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화동>,<무산일기>,<사이비>
씨네톡: 정재형, 이대연, 성진수, 민병선, 이수향
<혜화동>
이대연: 근래 한국 인디영화의 중요한 흐름을 파악하기 위해 후보작으로 고른 영화들입니다. <이파네마 소년>,<혜화, 동>,<굿바이 보이>,<무산일기>,<러시안 소설>,<벌거숭이>,<범죄소년>,<터치>,<가시꽃>,<고양이 소녀>,<그 강아지 그 고양이><길 위에서>,<남자 사용설명서>,<말하는 건축 시티>,<홀>,<무게>,<물고기>,<사이비>,<앵두야, 연애하자>,<잉여들의 히치하이킹>,<잉투기>,<풍경>,<힘내세요, 병헌씨>,<디셈버>가 후보였고, 투표를 통해 다음 작품이 씨네톡으로 선정 되었습니다. <혜화, 동>, <무산일기>, <사이비>입니다.
정재형: 우리가 한번 이 시간을 빌어 작품들의 의미를 짚고 넘어가보죠. 혜화동부터 이야기해볼까요.
이수향: 영평상에서 유다인씨가 신인 여우상을 받았는데, 보면서 진짜 받을만하구나. 굉장히 연기가 좋구나, 이런 생각을 먼저 했고요. 요새 굉장히 핫한 유연석씨의 초기모습을 볼 수 있어서 그것도 재미있었고. 영화는 유기견 이야기와 동시에, 자기 핏줄을 입양 보내야 했던 사연이 서로 얽히면서 진행되는데, 공간이라든가 배경, 날씨, 이런 것에 치중을 해서, 연출이 섬세하고 돋보였다는 생각을 합니다.
민병선: 저도 같은 생각인데요. 인물의 심리를, 그러니까 그 컷 안에서 정서를 어떻게 표현할까를 많이 고민한 게 잘 드러나고요. 유기견이라든지 폐허가 된 재건축 단지 안에서, 저는 주인공 혜화가 유기견 같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연출 적으로도 유기견처럼 보이는 주인공을 통해서, 그녀는 비록 유기견을 구원하려고 온 사람이지만 길을 잃고 헤매는 그녀 자신이, 철창 안에 갇힌 유기견 같은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거죠. 상처가 있고 그것이 원죄로 작용하는데 이것을 어떻게 풀어나가느냐가 영화의 재미고 연출력일 텐데 디테일한 심리를 잘 표현했다고 봅니다. 그에 반해 남자 캐릭터는 사건을 만드는 장치로 쓰이다 보니까 좀 들쑥날쑥하다.
이대연: 저도 재밌게 봤는데, 유치하게 보일 수도 있겠다, 그런 생각도 들더라고요. 개장을 사용해 자신을 유기견과 동일시하는 부분들도 그렇고. 도식적으로 생각될 수 있는 그런 게 아닐까 했는데 나중에 가다 보면 뭔가 앞뒤가 딱 맞물리더라고요. 중후반 지나면 그런 게 풀리는 기분이 들더라고요. 뒤에서 힘이 빠졌나라는 생각이 개인적으로는 들었는데. 놀라웠던 건 손톱 때문에. 저 손톱이 뭘까. 그런 생각을 했는데 심지어는 그 손톱가지고 손목까지 긋는 어떤 액션을 취하기도 하고. 손톱이라는 게 신체의 일부인데 잘려나간 거잖아요. 그걸 모으고 있다는 게 편집적인 부분인데 아기를 못 잊고 그런 상처들... 그런 걸 보면 자기가 놓고 있지 못하는 어떤 것들에 대한 떠나지 못한 어떤 것들을 얘기하고 있지 않나 하는데. 아무튼, 혜화가 차 운전할 때 후진기어를 넣잖아요. 일말의 희망 같은 걸 보여주는 것 같아서 약간 안도가 되는. 그런 느낌이었던 것 같아요.
성진수: 제게 <혜화, 동>은 따뜻한 영화로 다가왔는데요. 사실 소재 적으로 몇 가지 상징장치들을 끼워 넣는 게 학생영화를 보다 보면 많이 등장하는 그러한 부분들이에요.
정재형: 어떤 면에서요?
성진수: 예를 들어서 어떤 청소년이 임신을 했다가 아이를 잃어버린 거죠. 부모가 개입을 하고. 그리고 나서 방황하는 이야기죠.
이대연: 거기다 유기견 이야기 하나를 끼워 넣는.
성진수: 그 상징의 매개체로 유기견을 넣었는데 단편영화에서 사실 그런 정서는 많이 발견하게 되는데, 공감했던 것은 단편 소재로 갈 수 있는 것을 장편으로 잘 만들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긴 호흡을 그렇게 끌고 갈 수 있는 힘은 감독한테 있다라는 생각이 많이 들었어요. 그래서 그 점은 좀 놀랍다, 라는 생각이 들었고. 잘 만든 힐링 성장영화 같다는 생각을 했었고. 그리고 남자주인공하고 여자주인공이 서로 아픔을 달래는 방식이 대비되는데 흥미로웠던 점 중의 하나였고. 그래서 저는 되게 따뜻한 영화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마지막 엔딩이 후진기어를 넣고 가는 것도 그렇고. 유다인이 걱정하는 백구 한 마리 있잖아요. 새끼들이 이렇게.. 나오는 것도 그렇고. 감독이 되게 따뜻한 시선으로 상황을 보는 영화라고 받아들여졌습니다.
정재형: 저도 되게 좋게 평가하는데, 두 가지 측면에서 높게 평가하고 싶은데 첫째는 주제의식적인 측면에서 봤을 때 지금 이 영화가 미스터리를 풀어나가잖아요. 그래서 계속 호기심을 주고 반전이 있고. 그래서 마지막에 가서야 이게 무슨 영화인가 느껴지게 하는 그런 흥미로운 진행방식을 통해가지고 미스터리가 풀리는데 그것이 어떤 주제로 순화되냐면 결국 사회억압이거든요. 결국은 이 어린 애들이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는, 저항할 수 없는 사회적 억압이 있는 거죠. 결국은 인간이 어떤 조건 속에서 실존적인 상황에 부딪히게 만드는. 그런데 거기에 대한 어떤 무기력함? 이런 것들을 이 영화가 잘 전달한다고 보여요. 씁쓸하다면 씁쓸할 수 있는 그런 느낌을 갖게 하는. 인간이 어떤 사회 제도 안의 억압 속에서, 기존의 관습적인 억압 속에서 그럴 수밖에 없다는 거. 이미 많은 사람들이 그런 지적을 했지만 아버지의 부재. 남성이 굉장히 무기력해지는. 그러니까 이제 강한 어떤 가부장적인 남성들이 거세되어있는 그런 환경들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혜화의 입장에서 이걸 풀어나가는 그런 이야기인데 결국 혜화라는 실존이 부딪히는 것이 사실은, 어떻게 저항할 수 없는, 살아가는데 있어서 어떠한 힘을 발휘할 수 없는, 그런 상황에 부딪히게 만드는 거죠. 이 상황을 그렇게 묘사했다라는 것. 그런 것들이 다른 영화들이 현실에 대한 문제를 갖다가 굉장히 기만적으로 혹은 희망적으로 제시하는 것에 비해서 담담하게, 우리가 갖고 있는 현실의 모습을 잘 주제의식으로 승화시켰어요. 그래서 마지막에 그 부분도 굉장히 논란이 많이 되는데 과연 희망을 준 거냐. 과연 남자와 정말 희망적으로 결합하는 거냐. 아니면 냉엄한 현실을 그리는 거냐. 희망적이고 적극적으로 해석하려고 하는 사람은 모든 갈등이 다 풀리고 여자가 희망적으로 하는 제스처로 해석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고 쿨하게 해석했을 때는 이제 비로소 모든 오해가 풀렸으니까 그 남자를 정면으로 바라보기 위해서 후진을 했을 뿐이다. 이렇게 논란이 되더라고요. 그럴 정도로 이 영화가 현실을 굉장히 담담하게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에 어떤 미스터리를 푸는 거거든요. 우리 사회가 갖고 있는 모습을 굉장히 담담하게 잘 드러내는 주제의식을 보였다고 생각하고, 기법 적으로 나는 이 영화를 보면서 <여자, 정혜>를 떠올렸어요. 한국 영화가 소위 의식의 흐름 서사가 굉장히 부족하거든요. 그래서 굉장히 치밀하게 의식을 이어나가는 게 그 영화의 영향을 받았지 않았나라고 평가하고 싶은데 이윤기의 <여자, 정혜>가 획기적인 영화인데, 정혜라는 여자의 의식을 중심에 놓고 계속 현재와 과거를 왔다 갔다 하면서 의식의 흐름 서사를 보여주는데, 바로 그 의식의 흐름 서사를 <혜화,동>에서 가장 잘 보여주고 있다고 보여요. 문고리를 잡는 클로즈업이 나오고 과거로 돌아간다든지 계속 이 여자의 의식에 의해서 커팅이 되면서 현재와 과거를 의식의 흐름 수법으로 보여주죠. 그런 것은 굉장히 단편 영화나 이런 인디영화에서나 추구하지 일반 대중. 우리 한국 영화에서 잘 보여주지 않던 서사 기법이죠. 그래서 이 서사기법에 주목하는 사람들도 또 많이 있었는데 나는 이제 그 서사 기법이 상당히 한국 영화에 굉장히 진보라고 얘기할 수 있는 거죠. 보통 문학에서는 그런 서사 기법이 익숙한데 비해서 한국의 대중영화 서사가 빈약하다 보이는데. 의식을 추구하는 섬세함이 너무나 부족하지 않냐. 그런데 그런 것에 대한 어떤 반론이 되는 영화라고 볼 수 있죠. 그래서 이것은 어떤 그런 소설 같은 데서 구사하는 그런 내적 독백 같은 것이 많고 의식의 흐름을 쫒아가는 그런 서사를 영상적으로 영화적으로 잘 보여주는 그런 좋은 서사고 다른 일반 대중영화가 갖고 있지 않은 그런 영화다. 그런 측면에서 저는 높게 평가하고 있습니다. 더 부연해서 하실 얘기 있으신 분?
민병선: 이 의식의 흐름의 서사가 어떻게 보면 한국의 저예산 독립영화들이 반복하는 경향이 보이는데요. <용서받지 못한 자>도 있고 <파수꾼>도 그렇고. 아까 말씀하셨듯이 대중영화는 그렇게 하면 오락성이 많이 떨어지니까, 영화가 뒷걸음질을 친다라고 보니까 오락적인 것은 앞으로 나가서 어떤 사건이 벌어지느냐 이런 것을 추구하고 그러다보니까 좀 한국의 독립 저예산 영화들이 작품성이나 이런 것을 취할 수 있는 방법으로 그걸 좀 트렌드적으로 쓰는 게 아닌가. 그런 생각도 좀 들긴 들더라고요
정재형: 지금 예를 든 영화와 차별성을 두고 싶은 게 그러니까 단순한 심리묘사와 의식의 흐름. 의식의 흐름을 서사적인 기법으로 한 것하고는 조금 차이가 있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심리 묘사를 <파수꾼>이라든가 <용서받지 못한 자> 이런 것은 어떤 한 특정인의 어떤 의식을 집중적으로 추구했다기 보다는, 큰 범주에서는 <혜화, 동>이나 심리적인 성향을 갖는 거긴 한데 나는 <혜화, 동>은 특별히 여자 주인공의. <여자, 정혜>도 그렇고 혜화의 심리를 집중적으로 파헤치는 그 기법이 굉장히 의식의 흐름의 기법을 심리적으로 더 깊이 들어간 거죠. 어떻게 보면. <파수꾼>은 캐릭터들의 심리적 관계에 치중했다면, 혜화라는 여자를 중심화 시켜서 그 여자가 현재, 과거를 왔다 갔다 하는 그런 것을 계속 추적하는 그 부분이 나는 굉장히 차별성이 있는 것 같아요. 그런데 그런 것들이 굉장히 깊이 들어가는 거죠. 대체로 인디영화들이 심리적 경향을 서술 하는 부분에 있어서는, 나도 다른 대중영화에 비해서 상당히 심리 묘사에 치중하는 것은 그렇게 보는데, 혜화동이 갖고 있는 특별한 가치가 있어서, 어떤 의미에서 다른 영화들에서 보이지 않는 깊은 심리 의식의 흐름. 문학으로 비유하면 율리시스라든지 이런 데서 한 주인공이 끊임없이 계속 상념을 가지고 진행했던 그런 기법과 같이 현재과거를 왔다 갔다 한다고 보여요. 혜화가 이렇게 진행하는 것을 나는 인상적으로 봤거든요. 그런데 그게 <여자 정혜>에서 놀랍게 받아들였던 건데 그것이 다시 나오는 것 같아서 유사성도 좀 느꼈고, 그런 추구가 많은 작가들이 하는 건 아닌 것 같아요. 그래서 일반적인 심리묘사하고는 구별해서 보는 점이 있는건데.
