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객센터

customer center

070.8868.6303

[안숭범의 시네마 크리티크]‘우리’는 가능한가- ‘내일을 위한 시간’과 ‘나, 다니엘 블레이크’

 
 

이토록 유연한 세계: 당신은 어디로부터 낙오 중입니까


영화가 시작되면 생계의 파국이 실존의 불안을 불러오는 정황이 짐작된다. 수화기 너머에서, 또 암전 상황에서 주인공에게 음성으로 전달되는 그 비극은 누군가의 불행을 전제로 안녕을 유지하는 우리 사회의 폭력성을 드러낸다. <내일을 위한 시간>(이하 ‘<내일>’)에서 우울증으로 휴직 중인 산드라는 직장 동료들의 투표에 의해 복직이 불허되었다는 정보를 전화로 받는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이하 ‘<나>’)의 다니엘은 심장병으로 일을 계속할 수 없는 상황에서 질병 수당마저 놓칠 수 있다는 언질을 받는다. 대화 과정은 암전 상황에서 소리로만 전달되는 바 프레임을 가득 채운 어둠은 그의 내면을 잠식하고 있는 암울한 전망을 대변한다. 

그러니까 그들은 ‘실업’과 ‘질병’이 만난 위태로운 자리에 있다. 그 ‘자리’는 안전한 내일로부터 멀어지는 중에도 스스로에게는 반전의 수단이 없다는 것을 확인해야 하는 수렁이다. 그들을 두고 다르덴 형제(이하 ‘다르덴’)와 켄 로치는 우리에게 동일한 질문을 추수하게 한다. 가령 그들을 평범한 낙오자 중 하나로 간편하게 분류하는 습관은 왜 의심받지 않는가. 상처를 피하는 선에서 타인을 향한 연민을 효율적으로 재배치하는 습관은 이대로 괜찮은 것인가. 공감의 방향과 정도를 규율하는 제도와 원칙의 권능에 문제는 없는가. 경쟁을 본능에 기입하는 세계의 질서에 대해서는 왜 의문을 두지 않는가. 이들 질문 외곽에 예외를 불허하는 신자유주의 체계가 국가와 사회, 기업과 노동자의 존재양식을 주무르는 큰 그림이 있다. 이제는 생득적 환경이 되어버린 신자유주의가 행사하는 생명정치의 음험함이 있다. 

주지하다시피, 다르덴과 켄 로치에게 이는 전혀 어색한 논제가 아니다. 그들은 사회적 문제를 논변하는 TV 다큐멘터리, TV 영화 등을 작업하다가 극영화를 만들기 시작한 경험을 공유하고 있다. 가난과 실직, 청소년과 청년의 노동, 악순환 되는 빈곤과 범죄, 몫을 상실한 이민자의 운명 등은 그들 영화가 집요하게 고쳐 물었던 화두다. 이를테면 다르덴의 영화 세계는 1960년에 있었던 벨기에 총파업 사건을 회상하는 두 편의 중편 다큐멘터리 <레옹M의 보트가 처음으로 뫼즈강을 내려갈 때>(1979), <전쟁을 끝내기 위해, 벽은 무너져야 했다>(1980)로부터 출발한다. 노동(해야만)하는 인간의 소외 문제를 다룬 <로제타>(1999)와 같은 극영화 초기 대표작도 정확히 그 연장선에 위치한다. 그처럼 켄 로치는 <나, 다니엘 블레이크>로 깐느를 방문했을 때 “50여년 전에 만든 <캐시 컴 홈>과 유사한 작품을 다시 만들어야 한다는 현실이 놀라울 따름”이라며 그의 영화세계가 항상 동질적인 언저리에 있었음을 시사한다. <레이닝 스톤>(1993)이나 <빵과 장미>(2000)를 언급하지 않더라도 부조리한 세계에 대한 그의 온도는 항상 뜨겁게 유지되어 왔다.
 
영화의 폐부에 이르기 위해 매우 직관적인 의문을 공유하고자 한다. 이른을 바라보는 다르덴과 여든을 넘긴 켄 로치가 영화에 입문할 무렵 가졌던 논제를 지금까지 털어버리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지난 40여년 간 그들의 영화에 반사된 세계는 어떤 미래를 약속했고 그 결과는 어떠했는가. 1979년 켄 로치의 고향 영국에서는 마거릿 대처라는 시대적 인물이 수상 자리에 올랐다. 그녀가 취임 초부터 내세웠던 아젠다 중 하나는 ‘법질서의 회복’이었다. 그러한 언명은 공공부문의 민영화, 노조활동의 약화, 노동 유연성 강화와 같은 정책 비전을 관철시키기 위한 보수 우파의 으름장으로 비약할 수 있다.  

그로부터 2년 후 미국 대통령에 오른 로널드 레이건은 신자유주의의 세계화와 가속화에 더욱 분명한 기여를 한다. 그의 취임 연설문 속 구절들은 외관상 가슴 벅찬 비전들로 가득하다. "우리들 중 자신을 통제할 수 없는 사람이 있다면, 다른 사람을 어떻게 통제할 수 있겠습니까?"(1)와 같은 멋진 표현은 숨은 의미를 들추기 전까지는 당위적인 표현에 가깝다. 그런데 그 질문은 자기 경영적 주체가 되어 경쟁에서 승리하라는 독려이면서 그 결과가 모두에게 공평한 희망이 될 수 없다는 전망으로 나아간다. 경쟁의 주체들에게 무한한 자유를 허락할수록 가진 무기가 없는 약자는 합법적으로 희생과 도태의 길에 들어설 수도 있다.

이후 신자유주의적 질서는 세계의 공기가 되었다. 단적인 예로 1997년의 벨기에, 곧 다르덴의 고향에서는 르노 자동차가 대규모 파업 사태를 맞는다. 국제적 경쟁에서 뒤처지면서 3천여 명의 노동자가 일하던 빌보르드 조립공장을 일시에 폐쇄조치해버린 탓이다. 폐쇄가 확정된 날은 3월 2일이었고 공장 폐쇄일은 3월 7일이었다. 이에 경악한 각국의 르노 자동차 노동자들이 국제적으로 연대했지만, 거대한 흐름에 편승한 이 사태를 처음으로 되돌릴 수는 없었다. 

이토록 유연한 세계에 속해 산다면, 가난과 실직을 오로지 개인의 실패와 불행으로 돌리는 습관으로부터도 좀 더 유연해져야 마땅하다. 그런 입장에서 다르덴과 켄 로치는 영화 입문기에 던진 질문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1999년 다르덴이 만든 <로제타> 속 로제타는 성실하게 노동력을 제공했음에도 공장에서 해고당한 후 삶이 무너져 내린다. 이후 취업이 계속 무산되면서 그녀의 운명은 알콜 중독에 몸을 파는 엄마와 함께 나락으로 떨어져 간다. 어쩌면 그녀는 임시 거주지인 캠핑촌에서의 생활조차도 지켜낼 수 없을지 모른다. 그것이 로제타의 ‘오늘’이었다. 그런데 <내일> 속 산드라와 <나>의 주인공 다니엘의 현실이 로제타의 ‘오늘’로 나아가는 문턱에 있다. 

