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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아름의 시네마 크리티크] 소비되는 청춘과 곡해되는 청년 - <버닝>의 공허한 칼날에 대해

 
 
청춘은 비유적인 단어이지만 청년은 지시적인 단어이다. 봄에 기대는 청춘은 무한정한 자유와 무작정한 화사함을 전제할 수 있지만, 으레 그 안에 속해있을 것이라 상정되는 청년은 나이도 성별도 역할도 강제된다. ‘청춘들’이라고 호명되는 이들이 누릴 수 있다고 떠올리는 것을 ‘청년들’이라 불리는 이들이 꿈이라거나 배부른 소리라 일축해버리는 것은 이 때문이다. 앞을 제대로 보지 못할 만큼 어깨 한가득 옷더미를 짊어진 채 걸어가던 종수(유아인)가 자신을 알아봐준 어릴 적 친구 해미(전종서)를 만나 술을 마실 때, 그러니까 오랜만에 일상을 벗어난 그 순간조차 계산을 하며 영수증과 포스기를 번갈아 살피고 당황할 수밖에 없는 것은 비슷해 보이지만 전혀 다른 이 두 단어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영화 시작 10분이 채 되지 않아 등장한 이 장면은 영화 <버닝>의 해석에 대한 두 개의 단서를 준다. 하나는 위에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버닝>이 이 두 단어를 혼용할 생각이 전혀 없는 영화라는 점이다. 이창동 감독이 ‘젊은이’나 ‘젊은 세대’, ‘청년’ 등으로 언급한 한 내용들이 ‘청춘’이라는 표제어를 달고 옮겨지긴 했지만 이 영화는 분명히 청년에 대한 것이다. 그리고 이 장면은 <버닝>이 분명히 그어놓은 선 안에 들어온 청년의 삶이 그리 녹록치 않은 곳에 있으리라 짐작케 한다. 그렇다면 이어지는 질문은 <버닝>이 청년들이 팍팍한 삶 속에 놓인 이유를 무엇으로 삼고 있느냐일 텐데 이것은 바로 위의 장면이 가리키는 두 번째 단서에서 드러난다. <버닝>은 청년과 돈이 끔찍하리만큼 끈끈한 관계 속에 놓여 있으며, 청년의 흔들거림의 극점에 경제적 문제가 있다는 점을 지시하고 있다. 

  
 
사실 현재 ‘청년’의 뒤를 잇는 단어들로 ‘실업’, ‘주거환경’, ‘취업 지원(금)’ 등을 떠올리는 것이 어색하지 않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청년과 경제적 문제를 연결 짓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해미의 방을 처음 방문한 종수가 자신의 얼굴에 볕 한 점 걸쳐주지 못하고 두 사람이 서있기에도 버거운 방을 보며 그래도 여기는 괜찮다고, 자신이 예전 살던 곳은 싱크대 옆에 변기가 있었다고 말하는 장면에서 우리가 기사에서 보았던 어떤 자취방의 사진을 떠올렸다면, <버닝>이 전제하고 있는 청년의 상은 너무도 명확해진다. 즉 <버닝>은 2018년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20-30대 청년을 서울에서는 집도 아닌 방에서 살 수밖에 없는 이들로 설정하고, 그들이 향할 수 있는 분노의 끝에 돈을 위치시킨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사실 여태까지 청년들을 고립시키고 손가락질 해 온 가장 피상적인 것이라는 점에서 의아할 뿐이다.

<버닝>의 원작인 무라카미 하루키의 「헛간을 태우다」의 화자 ‘나’와 종수는 나이나 기혼/미혼 등의 차이가 있지만 가장 크게 변화하는 것은 종수가 주변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감정을 드러내는 이로 변화했다는 점이다.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행동을 하는 그녀와 그녀의 애인을 신기한 젊은이들에 대한 호기심으로 대했던 것에 그쳤던 「헛간을 태우다」 속 ‘나’는 해미를 사랑하며 소유하고 싶어 하고 그것을 방해하는 벤을 끊임없이 견제하며 분노를 내뿜는 종수로 다시 빚어 놓았다. 그렇기에 ‘나’도 종수도 그녀의 애인과 벤을 가리켜 무엇을 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돈은 많은,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같다고 이야기 했지만, 전자가 의아함을 바탕으로 한 이야기일 뿐이라면 후자는 냉소와 자학, 불안함까지가 내재된 분노로 귀결될 수 있다. 어떻게 돈이 많은지 알 수 없는 수많은 개츠비 중 한 명인 벤을 향한 분노는 결국 절대 종수가 가 닿을 수 없는 바로 벤의 ‘것들’로 인한 것이다.
 
