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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숭범] 관계의 균열, 논리의 우열, 진실의 분열 -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론

 
 

출구없는 질문 

최초에는 관계의 어긋남에서 발생한 긴장만이 있었다. 그런데 사사로운 다툼은 예측할 수 없는 비극으로 연쇄됐다. 아무도 그 ‘연쇄’의 길목을 장악할 수 없었다. 관계는 파국으로, 비극적 사건은 불가항력적인 불행으로 점점 침잠했다. 사소한 딜레마로 도착했던 양자택일의 상황은 엄청난 무게의 선택을 강요하는 폭력으로 되돌아왔다. 아무도 그들을 구해주지 못했고 해답을 기다리는 질문들만이 남았다.  

늘 그러했지만, 아쉬가르 파라디 감독은 더욱 본격적으로 질문의 영화를 만들었다. 그렇다. 질문의 영화. 그는 영화관을 나서는 우리들의 삶을 향해 방만한 질문을 쏟아놓는 것으로 자기개성을 주장하는 감독이다. 일찍이 이란의 씨네아스트들은 에스닉 문화(ethnic culture)를 밀도있게 전시하는 것 이상의 이미지텔링을 통해 로컬 영화의 한계를 돌파해 왔다. 이를테면, 압바스 키아로스타미는 구부러진 흙먼지 길을 내달려 친구의 집을 찾아 나선 소년의 뒷모습과 결국 친구에게 건네진 숙제 공책 속 꽃한송이를 통해 미학적 입구를 찾았다. 그곳은 생경한 문화와 풍광을 관조하게는 익스트림 롱쇼트와 대사의 힘을 빌릴 필요가 없는 클로즈업 셔레이드 사이 어딘가이다. 이후 키아로스타미는 자기 영화에서 더욱 언어를 줄였고 사건들의 맥락을 최소화했다. 그럼에도 사소한 설정으로부터 실타래처럼 뽑혀 올라오는 이미지들은 매번 신비로웠다. 모흐센 마흐말바프, 자파르 파나히, 바박 파야미, 바흐만 고바디까지. 모두 다른 스타일의 영화를 내놓았지만, 그들은 이란만의, 혹은 그 내부에 속한 자기 민족만의 에스닉 문화에 갇히지 않는 작가적 칼날을 찾아 그 끝을 벼려왔다.   

아쉬가르 파라디가 선배들의 작업을 계승하면서도 그들 영화를 벗어나는 지점은 질문을 남기는 상황들을 통제해가는 연출 방식에 있다. 일면 다르덴 형제의 영화 작업을 떠올리게 하지만, 그는 훨씬 정교하게 복수의 사건과 복수의 인물들을 교직시키면서 윤리적 딜레마의 순간을 장악해가는 편이다. 이를테면 그는 사건에 연루된 영화 속 인물들에게 결정적인 정보들을 제때에 주지 않는다. 추리와 예측의 과정으로 점철되는 스토리텔링은 그렇게 촉발된다. 이로써 인물들은 도덕적·법적·실리적·종교적 판단 사이를 헤매게 된다. 그들이 지쳐갈 무렵 파라디는 반전 상황에서 분출되는 서스펜스를 불쑥 내민다. 뒤늦게 이해되는 상황이나 혼란스럽게 도착하는 정보들이 앞에서 제기된 질문들에 대한 적확한 대답은 아니다. 그 때문에 이제 질문은 더 복잡해지고 더 많은 갈래로 뻗어간다. 질문을 따라 해명해야 할 의혹도 점점 불어난다. 그러나 파라디의 영화는 주어진 질문과 의혹들이 영화 안에서 제 짝을 만나는 순간을 허용하지 않는다.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이하 ‘<별거>’)로 이야기하면 이런 식이다. 나데르(페이만 모아디 분)와 씨민(레이라 하타미 분)은 이민에 관한 이견으로 이혼 법정에 선다. 씨민은 11살 딸 테르메(사리나 파르하디 분)에게 더 나은 환경을 물려주기 위해 이민을 원했고, 나데르는 치매에 걸린 아버지를 보살피기 위해 남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장의 이혼이 어려워지자 그들은 별거에 들어간다. 어쩔 수없는 수순으로 나데르는 아버지를 보살필 간병인을 구하게 된다. 그런데 간병인으로 온 라지에(사레 바이아트 분)는 개인적인 사정으로 잠시 집을 비우게 되고 그 사이 침대에 손이 묶인 채 잠긴 방 안에 누워있던 나데르의 아버지가 침대에서 굴러 떨어진다. 그 충격적 사태를 목격한 나데르는 라지에가 일당만큼의 돈까지 가져간 것을 확신하고는 뒤늦게 집에 돌아온 라지에를 문밖으로 밀쳐낸다. 