영화는 그 문턱에서부터 시작한다. 그곳에서 그들은 안전한 생활을 보장받기 위해 사회와 조직이 부여한 규칙을 내면화하려고 분투하는 중이다. 이때의 규칙은 사회가 내부 구성원을 인준하는 간편한 방식이다. ‘생명정치’의 장을 “생명과 생명의 메커니즘을 명확한 계산의 영역으로 편입시키고 권력-앎을 인간 생명의 변화 요인으로 만드는”(2) 곳이라 한다면, 그들은 정확히 그 영역의 구심력에 압착된 개인들이다. 이 글은 그들이 사는 영화 속 세계가 지금 우리가 사는 영화 밖 세계와 어떻게 관련되는지를 조명하고자 한다. 영화에 대한 내재적 비평을 선호해 왔지만 이번만큼은 다르덴과 켄 로치가 영화를 통해 저항하고자 한 우리 세계의 맨얼굴을 성찰하는 데 방점을 두고자 한다. 이는 두 거장이 어떤 입장에 서서 우리를 독려하고 있는지, 그 목소리의 현실적 기원을 더듬는 작업과 다르지 않다. 지금부터 이 글은 영화비평을 초과하거나 미달한다.  

그간 비평문을 쓸 때 영화를 향한 동지적 열정을 가진 이들을 상상하며 ‘우리’라는 용어를 애용해 왔다. 그런데 다르덴의 일부 영화와 켄 로치의 거의 모든 영화는 다소 다른 차원의 ‘우리’, ‘우리 되기’를 요구한다. 이를테면 그들 영화 중 많은 수는 윤리적 연대를 위한 책임적 주체화의 요청으로 나아간다. 그 요청 앞에 진지한 실천적 관객을 ‘우리’로 묶는다면, 그들은 심정적으로 같은 편에 속하는 추상적 무리가 아니다. 가령 <내일>과 <나>는 도덕적・윤리적으로 서로에 대한 하자를 갖지 않는 생활 속에서 ‘우리’의 현실적 용례가 가능한가를 질의한다. 정상적인 생활세계에서 낙오 중인 산드라와 다니엘을 두고도, 세계가 어제처럼 균형잡힌 표정을 유지하고 있다고 고발한다. 그렇다면 이 글은 다르덴과 켄 로치가 요청하는 ‘우리’에 결속되고자 하는 의지의 산물이다. 

  
 
불행의 초국적 질서화: 이것은 도덕적 딜레마가 아니다
 
유연한 자본주의(flexible capitalism)가 조직과 노동의 형태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는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바다. <내일>에서 산드라가 일했던 태양열판 제조공장은 조직 구성원을 임의적인 ‘인적자본’으로 본다. 이 조직은 공장의 생산성이 열여섯 명의 노동력으로 유지될 수 있다는 계량적 판단이 선 순간 더욱 유연해진다. 그런데 조직이 내세우는 ‘유연성’은 노동자의 입장에서 자기 생계의 ‘안정성’과 반비례한다. 조직으로부터 1000유로의 보너스를 받기 위해서는 산드라의 복직을 거부해야만 하는 열여섯 명의 동료들을 비난하기란 쉽지 않다. 그들에게도 유연한 조직에의 ‘적응’만이 세계와 화해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산드라도 특별한 이유를 공지하지 않고 복직을 불허한 공장의 부조리함을 곧바로 문제 제기하지 못한다. 그 대신 공적 세계 바깥에서 동료들에게 동정을 구걸하는 쪽을 선택한다. <내일>은 130만원 짜리(1000유로) 동정을 열여섯 번 받아내기 위해 동네와 거리를 헤매는 산드라의 로드무비인 것이다.   

한편 <나>의 관공서 풍경을 보면, 실리와 효율의 논리로 무장한 숨 막히는 우리 세계가 상상된다. ‘복지’의 영역까지 장악해 들어온 생산성의 논리는 제도와 기준, 원칙과 규칙을 내세워 절박한 개개인을 규율하는 중이다. 떠들썩한 입법 체계들에 현혹되어서는 안 된다는 푸코의 조언은 정확히 이런 경우를 두고 한 말이다. 당장 오늘의 생계가 절박한 다니엘에게 그 지난한 행정적 절차는 ”규격화하는 권력을 받아들일 만한 것으로 만드는 형태”(3)에 불과하다. 그는 최근에 심장마비로 추락사할 뻔한 경험을 한다. 그러자 주치의는 40여년을 지속한 목수생활을 단념시킨다. 그럼에도 그는 질병수당 수급 심사에서 탈락하고 결국 질병수당 수급 재심사와 구직수당 수급 심사를 함께 청구해야 하는 입장에 내몰린다. 구직수당 심사 시 요구되는 것은, 구직활동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서류들이다. 그러나 그 절차와 형식은 누군가에게는 간편하지만, 다니엘과 같은 사람에겐 너무 어렵고 복잡하다. 영국의 고용연금부는 누군가에게 차별과 불편을 조장하면서 복지정책의 성과를 유연하게 이끌어내는 집단인 것이다.   

그런데 <내일>과 <나>의 진정한 비극은 유연한 자본주의가 초국적 질서 내에 굳건하게 자리잡은 데서 파생한다. <내일>에서 산드라의 복직 문제는 아시아 쪽 태양열판 기업들의 선전과 맞닿아 있다. 그들이 누리게 된 풍요의 크기만큼 산드라가 다니던 공장이 위기에 빠진 셈이다. 회사의 기대수익이 낮아지자 사장은 인건비 절감이라는 단순한 출구를 선택한다. 불행은 사장이 줄이려는 ‘인건비’가 산드라에게는 가족의 절박한 ‘생계비’라는 데 있다. 그처럼 <내일>은 국민경제가 초국적인 자본의 흐름을 조종할 수 있다는 낙관론, 곧 케인스주의적 믿음이 휘발된 이후의 사회 풍경을 다룬다. 공장을 짓고 사람을 쓰는 논리도, 공장을 없애고 사람을 내보내는 명분도 전지구적 역학관계 내에서 계산되고 개발된다. 

다르덴은 그러한 상황을 배경에 놓고 산드라의 불행이 오롯이 그녀의 것이어야 하는가를 묻는다. 애초에 그녀는 휴직하지 않았어야 했고 이를 위해 우울증을 얻어선 안 됐다. 황당한 궤변이지만, 만약 이 비극이 오로지 그녀의 책임이라 할 때 해결책은 그 불가능한 상상 속에만 존재한다. 그러한 기이한 자책은 신자유주의의 통치술 아래에서 호모 에코노미쿠스가 효과적으로 생존하기 위한 정신승리 전략과 맞닿는다. 해당 사회의 관리와 조작의 기술을 자발적으로 내면화하지 않고서는 유연하고 민첩한 ‘적응’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푸코 철학의 핵심적인 방법론은 실천적 형식(set of practices)이 진리체계(regime of truth)와 결합하여 특정한 개념들(질병, 섹슈얼리티, 광기 등)의 의미를 어떻게 배치(arragement)하는지 파악하는 데 있다. 푸코가 즐겨 써 온 ‘권력-지식 장치(apparatus of knowledge-power)’는 그렇게 작동한다. 그렇다면 신자유주의의 초국적인 통치술은 개개인의 경제적 행동에 낭비나 잉여가 발생하지 않도록 그들(인적 자본)을 관리하고 위험이 생기지 않도록 조작(manipulate)하는 힘과 다르지 않다. 자본 창출에 부적합하거나 부자연스러운 몸은 이제 과학과 지식의 이름으로 질병처럼 관리대상이 된다. ‘생명’이 ‘권력-지식 장치’에 복속되는 메커니즘은 그와 같다. 그래서 신자유주의의 통치술에 적응한다는 건 초국적 질서 내에 위치한 잠재적 경쟁자보다 더 적극적으로 자신의 몸과 욕망을 제어하는 게 관건이다.

