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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로운영화평

철학의 의무는 오해로부터 유래된 환상을 제거하는데 있다 : 이창동, <버닝>

돌아왔다. 이창동이.

 

 

영화관을 빠져나올 때 뒷자리에 있던 관객 한 분이 토로하듯 말했다.

 

"무슨 얘긴지 모르겠다."

 

나는 어땠는가? 물론 아리송한 부분이 많았다. 그러나 무슨 말을 하라면 할 수는 있을 것 같았다. 물론, 스포일러와 함께.

 

*

 

오해들

<버닝>은 시작과 동시에 '종수'를 비춘다. 그의 뒷모습을 서두르지 않고 좇아가는 카메라 워크를 보며 관객들은 두 가지 정도를 짐작하게 된다. 앞으로 두 시간, 꼼짝없이 종수란 인물을 지그시 관찰하게 생겼다는 것과 사건들의 속도가 그다지(미스테리 영화를 기대한 것치고) 빠르지 않을 것이란 점이다. 짐을 나르러간 아르바이트 현장에서 종수는 우연히 나레이터 모델을 하고 있는 '해미'를 만난다. 고향인 파주에서 어릴적부터 이웃했던 해미는 "군대는?"이라며 종수의 근황을 묻는다. 종수가 군대는 다녀왔으며 문예창작과를 졸업한 뒤 습작소설을 쓰고 있다고 하자 해미는 -그만하면 됐다는 듯이- 대뜸 저녁 때 술을 마시자고 청한다. 

 

술자리에서 해미는 별안간 마임을 선보인다. 마임을 선보이며 꺼내는 얘기는 "나 곧 아프리카에 가"라는 것이다. 아프리카에 가기 위해 돈을 모았다는 해미는 있지도 않은 귤을 까먹는 마임을 선보이며 "중요한 건 귤이 있다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귤이 없다는 걸 잊어버리는 것"이라 말한다. 종수가 알쏭달쏭한 해미의 말들을 채 해석하기도 전에 해미는 잠이 들고 만다. 

 

다시 만난 종수와 해미. 이번엔 해미의 집이다. 아프리카 여행을 위해 집을 비우는 동안 가끔 들러 고양이밥을 챙겨주라는 해미의 부탁을 종수가 수락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막상 고양이는 보지도 못하고 둘은 당연하다는듯이 섹스를 한다. 아무렇지 않게 침대 밑을 뒤져 콘돔을 꺼내는 해미. 반면에 이런 일에 조금은 서툴러 보이는 종수.

 

환상들

 

종수는 집에 '문제'가 생겨 파주 집으로 다시 들어갔다. 그 문제란 아버지의 폭행사건이다. 분노조절장애로 이따금 폭력을 썼던 아버지가 이번에도 피해자에게 사과를 않고 고집을 부려 영락없이 징역을 살게 생겼다. 아버지의 부재로 소를 돌볼 사람이 필요해서 종수는 텅 빈 집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자꾸 이상한 전화가 온다. 전화를 걸어놓고 말이 없으면 어쩌란 말이냐.

 

반가운 전화도 있다. 해미다. 아프리카 여행 마치고 귀국할 건데 공항으로 나오란다. 순둥이 청년 종수, 마다할 이유가 없다. 그간 고양이 밥을 주러 해미네 집에 들락날락하면서 온몸으로 그녀를 그리워했잖은가. 비록 낯가림 심한 이 고양이의 얼굴을 못봤지만. 그런데 공항에서 만난 해미, 혼자가 아니다. '벤'이란 남자와 같이 들어왔다. 나이로비 공항에서 함께 산전수전 겪었다는 벤은 어딘가 수상하다. 하긴 마음에 둔 여자 옆에 불쑥 등장한 남자치고 수상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있을까. 그런데 종수가 벤의 정체를 확인하기도 전에 해미는 또 술을 먹다 잠이 들고 만다. 

