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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운 작가론_동물이라는 폐쇄회로_이대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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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운 작가론
동물이라는 폐쇄회로
이대연(영화평론가)

 

 

이런 이야기가 있다. 체포를 위해 범죄자에게 접근한 경찰이 그의 인간적 매력에 끌려 동조하게 된다(<폭풍 속으로>, 1991), 이런 이야기도 있다. 범죄조직을 소탕하기 위해 잠입한 경찰이 자신의 정체성에 혼란을 느낀다(<무간도>,2002). 그런가 하면 잠입한 경찰이 범죄조직의 우두머리가 되기도 한다(<신세계>, 2012). 또 어떤 이야기에서는 가족을 보호하기 위해 조직원이 되어 경쟁 조직들을 처참하게 제거하기도 한다(<대부>, 1972). 그리고 <밀정>(2016)은 이런 이야기다. (일제의 입장에서) 한때 불법조직에 가담한 적이 있으나 정보를 가지고 전향해 경찰이 된 이가 있다. 경찰조직의 우두머리가 자신을 믿어주었다. 그는 보은하며 성실하게 일한다. 그러던 중 검거하기 위해 접근한 범죄자로부터 자신들을 도와달라는 역제안을 받는다. 인간적인 연민과 친밀감 때문에 뿌리치지 못한 그는 범죄자들과 행동을 함께 한다. 그러나 계획은 실패로 돌아가고 범죄자들은 모두 체포되어 끔찍한 고통을 겪는다. 그는 갈등과 번민 끝에 경찰에 대한 테러를 결행한다. 그것은 범죄자들이 세웠던 계획의 대행이며 또한 복수이다.

느와르, 특히 갱스터 느와르라 불릴만한 장르의 누적된 데이터베이스에서 인물과 사건을 적절히 뽑아낸 것 같은 이 이야기는 일제 강점기의 한반도라는 시공간적 배경이 주어지는 순간 갱스터라는 장르 틀을 벗어나 역사적 메시지를 던지는 듯이 보인다. 그런데 김지운이라는 스타일리스트의 필모그라피에서 사회적 메시지를 찾아보기는 쉽지 않다. 그는 변칙적이기는 하지만 장르적 틀을 기반으로 하여 영상의 미학적 성취를 추구하는 감독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영화적 기획들 속에서 민족이나 독립운동 같은 거대 담론과 마주치는 일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다. 있다면 이 정도일 것이다. 이를테면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2008)에서 ‘빼앗긴 나라 땅은 뭐하러 사려고 하냐’는 박도원(정우성)의 말에 태구(송강호)가 ‘우리 같은 놈들, 양반들 밑에서나 일본 놈들 밑에서나 달라질 게 뭐 있냐’고 응수하는 식이다. 김지운에게 공인된 역사, 즉 국민국가의 기반이 되는 민족중심적 역사 같은 것은 별 의미가 없어 보인다. 차라리 ‘도깨비 시장’의 탈역사성과 무국적성이 그의 색깔이 아닐까 싶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민족주의적 시각이 도드라지는 <밀정>의 시공간적 배경은 다소 의아하다. 더구나 이정철을 연기한 송강호는 민족주의적 역사관의 무의미성을 주장하던 태구를 연기하지 않았는가. 노골적으로 자신의 필모 안에 속한 두 영화를 충돌시키는 까닭은 무엇일까?

01.경계 서성이기

루이 암스트롱의 ‘When you smiling’이 흐른다. 1930년대 미국의 스탠더드 재즈 선율 아래 독립운동조직이 일망타진 된다. 도주는 용납되지 않는다. 일본 경찰은 집요하다. 누군가는 사살되고 누군가는 체포된다. 마치 헐리우드의 고전 느와르에서 경찰이 범죄자를 소탕하는, 혹은 상대조직을 제압하는 장면을 연상시킨다. 경찰과 갱, 혹은 갱들 사이의 집단적 갈등과 대립이 한 세력에 의해서 해소되는 장면과 다르지 않다.