산드라의 직장 동료들 중 상당수는 이미 생명정치의 장에 작동하는 ‘권력-지식 장치’에 의식적・무의식적으로 길들여져 있다. “다른 사람들은 어떻대?”, “사람들이 보너스 포기한대?”, “만난 사람들은 뭐래?”, “보너스 포기한 사람이 몇 명이야?”, “보너스 안 받겠다는 사람들 많아?” 이들 대사는 보너스 대신 자신의 복직에 재투표해줄 수 없는지를 묻기 위해 찾아온 산드라에게 동료들이 먼저 뱉은 말들이다. 그러니까 그들은 산드라의 요청에 즉답을 회피하는 대신 직장 공동체를 규율해온 통치술이 아직 건재한지의 여부를 궁금해 한다. 그렇다면 산드라의 동료들에게 직장 공동체를 장악한 생명정치 메커니즘은 희석된 자신의 비인간성을 감춘 채 숨기 좋은 집이다. 책임적 주체의 자리를 피하고 싶은 개인들을 익명화하는 보이지 않는 손이다. 그렇다면 지금 산드라는 동료들의 부족한 윤리의식이나 이기심을 상대하는 게 아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산드라 동료들의 내면이 어떻게 규율되고 있는지 살펴보자. 산드라가 복직하면 16명 중 누군가가 퇴직해야 한다는 반장의 말은 그들 사이에서 위력을 떨치는 중이다. 그 말의 사실 여부를 떠나 퇴직 당사자가 내가 될 수도 있다는 공포는 본능적인 것이다. 멀리 있는 사안에는 윤리적인 사람들도 내가 개입된 사안에 대해서는 실리적이기 마련이다. 신자유주의가 촘촘하게 재편한 초국적 생명정치 질서는 실리 추구에 입각한 선택을 본능적·즉각적으로 요청해 왔다. 게다가 그들은 산드라의 희생만 눈감는다면, 130여만 원의 보너스를 당장 받을 수 있다. 누군가의 큰 불행과 나의 작은 불편 사이에서 우리는 대게 내게 닥칠 작은 불편을 견디기 어려워한다. 그렇게 보면 산드라의 미래를 결정할 ‘비밀 투표’는 비가시적으로 존재하는 조직 내 생명정치 메커니즘의 규제력을 확인시키는 적확한 도구가 아닐 수 없다. 

산드라가 느끼는 비참함은 그 규제력에 상대화되고 있는 데서 발생한다. 그녀는 집대출금을 계속 갚아가지 않으면 어렵게 마련한 가족의 보금자리를 박탈당할 수 있다. 그런데 당장은 동료들 한 명 한 명에게 동정을 구걸해야 하는 상황이 견디기 힘들다. 여기서 우리는 <나>에서 다니엘이 내뱉은 “사람이 자존심을 잃으면 다 잃은 거요”라는 말의 깊이를 짐작해 봐도 좋을 것이다. 실제로 산드라는 동정을 구걸하러 간 자리에서 “동정하지 마”와 “원망 안 해”라는 말을 반복한다. 그녀가 구하는 동정이 동료의 130만원 짜리 적선과 다르지 않음을 잘 알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산드라는 적선을 받아야 내일이 있다는 비참한 자각과 싸우면서 불행의 책임을 동료에게 전가해선 안 된다는 마음과도 다투는 중이다. .   

산드라의 복직 대신 보너스를 선택한 이들의 형편과 처지도 간단치 않다. 윌리는 아내의 실직 때문에 타일을 팔아가며 대학생 자녀의 학비를 마련하는 중이다. 미레유는 이혼 후 만난 남친과 새출발을 준비하기 위해 집안 집기류를 새로 장만해야 하는 상황이다. 히샴은 주말이 되면 마트에서 투 잡을 해야 이제 갓 태어난 막내를 먹여 살릴 수 있다. 그럼에도 다르덴은 영화 마지막 시퀀스에 이르러 시각적으로 명징한 ‘구별 짓기’를 시도한다. 유리창으로 서로를 들여다볼 수 있는 두 방에 복직 찬성자 8명과 반대자 8명을 나눠 놓은 것이다. 투표는 비밀이라지만 결과를 공개해놓은 이 직설적인 씬은 다르덴 영화에서 매우 보기 힘든 장면이다. 영화 밖 우리를 향한 예외적으로 선명한 전언이 거기에 있다. 

도덕적인 개인의 선의나 호의에 의해 공동체의 안녕이 유지된다면 그 곳은 후진 사회다. 아들과 함께 산드라의 동료로 일해 온 이본은 아들에게 얻어맞으면서도 보너스 대신 산드라의 복직을 택한다. 안느는 돈을 포기할 수 없다는 남편과 이혼을 각오한 후 산드라의 복직에 힘을 싣는다. 흥미로운 것은, 다르덴이 만든 ‘구별짓기’의 풍경이 그 범상치 않은 윤리적 선의 다음에 도착한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그 풍경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명확하게 내뿜는다. 이본과 안느처럼 평균 이상의 책임감을 가진 이들에 의해 불행한 이웃의 생계가 보전되는 사회가 정상인가. 

산드라의 행복한 웃음이 새겨진 몇몇 쇼트들이 있다. 신자유주의가 배태한 불행의 초국적 질서를 잠시나마 망각하게 되는 몇몇 순간이 있다. 다르덴은 <자전거 탄 소년>(2011)에 이르러 처음 영화 음악을 썼을 정도로 엄정한 형식을 유지해왔다. <내일>에서는 동료의 집을 돌던 중에 남편 차에서 음악이 흘러나오곤 한다. 한번은 안느의 집을 다녀온 산드라가 그녀의 지연된 대답을 가늠하며 남편 차에서 음악을 듣는다. 그때 음악으로 흥건한 차 안 조수석에서 그녀는 손을 뻗어 남편의 손을 조용히 잡는다. 자신의 복직이 결정되는 투표를 앞둔 전 날 밤에도 산드라는 집 나온 안느와 남편 차를 타고 가면서 음악으로 행복해진다. 그때 카메라는 차 안 네 번째 인물의 위치에서 산드라와 남편, 안느의 대화를 지켜보며 그 순간에 동참한다. 카메라의 위치는 “어쨌든 의무감 갖지 마 생각 바꿔도 이해해.”라고 말하는 산드라와 “의무감이 아냐. 널 택해서 기뻐.”라고 응답하는 안느, 정확히 그 사이다. 우리는 카메라의 위치에 앉아 차 안을 빠져나가지 못하는 로큰롤 음악의 지분을 나눠가지며 문제적 사태를 낭만적으로 봉합한다. 다르덴은 그 봉합의 순간을 ‘잠시’로 묶어둠으로써 <내일>의 비극을 극대화한다.  

