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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호] 네 ‘이름’을 기억하라 -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네 ‘이름’을 기억하라 -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1)
 
1.인간관을 둘러싼 담론전쟁 

  
 
인간 역사를 통틀어 모든 집단과 사회는 우주와 세계에 대한 설명체계를 가지고 있었으며 그 가운데는 인간관도 포함되어 있다. 인간 스스로에 대한 자기이해는 각 시대의 정치, 경제, 사회는 물론 제도와 문화, 역사의 성격과 내용을 결정지었다. 이를테면 서양 중세의 기독교적 설명체계에서 인간은 신의 피조물이자 원죄의 굴레를 뒤집어쓴 인간이었기 때문에 현세부정, 육체성과 욕망을 부정하는 금욕주의를 낳았다. 이후 인간을 이성적 존재로 규정하면서 계몽주의나 민주주의가 성취될 수 있었고, 인간을 적자생존의 법칙 속에서 진화해 온 생물학적 인간(다윈)이나, 자기보존의 욕구에 따른 힘의 추구(홉스), 계급적 존재로서의 인간(마르크스), 성적 존재(프로이트)로 규정하는 설명체계들이 20세기를 이끌어왔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따라서 ‘인간이란 무엇인가’라고 묻는 질문은 어떤 식으로든 우리 시대의 세계를 설명하는 담론틀과 조우하는 길로 들어서게 된다. 그러나 현대적 담론의 지평에서 철학적 인간학의 위상은 그리 높지 않다. 인간에 대한 존재규정의 시도는 매우 불온하게 받아들여진다. 인간을 특정한 존재로 규정하고 서술하는 것은 이데올로기적이며 교조적인 태도로 간주될 여지가 충분하다. 인간존재의 규정성은 그 분류체계에 따라 인간들을 서열화하거나 타자화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정 분류체계에 의해 기준에 미달하는 인간은 열등한 인간이 되고, 이 기준으로부터 멀리 위치할수록 타자화 된다. 인간을 남성(man)으로 규정하는 순간 여성(wo-man)은 결여나 부가적 존재가 되며, 서구근대문명의 척도로 인간을 정의하는 순간, 다른 문화권의 인간들은 미개인으로 타자화 되어 계몽의 대상, 착취의 대상으로 여겨져 왔다. 

분명히 특정한 인간관과 세계관은 역사적으로 여러 형태의 억압을 전개해 왔다. 그러나 인간성을 규정하지 않는 것 또한 불가능하다. 규정을 내리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이미 인간은 자신을 규정하는 관점을 형성하고 있으며, 어떤 식으로든 그것을 작동시키고 있다. 문제는 인간관을 정립하려는 태도 자체가 아니라, 그 인간관을 특권화 하는 것이다. 세계는 인간을 둘러싸고 각 담론들 간에 치열한 전쟁을 벌이고 있다. 어떤 인간관을 선택하든 특정 관점을 선택하는 입장에는 일정한 기준이 전제되어 작동하고 있으며, 좀 더 낫다고 여겨진 인간관이라는 것도 사실 특정 입장과 이해관계에 의해 이미 오염된 인간관이라는 혐의를 벗기 어렵다. 여기서 우리는 상대주의적 허무주의에 직면한다. 도대체 무엇이 정확한 판단인지 알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무수한 신념들의 진열장에서 가장 그럴듯해 보이는 관점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현재 인간관을 둘러싸고 담론들이 각축전을 벌이고 있다는 말도 틀린 것은 아닐 터이다. 그리고 그 특정 인간관 가운데 이미 세력을 차지한 관점, 그 규정성이 숱한 파열음을 생산하고 있음에도 자기 유지를 위해 그것을 봉합하고 있는 인간관이 있다면, 그것에 대항하려는 인간관이 반드시 이데올로기적이라는 비난을 받아야만 할 이유는 없어 보인다. 만일 하나의 인간관이 과거의 것이었고, 보수적인 이데올로기로 치부되는 인간관이기 때문에 거부되어야 하는 것이라면, 그 진보의 내용이 무엇이든 간에 진보적인 인간관이 바람직하다는 생각은 무엇으로부터 정당성을 얻고 있는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오히려 현재 팽배한 인간관에 대항할 수 있는 것이라면 과거의 인간관으로부터 그 항체를 마련하려는 태도 또한 제한적으로나마 유용할 것이다. 