이대연: 저는 단순하게 그 동물병원 원장이 참 나쁘다. (웃음)
민병선: 여자 마음을 그렇게 모르는구나..
이대연: 그러면서 농담처럼 얘기하잖아요. 나는 왜 아니냐고.. 저게 진담일까 농담일까 모르겠더라고요. 역시 여자의 말은 해석하기 좀..
정재형: 혜화는 기대를 했는데, 어긋나는 장면이잖아요. 그게. 기대를 했는데.
이수향: 혜화의 기대라는 게 단순하게 그 원장을 향한 기대인지, 아니면 자기를 엄마라고 부르는 그 아이 때문에 그런 어떤 걸 하게 됐는지..
정재형: 둘 다 아닌 것 같은데 나는.. 정말 혜화 자신에 대한. 정말 사실은 그게 깨질 수밖에 없는 게. 혜화가 그 남자를 진심으로 사랑했던 것도 아니고 그 자기의 어떤 심리적인. 자기가 그 때 그 상황이 그랬잖아요. 그러니까 정말 자기가 이제 자기도 뭔가 이렇게 위로받는다고 그럴까. 그러한 어떤 짝에 대한 그런 열망이 생기는 시점에서 자기가 그 동안 오랫동안 기댈 수 있고 편하고. 그런데 그게 열렬한 사랑은 아니었던 거죠. 어떻게 보면 정인데. 그것도 있겠죠. 애도 부수적으로는 있겠지만 어느 한 쪽은 아니었던 것 같고. 사실은 본인의 마음에서 오는 것이기 때문에 그 남자도 그렇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뭐 언질을 하는 것도 없고. 여자가.
성진수: 그러니까 그 3명이 아이와 동물병원 원장하고, 아이하고 혜화가 유사가족처럼 되게 많이 보였어요. 3년 동안 어떤 특별한 남자로서의 그런 거라기보다는 자기가 한 가족의 일원. 잃어버렸던 그런. 강탈당했던. 어떻게 말하면. 그런 가족의 모습이 거기서 그려져 있으니까. 그냥 자신도 모르게 일상화 되어있던. 이게 나의 가족이라고 생각했는데, 어떤 일상화 되어있던 것에서 갑자기 아, 그 사람이 다른 가족을 꾸린다고 하니까 잠깐 정신이 딱 깨서 혜화가 던진 말이 아닐까 저는 그렇게 봤거든요
이대연: 혜화한테 저는 궁금한 게. 꼬마 애가 있잖아요. 같이 자고 엄마처럼 젖도 만지면서 자고 이렇게 하는 데. 혜화가 집에 데려다 기른 개들하고 저 꼬마애가 차별이 될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별로 차이가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좀 드는 것 같아요. 그게 아무거나 여도 상관없는. 그런.
정재형: 혜화한테는?
이대연: 자기가 보살피고 뭔가 해줄 수 있는 이런 상대면 그게 그 꼬마 애거나 아니면 강아지거나 의미가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정재형: 그러니까 그 비슷한 얘기일 수 있는데 나는 왜 이게 의식의 흐름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봤냐면, 결국은 이게 자의식적인 캐릭터거든요. 이 혜화가. 이 혜화의 실존적인 이야기라고 보여져요. 혜화의 실존적인 이야기. 혜화 자체도 입양된 애잖아요.
성진수: 혼혈자식.
정재형: 혜화가 미스터리 한 요소지만, 애가 죽은 걸 몰랐고 어쨌든 애를 제대로 키울 수 없는 상실감을 가진 거야. 자기는 키우고 싶었는데. 애에 대한 이게 있죠. 가족도 물론 있지만 특히 애에 대한 상실감. 그건 자기 출생에 어떤 근본적인 것과도 관련된 거거든요. 자기의. 그러니까 실존에 대한 자기가 이 세상에 있게 된 것에 대한 어떤 불만? 그런 것들을 태생적으로 갖고 있는 애인데, 또다시 생명을 키울 수 없는 사회적 억압이 있었던 거예요. 어른들에 의한 것. 어른들에 의해서 자기 남편이 되어야 하는 사람이 차단이 되고 격리되어서 결국 증오감을 갖게 되었고 이유도 잘 모른 상태에서 증오감을 키워가게 된 거지. 그래서 계속 이 여자는 굉장히 불행한 여자로 끝나죠. 그런 여자가 쉽게 남자한테 희망적으로 화해하고 서로 위로하면서. 너도 고통을 받았구나라는 입장에서 이해했다는 거지 희망적으로 살고싶다는 생각은 없는 거죠. 그런 의미에서 사실은 남자보다도 여자가 중요하고 오로지 여자가 관심 있어 하는 그 애에 대한 실존인 거예요. 애가 있다라고 거짓말 했잖아요. 거기서부터 사실 반미치광이가 되어가는 거죠. 그래가지고 심지어는 애를 납치하고픈 충동까지 느꼈다가 자동차가 견인되면서 정신이 돌아오고. 반 정도는 넋이 나가게 되는데요. 불을 지른 거죠. 자기 실존에. 남자가 몇 년 만에 나타나가지고 그 애가 살아있다. 라는 말을 던진 것으로 인해가지고 다시 뒤집어지고. 결국 그 여자의 어떤 실존 얘기거든요. 가족도 있지만 그 애에 대한 것이 굉장히 중요한 거죠. 애에 대한 말하자면 존재. 존재. 그래서 나는 그. 그 혜화의 그러한 실존적인 상황을 굉장히 그 여자의 의식에 맞춰가지고 계속 추구했다라는 그것을 굉장히 높게 평가하고 싶다는 거예요. 처절한 한 인물의 의식을 갖다가 계속 추적을 했다라는 점을 난 굉장히 높게 평가하고 싶다는 거야.
그런데 그것을 미스테리 구조로 서사를. 그래서 지루하게 볼 수도 있지만, 굉장히 지루하지 않게 봤거든요. 나는. 굉장히 미스테리를 계속 던져주니까. 손톱을 깎고 손톱에 대한 그 상징성. 그런 장치마저도 굉장히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더라고. 쟤는 왜 등장했지. 뭘까. 개가 뒤를 돌아보면서 가고 그것을 쫓아가는 그런 미스테리함. 어떤 글을 보니까 어떤 사람은 이 영화는 유령영화를 닮아있다.
이대연: 굉장히 몽환적이잖아요.
정재형: 귀신영화를 닮았다는 거거든요. 굉장히 폐허에다가 쓰러져가는 폐허에 이상한 개. 유령 같은 개와 느닷없이 나타났다가 사라지곤 하는 이런 설정들이 그렇잖아요? 심지어는 애가 뒤에서 갑자기 등장하는 톤. 이런 것 까지 유령영화의 한 장면처럼 되어 있다라고. <혜화, 동>은 여기서 마치고 <무산일기>로 넘어갈 볼까요?
<무산일기>
성진수: 무산일기를 보면서 몰입을 하고봤던 측면을 이야기 하자면 단순히 탈북자의 이야기로 보이지가 않고 내가 살고 있는 이 사회에 대한 이야기로 보였던 점이다. 주인공 전승철이 마치 지금 이 사회에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착하게 살아야 한다, 거짓말을 하지 말아야한다, 미덕으로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지키지 않는, 무시하고 살아가는 우리 이면의 모양처럼 보였다. 예로 노래방에서 딸이 나가라고 하니까 천승철이 “내가 뭘 잘못했습니까?” 되묻는데, “승철 씨는 승철 씨가 뭘 잘못했는지 모르죠? 그게 문제라고요.” 그게 어떻게 들리냐면, 네가 잘못한건 이 사회에서 어른답게 살지 못하는 것이 잘못이야. 그걸 모르는 인물이고 어른답게 살기 위해서 서랍 속에 넣어두었던 그 모든 것의 총체적 모순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그 영화가 가지고 있는 양식이 와 닿았는데, 인물을 뒷모습으로 담거나 유리창 밖에서 찍는 방식은 내가 잃어버린 누군가를 살피는, 관찰하는 대상으로 찍는, 내가 거울을 보고 나를 관찰하는, 대상화 된 양식을 가졌고, 내가 천승철이라는 인물을 보면서 서랍 속에 가둬 두었던 어떤 것들의 총아라고 받아드리게 한다. 저렇게 해서는 우리 사회에서 살아남지 못하지, 그런 사회를 느끼게 한다. 또 한 가지 영화를 보면서 느끼는 양가성은 그 영화가 미덕으로 남았던 그 지점이, 전승철이라는 인물을 타자화 시켜서 얻게 되는 미덕이다. 탈북자에게 잃어버렸거나 무시하고 버려두었던, 그대로 탈북자를 타자의 지점에 놓아야만 가능했던 영화로 보여서 타자를 재현하는, 혹은 영화가 타자를 타자의 지점으로 놓았을 때 윤리적인가 라는 생각이 든다. 타자를 타자의 지점에 놓았을 때는 내 모습의 타자도 몰입시켜 놓았을 때, 과연 타자와 주변과 경계를 또렷이 하는가, 타자를 타자의 위치에 놓는 것이 과연 윤리적인가 양가적으로 느꼈다.
정재형: 참혹한 현실이다 감독의 의도가 객관적으로 보이기를 원했겠지.}
성진수: 객관적으로 윤리적인 미학이 갖는 힘을 거기에다가 놨는데 필라델피아 같은 영화는 흑인이 에이즈에 걸린 동성애자, 주변인을 다루는데 주변인을 영화의 중심에 놓는다. 보는 사람들이 주변인에게 감정이입을 하게 해서 보게 만드는데, 무산일기처럼 타자를 사실주의적으로 그린다는 방식과 차이가 난다.
정재형: 미학적 차이가 있다. 다르덴형제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핵심적인 건 카메라가 거리두기를 안한다. 카메라는 유동적이지만 클로즈업 많고 접사를 통해서, 롱테이크가 많지만 접사를 통해서 관객을 동화시키면서 가기에 멀리 떨어져 대상화 시키는 객관적 리얼리즘이랑 다르다. 전승철도 그런 기법이다.
성진수: 똑같은 기법인데 무산일기는 동화가 안 된다. 미장센이, 동화가 되는데 대상을 미장센으로 메운다. 상징적인 미장센이 황량하고 황폐화 된 걸 통해서 마음의 상태를 미장센이 보여줬기 때문에 관객들이 동화되어 따뜻함을 느끼지 못했을 뿐이지 동화시켰다.
정재형: 다르덴은 그런 상징적인 장치보다는 인물에 집중한다. 무산일기는 상징적 장치가 많다. 탁월한 경지다. 마음의 상태를 환경을 통해서 계속 보여주는 기법이 상징주의적으로까지 보이기 때문에 두 가지가 결합이 되어서. 황폐한 정서에 동화되다 보니까 그렇게 느껴지는 거지, 동화시켰다고 본다.
