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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신으로서의 인간, <만신>이 제기하는 문제들

현신으로서의 인간, <만신>이 제기하는 문제들


1. 경계에 선 만신, 균형감각으로서의 영화미학

  박찬경 감독의 <만신>은 균형감각이 돋보이는 영화이다. 이 영화는 형식상으로나 내용상으로나 서로 다른 이질적인 것들을 동시에 재현해 내는데 치중한다. 성우가 나래이터의 역할을 맡는 다큐멘터리의 형식과 영화적 기법을 뒤섞고 있으며, 모티프가 되는 실존인물이 배우들과 한 장면에 출연한다. 마지막 장면에서는 영화를 찍고 있는 스텝들을 카메라에 노출시키면서 영화라는 매체의 안팎까지 넘나든다. 내용상으로는 김금화의 만신으로서의 삶과 한 개인-여자로서의 삶, 미디어에 의해 유명해진 김금화와 여전히 천대받는 무속인으로서의 삶, 배우들에 의해 재현되는 젊은 날의 그녀와 노년인 실제의 김금화 등을 복합적으로 제시한다. 그리고 이러한 김금화 만신의 일대기에 우리 근현대사에 대한 조망을 배치한다. 이렇듯 이 영화가 표현하려는 층위나 제기하려는 문제의식은 매우 다층적이어서 섬세한 연출력이 뒷받침되지 않거나 균형감각이 흔들린다면, 특이한 인물들의 삶에 대해 흥미위주의 시선을 들이대는 그렇고 그런 영화가 되기 십상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박찬경감독은 전작 <파란만장>에서 보여준 성과가 결코 박찬욱감독에게 전적으로 의지한 것이 아님을 이 작품을 통해 다시 한 번 확인해 보인다.

  이처럼 여러 이질적인 지점들을 동시에 균형 있게 제시해내려는 어려운 작업을 시도한 감독이 가 닿고자 했던 방향은 어느 쪽이었을까. 그리고 그것은 얼마만큼 성공을 거두었을까. 그것은 이 영화에서 감독이 한사코 피하고자 했던 수순 두 가지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꼭 드러내고 싶었던 듯 보이는 지점 세 가지를 파악해봄으로써 확인해 볼 수 있을 것이다.

 

2. 예상 가능한 함정에 빠지지 않기 위한 두 가지 방법

  이 영화에서 감독이 가장 주의를 기울이는 부분은 첫째, 이 영화가 만신 김금화에 대한 신격화나 일방적인 헌사처럼 비춰지지 않기를 바라는 듯이 묘사된다는 것이다. 둘째, 일반적인 영화들과는 달리 매끄러운 장면 진행과 드라마틱한 스토리의 제시에 그다지 관심이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는 것이다. , 감독은 영웅화된 인물이나 구조화된 스토리 구성에서 오는 영화적인 감동을 의도적으로 피하는 것처럼 보인다. 감독이 피하고자 하는 이 두 가지 수순은 영화는 영화일 뿐이라고 인식시키는 방식으로 그 의도를 달성하고자 한다.

