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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호] 우리를 부르는 목소리들 ―영화 <장산범>

1. 구천을 떠도는 민담


영화 <장산범>은 매년 여름, 우리의 체온을 낮춰주기 위해 찾아오는 스릴러 공포물 가운데 하나였을지도 모른다. 비슷한 시기에 개봉했던 <애나벨: 인형의 주인>과 비교되면서 “둘 중 더 무서운 영화가 뭔가요?”라는 식의 질문이 많았다. 사람들은 외국 공포물의 손을 들어 주었고, 그렇게 전작 <숨바꼭질>로 알려진 허정 감독의 다섯 번째 영화 <장산범>은 관객 수의 면에서만 보자면 초라한 성적표를 받았다. 그 말은 <장산범>이 관객 수용-반응의 차원에서 밤늦은 귀가 길을 무섭게 하지 못했고, 집에 돌아가 잠들지 못하게 할 만한 환영들을 선물하지 못했다는 말도 된다. 하지만 고백컨대, 영화를 보던 필자의 팔은 제 멋대로 덜덜 떨리고 있었다. 주체의 자기의식은 공포를 억제하는 데 성공했으나 신체는 이미 무서움을 타고(“무섬-탐”) 있었던 것이다. 이 글은 그 ‘공포-두려움-불안’을 조금이나마 해소하기 위한 시도로 쓰여진다. 
 
  
 
<장산범>은 먼저 구전 공동체 사이에서 떠도는 이야기를 채취한다. 영화 속에 나오는 전래 동화 「햇님 달님」 이야기도 그렇거니와 우리 시대의 또 다른 이야기 형식인 웹툰을 원소스로 한다. 1992년 부산의 장산 지역에서 일군의 사람들이 호랑이를 목격했다는 <동아일보>의 신문 기사도 한몫을 거든다. 더 거슬러 올라가 장산범 괴담은 장산 지역과 소백산 일대에 전해 내려오는 구전 설화이기도 하다. 장산범을 그렸던 민화들이 그것이 오래된 우리들의 떠도는 이야기였음을 증거한다. 
우리도 어렸을 적 할머니로부터 사람 목소리를 흉내 내 정신을 홀린다는 범의 이야기를 들어본 기억이 있다. (한국 전통에서 ‘범’이란 말은 고양이과 짐승을 통칭하는 말이었지 반드시 호랑이만을 일컫지는 않았다.) 정리하자면 이 영화는 출발에서부터 우리 집단의 기억, 단위 공동체의 공동 기억을 소환하고 있다. 한 개인만이 아니라 공동체 구성원 사이에서 떠도는 불안과 공포, 그래서 확인되지 못한 실체 같은 것들에서 유래하는 불안을 영화로 재현시킴으로써 <장산범>은 또 하나의 괴담 이야기를 잣는다. 

떠도는 이야기는 왜 무서운가? 확인되지 않은 것에 대한 공포, 실체를 증명하지 못한 미지의 것에 대한 두려움에 기원할 것이다. 떠도는 이야기란 우리 내부로부터 나와서, 사람과 사람 사이를 옮겨 다니며 증식하는 불안의 말들에 다름 아니다. 헛소문, 괴담은 그 실체가 확인되기 전까지 막강한 힘으로 하울링하며 말들 속에서 증식한다. 그것은 호환․마마보다 무서울지 모르지만 떠도는 말들이야말로 이미 호환․마마 그 자체이다. 그것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사람을 죽이는 힘이 있다. 이제는 추억이 되어버린 메르스 사태를 생각해보자. 우리는 사실 감염균에 대한 공포만이 아니라 접촉에 대한 두려움, 전염에 대한 불안을 경험했다. 우리가 그 권리를 위임한 국가 장치에 대한 불신에서 불안은 증폭되었고 그것은 분노로까지 화했다. 그 불안은 역병처럼 번지며 바이러스보다 더 빠르고 강력하게 퍼져나갔다. 떠도는 말들은 원래 공포스러운 법이다. 그러니 우리에게 안정된 소식을 전해주는 언론매체에 감사라도 해야 할 판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장산범>은 우리에게 또 하나의 공동 기억이 되어버린 사건, 바다 위에서 처절하게 구원과 도움의 손길을 기다리며 유명을 달리한 아이들에 대한 기억을 재생시킨다. 우리 사회가 아직 제대로 애도하지 못한 이 사건은 우리 양심에 가책을 불러일으킨다. 다소 뜬금없는 연결처럼 보일 이 연상은 공동 기억 뿐만 아니라 이 영화가 죄책감을 다루면서 시작하기 때문에 생겨난다. 허정 감독의 전작 <숨바꼭질>에서도 죄책감의 모티프는 영화를 끌고 가는 주된 동력이었다. <숨바꼭질>의 성공한 사업가 성수(손현주)의 어릴 적 거짓말이 불러일으키는 죄책감은 중산층의 근원을 알기 힘든 죄책감과 어울려 증폭하다가 “이 집 가져도 좋으니까 나가게만 해줘”(소유의 포기)에서 비로소 잦아들었다. 