이후 4개월 여간 태아를 뱃속에 품고 있었던 라지에는 유산을 하게 된다. 라지에의 남편 호얏(샤하브 호세이니 분)은 나데르를 고소하고 씨민이 마련한 보석금으로 나데르는 잠시 석방된다. 나데르에게 살인죄를 묻는 법적 절차가 지지부진해지자 호얏은 테르메의 학교를 찾아가 위협을 일삼는다. 영화 말미 사태를 봉합하기 위해 나데르, 씨민 부부와 호얏, 라지에 부부 사이의 합의 절차가 갑작스레 진행된다. 그러나 합의는 자기 진실을 두고 신에게 거짓을 맹세할 수 없었던 라지에로 인해 무산된다. 이로써 절반의 거짓에 대한 은폐를 전제로 절반의 진실을 주장하던 인물들은 불행을 등질 계기를 잃게 된다. 영화의 마지막은 다시 나데르와 씨민의 이혼 법정을 보여준다. 맨 처음으로 되돌아가야만 하는 맨 마지막. 혹은 맨 마지막으로 건너갈 수밖에 없었던 맨 처음. 그러나 전혀 다른 밀도로 도착한 마지막 씬의 투샷은 수다한 말 대신 긴장어린 침묵을 내려놓는다. 

이처럼 <별거>는 매우 정치한 스토리텔링 구조물이다. 흥미로운 건 다음 순간에 대한 예측과 기대, 바람을 조금씩 엇나가면서 질문을 산란하는 플롯이다. 미리 말하지만, 이 글은 영화가 준 질문의 출구를 지금까지 찾고 있다는 고백이거나 토로에 가깝다. 지금부터 해명되지 않은 의혹과 제기된 질문 사이에서 서로 비껴서는 상황들을 따라가 보기로 한다. 종교적 규율과 도덕이라는 거울 앞에서 발가벗겨지는 관계망을 헤집어 보기로 한다. 

  
 
인식에 대한 입장의 우위
 
생각들 (진실이든 거짓이든) 뒤편에는 항상 어두운 기저가 있지만, 우리는 시간이 흐른 후에야 비로소 그것을 밝은 빛 아래로 꺼내어 생각의 형태로 말할 수 있다.(1) (비트겐슈타인, 『전쟁일기』 중) 

<별거>로부터 촉발된 갈등의 이면에는 계층 차이, 혹은 계급 차이를 갖는 두 가정의 다른 입장이 있다. 나데르와 씨민의 사회적 지위에 대한 정보가 충분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들은 딸의 교육이나 아버지의 간병에 신경을 쓸 수 있는 정도로 경제적 여건이 뒷받침된 중산층처럼 보인다. 딸에게 더 나은 환경을 만들어주기 위한 이민을 두고 다툰다는 건, 적극적으로 행복을 쟁취하는 방식에서 오는 갈등이지 않는가. 반면 호얏과 라지에는 생계를 두고 전투와 같은 삶을 버텨내고 있는 하층민에 속한다. 호얏은 10여 년간 구두 수선 일을 해오다 직장에서 잘린 후 직장과의 소송 문제로 긴 싸움을 해왔다. 급기야 빚쟁이들에게 둘러싸인 상황이지만 여전히 백수 상태를 벗어나지 못한다. 라지에가 먼 거리를 마다않고 나데르의 집에 와 치매 걸린 아버지를 간병하게 된 까닭엔, 그런 경제적 난국이 배경에 있다. 그런 의미에서 호얏과 라지에의 선택 과정을 보면 불행을 면피하기 위한 최소한의 분투가 읽힌다. 

