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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호] “나는 그대의 이름을 부르노라” ―다큐멘터리 영화 <김광석 19960106>

“<김광석>이라는 유령이 나타났다.” 이 진술은 헛소문이 아니니, 믿어도 좋다. 그것은 마르크스의 저 유명한 표현처럼 사람들 사이를 떠돌고 있다. 하지만 이 서술이 선정적인 저널식 표현이 되지 않기 위해 약간의 첨언을 해 두자. 떠도는 유령이 어디 한 둘이며, 유령을 보거나 들은 사람들의 증언이 어디 하나 둘인가? 이 글을 쓰는 시점에서 이 유령의 확산을 급속히 잠재우는 것은 법원의 故 김광석 타살 무혐의 처분이라는 진술인바, 그렇게 보자면 법원의 판결은 유령을 안정적인 사회로부터 추방하는 축문(逐文)과도 같은 기능을 수행한다.

유령들의 증식 현상은 심지어 ‘1인 매체 시대’라는 표현이 진단하듯 미디어들의 증가 현상과 맞물리는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매체가 별로 없던 시절에도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돌아다니던 이야기들이 전자-영상 미디어의 역할을 대신하던 시절과 본질적으로 양상이 달라진 것은 별로 없는 듯하다. 그것은 크게 ‘정론定論’(정설, 공식적으로 확인되고 인정된 이야기)과 ‘이설異說’(가설, 미확인되고 공식적으로 채택되지 못한 이야기)라는 두 계층의 진영으로 펼쳐져 왔다는 점을 생각해봐도 그렇다. 그렇다고 해서 옛날과 지금의 차이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이설이 정설을 위협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아졌다는 점, 이설을 믿는 자들이 많아질 때 발생하는 현상이 훨씬 더 자주, 그리고 위협적으로 느껴지는 사태가 경험적으로 목격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과 사실로 믿어지는 것의 효과는 다르지만 때로는 후자가 더 강력한 효과를 발휘할 때도 있다.
 
그런 점에서 소위 ‘음모론’이라고 불리우는 광범위한 이설의 영역이 그 어느 때보다 약진하고 있음은 분명하다. 어찌됐든 음모론은 아직 공식적으로 채택된 정상 과학 이론은 아니다. 그럼에도 음모론이 가지는 매혹적인 힘은 몇 가지 점에서 분명한 에너지를 가지고 있다. 가장 먼저는 종종 그 음모론이 ‘사실’로 밝혀진(일이 많)다는 점이다. 다음으로는 음모론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증가하고 있거나 음모론을 믿고 싶은 사람들이 증가했다는 것이다.(음모론 수요자의 증가.) 달리 말해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음모론을 필요로 하고 있는 세태가 되어가고 있다는 뜻이다. 
 
  
 
 
거대 서사(메타 내러티브)가 소멸한 시대에 적(과 적의 전략전술)을 파악하기 어려운 복잡한 세계 속에서 기득권자들의 정설을 그대로 믿고 추인할 수는 없으나, 그들의 매커니즘을 파악해 그것의 허구성을 고발하며, 그것에 저항하기에 어려운 시대에 음모론은 그 자체로 정치적인 배치 속에서 작동하게 마련이다. 즉, 음모론의 마이너리티한 감수성은 이미 기득권과 정설에 도전하는 하나의 내러티브 방식인 것이다. 이를테면 저 유명한 음모론 영상들을 생각해 보자. 
 
<시대정신>이라는 다큐에서부터 최근의 <공범자들>이나 <저수지 게임>에 이르기까지 음모론은 단지 호사가들의 한담이 아니라 실제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 보이지 않는 진실을 확인하려는 말을 듣거나 믿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 말은 힘을 가지게 된다. 문제는 그 말들이 어떤 미묘한 이데올로기적 배치들 속에서 움직이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한 비주류의 B급 가설들은 정규적이고 안정적인 사회에 파문을 일으키며 정치적인 성좌들 속으로 들어가려 한다. 흥미롭게 그것들을 즐기는 것도 나쁘기는 마찬가지고, 순진하게 그것을 그대로 믿으며 흥분하는 것도 위험하기는 마찬가지다. 
 
음모론이 매력적인 이유는 또 있다. 이미 알려진 죽어버린 사실로서의 정설보다는 아직 인정받지는 못했으나 알려진 기지의 지식과 식견을 깨는 이야기는 인간 본연의 진실을 알고 싶은 욕망에 뿌리를 둔다. 주지하다시피 사태(사물)의 진실을 찾으려고 하는 일군의 대표적 직업이 있는데, 그것을 우리는 영화 속에서 집약적으로 만나볼 수 있다. 누군가는 이러한 형국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사건이 벌어지면 3개의 직업군이 달려온다. 경찰관, 기자 그리고 작가.” 이 세 직업군은 각자 나름대로의 진실을 찾는 대표적인 직업군이다. 
 
