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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로운영화평

<베니스에서 죽다>-우리는 모두 베니스에서 죽는다.

?<베니스에서 죽다>

 

 

?우리는 모두 베니스에서 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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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니스의 죽음

    감독
    루치노 비스콘티
    출연
    더크 보거드
    개봉
    1971 이탈리아

    리뷰보기

 

 

 

 

 

 자못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우리는 영화 속에서 수많은 죽음을 보아왔고 또 보게 될 것이다. 비록 현실에서 죽음이 그리 흔한 일은 아니지만 적어도 영화에서는 그것이 여러 방식으로 흔하게 작동하는 테마인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영화 속 인물이 죽음과 동시에 방금 그로 대변되는 어떤 세계가 끝났다는 것을 느끼며 그 사실이 스크린 바깥으로 넘어와 내 옆에서 서늘해지는 기분을 맛보는 체험은 얼마나 빈번할 수 있을까. 가장 근래에 내가 겪은 이런 유의 체험은 <아무르>. 엠마뉘엘 리바가 연기한 그녀의 죽음은 단지 한 개인의 최후로만은 읽히지 않았다. 그 것은 적어도 나에게 대다수의 영화들이 기능적으로 인물들을 죽여오던 행태가 얼마나 관습적이었는지에 대한 일갈이었다. 한 인간이 죽는다는 사실이 얼마나 엄중하고 무시무시한 것인가를 <아무르>는 한정된 공간과 두 명의 배우로 냉혹하게 증언하고 있었다.

 

 

 

 

 

 비록 차이는 있겠지만 루키노 비스콘티의 <베니스에서 죽다>역시 <아무르>와 마찬가지로 영화가 죽음을 마주하는 방식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해주었다. 아젠바흐는 죽기 위해 죽은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 영화를 위해 죽은 것이 아니다. (몇몇 영화들처럼 죽이기 위해’, 혹은 스토리를 위해충분한 설득력 없이 인물들을 없애는 것이 아니란 이야기다) 그는 죽었어야만 했기에 죽은 것이다. 적어도 베니스에 있는 이상 그는 반드시 죽었어야만했다. 예술에 대한 생각부터 지난 수 십 년간 본인이 살아왔을 이성애자로의 삶까지 말 그대로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던베니스에서 아젠바흐가 무탈하게 돌아갈 수 있었더라면 얼마나 괴이한 일일까.

 

 

 

 

 독일의 나이든 음악가 아젠바흐는 휴가차 베니스를 찾지만 오히려 그곳 사람들의 불친절에 짜증만 늘 뿐이다. 그러던 와중 호텔에서 아름다운 미소년 파지 오를 만나 첫 눈에 사랑에 빠지게 되고 열병을 앓는다. 베니스에는 열풍과 함께 전염병이 찾아오지만 아젠바흐는 그 곳을 떠날 수가 없다.

 

 

 

 

 작품 속에서 베니스는 흡사 연옥처럼 느껴지는 금단의 도시다. 일 평생의 가치들이 한 여름 베니스에서 처절히 무너져 내리는 것을 그저 바라만 보던 아젠바흐는 어떤 기분이었을까. 오프닝 시퀀스에서 그가 베니스에 오기위해 탄 배의 이름을 보라. ‘에스메랄다라는 선명한 글씨는 중반부 미소년 타지오를 사랑하게 된 그가 이성애를 되찾기 위해 찾아간 매음굴의 창녀이름과 동일하다. 그 곳에서 그는 끝내 성을 사지 못하고 되돌아 나온다. ‘에스메랄다를 타고 베니스에 왔지만 정작 그 곳에서는 에스메랄다를 품을 수 없다. 난생 처음 마주한 동성애의 감정에 당혹스러워하는 아젠바흐의 심리를 포착하기위해 비스콘티가 택한 것은 끊임없는 클로즈업이다. 타지오와 아젠바흐와 베니스를 번갈아 줌 인하며 두 인물과 공간의 역량을 이끌어내는 비스콘티의 능력은 극 중 아젠바흐가 타지오를 처음으로 발견하는 순간의 호텔 장면에서 빛을 발한다. 아젠바흐의 시점 숏에서 시작하여 패닝으로 젊음과 늙음을 교차시켜 대비하다가 어느 순간 빠져나와 다시 아젠바흐를 잡아내는 연출력은 그야말로 경이롭다.

 

 

 

 

 

 비스콘티는 파지오에게 사랑을 느껴 괴로워하는 아젠바흐의 모습의 사이마다 독일에서 친구와 진정한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에 관해 논쟁하는 그의 모습을 교차한다. 아젠바흐는 아름다움이란 예술가 자신의 치열한 노력에 의해서만 맛 볼 수 있는 것이라 주장하지만 그의 동료는 비웃으며 아름다움이란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라 주장한다. 여기서 이성애자로서의 자아와 함께 공멸하는 것은 예술가로서의 자아다. 베니스에서 그가 목격한 파지오는 말 그대로 아름다움그 자체이다. 파지오는 미에 대한 열망을 바탕으로 끊임없이 노력하여 아름다움을 성취해낸 것이 아니다. 그는 그저 존재할 뿐이다. 아름다움은 노 력없이 그 자체로 오롯했다.

 

 

 

 

 

 <베니스에서 죽다>는 결국 열풍이 도는 베니스를 배경으로 이 모든 파국을 아름답게 포착해낸 작품이다. ‘에스메랄다호를 타고 이곳에 들어온 이상 아젠바흐는 떠날 수가 없었다. 시도는 했지만 그것을 실패라고 부를 수는 없다. 어쩔 수 없는 상황에 이끌려 다시 베니스로 돌아온 그의 표정에는 체념과 동시에 기쁨이 섞여있었기 때문이다. 비스콘티의 카메라는 평생의 자아가 한 순간에 파괴되어가는 남자의 당혹감과 무력감을 섬세하게 포착해냄과 동시에 일관되게 과연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젊음은 무엇인가 같은 미()에 관한 질문을 던진다. 교차편집과 미장센으로만 표현되는 이러한 질문들은 아젠바흐의 이야기와 조화롭게 섞여 자못 수많은 텍스트를 내포하고 있음에도 잡스럽지 않아 하나로 어우러져 또 다른 방향으로 도약하는 경지에 이른다. 다시 아까의 주장으로 돌아가 보자. 아젠바흐는 반드시 베니스에서 죽었어야만 했다. 그 누구를 위해 죽는 것도 아니다. <베니스에서 죽다><아무르>와 함께 죽음이 얼마나 미학적으로 사용될 수 있고 또 커다란 사건인지 명백히 주지시키며 한편으로는 최후에 분명하게 예측할 수 있는 죽음을 원동력삼아 극을 훌륭하게 끌어가는 영화다. 파지오는 그저 미소를 짓는 것만으로 한 생을 무너뜨렸다. 모든 것이 산산히 부서진 그 자리에서, 아젠바흐가 다시 툭툭 털고 일어나 너털웃음을 지으며 에스메랄다를 타고 다시 독일로 향하는 엔딩은 상상하기도 싫다. 모래사장에서 열풍 아래 검은 땀을 흘리며 그가 죽음을 맞는 모습은 오래오래 기억될 것만 같다. 생의 마지막에 자신의 일생을 부정하며 쓰러지는 예술가의 모습을 바라보는 마음은 그랬다.

 

 

www.qkrdndwkd.blog.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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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자박웅

등록일2013-02-28

조회수36,5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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