그들 사이에 형성된 전장(戰場)은 두 가지 질문을 두고 전선(戰線)을 이룬다. 첫 번째는 ‘나데르가 라지에의 임신 사실을 알고도 그녀를 집 밖으로 밀쳤는가’하는 것이다. 이 질문은 호얏과 라지에가 도덕적·법적·실리적·종교적 측면에서 나데르와 씨민에 비해 우위에 설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호얏과 라지에에겐 적극적으로 상대를 몰아 부칠 수 있는 선제적 포석에 해당하는 것이다. 유념할 점은, 호얏과 라지에가 나데르와 씨민을 압박해가며 이 질문을 고수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자기기만을 전제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이 질문을 끝까지 이용하려 하는 호얏 부부의 진실은 각색된 결과물이다. 당연히 각색의 주체는 호얏 부부의 입장,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앞의 질문보다 뒤늦게 주어지지만, 그만큼 중요도를 갖는 질문이 있다. ‘전날 당한 교통사고가 라지에의 유산에 결정적인 이유는 아닌가’ 하는 것이다. 당연히 이 질문은 나데르와 씨민이 궁지에 몰린 자기 처지를 탈출하기 위해 유지해야 하는 입장을 환기시킨다. 특히 나데르에겐 살인죄를 벗고 돈을 지키며 실추된 명예를 추수할 일말의 가능성이 이 질문으로부터 확보될 수 있다. 그런데 이 질문 역시 나데르가 이미 인식하고 있는 모순을 스스로 눈감을 때 성사될 수 있다. 조금만 차분히 생각해보면, 그의 행위가 ‘유산’이라는 비극적 결과에 미미한 영향관계였을 뿐, 절대적 인과관계가 아니라는 논리는 진실의 영역에 속하는 게 아니라 믿음의 문제에 불과하지 않는가.  

그런데 <별거>에서 외연화 된 양측의 갈등은 일의적인 귀결을 향해 직진하지 않는다. 이 과정은 다시 네 주인공이 품은 각자의 진실이 어떻게 부딪치는가에 대한 설명을 필요로 한다. 사실상 <별거>의 스토리텔링은 그 심층에서 네 주인공의 진실이 부딪치는 과정을 들여다보게 하는 데 방점이 찍힌다. 각자의 진실은 상대의 해명되지 않은 의혹을 실리적으로 역이용할 때 도달할 수 있는 반쪽짜리 진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별거>는 자기 입장을 포기할 수 없는 인물들이 나머지 세 사람에게서 자신의 상처투성이 논리를 확인받고 관철하려는 절차를 따라 움직인다고 할 수 있다.

자신에게 불리한 구석을 알고 있음에도 감춘 채, 궁색한 처지를 면피하기 위해 허구적 진실을 상대에게 강요한다는 것. 이는 ‘인식에 대한 입장의 우위’라는 구절 앞에서 그들이 동질적이라는 사실을 확인시킨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에 라지에는 다른 세 명과 달리 정반대의 태도로 선회한다. 그 순간 논리의 우열을 다투던 전장의 분위기가 전혀 다른 분위기로 경색된다. 관계의 분열이 봉합된 것은 아니다. 충돌하던 진실들이 분열을 그친 것도 아니다. 다만 질문을 던짐으로써 상대의 의혹을 추궁하던 그들은 이제 자기 논리를 구축하던 언어를 거둬야 한다.

그렇다면 ‘인식에 대한 입장의 우위’를 견지하는 인물들의 심리 궤적을 차례대로 밟아보기로 하자. 먼저 나데르는 라지에의 임신 사실을 알고도 그녀를 밀쳤는가에 대한 의혹을 받고 있다. 그는 한 가지 명백한 사실에 대한 인식 여부를 검증받는 자리에 있는 셈이다. 영화 속 정보를 모두 취합해 보면, 나데르는 라지에의 임신 사실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나데르는 라지에의 임신 사실을 몰랐다고 부인할 때 지켜지는 것들을 포기할 수 없는 인물이다. 더군다나 세상은 자신이 임신 사실을 몰랐다고 주장할 때, 그것을 뒤집을 만한 근거를 충분히 갖고 있지 않다. 태아를 죽인 살인범이라는 낙인을 피하는 것. 지금 이 순간 그보다 중요한 가치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 때문에 그는 구속을 피하는 목적을 달성하는 데 필요한 만큼의 양심을 입고 스스로 설득되지 않는 논리를 진실로 포장하게 된다. 

씨민은 라지에로부터 전날 차에 치여 유산했을 가능성을 직접 고백 받는다. 서스펜스를 안기며 들이치는 사건의 새로운 국면을 정면에서 마주하게 된 것이다. 이때 라지에는 결정적인 양보를 내미는 조건으로 한 가지 부탁을 한다. 그녀의 씨민을 향한 요청은 단지 이 사실을 비밀로 해달라는 것이었고, 양보의 내용은 합의금을 주지 않아도 된다는 선언이었다. 그러나 씨민은 합의금을 건네지 않을 때 계속될 수 있는 호얏의 위협을 떠올렸다. 씨민은 딸을 보호해야 하는 입장이 먼저였고 호얏 부부와의 갈등을 최종적으로 끝내야만 이후 딸의 이민 문제를 놓고 나데르와 재논의가 가능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그녀는 결국 라지에의 간청에도 불구하고 호얏의 집으로 가서 합의금을 건넨다.   

