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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형의 시네마 크리티크] 열렬한 사랑을 통해 구원받기 영화 <그녀에게>

 
페드로 알모페도르 감독 <그녀에게>

피나 바우쉬의 쇼 ‘카페 뮬러’의 막이 오르고 관객 속에 남자 간호사인 베니그노와 마흔 살의 작가 마르코가 나란히 앉아 있다. 감동적인 쇼를 보던 마르코는 울컥하며 눈물을 쏟았고, 옆에 있던 베니그노는 그런 감정을 공유하고 싶다고 생각한다.  서로 알지 못하는 두 사람. 공연에 감동한 마르코는 눈물을 흘리고, 베니그노는 그런 그를 바라보며 공감하게 된다. 그러나 아무 관계도 아닌 이들은 아무렇지 않게 헤어진다.  두 남자가 들려주는 아름답고 가슴아픈 사랑 이야기가 시작된다. 


베니그노와 알리샤. 오랫동안 아픈 어머니를 정성을 다해 보살펴 왔던 베니그노. 어머니의 죽음 이후, 그는 우연히 창 밖으로 보이는 건너편 발레 학원에서 음악에 맞춰 춤추고 있는 알리샤를 발견한다. 환한 봄 햇살처럼 생기 넘치는 알리샤. 베니그노는 창문 너머로 그녀를 바라보며 사랑을 느낀다. 하지만 비가 오던 어느 날, 알리샤는 교통사고를 당해 식물인간이 되고, 간호사였던 베니그노는 그런 알리샤를 4년 동안 사랑으로 보살핀다. 그는 알리샤에게 옷을 입혀주고, 화장과 머리손질을 해 주고, 책을 읽어주고... 세상의 모든 이야기를 들려준다.

마르코와 리디아. 여행잡지 기자인 마르코는 방송에 출연한 여자 투우사 리디아에게 강한 인상을 받고 취재차 그녀를 만난다. 각자 지난 사랑에 대한 기억과 상처를 가슴에 묻고 있는 두 사람. 서로의 상처를 이해하고 치유해 주는 사이 그들은 사랑에 빠지지만, 리디아는 투우경기 도중 사고를 당해 식물인간이 된다. 

  
 
거기서 일하는 베니그노를 만나게 된다. 베니그노는 혼수상태에 빠진 젊은 무용수를 간호하고 있었고, 이들 네 명은 이상한 운명을 향해 과거와 미래 속으로 빠져든다.그녀의 곁에 남아 그녀를 돌보기 시작하는 마르코. 그러나 마르코는 그녀와 그 무엇도 나눌 수도 없음에 괴로워한다.

베니그노는 알 수 없는 강간혐의로 감옥에 가게 되고 죽게 된다. 마르코는 이 사실도 모른채 정상인의 생활을 하고 있는 알리샤를 만나게 된다. 둘은 마치 새로운 관계를 시작하려는 듯한 자세로 돌아간다. 그건 처음 마르코와 베니그노가 만났던 그 시점으로 되돌아간 것이다. 마르코의 운명은 베니그노의 운명이 된다. 두 남자의 이야기는 무엇을 상징하는가. 인간은 결국 같은 일을 반복한다는 것이다. 남의 운명인 듯 지켜 보고 있지만 그것은 곧 나의 운명이기도 하다는 교훈인 것이다.  

피나 바우쉬의 무용세계와 영화의 관계

영화는 무용 공연을 보는 두 남자의 모습으로 시작한다. 그들이 보고 있는 작품은 피나 바우쉬의 〈카페 뮐러〉이다. 흰색 잠옷 드레스를 입은 여자가 눈을 감은 채 카페에 가득한 의자들 사이를 비틀거리며 뛰어다니고 한 남자가 그녀가 부딪힐까봐 그 의자들을 필사적으로 치워준다. 또 다른 여자가 그녀의 움직임을 비슷하게 변주하며 무대의 다른 쪽에서 춤을 추고 있다. 다른 남자가 그녀를 바라본다.

눈을 감은 여자는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남자의 시선을 알지 못하고 혼자 고독하게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 있다. 남자는 여자를 보호해주고 싶어 하지만 그의 노력은 그녀의 마음에 가닿지 못한다. 카페 안에서 분주하면서도 필사적으로 움직이고 있는 두 커플의 모습은 온몸과 마음을 다해 사랑을 갈구하고 있지만 그들의 행위는 따뜻한 감정의 교환이 없는 일방향적인 것으로 보인다.

비언어적인 방식으로, 오로지 몸을 통해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전달하고 싶어 했던 피나 바우쉬의 작품은 정형화된 아름다움에서 탈피하여 인간 내면의 본질적인 감정들을 완전히 새로운 육체적인 언어를 통해 전달한다. 〈그녀에게〉에 등장하는 〈카페 뮐러〉의 한 장면은 사랑에 대한 영화의 개념을 압축적으로 제시하는 도입부 역할을 하고 있다.