  
 
종수의 감정을 분노로 이끌 때 그 중심에 돈이 놓인다는 것이 가장 명확하게 드러나는 순간은 물론 벤의 등장으로 완성된다. 혼자 아프리카 여행을 떠났던 해미가 벤과 함께 돌아온 것을 본 종수의 얼굴에서 처음 읽을 수 있는 것은 당황, 질투, 어색함 등이다. 이러한 감정이 해미 옆에 누군가 있을 것이라 생각지 않았던 종수에게서 읽을 수 있는 자연스러운 반응이라면, 함께 식사를 하고 나와 벤의 차를 보았을 때 그리고 해미가 벤의 포르쉐를 타고 떠났을 때 고개를 떨군 채 불안한 음악 속에 종수를 가두는 장면은 그의 감정이 더 이상 해미만을 향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벤의 집을 보았을 때에도, 벤의 친구들을 처음 보았을 때에도, 그리고 해미가 사라진 후 벤의 집 주변에서 그를 염탐을 할 때에도 이제 종수의 얼굴에는 자신을 초라하게 만들 만큼 상상할 수 없는 것들을 당연히 누리는 이들에 대한 분노가 서린다. 

그러니까 종수에게 돈의 결핍은 분노다. 15년 만에 연락한 엄마가 결국에는 돈 때문에 자신을 불러낸 것이라는 사실을 알 때, 그만큼 사람을 파렴치하게 만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얻어내야만 살 수 있는 것이 돈이라는 존재라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한다. <버닝>은 이 같은 종수의 감정이 관객을 향하도록 함으로써 관객 역시 이에 동참하기를 요청한다. 관객들은 벤의 친구들 사이에서 아무것도 모른 채 놀잇감처럼 전시되는 해미를 쫓는 종수의 시선으로 벤의 친구들의 지루해하는 얼굴을, 한편으로는 신기한 것을 바라보는 표정을, 그리고 하품을 하는 벤을 포착한다. 또한 해미가 사라진 후 벤의 뒤를 밟으면서 발견하는 벤은 불길과 경찰과 노동자 혹은 철거민처럼 보이는 이들이 대치하는 전시물들이 놓인 공간을 등지고 가족들과 여유롭게 식사를 하는 이로 관객 앞에 놓인다. 적어도 자신이 청년이라 생각하는 이들은 그 화사한 빛 속에서 식사를 즐기는 벤 보다는 그들 곁에 갈 수조차 없어 멀리서 이들을 바라보는 종수에게 훨씬 쉽고 빠르게 이입할 것이다. 

  
 
그러나 청년을 이야기할 때, 그리고 청년들의 고민과 분노를 언급할 때에 이처럼 ‘돈’을 중심에 놓는 것은 그들이 짊어진 모든 무게를 청년의 탓으로 돌리기에 가장 용이한 점이라는 것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돈만 아는 이기적인 젊은이들, 남을 배려하지 않는 계산적인 세대, 돈이면 뭐든지 하는 무서운 이들, 안정적인 월급을 좇아 공시(公試)로 몰리는 용기도 패기도 없는 무력한 젊음. 이러한 수식들은 돈을 청년 문제의 궁극적인 결과로 놓았을 때 손쉽게 만들어낼 수 있는 프레임이다. 벤에 대한 종수의 감정적 배회, 분노, 의심 등 불편한 것은 이와 같은 청년들에 대한 비난의 연장선상에 종수를 두는 것이 전혀 어색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 현재의 청년들의 분노가 향하고 있는 것은 자신이 노력한 만큼을 얻을 수 있는 공정성이 무너지고 있다는 점이다. 그로 인해 파생될 수 있는 다양한 문제들, 계층의 이동이 불가피 한 것, 일상적으로 누릴 수 있는 자유나 여유의 박탈, 정신적인 패배로 인한 우울과 같은 문제 사이에서 돈 역시 같은 층위로 놓인다. 그러니까 돈은 모든 것의 원인이 아닌 공정성 붕괴의 결과 중 하나일 뿐이다.