호얏은 최소한의 목적이 달성되기 직전, 라지에로부터 충격적인 말을 듣는다. 라지에의 유산이 나데르 때문이 아닐 수 있다는 소식은 그 순간 도착해선 안 되는 말이었다. 그 소식은 나데르에 대한 심리적·도덕적 우위에 설 수 있는 기회를 박탈하는 계기만이 아니다. 법적 정당성을 토대로 교환되는 금전적 실리를 포기해야 하는 궁지에 몰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라지에의 유산이 전날 차에 치인 것 때문일 것이라는 심증을 가졌음에도 그 사실을 몰랐다고 부인할 때 획득할 수 있는 것들에 집착한다. 더군다나 교통사고에 의한 유산 가능성을 몰랐다고 끝까지 부인할 때, 세상이 자신에게 그것을 알지 않았느냐고 되물을 근거는 아직 없다. 실제로 영화 내내 계속되는 그의 악다구니는 백수생활을 벗어나지 못한 채 빚쟁이에게 쫓기는 상황 때문만은 아니다. 인식에 대한 입장의 우위를 지켜낼 때 얻을 수 있는 것들이 너무 많고, 그 반대의 상황으로 전환될 때 잃을 수 있는 것들이 그만큼 크기 때문이다. 

라지에도 그들과 유사한 심리궤적을 밟으며 영화 마지막 순간까지 자기만의 진실을 주장한 바 있다. 그러나 그녀는 마지막 순간에 자기 안의 최종 심급에 순종하는 결단을 내린다. 이 결단은 다른 세 사람이 집착하는 태도의 정반대, 곧 ‘입장에 대한 인식의 우위’를 수용하는 실천으로 나아간다. 예컨대 라지에는 유산의 이유일지 모르는 교통사고에 대한 정보를 숨기면 얻을 수 있는 이익이 가장 큰 인물이었다. 빚쟁이에게 더 이상 시달리지 않아도 되는 미래가 코앞에 있는 상황이었다. 심지어 그녀는 도둑이라는 누명을 쓰고 있었고, 남편으로부터는 남자만 있는 집에 가서 이란 여성에게 쉽사리 허용될 수 없는 간병인 역할을 몰래 한 상황이었다. 젠더정치의 측면에서, 종교적 기율을 기준으로 그녀는 위축될 수밖에 없는 입장에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자기를 기만할 수는 있었지만, 신을 기만할 순 없었다. 합의금을 주러 온 나데르, 씨민 부부 앞에서, 또 이웃들 앞에서 코란에 손을 얹고 유산의 이유가 나데르의 탓이라는 사실을 맹세할 수 없었다. ‘신이 나의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인식. 그것은 근본주의 이슬람인인 그녀에게 어떤 실리와도 바꿀 수 없는 선택과 결정에 있어서의 최종심급이었다. 예를 들면 그녀는 침상에서 소변을 본 나데르 아버지의 하체를 닦아야 하는 상황에서 이슬람 기관에 전화를 건다. 자신이 하려는 일이 율법에 저촉되는지를 정확하게 확인해야 마음이 놓이는 인물이었던 것이다. 한마디로 라지에는 신이 규제하는 염결한 양심에 따라야 한다는 인식, 곧 흠없는 신앙생활을 요청하는 신의 존재에 대한 인식이 중요했다. 그래서 그녀는 위기 국면을 단숨에 전환할 수 있는 순간을 앞두고 자기 입장을 철회한다. 이처럼 <별거>는 각기 다른 처지에 놓인 네 인물의 인식과 입장을, 그리고 양자 사이의 간극을 끊임없이 견주게 하는 영화다. 

궁극적으로 <별거>는 나데르와 라지에가 감당하게 된 의혹이 무수한 질문으로 전환되는 과정을 그린다. 그리고는 그 질문의 무게를 나눠지게 하면서 우리의 신념화 된 논리가 덮지 못한 각자의 의혹을 생각하게 한다. 누구의 진실도 절반의 거짓을 은폐한 바탕 위에 세워진 허술한 구조물일 수 있다는 것. 적당히 도덕적인 탓에 버텨낼 수 없는 딜레마에 빠진 그들을 우리가 오래 곱씹어야 하는 이유다. 