철학자 칸트도 인간 이성의 모든 관심은 세 가지 질문(인간은 무엇을 알 수 있는가, 할 수 있는가, 희망할 수 있는가)에 집약된다고 말하며 그에 대한 각각의 답변으로 『순수이성비판』, 『실천이성비판』, 『판단력비판』을 저술했다. 그리고 말년에 『논리학』에서 네 번째 질문을 추가했다. 칸트의 네 번째 물음은 “인간이란 무엇인가?”였다. 칸트는 앞의 세 물음들이 모두 네 번째 물음에 귀결된다고 말했다.(2) 철학사에서 도저히 빼버릴 수 없는 이 철학자가 긴 연구생활의 끝에서 제기한 이 질문에 대한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현재 가장 유력한 인간관, 당위적인 차원은 아니지만 현실적으로 통용되며 위세를 떨치는 인간관은 무엇인가? 그것에 답하는 방식 가운데 하나는 각 주체들이 자신을 비인간적으로 만드는 조건들을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에 따라서 부정적(否定的)으로 답해질 수도 있다. 그 비인간화의 조건들 가운데 무엇이 가장 시급한 것인가를 꼽는 것은 다시 주관성의 함정에 노출되기는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적 인간관, 인간을 시스템의 일부로 치환해 버리는 기능주의적 인간관의 폭주 현상에 대해서는 이미 여러 가지 비판과 대안들이 제출되어 있으며 많은 이들이 이에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관을 정립하려는 노력이 위험한 만큼, 은연중에 침투한 인간관 역시 위험하기는 마찬가지며, 이 은폐된 인간관은 자신의 이해지평과 작동방식을 노출시키지 않기 위해 다른 인간관의 탈을 뒤집어쓰기도 한다. 

인간 존재는 사실 매 순간 ‘너는 누구냐?’라는 질문에 직면해 있는 존재라고도 할 수 있다. 그것은 특별한 순간에서만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과 선택 속에 주어져 있는 질문이고 인간은 그 질문에 의식적이든 습관적이든 ‘이미-항상’ 응답하고 있다. 이러한 인간관에 대한 탐구 방식은 여러 가지 차원에서 가능할 수 있다. 그 가운데 하나는 당대의 서사체들을 분석함으로써 인간관의 문제에 대한 탐구를 수행하는 것이다. 그리스 신화를 통해 우주와 인간에 대해 탐사하는 것이 가능하듯 현재의 서사텍스트들을 통해 인간관에 대해 고찰하는 것 역시 가능하다. 이 자리에서는【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이라는 일본 애니메이션을 통해 인간관에 대해 논의해 보자. 

미야자키 하야오의【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은 자본주의적 메커니즘에 포획된 인간존재에 관해 질문을 던진다. 이 영화는 무엇보다 인간이라는 이름과 그 이름을 기억하기에 관한 영화다. 인간존재에 대해 질문을 받은 한 소녀의 행방을 좇아서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서사의 회로 속으로 들어가 보자. 

  
 
2. 치히로-인간의 이름

부모님과 함께 이사 가는 차 안에서, 10살 소녀 치히로는 촌동네로 옮겨 가게 된 것이 못마땅해 투덜거린다. 새롭게 이사한 집을 찾다가 치히로의 가족은 낯선 곳에서 길을 잃고 숲속으로 들어서게 된다. 오래된 신사(神社)가 그 곳이 다른 세계로 가는 길이라는 것을 이정표처럼 암시한다. 숲으로 이어진 길의 끝에서 치히로의 가족은 낯선 공간, 다른 세계로 접어든다. 어두컴컴한 회랑을 따라 들어간 저 편의 세계는 문을 닫아 버린 놀이동산처럼 인적이 없는 텅 빈 마을이 펼쳐져 있고, 그들은 음식을 잔뜩 진열해 놓은 가게를 발견하게 된다. 치히로의 부모는 음식점의 주인이 나타나지 않자, “일단 먹고 주인이 오면 계산하자”라면서 그 ‘망자의 음식’을 게걸스레 먹어 치운다. 소녀 치히로는 ‘주인도 없는데, 왜 음식을 먹느냐’면서 부모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그 음식을 먹지 않는다. 그것은 치히로의 어린아이다운 도덕적 엄격성 때문이기도 하지만 낯선 곳에서 풍겨오는 분위기, 즉 조심스러움 때문이기도 하다. 낯선 곳, 낯선 환경에 노출되어 있다는 사실을 망각한 채, 치히로의 부모는 조심성을 저버리고 마녀가 진설한 음식을 먹기에 열중한 나머지 저주에 걸려 돼지로 변해 버린다. 