김지운 감독의 데뷔작은 가족 중심의 이데올로기를 비틀고 풍자하는 <조용한 가족>(1998)이다. 이 작품은 내부와 외부가 구별되고 내부의 안정과 평화를 위해서 외부와 투쟁하는 이항대립적 구성을 보여준다. 여기서의 가족은 '패밀리'와 구분되지 않는다. 그리고 가족에서 패밀리로의 전환은 가족이 갖는 의미를 장르적으로 해석하게 만든다. 이를테면 <갱스 오브 뉴욕>(2002)은 미국 초기에 유럽에 서 막 도착한 이주민들이 생존을 위해 어떻게 갱이라는 집단을 형성해 나갔는지를 발생론적으로 보여주며, <대부>는 이탈리아 이민자 집단의 이야기다. 그들을 지켜주는 것은 미국의 법과 질서가 아니라 ‘패밀리’로 불리는 집단이다. <갱스 오브 뉴욕>이건 <대부>이건 법과 질서가 지켜주지 못한다는 하나의 공통된 불신과 그것에 앞서 ‘가족의식’을 중시하는데서 갱이 발생한다고 말하는 것 같다. 결국 두 영화 모두 가족이라는 소집단과 국가라는 거대집단 사이에서 발생하는 갈등에 기반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에서 갱스터 장르는 거짓가족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구현되었다. 가족의 소중함이나 가족의 의미를 되새기게 하는 교훈적 가족 서사들은 갱스터와 유사한 양상을 보인다. 가족 안과 밖을 가르고, 외부에 배타적인 가족 구성원 간의 유대감을 회복하는 것이다. 조폭서사가 거짓 가족과 진정한 가족을 경계 지음으로써 가족의 의미를 묻는다면, 가족서사는 가족 안과 밖의 구분을 통해 가족의 의미를 질문한다. 조폭서사와 가족서사는 이 부분에서 서로 맞닿는다. 그리고 가족이 가치가 아니라 혈연으로서 강조될 때 배타성을 지니게 된다. 그것은 당연하게 혈연 외부를 향한 폭력을 정당화시키는 기제로 작용한다. <조용한 가족>은 이러한 갱스터와 가족서사를 풍자적으로 비튼다.

가족으로 표상되는 공동체, 즉 혈연과 같은 어떤 동질성을 기반으로 한 공동체는 내부와 외부를 가름하는 경게를 중심으로 펼쳐진다. 그런데 그 경계는 불안정하고 위태롭다. 김지운의 캐릭터들은 경계에 얼룩을 만들며 경계의 허위성과 불안정성이 드러낸다. <장화, 홍련>(2003)에서 수미와 새엄마 은수의 대립은 공고해 보이던 전통적 가부장적 질서의 균열을 보여주며, <악마를 보았다>(2010)에서 가족은 약혼녀를 잃은 현수가 벌이는 잔혹한 복수를 정당화하는 기재로 작동하지 못한다. <커밍아웃>(2002)이나 <인류멸망보고서: 천상의 피조물>(2011)에서는 동성애자를 상징하는 뱀파이어와 깨달음을 얻은 로봇 RU를 통해 인류라는, 종의 혈연으로 맺어진 집단의 경계가 얼마나 허술한지를 보여준다. 그리고 <밀정>은 그 연장선상에 있다. 더구나 한국의 민족주의는 단일민족이라는 혈연의 허울 아래 강요되는 것이 아니던가. 그러나 경계는 생각보다 공고하다. 그런 까닭에 그의 인물들은 경계를 오락가락하거나 경계의 주변을 서성일 뿐이다.

02. 단백질의 세계

경계가 넓어지면 가족, 민족, 인류가 되고 줄어들면 몸이 된다. <장화, 홍련>에서 수미(임수정)는 분열적 정신 세계 속에서 자신을 은수로 착각하기도 하고, 오래 전에 죽은 동생 수현(문근영)을 보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귀신이 나타나기도 한다. 현실과 환상이 구분되지 않고 퍼즐맞추기는 끝내 실패한다. 존재하지 않는 수현의 시선이 수미를 바라볼 때, 혹은 귀신이 등장할 때, 그것은 몸의 경계에 대한 인식의 붕괴에 기반한 것으로 보인다. 마치 빙의 같기도 하고 몸의 경계를 잃어버린 자의 방랑 같기도 하다. 김지운의 몸이란 하나의 경계이다. 몸의 경계는 생명이 세계에 존재하는 방식이면서 동시에 세게와 주체를 가르는 경계이다. 몸의 경계가 무너지면 <장화, 홍련>의 수미가 되고, 질소 가득한 과자봉지처럼 과장되게 부풀면 <달콤한 인생>(2006)의 선우가 된다. 몸의 경계 안에 든 것은 살과 뼈와 피다. 몸의 경계는 자루에 불과하다. 그러나 움직이지 않는 살은 단지 고기일 뿐이다.