베니그노와 알리샤, 마르코와 리디아는 사랑하지만 그 방향성은 제각각이다. 베니그노의 헌신적인 사랑은 알리샤의 동의와 상관없이 이루어질 뿐 아니라 그녀는 그의 존재를 알지 못한다. 혼수상태에 빠진 리디아는 마르코를 떠나겠다는 말을 하지 못한 채 한동안 육신만 마르코에게 맡겨둔다. 피나 바우쉬의 작품은 사랑이라는 관계 안에 담겨 있는 본질적인 고독에 대해 말하는 이 영화의 정서적 배경으로 기능하고 있다.

  
 
베니그노는 알리샤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나눈 대화에서 그녀가 무용 공연이나 무성영화를 즐겨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는 알리샤의 간병인이 된 이후 무성영화를 보고 와서 그녀에게 이야기해준다. 그 영화의 제목은 〈애인이 줄었어요〉인데 다이어트 시약을 개발하는 여성 연구자가 애인에게 테스트를 하다가 애인이 아주 작은 크기로 줄어든다. 우여곡절 끝에 이 애인은 여성 연구자가 잠을 자는 사이 그녀의 질 속으로 들어간다.

이 영화 속 영화는 베니그노의 사랑과 병렬된다. 감독은 남자가 여성의 질로 들어가는 장면을 통해 베니그노가 알리샤를 강간하는 장면을 생략하고 알리샤의 임신 과정을 암시한다. 영화의 환상성은 베니그노의 폭력을 동화적으로 치환함으로써 그의 사랑이 폭력으로 각인되지 않도록 완충적인 역할을 한다. 또 사랑에서 ‘헌신’이란 어떤 행위를 통해 성취되며 어떤 결과에 이르게 되는지에 대해 미리 생각해볼 수 있도록 하는 역할을 한다.

남과 나는 같은 운명이라는 사랑

이 영화의 주제는 ‘사랑’이다. 영화는 식물인간이 된 애인을 둔 남자들의 행위와 선택을 다루면서 ‘헌신적인 사랑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제시한다. 알리샤를 사랑하는 베니그노의 행위는 여러모로 헌신적이다. 그는 병든 어머니를 보살피기 위해 간호사가 되고 미용 자격증까지 취득한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를 살피는 것보다 상대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를 생각해서 행하는 것이 그의 사랑의 방식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하나의 딜레마가 있다. 사랑이란 일방향적인 것이 아니라 쌍방향적인 것이어서 상대의 욕구 역시 그의 방식에 동의해야만 그것이 진정한 의미의 헌신이 되는 것이다. 헌신이란 하는 이의 태도상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받는 이의 동의가 있어야만 의미가 있고 또 가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의식 없이 누워 있는 알리샤는 그런 상대로서의 조건을 결여하고 있다.

  
 
베니그노가 들뜬 마음으로 알리샤와 결혼할 것이라는 계획을 밝힐 때 마르코가 걱정스러운 얼굴이 되는 것은 그 때문이다. 베니그노가 간호인으로서의 의무를 넘어 보이고 있는 절대적인 헌신은 알리샤의 동의를 전제로 하지 않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베니그노가 직업인으로서의 한계를 뛰어넘는 육체적인 관계를 감행했을 때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범죄가 된다.

하지만 이 영화는 베니그노의 사랑에 대해 단선적인 판단을 내리지 않는다. 그의 행위는 형법적으로는 범죄일지 몰라도 알리샤의 의식회복이라는 기적적인 사건에 가장 결정적으로 기여했다는 걸 마르코라는 인물을 통해 증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르코는 의식을 잃은 리디아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 당황하고 있을 때 베니그노를 만났다. 베니그노의 사랑이 지나치게 감상적이고 비일상적인 영역에 속해 있는 헌신을 구현하고 있다면 마르코의 사랑은 감성적이지만 동시에 이성적인 판단을 잃지 않고 있다.

그에게 사랑은 의식이 있는 타자를 향한 것이었는데 의식이 사라진 순간 껍질만 남은 육체를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매우 난감한 문제가 된다. 사랑이란 육체적이기도 하지만 정신적인 것이기도 하므로 그의 혼란은 대부분 관객이 공감할 만한 것이다. 하지만 그의 사랑은 베니그노의 것처럼 어떤 기적을 행하는 순간과 접합하지는 못한다. 이처럼 이 영화는 ‘사랑’이라는 단일한 단어에 담겨 있는 다양하고 모순적인 감정과 행위에 대해서 상식과 상식을 넘어선 차원을 동시에 보여주되 도덕적으로 단죄하기보다는 그 의미의 범주를 확장하는 방식을 택하고 있다.

글·정재형
동국대교수이며 한국영화평론가협회회장을 역임했다.

* 글 출처: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 르몽드 시네마 크리티크

http://www.ilemonde.com/news/articleList.html?sc_sub_section_code=S2N40&view_type=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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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자서성희

등록일2018-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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