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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승학] ‘사랑은 반드시 존재한다.’ - <나의 엔젤>

우리가 이해하는 이야기가 영화로 재현될 때면 그것은 ‘시점’을 동반한다. ‘시점’은 카메라로 구현되니 결국 영화는 카메라의 시점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볼 수 있다. 대체로 카메라가 누군가의 시점(전지적 시점이든 개인의 시점이든)이 되면 그것은 동시에 ‘몸’을 전제한다. ‘있음’을 확정하는 ‘몸’. 카메라를 바라보며 ‘넌 누구니?’라고 말하는 화자의 얼굴이 클로즈업됐다면 카메라가 묘사하는 일인칭 시점의 몸은 ‘거기 있는 것’이다. 그런데 <나의 엔젤>은 이렇게 되묻는다. “몸이 있다고 했지 보인다고 한적 없어..” 

  

<나의 엔젤>의 포스터

<나의 엔젤>은 카메라 시점의 주체에게서 바로 ‘보이는 몸’을 빼앗는다. 어쩌면 투명한 주인공의 몸은 ‘보다’보다 ‘만지다’의 감각을 더 극적으로 관객에게 환기시켜주고 싶었는지 모른다. 그렇지만 어차피 ‘카메라’의 존재는 영화 속에서 절대로 보이지 않는다. ‘투명인간’이라고 하지 않아도 운명적으로 ‘카메라’는 ‘투명하다.’ 아무도 카메라의 존재를 시각적으로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살인의 추억>에서 ‘밥은 먹고 다니냐?’라며 냉랭하게 바라보는 주인공의 눈빛이 왜 나를 향한다고 생각하는가? 결국 카메라는 자신의 존재를 감출 수 있기 때문에 스크린 속 인물과 스크린 밖의 나를 연결한다. 그러니 <나의 엔젤>에서 일인칭 시점의 카메라가 ‘투명인간’이라는 설정은 그 자체로는 그리 새로워 보이지 않는다. 

차라리 새로운 건, 여주인공이 ‘장님’이라는 사실에서 드러난다. 왜냐하면 마들렌은 상대방의 ‘있음’을 ‘보다’ 이외의 감각으로 확신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 <나의 엔젤>의 마들렌의 눈먼 어린 시절
‘나의 엔젤’(<나의 엔젤>은 영화제목, ‘나의 엔젤’은 영화 속 주인공 이름으로 구분>)이라 불리는 남자 주인공은 태어나면서부터 투명인간이다. 그의 ‘존재’는 유일하게 어머니에 의해서만 인정된다. 투명인간을 다루는 다른 영화들과는 달리, 그는 투명하다는 존재의 특징에 거의 집중하지 못한다. 그런 ‘나의 엔젤’은 마들렌과의 놀이 속에서 자신의 존재이유를 깨닫는다. 마들렌은 그의 존재를 촉감과 냄새로 인식한다. 그것은 볼 수 있다는 것을 압도한다. 이들의 놀이는, 각막이식 수술을 한 이후 시력을 회복한 마들렌과 극적으로 만나게 되면서 다시 이어진다. 

이런 관계의 설정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니까 우리가 흔히 누군가를 의미있는 존재로 만든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해준다는 차원에서 그러하다. 그것은 서로의 불가능과 불가능이 만날 때 가능이 된다는 관계, 결핍과 결핍이 만날 때 충족이 된다는 관계이기 때문이다, 마들렌에게 ‘불가능한 시각’은 보임이 불가능한 ‘투명함’과 만날 때 ‘관계의 충족’이 된다. 그렇다면 이렇게 묻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가능과 가능, 충족과 충족이 만나면 무슨 관계가 된단 말인가?’ 

<나의 엔젤>에서는 일단 이를 거의 관음증적 판타지로써 보여준다. 성인이 된 마들렌의 육체를 훑어 내려갈 때, 그러니까 시각이 회복된 마들렌의 육체를 훑어 내려가는 ‘나의 엔젤’의 시선에서, 나는 그런 질문을 던지게 된다. 

결핍과 결핍이 만날 때 분명해지는 ‘존재’의 가치가 충족과 충족이 되어 변질되는 ‘관음증’의 돌연한 출현은 도대체 무엇 때문이란 말인가? 거기에는 회복된 ‘시각’이 전제된다. 물론 ‘나의 엔젤’은 투명인간이라는 상황이 나아지지 않았다. 반면에 마들렌의 회복된 시각은 예전 그녀의 감각이 전과 같지 않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런 이유로 ‘나의 엔젤’은 존재할 수 없게 된다. 자신이 사라지고 ‘시선’만 남은 ‘나의 엔젤’은 인간 앞에 자신의 몸을 드러내지 않는 ‘신’이 될 수 있지만 기뻐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을 드러낼 수 없음을 ‘절망적으로 받아들인다. 게다가 그는 그녀가 투명한 자신의 존재를 인지하면 놀랄 것을 우려해 숨소리조차 내지 않지만, 그것이 투명한 카메라의 시선에 포착될 때 관음증적 시선이 되는 변질을 피해갈 수는 없다. 