  
 
미끄러지는 진실, 고정되는 진심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바로 그 문제를 사라지게 만드는 방식으로 사는 것이다. 삶이 문제가 된다는 것은 우리의 삶이 삶의 형식에 맞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삶을 바꿔야 한다.(2) (비트겐슈타인 『문화와 가치』 중)

버틀란드 러셀의 통찰을 빌리지 않더라도, 우리는 불행이 일정부분 사회제도로부터 기인한다는 것을 안다. 개인 심리의 차원에서 비롯되는 불행의 존재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러셀에게서 빌리고픈 문장은 그 다음에 온다. “개인적인 심리도 사회제도의 산물”(3)이라는 구절 말이다. 우리는 쉬이 눈치 챌 수 없는 사이에 환경적 존재, 외적 변인에 따른 구성적 존재가 되어 살아가고 있진 않는가.  

그렇다면 <별거> 속 네 인물이 나눠진 불행을 좀 더 거시적인 시각에서 재조명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예컨대 치매노인이나 빈자들을 향한 사회복지제도가 좀 더 탄탄하게 구축되었다면 어땠을까. 법원의 법집행이 효율화되고 행정서비스 등이 개선된다면 사태가 달라졌을까. 여성에 게 억압적인 문화에서 비롯되는 젠더과제에 사회가 충분한 문제의식을 가졌다면 불행이 덜어졌을까. 자라나는 미래세대를 위한 교육환경이 성숙했다면 갈등이 덜어지지 않았을까. 차별과 불편을 감수하게 하는 종교적 교리가 좀 더 합리적으로 재공유될 수는 없는 것일까. 결국 영화에서 가정법은 무의미하지만, 이 질문은 영화 초반 이혼법정에서 씨민이 했던 말, “엄마로서 이런 환경에서 키우고 싶지 않아요”에 대한 판사의 궁금증(“이런 환경이라니요?”)에 대한 주석이다. 

그런데 최초의 갈등이 촉발된 그 지점으로 돌아가더라도 ‘못 마땅한 환경’과 ‘더 나은 환경’사이의 거리가 불행의 결정적 이유까지는 아닌 것 같다. 만약 <별거>가 네 인물의 외적 조건을 향한 탐색에 방점을 찍는 영화였다면 이 영화는 에스닉 문화에 대한 성찰을 요하는 그럭저럭 괜찮은 로컬 영화로 남았을 것이다. 가장 단순한 방식으로 파라디가 던진 질문을 압축하면 ‘진심에서 유리된 언어를 그들은 왜 진실로 포장하고 있는가’이다. <별거>는 종교, 젠더, 교육, 계급, 제도 등이 충돌하는 장에서 발생한 갈등을 다루지만, 사실상 나데르와 라지에 사이에서 벌어졌던 일을 두고 벌이는 인물들의 진실게임에 가까운 것이다. 부연하면 <별거>는 마음 깊숙한 곳의 진심은 고정되어 가지만, 자기에게도 부정될 말들을 진실이랍시고 내려놓는 자들의 이야기이다. 

이즈음에서 <별거>의 인상적인 영상을 말할 필요가 있다. 이 영화의 영상은 대부분 평범한 바스트 쇼트와 미디엄 쇼트 사이에서 진행된다. 그런데 방금 말을 했거나, 지금 말을 하고 있는 상대방의 표정 등을 살피는 청자의 쇼트, 곧 역앵글 쇼트에 고이는 느낌이 매우 각별하다. 방금 본 행위, 방금 들은 말을 소화 중인 인물들의 표정과 태도에서 명징하게 언어화될 수 없는 순간이 읽히기 때문이다. 남편과의 별거를 결심하고 친정으로 가기 위해 무거운 짐가방 등을 들고 씨민이 집을 나설 때의 장면도 그 중 하나다. 욕실 문간에 기대어 그녀를 훔쳐보는 나데르의 표정에는 ‘감정’, ‘정서’라는 단어의 의미를 초과하는 ‘정동’이 있다. 유리창 너머로 엄마의 떠남을 지켜보는 테르메의 표정 역시 평범하게 추수할 수 없는 의미들로 넘실댄다. 

영화 말미, 합의를 위해 네 사람이 호얏의 집에 모인 씬도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두 부부와 이웃들이 모여 앉은 자리에서 나데르는 수표를 꺼내들고 합의금을 내놓으며 라지에에게 의미심장한 조건을 내놓는다. “저 때문에 유산이 됐다고 코란에 손을 얹고 맹세해 주세요.” 카메라는 어느 누구도 예상할 수 없었던 그 말 이후의 침묵이 씨민과 라지에, 호얏의 표정으로 갈래화되는 것을 전시한다. 그 침묵을 묻힌 표정들에는 진심과 진실 사이의 비극적인 거리를 섬뜩하게 자각하는 순간이 있다. 사실상 그 순간은 언어의 무능력을 증언한다. 봉합을 시도할수록 더 균열될 것 같은 관계를 암시한다. 결국 그로부터 각자에게 되돌아가는 무수한 질문들이 다시 태어난다. 이 가시화될 수도 언어화될 수도 없는 어떤 것에 관한 침묵. 이런 장면들에서 파라디는 평범한 스토리텔러의 범주를 월담한다. 

