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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시내] 끝나지 않은 용산 참사, 연분홍치마의 <공동정범>

사회적, 역사적 문제를 다루는 최근의 한국영화들에서 발견되는 명확한 경향이 있다면, 영화의 서사와 활동이 영화의 소재로 선택된 이른바 ‘팩트’의 존재와 지위로 인해 추동된다는 점이다. 물론 개별 영화들의 차이는 있겠지만 대체로 다음과 같은 전략을 공유하는 듯하다. 전해지고 알려져야 할 순수한 사실이 있고, 그 사실은 발견되기를 기다리는 객관적인 자료이며 그것이 제대로 전달되어 세상에 알려지기만 한다면 적어도 잘못이 바로잡히고 정의가 실현되는 단초가 된다는 식이다. 또한 팩트를 보존하고 그것을 전달하는 과정이 영화 전체의 긴장감과 재미를 발생시킨다. 특히나 한국 현대사의 중요한 사건들을 그 소재로 삼고 있는 <택시운전사>와 <1987>이 모두 일종의 ‘증거’를 보존하고 전달하는데 대부분의 시간을 할애하고 거기에 가해지는 방해와 싸우는 과정을 장르적 긴장감을 통해 스크린에 재현한다는 것은 단순한 우연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혹은 숨겨온 속내를 절절히 내뱉는 인물들의 ‘증언’과 같은 것 역시 이와 비슷한 효과를 발생시킨다. (예컨대 <아이 캔 스피크>) 이 반복되는 전략을 거치면서 영화들은 점차 말쑥한 겉모습을 정돈해가는 과정에 있는 것 같다. 


일정부분 영화 밖 현실에 근거를 두고 있는 이러한 전략들로 인해 종종 사실공방에 휘말리기도 하는 것 같지만, 아무래도 영화들의 선택과 태도에 집중하는 편이 더 중요할 것 같다. ‘팩트’의 보존과 전달과정이라는 선택된 서사에서 간과되고 무시되는 것은 ‘팩트’가 포괄하지 못하는 수많은 잔가지와 균열이다. 서사에 포섭되지 못하는 얼룩은 표백되고 인물 각자가 놓인 조건의 차이와 간극은 접착된다. 이러한 말끔하되 무딘 서사는 어딘지 법정의 언어를 닮아있다. 여러 평자들에 의해 지적되었듯 한국의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문제를 다루는 영화들이 끊임없이 ‘무고함’, ‘보통 사람’, ‘정치적인 의도가 없는 순수함’을 강조한다는 점을 돌이켜보면, 앞서 정리한 종류의 서사를 법정이 요구하는 서사, 법과 절차로 구동되는 세계에의 호소로 보는 감상이 그다지 무리한 것도 아니다. 계속해서 반복되는 이와 같은 전략의 영화들을 보는 것은 물론 지치기도 하는 일이지만, 한편으로 한국영화가 어딘가 막다른 벽에 봉착해있다는 생각도 지우기 힘들다.

서두가 길었다. 이와 같은 흐름 속에서 영화 <공동정범>(김일란, 이혁상)이 드디어 극장 개봉을 앞두고 있다. 2009년 1월 20일에 발생한 ‘용산 참사’로부터 9년, 또한 영화가 완성된 뒤에도 1년이 넘는 시간을 기다린 결과이다. 소위 상업영화라고 불리는 극영화와 독립 다큐멘터리라는 차이에도 불구하고 앞서 지적한 문제들과 이 영화를 함께 이야기하고 싶다는 생각을 떨치기 어려웠다. 무엇보다 용산 참사와 그 이후의 시간에는 재판이라는 사건이 무겁고 깊게 관여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잠시 기억을 돌이켜 <두 개의 문>(2011, 김일란, 홍지유)을 떠올려보자. 이 영화는 용산 참사 이후 살아남은 철거민들이 징역형을 구형받고 구속되어 있을 당시, 기록 영상들과 기자, 활동가, 변호사들의 인터뷰들을 통해 용산 참사를 재구성한 것으로 <공동정범>의 전작이라 할 만하다. (모두 ‘성적소수문화인권연대 연분홍치마’의 작품이다.) 실제 재판 당시 크게 문제가 되었던 것은, 검찰의 초동수사기록 3000쪽과 경찰의 채증 영상 일부가 사라진 채 재판이 진행되었다는 사실이었다. 글 초반에 제기한 문제를 당겨오자면 마치 재판의 판도를 뒤집거나 훼손되지 않은 사실이 담겨있다고 여겨질 법한 숨겨진 증거의 문제가 여기 있는 것이다. 이것은 물론 사법부의 기만적인 결정으로 반드시 지적되어야 하는 문제이지만, <두 개의 문>은 그에 대한 면밀한 검토와 함께 결국 그러한 증거 혹은 증언에 탈맥락적으로 의지한 채 책임소재를 가려내려는 법적 판단의 허위성을 지적하며 보다 구조적이고 종합적인 이해에 접근할 것을 제안하는 데로 나아간다. 이를 통해 관객들은 현대 국가의 책임과 사법체계의 공백, 재개발과 저항의 역사 등을 경유해 ‘용산 참사’를 바라보게 된다. 

