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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아름의 시네마 크리티크] 두 개의 ‘우리들’로 빚은 섬세한 화해-이다지도 다른, <우리들>

생각해보면 우리는 순간순간 자신이 다 자랐다고 생각하며 지내 온 듯하다. 숟가락을 잡을 수 있게 되었을 때에나 걸을 수 있게 된 때부터, 학교에서 친구들과의 관계가 세상 무엇보다 소중해 질 때, 성인이라는 이름을 달고 직장을 찾거나 돈을 벌 때. 이 모든 순간들에는 나 스스로 할 수 있다는 혹은 해야 한다는 ‘성장’에 대한 희열 안에서 나보다 ‘어른’이라 생각한 이들을 최대한 밀어냈다. 그런데 이 성장이라는 것은 너무도 우스운 것이어서, 조금만 시간이 흘러도 ‘그때의 그’ 행동과 생각들이 얼마나 성장하지 않은 것이었는지를 끊임없이 확인시킨다. 조금씩 나이를 먹어가면서 오히려 이 모든 순간들이 혼자 할 수 없었다는 것, 그 이후에도 또 다른 성장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다시금 되짚게 된다. 내 스스로 어른이 됐다고 믿으면서도 결국 내일보다 부족할 수밖에 없는 오늘의 시간들, 순간 그 어설픈 어른들이 내세운 자존심이 서렸던 영화 <우리들>이 떠올랐다.


  
 
‘우리들’은 ‘우리’라는 복수에 ‘-들’이라는 역시 복수의 표현을 겹친 단어이다. 그러나 이 단어는 복수의 의미를 확장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좁혀놓는다. ‘나’와 관련한 모든 무리가 아닌, ‘나’와 함께하는 구체적이고 특정한 구성체로의 제한. ‘우리들’은 이렇게 ‘우리’와 갈라진다. 그러니까 윤가은 감독의 장편 데뷔작 <우리들>을 누구나 경험했을 ‘우리’의 이야기로 쉽게 전환시켜서는 곤란하다. <우리들>에 대한 거의 전부라 해도 좋을 만큼의 글들은 선(최수인)과 지아(설혜인)‘만’을 바라본다. 즐거웠다고 믿었던 어린 시절에 꼭꼭 숨겨놓았던 소외와 배제, 그리고 상처는 그 시절 ‘우리’의 그것으로 확장되며 많은 이야기를 낳았다. 그러나 이 영화가 <우리들>이라는 제목을 내걸었다면, 이 영화를 범박한 ‘우리’의 추억으로 보지 말아달라고 부탁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우리들>은 세심하게 ‘우리들’을 구분해두었고, 선은 그 사이를 통과해서야 스스로의 ‘우리들’의 화해 방식을 만들 수 있었기 때문이다.

분명 <우리들>은 선의 시선을 중심에 둔다. 그러나 그 시선은 또래에게만 할애되지 않는다. 순수할 것이라고만 믿었던 아이들 세계의 예민함에 주목했다면 조금은 단조로웠을 선의 시선은 사실 긴 시간 어른들에게도, 자신의 동생처럼 더 어린 아이에게도 찬찬히 머물러 있다. 영화가 시작되고 10분, 학교에서의 장면 뒤 이어지는 부모님의 대화, 지아와 처음으로 만나 즐거운 시간을 보낸 장면 후 바투 닿아 있는 동생 윤(강민준)의 얼굴을 보여주는 것에 집중하는 이 짧은 시간은 선이 무엇을 관찰하고 무엇에 영향을 받을지에 대해 선명하게 보여준다. 서로 다른 세계를 구축하고 있을 각기 다른 ‘우리들’을 위한 이 상징적인 분할. 여기에서 <우리들>을 구성하는 세 개의 ‘우리들’이 드러난다.