 

이후 해미와의 만남은 늘 벤과 함께다. 어느날 벤은 친구들도 불렀다. 그 자리에 해미와 종수도 함께다. 해미는 아프리카 여행기를 모두 앞에서 신나게 풀어 놓는다. 그 동네 부시맨들은 독특한 춤이 있다며 열띤 설명을 하는 해미의 뒤에서 벤은 지루하다는 듯 하품을 한다. 해미, 그런 벤을 아는지 모르는지 일어나서 춤사위를 선보이기까지 한다. 양손을 어깨 높이로 들고 덩실덩실 춤을 추면 배가 고프다는 의미의 '리틀헝거춤', 손을 하늘로 향하고 춤을 추면 삶의 이유가 고프다는 '그레이트 헝거춤'이란다. 벤의 친구들은 해미의 춤을 보며 웃는다. 그리고 다음 장면에서 그들은 클럽에 가 있다. 헝거춤이고 뭐고, 그저 신나게 흔든다.

 

다시 만난 셋. 이번엔 벤의 집이다. 종수가 보건대 벤은 한량이다. 그냥 한량이면 문제가 없는데 하필이면 돈 많은 한량이다. 종수는 그를 가리켜 '개츠비'라고 한다. 개츠비가 누구더라. 아, 떠오르는 얼굴이 있다. 디카프리오다. 왜인지 모르겠는데 돈이 아주 많았던 그는 자기가 좋아하는 여자의 환심을 사기 위해 매일밤 성대한 파티를 벌였었지. 그럼 해미는 뭔가. <위대한 개츠비>의 데이지 역이려나. 

 기억나시는가, 이 돈 많은 한량이.

 

환상이 짙어지고 혼돈은 시작된다

영화는 도입부에 자막을 통해 이야기의 원작이 따로 있음을 밝힌 바 있다. 바로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 <헛간을 태우다>다. 이 작품을 읽지 않은 관객들은 영화의 후반부에 원작 소설의 내용을 짐작할 수 있는 단서를 만나게 된다. 종수와 해미, 그리고 벤이 함께 하는 장면에서다. 장소는 어디? 이번엔 종수의 집이다.

 

지나가다 놀러왔다는 해미와 벤. 종수는 마당에 대충 자리를 깔고 벤은 가져온 와인을 딴다. 잠시 석양을 바라보는 그들. 그리고 종수가 '떨(대마초)'을 꺼낸다. 얼떨결에 받아든 대마초를 피워보고는 기침을 연발하는 종수와는 달리 해미는 그것을 능숙하게 받아 피운다. "난 그거 하면 웃음이 나"고 말하는 거로 봐서 이 여자, 참 여러가지를 시도하면서 산 것 같다. (폭탄이 팡팡 터지는 아프리카로 여행을 가는 거나, 오랜만에 만난 이웃친구와 스스럼 없이 섹스를 하는 것이나, 대마초를 피우는 것이나). 

 

대마초를 피우고 황홀경에 들어간 해미는 다시 춤을 춘다. 이번엔 옷을 벗어던지고 나체가 되어 자유롭게 춘다. 석양을 배경으로 한 그녀의 '그레이트헝거춤'은 아름답다 못해 몽환적이다. 반면에 함께 대마초를 피운 벤은 무심하다. 한껏 춤을 추고 난 해미, 다시 잠이 들고 말았다. 종수와 벤은 해미가 잠든 사이에 내밀한 얘기들을 한다. 종수의 내밀한 이야기는 "해미를 사랑해요"라는 것. 반면 벤의 얘기는 좀 더 알쏭달쏭하다. 그의 취미가 바로 "비닐 하우스를 태운다"라는 것이다. (원작에서는 "헛간을 태운다"라고 했겠군, 이라고 짐작들 하셨을 것이다.)

 

무슨 얘기를 더 하기 전에 해미, 일어나 나온다. 종수는 떠나는 해미의 등 뒤로 "여자가 어디서 그렇게 옷을 벗어, 창녀 같이"라며 질투의 감정을 내보이지만 해미는 별 말이 없다. 그리고 해미는 종적을 감춘다.