여기에 우리는 과학자(의사)와 판․검사와 변호사를 첨가해 볼 수 있겠다. 과학으로 사태의 명백한 진실을 증언하는 사람들로서는 영화에서는 사체를 부검하는 의사로 자주 나타나며, 법정 공방은 기자와 관련되어 공적인 현실이 그것을 무엇으로 결정했느냐와 연관해서 나타난다. 익히 알려졌듯이 경찰/수사관은 후던잇(who done it)의 경로를 따라 그 사건을 저지른 사람을 찾고, 의사는 그 사건의 직접적 원인(사인)을 찾으며, 기자는 그 사건 배후의 논리를 찾아내려 한다. 작가는 그 이야기의 의미론적 진실을 찾는데 골몰하기 일쑤다. 물론 수많은 영화 속에서 이 역할은 서로 중첩되기도 하고 상호 침투하기도 한다. 
 
먼저 사실. 1996년 1월 6일 새벽에 우리들이 사랑하던 가수 김광석이 죽었다. 의학적 사인은 의사(縊死) 즉 목을 매어 질식사한 것이다. 그동안의 공식적인 정설은 자살이었으나 전직 해임기자 이상호의 다큐멘터리 영화 <김광석>은 또 다른 의혹을 제기한다. 타살 가능성에 대한 의혹 제기. 그러니까 우리는 21년 만에 사건 현장에 도착한 어떤 기자 출신 다큐멘터리 작가의 리포트(소견서)를 받아든 셈이다. 이 소견서를 검토하기 전에 먼저 이런 현상이 왜 일어나는가에 대해 언급하고 넘어가도록 하자. 그것은 우리들이 지금까지도 애창하고 있는 가수의 죽음에 대해 충분한 애도를 하지 못했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김광석이라는 유령이 죽지 않고 돌아온 것은 마치 저 햄릿의 아버지-망령처럼 그의 죽음을 둘러싼 의혹이 해소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의 죽음을 둘러싼 의혹이 해소되지 못했을 때, 우리는 그를 제대로 애도할 수 없다. 애도의 숨겨진 기능 가운데 하나는 죽은 사람을 제대로 묻음으로 인해 산 사람이 정상적인 생활로 복귀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너무 서운해 말기를.... 진정한 애도의 불가능성을 말한 사람은 누구였던가!) 그러나 그의 죽음의 이유나 원인이 완전히 납득되지 않을 때 우리는 그를 시간과 망각의 저편으로 제대로 떠나보낼 수 없다. 그는 죽었지만, 올바르게 매장되지 않았기 때문에 돌아오며, 제대로 치러지지 못한 장례식으로 인한 ‘상징적 부채’ 때문에 돌아오는 것이라고 우리는 지젝을 인용해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다큐 영화 <김광석>은 어쩌면 故 김광석을 제대로 애도하기 위해서, 한 줌의 의혹도 없게 만들어 이제는 김광석을 떠나보내기 위해서 애쓰는 몸짓의 결과물일지도 모른다.(그러나 이 글은 논문이 아니므로 간략히 요지만 소개하겠다.)
 
다른 각도에서 말하자면, 하나의 가설을 제기하는 <김광석>은 음모론의 방식으로 김광석을 전유하고 부활시키려 한다는 것이다. 달리 말해서 김광석이라는 유령이 우리에게 돌아온 방식은 음모론의 형식이었다. 그런데 이 <김광석>은 한 사람의 희생물을 필요로 했다. 그것은 고 김광석의 아내였다. ‘그/녀’는 모 뉴스 인터뷰에 출연했는데, 그 화면을 보면 분명 의혹과 의심을 사기에 적합해 보인다. 하지만 그것과 별도로 냉정하게 사태를 관찰해야 한다. 그렇게 보자면 이 영화가 제기하는 타살 의혹에는 온갖 부정적인 감정들이 묻어있다는 점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이 다큐멘터리 영화가 우리에게 호소하는 언술 전략을 들여다 보아야만 파악가능하다. 
 