그렇다면 마지막 순간까지 그들 자신에게서조차 미끄러지는 진실을 어떻게 구원할 수 있을 것인가. 우리가 아는 ‘진리’는 보편적이고 모두를 관통하는 이치이다. 본질적이면서 항구적이고 필연적인데다가 원칙적이다. 그와 견준다면, 아마도 ‘진실’이란 단어의 의미는 특수하고 대게는 사적 차원에서 유의미한 신념일 수 있다. 때때로 주변부적인 속성을 띠고 가변적인 개념일 수도 있겠다. 우연적인 상황논리에 기반한 단어일 수도 있고 타인에게 강요할 수 없는 내용일 때도 있다. 더 단순화하면, 받아들인 사실의 한 국면에 불과할 수도 있다. 그렇게 ‘진실’이라는 단어가 묻히고 있는 감정과 의미를 축소해서 바라보면, 그들이 측은해지는 지점이 있다.

<별거>를 본 후 다녀간 감정 중 마지막까지 남은 것도 ‘측은함’이었다. 나데르의 진실과 라지에의 진실이 모두 반쪽짜리라고 하더라도 제 나름의 의미를 갖지 않는 건 아니다. 그러나 ‘제 나름’의 의미였기에 역설적으로 진심어린 소통이 불가능했던 것은 아닌가. 그러니까 그들의 진실은 서로의 다른 진실이 있음에 겨냥하던 곳으로 가지 못했다. 안타까운 사실은, 그 과정의 반복 속에서 상처가 덧난 그들이 각자의 진심을 내면 더 깊숙한 곳으로 은폐해 버렸다는 것이다. 결국 <별거>는 그 진심이 끝내 언어를 얻지 못한 풍경에서 끝난다. 그들은 모두 ‘(상황에) 맞기에 (현실적으로) 옳다’는 입장에서 공방을 벌였고, 결국에는 ‘옳기에 맞다’는 입장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별거>의 또 다른 특별함은, ‘옳기에 맞다’는 어쩌면 당위적이고 윤리적인 그 입장이 인물들에게 권면되는 순간에 있다. 예를 들면, 나데르에게 그 순간은 테르메의 선택과 행동으로부터 온다. 중요한 법정 공판을 앞두고 테르메는 나데르에게 라지에의 임신 사실을 인식하고 있었지 않았느냐고 묻는다. 딸의 질문으로 옹색한 상황에 처한 나데르는 알고 있었다는 것을 고백한다. 그러나 밀치는 상황에서는 너무 화가 나 있었기에 순간적으로 잊었다고 말한다. 이때의 대화는 “아빠 봐봐, 네가 원하면 말할게”라는 나데르의 확언으로 끝난다. 

그러나 이후 씬에서 테르메는 판사 앞에서 오로지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 거짓말을 한다. 영화 전반에 걸쳐서 나데르와 씨민은 딸의 교육을 위해 살아가는 부모처럼 나온다. 그 때문에 어린 테르메가 법정에서 침착하게 거짓말을 하는 장면은 나데르에게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도 칼날처럼 되돌아온다. 법정을 나와 나데르의 차 뒷좌석에 앉은 테르메는 침묵 속에 눈물을 흘린다. 나데르는 정면으로 테르메의 얼굴을 뒤돌아보지 못한다. 그 순간 삽입된 쇼트는 보조석에 앉아 있는 치매 걸린 아버지의 무표정을 담는다. 성격이 다른 두 가지 침묵. 보살펴야 할 대상으로부터 요청되는 윤리적 선회. 그러나 그는 투명한 진심과 실리적으로 개발된 진실 사이에서의 갈등을 멈추지 못한다.

네 명의 인물들에게 당위적이고 윤리적 입장이 동시에 권면되는 순간도 있다. 최종적인 합의를 위해 나데르와 씨민이 호얏과 라지에의 집을 찾아간 씬을 좀 더 음미해 보자. 두 부부와 이웃들은 집 안에 둘러앉아 연쇄되어 온 불행을 돈으로 종식시키려 한다. 그런데 나데르가 테르메와 소바예를 부르기 전까지, 이 어린 소녀들은 마당 나무 아래에서 공놀이를 함께 하며 티없이 웃고 있었다. 짧게 지나가는 이 쇼트는 어른의 세계와 아이의 세계, 또는 불순한 논리로 오염된 세계와 조건을 교환하지 않고도 화해가 가능한 순수의 세계를 즉각적으로 대비시킨다. 