  
 
주인 없는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일종의 도덕적 해이(moral hazard)를 의미하며, 신중함을 상실한 그들의 태도는 매우 경솔한 것이다. 식욕에만 집중하는 태도는 본능적 욕구의 실현에만 관심이 있는 그들 인간성의 저열함을 의미한다. 그들이 돼지로 변하기 전에 이미 동물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그들 스스로의 행동을 통해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이미 치히로의 부모는 인간성의 중요한 부분을 상실하고 있으며 그들이 돼지로 변하게 되는 것은 차라리 그들 존재 자체의 탐욕스러운 본성에 걸맞는 모습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제 돼지로 변해버린 부모를 구출해야 하는 임무가 소녀 치히로에게 주어진 셈이다. 낯선 곳에서, 부모마저 잃고 방황하는 치히로. 이윽고 밤이 되자 혼령들이 활동을 시작한다. 어찌할 바를 모르는 치히로 앞에 ‘소년-하쿠’가 나타나 치히로를 도와준다. 치히로는 하쿠의 도움으로 혼령들의 ‘성-온천장’으로 들어간다. 그 곳은 마녀 유바바가 지배하는 온천장이자 하나의 성이고 ‘마을-도시’다. 이 온천장은 자족적인 체계로서 그곳의 모든 ‘혼령-존재자들’은 자신의 자리에서 맡은 바 ‘일-노동’과 소비를 해야만 한다. 그것이 그곳의 규칙이다.

소년 하쿠의 도움으로 치히로는 ‘가마할아범’에게 일자리를 부탁하지만, 그곳에 머무르는 자들은 누구든지 그곳의 주인인 마녀 유바바와 ‘계약’을 맺어야 한다. 일하지 않는 자는 모조리 거침없이 동물로 만들어 버리는 마녀 유바바. 그 곳에 거하고 싶은 자는 모두 그녀가 정해준 자리에서 일을 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그곳은 단순히 혼령계가 아니라 현실세계의 알레고리로 읽을 수 있다. 유바바는 청소도 마법으로 하고, 스스로는 일하지 않으며 그 곳 사람들을 지배한다. 하지만 ‘성-온천장’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카오나시의 사금에 현혹당한다.

  
 
유바바의 성에서 누구나 일해야 한다는 것은,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는 근대자본주의 사회의 노동의 규율과 같다. 노동의 명령을 이행하지 않는 자, 일하지 않는 자는 무용한 자이며, 이 세계에서 인정받을 수 없는 불모의 존재자다. 이것은 노동하는 존재로서의 인간을 말해준다. 그러나 마녀 유바바가 지배하는 세계 속에서의 노동은 자발적이고 건강한 노동이라기보다는 노동-교환체계 시스템 하에서 주어진 어쩔 수 없는 노동, 생존하기 위해 하는 노동, 즉 노동하는 자가 그 노동으로부터 소외된 노동을 말한다. 그런 점에서 노동-서비스의 생산과 공급을 통해 그곳을 지배하는 마녀 유바바는 현대 자본주의의 자본가 계급, 부르주아의 알레고리로 읽을 수 있다. 유바바는 치히로와의 계약 장면에서 공장의 사용자-관리자처럼 유달리 규칙의 준수를 강조한다. 노동을 통해서만 사회에 참여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온천장은 냉엄한 현실의 질서를 뜻하는 생산과 소비의 시스템으로서의 자본주의 사회로 간주할 수 있다.

  
 
그곳에서 마녀 유바바는 치히로(千尋)라는 이름을 빼앗고, 대신 센(千)이라는 이름을 부여한다. 유바바는 이름을 빼앗아 자신의 영토 안에서 이름의 주인을 노동의 주체로 바꾸어 버리며, 이름을 거두어가고 대신 새로운 이름을 부여하는 방식으로 그곳을 지배하는 존재다. 이름에 관한 많은 통찰이 가르쳐 주듯 이름이란 정체성, 고유성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름을 빼앗는다는 것, 이름을 다시 부여한다는 것은 기존의 정체성과 존재의 고유성을 제거하고 그녀의 온천장-노동 시스템 하에서 기능적으로만 필요로 하는 정체성을 부여한다는 것이다. 온천장의 최고경영자 유바바는 치히로의 고유성(독자성, 千尋)을 말소하고 치히로에게 숫자 가운데 하나, 일련번호 가운데 하나일 뿐인 ‘센(千)’이라는 이름-정체성을 부여한다. 