성진수: 저는 그 지점을 반대로 보는데, 미장센에 그 인물을 놓다보니까 그 인물을 타자화 시키는 방식으로 미장센이 구축되어 있다.
정재형: 다르덴의 영향을 받았지만 그런 점에선 다르다. 미장센에 대한 다른 분들의 평가를...
민병선: <혜화, 동>의 미장센과 <무산일기>의 미장센이 유사하다. 황량함이라던지 마음의 공허함을 그린다.
정재형: <혜화, 동>하고 <무산일기>는 메타포가 미장센도 그렇고 소도구도 그렇고 공간을 심리상태를 드러내기 위해 공간의 상징성을 활용한 기법은 똑같고, 개는 버려진 개나 팔려가기를 기다리는 탈북자의 개나 인간의 메타포에 비유해서 길을 잃은 개를 통해 동일시했다는 메타포 사연도 같다.
민병선: 동물이라는 게 사람이 사람한테 상처를 받으면 짐승한테 집착을 한다. 배신을 당하거나 할 때 동물을 키우면서 보상심리 같은 게 생기는데, 동물은 배신을 안 한다는 전제가 있다. 동물에 대한 해석을 하자면 혜화는, 미스터리가 풀릴 때에 그 여자가 다시 성숙해질 수 있을 거야라는 모습을 이미 동물에 대한 사랑을 통해 보이고 있다. 그것만 극복하면 성숙해질 수 있겠구나, 다가오지만 무산일기는 상처 받고 관계성을 맺지 못하는 홀로 섬 같은 남자가 그 나마 정을 쏟을 수 있는 개를 죽인다라는 거죠.
성진수: 개라는 상징을 단순하게 받는데, 전승철이 자기의 예전 양복을 입기 전 모습을 개가 상징한다고 보았다. 개와 전승철이 같은 처지였는데 이 세상에서 어울리고 친구를 만들고 하면서 과거의 자신을 버린 것이라는 상징으로 보았다. 혜화동의 개는 대상이고, 어떤 의미에서는 개를 자기와 동일시할 수 있겠다라고 보았다. 무산일기의 개는 본인의 자아로서의 개의 느낌이 훨씬 강했다.
이수향: 공간에 관해서 어떤 생각이 들었냐면 영화가 현실적 상황과 맥락에 영향을 받는데 용산 사태 후 재개발, 철거, 재건축 등의 공간이 문학과 영화에 대거 들어온다. 난쏘공 식의 단순 발전과 개발이 아니고 그 속에 살던 사람들이 하나의 하부구조로서 희생이 되고 그러면서 새로 쌓아져 나가고, 뿌리에서부터 새로 시작하는 것이 아니고, 있던 걸 부수고 재개발 한다는 다시 건립한다는 재가 <혜화, 동>은 감정을 움직이는 영화고 <무산일기>는 리얼리틱한 공간을 다루는 것이 당대의 조류를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고철처럼 나뒹굴어진 저런 공간, 개 한 마리랑 쓰레기처럼 놓인 사람, 이런 메타포를 많이 쓰는구나 생각했다.
성진수: <혜화, 동>, <무산일기>에도 폐허가 된 공간이 나오는데 영화의 미장센은 공간 안에 사람이 같이 들어있는데 혜화동의 폐허가 된 집과 무산일기의 폐허가 된 공간과 방식은 차이가 난다고 느낀다. <혜화, 동>은 인물, 실존과 심리 서사가 이끌어 가다보니까 미장센이 인물 안에서 큰 힘을 발휘하는데 반해서, 무산일기는 뒤에서 찍거나 측면을 보여주는 등 같은 미장센 요소를 가지고 있지만 다른 미장센이라고 느꼈다.
정재형: 무산일기는 불안정한 구도를 만들어내고 일부러 잡은 거지. 그런 의도로.
성진수: 동화내지 동일시의 문제가 인물 세트는 같지만 인물이 들어간 미장센이 다른 역할을 한다. 하나는 동일시되기가 어렵고.
민병선: 혜화가 개인적인 심리에 포커스를 맞추려고 했다면 무산일기는 한 인물이 사회 속으로 동화되고 싶은데 들어가지 못하고 사회 구성원이 되지 못하고 폐허처럼 있어야 한다는 사회적 맥락 안에서 가고 싶어서 그런 거 아닐까.
이수향: <무산일기>를 보는 사람의 시선의 윤리에 대해서 얘기를 했는데 그런 걸 보며 느끼는 건데, 멀게 느껴지고 거리두기로 느껴졌다면 생존조건이 달라서이지 않을까, 그들의 가장 큰 문제는 탈북이고 이 사회 안에 동화될 수 없다는 지점이고, <혜화, 동>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개인적으로 느낄 수 있는 상황이고 그것과 실존 자체가 너무 다른 무산일기의 상황이 텔레비전을 보며 나랑 너무 다른 사건이라 안심하게 되는 그런 상황 자체가 경계에 있다는 것이 너무 달라서 거리두기가 가능하지 않았을까.. 완전히 동화될 수 없고 그들의 고통이 눈요기에 그친다고 하더라도 얘기가 되서 수면으로 보여줘서 인지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성진수: <필라델피아>는 경계부에 있는 사람을 중심부에 가져와서 보는 사람들이 그 사람에 대해서 동일시하게 하는 요소가 많다. 엔딩이 그래서 기반을 하는 게 있으니까 정치적으로 가있다거나 하지만 중심부로 가져와서 끌어가는 양식과 <무산일기>처럼 타자화 시켜서 거리두기를 하는 양식과는 어느 것이 더 우위에 있는가는 논의가 필요하다.
정재형: 할리우드 방식보다는 훨씬 객관적이다. 할리우드의 한계가 모든 걸 사회문제를 주관화 시키니까 주관적으로 몰고 간다. 이거는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만든다. 그런 냉정한 시선, 마지막 장면에 긴 응시 그런 것들이 할리우드가 거세하는 부분이다. 빈공간과 응시를 메우려고, 빨리빨리 사고해서 관객이 응시를 충분히 하지 못하게. 단적으로 빈 공간을 많이 두고 공간을 상징화 시켜서 인물을 될 수 있으면 해석을 하게끔, 공간과 인물의 관계가 뭐냐, 다른 리얼리즘 영화들이 공간을 상징적으로 활용하거나 하는데 다르덴 같이 인물에 대한 팔로웡을 하면서 정서적으로 동화시키고, 현대영화가 여러 양상이 있는데 조합을 한다. 기본적으로 리얼리즘이 객관적으로 제시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중심에 둔 건 사실이다. 인물에 동일시를 시키지만 할리우드처럼 스토리를 어떤 방향으로 해석을 하려는 태도를 자제하고 상황논리를 강조하려고 하는 게 보인다. 남한 사회의 이질감, 야수적인 모습으로 튀게 보인다든가 생경함을 많이 제시하려고 했다. 탈북자가 적응하지 못하는 상태를 보여주려고 어눌한 캐릭터라던가, 뭔가 조화되지 못하는 면을 강조한 면에 대해서는 나름대로의 거리를 두고 관객이 천착하게 하려고 하는 낯설음, 객관성, 할리우드는 매끄럽게 주관적인 해석을 하려는, 양심이 됐든 건강한 리얼리티를 드러내려고 하더라도 주관적인 방식으로 드러내기 때문에 관객에 사고의 민주성을 전제적으로 보여주니까 방식의 차이가 있다. 많은 부분에서 동의한다하더라도 방식에 있어서는 주관적으로 유도하기 때문에 차이가 있다. 방식이 무산일기는 유럽영화나 아시아 영화의 현대영화에서 나오는 객관적인 방식, 반헐리우드 방식을 쓴다.
성진수: 방식의 차이가 위계를 가질 수 있을까요?
정재형: 결국은 그 기준이 관객이 생각을 하게 하느냐,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관객이 스스로 현실을 스스로 깨닫게 하는 것을, 이게 진실이야 부여하느냐, 무산일기는 유럽영화적인 방식이죠. 인디영화들이 그런 점을 추구하니까.
민병선: 한국의 제작자들도 이제는 할리우드식으로 되면서 해석을 자꾸할 수 있게 하거나 그러면 쉽게 해달라,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게 하지 말고 심플하게 해달라, 한 남자가 탈북을 해서 문화적으로 적응을 못하는 얘기, 반대로 해석할 수도 있는데, 이 남자를 통해서 우리 한국사회가 모순 되어 있다는 것을 주인공은 이해를 못한다. 그러기에 이 남자가 틀린 건 아닌데 모순 되어 있다보니까, 교회를 열심히 가지만 노래방에서 불법을 하는 이중성, 역설적이고 모순적인 한국사회를 보여주면서 한 남자가 동화 될 수 없는 관계성을 역설적으로 뒤집는 이중적인 의미가 나온다. 역설적이고 모순적인 한국 사회를 포진해가지고, 한 남자가 어떻게 동화될 수 없는 굉장히 이중적인 의미들이 나오더라구요,
성진수: 만약에 그게, 저도 비슷한데 그런 방식으로 그 영화를 보면 거기서 전승철이라는 주인공은 타자로, 우리의 다른 면을 보여주기 위해 사용된 도구처럼 되게 느껴지는 그런 면이 있다.
이대연: 아- 근데 제목이 무산일기잖아요. 이게 무슨 정보가 있나요?
성진수: 무산에서 왔죠.
이대연: 중국에서 보면 북한의 제일 잘 보이는 지명이라고 하는데, 또 우리가 생각할 때는 무산자를 생각할 수가 있잖아요.
정재형: 그걸 같이 노렸을 수도 있죠. 중의법적으로...
이대연: 근데 여기서 계속 그 얘기만 하는 건 아니고, 중간에 가보면 막 교회가 등장을 하잖아요. 저는 되게 이상하게 봤던 게 뭐냐 하면, 계급의 문제하고 구원이나 타락의 문제를 같이 겹쳐놓니까 되게 이상한 영화가 되더라구요. 중간에 보면 노래방 장면이 되게 충격적이었는데, 그 무슨 찬송가 뭐 부르다가 갑자기 디스코 버전으로 확 넘어가잖아요.
이수향: (웃음) 사랑하는 나의 아버지...
이대연: 그게, 근래 봤던 장면 중에 손톱만큼 충격적이었거든요. (일동 웃음) 성에서 속으로 확 떨어지는 어떤 지점인데 승철이가 가지고 있는 스탠스가 분명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고지식할 정도로 막, 자기가 알고 있는 대로... 되게 착하잖아요. 중반 지나가면서 돌출되는 행동을 보이는데, 자기가 붙였던 그 아슬아슬하게 붙어있던 벽보들을 확 뜯어버리는 순간부터, 그전에는 벽보들을 붙여도 붙여도 안 붙어있었는데, 벽보를 뜯어버리면서 자기 때리던 놈들도 다 제압을 하고, 친구가 되게 부당하게 하는 행위에 대해서도 저항을 하고. 교회에 가서 고백을 하고... 그러고 보니까 가장 큰 변화 중에 하나가 그 노래방 딸의 태도가 변하잖아요, 그게 뭐냐면 한국사회가 받아들여주는 어떤 분위기들...이런 것들이 보이더라고요. 거기다 결정적으로 사기까지 치고. 친구 돈을 훔치고. 이제 남한 사회에 살 준비가 된 느낌. 그게 어떻게 보면 타락하지 않으면 살 수가 없는 구원과 타락의 문제 같고, 아까 강아지가 승철의 이전 모습 같다고 하셨는데, 저는 비슷한데 좀 다르게 얘기하면, 일종의 종교에서 보면 속죄제 같은 거 있잖아요. 승철이 저지른 큰 범죄, 예를 들자면 친구의 돈을 훔친 거라든지 이거를 대신해서 죽은 느낌도 들기도 하고, 또 가장 억압했던 문제는 남한사회의 문제도 있지만 배고파서 친구를 죽였던 그게 제일 억압적인 일이었던 것 같은데, 죄의식들이 분노를 계기로 해소가 되면서 자연스럽게 남한사회의 부조리한 모습을 이해할 수 있는 어떤 지점까지 온 게 아닌가 이런 생각이 들어가지고, 계속적인 타자는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정재형: 계속적인 타자는 아니다?