"마임에서 중요한 건 귤이 있다고 믿는 게 아니라 귤이 없다는 걸 잊는 거야"라고 말하던 해미. 그녀는 과연 어떻게 된걸까?

 

철학의 의무

대마초 파티(?) 다음날부터 종수는 벤이 했던 말이 계속 신경쓰인다. 비닐하우스를 태운다니, 그것도 우리집 근처에서? 종수는 매일 아침 인근의 비닐하우스를 보러 다닌다. 간밤에 별 일 없었나, 정말 화재가 났었나, 확인하면서. 그러나 아직까지는 별 일이 없다. 그런데 별 일은 비닐하우스가 아닌 다른 곳에서 생겼다. 해미가 연락두절이라는 것.

 

해미가 전화도 안받고 집에도 없고 가족들에게도 돌아가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된 종수는 벤을 의심한다. 뭔지는 몰라도, 해미의 실종과 벤 사이에 어떤 식으로든 관계가 있을 것이라고 종수는 거의 확신한다. 그러다 종수, 물증을 찾아낸다. 해미의 시계가 벤의 화장실 수납장에서 발견된 것. 그리고 해미가 키운다던 고양이가 벤의 집에 와 있는 걸로 봐 벤이 해미를 죽인 게 틀림없다. 

 

해미가 벤에게 살해당했다는 결론을 낸 종수는 그제서야 소설을 쓴다. 불과 얼마 전까지 벤에게 "무엇을 써야 할지 모르겠다"던 그는 갑자기 왜 소설을 쓸 수 있게 된 걸까. 아리송한 가운데 영화는 절정으로 치닫는다. 종수가 벤을 찔러 죽인 것이다. 종수는 벤의 시체를 벤의 차에 넣고 피가 묻은 자신의 옷을 모두 벗어 함께 차에 넣은 뒤 차를 불태운다. <버닝>은 비로소 '버닝'에 이르고, 영화는 돌연 끝나 버린다.

 

관객은 이제 둘 중 하나를 할 수 있다. 맥줏집에 모여서 "유아인, 확실히 매력은 있더라"고 말한 뒤 "영화는 그냥 그랬어"라고 말하는 법. 하나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초기 소설들을 다시 꺼내 읽는 것.

 <버닝>은 드디어 뭔가를 태워 없애며 끝이 난다.

 

무라카미 하루키, 그리고 소설가의 역할

무라카미 하루키는 그의 초기작품에서 다음과 같이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을 인용한 바 있다.

 

철학의 의무는 오해로부터 유래된 환상을 제거하는 데 있다.

 

는 이 문장을 해석하는 데 15년이 걸렸다. 15년 동안 나는 무엇을 했나? 철학과 문학을 공부했다. 그리고 가까스로 깨달았다. 아, 철학의 의무는 실로 그러한 것이구나! 그렇다면 문학의 역할, 즉 소설가의 역할은 철학을 돕는 것에 있는 것이구나, 라고.

 

해미는 '무지'의 상징

종교관은 상관없다. 하느님을 믿든 알라신을 믿든 리차드 도킨스를 믿든, 아름다운 석양의 모습에 심취해 "아, 이 세계를 만든 누군가가 분명히 존재할거야"라고 생각했던 경험이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절대자의 존재를 가정하기 시작하면 인간은 혼란에 빠진다. 대체 '나'가 창조된 이유는 뭘까? 절대자, 즉 신께서는 어떠한 의도를 가지고 우리 인류를 만드신 걸까? 그리고 인간은 삶의 의미를 찾아 해메기 시작한다. 그 실존의 불안을 달래려 사람들은 갖가지 쾌락을 탐닉한다. 술, 섹스, 대마초 같은 것들을. 그러는 중간중간 수신호를 보내기도 한다. 하늘을 향해 손을 뻗고, 내게 계시를 내려주시옵소서, 하고 간청하는 것이다.