그러므로 여기서 눈여겨 봐야할 것은 필연적으로 관음증적 시선으로 돌변하는 ‘카메라의 일인칭 시점’이다. 왜냐하면 관음증적 시각은 관객들이 누리고 싶어하는 어린 마들렌과 ‘나의 엔젤’의 공감과 추억을 빠르다 싶을 정도로 타락시키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에 대한 반발로 다른 영화에서라면 변태적 시선으로 치부해 버릴 여러 상황들을 여기서는 얼마간의 이해의 맥락, ‘나의엔젤’은 그런 남자가 아니야 라는 짤막한 저항으로 버텨내게 만든다. 

왜 이런 순간의 충돌이 돌발적으로 튀어나오는지는 분명해 보인다. 투명인간의 시선인 ‘나의 엔젤’이 ‘시각적으로’ 등장했다면 아마 우리는 관음증적 시선이 가진 남성우월적 성향에 자연스럽게 흡수되어 그 빤함에 허무해 했을 테지만, 여전히 투명한 그의 모습은 여전히 어린 시절 순수한 그의 모습으로 이어질 수 있으니, 우리는 온전히 순수한 ‘나의 엔젤’의 모습을 보지 않으면서도 보고 있다고 여기게 되는 희한한 경험을 공유할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덕분에 이 영화는 얼핏 비슷해 보이는 다른 로맨스 영화들이 “그래서 이들은 계속 사랑하게 될까?”를 물을 때, 오히려 “사랑을 할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를 되묻게 만든다. 그리고 이 질문은 결국 다음 질문으로 이어진다. “우리는 왜 사랑하고 있지 않는가?” 
 
  
▲ <나의 엔젤>의 마들렌이 시력을 회복한 모습
더 나아가 마들렌과 ‘나의 엔젤’은 거의 불가능한 상황 속에서도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기위해 노력하는 그 절박함을 오히려 ‘충동’처럼 보이게 만들기도 한다.
 
이에 대해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겠다. ‘나의 엔젤’이 투명인간인데다가 목소리로만 표현됐다는 점을 생각해본다면 이는 어쩌면 마들렌의 심적 내부에서 울리는 일종의 ‘충동’의 재현일 수 있겠다는 생각. 영화는 시종일관 ‘나의 엔젤’이 지극히 현실적인 존재임을 내세우고 있지만 관객의 입장에서 ‘투명인간’은 마들렌에게 사랑을 충동질하는 내면의 목소리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 말이다. 

이는 ‘죽음충동’이 존재이전의 ‘무화상태’로 되돌아가 가려는 맹목적 힘이라는 점에서 ‘투명인간’은 무화 상태의 또 다른 버전임을 말해준다. 투명인간이 충동을 재현하는 존재라면 ‘나의 엔젤’은 마들렌에게 ‘사랑’을 충동질하는 동시에 ‘사랑 그 자체’의 현현으로서 마들렌에게서 제거할 수 없는 리비도의 강력한 에너지를 다르게 표현하고 있는 것이 된다. 

그러니 마들렌이 보여주는 ‘사랑’은 단순명쾌해 질 수 있다. 봤으니 아는 것이 아니라, 만졌으니 만나야 된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마들렌은 그를 감각했으니(만지다) 거부할 도리는 없다(반드시 만나야 한다)고 믿는다. 마들렌은 사랑이란 필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사랑 그 자체의 존재를 ‘감각’했기 때문에 거부할 수 없다고 믿는다. 그러므로 이 영화는 상실감에 빠져 ‘사랑이 뭐냐’고 묻는 허무주의자들의 말을 인용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느꼈다면 그건 부정될 수 없다’는 식의 존재적 차원의 확언이라고 볼 수 있다.  

감각 대상의 거부 불가능성. 어쩌면 이것이 사랑에 접근하는 본질적인 독법이 아닐까? 그러니 이렇게 정리하면 좋을 것 같다. 감각된 ‘사랑은 반드시 존재 한다’고. 


글: 지승학
영화평론가. 현재 고려대학교 연구교수, 문학박사이며, 201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영화평론부문 등단하였다.

글 출처: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 르몽드 시네마 크리티크
http://www.ilemonde.com/news/articleList.html?sc_sub_section_code=S2N40&view_type=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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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자서곡숙

등록일2018-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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