이수향: 저는 그, 방금얘기하신대로 승철이가 굉장히 고지식할 정도로 너무 착하고 사람들에게 맞는데도 너무 참고 꾹꾹 누르고 이런 게 굉장히 인상적이었는데, 근데 그런 행위 자체가 자기가 가지고 있는 불만이나 열등감을 반동 형성으로써 과잉되게 자신을 선한 위치에 놓으려고 한 것이 아닌가 생각했었거든요. 그런 여러 가지 착한 일이 있고 나서 바뀌어서 사실 나중에 양복입고 바뀌었다고 했는데 사실 그 전에 한 번 더 바뀌었다고 봐야 되는 게 원래 북한에서 친구를 죽인 게 가장 큰 문제잖아요, 사실은, 그게 굉장히 사로잡고 있는데, 남한에 넘어와서 친구한테 "우리 이러려고 넘어왔니? 목숨 걸고 넘어왔는데 지금 뭐하는 거니?" 이런 식으로 친구한테 말하잖아요, 사람도 죽이고 바꿔보겠다고 넘어와서 되게 반동적으로 행동을 하는 거죠. 자기는 손에 때를 묻히지 않겠다는 듯 행동을 하지만, 말씀하신대로 그것이 남한에 동화되는 그런 지점 중에 하나겠지만, 그런 식으로 자신의 의식을 지키고 싶었던 사람이 결국 그게 뜻대로 되지 않는 상황에서 오는 일종의 폭주 같은 느낌이 들더라구요. 저는 그래서 세 번 변화했다고 보는데 저는 그런 게 재미가 있었어요.
저는 개인적으로 종교 문제가 재미가 있었는데, 사실 근래에 들어서 기독교에 대한 담론이나 그런 것을 영화 같은 데서 다루는 방식은 속된 말로 까야지 굉장히 쿨하고 진보적인 것 같은 느낌을 주잖아요, 근데 이 영화에서는 되게 특이하게 종교적인 부분에 있어서 그 사람들에 대해서 되게 크리티컬한 것을 최대한 자제하려고 한다는 인상을 받았거든요. 그 노래방 여자도, 사실은 이런 살인 고백을 했을 때 그런 자리에서, 더 일반화된 반응은, 교회 목사라든가 다른 사람들이 나오는 것을 좀 자제했으면 좋겠다라든가 여러 사람들에게 위화감을 줄 수 있다든가, 이런 식이 좀 더 일반적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저는 들었거든요. 근데 사람들이 그걸 너무 막 이해를 해주고, 성가대도 막 들어오라고 하고, 그 여자는 그걸 듣고 갑자기 난 당신에 대해 너무 많은 걸 이해하게 됐다고 얘기하는 부분이 저는 굉장히 어색했는데...
이대연: 다 거짓말이에요. (일동 웃음)
성진수: 굉장히 아이러니한...
이수향: 되게 어색했는데! 왜 감독이 이렇게 한사코 종교적인 그런 부분에 대해서... 의도한 게 뭔지는 사실 전 잘 모르겠어요, 오히려 너무 크리티컬한 그런 관점을 오히려 구원의 모티프를 가져오면서, 그래도 이 사람을 풀어 준 유일한 곳으로 좀 얘길 하고 싶었던 건지, 아니면 정말 반어의 반어처럼 그리고 싶었던 건지... 전 사실 그 부분이 되게 어색했거든요.
이대연: 구원은 없다...(웃음) 그런데 그 캐릭터가 어떻게 보면, <가시꽃> 캐릭터와도 좀 비슷한 것 같고.
성진수: 종교얘기 나왔으니, 자연스럽게 사이비로 넘어가면 되나요?
<사이비>
이대연: 저는 원래 애니메이션을 좀 좋아해가지고 보는데, 한국에서 예전에 <사이비> 전에, <돼지의 왕>보고 되게 충격을 받았는데, 이런 게 한국에서 만들어지는구나 싶어서 반갑기도 하고 기쁘기도 하고 그랬는데 그 비슷한 시기에 <마당을 나온 암닭>도 재밌게 봤는데, 그림체가 취향문제도 있을 것 같긴 한데, <마당을 나온 암탉>이 아무래도 연령층을 고루 배려를 하다보니까 아무래도 밋밋한 그림체가 아닌가 싶기도 했는데, 연상호 감독의 그림체가 전 되게 좋거든요. 근데 그게 왜 좋은가 하면, 일단은 일본 애니메이션에서 쉽게 볼 수 없는 그림체이기도 하고, 일본뿐만 아니라 다른 애니메이션에서도 그런 그림체를 흔하게 볼 수 없었던 것 같아요. 그림체가 되게 사실적인데 가만히 보면 되게, 위악적이라고 해야 하나요? 약간 어떤 부분들을 과장되게 그리는데, 그게 위악적으로 보이는 부분이 있는데, 사람들이 다 조금씩 강하게 보이잖아요. 그게 예쁜 그림체는 아닌데, 일종의 추의 미학이라고 해야 하나? 그런 부분들이 있어가지고, 거기다가 한국 사람들의 표정이나 체형, 정서 이런 것들을 담기에 좋은 그림체 중의 하나가 아닌가 이런 생각이 들어서 즐겁게 봤는데, 요번에 <사이비>보면서도 그런 느낌은 같았구요. 내용 같은 경우가 저는 사실 정리가 잘 안되는 느낌이 들어요. 캐릭터들이 되게 다양하고 성격도 뚜렷하고 그런 캐릭터들이 부딪혀서 얘기가 만들어지는데 이게 종교얘기로 풀려고 하니까, 기본적으로 중심에 있는 게 정상 종교가 아니고 사이비 종교다 보니까 이걸 올바르게 정석적인 방법으로 풀 수 있는가란 생각도 좀 들고, 그렇다고 그걸 둘러싼 사람들의 얘기로 풀려고 하니까, 욕망이 충돌하는 상황들 이런 거 말고 또 뭘 얘기할 수 있는가 저는 잘 못 찾겠더라구요.
정리하자면 한 두 마디로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은데, 파고들자면 되게 애매하게 겹치는 부분들이 발생을 해가지고 저로서는 되게 난감한 것 중에 하나였구요, 점점 어렵게 만드는 것 중의 하나가 뭐냐면, 중간에 나오는 칠성이, 가게 집 부인이 죽은 걸 보며, 이 표정을 보고 얘기하라고 하는 장면에서 그때까지 제가 쭉 봐왔던 그 앞에 부분들이 한 번 깨지고, 쭉 가다가 민철이 딸이 죽은 것을 보고 거봐 내 말이 맞았어, 라고 외치는 부분에서 이전에 봐왔던 것이 한 번 또 깨지고, 이런 상황에서 끝에 가서 동굴 속에 들어가는 그 장면에서 앞에 봐왔던 것이 또 한 번 깨지고, 그러다 보니, 아, 이게 뭐지? 이런 생각이 들었는데..,
이수향: 저는 이걸 보면서 일단 그림체 얘기를 해야 될 것 같은데, 제가 애니메이션을 잘 안 봐서 그나마 제가 최근에 접한 게 3D나 뭐...
정재형: 겨울왕국? 미야자키 하야오?
이수향: 네, 뭐 그런 것들.. 굉장히 색감도 예쁘고 뭐 그런 헐리우드나 일본의 것들의 자연스러움을 보다가, 너무 영상 충격이..(웃음). 그림체가 뻣뻣한, 그러니까 그림체가 센 것 더하기 움직임이나 연결이 자연스럽지가 않고 기계적이라는 느낌, 덜 발달한 느낌을 받았거든요.
이대연: 돈이 없어서 그래요...(일동 웃음)
이수향: 그리고 시작하자마자 바로 그런 그림체가 세게 딱 다가오는데 부자연스러운 몸짓과 함께 다가오는데 거기에 또 성우의 더빙이 확 들어가잖아요. 권해효 씨의 목소리가 처음에 크게 한 십분 굉장히 확대되어서 나올 때 처음 한 십 분 정말 몰입하기가 힘들었어요. 그래서, 아, 이런 걸 오히려 노린 건가 아니면 가지고 있는 제작비라든가 여러 가지 조건의 한계인가 하는 그림체에 대한 생각이었구요. 감독이 그냥 종교가 좋다 나쁘다 이런 것만 얘기하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복합적으로 다양한 지점을 다 얘기하고 싶었던 것 같아요, 그런 면에서 정리 안 되는 느낌이 있긴 있는데 전 그들이 사이비든 나쁜 사람이든 이 사람들은 돈을 위해서 하는 것이든 말든 간에 그것 때문에 위안을 받는 사람들이 있고 행복하게 죽은 사람이 분명히 있잖아요. 심지어는 명선이 같은 경우에는 진짜를 알려주는 아빠보다 그들에게서 훨씬 더 행복감을 느끼잖아요. 그게 잘못된 것이든지 뭐든지 간에. 그런 면에서 또 그 사람들의 상황이 수몰직전의 고장이라는 굉장히 불안한 분위기가 같이 있고, 생각 있는 젊은 사람이 거의 안 나오는, 그런 의미에서 정보라든가 인식이라든가 그런 것이 차단된 상태의 사람들이라는 한계성도 분명히 있을 것이고, 이런 저런 것들을 통해서 단순히 사이비가 나쁘다는 일차원적인 것이 아니라 그게 또 다른 측면에서 기능하는 면들까지 얘기하고 싶었던 것 같아요. 옛날부터 역사에 보면 나라가 뒤집어 지거나 큰 우환이 있거나 그러면 말세 사상 같은 것도 나타나고 신흥 종교같은 게 발흥하고 그러잖아요. 지금은 그런 종교들 자체도 하나하나 분석하는 연구들도 많이 있는데, 그게 또 그런 사람들이나 시대에 맞춰서 어느 정도 순기능과 역기능을 하게 되는 그런 지점들을 다 얘기를 하고 싶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감독이 사이비를 몰아붙이거나 종교에 대한 좋다 나쁘다 이런 게 아닌, 복합적인 면들을 다 말하고 싶었던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민병선: 저는 감독이 이야기를 만드는 능력이, 극영화를 포함해서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뛰어난 능력을 갖고 있는 것 같아요, 문득 이런 분이 왜 만화를 할까 이런 생각이 들 정도로, 근데 한편으로는 웹툰같은 데서도 보면, 그런 분위기라든지, 예전 만화나 애니메이션하고는 다른 그런 지점들이 나오면서, 애니메이션을 통해서 하고 싶은 얘기를 할 수 있기 때문에 아마 그게 된 게 아닌가... 하여튼 이분이 만드는 극영화를 나중에 한 번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측면이 있구요. 이야기적으로도 예를 들어 이게 과연 사이비를 얘기하고 싶은 건지, 말이 사이비지, 실은 종교를 얘기하는 큰 틀을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우리가 보통 이야기를 여기까지 간다하는데, 한 발 더 나아간다는 느낌이 있거든요? 예를 들어 목사가 반성하는 지점에서 최장로를 죽이잖아요. 거기서 이야기가 끝날 것 같지만, 그래서 명선이 아버지 편으로 돌아온 줄 알았는데 다시 살인을 시도하면서, 난 너한테 회개할 기회를 줬어 이러면서 이야기가 한 번 더 뒤집는데,
이대연: 거기서 그거 나오잖아요, 어, 안 속네? (웃음)