<장산범>의 오프닝에서는 한 사내가 아내를 묶어 트렁크에 싣고 애인과 장산 동굴로 가는 시퀀스가 나온다. 공포와 불안으로 뒤범벅된 이 장면은 사실상 전체 스토리와 연관이 없지만 본 스토리의 예고편이자 압축판으로 읽을 수 있다. 그는 아내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환청)에 시달리며 결국은 아내를 버리러 갔다가 자신의 애인조차 죽이게 된다. 자책감의 원인을 제거해 버린 것이다. 그를 괴롭히는 것은 아내가 자꾸 자신을 부른다는 것인데, 그것이 죄책감에서 연유하는 것임은 물론이다. 그럼에도 그의 아내가 실존하는 것이었는지는 사실상 불분명하다. 그런데 이 불분명함들이야말로 이 영화의 숨겨진 공포감 유발 요소들 가운데 하나이다. 모든 것이 확실한 인과 관계로 설명되지 않은 채 해명되지 않는 서사들, 뒤죽박죽이 되어버리는 이미지들의 연쇄 속에서 우리는 생각할 시간보다는 장면과 이미지에 반응하기 바쁘다. 이 영화에서는 살인 뿐만 아니라 사소한 죄, 어딘가 찜찜하고 불편한 느낌 같은 것들, 일상의 작은 균열 같은 것들을 장산 동굴에 뚫린 벽돌, 작은 구멍의 이미지로 제시한다. 그 구멍 너머에는 깊이를 알 수 없는 어둠(인식의 공백 지대)이 있고, 그곳으로부터 익숙하지만 낯선, 그래서 섬뜩한 음성이 울려나온다. 그 음성은 나를 부르는 목소리이다. 

그 음성이 근원을 알 수 없는 죄책감과 공명할 때 그것은 비로소 양심의 소리, 탓하는 부름으로 청각화된다. 이 영화를 보며 제대로 무서움을 타기 위해서는 그 소녀가 바로 우리들 마음 속 깊은 곳에 실재하며 탓하는 부름의 체현물이라는 점을 생각해야만 한다. 소녀는 우리의 양심이 불러낸 환영 혹은 탓하는 부름으로서의 가책감이다. 즉 “정신적인 것의 물질화”된 소녀로 보는 것이 가능해진다. 다시 말해 그 소녀는 우리의 가책감이 만들어내고 불러낸 심인성 현실(psychic reality)의 조각이다. 

주인공 희연(염정아)은 자신의 아들 ‘준서’를 잃어버린 자책감으로 괴로움과 상처를 안고 사는 인물이다. 어머니가 아이를 잃어버렸을 때, 그 아이가 겪었을 두려움과 공포를 상상해보면서 그것에 대해 미안해하고 자책하고 있었다는 점이 영화 곳곳의 대사나 행동, 표정 등으로 표현된다. 어떻게 아이를 잃어버린 엄마가 그 아이의 두려움을 상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우리가 어찌 침몰하는 배 안에서 유리창을 두드리던 그들의 들리지 않는 목소리를 상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때 우리는 그것을 미디어로 구경하고 있었다.……

2. 귀신: 다시 돌아오는, 존재자 없는 존재

한 가족이 장산으로 이사를 간다. 요양하기에는 더 없이 좋아보이는 집. ‘숲 바람 그리고 강아지’라는 이름에 걸맞는 해피 힐링 펜션이다. 언뜻 보면 공기 좋은 곳에서 요양하려는 가족처럼 보이지만 상황은 낭만적이지 않다. 치매에 걸린 시어머니, 5년간 잃어버린 아들 준서를 찾아 헤매느라 심신이 피폐해진 희연의 가족이다. 시어머니(허정)의 고향인 이곳에서 혹시라도 기억이 돌아올 수 있다면 잃어버린 아들을 찾을 수 있는 실마리라도 건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가지고 온 곳이다. 