켄 로치는 더욱 정확하게 신자유주의 체제가 만든 초국적 불행의 풍경을 조형한다. 앞에서 언급한대로 <나>의 오프닝씬은 2분 30초간의 암전으로 시작된다. 다니엘은 관공서에서 질병수당 신청을 하는 중이다. 이때 다니엘뿐만 아니라 관공서의 심사자 역시 자기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다. 심지어 그 심사자는 암전이 끝난 이후에도 우리에게 정체를 들키지 않는다. 추측일 뿐이지만, 영어 발음과 억양에 유념하면 그녀는 동남아시아와 같은 전혀 다른 국적의 사람인지도 모른다. 그녀가 질병의 경중을 가늠하기 위해 다니엘게 묻는 질문들은 하나같이 형식적이다. “혼자서 50미터 이상 걸을 수 있나요?”, “모자를 쓰듯 양팔을 높이 올릴 수 있나요?”, “의사소통에 어려움을 겪은 적 있나요?”, “배변 장애가 생길 정도로 통제력을 잃은 적 있나요?” 질병의 중함을 증명하기 위해 적절한 답변을 구성하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그를 둘러싼 사회만큼 유연하지 못한 그는 받은 질문의 우스꽝스러움과 심사자의 태도만을 공격한다. 

심사자의 국적 혹은 태생이 궁금했던 이유는, 영국정부가 복지수당 수급 심사 업무를 미국기업에 맡겼다는 정보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영국의 고용연금부는 외국 파견업체 인력을 사서 자국민을 위한 복지 서비스를 감당하고 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심사자의 질문과 태도에서 드러나는 문제성이 재인식된다. 자국민의 생명을 다루는 관광서의 현장에까지 다국적 민간 기업이 침투해 있는 상황으로부터 <나>는 재해석되어야 하는 것이다. 바꿔 말해 우리는 다니엘의 고투를 늘어놓기 전에 공공영역의 민영화 과정이 전지구화된 통치성의 한 양상이라는 것을 읽어내야 한다. 그 관점에서 <내일>을 보면, 산드라의 세계도 케인스주의적 국가 운영의 쇠퇴로 실업 증가와 재분배 기능의 약화가 나타난 현실과 닿아있다. 그렇다면 <나>는 거기서 더 나아가 복지 시스템 내에까지 초국적 효율화의 논리가 파고들면서 사회적 불안정성이 증대된 현실 위에서 출발한다고 할 수 있다.(4) 

<나>에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인물 중 하나는 다니엘의 이웃으로 살아가고 있는 흑인 이민자 청년이다. 영화 속에서 ‘차이나’로 호명되는 그는 이름처럼 광저우 공장 직원이 빼돌린 운동화를 싸게 밀수하며 살아간다. 세관을 무사히 통과하는 방법, 곧 법과 제도의 틈새에 기생하면서 이익을 편취하며 생활하는 셈이다. 그는 그런 비합법적 영역에 거주하면서도 다니엘과 진심어린 연민을 나누는 사이다. 원칙주의에 매몰된 관료제의 빈구멍에 기생하면서도 부도덕하게 볼 수만은 없는 아이러니한 인물인 것이다. 푸코는 신자유주의 통치술이 견고해진 상황에서 이제 호모 에코노미쿠스의 경제학은 “환경의 가변항에 대한 개인의 체계적 반응의 총체”(5)라고 설명한 바 있다. 여기서의 ‘체계적 반응’이란 시대 흐름에의 유연한 적응 혹은 일사분란한 수용과 다르지 않다. 그렇게 보면, ‘차이나’는 가까운 생활 세계의 변화에 영민하게 적응하면서도 이웃에 대한 연민을 잃지 않는 우리 시대의 기이한 초상이라고 할 만하다.

그와 대조하면, 다니엘은 신자유주의의 생명정치 기획과 끝까지 불화하는 인물이다. 그는 영화가 진행되는 내내 관공서의 복지 시스템에 전혀 적응하지 못한다. 굳이 구분해서 말하면, 다니엘은 뉴캐슬 지역 공동체의 내부인이면서 그 사회에 부적응함으로써 관료제의 비인간성과 복지 시스템의 부조리를 드러내는 인물이다. 한편 케이티는 뉴캐슬 공동체 외부에서 들어와 그곳의 문제성을 삶으로 반사하는 존재다. 공통적인 것은, 그들이 복지시스템의 사각지대로 속절없이 밀려나 생계마저 위협받고 있다는 점이다. 켄 로치의 저항감은, 그들이 서로가 아니면 희미한 구원의 기미도 얻지 못하는 데서 분출한다.  

<나>에는 인상적인 점프컷 장면이 있다. 다니엘은 관공서 전산실을 찾아가 인터넷으로 구직 수당을 신청하려 한다. 그러나 직원에게, 옆에 앉은 익명의 이웃에게, 하다못해 지나가는 사람에게 도움을 청하지만 다니엘은 신청 과정에서 생긴 오류를 끝내 바로잡지 못한다. 켄 로치가 장면의 연속성, 연대기적 시간성을 깨뜨리며 그의 액션을 부자연스럽게 반복시킨 이유는, 그가 ‘지금 여기’와 얼마나 불화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려는 의도다. 실제로 그는 ‘커서’, ‘스크롤 바’, ‘클릭’ 과 같은 기초용어에도 적응하지 못한 상태다. 톱과 나무에 숙련되어 온 지난 40여년은 그 순간 전혀 무의미하다. 이 장면은 시대에 뒤떨어진 이가 경험할 수밖에 없는 테크노스트레스(techno-stress)를 강조하려는 게 아니다. 정책을 입안하고 집행하는 자들에게는 그러한 수당신청 방식이 효율적인 시스템이지만, 수혜를 입어야 할 대상자 중 일부에게는 자신들을 효율적으로 배제시키는 시스템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나>를 꼼꼼히 보면 다니엘은 질병수당과 구직수당 수급 문제로 정확히 일곱 번 관공서를 방문한다. 그런데 그는 마지막 일곱 번째 방문 때에 화장실에서 쓰러져 삶을 등진다. 질병수당 심사 결과에 항고하기 위해 찾아간 자리였고, 복지사에 따르면 반드시 이길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결국 그가 심사관들 앞에서 읽으려 했던 쪽지는 유언장이 되고 만다. 다니엘의 장례식 때 케이티는 그 내용을 또박또박 읊어나간다. 그렇게 얼굴 없는 목소리로 시작된 <나>는 얼굴에 더해 목소리마저 잃은 자의 묵직한 울분으로 끝난다. 자기 정체감과 효능감, 자존심을 잃지 않기 위해 싸우다가 ‘말할 수 없는 자’가 되어 버린 다니엘의 침묵은 그렇게 더 강력한 언어를 획득한다.   

<나>가 정서적으로 더 뜨거운 온도에 도달하는 까닭은 다니엘의 죽음이 ‘부당하다’는 인상을 남기기 때문이다. 그는 절차적·형식적 원칙에 의해 움직이는 복지 시스템으로부터 끝까지 연민을 받지 못한다. 그러나 그 자신은 뉴캐슬로 이주해오자마자 궁지에 몰린 케이티와 그의 어린 남매에게 한없는 연민을 보낸다. 케이티를 관공서에서 마주친 첫날, 자신의 처지가 생각난 그는 그녀의 짐을 들고 집에까지 데려다주고는, 그것도 모자라 집 안 변기를 고쳐준다. “전기요금으로 쓰세요”라는 쪽지와 함께 20파운드를 남기기까지 한다. 수입도, 연금도, 주택보조금도 없고 가스 전기요금 독촉장까지 날아드는 판에 그가 케이티 가족에게 품은 연민은 차라리 사치다. 그렇게 보면 다니엘은 신자유주의 통치술이 복지의 영여까지 잠식해 들어온 사회에서 진정성있는 복지란 무엇인가를 몸소 실천하는 인물이다. 