민병선: 그런 양면성들이 그렇게 능수능란하게 하는 걸 본 적이 없는 것 같아요. 그 능수능란함이 잘 보면, 많은 얘기를, 이 얘기도 하는 것 같고 저 얘기도 하는 것 같은데, 인간의 어떤 보편적인 그런 심리를 굉장히 증폭이 크게 다루더라구요. 그러니까 이야기가 굉장히 세고, 강한 충격파들이 오는 이야기꾼인데, 소재적으로는 수몰민, 그 안에서 외지인이 들어와서 결국은 보상금을 노리고, 또 어떤 맹목적인 종교...그런 것들이 많이 문제가 되고 나왔던 것들이거든요. 점점 신화화되면서 인간의 어떤 맹목적인 믿음들, 이런 거를 하고 싶었던 얘기는 아마 그 아버지를 통해서 계속하는 "가짜다, 가짜야, 가짜" 그 애기를 스릴러적으로, 사건을 계속 엮고, 물론 그 투르기는 추격자나 일반 극영화에서도 많이 썼던 방식이지만, 그걸 통해서 우리가 관념처럼 그것을 낫질하듯이 깨는 분위기들이, 하여튼 극영화를 한 번 만들어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성진수: 특정 종교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기보다는, 믿음에 대해서 얘기를 하려고 하는 측면이 많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측면에서 사이비가 굉장히 복합적이고 훌륭한 측면이라고 느껴졌던 것이, 특정한 신을 믿는 사람, 그것이 가짜라는 믿음을 쫓는 사람-물론 우리는 영화를 보기 때문에 그 중에 뭐가 fact라는 것은 알지만-어쨌든 간에 그 극 속에서 그것을 믿는 사람, 어떤 믿음이라는 게 진짜 맹목적이 될 때, 그게 사람을 괴물처럼 만들 수 있다는 것을 특정 한 종교만이 아니라, 거기에 나오는 다양한 사람들, 예를 들어서 경찰, 술집 주인, 뭐 저렇게 선하게 생긴 사람이 왜 사기꾼일 수 있겠어요, 너같이 생긴, 욕하는 니가 나쁜 놈이지라는 그런, 소위 말하는 선입견이라는 믿음부터, 그런 것들이 다 그 안에서 충돌하고 폭발하고 그렇게 만들어지는 이야기라는 느낌을 받았어요. 그런 측면에서 폭발적으로, 이렇게 한 번 갔다가 더 극단까지 가는 그런 모습을 보여주는 상상력이 되게 좋았고, 그런 의미에서 거기에 있는 어떤 인물에 대해서도 되게 객관적일 수 있게 만들어 주는 영화였던 것 같아요, 각각의 다른 곳을 향하는 믿음들이 서로 충돌하는 그런 모습을 보면서, 저도 처음에는 보면서, 아, 그냥 사이비 종교가 나와서 <사이비>인가 보다 했는데, 보다보니까, 아, 사이비라는 것은 어떤 자기가 가지고 있는 자신의 믿음을 향한 어떤 충성이 사이비를 만들어낸다 라는 생각이 영화를 보면서 들어서 그런 의미에서 종교를 다룬 영화 중에서 가장 진폭이 넓지 않은가 그런 생각을 좀 했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지만, 그림체의 힘, <돼지의 왕>보다는 좀 더 순화됐지만, 그래도 그 그림체의 힘이 미장센적으로 하는 역할도 정말 큰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민병선: <돼지의 왕>하고 저는 봤을 때, 돼지의 왕을 종교소재로, 그건 학교 소재잖아요? 학교에서의 어떤 괴물을 종교적인 그런 맹목적 신앙이 주는 그런 괴물로 바꿔놓고 그 안에서 어떤 집단이 어떻게 화학적 반응들을, 학교에서는 폭력 앞에 살아남기 위해, 생존을 위해서든 뭐든 서열화가 되어야 되든. 그 목사는 결국 돼지의 왕에서는 옥상에서 미는 애랑 똑같은 역할이라는 거죠. 그러니까 상처받고... 그런데 아이러니 하게도 괴물이 되어야 한다고 종용하는 역할이죠. 근데 갑자기 회개하고 반성을 해버리니까, 괴물이 되어야 할애가 괴물이 안 되겠다고 그러니까 우리의 믿음을 위해서 밀어버리잖아요, 그런 역할을 또 목사가 하고, 어떻게 보면, 작가 세계가 분명하더라구요. 자신의 세계가 굉장히 분명하더라구요.
성진수: 그러네요
민병선: 저는 <돼지의 왕> 보다 사이비를 좀 더 재밌게 봤어요. 돼지의 왕은 학교의 문제라는 것들이 어떻게 보면, 현실적인 문제다 보니까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에서처럼 그것이 어떻게 보면 관습적으로 다가왔기 때문에 좀 그랬는데, <사이비>는 그걸 이야기적으로 잘 바꾼, 허구적인 이야기의 소재로 좀 진일보한 느낌을 받았어요. 기존에 있던 것과 허구의 이야기 속에서 이제 내가 그런 얘기를 메시지나 주제 의식을 담을 수 있다라는 방점을 좀 찍는, 그런 느낌이 있더라구요.
정재형: 난 할 얘기가 많은데, 사실 <사이비>를 굉장히 대단한 영화다라고 높게 평가하는 편인데, 작년에 나온 영화들 중에 가장 최고의 영화다라고 개인적으로 평가하는데, 그 이유가 다 중복되는 이야기도 있지만, 크게 짚으면 영화적 완성도에 있어서 이게 애니메이션이지만, 애니메이션이 그동안 가졌던 그런 서사적인 한계, 단순한 서사라는 것들을 굉장히 복잡미묘하고 그러면서도 굉장히 큰 파장으로, 우리가 흔히 가졌던 동화수준의, 그리고 동화수준이 아니더라도 기본적으로 애니메이션은 애니메이션이라는 형식에 강세가 있기 때문에 흔히 서사가 좀 부족해도 된다라는 것에 대한 그런 취약점을 완전히 불식시켜서 정말 웬만한 극영화의 퀄리티를 능가하는 서사를 구사한다는 점에서 굉장히 뛰어난 영화고, 그 다음에 본격적으로 이 영화가 추구하는 것이 뭔가라고 했을 때, 그런 의미에서 애니메이션적인 얘기를 마무리하자면, 나는 에니메이션에 있어서의 굉장한 대안적인 애니메이션으로서 아주 소중한 보석과도 같은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는 거다, 말하자면 성인 애니메이션이라고 하는 건데 그 성인 애니메이션의 세계가, 더구나 인디 애니메이션으로서 이것이 단순히 어린애 동화수준에 머물렀던 것을 성인 애니메이션의 세계로 끌어올리면서 그런 완성도를 보여줘서, 인디 극영화가 보여주는 현실에 대한 고발, 어떤 문제점들을 아주 잘 보여주는 영화 같은 그런 기능을 하는 애니메이션을 개척했다는 점에서 굉장히 높게 평가를 하고, 이게 연상호 개인, 옛날에 그런 씨앗이 보인 게, <아치와 씨팍>이라는 게 있었는데 그것을 잇는 굉장히 중요한 성취이고, 그리고 훨씬 <돼지의 왕>보다도 진일보해서, <돼지의 왕>이 좀 굉장히 선악이분법적인 면도 강하고, 굉장히 복수에 대한 것, 적개심 이런 것들을 사회 정의하고 맞춰가지고 굉장히 그런 선악이분법적인 잔재가 여전히 있었고 굉장히 단순했다면, 이 <사이비>에 와서는 훨씬 그런 이분법적인 가치관이 전복이 되서 경계가 불분명해 지면서, 훨씬 더 깊은 인생의 문제를 파고드는, 단순함이 복잡해 져서 훨씬 더 현실의 문제를 깊이 파헤치는 그런 시각으로 진일보해다고 보고, 그런 의미에서 이 연상호라는 작가가 굉장히 주목받을 만한 작가인데, 그런 것들을 더 휩쓸 수도 있는, 그런 존재였는데, 그런 것들이 잘 안 되서 아쉽고, 평단에서도 애니메이션이라는 것을 조금 소홀히 다루려고 하는 관습에서 손해를 본 그런 작품이 아닌가, 그래서 나는 그걸 쫌 많이 끌어올리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사이비>는 종교를 다루고 있지만 종교는 표피적인 단순한 소재이고, 종교를 정면으로 다뤘다기 보다는 수몰지구 사람들의 상태, 그 돈을 이용해서 사기를 친 그런 ‘사이비’도 있고, 단순히 종교적 사이비 보다는. 근데 ‘사이비’라는 것이 암시적인 상징성을 갖고 있는 게 가짜라는 것. 이 영화는 가짜와 진짜를 구별하려고 하는 것에 대한 문제의식을 던지고 있다고 봐요. 이 영화의 가장 큰 성취가 무엇인가 하면, 이 서사에서 가장 중요한 성취가 주인공 캐릭터에 대한 묘사인데. 이 주인공 캐릭터가 사실은 관객에게 전혀 동정 받지 못하는 인물이거든요. 그래서 관객은 이 사람을 악당으로 규정하고 보죠. 그런데 사실은 이 사람은 반영웅인 것이죠. 결국 이 사람이 봤던 진실이 맞는 것이고, 사실은 우리가 동정했던 믿음이 가짜였다는 것이에요. 결국 이 사람을 억압했던 경찰이라든지 사이비 일당이라든지 이런 것들이 결국은 또 뒤집어 지잖아요. 동정 받지 못하는 인물을 통해서 이 주제를 전달한다고 하는 것이, 이 영화가 처음은 아니지만, 결국 이 영화에서 몰고 가려고 하는 것이 이 세상의 시스템에 대한 문제를 하는 것 같아요. 결국 이것이 정치 얘기를 하는 건데, 결국 이 사람이 반영웅적이고 악한으로 그려지잖아요. 딸에 대해서 횡포를 부린다던지. 결국은 이 사람이 올바른 진실만 봤지, 하는 행태는 악당이거든요. 그러니까 정확하게 악당으로 나쁜 사람으로 그리고 있어요. 마지막에도 이 사람이 동굴에 들어가서 보이는 종교적인 모습도 애매모호함을 주고. 그래서 이 사람을 한 인간으로 그리는데 성공했다고 봐요. 굉장히 결함이 많은 인간으로 그렸다는 점에서, 이 사람을 완벽하게 그리고 정의의 문제를 단순하게 해결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러나 단지 우리 사회가 갖고 있는 사이비적인 세계라는 것. 이 세계를 거꾸로 뒤집어서 반영웅을 통해서 결국은 이 영화가 가짜와 진짜라는 것을 구분해야한다는 메시지를 궁극적으로 준다는 것이고.
그리고 그림체 얘기가 나왔는데. 나는 이 작품이 80년대 민중 판화라든가 하는 80년대적인 정서가 있는 그림체라고 보이는데. 그 당시의 궁핍한, 그러니까 역설적인 인물이죠. 사실은 농부를 그렸는데, 농부가 굉장히 빈궁한 악마적인 얼굴을 하고 있는 거예요. 굉장히 핍박당한 민중의 모습을 통해서 그 상황을 인간의 얼굴에 비추어 그린 것이 그 당시를 이해하는 시대가 지났으니까 지금은 그런 그림체에 익숙하지 않지만. 이 작가는 분명히 그런 믿음을 갖고 있다고 보여요. 여러 가지 다른, 제작비가 없다든지 하는, 인디라든지 하는 제작 여건에서 오는 투박함을 차치하고라도 일단 나는 80년대의 민중을 묘사했던 그림에서 보이는 민중의 모습들, 궁핍하고 그래서 악하게 보이기도 하는, 악만 남은 거죠. 그래서 절규하고 데모하는, 사람들의 얼굴이 선한 사람들의 얼굴에도 나타날 수 있는 그런 모습 속에서, 결국은 그렇게 행동하거든요. 그 수몰 지구에 살고 있는 사람들도 그렇게 보이거든요. 오히려 경찰이나 다른 사람은 굉장히 선하게 그려져 있죠. 그래서 나는 그 착취자와 피억압자가 경계가 지어지는 것이라고 보여요. 대체로 투박한 가운데서도 내가 기억하기로는 사이비들, 즉 사기꾼들이라든가 경찰의 모습은 그렇게 삐죽삐죽하지 않았던 것 같거든요. 그런데 앓고 있는 아낙이라든가 주인공이라든가, 눈도 악당처럼 찢어져 있고 궁핍해 있고. 그런 것들이 이미 어떤 말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 보이거든요. 그러면서도 80년대 투쟁적이거나 민중지향적인 메시지를 주지 않고, 어떻게 보면 지금 2010년대의 현실로, 즉 가치관의 혼동 속에서 무엇이 진짜인지 구별할 수 없는 것을 아이러니하게도 반영웅적인 주인공, 전혀 동정 받을 수 없는 주인공을 통해 그렸다는 것. 그래서 이 영화의 재미가 거기서 생기기도 하는데, 그게 혼란으로 여겨지는 사람도 있지만 나는 그걸 굉장히 재밌게 봤거든요. 거기서 호기심도 많이 생기고. 어떻게 저런 사람을 통해서 저런 사람을 믿으면서 어떻게 이 부조리를 파헤치려고 하는가를 굉장히 관심 있게 봤는데, 결국은 그런 식으로 귀결이 되었을 때 나는 감동을 많이 받았어요.