<밀정>의 오프닝 시퀀스에서 투항을 권유하며 ‘기울어진 배에서 내리라’고 설득하는 이정철(송강호)에게 김장옥(박휘순)은 ‘기울어진 배에서 쥐새끼들이 먼저 빠져 나간다’고 대꾸한다. 전향한 그를 향한 조롱이다. 그는 한때 인간이었는지 모르지만 지금은 ‘쥐새끼’일 뿐이다.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에서 송강호가 연기한 태구는 자신의 소원을 ‘땅을 사서 가축을 기르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것이 전부다. 동물이 되거나 동물을 기르는 것이 송강호라는 페르소나가 지닌 임무인지 모른다. 스스로 자기 자신을 부정하지 못하고 만신창이가 되어 죽음을 맞고서야 비로소 주어진 상태를 벗어나는 존재이든, 자신의 존재를 긍정하고 즐길 줄 아는 존재이든, 동물은 인간이라는 종의 울타리 너머에 있다.

<악마를 보았다>는 경철(최민식)이라는 인물을 통해 동물의 모습을 보여준다. 영화는 살인과 인육, 린치, 강간, 배설물 같은 끔찍함으로 가득하다. ‘천사’나 ‘악마’, 혹은 ‘선’과 ‘악’ 같은 관념들에 반해, 피와 고기, 배설물로 요약되는 이미지들은 철저하게 물질적이다. 감정이 없는 경철의 세계 역시 다르지 않다. 자신이 두려움이나 공포를 느끼지 않으며, 따라서 현수(이병헌)가 이미 게임에서 진 것이라고 주장하는 그는 현상의 표면에 집중한다. 인간적 관계나 타인의 감정 따위는 알 바 아니다. 그는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지도 않는다. 사람을 단지 먹고 강간하고 희롱하는 대상으로 취급하는 그는 악마라기보다는 짐승에 가깝다. 약육강식의 원리를 충실하게 실천할 뿐이다. 포식자로서의 그는 모든 것을 가질 권리가 있다. 왜냐하면 그가 존재하는 세계는 몸의 경계라는 자루에 담긴 단백질의 세계이고, 본능으로 움직이는 살의 세계이며, 그러한 살들이 서로 부딪치고 싸우는 ‘정글’(<반칙왕>, 2000)이기 때문이다. 싸워서 먹고, 먹어서 에너지를 얻고 또 싸워 먹이를 얻는다. 찌꺼기는 버린다. 역사란 먹고 움직이고 배설하는 행위의 반복과 연속, 즉 ‘몸의 역사’이다.

김지운에게 몸이란 이런 것이다. 고깃덩어리로서의 물질성과 동물의 자연스러움, 그리고 몸의 경계를 유지하기 위한 활동의 충만한 생명성을 지닌 오브제이다. 카메라는 생리적 대사 작용을 하고 몸의 경계를 유지하기 위해, 즉 생존(생계)를 위해 고군분투하는 몸을 고스란히 담아낸다. 그것은 때로 우스꽝스럽고 때로는 아름답거나 비장하며, 때로는 역겹다. 그리고 김지운에게 영화는 몸이 지닌 우스꽝스러움과 아름다움, 비장함과 역겨움을 미학적으로 포착하고 표현하는 일이다.