그러므로 이 영화는 분명 ‘찾기’의 모티프를 가지고 있다. 물론 ‘찾기’의 대상은 잃어버린 것들이 되어야 한다. 잃어버린 자만이,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자각한 자만이 찾으러 나선다. 그래서 영화 속의 인물들은 기억을 찾으려 하고, 아이를 찾고 싶어하며, 개를 찾으러 다니고 형사는 범인과 더불어 사건의 진실과 원인을 규명하고자 한다. 그러나 영화는 우리 손에 그런 진실을 쥐어주지는 않는다. 찾으려는 자는 성급한 진실보다 소녀(의문의 존재, 거울 속의 피사체, 비-존재로서의 유령, 사진 속에서 나온 아이)를 먼저 만나야 한다. 혹은 만나게 된다. 그 소녀를 따라 동굴의 어둠 속으로 들어서기 전에 그녀는 진실을 마주할 수 없다. 그렇다면 도대체 장산범이라는 목소리를 흉내내는 괴담에서 우리는 또 무엇을 찾아내야만 하는 것인가. 

여기 따라하는 목소리(모방)와 어우러지는 이 영화의 주요한 오브제가 있는데 그것은 ‘거울’이다. 영화는 모방(이야기), 재현(스크린), 미믹(연기)의 한 장르임이 분명하고 그것을 잘 보여주는 장치로서 거울만한 소품도 흔치는 않을 것이다. 공포 영화의 관습 속에서 거울은 공포나 주물의 대상으로 나타나지만 영화 <장산범>에서 거울은 반영과 재현의 매체 속에 나타나는 허구/진실의 알레고리이다. 게다가 거울을 통해서 이 영화가 영화에 대한 영화임까지도 추론해 볼 수 있다. 거울로부터 출현하는 공포스러운 괴물은 영화적 환영-이미지임에 분명한데, 공포영화이기에 그것은 끈적하고 흐물흐물하며 더러운 아브젝시옹의 이미지로 출몰한다.
 
개를 잃어버린 아이들과 장산 동굴 앞에 도달한 희연 부부는 살인된 시체를 발견하게 되는 곳에서 한 명의 길 잃은 여자아이를 만난다. 물론 그 아이는 희연의 눈에 처음으로 거울 속에서 나타난다-재현된다. 그 아이는 그날 밤 희연의 집 앞에 다시 나타나고 희연은 그 아이를 집으로 들여 닦아주고 재워준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아이였으나, 잠시 뒤 그 소녀는 말문을 열고 자신의 이름이 ‘준희’라고 한다. 희연의 딸 ‘준희’와 이름이 같으며 심지어 목소리도 같다. 숲속에서 발견된 소녀, 자칭 ‘준희’라고 밝힌 그 소녀는 누구인가? 소녀는 헐벗고 버려지고 길을 잃은 행색이며 학대받은 흔적까지 있다. 말이 없다고 딸 준희의 목소리를 흉내내는 그 소녀는 누구인가. 그 소녀는 장산범의 분신인가 아니면 버려지고 학대당한 양심의 체현물인가. 

 
  
 
그런데 장산범은 왜 목소리를 따라하는 것일까? 그것은 장산범이 다름 아닌 나의 ‘분신’이기에, 내 양심의 체현물이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닐까? 목소리를 흉내 내는 장산범은 내 양심의 물질화이기에 나의 목소리를 따라할 수밖에 없다. 여기서 우리는 스타니슬라브 램의 동명소설을 영화화했던 타르코프스키 감독의 <솔라리스>(1972)를 떠올리게 된다. 우리가 지금 전형적인 귀신 영화를 보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도 안 된다. 구전 설화 속에서 괴담으로만 전해지는 ‘실체 없는 현존’으로서의 귀신. 