  영화는 촬영을 앞두고 고사를 지내는 듯한 장면으로부터 시작한다. 그 장면에서는 조금 떨어진 곳에 서서 이러한 모든 일들을 찬찬히 관찰하고 있는 실제 주인공이 등장한다. 굿과 영화촬영이 동시에 이루어지는 이 장면에서 젊은 금화와 늙은 금화는 한 화면에 등장한다. 그리고 이후로도 곳곳에서 이 영화는 실제 인물이 따로 있고, 배우들은 그녀를 연기하고 있을 뿐임을 강조한다. 또한 그녀가 만신이자 나라 무당이며 무형문화재로서 유명세를 떨치고 있지만, 그것이 시대적인 필요나 미디어적인 조명에 의해 만들어진 것일 수도 있다는 비판적인 관점을 놓치지 않는다. 그리고 그러한 관점은 그녀의 유년시절이나 시집살이, 무당이 된 이후의 삶을 묘사하는 데에 있어 감정적인 장면이나 대사 대신 일반화된 어조-성우 김상현의 목소리가 TV나 광고 등에서 익숙하다는 점에서 설명조에 가까운-의 나래이터가 요약적으로 제시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영화를 보기 전에는 이러한 방식의 영화가 흔히 그렇듯 한 많은 인물의 삶의 극적인 부분을 강조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이 영화는 극심한 신병을 앓았다. 그리고 열일곱 살에 신내림을 받았다라는 나래이터의 말로 간략히 제시함으로써 감정적 서술을 자제하려 했던 감독의 의중을 드러낸다. 감독은 이 영화가 한 개인의 삶을 지나치게 미화시키지 않기를 바랐던 것이고, 한편으로는 내러티브만큼이나 영화적 재현의 방법에 객관적인 시선을 답보하고 싶었던 것이다. 감독은 세밀한 극적 장면을 없애고 아낀 러닝타임을 이미지 위주의 장면들을 할애하는데 쓴다. 신병을 앓는 어린 남세의 시야에 보이는 환상이나 환청, 그리고 신내림을 받는 장면에서 젊은 금화에게 들어서는 많은 신들을 묘사한 민화 그리고 금화의 뒤에 거인들처럼 버티고 서는 신들의 형상 등을 묘사하는 데에 치중하는 것이다. 이는 감독이 강조하고 싶었던 지점들과도 연결된다.

 

3. 가 닿으려 했던 지점과 가 닿지 못한 지점

  미리 간략히 말하자면, 감독이 의도했듯 의도하지 않았든 이 영화에서 강조되는 것 세 가지는 시각성의 강조, 굴곡진 현대사에 대한 고찰, 타기되어야했던 미신으로서의 무속과 사람에 대한 위로이다.

그 중 시각성은 앞서 지적한대로 스토리의 세밀한 흐름을 끊고서라도 제시하려는 감독의 야심적인 실험이다. 이 영화는는 곳곳에서 감독의 미디어 아티스트적인 면모가 드러난다. 영화의 포스터, 타이틀 시퀀스, 극에 등장하는 색색의 민화, 분할 화면 등 다양한 시각적 재현 기법 등이 등장한다. 불교의 탱화나 무당집의 총천연색의 그림 등을 다소 무서워하는 사람들에게도 거부감이 없도록 이러한 시각적 이미지들을 표현했다는 점이 흥미롭다. 특히 그림 속 무속신들을 애니메이션화한 장면은 전체적으로 어두운 영화의 분위기에 색다른 재미를 주었다. 그리고 회화에서 미디어로 나아간 감독의 이력에 걸맞게 음향이 인상적이었다. 어린 넘세가 부엌에서 환각에 시달릴 때 울리는 벌소리라든가 배경음악처럼 사용된 굿소리, 중간중간 삽입되어 영화의 분위기가 너무 다운되지 않도록 돕는 경쾌한 음악은 시 청각적 감각의 균형을 맞춘다.