그런데 코란에 손을 얹고 맹세를 할 수 없었던 라지에를 두고 호얏이 그 공간을 나가버린 후, 이 양자의 세계를 구분해주던 가로막대가 소멸되어 버린다. 라지에는 나데르와 씨민을 향해 외친다. “여긴 왜 온 거에요? 오지 말랬잖아요. 돈 필요 없다고 하지 않았나요? 난 이제 여기서 어떻게 살아요? 왜 나한테 이러냐구요.” 울분 섞인 라지에의 토로가 어른들의 세계를 갈가리 찢어놓을 때 테르메가 한 곳을 응시한다. 그 시선을 받는 자리에 앉아있던 소바예도 테르메에게 불안과 경계의 눈망울을 들킨다. 이 순간 투명한 진심으로 조건없이 소통할 수 있었던 유일한 세계마저 오염되었음이 확인된다. <별거>가 잡아낸 이 비극의 순간으로부터 우리는 ‘옳기에 맞다’라고 말할 수 있는 세계의 훼손을 떠올려야 한다.

<별거>에서 몇 차례 등장하는 법정공판은 죄와 의혹의 최종적인 규명이 아니라 거짓과 저의의 고통스러운 발견으로 이어진다. 투명한 진심을 교환하려 하지 않는 그들에게 법은 화해의 가능성을 열어주지 않는다. 그로 인한 상처는 서로의 완고한 입장에 시달리면서도 자기 진심과 화해하지 않는 태도의 결과다. 나데르가 라지에에게 가한 행동보다, 호얏의 나데르를 향한 분노 섞인 악다구니보다 난폭한 것도 바로 그 태도다. 그래서 그들은 밑도 끝도 없이 악화되는 상황으로부터 그들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었다. 

  
 
기억을 잃고, 언어와 헤어지고도 남는 질문

사실들은 모두 과제에만 속할 뿐, 해결에는 속하지 않는다. (4)(비트겐슈타인, 『논리철학논고』 중)

현실적 사건들로부터 비롯된 딜레마 곁에서 배경의 정물처럼 고정되는 한 사람이 있다. 이 영화에 대한 여러 비평문이 간과한 한 사람. 그는 나데르의 아버지이다. 그는 영화가 시작되기 이전 이미 기억을 잃었다. 자기 존재와 그 자신을 둘러싼 관계망을 인식하는 데 필요한 실존의 동력을 상실했다. 그리고는 영화가 시작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언어마저 잃어버린다. 언어가 닫힌 시점은, 씨민이 나데르와 테르메를 두고 친정으로 옮긴 직후다. 더 정확히 말하면, 씨민의 자리에 라지에가 들어온 첫날이다. 그는 씨민이 짐을 챙겨 집을 떠날 때, 그러니까 별거가 시작되는 그 순간에 정확무오하게 그녀의 이름을 호명한 바 있다. 그때 그는 “씨민, 어딜 가는 거니?”하고 물으며 수전증이 심한 손으로 씨민의 팔목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다. 그런데 바로 그 다음날, 그는 그녀의 부재를 대체한 라지에에게서 씨민을 찾는다. 그러니까 그가 세상을 향해 내뱉은 마지막 말은 “씨민?”이라는 일종의 확인 작업이었고, 그 확인 작업은 ‘대상-언어’ 사이의 불일치에서 파생하는 긴장을 베푼다.

말장난 같지만, 이후 계속되는 그의 침묵은 신비한 전언을 품고 있는 듯한 인상을 준다. 우선 <별거>의 갈등이 점증하는 과정을 보면 세 번의 변곡점을 찾을 수 있다. 그가 머무는 집에서 씨민의 이탈이 발생한 시점, 그리고 라지에가 틈입한 시점, 라지에 마저 부재하게 된 시점이 바로 그것이다. 법정공방까지 나아간 <별거>의 문제적 갈등은 그 세 번의 변곡점을 거치며 풀기 어려운 고차방정식이 든다. 이때 나데르의 아버지는 ‘상수’로 기능한다. 그런데 그는 긴 침묵 속에서 우연한 불행으로 연쇄되는 사태, 혹은 그 불행한 ‘사태의 현존으로서의 사건’(비트겐슈타인)을 배경에서 지켜 본 목격자다. 치매에 걸린 상태라는 것을 잠시 망각하고 보면, 인식을 감춘 네 주인공의 입장과 그것의 전후 맥락을 치밀하게 궤뚫을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그곳은 관계의 균열을 낳은 사건들이 논리의 우열을 가리는 질문들 속에서 왜곡되는 것을 가장 적확하게 파악할 수 있는 자리이기도 했다. 