드디어 이 질문을 할 때가 됐다. <내일>과 <나>에 등장하는 공동체가 산드라와 다니엘에 대해 겪는 고통은 단지 ‘도덕적 딜레마’인가. 양심에 비추어 이웃을 향해 실천하면 좋을 그 무엇을 찾아내는 게 두 영화의 목적인가. 다르덴과 켄 로치가 요청하는 것은 초국적 질서로부터 파생된 이웃의 불행에 대해 개개인이 ‘인간적 도리’를 잃지 말자는 교훈을 초과한다. 당연한 것부터 말하면 효율화의 규칙, 경쟁의 원칙 이전에 인간의 삶이 존재한다. 호혜적 공동체로서 ‘우리’가 될 수 있는 틀림없는 길은 내부 구성원의 도덕적 양심이나 그들 간의 연대에 의해 낭만적으로 닦이지 않는다. 우리의 욕망과 의지, 우리의 형편과 사정은 이미 자본에 의존하고 있고 언제든 크게 요동칠 수 있다. 그래서 부조리하고 은밀한 신자유주의의 통치술을 되돌려주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제도와 규칙, 합의가 필요하다. 그러했을 때 다니엘이 살아보지 못한 희망의 내일을, 산드라만이라도 살 수 있을 것이다.    

  
 
지속 가능한 자아의 훼손: 이것은 윤리에의 요청이 아니다

<내일>에서 산드라가 복직 의지를 피력하며 마지막으로 만난 동료는 알퐁소다. 의미있는 정보 하나를 보태자면 그는 계약직이다. 밤늦은 시간 세탁소까지 찾아와 복직의 길을 투표로 열어달라는 산드라에게 알퐁소는 한 표를 약속한다. 그런데 “내일 봐”라는 인사와 함께 세탁소를 나서려는 산드라를 그가 다시 불러 세운다. 그녀를 따라나서던 카메라도 되돌아와 화면은 다시 투샷이 된다. 갑자기 그는 “내 표 없으면 과반수 안 돼?”라고 망설인다. 반장이 투표 내용을 취조할 수 있어서 이래저래 트집잡히면 9월 말 재계약이 힘들어질 수도 있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산드라의 복직에 투표하겠다던 결심을 철회하진 않는다. 그 투샷의 의미는 “너도 나처럼 반장이 두렵구나”라며 공감하는 산드라의 대사로 일단락된다.

이 씬은 다음 씬과의 연결관계 속에서 다시 해석돼야 한다. 투표 결과는 8대 8. 산드라는 자신의 복직을 지지하는 한 명을 더 만들지 못해 공장을 떠나게 된다. 그런데 자신에게 투표한 동료들에게 인사한 후 자기 짐을 챙겨 집으로 가려던 찰나, 사장이 그녀를 부른다. 이번엔 사장과 산드라 사이의 투샷이 완성된다. 사장은 팀원들 간의 화합을 위해 보너스도 나눠주고 산드라도 복직시키겠다고 말한다. 그러나 당장은 복직이 안 된다는 단서와 함께 9월말에 계약직 직원을 내보내고 나면 그 자리로 와서 16번째 직원이 돼달라고 말한다. 그 말에 산드라가 거부감을 드러내자 사장은 알퐁소를 내쫓는 것이 해고가 아니라 재계약 거부일 뿐이라고 설명한다. 그 순간 산드라는 단호한 표정으로 “안녕히 계세요”라는 말만 남기며 사장의 방을 나선다. 사장과 산드라를 엮어놓은 평범한 투샷은 그렇게 붕괴된다. 중요한 것은, 산드라의 망설임없는 결단을 전날 밤 알퐁소의 망설임에 대한 윤리적 답장으로 봐야 한다는 사실이다. 

이 윤리적 답장은 산드라를 압박했던 세계에 대한 가장 높은 수준의 복수다. 그래서 그녀는 공장을 나서는 중 남편과 통화하며 “우리 잘 싸웠지? 나 행복해”라고 말한다. 그녀의 투쟁은 알퐁소와 같은 존재를 생계의 바깥으로 내모는 데 주저함이 없는 권력, 곧 신자유주의의 생명권력을 향한다. 돌이켜보면 최대의 생산성을 위해 ‘16명이면 족하다’는 시장원리를 내면화하게 한 것도 그 불온한 생명권력이다. 같은 상황을 다른 관점으로 설명하면 산드라도, 다니엘도 베넷 해리슨이 경계한 ‘조급한 자본(impatient capital)’과 투쟁해 왔다고 할 수 있다. 조급한 자본이 재편한 세계에서는 단기간에 이익의 극대화를 노리면서 시장의 급격한 변화를 주도하는 세력들이 지탄받지 않는다. 이 세계에서는 임의적인 단기질서로 존재하는 경제망을 관철시키는 과정도 시장의 ‘역동성’으로 해석된다. ‘단기’, ‘계약’, ‘임시’로 살아가는 삶을 정당화하고 규율하는 권력은 그렇게 명분을 얻는다.(6) 

언제든지 해체와 재편이 수월한 조직 구조를 갖추는 것은 그들의 우선적인 목표다. 그렇다면 조직과의 중장기적인 동행을 전제로 형성될 수 있는 충성이나 헌신, 신뢰와 같은 가치는 그 의미가 반감될 수밖에 없다. 지속 가능한 자아(sustainable self)의 훼손은 그 ‘의미반감’의 효과다. 전혀 다른 입장에서 다른 경로를 거쳤지만 알퐁소와 산드라, 다니엘과 케이티가 도착한 곳은 바로 거기, 자기 인생을 먼 안목에서 설계하고 통제할 수 없는 그 자리다.

그래서 슘페터가 기업가 정신의 핵심이라고 말한 ‘창조적 파괴(creative destruction)’가 노동자에게 미치는 영향은 양날의 검이다. 다음 순간의 결과를 계산하거나 통제할 수 없더라도  개의치 않고 자신과 조직을 끊임없이 갱신하라는 말(7)은 누군가의 희생을 전제로 한다. 기업은 산드라를 복직시키지 않거나 알퐁소와 재계약하지 않기 위한 수많은 이유를 발명할 수 있다. 공동체가 다니엘과 케이티를 도울 만한 여유가 없다고 결심하면, 수당 지급을 위한 심사 문항들만 유연하게 조정하면 된다. 그래서 산드라의 우울증도 심상치 않아 보인다. 약을 털어 넣고 나서야 숨을 쉴 수 있는 산드라의 어떤 순간에 그를 규율해온 세계가 비치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녀는 ‘조급한 자본’의 위력에 끌려 다니는 삶, “거지가 된 기분”을 하루에도 몇 번이고 맞닥뜨려야 하는 현실을 벌써 오래도록 앓아오지 않았을까. 

