘새로움’은 툭 튀어나간 설정이 아닌 무수히 나열된 것들 중 슬쩍 돌출된 부분에서 드러난다는 것, 특히나 괴물은 이 ‘슬쩍’에 매우 예민하게 반응하는 주인공이라는 것 등이 미지의 것을 대할 때의 태도여야 하지 않을까.

괴물에 대한 존중이 필요한 이유

서구의 괴물들이 유난히 무자비한 것에서 그들이 가진 신체 보존에 대한 불안감을 읽을 수 있다. 살인마들이 들고 나온 각종 연장들, 그리고 밝히고 보니 살인자들 역시 기형이거나 신체적으로 불완전한 이들이라는 설정은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명확히 보여준다. 귀신들린 집 모티브를 활용했던 ‘아미티빌 호러’ 류의 영화들에서조차 가장 먼저 귀신의 목소리를 듣는 것은 집안에서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진 자인 아버지이며 이로 인해 가족은 잔인하게 몰살된다. 그들이 생각하고 있는 정체성과 그것을 위협하는 힘, 그것은 현실적인 실체에 있다.  

반대로 동양의 귀신들은 무차별적인 공격을 행하지 않으며 늘 조심스럽다. 그들이 늘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줄 이를 자신과 유사한 아픔을 가진 여성이나 순수한 어린아이를 고른다는 것은 가장 흔한 증거이다(일본의 경우 <링>(1998) 이후로 이러한 패러다임을 벗어났지만, 한국의 공포영화는 아직 그 주인공의 성별과 연령이 한 쪽으로 치우쳐 있다. 그리고 그들은 대부분 귀신과 비슷한 혹은 비슷한 강도의 상처를 받은 이들이다). 동양의 귀신이 물리적인 힘보다 자신과 공명할 수 있는 대상을 찾는 것은 그들이 원하는 것이 도덕적 처벌이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남의 눈을 의식하며 바르게 살아가야 한다는 내적인 강박이 고스란히 녹아들어 있다. 그 중에서도 신체보존한 채로 나타나는 한국의 원귀는 죽음을 카니발로 승화시키는 일본이나 인육만두 혹은 국수 괴담이 있는 중국처럼 신체훼손 류의 이야기를 가지고 나라들에 비한다면 훨씬 더 삶에 대한 갈망과 단죄에 대한 의식을 강하게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해석이 가능한 것은 괴물을 쉽게 보아 넘길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는 점을 지시한다. 보통 유희의 한 부분으로 치부되어 버리는 괴물은 문화권마다, 시기마다, 세대마다 각각의 정체성을 드러낼 수 있는 중요한 산물이다. 더불어 그것이 장르적 쾌감을 발산할 때의 에너지는 그 무엇보다 강력하다. 새로운 괴물의 등장은 그것을 탄생시킨 이들이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무엇을 지키고 싶어 하는지에 대한 무의식적 측면들에 섬세하게 가닿는다. 이에 대한 예민함, 그것이 괴물이 지닌 거대한 함의를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는 길일 것이다. 


<캐빈 인 더 우즈>(2012)
<희생부활자>(2017)


사진출처: 네이버 영화, 다음 영화


글: 송아름
영화평론가. 한국 현대문학의 극(Drama)을 전공하며, 연극·영화·TV드라마에 대한 논문과 관련 글을 쓰고 있다.

글 출처: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 르몽드 시네마 크리티크
http://www.ilemonde.com/news/articleList.html?sc_sub_section_code=S2N40&view_type=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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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자서곡숙

등록일2018-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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