그러나 치히로의 등장으로 유바바가 지배하는 온천장, 이 견고한 질서체계에 미세한 균열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그것은 ‘인간-외부자’ 치히로가 혼령계에 잠입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온천장의 노동하는 혼령-주체들, 유바바에게 포섭된 노동자-혼령들과는 다른 룰을 가진 소녀 치히로가 잠입했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소녀라는 설정은 아직 자본적 질서에 완벽하게 포섭되기 이전의 인간 상태를 의미한다. 치히로가 성으로 들어오는 동시에 얼굴 없는 침입자, ‘카오나시’가 그 체계 내부로 들어온다. 치히로의 잠입과 동시에 카오나시가 유바바의 성으로 들어왔다는 점에서 카오나시는 노동과 교환의 시스템 안으로 잠입한 유혹과 욕망을 상징한다.(3) 이 카오나시의 잠입에 대해 유바바는 뭔가 불길한 기운이 침투한 것을 감지하지만, 그것이 어떤 존재인지, 어떤 변화를 일으킬지에 관해서는 정확히 간파하지 못한다.

얼굴(顔) 없는(無) 존재, 카오나시는 욕망이 본질적으로 그 구체성을 갖고 있지 않듯, 형체가 불분명한 자루를 뒤집어쓰고 다니며, 욕망이 구체적 ‘대상 a’, 내용이 결정되기 전까지는 특성을 갖고 있지 않듯이 명료한 얼굴이 없는 존재, 가면을 쓰고 다니는 존재다. 카오나시는 자신이 집어 삼킨 자의 목소리를 통해서만 말한다. 욕망이란 본래적으로 빈 자리이며 구체성(안면성)이 없으며 그 경계도 없다. 욕망은 카오나시가 사람들을 삼켜 버리듯, 어느 순간에 사람의 전존재를 집어 삼킬 수 있는 그러한 운동성이다. 욕망이란 그처럼 친숙하면서도, 늘 그림자처럼 우리와 함께 있으며 괴물처럼 우리 자신을 집어 삼킬 수 있는 그런 것 아닌가? 그러나 위험이 있는 곳에 구원의 힘도 함께 자라듯, 카오나시가 들어온 곳에 치히로가 함께 있다.

어린 소녀로서 힘에 부대끼는 노동을 하는 치히로에게 어느덧 응석받이 아동의 모습은 사라지고, 자신의 짐을 묵묵히 지고 가는 인간의 모습으로 성장해 간다. 그러던 중 ‘오물신’이 유바바의 온천장을 찾아온다. 오물신이 풍기는 악취 때문에 성 안의 혼령들 모두가 기피하지만 치히로는 그런 오물신을 목욕시키게 된다. 유바바가 떠넘긴 일을 치히로는 불평하지 않고 감당해 내는 것이다. 목욕을 통해 오물신은 정화된다. 원래 유명한 강의 신이기도 했던 오물신은 인간 세상의 온갖 쓰레기를 다 토해 내고는 다시 가벼워진 몸으로 치히로에게 고마움의 표시로 환약(경단)을 주고 떠난다.(4)

  
 