03.명예로의 귀속

동물의 다른 편에 이름이 있다. 이름은 한 개체를 다른 개체와 구별하기 위한 기호이다. 그것은 단지 몸을 가리키는 한정된 지시어가 아니다. 몸은 이름을 구성하는 하나의 요소에 불과하다. 그 빈 공간을 채우는 것은 시간 속에서 움직이는 몸의 동선과 그 힘의 역학이 산출하는 방향으로서의 백터이다. 그것은 마치 클라인의 병을 흐르는 액체처럼 몸과 시간 사이를 관통하는 끊임없는 운동이 쌓아올린 퇴적층이다. 그러나 몸의 역사와는 다르다. 왜냐하면 이름이란 타자가 붙이고 타자가 부르는 타자의 말이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몸들’의 역사라고 해야 할 것이다. 몸이 복수가 될 때, 몸이 몸을 만나 몸이 부정되고 지양될 때 이름을 얻고 사람이 된다. 그러나 여전히 섭취와 배설을 통해 움직이는 단백질 덩어리를 끌어안고 있다. 몸이 없으면 이름도 없기에. 이름은 몸 위에 새겨진 지워지기 쉬운 글자이다. 글자가 지워지면 사람도 지워진다.

김지운의 할리우드 진출작 <라스트 스탠드>(2013)에서 마피아 두목 코데즈가 돈으로 매수하려 들자, 보안관 레이는 ‘내 명예는 사고파는 게 아니라’고 말한다. 이 말이 뜬금없는 것은 김지운의 영화에서 진지하게 발화된 ‘명예’라는 단어와의 마주침이 기존의 물질적·허무주의적 세계관에 비추어 생소하고 난해하기 때문이다. 웨스턴 장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클리셰적 허세라고 치부하기에는 편치 않다.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의 창희는 ‘허무한 죽음은 없으며 남은 사람이 허무할 뿐’이라고 말한다. 남은 자들의 허무는 죽은 자들이 남긴 고깃덩어리를 목격하는 데서 온다. 허무를 극복하는 방안으로 시간의 영속성에 이름을 박제하는 것이 명예이다. 명예는 몸의 역사도, 이름에 대한 순수한 평가도 아니다. 공동체의 가치에 몸과 이름을 귀속시킴으로써 가능해진다. <라스트 스탠드>에서 레이가 말하는 명예란 수많은 동료들의 죽음을 목격하고 경험하며 견고해진 그의 정체성이며, 경찰이라는 소집단의 가치에 자신의 이름을 귀속시키고 복무시킴으로써 허무를 극복하고자 하는 그의 방식인 것이다.

 

<밀정>에서 이정철을 향한 의열단 단장 정채산(이병헌)의 질문,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이름을 어디에 올려야 할지 정해야 할 때가 온다. 이 동지는 어느 역사 위에 이름을 올리겠느냐?’는 질문에서 방점은 ‘어느’에 찍힌다. 이름을 올린다는 것은 이름을 공동체의 가치에 귀속시키는 (불)명예를 뜻한다. 그의 말은 ‘일본 제국주의 편에 서서 안락함과 생존만을 쫓는 동물의 역사에서 벗어나 위험하더라도 조선의 독립이라는 가치를 쫓는 사람의 역사를 선택하라’는 호소처럼 들린다. 그는 선택을 강요한다. 일본제국의 법과 질서가 보호해주지 않는 조선인으로 구성된 디아스포라 이주민의 공동체인 한민족을 위해 싸우라는 것이다. 이것은 가족의 질문이자 패밀리의 논리이기도 하다. 그런데 생존의에 입각한 ‘패밀리’의 논리는 모든 것을 생존으로 환원시키는 동물을 닮았다. 요컨대 그는 사람이 되기 위해 동물이 되라고 말하는 것이다. 어느 것을 택하든 동물의 함정을 벗어나기는 힘들어 보인다.

그런데 이정철은 경계의 안과 밖을 오가며 서성이는 ‘반간’이다. 흔들리는 것이 그의 존재방식이다. 정채산의 요구는 이정철의 난처함이며 김지운의 난처함이기도 하다. 어쩔 수 없이 의열단을 돕지만 이정철에게 정채산의 말은 여전히 질문으로 남고 대답은 지연된다.