 현대사에 대한 비판적 고찰이 처음 두드러지는 부분도 음향의 강조와 함께 시작된다. 폭탄 터지는 소리와 함께 다큐멘터리적인 색감으로 전쟁이나 연평해전, 천안함 사태 등이 제시된다. 무속인으로서 김금화는 정치적 상황의 변모와는 상관없이 인민군이나 국군 어느 쪽에서도 환영받지 못했다. 그러나 그녀는 이러한 개인적 불행에도 불구하고 현대사의 고비에서 죽어간 사람들을 위해 진혼굿을 하고 그들의 원한을 감싸 안는다. 특히 서해 관련 굿의 무형문화재 보유자이기도 한 그녀는 서해 바다와 그곳의 원령들을 향해 남다른 애착을 가진다. 이러한 그녀가 기독교의 찬송가의 한 구절인 요단강 건너가 만나리라는 부분이 남다르게 들렸다는 증언을 영화에 삽입한 것은 아마도 삶과 죽음의 경계를 의식하는 지점이 모든 종교에 공통적으로 있음을 감독은 증언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나라 무당으로서 그녀가 역사적 상황들에 관련된 영혼들을 달래서 떠나보내는 일들을 보여주면서 감독은 아무도 기억하지 않지만, 많은, 죽어간 사람들을 환기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리고 결국 이 영화에서 위로의 시선을 보내는 것은 죽어간 망자들만이 아니라, 오해되어 비난 받아왔던, 타기되어야 할 무속 혹은 만신 그 자신들이다. 뻘에 갇힌 흰고무신처럼 놓여나려고 해도 놓여날 수 없었던 그들의 삶이 그들 자신의 선택이 아니었듯이, 일제와 새마을 운동, 기독교 세력 등에 의해 배척되다가 80년대에 상전벽해일 정도로 갑자기 민속예술로서 융숭한 대접을 받게 되는 과정도 그들의 의사대로 진행된 것은 없었던 것이다. “그냥, 그때는 신의 세계야라고 회고하던 어린 넘세의 시대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여전히 무속은 살아남았지만, 어린 넘세가 당한 멸시와 배척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무속에 대한 이중적인 태도를 설명하는 민속학자 황루시가 80년대의 자료화면에서 등장하고, 다시 현재의 모습으로 등장하는 장면을 넣은 이유도 시대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계속되는 오해들을 관객들에게 실감시키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반복되는 풍문과 오해를 넘어서기 위해 감독이 절제된 관점으로 조명하는 과정에서 그들의 한 많은 삶 역시 치유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영화는 단순히 영화/다큐, /인간, 만신 김금화/개인 김금화, 무속인/일반인 경계를 제시하는 데에서 나아가 그 모든 경계를 잇는 데에 주안점을 두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영화가 가진 단점들은 공교롭게도 모두 감독이 강조한 세 가지의 요소에서 기인한다. 시각성의 강조는 이 영화를 좀 더 다채롭고 풍요롭게 하며, 만들어진(artifact) 시각성으로서의 박찬경감독의 능력은 출중해 보이지만, 실제의 표현에서는 장면적 한계가 눈에 띤다. 특히 젊은 금화(류현경)가 전쟁통에 이리저리 헤매거나 죽음의 위협을 겪게 되는 산 속의 장면 등은 장소적인 협소함이 너무 분명하게 드러나서 영화적인 밀도를 떨어뜨린다. 그리고 현대사에 대한 작가적 통찰은 분명 문제적인 것이나 이것이 너무나 분명해서 이 영화의 '낯설게 하기'의 미학과 더불어 영화를 다소 교조적으로 만드는 것 같아 아쉬웠다. “쇠걸립을 모으러 다니는 어린 넘세를 중심으로 그녀가 뛰어 다닐 때마다 공간이 확장되는 지점은 인상적이었지만, 그 확장된 공간에서 각각의 배우들과 스텝들이 등장해서 그녀에게 총알’, ‘카메라와 같은 쇠붙이를 모아주는 장면은 도식적으로 느껴졌다.

   한편, 이 영화를 본 관객들의 반응은 무속에 대해 다시 보게 되었다거나 우리의 전통 문화로서 인정하자라는 평가가 주를 이룬다. 그러한 측면에서 볼 때 이 영화는 만신 김금화만이 아니라 우리의 무속에 대한 일반의 인식을 재고하는데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그런 측면에서 이 영화는 다소 오해를 불러올 소지가 있어 보인다. 모두가 김금화인 것도, 모두가 만신인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배우들의 연기에 대해서라면 어린 넘세역의 박새론이 배역에 대한 이해도가 높은 것 같아 좋았고, 중년 금화를 맡은 문소리가 너무 과장하지 않는 여유를 보여준 것 같아 좋았다.

   이 영화는 첫 부분부터 마지막 장면까지 자연 조명으로 햇빛을 이용하고 있는 점이 특징적인데 이는 영화 전체를 아우르는 감독의 따뜻한 시선과도 공명하는 부분이다. 무속은 터부와 금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전래적인 민속 문화로서 그 외연을 확장해 왔고, 예인이나 무형문화재로서 그 사회적 지위를 높여왔다는 것이 기존에 의미화 된 수순이다. 박찬경감독이 이에 좀 더 추가한 것은 현대사에 대한 증언자이자 이름 없이 죽어간 자들에 대해 진혼굿 하는 자로 만신을 설정한 것이다. 서사 무가 바리데기에서 버려진 바리데기가 도리어 부모를 죽음에서 구해내듯이, 천대받던 이들의 낮은 목소리가 망각된 역사를 복원해내고 씻겨 흘려보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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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자이수향

등록일2014-03-19

조회수1,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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