한편 카오나시는 사람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사금을 뿌리고 다니기 시작한다. 카오나시는 무엇이든 생겨나게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존재이기도 한데, 온천장의 개구리 웨이터가 사금에 혈안이 되자, 그것이 성 안의 존재들에게 관심의 대상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계속 사금을 만들어 내며 그것으로 환심을 얻으려 한다. 그러나 사금으로 그들의 정신을 홀리고는 곧바로 그들을 집어 삼켜 버린다. 황금에 홀린 자가 양심과 영혼을 잃게 되듯 카오나시의 사금에 홀린 자들은 카오나시에게 잡아먹히게 된다. 성 안의 존재들에게 사금은 바로 자기 욕망의 대상으로서 카오나시는 그 환상을 공급한다. 그러나 카오나시가 만들어 낸 사금덩어리들은 실체가 아니었다. 유바바의 언니 제니바의 말처럼 “마법으로 만든 것은 쓸모가 없는 것”이며 헛것에 지나지 않는다. 제니바는 직접 땀 흘린 노동을 통해 창출되는 가치만이 값어치가 있다는 교훈을 전달하는데, 카오나시의 사금이 순식간에 쓸모없는 똥덩어리로 변해버리는 것과 동궤선상에 놓이는 메시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사금을 주우려고 온천장에는 일대 혼란이 일어나고 카오나시는 치히로에게도 황금을 내밀지만 치히로는 그것을 받지 않는다. 치히로 자신에게 필요한 것이 아닐뿐더러 정당한 자기 몫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일까? 치히로가 카오나시의 사금을 거절한 것은 자기 내면의 유혹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음을 의미한다. 뿐만 아니라 사금을 뿌리며 성 안의 혼령들을 먹어치우고 있는 카오나시를 위해 강의 신/오물신이 준 환약의 반쪽을 카오나시에게 먹여준다. 환약을 먹은 카오나시는 먹었던 사람들을 다 토해내고 다시 온순해진다. 강의 신, 즉 자연이 준 선물은 물신화된 탐욕을 치유하는 힘이 있는 것일까?

유바바의 명령을 받고 제니바의 집에서 도장을 훔쳐오던 하쿠는 제니바의 분신인 종이추격자들의 공격을 받게 되고, 공격을 피하기 위해 온천장 꼭대기에 위치한 유바바의 방으로 숨어들게 된다. 그것을 목격한 치히로는 공격받는 하쿠를 찾아서 유바바의 방으로 들어가 거기서 상처 입은 ‘하쿠-용’을 발견한다. 치히로의 머리카락에 붙어 잠입한 제니바의 분신-종이들은 유바바의 모습으로 변신하여 유바바의 아들 ‘보우’와 ‘홀쭉 까마귀’를 두더쥐를 닮은 동물과 작은 새로 각각 변신시켜 버린다. 그러나 유바바는 그런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다.

  
 
치히로가 상처 입은 하쿠-용에게 나머지 반쪽의 환약을 주자(5) 하쿠는 마녀 유바바가 그의 내부 깊숙이 심어 둔 발바닥-혼령을 뱉어내게 되고, 치히로는 그것을 밟아 소멸시켜 버린다. 하지만 아직도 회복되지 못한 채 누워있는 하쿠를 구하기 위해 치히로는 유바바의 언니 제니바의 집으로, 즉 유바바의 영토 외부로 여행을 떠난다. 여기서 치히로가 하쿠를 구하기 위해 떠나는 동인(動因)은 ‘사랑’ 때문인 것으로 제시되고 있다. 그러나 치히로의 사랑은 남녀 간의 열정적인 사랑을 뜻하는 에로스적인 것이라기보다 자신을 돌보아 주었던 사람에 대한 인간적 애정, 인류 보편애적인 사랑, 그것도 아니면 소년소녀다운 관심과 사랑이라고 보는 편이 훨씬 자연스럽다. 남녀 간의 사랑이라고 보기에 그 둘의 나이와 모습은 너무도 어리고, 또한 그들 간의 애틋함도 이성(異性)간의 것이라기보다는 돌봄과 연대감에 가까운 성격의 것이다. 이런 지점에서 치히로가 두더쥐로 변해 버린 유바바의 아들 ‘보우’와 작은 새를 데리고 다닌다는 것, 자신을 따라오는 카오나시에게 동행을 허락한다는 점은 치히로가 보편적 사랑, 돌봄과 희생의 정신을 소유한 자라는 확증을 더해준다. 이 사랑은 자연과 인간의 유기적 관계, 모든 존재자들의 유기적 연결성(holism)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하천으로서의 용-하쿠와 인간 치히로의 사랑이란 결국 자연과 인간의 일체성을 상징하는 것이다. 

제니바의 집으로 향하는 열차의 행선지는 의미심장하게도 ‘중도(中道)’인데 그 열차 안에서 치히로는 성의 내부에 위치하지 못한 채 떠돌고 있는 음울한 여행자들―노동의 현장에서 소외된 자들을 목격하게 되고 끝내는 제니바의 집에 도착한다. 