우리 문화권에서는 유령을 ‘귀신’(鬼神)이라 통칭하는 관습이 있다. 그것은 틀리지 않았다. 돌아온 넋으로서의 귀신과 유령은 전적으로 같은 말이다. 유령학의 권위자이기도 했던 데리다는 말한다. 유령은 존재자로서는 부재한다. 그런 의미에서 유령-귀신은 명사(existant)가 아니며 그저 동사(exister)로만 생각되어야 하고, 현학적으로 말해서 명사 없는 동사, 존재자 없는 존재로 보아야 한다.(서동욱, <일상의 모험>, 민음사, 2005, 114쪽 참조.) 그렇다면 존재자 없는 존재가 유령-귀신이고, 존재 없는 존재자는 좀비일 것이다. 전자는 무섭고 후자는 두렵다. 둘다 우리 불안의 실재적 상상물임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장산범>의 소녀는 이름이 없다. ‘소녀-그것’에게는 목소리도 없다. 하지만 그리스 신화의 에코처럼 나의 목소리를 되받아친다. 실체가 없기에 고유의 이름이 있을 수 없고, 목소리 또한 들은 그대로 흉내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장산범이 들려주는 내가 아는 이들의 목소리는 오직 나의 것이며, 내가 들었던 목소리, 잃어버린 목소리 혹은 내가 듣고 싶은 목소리이다. 죽은 자들이 나를 부르는 소리, 그것은 양심의 물질파이며, 오로지 나의 들음 속에서만 현성하는 목소리일 것이다. 영화 속에서 살인범이나 시어머니는 그 목소리의 근원을 제거하려는 행동을 한다. 거울을 청테이프로 꽁꽁 싸매고, 심지어 그 소녀를 칼로 찌르려 든다. 희연의 남편은 그 소녀를 내보내라고 희연을 채근한다. 자기 내면의 목소리가 불려나와 재현되지 않도록 하려는 행동이며 그 소리의 체현물을 제거하려는 몸짓이다. 자신들의 안온한 일상을 유지하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은 섣부른 주문을 외우며 되돌아오는 귀신을 막아보려는 애처로운 몸짓에 지나지 않는다. 

3. 어둠 속의 목소리

목소리를 따라 시어머니는 동굴 속으로 사라졌다. 어머니를 찾으러 간 남편(박혁권)도 장산 동굴에 갇힌다. 희연 역시도 남편을 찾아서 ‘소녀-그것’의 안내를 받아 동굴 안으로 들어선다. 동굴 안에서는 어떤 소리도 내서는 안 되며 어떤 목소리에도 대답해서는 안 된다는 금기가 주어지지만 금기는 깨뜨려지기 위해 존재하는 법. 희연은 소리를 내고 동굴에서는 장산범의 목소리들이 들려오기 시작한다. 나지막하지만 소름끼치는 그 소리는 시어머니의 목소리이고, 남편의 음성이며 또한 딸의 목소리 그리고 잃어버린 아들 준서의 목소리이기도 하다. 이 장면에서 사건의 인과관계가 조금 얽히면서 납득이 안 되는 장면들이 있기도 하지만 그냥 넘어가자. 중요한 건 목소리이니까. 

동네 무당이 들려주는 또 하나의 ‘이야기’를 참고하면 그 소녀의 아버지가 장산범의 하수이고, 어린 소녀는 희생자이면서도 장산범의 하수로 비치기도 한다. 아마 이 영화의 공포는 소녀를 어떻게 보느냐에서 결정될 것이다. 분명 아버지와 딸-소녀는 모두 장산범과 관계된 자들이다. 하지만 동굴 안에서 소녀는 아버지-괴물을 무서워하며 벌벌 떤다. 동굴 안에서 소녀-그것은 분명 희연에게 아무런 피해도 입히지 않는다. 오히려 희연을 안내하며 감싸주기도 한다. 그렇게 보노라면 소녀는 대면하기 힘들고 피하고 싶지만 목소리에 응답하기 위해 장산동굴에 들어가 내면의 심층과 대면하도록 이끄는 양심의 밝은 면, 유령-천사의 기능을 수행한다고 말할 수도 있으리라. 소녀는 탓하는 부름으로서의 양심의 밝은 면이고 괴물 형상의 무당-아버지는 그 소리에 응답하는 순간 일상을 전면적으로 붕괴시키는 양심의 괴물적 형상 이미지인지 모른다.
 