04.마주침의 순간들

선택은 말이 아니라 몸에서 일어난다. 이정철이 김장옥의 떨어진 발가락을 집어들고, 연계순의 시신을 덮은 거적을 들추는 순간 어떤 동요가 일어난다. 자신 앞에서 자살한 친구의 발가락은 가벼웠고, 자신이 충성을 증명하기 위해 인두로 얼굴을 지진 여성의 시신은 너무 작았다. 그것은 박살나는 수박(<라스트 스탠드>)이나 소년이 가지고 노는 축구공(<악마를 보았다>)이 지시하는 물질로서의 몸과는 다르다. 깨달음을 얻었지만 차가운 기계의 몸(<인류멸망 보고서: 천상의 피조물>)과도 다르고, 말 위에서 폼 나게 장총을 겨누는 나르시즘적 몸(<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과도 다르다. 카메라가 소녀의 다리를 훑는 페티시즘적 몸(<장화, 홍련>)도 아니고, 격투와 전투 장면에서 일회적으로 소비되는 몸도 아니다.

엄밀히 김장옥의 발가락과 연계순의 작은 시신은 다른 몸과 다를 게 없다. 그들의 몸은 활동이 정지된 살, 고깃덩어리에 불과하다. 그런데 이정철은 그들의 몸에서 뭔가를 발견한다. 섭취와 배설의 관성으로 움직이는 살의 물질성이라는 수평과 직각을 이루는 죽음 속에서 다른 삶과 만나는 순간이며, ‘허무한 죽음은 없고 남은 사람이 허무한 것’이라는 창희의 허무가 극복되는 순간이다. 그리고 김장옥과 연계순의 죽음이 그의 내면으로 흘러드는 순간이기도 하다. 그는 죽음을 만나 죽음 속에서 다른 생을 살게 된 것이다. 레이 역시 동료들의 무수한 죽음을 겪으며 그들의 죽음과 마주친 자의 태도이다. 삶의 변곡점을 이루는그들의 마주침이 어디로부터 발원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친밀감이나 유대감일 수도 있고 동경이나 연민일 수도 있을 것이다. 다만 김지운의 영화에서 죽음은 더 이상 움직이는 살의 정지가 아니라 삶의 연속선상에 놓인 어떤 것이 된 듯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지운의 딜레마는 해소되지 않는다. 여기서 의열단 단장 정채산이 어떤 실마리를 보여줄지도 모른다는 헛된 희망을 품게 된다. 왜냐하면 그는 ‘우리는 실패해도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실패가 쌓여 그 실패를 딛고서 앞으로 전진하고 더 높은 곳으로 올라서야 한다’고 웅변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그의 말 앞에서 우리의 감정은 고양되고 피는 뜨거워진다. 그가 이정철에게 시계를 주며 ‘나의 시간을 맡기겠다’고 할 때, 그것은 자신의 몸이 시간 속에서 움직여 온 궤적이며 그것이 가리키는 방향, 다시 말해 정채산이라는 이름이다. 그는 자신의 이름 일부를 떼어 이정철에게 준 것이며, 민족이나 독립 같은 추상이 아니라 자신의 이름에 참여하라고 요청하고 있다. 마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하는 예수처럼, 혹은 제자들에게 떡과 포도주를 주며 ‘내 살과 피니 먹고 마시라’고 말하는 예수처럼. 그러나 그는 예수가 아니다. 단지 깃발일 뿐이다. 그는 스스로 고백하는 것처럼, 자신의 폭력을 공인해줄 국가를 갖지 못한 ‘나라 잃은 군인’이며 살아남기 위해 사람에 대한 ‘본능적 경계’를 믿는 동물성을 지닌 자이다. 그는 사회적 규범에 복종하지 않고 자유를 획득하기 위해 투쟁하는 근대적 주체를 닮았으나, 그것은 근대 국민국가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결국 딜레마는 해소되지 않으며, 그 간극은 민족주의적 휴머니티라는 신파로 간신히 봉합된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보자. 루이 암스트롱의 When you smiling을 배경으로 무장 독립운동단원들이 일망타진되고, 라벨의 볼레로 선율 아래서 폭탄이 터질 때, 김지운의 필모가 쌓아온 몸의 미학은 갱스터라는 폐쇄회로 속에 갇힌다. <라스트 스탠드>를 통해 할리우드의 효율적 작업방식과 함께 ‘명예’를 얻은 그는 ‘사람’이 되고 싶었는지 모르나 빠져나오기 힘든 ‘동물’의 덫에 걸린 듯하다. 그가 어떻게 올무를 풀고 탈출할지는 다음 작품을 기대해보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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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자관리자

등록일2017-0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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