먼저 영화는 김광석에 대한 애정을 기저음으로 깔아놓고 내내 이야기를 진행시킨다. 우리들이 사랑하는 가수, 지금도 우리들의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 가수 김광석의 죽음에 석연치 않다는 의혹을 제기한다. 그것은 곧바로 타깃으로 향하는데 그것은 서해순이라는 김광석의 판권을 독식하고 지금까지도 호의호식하는 한 명의 여성이다.(그녀는 자기 딸의 죽음도 10년 동안 주변인들에게 알리지 않아 더욱 사람들의 의혹을 샀다.) 그런데 이 여성이 판권을 가지는 것은 현행법의 차원에서 문제가 없는 일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감정적으로 그렇게 느끼지는 않는다. 거기에는 우리들의 가객이 죽었는데도 혼자 잘먹고 잘 살아가는 어떤 여자에 대한 분노, 그 어떤 애도의 잔영도 비치지 않는 여자에 대한 미움이 개입한다. 그러니까 이 다큐 영화는 대단히 감정적인 성감대를 자극하고 있는 셈이다. 우리 안에 있는 의심과 분노와 시기심 같은 것들을 작동시키는 방식이 이 영화의 언술 전략적 메커니즘이다. 
 
 
  
 
영화를 보면, 김광석의 아내 서해순 씨의 부정한 의혹이 제기된다. 그러니까 영화는 이렇게 말하는 셈이다. 최소한 김광석이 물리적으로 타살은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정황상 그리고 심리적으로 타살이라는 주장을 소통시키는 데는 성공한다. 뉴욕에서 공연을 앞두고 그곳에서 만난 친구와 잠적했다는 언급이 담겨진 김광석의 일기를 공개하는 장면에 이르면, 우리는 김광석에 대한 애잔함과 함께 그의 아내에게 공분을 느끼게 될 수밖에 없다. ‘그/녀’가 김광석의 아버지와 판권을 둘러싸고 지껄이는 대화가 들려지면 우리는 그녀를 소위 “싸가지 없는” 탐욕스러운 괴물로밖에 보도록 강제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 안의 부정적인 감정을 원소스로 삼아 하나의 대상을 의혹과 미움의 눈초리로 바라보도록 만드는 작품이 바로 다큐 영화 <김광석>의 언술 전략이다. 거기에 자신이 얼마나 김광석의 죽음을 둘러싼 진실을 진실되게 추구하는지 살짝 토핑처럼 얹어 홍보하는 것도 잊지는 않는다. 좋은 말로 자기홍보의 전략적 배치인 셈이다. 
 
그렇다면 김광석의 진실이 거주하는 곳, 김광석이 죽어버린 진실의 위치는 어디인가? 주지하다시피 우리가 영화를 볼 때는 그것이 아무리 사실에 기반했다고 하더라도 허구텍스트라는 점을 잊지 않는다. 그럼에도 우리는 허구 장치(텍스트)를 통해 진실에 도달한다. 이럴 경우에는 사실(팩트)보다 진실이 중요하다. 그것이 텍스트의 생산과 수용 과정의 커뮤니케이션 모델이다. 그것을 그림으로 표현하자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우리가 김광석의 노래를 들을 때도 똑같다. 
 
  
 
 
그런데 우리는 김광석의 노래를 단지 듣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이 소통 회로에서 텍스트와 청취자 사이에 공동구역이 하나 발생하는데, 그곳이 우리가 노래를 들으며 도달하는 곳이다.(작품의 진실이 텍스트에 있는지, 수용자의 마음 속에 있는지는 불분명하므로 공동구역이라고 잠정 설정하자.) 그러면 다음과 같은 그림이 만들어진다. 
 
  
 
 
그런데 이 다큐멘터리 영화를 보게 되면 우리는 이제 사태가 이렇게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것의 그림은 다음과 같을 것이다.
 
 
  
 
텍스트의 수용회로에서 우리는 영화를 보거나 노래를 들으며 그 어딘가에 도달하게 된다. 그곳은 우리 각자가 처한 다른 현실이지만 보편적이면서도 특개적인 그런 곳이다. 그곳은 텍스트의 진실이 지시하는 곳, 우리가 그 텍스트를 통해 느끼고 경험하면서 잠시 머물게 되는 그런 곳이다. 우리가 소설이나 영화, 회화나 조각 그리고 음악을 통해서 도달하게 되는 곳이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텍스트가 진짜가 아니었다고 화를 내지 않는다. 우리는 하나의 텍스트가 우리를 충분히 진실에 도달하지 못하게 했을 때 화를 낸다. 
 