제니바는 마녀 유바바의 쌍둥이 자매로서 그녀 역시 마법을 부릴 줄 알지만, 그녀의 집은 유바바의 사업체-온천장과는 달리 아주 소박하고 검소하다. 유바바와 쌍둥이 자매이자 언니인 제니바는 자본주의의 경영자인 유바바의 짝패이기는 하지만, 프로테스탄티즘에서 말하는 초기 자본주의의 건강한 노동 윤리를 보여준다. 그녀의 주거와 하는 일(바느질), 삶의 방식에서 우리는 자본주의 시스템에 타락하지 않은 건전한 노동의 형태를 발견하게 된다. 치히로는 제니바에게 하쿠가 훔쳐온 도장을 돌려주고 대신 사죄한다.

치히로가 다시 성으로 돌아가려 할 때, 이미 치유된 하쿠-용이 치히로를 온천장-성으로 데리고 가기 위해서 제니바의 집 앞에 와 있다. 카오나시는 제니바의 집에 남게 되는데 이는 얼굴 없는 욕망, 무정형의 욕망은 제니바에게 훈련받을 필요가 있기 때문인 것으로 볼 수 있겠다. 제니바는 욕망을 절제하고 다스릴 줄 아는 캐릭터이기 때문에 무정형이자 중립적(타락의 원흉이면서도 생산과 동력의 근본)이라고 할 수 있는 욕망은 훈련되고 조절되어야 할 필요성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치히로는 하쿠-용을 타고 다시 유바바의 성으로 돌아간다. 치히로의 제니바의 집으로의 여행은 유바바로부터 벗어나 자본주의에 나포되기 이전의 순수했던 노동과 생활을 유지하고 있는 정신에 대한 경험과 일치한다.

  
 
제니바의 집에서 하쿠-용을 타고 유바바의 성으로 돌아오는 길에 치히로는 어린 시절의 기억 한 조각을 떠올린다. 그 기억은 아주 오래 전, 치히로가 마을의 개천에 빠졌을 때 구해주었던 개천이 바로 하쿠였다는 것이다. 마을 개천이란 바로 우리들이 잃어버린 생태적 환경의 또 다른 이름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앞서 ‘오물신’의 시퀀스에서도 암시되었듯 치히로가 유년시절의 마을 개천을 상기하는 과정은 결국 인간의 근원을 찾는 메시지, 현재의 인류가 잃어버린 유년의 기억을 찾아야 한다는 생태적인 메시지를 던져 주는 셈이다. 치히로가 그 기억에 관해 말하자 하쿠-용은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자신의 본래 이름을 기억해 내게 된다. 하쿠는 자신의 이름이 코하쿠, 즉 ‘니기하야미 코하쿠누시’라는 이름의 개천이었다는 것을 기억해 내기에 이른 것이다. 이로써 치히로는 하쿠의 이름을 찾아 준 셈이며, 하쿠는 치히로를 통해 자신의 본래성-정체성을 되찾게 된 것이다. 하쿠는 인간이 잃어버린 자연이자 문명과 기술 탓에 잃어버린 순수했던 시간을 의미한다. 하쿠가 강의 신이라는 점은 인간-치히로와 자연-하쿠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존재라는 점 역시 시사한다. 

  
 