  
 
<우리들>에서의 어른들은 누구와도 화해하지 못한다. 선의 아빠(손석배)는 ‘그 사람이 우리한테 어떻게 했’는지를 잊지 못해 병원에 입원한 아버지를 외면한다. 위독하다는 연락을 받고  ‘굳이 공장차’를 빼 ‘달려’갔으면서도 병실이 아닌 병원 주차장에만 머문다. 선의 엄마(장혜진)는 상냥함 속에 자신의 본심을 숨겨 버린다. 선의 엄마는 늘 윤을 괴롭히는 연우의 엄마와 친절한 말투로 통화하지만, 전화를 끊고 난 후 늘어놓는 것은 통화 때와는 정반대의 말들이다. 지아 할머니(최찬숙) 역시 이혼한 며느리를 용서하지 못한 채 그 분노를 한탄으로 대신한다. 지아가 너무도 숨기고 싶어 했던 지아의 과거와 엄마에 관한 이야기는 지아 할머니의 푸념 사이에 묻혀 쉽게 다른 이에게 전달된다. 이때 선의 시선은 오랫동안 그들에게 머무른다. 할아버지가 아들을 찾았다는 간호사의 말을 기억하는 선의 시선은 운전석에 앉아 한숨 쉬는 아빠의 뒷모습에 고정된다. 선은 윤이 당하는 것을 볼 수 없어 연우를 때렸던 자신을 자책하며 엄마에게 미안하다고 했을 때, 당하는 것을 보고 있지 않아 잘했다며 엄마가 건네주는 계란말이를 한참동안이나 내려다보고 나서야 입에 넣는다. 할머니의 말을 듣다가 자리를 옮긴 선은 보이스 오버로 들려오는 지아 할머니 목소리에 포위당한 채 불안하게 힐끔거린다.

  
 
중요한 것은 선이 주시했던 만큼 이 어른 ‘우리들’의 방식이 선과 지아의 관계에 묻어난다는 점이다. 선의 손톱의 봉숭아물이 조금씩 밀려나며 어른에 가까워진 그 시간만큼이나, 선은 솔직하게 표현하는 것을 주저한다. 선은 친했던 지아와 조금씩 멀어지는 것을 알면서도 그 이유에 대해 묻지 못한 채 곁으로 밀려난다. 선은 지아가 상처받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래서 그의 곁을 맴돌면서도 자신이 왜 여기에 있는지, 지아가 무엇을 오해하고 있는 것인지에 대해 쉽게 입을 떼지 못한다. 지아가 자신에게 왜 그러냐고 다그쳤을 때, 선은 처음으로 언성을 높여 소리치고 가시 돋친 말들을 쏟아내며 자신이 당하고만 있지는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러한 선의 태도, ‘-했다며’라는 간접화법을 빌어 할머니의 입에서 나왔던 것을 그대로 옮기는 선의 말들은 선이 어른들의 그것을 체득한 결과라는 것을 드러낸다. 그런데. 선은 당한 만큼 갚아주었는데도 후련하지 않다. 몸싸움까지 벌였던 지아에게서 시선이 떨어지지 않는다. 무언가 잘못되었다.

  
 
선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그 무거움의 원인을 임종을 지키지 못한 채 빈 병상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는 아버지의 뒷모습에서 찾았을지 모른다. 그렇기에 동생 윤이 만들어놓은 ‘우리들’의 방식에 말문이 막혔을지 모른다. 연우가 때리면 맞지만 말고 너도 때리라는 선의 다그침에 내놓는 연우의 한 마디. 그럼 언제 놀아? 연우가 때리고 나도 때리고 그럼 언제 놀아? 난 놀고 싶은데. 너무도 간단한 이 화해의 논리는 선이 자신이 기대었던 방식을 버리고 ‘우리들’만의 화해법을 마련하게 해 주었다. 그래서 선은 용기를 낸다. 누군가의 비난 앞에서 늘 어물거리며 말할 순간을 놓치거나 침묵했던 선은 지아가 친구들에게 비난을 당할 때 처음으로 자신의 목소리를 조심스레 내놓는다. 선은 바로 얼마 전처럼 ‘왜 연락 안했어?’라며 지아와 어깨동무할 그 때를 위해 잠시 어색하게 바라볼 시간을 마련해 둔다. 선은 윤이처럼 바로 엉겨 놀 순 없겠지만, 어른들이 그랬던 것처럼 후회를 남기지도 누군가에게 엄청난 상처를 주는 일 따위도 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선의 ‘우리들’은 조금씩 더 견고해 질 것이다.


<우리들>(2016)
사진출처: 네이버 영화

글: 송아름
영화평론가. 한국 현대문학의 극(Drama)을 전공하며, 연극·영화·TV드라마에 대한 논문과 관련 글을 쓰고 있다. 
 

* 글 출처: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 르몽드 시네마 크리티크

http://www.ilemonde.com/news/articleList.html?sc_sub_section_code=S2N40&view_type=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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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자서성희

등록일2018-10-09

조회수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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