  
 

소녀가 나타난 이후로 가족들의 시력은 약화된다. 목소리 외에 시선이 등장한다. 시력은 약화되다가 장산 동굴 안에서는 거의 무력화된다. 명석하고 판명한 밝음 속에서 이성적 인식을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 간다는 뜻이다. 시각-인식-이성이 끝나는 곳에서 음성-들음-내면의 목소리가 시작되고, 동굴에서 시선은 무화되어 인식이 중지된다. 시선이 약화되었을 때 의지할 수 있는 것은 청각과 소리 뿐인데 그러나 장산범은 목소리를 모방하기 때문에 이제는 그 목소리 자체가 공포의 대상으로 다가온다. 내가 알고 있는 것, 기지의 지식이 더 이상 작동하지 못할 때 우리는 음성 목소리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데 소리조차 믿을 수 없게 된 상황은 대단히 공포스럽다. 자신이 알고 믿던 토대가 허물어졌는데 의존해야 하는 목소리조차 가짜일 가능성이 농후해진다면 무엇에 의지해야 할 것인가라는 경험이 장산 동굴에서 펼쳐진다. 

동굴 안에서는 모든 인식이 무화될 뿐만 아니라 거꾸로 뒤집힌다. 거기서는 살아남기 위해서 소녀를 믿지 말고 따르지 말아야 한다. 소녀를 버려두고 동굴을 빠져나가야만 한다. 급박하게 비가시적 장산범의 가시적 형상인 무당-괴물이 뒤쫓아오며 위협과 공포를 하는 이 공간은 희연 내면과 진실의 공간일 수 있다. 우리가 잃어버린 진실과 조우하기 위해서 마주쳐야만 하는 장소로서의 동굴은 살기 위해서는 빠져나가야만 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인식은 결국 주체의 것이며 주체를 강화시킨다. 그러나 어두움, 깊은 곳에서 울려 나오는 목소리에 응답하는 길은 ‘자기동일성’을 버리고 어둠과 비실재의 환청(타자성)을 따라 진실을 향해 걸어야만 한다. 그것은 이 세상으로부터 실종되는 길이며 죄책감을 버리고 거울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고 상징망의 세계로부터 잊혀지는 길이다. “너 때문이야. 너 때문에 우리 준서가 사라진 거야.” “당신 때문이야. 당신이 잘못한 거라구.” 사물을 식별하고 구분하는 빛의 세계를 벗어난 동굴은 바로 장산범의 영역이지만 혼돈과 알 수 없음의 장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소리들이 우리 내면 깊은 곳에서 울려나오는 목소리들의 장소라면? 그것은 피하고 싶은 목소리들의 장소이지만 진실의 장소일 수 있음은 물론이다. 그것은 가히 공포스럽다. 그 목소리를 따라 진실을 향해 걸어 들어갈 것인가 아니면 살아 남기 위해 빛이 지배하는 밝은 세상으로 향할 것인가. 내가 잃어버린 사람들은 아련한 목소리로 나를 부른다. 그러나 우리는 살기 위해서 그 소리를 뒤로 묻은 채 그곳을 벗어나야만 한다. 

이 영화에서 가장 공포스러운 장면이 있다면 희연이 남편의 말을 따라 동굴 밖으로 나가려는 쇼트이다. 자신을 버리고 남편을 따라 밖으로 나가려는 희연에게 소녀는 “엄마, 나 지켜 준다며……곁에 있어 준다며……”라며 흐느낀다. 그것은 원망하는 소리이며,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않는 희연을 탓하는 부름이다. 소녀를 버리고 동굴 밖으로 향하는 계단 위에서 희연은 끝내 아들 준서의 울먹이는 목소리를 듣는다. “엄마, 나 여기 있어. 나 데리러 올거지? 엄마 나 버리고 가는 거야?”라는 목소리. 소녀가 실종된 아들 준서의 목소리를 한 번도 들은 적이 없음을 상기하자. 그러니까 그 소녀는 직접적으로 들은 목소리만 흉내내는 것은 아니다. 그토록 듣고 싶었던 아들의 목소리, 희연이 상상하는 목소리였을 것이다. 그것은 자신을 탓하는 발화이자 이리로 오라는 초대의 부름이다. 결코 거절할 수 없는 부름. 그녀는 그 목소리에 응답한다. 다시 동굴의 어둠 속으로 내려가는 것이다. 