  
 
<공동정범>은 바로 그 재판, 폭력적이고 획일적인 논리로 철거민들에게 죽음의 책임을 물어 그들을 공동정범으로 기소하고 법적 맥락에서 용산 참사의 시간을 종결시켜버린 그 재판이 끝난 곳에서 시작하는 영화이다. 영화는 용산 참사 이후 경찰특공대원 1인의 사망 책임에 대해 공동정범으로 기소되었다가 2013년 출소한 생존자들 김주환, 김창수, 이충연, 천주석, 지석준의 인터뷰로 구성되어 있다. 이들은 영화 내내 두어 장면을 제외하고는 대체로 만나지 않고, 각자의 공간에서 재판과 출소 이후의 삶, 참사 당시의 기억 등을 힘겹게 회상해낸다. 영화 전반부의 큰 화두는 이런 것들이다. 용산 참사를 둘러싼 모든 사법적 판단은 종결되었으나 사실 이 사건은 여전히 끝나지 않았다. 마침표 이후의 고통스러운 삶을 생존자들은 매순간 마주하며 살아가야 한다. 돌아와 보니 아내는 병에 걸렸고, 사람들을 만나기가 두려우며, 술이 없이는 일상을 지속할 수 없는 그러한 삶들. 천주석의 말에 따르면 ‘큰 감옥’에서의 삶을 말이다.

애초에 <공동정범>은 <두 개의 문> 제작 당시 감옥에 있었기에 우리가 들을 수 없었던 생존자들의 이야기를 통해 참사 당일의 진실에 다가가려는 기획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경찰 특공대가 투입되었을 때 진압의 과정은 어떠했으며, 어떤 경로로 이들이 망루에 오르게 되었는지를 밝히고 그 날 이후의 삶도 기록하며 진상규명으로 가는 길을 열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런 시도는 종종 난관에 부딪힌다. 참사 당일의 기억을 모으는 작업에서 기억을 더듬고 그것이 틀림없는 하나로 모아지는 일은 단숨에 완결되지 않는다. 예컨대 경찰특공대의 컨테이너 박스가 남일당 건물 옥상에 투입되자, 몇몇은 망루가 크게 흔들렸다고 회상하지만 전혀 그런 기억이 없다고 대답하는 이들도 있다. 불길의 시작 지점을 지목하거나 지석준의 탈출을 도운 이가 누구인지 특정하는 작업 등도 결코 하나의 방향으로 쉽게 모이지 않는다. 

  
 
놀라운 점은 이 영화가 그와 같은 난감함을 바라보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 생존자들 사이의 갈등과 균열을 정면으로 마주한다는 데에 있다. 그날 망루에 올랐던 이들은 용산 4구역 철거반대농성의 직접적인 당사자들과 전국철거민연합회 회원으로 농성에 참여하기 위해 용산에 모인 연대 철거민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들은 한편에서는 농성의 직접적인 주범으로 죄질이 무겁다는 이유로, 또 한편에서는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없음에도 마지막까지 망루에서 저항했기에 죄질이 불량하다는 이유로 공동의 죄를 선고받았다. 공동체의 와해와 분열을 조장하고 겁을 주며 어떠한 연대도 불가능하게 만들어버리는 이와 같은 판결의 말로 인해 생존자들 사이에는 갈등과 균열이 시작되었다. 이들은 서로를 향한 원망과 미움, 자신의 행동에 대한 후회스러움 등과 고통스럽게 싸워야만 한다. 

그것은 때로 수치스럽고 감추고 싶은 부끄러운 마음과 기억이다. 바꿔 말해 그것은 법정을 통과하거나 법정에 포괄되기 어렵다고 그들 스스로도 여기고 있는 얼룩, 당장은 덮어두어야 할 것으로 종종 생각되는 통합되지 못한 차이들이다. 그러나 그것을 꺼내들어야 한다고 절실하게 느끼는 것 역시 이들이다. <공동정범>이 저항하고 있는 것은 실제로 진행된 재판과 이러한 사태를 만든 국가폭력이기도 하지만, 진상규명이라는 활동이나 피해자 혹은 유가족에 대한 관념적인 이미지이기도 하다. 흩어진 모든 조각들이 모여 단일한 흐름을 형성하고 그 내부의 갈등은 없거나 부차적인 것으로 인식되는 문제, 국가폭력의 피해자는 세상의 모든 판단 앞에서도 무고한 피해자여야 한다는 일반적인 관념에도 영화는 끈질기게 저항한다. 그리고 그 안에서 또다시 흔들리고 고통스러워할 수밖에 없는 생존자들에게로 다시금 돌아가며, 이들의 균열과 아픔, 부끄러움과 답답함을 함께 앓아내기를 영화는 망설이지 않는다. 

그러니 그러한 용기 앞에서 우리는 적어도 이러한 물음을 생각해야한다. 영화의 초반부, ‘작은 감옥’에서 세상이라는 ‘큰 감옥’으로 나왔을 뿐인 것 같다고 말하는 천주석의 말을 빌려, 사실은 우리가 세상의 문제들과 그것을 다루고 있는 영화를 바라볼 때 지속적으로 재판의 논리로 돌아가려고 하는 것은 아닌지, 그러니까 ‘큰 재판’속에 끊임없이 무언가를 배치하기 위해 애쓰고 있는 것은 아닌지에 대한 물음말이다. 타인의 비극을 남김없이 하나의 논리에 종속시키거나 말끔히 해소되기를 바라지 않는 세계, 얼룩과 수치를 대면하기를 끝내 거부하지 않는 세계를 간절히 바라면서, <두 개의 문>과 <공동정범>을 만든 연분홍치마는 세계의 지배적인 논리의 틈새에 주목하고 그러한 논리의 시선으로는 포착되지 않는 부분들로 관심을 옮기는 작업을 지속해나가고 있는 중이다.

2018년 1월 25일 개봉

* 손시내 : 2016년 영평상 신인평론상을 수상하였다. 한국독립영화협회 비평분과에서 활동 중이며 여기저기에 영화글을 쓰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 글 출처: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 르몽드 시네마 크리티크

http://www.ilemonde.com/news/articleList.html?sc_sub_section_code=S2N40&view_type=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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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자서성희

등록일2018-0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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