 

일단 태어나긴 했는데 그 목적을 모르는 상태, 이것은 '말이 없는 전화'와 같은 꼴이다. 일단 전화연결(탄생)은 되었는데 전화를 건 목적(태어난 이유)을 모르겠는 것이다. 이러한 미스테리는 인간에게 불편함을 안겨준다. 불편함을 달래기 위해 무지한 인간들은 계속해서 신을 찾는다. 성당에 가서 기도하고 노래한다. 신이시여, 답을 주소서...! 

 

해미는 그러한 인간의 무지함을 상징한다. <위대한 개츠비>의 데이지 역할이라고한 건 그런 뜻이다. (피츠제럴드는 데이지를 정말이지 무식한 여자로 그려놓았다) 무지는 필연적으로 오해를 낳는다. 신의 존재가 그렇고 부시맨들의 춤이 그렇다. 삶의 목적을 모르니 해미는 그레이트헝거춤에 특히 매료된다.

 

해미는 섹스, 여행, 마약 등 닥치는대로 경험을 하며 어떻게든 진리를 깨우치려 하지만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어 괴롭다. 결국 그녀는 어디엔가 진리(귤)가 있을 것이란 믿음을 갖는 대신 내게 깨달음이 없다(귤이 없다)라는 사실을 잊으며 팬터마임에 몰두한다.

 

세상에는 헛간이 얼마든지 있고, 그것들은 모두 내가 태워주기만 기다리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벤은 '신'의 상징

나름의 싸움을 하고 있는 해미와 달리 벤은 여유롭기만 하다. 그는 '마음먹은대로 만들었다가 해치워버릴 수 있어서' 요리하는 것을 좋아한다. 요리를 만들어 먹어치우는 걸 '제물을 바치는 것'에 비유하는 그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그가 영락없이 '신' 행세를 할 수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이제 메인포스터의 구도가 이해가 간다. 가장 작게 묘사된 해미는 무지한 인간이다. 그것보다 큰 비중을 차지하는 벤은 무지한 인간들을 지배하는 관념, '오해로부터 유래된 환상'이다. 신이다.

 

벤은 모든 면에서 대범하다. 그는 자신이 감히 '판단'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의 자신의 손길이 비처럼 내려 그저 어떤 것들을 휩쓸고 갈뿐이라고 말하는데 '나'의 행동을 인위적인 것이 아니라 자연적인(=신적인) 것에 비유할 수 있다니 놀라운 자만이다. 아무튼 그는 무지한 인간들을 제거한다. 해미도 끝내 그 신세를 면하지 못했다.

 

여기서 잠깐. 종교 외에 무지한 사람들이 빚어낸 오해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얼마든지 있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이념대립'이다. 공산당 빨갱이는 위험하다는 프로파간다도 그렇지만 반대로 천박한 미국식 자본주의에는 인간성이 결여되어 있다고 선전하는 대남방송도 그 예다. 파주에 도착한 벤은 그 대남방송을 듣고 '재미있네요'라고 대수롭지 않게 넘긴다. 모든 것에 통달한 그에게 이념대립 따위가 진지하게 받아들여질리 없다. 그는 무지가 낳은 이런 대립들에 진저리를 내며, "두 달에 한 번씩"은 비닐하우스를 태워버린다.(무지한 인간을 찾아 죽인다) 그러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는 것이다. 하루키의 원작소설에서 "세상에는 헛간이 얼마든지 있고, 그것들은 모두 내가 태워주기만 기다리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라는 대사가 등장한 것은 그런 의미다. 세상의 무지한 인간을 전부 제거하려는 자, 그의 이름은 '벤'이다. 