텍스트의 현실 소통 회로에서 텍스트가 취하는 물질성의 차원이 있고, 그것은 법적인 문제까지도 제기하지만 다큐멘터리는 바로 이 물질과 실제적인 영역을 문제삼는 것이다. 그러나 이 회로에서 우리는 사태가 이상하게 바뀌어 있음을 알게 된다. 노래를 통해 우리는 김광석과 소통하고 교감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 회로에서 텍스트의 실제성과 음원이라는 물질성과 경제적 차원, 법적인 문제까지 인식하게 된 것이다. 이제 우리는 김광석의 노래를 부르거나 들을 때마다 그의 아내 서해순이 거기서 일정 부분 경제적 이득을 취한다는 사실을 잊을 수 없게 되었다. 이제 우리는 순수하게 김광석의 노래가 데려다 주는 곳으로 가기 더욱 힘들게 되었다. 물론 그렇다고 그것을 처음 알게 된 것은 아니며, 그것을 몰랐을 때가 행복했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우리가 저 다큐를 보면서 도달하는 곳이 어디냐는 것이다. 그것은 김광석의 노래를 들을 때 느꼈던 감정과는 사뭇 다른 울분과 의혹의 영토, 분노와 절망의 강역(疆域)이다. 단언컨대 그곳은 김광석의 진실이 거하는 위치가 아닐 것이다. 김광석의 노래는 그것과는 무관한 곳에 거한다고 믿고 싶은 심정이다. 우리는 노래나 허구를 통해 진실에 도달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다큐멘터리는 거꾸로 만든다. 우리는 다큐라는 텍스트를 통해 도리어 허구에 도달하게 된다. 그 허구의 영역은 어떤 것을 현실로 만들 수 있는 가능성의 영역일지는 모르지만 잠재적인 영토는 분명 아니다. 그것은 상징망이나 법과 관계하는 곳이지 김광석 노래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곳이다. 
 
  
 
 
그리하여 음모론의 지위는 유령적 지위, 모두가 그의 존재-사실을 믿고 있지만 모르는 것(미확인 된 것, 정설이 아닌 것)으로 하기로 약속된 곳이다. 그것은 분명히 효과를 낳는다. 떠돌며 살아서 돌아다니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현실은 아니다. 사람들이 현실로 규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모든 정황을 추론해보면 하나의 진실을 발견하게 되는바, 우리에게 김광석의 죽음이 억압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사회의 정설이 그를 자살이라고 규정했을 때 우리는 그 사실을 믿을 수 없었고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냥 정설이 그렇다니까 더 이상 토를 달 수 없었을 뿐, 마음으로는 받아들이지 않았던/못했던 것이다. 그것은 21년의 세월이 흘렀어도 여전히 그렇다. 그런 식으로 김광석의 죽음은 억압되었고, 억압된 것은 반드시 회귀한다.(프로이트) 그렇다면 이렇게 된다. 이 다큐는 우리 무의식의 증상이다. 그 말인즉슨 우리의 무의식은 김광석의 죽음에 대한 충격으로부터 방어하기 위해 그의 죽음이라는 현실을 받아들이지 않았던/못했던 것이다. 더 정확히 우리는 김광석의 자살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믿고 싶지 않(았)다.
 
가만히 눈을 감고 생각해 보자. 우리는 김광석이 타살이라고 믿고 싶다. 왜냐하면 그의 죽음이 타살인 것이 훨씬 받아들이기 쉽기 때문이다.(그리고 우리가 합의한 정설 이면에 숨겨진 진짜 진실이 하나 더 있었으면 하고 바라기 때문이다.) 그만큼 우리는 가수 김광석을 좋아했고 또 여전히 좋아한다. 어찌 그의 노래를 들으며 그를 좋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차라리 김광석이 타살이었다면 좋겠다는 숨겨진 욕망과 진실에의 희구가 결합한 희한한 텍스트적 보충물이 바로 <김광석>이라는 다큐멘터리 영화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그의 노래를 통해 도달하는 곳의 위치를 바꾼다. 
 
그러니까 가수 김광석의 죽음을 둘러싼 음모론에는 이렇게 우리 사회 구성원들이 벌이게 되는 한편의 심리극이 도사리고 있다. 다큐멘터리는 이런 심리 현상으로부터 떠올라서 상징계-법의 저편으로 사라져간다. 그 사이를 우리는 ‘현실’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제 우리는 김광석을 제대로 애도할 수 있을까? 법은 주문을 걸어 그의 유령을 잠재우지만, 그의 노래를 부를 때마다 우리는 그를 만날 것이기 때문에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글: 이 호
문학전공자로 문학평론을 전공했으나 전향하여 ‘워너비 해석학자’를 자임하며 세상의 많은 텍스트를 해석해보려는 사람.

글 출처: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 르몽드 시네마 크리티크

http://www.ilemonde.com/news/articleList.html?sc_sub_section_code=S2N40&view_type=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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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자서곡숙

등록일2018-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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