그래서 여러 가지 측면에서 얘기할 수 있지만, 스토리텔링에 대한 힘도 대단히 있고. 우리가 극영화를 해야 잘하는 게 아니잖아요. 애니메이션이라고 해도 바로 이 성인 애니메이션이라는 것은 성인들이 보는 것이기 때문에, 극영화의 리얼리티나 극영화의 스토리텔링이랑 똑같은 필력을 구사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경지가 생긴 것이라고 보이는데. 그것이 시스템에 의한 것이 아니라, 연상호라는 개인에 의해서 성취되었다는 것이 조금 조심스러운 것이죠. 이것을 어떻게 확산시켜서 한국 애니메이션의 중요한 성취로 만들 것인가의 문제도 있고. 그렇게 보거든요. 일본이 미야자키 하야오를 자랑하듯이 우리나라는 연상호 애니메이션 같은 것들이 굉장히 특징이 될 수 있다. 왜? 전 세계 애니메이션 시장에서 굉장히 독특한 위치에 있고, 그래서 국제적인 상을 다 휩쓸었거든요. <돼지의 왕>도 그렇고. <사이비>가 큰 상을 더 많이 휩쓴 것으로 알고 있어요. 그런 것으로 보면 굉장히 소중한 성과인데. 그에 비해서 그 전에 있었던 <마당을 나온 암탉>하고는 아주 그런 점에서 질적인 차이가 있죠. 그것은 할리우드 애니메이션과 같은 맥락의, <겨울왕국>과 같은 할리우드 애니메이션의 연장선상에 있고 그런 것을 개척하는 것이라면, 연상호가 갖고 있는 대안적 영화, 인디영화의 성인 애니메이션. <마당을 나온 암탉>은 대중 상업 오락영화에 있어서의 애니메이션의 성취이지만 그리고 여전히 어린이를 대상으로 하는 애니메이션의 전통적인 범주 안에 있구요. 성인 애니메이션은 전 세계적으로도 굉장히 드물거든요. 단편 실험 애니메이션이라든가 이런 것들을 제외하고는. 장편으로 대중을 상대로 하면서 장편 상업 영화계에서 대안적인 목소리를 내는 작품이나 작가들은 흔치 않은데. 우리나라에서는 왕성하게, 한 작가에 의해서 <돼지의 왕>에 이어서 나오고 있는 것은 고무적으로 생각하고 그런 지점이 좀 조명이 되어야 하지 않는가 하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이수향: 저도 선생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주인공이 너무 특이해서 정말 절대 악인처럼 그려지잖아요. 대사는 욕만, 욕을 위주로 해서 대사를 하고, 심한 폭력을 휘두르는, 누가 봐도 정말 악인인데, 그 사람을 주인공을 내세워서 이끌어가니까 관객들은 애매하고 모호한 거예요. 저 사람이 주인공인 것도 알고, 맞는 얘기를 하고 있는 것 알지만 편을 들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라고 갈등하면서 어떻게 진행이 되나 계속 보게 되요. 그런데 관객의 입장에서 봤을 때 목사에게 일말의 기대를 걸게 되는 거 같아요.
민병선: 선하게 느껴지니까
이수향: 외모도 그렇고 사기꾼하고는 다른 지점이 있잖아요. 그렇게 하지 말자는 얘기도 하고. 그런데 감독이 뛰어나다고 생각했던 것이, 대부분의 사람들은 단순하게 영화 구성을 하면서 선과 악을 나누거나, 그 인물이 어떻게 되는 모습을 일차원적으로 다룰 텐데, 감독이 한 번 넘고 두 번 넘고 세 번 넘었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그 목사가 변하는 데서 넘었고, 그 마지막 장면에서 그 폭력적인 인물이 자신의 딸이 자기 때문에 죽었는데 그 상황 앞에서도 “내가 맞았다. 내가 진짜다.”라고 소리를 지르게 될 때, 사람들은 누구의 편을 들어야 할 지 전혀 모르게 되는 거죠. 그 곤란한 지점에 관객들을 세워놓는다는 것. 그 자체가 굉장히 문제적인 지점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고요. 마지막에 동굴 속을 들어가는 지점이 재밌었는데 동시에 신기했던 것이, 그 사람이 어떤 종교를 따르는지가 제대로 안나온다는 거죠. 성경책이라도 하나 나왔거나 하면 알 텐데, 촛불을 켜 놓고 신당처럼 되어 있으니까 토속 신을 믿는 것도 아닌 거 같고. 감독의 의도가 있지 않겠는가 했어요. 어떤 한 종교에 귀의했는가 아닌가를 말하려고 했던 것이 아니고, 그 폭력적인 인간이 나름의 방법을 찾은 것 같은데 그것이 뭔지는 의문점을 남겨 둔다는 것이죠. 또 재미있었던 것이 수몰지역이라는 표지판과 이 지점부터 물이 차오른다는 것을 강조하는 장면이 많이 등장하는데 마지막에는 결국 수몰이 안 되어서 수몰예정이라는 표지판만 덩그러니 남아서 영화가 마무리 되는데. 그 혼란과 난리와 보상금과 죽어간 사람들과 이 모든 것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되면서, 그 사람들이 평온하게 늙어가고 있다는 거죠. 그래서 이런 모든 것들이 감독이 생각을 많이 하고 일차원적인 사람이 아니구나 하는데 굉장히 감동을 받았어요. 우리나라에서 이 정도까지 복잡한 단계를 할 수 있는, 애니메이션도 그렇지만 극영화도 많이 못 봤거든요. 상당히 흥미롭고 놀랍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했습니다.
이대연: 근데, 여기 캐릭터들이 대충 다 그런 종류 같은데. 경찰들은 게으르고, 술집 여주인은 편견에 가득 차 있고, 마을 주민들은 어수룩하지만 착한 것 같은데 가만히 들여다보면, 예를 들어 기도회를 하면서 바람을 폈냐, 안 폈냐를 고백하라는, 종교적인 형식을 들어서 강요하게 되고. 이런 식으로 캐릭터 하나하나가 선악이 아니라 그냥 나쁜 놈이거나 어리석거나 그런 정도의 인물인 것 같은데.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요소들이 무엇인가 보면 분노가 있는 거 같아요. 아주 약한 경우는 짜증 정도, 심하면 증오로 가는 거 같은데. 대표적인 케이스로는 그 성목사 같은 캐릭터인데. 착한 것 같거든요. 뭘 잘못한 것도 아니고, 그런데 자기가 있던 교회에서 배제된 사람인데 그 계기가 오해였고 그 좋은 의도가 남한테 이용당했고 하는 분노가 있는 사람인 것이고. 민철이라는 인물 자체도 진실을 쫓는 것 같지만 그 사람이 쫓는 게 진실일까 하는 걸 자꾸 의심하게 되는 게 뭐냐 하면. 진실을 밝히겠다거나 진실을 향해서 간다기 보다는 나를 증명하려는 욕구가 더 크지, 이 사람이 진실이라는 것에는 관심이 없는 것 같고, 그 사람의 부인은 너무 무기력하고 책임 회피하는 사람이고. 이런 것들이 다 중첩되어 버리니까, 나중에는 극이 어떤 느낌이냐하면, 그 수몰의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게 우리가 사는 세상이야’라고 펼쳐 놓고는 거기에 물을 부어버린 느낌이 들거든요. ‘이거 아무것도 아니야.’ 달리 말하면, 우리가 사회라고 만들었던 이런 작은 탑 하나를 부숴버린 느낌이 들어서 사실 기분이 개운치가 않았던 부분이 있구요. 그 딸 같은 경우도 ‘죽기까지 했어야하나?’ 하다가도 이해가 될 거 같기도 하고. 그 아이도 절대적인 피해자라고만 놓을 수 없는 게 그 아이의 마음속에서 뿌리 깊은 증오가 있잖아요. 한 번도 아빠라고 불러 본 적이 없는. 민철이 자신도 성목사라 편지를 읽어 줬을 때, ‘그 애는 나를 아빠라고 부르지 않았어. 그 애는 나를 한 번도 좋아한 적이 없어’라고 말할 정도로 극단적인 증오심으로 가득 찬 아이인데. 절대로 화해할 수 없는 사람들이 모여서 화해한 것처럼 살고 있는 그 공동체 자체가, 데이비드 린치의 드라마 <트윈픽스>의 느낌이 드는, 기괴하면서도 그런 느낌이 들었어요.
정재형: 근데 <돼지의 왕>도 그렇고, 연상호라는 감독이 특징이 있는데, 분노, 증오감 그런 것을 모티프로 만드는 작가임에는 분명해. 아주 긴장되어 있는 감정들, <돼지의 왕>도 화가 나 있잖아요, 애들도. 막 분노하고 패죽이고 싶은 증오의 감정들을 많이 쌓아 올리잖아요. 그런 것들이 연상호라는 작가에게 형성이 되어 있는 것 같아요. 뭔지는 모르겠지만. 개인사에서 된 것일 수도 있지만. 이 사회를, 수몰지구에 빠져있는 설정을 했듯이, 보는 단면도가 분명하고, 그것이 그렇게 보면 그렇게 볼 수도 있는 것인데. 어찌했든, 뭐랄까, 증오감 같은 것이 남보다는 굉장히 강해서, 그것을 쉽게 와 닿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과의 차이가 확 나게끔, 그런 거 같아요. 보면서 부담스럽게 느끼는 사람이 있을 것이고. 여하튼 그런 면에서 굉장히 강한 작가인 거 같아요. 굉장히.
민병선: 에너지가 높으니까, 세니까. 평범할 수 없는, 또 그럴 수 없는 인물들의 폭발. 이런 것들이 화학작용을 만드는 것에 능한 재주가 있는.
정재형: 그래서 나는 개성 있는 좋은 작가라고 보는데.
성진수: 나는 인생여정이 이상한지, 그 영화에 나오는 인물들이 한 없이 평범해 보였거든요.
민병선: 더 쎄서 그런 거 아녜요.
이대연: 내가 볼때 이 정도 분노는 분노도 아니야, 이런....
정재형: 유형화 되어서 그렇게 보일 수도 있을지 모르지.
민병선: 일단은 만화 자체의 그림체가 비호감이라.
성진수: 맞아요. 비호감인 건 확실해요.
민병선: 머리 크게 그리고 다리 짧게 그리고...
성진수: 굉장히 사실주의적이라고 생각했어요. 제가 <돼지의 왕> 봤을 때, ‘드디어 만화에도 5등신, 6등신이 나오는구나.’ 보면서 정말 사실적이라고 생각했었거든요.
총평
정재형: 이제 영화들 얘기를 대충 했는데. 세 편을 뭔가 엮을 수 있는, 비교해 볼 수 있는, 우리가 지나간 것을 회고하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최근 3년 사이에서의 변화. 그런 측면에서 세 편을 같이 아울러서 보자면. 먼저 공간성 얘기를 했는데, 어떤 공간성에 대한 부분에서, 아까 뭐 폐허 얘기를 했고, 그런 것이 어떤 공통점일 수도 있고.