 

덧붙여 벤(Ben)의 이름 풀이. 벤이 벤자민(Benjamin)의 약자애칭이란건 다들 아실 거다. 그린데 벤자민하면 누구인가? 역시 벤자민 프랭클린이겠지. 프랭클린은 생전에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어떤 사람들은 25살에 죽는데 75세에 장례를 치른다"라고. 25살에 죽었다는 것은 대학시절 이후 성장을 안했다는 뜻이다. 철학과 문학 등 인간과 세계에 대한 공부는 하지 않고 살아가니 그들은 계속해서 무지하다. 무지하다는 것은 깨어있지 않다는 뜻이다. 깨어있지 못하니 해미는 툭하면 잠이 든다(하루키는 계속 잠만 자는 사람에 대한 단편소설 <잠>을 쓰기도 했다). 계속해서 마시고 피우고 잠이나 자는 인생이니 벤은 그런 존재들을 파괴해버린다.

 

그리고, 소설가의 탄생

무지한 인간 가운데 가끔 깨인 사람이 있다. 깨인 사람은 주변의 무지를 안타깝게 여겨 곧잘 계몽적인 사고를 하게 된다. 그런데 계몽이란 거, 정말 어렵다. 대체 어디부터 어떻게 말을 꺼내야한단 말인가.

 

그래서 예술이 존재한다. 단순한 예술은 미를 찬양하는데 그치지만 정교한 예술은 철학과 한 쌍을 이룬다. 그리고 '환상을 제거한다'는 의무를 가진 철학에게 한 가지 세련된 방법을 제시한다. 그 방법이란 다름아닌 '메타포'다. 은유를 뜻하는 이 '메타포'는 직접적이지 않은, 돌려서 얘기하는, 그러나 그 방식 때문에 더 큰 울림을 주는 가장 강력한 경종이다. 바로 사람들이 소설을 읽는 이유다.

 

종수는 뒤늦게 해미가 스스로 만들어낸 신이라는 허상(부시맨들의 춤이라는 토테니즘, 그리고 벤이라는 허구의 신)에게 잡아 먹혔음을 깨닫는다. 그리고 소설가로서 자신의 의무는 그 신을 파괴하는데 있다는 걸 깨닫는다. 그리고 칼을 쥔다. 그는 결국 환상을 제거하는데 성공하고, 지금까지 -아무 의미 없이- 자신을 둘러싸고 있던 것들(옷가지)을 전부 불태운다. 해미에게 "아무데서나 옷을 벗고 그래, 창녀 같이"라고 말하던 그는 옷을 입어야 한다는 것 자체가 하나의 관념이라는 걸 깨달았다. 나체로 태어난 인간에게는 아무것도 '입지 않을 자유'가 있다, 그걸 깨달은 종수는 스스로 나체가 된다. '관념'을 제거하는데 성공한 종수는 이제 자신만의 길을 가기 시작한다. 비로소, 소설가의 탄생이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아프락사스다.

 

영화 <버닝>과 소설 <백의 그림자>

헤르만 헤세를 읽은 분들이라면 위의 문장을 알 것이고, 아마 아주 좋아할 것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인가? 태어났다는 것이다. 태어나려면 하나의 세계(알)를 깨뜨려야한다. 그러려면 먼저, 자신이 알 안에 갇혀 있다는 걸 깨닫는 게 첫째다. 우리는 관념이라는 두터운 알 속에 갇혀 본질을 보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깨우쳐야 한다.

 

한편 황정은의 장편소설 <백의 그림자>를 읽은 분이라면 다음과 같은 대목을 기억할 것이다. 주인공 남녀가 마트료시카(인형을 열면 더 작은 인형이 계속해서 나오는 러시아의 공예품)를 계속 열어보는 장면 말이다. 주인공들은 마트료시카를 계속해서 열면 그의 끝에 본질(진리)이 나올 것이라고 기대하지만 결국 나온 것은 아주 자그마한 인형뿐이다. 그 인형은 곧 깨어져 부서지고, 주인공들은 세상을 둘러싼 것들이 전부 관념뿐인 것을 깨닫게 된다.