희연은 끝내 아들 준서의 부르짖음을 외면할 수 없었을 것이다. 5년 동안의 시간 동안 아들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했던 자책감으로부터 놓여나고 싶었던 희연은 결국 아들인지 아닌지 알 수 없는 존재에게 사과를 하며 흐느낀다. “버린 게 아니야……엄마가 버린 게 아니야……” 카메라는 분명 소녀-준희를 보여준다. 하지만 희연에게 그런 것은 중요치 않다. 중요한 것은 희미한 아이의 형상을 끌어안고 울며 사과하는 것이다. 그런 그녀를 소녀는 꼬옥 안아준다. 자책의 무거운 짐을 달고 사느라 지쳐버린 그녀에게 동굴은 어쩌면 평안을 가져다 준 안식처일 수 있었다. 이제 희연은 소녀-아들의 손을 잡고 어둠 깊은 곳으로 걸어 들어간다. 어떤 이의 눈에는 결국 장산범의 꼬임에 빠져 또 한 명의 사람이 사라져버린 사건일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이제 동굴은 더 굳게 철문이 설치되어 꽁꽁 닫혀버리고 폴리스 라인이 설치된다. 진실의 공간은 그렇게 또 한번 봉인된다. 

4. 목소리를 듣게 된다면

그렇게 영화 <장산범>은 한국 전래의 설화를 모티프로 하고, 부산 장산 지역의 괴담, 웹툰 <장산범>등의 문화 콘텐츠적 요소를 영화 속으로 끌여 들여 적절히 활용할 줄 아는 명민함을 가지고 있으며, 잃어버림과 찾기라는 테마를 중심으로 서사를 끌어가며 공포를 불러일으킨다. ‘목소리’라는 부분대상과 ‘목소리의 모방’이라는 미믹(Echo)을 적절히 활용하여 공포감을 극대화시킨다. 동굴이 가지는 빛과 어둠을 영화적으로 잘 표현하면서 드러남(眞)과 감추임(僞)의 테마를 제시하고 있으며 잃어버린 아이를 찾으려는 엄마의 애절함과 친숙한 가족들의 목소리의 섬뜩한 낯섦(unheimliche)을 공포영화다운 설득력으로 관객을 긴장시킬 줄 아는 연출력을 보여주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장산범이 목소리로 사람을 홀리는 이야기 혹은 우리의 존재를 망치는 이야기, 다른 한편으로는 영원한 안식을 꿈꾸게 하는 달콤한 초대로의 목소리 사이에서 우리는 갈팡질팡한다. 마치 엄마의 목소리를 흉내내며 문을 열어 달라는 전래 동화의 호랑이처럼, 밀가루를 바르고 문틈의 밑으로 털이 수북한 그 짐승의 발을 손처럼 내밀며 문을 열어 달라고 한다. 만일 당신이 문을 열어준다면 당신은 사라지게 될 것이다. 
 
  
 

찾으려는 자는 장산 동굴 앞에 서게 된다. 그리고 듣게 된다. 나를 부르는 소리를……그리고 거기로부터 흘러나오는 내 내면의 목소리를 듣게 되고, 내 목소리를 흉내 내는 양심의 물질화를 보게 될지도 모른다. 그 동굴은 숲 속으로 이끌고 어둠으로 이어지는, 미지의 부름이자 미지에로의 초대이다. 그러면 우리는 따라갈 수 있게 된다. 

하지만 돌아올 수 있을까? 알 수 없다. 그러나 어둠 깊은 곳, 심연 속에서 우리가 외면했던 그 목소리를 우리가 과연 거부할 수 있을까? 동굴을 빠져 나간 남편처럼 후자의 길이 훨씬 쉬워 보인다. 하지만 그 탓하는 부름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음 또한 마찬가지다. 영화는 결국 그 목소리들을 억압하며 현실에 골몰하는 우리를 자꾸 부르는 음성을 재현함으로써 아련한 자장가 소리로 마무리 짓는다. 언젠가 어머니의 어두운 자궁 안에서 들었을 듯한 그 소리로……


글: 이호
영화해석학자이자 문학평론가. 2002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문학평론으로 등단하여 계간 《연인》 편집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글 출처: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 르몽드 시네마 크리티크
http://www.ilemonde.com/news/articleList.html?sc_sub_section_code=S2N40&view_type=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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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자서곡숙

등록일2018-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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