그런데 <내일>은 기존 다르덴 영화가 내보이던 ‘윤리에의 요청’을 조금은 다른 방식으로 풀어놓는다. 가령 다르덴의 핸드헬드는 인물의 측후방을 따라다니며 성찰적 거리를 만들어 왔다. 그것은 비극에 내던져진 인물의 현실을 놓고 우리의 입장을 점검하게 하는 한 방식이다.  인물이 견디고 있는 예외적인 불행에 책임적 주체가 되길 바라는 제스처가 거기 있다. 예를 들어 다르덴은 우리 가까운 곳에 좀도둑질을 끊지 못한 채 갓 태어난 자기 아기를 팔아 돈을 구하는 브루노(<차일드>)가 있다고 말한다. 불법이민과 위장결혼을 통해서라도 꿈에 다가가고픈 로나(<로나의 침묵>)의 선택이 안타깝지 않느냐고 말한다. 

그런데 <내일>은 우리를 산드라의 처지에 더욱 밀착시킨다. 산드라의 감정이 적나라하게 읽히는 정면 쇼트들, 동일시를 요구하는 쇼트가 빈번한 까닭은 거기에 있다. 심지어 동료들에게 어려운 부탁을 해야 한다는 사실에 주저하는 산드라를 두고 카메라는 먼저 저 만치 앞서 가 주저하는 그녀의 내면을 읽게 한다. 이러한 적극성은 지금 산드라에게 들이닥친 고통이 초국적 관객 다수가 경험중이거나 조만간 경험할 수도 있을 것이란 확신과 연결된다. <내일>의 카메라는 평범한 우리가 갖고 있는 경험적 감정을 산드라에게 능동적으로 비춰보게 하는 전략에 충실한 셈이다. 요컨대 <내일>은 편재하는 불행을 재체험시키며 지속 가능한 자아의 훼손이 벌어지고 있는 ‘도처’를 상상하게 한다. 

<내일>의 인물구도 역시 기존 다르덴 영화와의 비교 속에서 좀 더 침착하게 들여다봐야 한다. 다르덴 영화에서 절망으로 침잠해가는 주인공들은 기댈 이웃을 좀처럼 만나지 못한다. <로제타>에서 로제타를 지켜보는 남자친구 리케나 <아들>의 올리비에는 증오와 연민 속에서 내적 고투 중이다. <더 차일드>의 브루노와 소냐는 결국 더 끈끈하게 결속되지만 그들 바깥에서 구원의 손길을 만나지 못한다. 물론 <자전거 탄 소년>으로 오면, 희망없는 소년 시릴 곁을 끝까지 지켜주는 사만다를 볼 수 있다. 그런데 <내일>의 안느는 서사분량은 크지 않지만, <자전거 탄 소년>의 사만다 못지않게 각별한 역할을 한다. 

그녀와 산드라는 문제의 주말에 세 번 만난다. 두 번은 산드라가 찾아가고, 한 번은 안느가 찾아온다. 그 순간의 카메라는 매우 세밀하게 그들 사이에 흐르는 감정의 맥락을 묘사해낸다. 첫 번째 만남에서는 안느도 “보너스 포기한 사람 몇 명이야?”부터 묻고 남편과 상의 결과 집수리에 보너스가 필요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고 말한다. 산드라의 절박한 처지에서 바라보면, 집을 수리하는 행위는 최소한의 필요라기보다는 잉여의 실천이다. 그런데 이 씬이 끝나기 전, 안느는 “거절하려니 너무 마음에 걸려” “금요일 이후 너무 신경쓰였어”라며 산드라에게 남편을 설득해 보겠다고 말한다. 

산드라와 안느의 두 번째 만남은 줄리앙에게 처참하게 거부당한 산드라가 안느의 집을 다시 방문하면서 성사된다. 이 만남에서 산드라는 안느의 폭력적인 남편을 마주한다. 그는 안느에게 보너스를 수급할 것을 명령하듯 종용한다. 이후 산드라는 완전히 실의에 빠져 동료 설득작업을 그만두겠다고 남편에게 말한다. 집으로 돌아온 산드라는 아이들의 방을 깔끔하게 정리하는가 싶더니 안정제 한 통을 입에 쏟고는 자살을 시도한다. 산드라가 죽음으로 가는 길목에 들어선 그 무렵, 안느가 산드라의 집에 찾아오면서 세 번째 만남이 이뤄진다. 그래서 물리적으로 산드라를 구원한 것은 안느다. 그 후 산드라는 병원치료로 날이 저물었음에도 나머지 동료를 설득하러 가기로 한다. 그때 안느는 남편과 헤어질 결심으로 집을 나왔다고 말한다. 산드라의 복직을 위한 선택이 “나를 위해 행한 첫 번째 결정”이라고까지 말한다.

한편 켄 로치는 사람이 사람에게 희망이 되어줄 수 있다는 믿음을 갖고 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이를테면 다니엘과 케이티는 특별한 우정과 정서적 지지를 주고받는다. 남편이 없는 케이티에게 다니엘은 남편이자 아버지 역할을 해준다. 아내를 잃어버린 다니엘에게 케이티는 빈자리를 달래주는 위로가 된다. 인간적 유대의 측면에서 그들은 더할 나위없는 최선의 관계를 보여준다. 그러나 그러한 인간적 유대는 당면한 생계 문제 앞에서 차선도 될 수 없다. 이를테면 케이티는 자신과 두 자녀를 헌신적으로 보살펴주는 다니엘이 있음에도 몸을 파는 처지가 된다. 다니엘은 집안 거의 모든 가구를 팔고서도 노숙자가 되기 직전에 이른다. 

결국 <나>는 지속 가능한 자아를 지켜내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생존을 위한 ‘정당한’ 복지시스템이 있어야 함을 강변한다. 그리고 그것은 ‘적절한’ 방식과 타이밍에 작동해야 한다. 그런데 효율화의 압력 속에 가속화 된 공공부문의 민영화는 잠재적인 국가 복지 수혜자에게 ‘정당한’이라는 수식어를 앗아간다. 무책임한 제도·기준·원칙·규칙으로 유지되는 관료제와 비인간적 매뉴얼들은 복지 현장에서 ‘적절한’이라는 단어를 소거시킨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약자와 약자 사이의 정서적 유대는 현실 문제 해결에 무기력하다. 앞에서도 느슨하게 이야기했지만, 다니엘과 케이티의 안정적인 생계를 고려할 때, 그들은 서로에게 너무나 희미한 위로다.   

물론 <내일>은 다니엘과 케이티의 가족을 그 ‘희미한 위로’의 순간마저도 절실한 존재들로 그린다. 우선 다니엘과 케이티는 몸과 마음의 정처가 필요한 사람들이다. 다니엘은 아내와 건강, 직장을 한꺼번에 잃었고 케이티는 런던의 노숙자 쉼터에서 어린 데이지와 딜런을 키우다가 새로운 도시(뉴캐슬)로 이제 막 흘러든 인물이다. 영화 초반 다니엘은 혼자 스탠드 불빛에 의지해 집 안에서 목공예를 한다. 그에게 목수라는 직업은 평생의 정체성이었다. 라디오에서는 죽은 아내 몰리와 듣던 BBC 방송, 더 정확히 해상 일기예보 심야방송이 흘러나온다. 주의깊게 들은 관객은 먼 바다의 ‘강풍주의보’ 소식을 알리는 캐스터 목소리를 분별했을 것이다. 그 정보는 이 영화의 귀결에 대한 복선이다. 영화 후반부에 주어진 정보에 의하면, 몰리와 다니엘은 이 방송을 들으며 “오늘은 어딜 항해하지?”와 같은 농담을 나누곤 했다. 그리고 몰리의 유언은 “바람에 기대어 먼 바다로 떠나고 싶어. 원하는 건 그뿐이야”였다. 