이 영화들만 얘기할 수도 있고 다른 영화를 곁들여서 얘기할 수도 있을 텐데. 공간성에서 얘기할 수 있는 것이 있을까요?
민병선: 공간성이나 캐릭터가 다 빠져나갈 수 없는, 세 영화가 막다른 지점에 있는 인물들인데. 출구도 없고 이런 막다른 절벽 끝에 사람들을 밀어 넣고서는, <혜화, 동>은 여성의 심리적인 것을 극단적 상황에서 어떻게 발화가 되나, <무산일기>의 탈북자는 이 사회에 적응하고 싶지만 어떻게 끝에서 떨어지나, <사이비>는 수몰이 된다는 건 없어져 버린다는 것인데, 이제 떠나야하는데 그 떠나는 방법을 놓고 서로 티격태격하다가 무엇이 진실인가를 다투다가 비극을 맞는. 그래서 극단적으로 가는구나.
정재형: 어떤 시대정신 같은 것을 읽어낼 수 있는가 하는 것인데.
이대연: <무산일기> 보면, 기억나시겠지만, 양아치, 깡패들한테 맞고 돌아서 문을 열었는데 절벽인 거예요.
민병선: 그게 아주 인상적인 장면이었죠.
이대연: 너무 깜짝 놀라서 충격 받은 장면이었는데요. 그런 느낌들이 다 드는 거 같아요. 문을 열고 나갔는데 더 이상 갈 수도 없고. 암담하고 답답한 정서들이 있는데. 그것이, 추상적으로 얘기하자면, 신자유주의라든가 이런 것이 강화되면서 사람들이 갖는 공통된 정서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거든요. 게다가 우리 사회가, 아까 용산 얘기도 나왔는데, 굉장히 상징적인 사건이었던 거 같아요. 근데 그 이후에 그 건물 자체가 개발도 안 되고 가만히 있는 거잖아요. 근데, 그 모습이 우리 사회가 지금 그 상태인거 같다는 생각이 좀 듭니다. 공포감들이 많이 밀려오고. 민영화 얘기도 나오고, 의료 얘기도 나오고. 사람들이 갖는 생각은 이것이 어떻게 될까하는 것도 있지만, 마음속에는 막연한 공포감들, 이런 것에서 벗어나긴 힘들 거 같아요. 그런 것들이 자연스럽게 반영되어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추상적으로 들기도 해요.
이수향: 저도 비슷한 생각인데요. 세 영화에 공통적이라면, 아까도 비슷한 얘기를 했지만, 그 공간 자체가 원래 기존에 있었던 것에서 새로운 것으로 재편되기 직전의 폐허가 된, 아직 정돈되지 않은 상태를, 세 영화가 모두 다루고 있다는 생각을 했거든요. 그 공간에 사는 사람들이 이제 문제인 것인데, 말씀하신 거랑 비슷한거 같아요. 불안하고 고통 속에 있는 거죠. 그런데 문 열고 나가면 갈 데가 없는 것처럼, 돌출되어 단독자로 서 있는 느낌을 세 영화에서 주고 있다는 것을, 개인적으로 공간에서 느꼈습니다. 그래서 재편되기 직전의 불안함과 어디로 갈지 모르는 막막함 같은데 굉장히 다른 성격의 세 영화에서 드러나고 있는 게 아닌가라는 생각을 했구요. 또 한편으로는 인물들의 특징에 대해서 보자면, 세 명, 혜화도 그렇고, <무산일기>의 주인공도 그렇고, <사이비>의 목사가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은 것이, 개인이 가진 불안함과 해소되지 못한 원망스런 감정 같은 것을 겉으로는 과잉된 숭고적인 행위로 가리려고 한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런다고 해도 해결되지 않는 것이니까. 결국에서 어떤 사건을 계기로 터질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래서 그 사람이 옳은 사람이냐, 그렇게 까지 했지만 안 된 것인가 하는 평판은 차치하고라도, 그런 불안함 자체를 이 영화들이 보여주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대연: 여기에 하나 더 얘기하면, <가시꽃> 같은 경우도 그 성폭행이 있었던 사건을 중심으로 돌아가잖아요. 근데 한 인물이, 같이 범행을 하지 않고 그 자리에는 있었지만, 그 복수를 해주는데 관객들은 ‘그 인물이 범행을 하지 않았구나’라고 생각하는데, 나중에 복수를 당하는 친구가 ‘너도 했잖아’라고 하면서 까발려지는 느낌이 들거든요. 그 자기도 했다는, 공범이라는 의식이 좀 전에 말씀하신 그런 과잉 순수, 과잉의 선함으로 드러나는 모습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성진수: 저는 공간에 있어서는, 아직 영화의 그런 것들이 기억에 자세히 남아있지 않아서, 각 영화에서 공간이 미장센적으로 차이 있거나 동일하게 그려지는지를 구체적으로 말씀을 드리기는 지금은 좀 어렵구요. 사실은 그냥 대체적으로 그런 세 편의 영화들이 어떤, 농촌 지역이라고 하더라도 수몰로 폐허가 되기 직전, 전승철이 사는 곳도 재개발로 무너진 곳에 남아 있는 아파트에 살잖아요. 그 교회를 갈 때 보면 저는 ‘저 쪽엔 길이 없나? 그렇게 힘들게 뛰어가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강조된 공간, <혜화,동>에서도 폐허가 된 재개발 지역을 강조하는 그런 선택들에 대해서, 지금 세 편의 영화 혹은, <사이비>는 조금 다른 것 같은데 개인적으로는, 두 편의 막다른 길에 있는 인물들을 보여주려고 할 때 굉장히 자주 선택되는 하나의 배경이기 때문에, 저는 그것이 특별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솔직히 말하면. 그것이 각 영화에서 어떻게 특별하게 다뤄지는가를 복기해서 말씀드리기가 어려운데, 특별하다고 생각되지는 않는데여. 그럼에도 불구하고, 흔히 일반 사람들과 우리가 영상물이라든가 많은 시각적인 것을 접할 때, 또 일상을 살아가면서 경험하는 우리의 시공간을 나의 기억에 담아낼 때, 매체도 선택적으로 아름답거나 평이한 것을 담아내고 내가 길거리를 갈 때도 보기 싫은 것은 선택적 삭제하는 방식으로 공간을 담아내기 때문에, 그런 의미에서 어떤 방식으로든 영화라는 것이 그러한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감추려고 하는 공간들을 끄집어내고 가져간다는 측면에서는 계속 있어야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은 들었어요.
정재형: 나는 이렇게 봐요. 크로노토프(Chronotope)로서의 시공간. 즉, 역사성의 시공간인데, 굳이 메타포적인 용어를 쓴다면, 중음계(中陰界)처럼 불확정적인 장소잖아요. 점이지대(漸移地帶), 일반적으로 얘기하는 변해가는 그런 장소인데, 바흐친(M. Bakhtin)이 얘기한 대로 크로노토프로서의 성격을 갖는다면, <혜화, 동>이 기억의 미로를 헤매는 장소로서 아주 인상적이었거든요, 그런데 그게 사실은 현실적인 공간이라고 얘기하기 어려울 정도로 굉장히 미묘하게 연출이 되어졌어요. 개가 마치 뒤를 돌아보고 살짝 살짝 꼬리를 감추면서 사라지고, 그걸 뒤쫓는 혜화의 모습은 정말 미스터리 속에 있었던 기성세대들이 뭔가 자기들을 억압했던, 세대의 문제이기도 한데, 사회가 갖고 있는, 그 기억의 회로를, 미로를 찿아 가는, 암호와 같은 궤적을 공간화 시킨 건데. 역사와 만나잖아요. 과거의 자기, 기성세대들이 억압했던 우리 사회의 사회성, 역사성을 갖고 있고.
<무산일기>도 상징공간들을 통해서, 현실공간이라고 얘기할 수 없을 정도의, 그런 공간이 있나, 할 정도의 공간을 통해서 보여주죠. 문을 열면 절벽이 있어 떨어질 정도의 공간, 작위적으로까지 느껴질 수 있는 공간을 통해서 사실은 역사를 드러내려고 했는데, 크로노토프적 인위적인 공간인데, 그냥 제시된 건 아닌 것 같아요. 우리가 그걸 암호로 반드시 풀도록 제시되는 공간, 크로노토프라고 보고 싶어요. <사이비>도 마찬가지라고 보여지거든요. 그래서 그것이 이제 용산이라든가 이명박 때의 개발, 말하자면 파헤쳐지기만 하고 결국은 제대로 되지도 않은 상태, 뉴타운 등 무수한 재개발 공사라든지, 우리에게 있었던 구체적인 역사적 공간들을 환기시키는 거죠. 구체적 역사들을 환기시키고 소환해내는 상징적인 공간으로서 제시된 것으로 해석한다면, 그건 정말 크로노토프고, 이런 서사물 속에서 아주 의도적이고 작가가 상상력으로 만들어내는 공간인데, 그것이 결국 지시하는 바는 실은 구체적인 역사에 대한 추체험이죠. 그걸 어떻게 해석해야 할 것인가죠. 결국은 그건 굉장히 비관적이죠. 나는 그래서 <혜화, 동>조차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대답을 줬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그건 엄정한 결말이라서 거기서 희망적으로 해석하고 싶어 하는 관객의 몫이 있을 뿐이지, 현실은 냉정하게 주어져서 이들 젊은이들이 희생자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죠. 우리 사회가 희망적인 탈출구를 전혀 제시하지 않는 닫힌 문이고,
<사이비>도 마찬가지구요. 비정상적인, 반영웅적인, 동정 받을 수 없는, 가장 인간적인 결함투성이의 인간이 결국은 진실을 얘기할 때 어디다 방점을 찍어야 할지 관객은 알 수 없는 것이고, 정말 수몰지구 그 자체가 인생이다, 라고 얘기했을 때, 아이러니로 느껴져요. 주인공이 마지막에 동굴 속에서 혼자 광적으로 기도하는 모습을 보면, 그냥 또 혼자 열심히 믿음을 갖는 그게 믿음이다, 이 세상에 객관적인 진실이란 게 없다, 라는 것이죠. 자기는 진실을 봤지만 자기 말은 아무도 믿어주지 않고, 그래서 답답하고. 그런 의미에서 진실은 영원히 실종되는 거죠. 항상 어긋나는 거죠. 세상에 정의가 있을 건데, 결국은 자기 같은 사람이 정의를 밝혀내고, 억울한 힘없는 사람들은 계속 이용당하고, 사실 이 세상에 정의는 없는 거거든요. 어떤 영웅도 없고, 구원도 없는 거예요.