유바바의 성에 도착했지만, 유바바는 자신의 아들 ‘보우’를 잃어버려 분기탱천해 있다. 그러나 변신한 돼지-아기를 치히로가 무사히 돌보아 주었던 탓에 다시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아온 아들 ‘보우’가 엄마 유바바에게 치히로를 인간세계로 돌려보내 줄 것을 요구한다. 그리하여 모든 임무를 완수한 치히로에게 이제 부모를 구출하는 일만이 남게 된다. 그러나 마녀 유바바는 마지막 시험을 준비한다. 숱한 돼지무리 가운데 자신의 부모 돼지를 알아보아야만 그 둘을 데리고 나갈 수 있다는 조건으로 석방을 제시한다. 유바바는 치히로가 돼지 무리 가운데서 자신의 부모를 골라내라는 시험을 준비한다. 치히로는 돼지 무리를 한 번 휘둘러 본 후 그 무리들 가운데 자신의 부모가 없다고 단호하게 말한다. 유바바의 마지막 시험을 통과한 것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치히로는 다 똑같이 생긴 돼지들의 무리에서 자신의 부모-돼지가 없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아챌 수 있었을까?【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는 그 이유가 제시되지 않고 있다. 제니바가 선물로 준 머리끈 때문이었을까? 영화 처음에 돼지무리들 가운데서 자신의 부모-돼지를 찾지 못해 쩔쩔매던 치히로를 생각해 보면 이는 놀라운 변화다. 치히로는 이미 모든 시험이 끝났고, 그녀의 부모는 돼지로부터 풀려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치히로가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를 완수했기 때문에 이미 부모들은 다시 사람으로 변해 치히로를 기다리고 있었다. 자기의 본래적 임무를 다한 곳에서, 자신의 인간성을 증명한 곳에서 더 이상 마법의 저주는 통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 치히로가 기억한 것은 무엇인지 물어야 한다. 치히로는 자신의 이름을 잊지 않았다. 그러나 영화에서는 이름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만 여러 차례 언급될 뿐, 치히로가 자기 이름을 잊어버렸는지, 그렇지 않았는지 묻는(확인하는) 장면은 나오지 않는다. 이것은 단지 치히로의 이름이 고유명사로서의 명칭, 실제적인 이름을 뜻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치히로라는 이름을 기억해야 한다는 것은 자신에게 부여된 자기 임무를 잊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며, 자신의 본래성을 지켜야 한다는 뜻이다. 자기 가족을 구출해야 한다는 것은 자신이 여기-이곳에 들어오게 된 이유와 역사, 자기가 속했던 곳과 자신이 돌아가야 할 곳에 대한 기억을 의미한다. 동시에 그것은 다시 돌아갈 수 있다는 노력과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며, 유바바의 성에서 주어진 노동의 자리에서 자기 처지를 비관하기보다는 용기를 가지고 현실에 충실하면서도 임무를 완수했다는 점일 터이다. 그 과정에서 치히로가 보여준 덕성은 황금에 사로잡히지 않았으며, 타인을 사랑하고, 보잘 것 없는 타자들을 돌보아 준 것 등이다. 이것이 주변 인물들에게 구원을 베푸는 결과를 가져온다.
  
3. 인간이라는 이름의 내용

호머의 서사시 『오디세우스』에서 오디세우스는 고향 이타카로 돌아가는 여정에서 마녀 키르케가 통치하는 섬에 도착하게 된다. 물과 식량을 보충하기 위해 마녀의 섬에 착륙한 오디세우스는 부하들에게 그 섬에서 나오는 어떤 음식도 먹어서는 안 된다고 충고하지만, 배고픔을 이기지 못한 부하들은 모두 마녀 키르케의 연밥(lotus)을 먹고 돼지로 변하는 저주에 걸리게 된다. 그 저주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은 자신이 인간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 자신이 인간이라는 그 고통스러운 자각을 포기하지 않는 것 뿐이다.

  
 
돼지가 되어버린 오디세우스의 부하들에게 찾아왔을, 그 자기존재의 내면-의식과 현실적으로 비쳐질 외부-모습 사이에 괴리감으로 자리했을 심연의 간격을 상상하는 일이란 어렵지 않다. 말을 하려고 하지만 나오는 소리는 돼지의 꿀꿀대는 소리뿐이며, 그들 내부의 인간성은 고상하게 먹고자 하나 실제로는 주둥이를 킁킁대며 먹을 것에 코를 박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될 때 느꼈을 심적 수치감과 고통은 차라리 자신이 원래 인간이었음을 잊어버리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으로 유도되었을 것이다. 그들은 돼지의 형상을 입고 있기 때문에 돼지로 대접받게 되고, 그들의 자존감 역시 상처받았을 것이다. 스스로 인간이라는 자각, 인간이었다는 기억, 인간으로 되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 즉 자기 존재의 본래성(인간성)과 현재의 모습 사이의 비동일적 간극 속에서 그들이 끝까지 인간이었다면 끝없이 괴로워했을 것이다. 