청년들이 공시에 몰리는 것은 적어도 시험은 점수로 ‘커트 해주기’ 때문이다. 다른 무엇도 아닌 자신이 시간을 쏟아 붓고 실수하지 않는다면 받아들 수 있는 그 점수가 모든 것을 결정해준다. ‘소확행’이라는 행위가 유행하는 것은 그것이 그만큼 공정하기 때문이다. 내가 들인 노력만큼의 분명한 보상. 그것은 작지만 정확한 방향성을 가지고 나에게 돌아온다. 이 정확한 액션-리액션이 편안하고 옳은 것이라 느끼는 현재의 청년들의 분노는 ‘커트 해’ 주지 않는, 그렇기에 불공정함이 끼어들 수밖에 없는 모든 순간에 존재한다. 그러나 <버닝>은 궁극적인 원인이 아닌 결과를 원인처럼 두면서 청년을 힘겹게 견디도록 한다. <버닝>은 벤과 종수가 왜 다른 삶을 살아야 하는지가 아닌 벤과 종수가 다르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멈추며, 영화의 중반을 넘어가지 않은 시점에서 종수에게 칼자루를 쥐어주며 답을 제시하는 식이다. 정확히 그의 분노가 무엇을 향하는지를 보여주지만 그것은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그저 청년들의 분노를 쉽게 위치시키기에 편리한 방법일 뿐이다. 

  
 
이러한 <버닝>의 청년상 속에서 돈이라는 것이 특별히 반응하지 않은, 애초에 관심도 없는, 그래서 현실의 청년이 될 수 없는 해미는 당연히 어떠한 의미도 부여받을 수 없다. 영화는 해미의 시점으로는 어떤 것도 보여주지 않는다. 벤의 차에 대해서도. 친구들에 대해서도 혹은 그의 집에 대해서도 어떠한 반응도 없는 이로 자리한다. 때문에 해미는 벤을 만나는 것에 거리낌이 없다는 이유로, 벤이 가진 모든 것에 예민하지 않다는 이유로, 이를 불편해 하는 종수의 비난의 시선을 감내해야 한다. 해미는 벤과 함께 종수의 집을 찾아가 술을 마시고 이야기를 하다 노을을 바라보며 옷을 벗고 춤을 춘다. 그리고 벤의 차를 차고 떠나기 전 종수에게 “너 왜 그렇게 옷을 잘 벗어? 창녀나 그렇게 옷을 벗는 거야.”라는 비난을 듣는다. 단 한 번 해미의 얼굴에서 당혹감이 비치게 하는 이 마지막 말은 벤에 대한 종수의 분노를 해미가 도구처럼 받아내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준다. 

벤을 찌른 종수의 칼날이 무디기만 하다고 느껴지는 것은 은유 속에 유영하는 듯 보이는 <버닝>이 그려낸 청년의 상이 너무도 피상적이기 때문이다. 우울과 어스름한 어둠이 영화 내내 함께하고 있지만 그것이 자아내는 감각들이 종수에 대한 단편적인 해석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사실 공허한 이미지들의 나열과 다르지 않다. 2010년대 초중반 사이에 쏟아져 나온 청년들에 대한 영화에서 드러났던 청년들의 예민함을 상기한다면 종수의 어물거리는 말투, 비척비척한 걸음걸이, 텅 빈 눈동자로 드러내는 감정 역시 이미 지나버린 전시라는 느낌마저 든다. <버닝>이 지시하고 있는 것은, 청년들에 대한 그 많은 멍에가 그렇듯, 어딘가 잘못된 곳을 향하고 있다.


<버닝>(2018)
사진출처: 네이버 영화

글: 송아름
영화평론가. 한국 현대문학의 극(Drama)을 전공하며, 연극·영화·TV드라마에 대한 논문과 관련 글을 쓰고 있다. 

* 글 출처: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 르몽드 시네마 크리티크

http://www.ilemonde.com/news/articleList.html?sc_sub_section_code=S2N40&view_type=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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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자서성희

등록일2018-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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