다니엘은 영화 중후반에 데이지가 머무는 창문에 자신이 만든 나무 물고기 모빌을 달아준다. 다니엘에게 그 모빌은 아내의 마지막 모습에 대한 윤리적 애도의 기표다. 목수로서의 자기 정체성이 담긴 심미적 오브제이기도 하다. 나무 물고기 모빌은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케이티 집에서 유난히 햇빛이 잘 드는 창문 앞에 달린다. 다니엘이 데이지에게 “바닷속 같을 거야. 볕 잘 드는 바다지”라고 말하는 순간은 인상적이다. 그간 집적돼온 상징적 이미지들이 시적 조화에 이르기 때문이다. 이후 어느 날, 다니엘은 ‘항해’라는 곡이 녹음된 카세트테이프를 데이지와 딜런에게 건넨다. 여느 때처럼 해상 일기예보 심야방송을 듣다가 순간적으로 녹음한 것으로 거기엔 몰리와 함께 했던 추억의 시간까지 보존되어 있다. 켄 로치는 이러한 심미적 상징물이 윤리적 맥락을 획득하는 순간을 통해 인물들의 서로를 향한 진심을 부각시킨다. 우리도 우리 이웃에 대해 책임적 주체가 되어줄 수 있을 것 같은 희망의 풍경은 그렇게 도착한다. 

<나>가 범상치 않은 영화인 것은, 그런 희망의 풍경으로 마무리된 시퀀스 이후에 나락으로 떨어지는 상황을 배치한다는 데 있다. 관공서의 복지 시스템은 다니엘과 케이지의 불행한 사연에 무정하다. 다니엘과 케이티의 세계는 매뉴얼대로 신청을 받고 기준대로 심사를 하며 원칙대로 결과를 전하고 효율적으로 행정절차를 완수하는 것에 충실할 뿐이다. 그런 세계에 대하여 다니엘과 케이티가 헌신, 충성과 같은 장기적 성격의 태도를 갖는다는 것은 오히려 비합리적이다. 결과적으로 다니엘은 신자유주의의 질서와 비인간적인 공공서비스가 만나는 지점에서 죽는다. <나>는 ‘희미한 위로’와 ‘선명한 절망’을 교차시키다가 완전한 불행의 한 점으로 수렴되는 멜로드라마인 것이다. 

영화 중반, 다니엘은 식료품 지원소에서 케이티의 절망을 목격하고 돌아가는 길에 한통의 전화를 받는다. 간절히 기다렸던 질병수당 심사 통보 전화다. 그 전화는 배제된 자에게 목소리를 허락하지 않는 무정함의 세계를 감각시킨다. 녹음된 메시지로 읊어지는 언어를 요약하면 ‘곧 편지가 갈 텐데 노동이 가능한 건강 상태라 당신은 질병 수당 수령 자격이 없다’쯤 된다. ‘자세한 사항은 인터넷으로 확인 하세요’라는 말은 일말의 친절처럼 느껴진다. 수동적 ‘적응’만을 요구하는 이 일방적 세계는 늙은 다니엘에게 너무 간편해서 잔악하다. 

그 잔악함은 구직수당을 받기 위해 이력서 강좌를 듣는 순간에 이미 확인된 바였다. 이력서 강사가 짚어준 핵심 포인트는 “밀려나면 안 됩니다”, “눈에 띄십시오”, “영리해 지세요” 라는 세 마디로 집약된다. 다니엘은 그 조언을 전혀 다른 곳에서 실천한다. 이제 노숙자가 될 상황까지 몰렸지만 형편에 맞는 어떤 수당도 타낼 수 없게 된 다니엘은 관공서 벽면에 거대한 낙서를 한다. 그 낙서는 정확히 밀려나면 안 되는 자가 눈에 띄기 위해 내놓은 최선의 아이디어다. “굶어죽기 전에 항고일 배정을 요구한다. 상담 전화의 구린 대기음도 바꿔라”

그 순간 다니엘의 가까운 미래를 환기시키는 한 노숙자가 다가와 자기 겉옷을 벗어준다. 켄 로치의 정치적 자의식은 그 노숙자의 입에서 직설적으로 토로된다. 노숙자는 영국 보수당을 대표하는 원로이자 고용연금장관을 지낸 이언 덩컨의 실명까지 거론하며 세계를 비꼰다. 이 유난한 사건 앞에서 익명의 이웃으로 자리한 군중과 공권력을 대표하는 경찰은 전혀 다른 반응을 보인다. 켄 로치는 군중의 환호를 받으며 경찰차로 끌려가는 다니엘의 모습에 감정을 불러 모은다. 그 장면에서 다니엘을 기물파손과 공공질서법 위반자로 분류한 세계가 회의된다. 

영화 말미 다니엘의 보살핌을 그리워하던 데이지가 다니엘의 집을 찾아온다. 데이지의 손에 들린 것은 간단한 먹거리와 딜런이 전해달라고 한 사탕이었다. “우릴 도와주셨죠? 저도 돕고 싶어요”라는 데이지의 말은 감동 이전에 슬픔이다. 그 언어는 집 안 가구를 모두 팔아 폐가처럼 비치는 다니엘의 텅 빈 집 안을 공허하게 떠돈다. 그 순간 우리는 앞에서 이미 언급했던 그 논제로 되돌아간다. 구성원의 불행을 다른 구성원의 선의에 맡기는 공동체를 언제까지 용인할 것인가. 재차 말하지만 공동체 구성원의 지속 가능한 복지는 개인의 역능으로 불가능하다. 구성원 간의 진심어린 위로와 공감은 ‘확실한 제도’ 이후에 권장되거나, 그와 더불어 필요한 것이다. 다니엘의 유언이 된 재심사 항고문 안에는 “나는 다니엘 블레이크, 개가 아니라 인간입니다.”라는 구절이 있다. 지속 가능한 자아를 유지하는 게 현실에서 불가능했던 다니엘의 그 말은 단순히 윤리에의 요청이 아니다. 분명한 방향성을 가진 저항에의 독려다. 

  
 
자기 경영 주체의 퇴로 

다르덴 영화가 ‘차가운 영화’라면, 켄 로치의 영화는 말 그대로 ‘뜨거운 영화’에 해당한다. 그런데 <내일>은 뜨거운 순간을 굳이 배제하지 않는 ‘차가운 영화’였다. 켄 로치의 <나>는 마지막 뜨거운 언어들에 힘을 싣기 위해 차가운 과정을 침착하게 밟는 영화였다. 두 영화가 동질적으로 보이는 결정적 이유는 등장인물 중 많은 수가 신자유주의 질서의 효과로 형성된 자기 경영 주체의 면면을 가시화하기 때문이다. 가령 <내일>에 등장하는 사장과 반장, 동료 절반은 정확히 자기 경영 주체의 전형에 해당한다. 그들은 외부로는 본능적 경쟁에 투신하면서 내부로는 자신에 대한 투자와 리스크 관리를 기민하게 해나가는 인물들이다. 시장 원리는 그들을 그렇게 적응시켰고 사회적 배제의 불안은 그들의 태도를 길들였다. 그들의 욕망은 조작적으로 배치되었고 거미줄 같은 관계망과 책임적 상황들은 그러한 ‘조작’을 은폐해갈 것이다. <나>는 그러한 메커니즘이 공공의 질서로 고정된 흔적이 매우 역력하다. “사회는 없다”는 마거릿 대처의 유명한 선언이 더 이상 의심되지 않는 세계가 거기 있다.