과연 이 흥미로운 모험담이 고대 서사시의 삽화일 뿐일까? 우리들 역시 인간으로서의 자존감을 유지하고 싶지만 주변의 현실은 쉽사리 그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나’는 고귀한 존재지만 사람들-시스템은 나를 돼지-부품으로 취급한다. 그 자기인식과 현실 사이의 괴리와 긴장 속에서 우리는 종종 합리화와 망각을 통해 심리적 타협을 전개한다. 어쩔 수 없다는 포기, 다른 이들은 더 하다는 피장파장의 오류, 인간이란 상황-현실 속에서 규정되는 존재라는 생각이 그 합리화 기제들의 회로다.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라는 물음은 한가로운 신선놀음일 뿐이라고 여기며 외적으로 강제된 상황 속에 몰두할 때 우리의 이름은 더욱 아득해 진다. 아주 가끔, 자신의 존재에 대해 기억이 나지만 이미 이름은 잊어버린 지 오래. 돌아갈 수 있는 길, 인간성 본연의 길로 회귀하는 길은 이 자본주의적 현실이 고통스럽더라도 인간으로서의 자기동일성을 유지하면서 그 고통스러운 현실 속에서 구원의 도래를 기다리며 희망을 놓지 않는 길 뿐이다. 이 때 인간이란 몇 가지 규정성을 가질 수 있다. 모든 이들에게 언제나 타당한 규정을 수립할 수 없겠지만, 적어도 치히로가 보여준 마음 몇 자락을 내적 규정성으로 가진다면 어떨까?

이름이란, 모든 기호가 그렇듯 그 실체의 내용을 본래적으로 가진 것이 아니다. 내용은 기표와 자의적으로 연결된 것이다. 고유명사와 본질은 사실상 아무런 공통점이 없다. 이름을 통해 역사성과 기원을 추적하고, 그것을 고정시켜 이해하려는 태도는 이름붙이기를 통해 대상을 인식하고 전유하는 마녀 유바바의 태도와 같다. 원래의 이름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이름이 비어 있는 것이라는 것, 그 이름은 끝없는 실천과 타자에 대한 보살핌을 통해 능동적으로 구성해 나가며 채워져야 하는 형식이다. 따라서 이름을 기억하라는 것은 이름의 내용을 구성하라는 것, 인간이라는 존재의 규정성을 실천을 통해 계속적으로 채워 넣으라는 능동적 명령어다. 기억이란 회복이 아니다. 원래 있었던 것을 잊지 않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 의미의 형성이다. 

마녀의 성-자본주의적 현실에 붙들린 우리가 이곳을 탈출하는 길은 치히로가 보여주었듯, 자신이 인간이라는 사실, 인간이라는 이름을 가진 자라는 것, 그리고 그 이름의 내용을 매 순간 실존적으로 채워 넣는 길 뿐이다. 그것이 인간이라는 우리의 이름을 기억하는 길일 것이다. 인간이라는 우리의 이름, 우리의 이름-내용은 무엇인가? 잘 기억나지 않는다면 치히로의 행동을 다시 좇아가 보아야 한다. 


글·이호

(1) 미야자키 하야오宮崎駿【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千と千尋の神隱し】,2001 
(2) 김용석, 『서사철학』, 휴머니스트, p.361.
(3) 카오나시가 온천장-성 안으로 들어온 외계적 존재인지, 원래부터 성 주변을 배회하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명확히 제시되지 않는다. 이것은 카오나시라는 모호한 덩어리가 노동하는 주체들 주변을 맴돌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고 해석할 수 있다. 노동할 때 죄를 가장 적게 짓는다는 말처럼 건강한 노동에 몰두할 때 불온한 욕망은 틈입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그 욕망은 노동주체와 노동의 현장 주위를 유령처럼 맴돌고 있다. 
(4) 이런 부분은 <바람계곡의 나우시카風の谷のナウシカ>(1984), <이웃의 토토로となりの トトロ>(1988), <원령공주もののけ姬>(1997) 등에서부터 지속되어온 미야자키 하야오의 생태주의적 메시지로 해석할 수 있다. 그것은 기계문명에 대한 비판이자 환경오염에 대한 반성적 사고를 반영하는 장치들이다. 
(5) 이 중요한 알약을 치히로는 자신을 위해 사용하지 않고 카오나시를 치료하는데 반쪽을, 하쿠를 치유하는데 나머지를 사용한다. 이는 치히로가 자신의 부와 이익관심으로부터 벗어나 아픈 자를 치유하고 돌보는 정신의 소유자임을 말해준다. 

* 글 출처: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 르몽드 시네마 크리티크

http://www.ilemonde.com/news/articleList.html?sc_sub_section_code=S2N40&view_type=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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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자서성희

등록일2018-0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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