그래서 그의 침묵은 이미 증언인지도 모른다. <별거>의 마지막 순간, 테르메는 판사 앞에 이르러 아빠 나데르를 택할 것인지, 엄마 씨민을 택할 것인지를 종용 받는다. 그러나 테르메는 부모님 중 누구랑 살고 싶은지 결정은 했다고 하면서도 결정 내용을 말하지 못하고 그 대답의 순간을 계속 지연시킨다. 말할 수 있다는 말만 하고 판사가 의도하는 적확한 언어를 뱉지 못하는 것이다. 그때 판사는 나데르와 씨민을 법정 밖 복도로 잠시 나가게 하고 카메라는 법정 밖 복도에서 서성이는 나데르와 씨민을 잡는다. 이 영화의 엔딩 쇼트다. 복도 안에 여러 사람이 있지만, 복도 양편에 선 두 사람 사이의 공간이 너무 텅 비어 보인다. 그 ‘텅 빔’ 속에는 보이지 않는 공기까지 축축하게 하는 무서운 침묵이 서성인다.

여기서 영화 시작이 판사 앞에 선 나데르와 씨민의 투샷이었음을 다시 기억해야 한다. 그때 나데르와 씨민은 서로의 논리를 격하게 주장하며 극복하기 힘든 감정적 거리를 보여준 바 있다. 그렇게 첫 번째 투샷은 그들의 간극을 보여주는 언어의 상찬이었다. 그러나 이야기가 진행되던 중에 말로 담아낸 그들의 서로에 대한 입장은 큰 상처를 입었다. 마지막 투샷에서 언어를 찾을 수 없는 것은, 매우 적확한 귀결인 셈이다. 바로 그 순간 우린 나데르 아버지의 긴 침묵을 떠올려야 한다. 그의 침묵은 이미 많은 것을 증언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해석도 가능하다. 마지막 씬에서 곤경에 처한 테르메의 ‘말할 수 없음’을 영화 내내 이어진 나데르 아버지의 ‘말할 수 없음’의 차원과 연결시켜 보는 것이다. 물론 두 사람의 침묵은 질적으로 완전히 다른 차원에 속한다. 전자가 심리적 요인을 상기시킨다면, 후자는 물리적인 결과다. 그러나 질문이란 대답이 존립할 수 있는 곳에서만 존립한다는 비트겐슈타인의 주장을 떠올려 봐야 한다. <별거>는 애초에 불가능한 질문들이 넘쳐나는 영화이지 않았는가. 균열된 관계, 우열을 가릴 수 없었던 논리, 자꾸 분열되는 진실들. 그 모든 것의 아버지는 불가능한 질문들이지 않았는가. 비트겐슈타인은 언어로 담을 수 없는 것들이 존재하고 그것은 자신을 신비스럽게 드러낸다고 말한다. <별거>의 마지막 씬에 등장하는 나데르와 씨민의 침묵은 테르메의 침묵 그 다음이어서 더욱 신비롭다. 나데르 아버지의 무거운 침묵이 이미 무엇인가를 증언하고 있었노라는 해석은 그런 경로로도 성사된다. 차라리 그는 기억을 잃고, 언어와 헤어지고도 남는 질문, 그 자체다. 파라디는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한 침묵”(5)의 경지를 그렇게 그리고 있다.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글·안숭범
영화평론가.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시인. EBS <시네마천국>을 진행했으며, 문화콘텐츠 기획 및 인문학적 비평에 매진하고 있다. 
 

(1)‘진리’로 번역된 단어를 ‘진실’로 바꿈.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박술 역, 『전쟁일기』, 읻다, 2016, p.189.
(2)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이윤 역, 『비트겐슈타인의 인생 노트』, 필로소픽, 2015, p.25에서 재인용.
(3) 버트런드 러셀, 이순희 역, 『행복의 정복』, 사회평론, 2010,p.15.
(4)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이영철 역, 『논리-철학 논고』, 책세상, 2006, p.115.
(5)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이영철 역, 『논리-철학 논고』, 책세상, 2006, pp.116-117.

 

* 글 출처: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 르몽드 시네마 크리티크

http://www.ilemonde.com/news/articleList.html?sc_sub_section_code=S2N40&view_type=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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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자서성희

등록일2018-0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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