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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승학] ‘무한한 죽음이 주는 하루의 힘 또는 무한한 하루가 주는 죽음의 힘’

<해피데스데이>에서는 같은 하루가 반복된다. 흔히 이런 경우 타임머신 영화를 떠올리기 쉽지만 되돌아오는 시간의 이유나 반복되는 하루의 원인은 영화 제작사인 유니버셜 스튜디오의 오프닝 로고영상에서 미리 나타나고 있듯이(이 부분이 매우 흥미롭다) 우주적 차원에서의 시간 반복이 그저 여주인공의 ‘죽음’과 연결되는 것으로 갈음 된다. 

  

그렇게 이 영화에서의 하루는 ‘트리’(여주인공 제시카 로테)에게서 시작해 ‘트리’를 향한다. 결국 트리의 하루는 오로지 하루뿐인 게 되지만, 이 때 다른 사건들과 등장인물들이 거의 다르게 서로 교차되는 탓에, 트리의 하루는 매번 내일로서의 오늘이 된다. 

  
 
트리가 겪는 되돌아오는 하루는 무언가의 시작이자 끝이기도 하다. 트리는 자신이 되살아나는 성스러운 순간에 늘 깨어나고, 죽은 뒤의 세상을 오늘로 바꿔 놓을 수 있다. 하지만 이 영화는 그런 거창함은 내팽개친 채 참신하면서도 재기발랄한 감독의 연출의도만이 영화 전체를 휘감는다. 영화 진행은 매끄럽고 상쾌하다. 그렇다고 트리가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마저 그런 것은 아니다. 결론을 향해가는 과정은 의외로 고리타분한데, 특히 하루가 왜 반복되는가가 ‘죽음’으로 치환되고 난 뒤에 트리가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은 진정한 사랑을 찾고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다는 장면에 이르게 되면 맥이 풀려버린다. 
 
  
 
그러나 <해피데스데이>는 진범이 누구인지와 왜 하루가 반복되는 가를 끊임없이 질문하게 만든다. 답을 이미 주고 있는 후자(앞서 이미 영화사 로고영상을 얘기했다)를 제외하더라도 두 질문은 의외로 시너지 효과를 크게 발휘한다. 그러니 이 영화를 보는 내내 나에게는 이런 물음들이 자꾸만 들러붙었다. ‘죽음을 말하기 위해 하루를 반복시킨 것인가, 하루를 반복시키기 위해 죽음을 끌어들인 것인가?’

대체로 반복되는 하루는 트리를 고통스럽게 한다. 과음으로 머리가 아팠던 트리는 죽음으로 직결되는 치명상 부위의 고통을 그대로 떠안은 채 또 다른 하루를 맞이한다. 그녀는 한편으로는 다행이면서도 한편으로는 두렵고 고통스럽다. 살아있기 때문에 다행이고 다시 죽어야 하니 두렵고 고통스럽다. 그나마 위안인 것은 이 모든 일이 단 하루 만에 일어나기 때문에 ‘우울의 무력감’을 보일 새가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자기 파괴적인 슬픔에 빠지기보다 긴박하게 살인자를 찾고 자신의 죽음을 극복하고자 적극적으로 자신의 주변에 개입해야 한다. 그런데 여기에는 한 가지 모순이 들어선다. 긴박한 하루 안에 해결해야하는 일이지만, 역설적으로 무한한 시간이 주어졌다는 것. 
 
  
 
이 영화가 갖는 이 역설은 아주 강력한 관점하나를 갖게 한다. 무한히 주어진 하루라는 시간으로 인해 자신을 돌아보고 주변을 이해하는 과정이 짧지만 강력하게 남기 때문이다. 특히 진범과의 관계 속에서는 이 부분이 더 강조된다. 거기에 사이다 발언과 걸 크러쉬로 무장한 밀레니얼 세대의 특징과 엮이면서 이 이야기의 힘은 한 층 더 강해진다. 성당 종소리가 암시하는 죽음과 삶의 중첩 지점에 놓인 ‘트리’의 걸 크러쉬는 어쩌면 이 세계 자체를 견디지 못하고 있는 밀레니얼 세대의 고통을 내부에서부터 무너뜨리고자 하는 ‘부정의 힘’은 아닐까. 마치 무기력하고 생명력 없는 대상을 보던 시선이 어느 순간 본질을 꽤 뚫는 강력한 응시의 통찰로 돌변하듯, 의미 없는 하루의 무기력한 반복이 결국 한 사람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 놓는 힘을 발휘하니 말이다. 

그러니 정리하여 말하자면 이 영화는 죽음을 말하기위해 하루를 반복시킨 것이 아니라 하루를 반복시키기 위해 죽음을 말하고자 한 것에 더 가까워 보인다. 그렇다면 또 다시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다. 죽음이 반복되는 메마른 하루의 반복이 숨겨진 자신의 본성을 발견하고 삶의 가치를 이해하는 순간이 되는데다가, 그 시간은 연기가 되기는커녕 늘 현재로 남는다면 그것만큼 축하해야할 데이(말그대로 ‘해피 데스 데이’)가 또 어디 있겠느냐고. 적어도 나는 이 영화에 높은 평점을 준 관객들은 무한한 하루의 긴박함이 응집력을 이뤄 뭔가를 극복하는 힘으로 재탄생 할 수 있다는 바로 그 사실을 눈치 챈 것이라 짐작해 보고 싶다. 거기에는 사랑을 이루는 진실된 힘도 포함되니 말이다.


글: 지승학
영화평론가. 현재 고려대학교 연구교수, 문학박사이며, 201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영화평론부문 등단하였다.

글 출처: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 르몽드 시네마 크리티크

http://www.ilemonde.com/news/articleList.html?sc_sub_section_code=S2N40&view_type=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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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자서곡숙

등록일2018-05-05

조회수6,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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