수몰지구 자체에서 정말 빠져나올 수 없는, 누가 크레인으로 끌어내줘야 하는데, 수몰지구에 우리 자체가, 마을이, 빠져있다면 이건 뭐 희망이 없는 거죠. 굉장히 절망적인 것 같고요. <무산 일기>도 말할 수 없을 정도죠. 자기 관에 들어갈 수밖에 없는 거니까. 공간이 없잖아요. 그것도 공간의 아이러니인데, 그 공간의 메타포가 신선한 거고, 결국은 절망이란 거죠. 최근의 절망적인 시대상황이 닫힌 공간으로 표현된 거라 생각되어져요. 역사의 응어리를 풀지 못했다, 용산이든 재개발이든 많은 힘없는 서민들이 원한을 갖고 있는데, 그것에 대한 해결을 우리 사회가 하지 못하고 있다. 그것에 대한 절망을 인디 영화들이 보여준 게 아닌가 볼 수 있겠죠. 그렇다고 거짓 희망을 제시할 순 없고, 헐리우드 영화처럼 그럴 수는 없는 거죠. 정의가 승리하는 모습은 관객에게 영합하고자 하는 측면이죠. 그렇게 생각하고 싶어 하는 관객에게 그림을 제시하는 것인데, 사실은 어떤 해결도 없죠. 현실이 그대로 드러나는 거 아닌가. 지금 얘기한 모든 역사적 사실들이 실지로 해결이 안됐잖아요. 4대강 개발도 그렇고, 용산도 그렇고, 뉴타운 재개발도 그렇고, 어떤 문제에서도 사실은 해결된 게 없이 파헤쳐지기만 했고, 그냥 그렇게 된 거잖아요. 말 그대로 공사판이 너무 많은 거잖아요. 이명박이 청계천 복개처럼 말끔히 처리했어야 하는데 안했죠, 한 거는 서울 시장때 청계천 복개공사밖에 없어요. 대통령 때는 그냥 흘러갔죠. 용산도 완전히 끝난 게 아니죠. 제대로 보상이 안됐잖아요. 마음의 응어리가 풀리지 않았잖아요. 여전히 원한으로 남아있죠. 서민들의 집문제를 해결하는 뉴타운 문제는 계속 터지고 있잖아요. 지금도, 유령도시처럼 되어가죠. 그런 곳을 소재로 해서 영화를 만든 거나 마찬가지예요. <혜화, 동>에 나오는 폐허가 뭔지 알 수 없어요. 하지만 역사적으로 환원 시키면 분명 서울 어딘 가의 버려진 재개발지구일 수도 있죠.
이수향: <사이비>속의 수몰지구도 사실 그런 메타포죠, 4대강도 해결을 못하고, 파헤쳐놓기만 하구.
민병선: 이런 영화들은 예를 들어서 백년 후에, 오십년 후에 사료적 가치가 있다고 봐요. 2012, 13년 대한민국의 시대상을 살펴볼 때 말이죠. 지금 이 시대가 이 영화들의 동의를 얻는 자체, 우리가 너그러울 수가 없는 현실, 관용을 베풀 수가 없는 현실, 이런 절망들이 의미적 요소들로 자꾸 그런 장소가 이렇게 주 배경이 되고, 그것이 지금 시대를 반영하는 분위기가 되는 거라고 보일 것 같아요.
성진수: 근데 사실 저희가 본 세 편의 영화에서 공교롭게 그런 배경이 나왔지만 그렇게 많은 영화들에서 나타난 것 같지는 않아요. 의미론적으로 잠깐 채택을 하지 그런 공간이 그렇게 주된 요소로 사용되지는 않거든요. <상계동 올림픽>, 그런 식으로 정치학적인 영화가 있지 않는다면 말이죠.
이대연, 이수향:전 <피에타>도 그렇게 봤거든요.
성진수: <피에타>도 그렇긴 하지만, 그게 그렇게 많은 오늘날의 영화에서 나오는 것 같지는 않아요. 제가 기억이 안 나는지 모르겠지만.
민병선: 또 한편으로는 소재주의적인 측면도 있는 것 같아요. 이런 소재를 이야기에다 넣어서 뭐 좀 만들 수 있겠다, 이런 소재적 측면에서도 이런 경향이 나타난다, 라는 생각도 들긴 들더라구요. 소재를 찿다 보니까, 이야기꺼리를 찿다 보니까, 쌍용차, 용산 이런 소재들이 채택되어진다고 할까요. 아무리 인디영화라 해도 대중성은 확보해야 되고, 누군가가 봐줘야 되고, 호기심을 끌 수밖에 없는 창작자의 입장에서는 그런 생각을 안 할 수가 없으니까 말이죠.
정재형: 자, 세 편을 같이 아우러서 얘기할 만한 것들이 뭐가 더 있을까요?
민병선: 이 세편 다 인디로 분류 할 수 있잖아요. 근데 문득 인디 영화가 뭐지? 하는 생각도 좀 들더라구요. 상업영화는 보통 투자를 받잖아요. 근데 현재 한국의 인디라는 것은 투자를 못 받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지원을 받게 되잖아요. 세 편 다 지원을 받았어요. 지원을 받기 위해서는 심사를 받아야죠. 심사라는 틀안에서 지원을 받아야 되고. 인디영화가 아니라 지원영화들이거든요. 인디영화가 독립이라는 개념인데, 이게 뭘까? 의미적으로 상업영화는 돈을 벌기 위한 명확한 목적하에서 이야기로 단장을 하지만, 인디는 그런 거로부터 자유로운 거라는 건지. 왜 이런 생각을 하냐면, 인디영화를 만드는 분들이 다 지원에 목을 매고 있잖아요. 지원을 못 받으면 영화 못 들어가거든요. 그러니까 또 거기에 맞게 최적화되었다고 그럴까요, 이런 얘기들이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인디영화의 어떤 흐름들인 것 같아서 인디영화란 게 뭘까, 그런 생각이 드는데 영화 세 편 보면서 그 생각이 들더라구요.
정재형: 인디영화는 보는 관점에 따라서 얼마든지 편의상 나눌 수도 있지만, 그 현상을 가지고 용어에 대한 정의를 해볼 필요가 있어요, 저는 인디영화가 예술성을 추구한다고 보는데, 그 예술성이란 게 투자를 받는, 소위 돈을 만들어내는 가치의 오락영화들과 구별이 된다고 봐요. 사람들이 요즘 치유 이런 말 많이 하는데, 오락이라는 형태로 사람들을 즐겁게 만족시키면서 풀어주는 오락영화의 치유목적과는 달리, 예술영화는 관객들이 근본적으로 스스로 치유할 수 있는 힘을 갖게 만드는 목적으로 만들어지는 영화라고 보거든요. 영화 자체가 오락적인 몸짓을 심하게 하지 않는 거죠. 기본적으로 현실은 관객들에게 각자 잘 판단할 수 있게끔 계기를 주는데, 소위 메시지라고 얘기하는 부분을 더 많이 치중하는 거 아닌가 싶어요. 그러다 보니까 현실적으로 덜 오락적이긴 하지만, 진지하게 볼 만한 꺼리는 더 많은 거죠. 오락에 빼앗기는 시간, 공간을 훨씬 더 많이 다른 면으로 보여주죠, 오락 영화들이 보여주지 못하는 고발적인 측면이라든지, 새로운 면을 보게 한다든지, 다른 데서 다루지 않는 것들을 통해서 새로운 생각을 하게 한다든지, 우리 현실을 다른 각도로 바라보게 한다는 분명한 역할을 하기 때문에, 인디영화의 목적이나 존재이유가 찿아진다고 봐요. 다른 원론적인 구분이 있을 수 있겠지만, 지금 이 세 편의 영화를 통해 봤을 때, 비록 흥행을 하지 못했고 문제작으로만 남아 있을지라도, 인디영화는 충분히 질적으로 오락에 상응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분명히 다른 목적과 존재이유를 갖는다고 보고 싶어요.
성진수: 저도 지금 세 편의 영화를 죽 생각해보니까 인디영화라는 게 그 자체적으로 인디영화는 이러이러하다는 정의가 생기는 게 아니라, 주류영화에 이항 대립되는 측면에서 자연스레 생기는 것 같아요. 주류에서는 다루지 않는 거, 다룰 수 없는 거, 다루기 싫어하는 거, 그런 것을 어딘가에서 보충을 하고 보완을 해야 되니까, 그게 인디에서 하는 부분인 거 같아요. 예를 들어 연상호 감독의 애니메이션 영화처럼 강한 것을 소재로 다루는 게 주류에서 받아들여지거나, 혹은 미국의 70년대 폭력적인 영화들이 주류로 올라왔다 싶게 그렇게 시대적으로 주류가 되는 거고, 또 다루지 않은 다른 부분들이 인디에서 연상호가 있던 자리를 채우지 않을까 생각되네요. 인디라는 것은 상대적인 개념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정재형: 그 실례가 미국의 6,70년대 뉴 어메리컨 시네마라는 거죠. 뉴 어메리컨 시네마가 양식적으로 보면, 유럽 누벨바그 스타일의 자유분방한 영화적인 기법을 많이 차용했는데요, <이지 라이더 Easy Rider>라든가,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 Bonnie and Clyde>라든가, 반영웅적인 주인공, 오픈 엔딩이고, 혼란하고 분열적이죠. 정제된, 환영주의적인(Illusionistic) 영화가 아니고, 파편적이고, 애매모호함을 추구하는 그런 영화였음에도 불구하고, 60년대 말의 신좌파(New Left)운동과 그것을 이은 히피, 청년문화에 어필해서 헐리우드를 잠시나마 대체한 현상이 있었잖아요. 보수적이고 안정적인 스타일의 영화라기보다는 토론을 유발하는 혼란한 영화들이 한동안 헐리우드를 끌고 갔었죠. 그런 걸 보면, 대중에 따라서 영화들이 선택되어지는 거는 확실한 거죠. 인디가 주류가 될 수가 있죠. 주류라는 게 정해진 틀이 있는 건 아닌 것 같아요. 대중을 따라간다는 게 대중이 어떤 모습을 갖고 가는 지에 따라서 얼마든지 영화의 위치가 달라지는 거죠. <사이비>같은 영화를 좋아해서 1000만 관객이 들 수도 있겠죠. 물론 그런 일이 일어나지는 않았지만.
이대연: 근데 연상호 작품이 걱정은 많이 돼요. 애니메이션이 비용이나 시간이나 노력, 에너지가 굉장히 많이 들잖아요. 디즈니나 일본도 마찬가지지만, 캐릭터산업을 하거나 프라모델 산업을 같이 연계해서 가야 되는데, 그게 안 될 경우에 시스템화 되어 있는 구조들이 아니면, 위험하거든요. 한국은 시스템이 있는 게 아니라, 한 사람이 하는 거잖아요. 돈은 어떻게 계속 지원받을 수 있을 것이며, 두 편 다 보면, 위태위태하게 해온 것 같아요. 한편은 애니메이션 학과가 있는 학교하고 연결해서 간신히 만든 것 같거든요. 앞으로 또 어떻게 만들 수 있을까 라는 것. 감독한테는 항상 그게 큰 문제일 것 같아요. 그래서 마음이 좀 편치 않죠. 한참 가다보면 투자자들이 과잉해서 몰리기도 하겠지만, 그 유행이 끝나고 나면 한동안 한국 애니메이션은 초토화되죠.
성진수: 아까 연상호 그림체 얘기할 때, 정선생님께서 80년대 민중화 느낌이 난다고 하셨는데, 사실은 <마당을 나온 암탉>도 그림체가 조금씩 바뀌었더라구요. 약간 순화되긴 했지만, ‘민화(民畵)’있잖아요, 호랑이 선 굵게 나오는, 닭 같은 거 있고. 그 그림체를 따와서 했다고 하더라구요. 예전에 한번 최종 나오기 전에 초안 그림체들을 봤는데, 굉장히 강렬하고 약간 특별한 면이 있었어요.
이대연: 근데 그렇게 가질 못한 거잖아요.
성진수: 유럽화 시켰죠. 유럽에 수출하느라고.
정재형: 세련되어 있어요. 영화가 색깔은 화려해도, 투박함이 있어야 하는데, <마당을 나온 암탉>은 세련됐죠. 연상호는 동작도 리미티드잖아요. 근데 <마당을 나온 암탉>은 월트 디즈니처럼 유연하게 24프레임으로 간 것 같아요. 연상호는 18프레임이하로 해서 재패니메이션, 미야자끼 하야오처럼 툭툭 끊어지는 움직임을 보여주죠. 투박한 캐릭터에 투박한 움직임이니까 훨씬 더 투박하게 보였고, <마당을 나온 암탉>은 세련된 애니메이션 움직임에다 캐릭터는 민화에서 따오긴 했는데 좀 달라졌죠. 민화의 구도나 분위기가 소재로 나왔던 닭이나 꽃 등 같은 일상적인 소재를 많이 택하긴 했죠. 민화를 참고는 했겠죠. 그런 분위기가 있다는 생각은 들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굉장히 세련됐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자, 그럼 토론이 대충 된 것 같네요. 이 정도에서 마무리 했으면 합니다. 다들 수고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