그 관점을 연장해서 보면 다르덴의 영화 세계 내에서는 ‘투자-이익 창출’로 설명되는 관계와 그 정반대의 관계가 반복되어 왔다. 정반대의 관계는 <내일>에 등장하는 산드라와 안느를 통해 확인한 바다. ‘투자-이익 창출’ 관계는 <로나의 침묵>의 로나 이야기를 부연해도 좋겠다. 미래의 꿈(남자친구와의 식당 운영)을 위해 벨기에 시민권을 얻고자 그녀는 클로디와 위장결혼을 한 상태다. 로나와 클로디 관계의 출발은 ‘투자-이익창출’ 관계의 한 극단쯤 되는 셈이다. <더 차일드>도 아이를 팔아서 돈을 번 천성적인 좀도둑 브루노가 이번에는 아이를 되찾기 위해 돈을 외면해가는 이야기였다. ‘투자-이익 창출’의 본능에 오염된 자기 자신과 극단적인 관계망을 어떻게든 역전시켜야 한다는 절박감이 거기 있는 것이다. 

켄 로치의 영화는 이때의 절박감을 저항의 동력으로 활용해 왔다. <나>에 등장하는 관공서의 부조리한 절차를 용인한다면 또 다른 다니엘과 케이티를 앞으로도 구원할 수 없을 것이다. 비교적 정확한 추측을 하자면, 우리 중 다수는 현실에서 켄 로치처럼 늙기 어려울 것이다. 알려진 사실들을 조합해 보면, 켄 로치는 영화로부터 은퇴하더라도 정치투쟁에서는 은퇴하지 않을 사람이다. 그가 주도해서 만들어진 좌파정당 ‘레프트 유니티’는 긴축재정을 위해 가장 먼저 복지 예산을 줄여온 영국정부와 앞으로도 싸워갈 것이다. 

켄 로치의 정치적 입장에 보조를 같이 하는 삶, 사회주의자의 투쟁적 자의식에 기초해 저항을 포기하지 않는 삶은 쉽지 않은 결단을 요한다. 그가 동의하지 않겠지만 그것은 ‘선택’의 문제일 것이다. 그러나 제도적 모순을 민감하게 살피며 이웃에게 ‘희미한 위로’라도 되어주는 삶은 아주 멀리 있는 게 아니다. 그런 생활을 습관으로 하면서 그 습관들이 모여 사회의 습속이 외는 과정을 꿈꿀 수 있다면 우리는 켄 로치가 기대한 최선의 공동체 속에서 ‘최소한’의 자격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서두의 질문, 곧 도덕적・윤리적으로 서로에 대한 하자를 갖지 않는 생활 속에서 ‘우리’의 현실적 용례가 가능한가에 관한 질문도 거기서 첫 단추가 맞춰진다. 

<내일>과 <나>의 전언이 만나는 접경지대에서 <내일>의 마지막 쇼트를 다시 생각해 본다. 그 장면에서 다르덴은 카메라를 공장에 위치시킨 채 떠나가는 산드라를 지켜보게 했다. 영화가 거기에서 끝나기에 공장에 남아 그곳을 살아내야 하는 것은 결국 카메라의 시선 주체인 관객, 곧 우리다. 어쩌면 다르덴은 영화가 진행되는 도중 투표하지 않은 숨겨진 열일곱 번째 시민을 상상했는지도 모른다. 과반을 위해서는 한 명이 더 필요한데 당신과 나는 이제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우리의 생활세계 내에도 흔하디흔한 다른 얼굴의 산드라가 있다. 당신은, 또 나는 그(녀)에게 틀림없는 항우울제가 되어 줄 수 있을 것인가. 머뭇거리는 사이에 한 발짝씩 더 밀려나고 있는 그(녀)들을 마중하는 방법은 그 고민에 가닿는 진심에 의해 개발될 것이다.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글·안숭범
영화평론가.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시인. EBS <시네마천국>을 진행했으며, 문화콘텐츠 기획 및 인문학적 비평에 매진하고 있다. 

 

(1) “if no one among us is capable of governing himself, then who among us has the capacity to govern someone else?” Reagan, Ronald., The Inaugural Address, 1981
(2) Foucault, Michel, History de la sexualite I, 이규현 역, 『성의 역사 1- 앎의 의지』, 나남, 2004, pp.159-160
(3) Foucault, Michel, History de la sexualite I, 이규현 역, 『성의 역사 1- 앎의 의지』, 나남, 2004, pp.161
(4) 佐藤嘉幸, 新自由主義と権力 :フーコーから現在性の哲学へ, 김상운 역, 『신자유주의와 권력』, 후마니타스, 2015, pp.28-29.
(5) Foucault, Michel, Naissance de la biopolitique, 오토르망 역, 『생명관리정치의 탄생』, 난장, 2012, p.370
(6) Sennett, Richard, The Corrosion of Character, 『신자유주의와 인간성의 파괴』, 문예출판사, 2002, p.27.
(7) Sennett, Richard, The Corrosion of Character, 『신자유주의와 인간성의 파괴』, 문예출판사, 2002, p.38.

* 글 출처: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 르몽드 시네마 크리티크

http://www.ilemonde.com/news/articleList.html?sc_sub_section_code=S2N40&view_type=sm

 

0

추천하기

0

반대하기

첨부파일 다운로드

등록자서성희

등록일2018-10-09

조회수4,248

  • 페이스북 공유
  • 트위터 공유
  • 밴드 공유
  • Google+ 공유
  • 인쇄하기
 
스팸방지코드 :
번호제목등록자등록일조회수
342[정재형의 시네마 크리티크] 가짜의 세상에서 가짜를 노래하다: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사랑을 카피하다'

서성희

2018.12.316,431
341[손시내의 시네마 크리티크] 포장되지 않는 삶, 타마라 젠킨스의 '프라이빗 라이프'

서성희

2018.12.315,553
340[남유랑의 시네마 크리티크] “스릴러라는 불가능한 이름을 넘어서서, 예술 그 자체에 대한 물음을 촉구하는 자리로” - <108: 잠들 수 없는 시간>

서성희

2018.12.314,028
339[장석용의 시네마 크리티크] 리처드 론크레인 감독의 <해피 댄싱> - 황혼 무렵에 풀어보는 삶의 방정식

서성희

2018.12.314,091
338[서성희의 시네마 크리티크] 무사히 할머니가 되고 싶은 두 자매 이야기 <어른이 되면>

서성희

2018.12.313,841
337[정동섭의 시네마 크리티크] 콜롬비아 마약왕에 대한 또 다른 클리셰 - <에스코바르>

서성희

2018.12.313,646
336[송아름의 시네마 크리티크] 그 지긋지긋함에 몸서리치면서도 - <밍크코트>

서성희

2018.12.313,087
335[서곡숙의 시네마 크리티크] <안녕, 나의 소녀 시절이여>

서성희

2018.12.313,559
334[안숭범의 시네마 크리티크] ‘공간-인물’로 읽는 사랑의 유형학- <쓰리 타임즈>로 허우 샤오시엔 읽기

서성희

2018.12.314,273
333[최재훈의 시네마 크리티크] 나그네라도 길 위에서 잠시 쉬어가야 한다, <에브리띵 윌 비 파인>

서성희

2018.12.314,0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