 

이 관념이란 개념은 상당히 낯선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의 사고를 지배하는 것은 대개 그러한 관념들이다. 흑인은 저열하고 더러워라는 편견(노예제도), 게르만족이 우월하다는 주장(나치즘), 공산주의는 위험하다거나 자본주의는 천박해라는 선전(이념대립), '남자는 짐승이야'라든가 '여자는 밥이나 해' 라는 폭력(성차별), '우리의 세계에는 어떤 신이 존재해'라는 착각(토테미즘과 종교), '우리는 우리를 있게 해주는 국가에 보답해야 돼'라는 강요된 충성(국민의례), '다이아몬드는 고귀해'(마케팅)가 전부 그에 해당한다. 합의가 불가능한 유신론/무신론의 갑을론박을 감수하지 않더라도 관념에 대한 얘기는 얼마든지 할 수 있다. 조금도 과장하지 않고 말하건대, 필요하다면 밤을 새서 늘어놓을 수도 있다.

 

이런 (고정)관념들은 자유로운 사고를 방해한다. 그리고 자유로운 사고를 하지 못하고 계속 관념에 갇혀 살아가는 사람들을 우리는 '깨어있지 못한 사람'이라고 부른다. 깨어있지 못한 사람은 뭘 하는가? 잔다. 계속 잠이나 잘 심산이라면 말없이 마임이나 하든가, 아니면 시인 오딘의 말 ("참다운 삶을 바라는 사람은 주저없이 나서라. 싫으면 그뿐이지만, 그럼 묘자리나 알아보러 다니던가")을 상기해볼 필요가 있다. 깨어있지 못한 자는 죽은 것이다. 이미 죽은 사람들을 세상에서 제거할 때, 파괴자는 일말의 죄책감조차 느끼지 않는다.

 

그런데 깨닫지 못하면 죽은 것과 같다는 말에 동의를 하더라도, 실제로 깨달음을 얻는 것은 너무나도 어려운 일이다. 별개로 깨달음을 얻었더하더라도 타인을 깨우치는 일(계몽)은 더욱 어렵다. 워낙 어려운 일이기기에 철학자 정도가 겨우 엄두를 내볼 수 있으려나. 그런데 철학이란 거, 정말 머리 아프다. 그래서 소설이 존재한다. 철학보다는 쉬운 접근으로 '잠든 자들'을 깨울 수 있는 사람, 그것은 소설가 밖에 없다. 벤이 했던 "'메타포'가 뭔지는 종수에게 물어봐"란 그런 의미다. 메타포를 사용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는 소설가(예술가)인 것이다. (그래서 메인포스터에서 종수의 존재가 가장 크다. 무지한 해미가 꼴찌, 해미를 압도해버린 허상(벤)이 둘째, 그 허상을 무찌를 수 있는 존재인 종수가 가장 크게 클로즈업 되어 존재감을 나타낸다. 사실 해미보다 더 무지하고 저열한 존재들은 따로 있다. 탐구정신도 없이 클럽에서 춤이나 추는 벤의 친구들이 그들이다. 그들은 아예 포스터나 나오지도 않는다. 아무튼 중요한 건 키를 쥔 것이 종수라는 것이다. <버닝>의 종수를 영화 <매트릭스>의 '네오'에 비유하는 건 조금도 서투른 메타포가 아닐 것이다.)

 

<버닝>은 결국 모든 것을 태우며 끝난다. 그런데 허상을 불태우는 데 성공했다고 기쁘기만 한가? 벤을 죽인 뒤 한바탕 구토를 하고 나서 가쁜 숨을 몰아쉬며 겨우 트럭을 몰아 현장을 빠져나가는 종수의 모습을 보면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다. 이제 그는 자신이 제거해버린 환상의 빈 자리에 새로운 세계를 세워야 할 처지에 놓였다. 신도 아니고 '세계'를 세우라니, 여간 힘든 작업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기대해 본다. 무엇보다 그에게는 이제 메타포라는 무기가 있지 않은가.

 

http://blog.naver.com/jeonjunh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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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자전준한

등록일2018-0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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