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형: 그럼, <도희야>부터 이야기해보죠.
성진수: 일단, <도희야>를 본 제 총평부터 말씀을 드리자면, 이 영화가 제기하는 어떤 화두나, 그 화두의 중요성, 혹은 그 화두를 어쨌든 영화적으로 그렇게 다루는 진정성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없지만, 실질적으로 이 영화가 다루고 있는 내용에 대해서 어떤, ‘성찰의 여정’이라고 저는 표현을 했는데, 그 성찰의 여정을 관객들에게 충분히 제시하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좀 의문스러운 영화였습니다.
그 이유가 저에게는 크게 두 가지가 있었는데요, 이 영화는 기본적으로 한국 사회에 있는 폭력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영화이기는 한데, 실질적으로 영화를 보다 보면은 저는 이 영화에서 세 가지 폭력을 주로 다루고 있다고 봤어요. 하나는 소녀 도희한테 가해지는 폭력이 하나 있고, 그 폭력은 한국사회의 어떤 가족 중심주의라고 말할 수는 없고, 가족에 대한 신격화된 신화화된 가족, 가족을 바라보는 신화화된 시각, 혹은 나이에 따른 위계의 엄격함 그리고 가족에서 자녀를 소유물로까지 생각하는 어른들의 태도 이런 것들이 소녀에게 가하는 하나의 폭력이고, 그것과 더불어 도희는 자기 가족에게서 그런 폭력을 받으면서 공동체와 자기가 속한 또래 공동체에서까지 동일한 취급을 받는 그런 소녀에게 가해지는 폭력이 하나 있고,
또 하나는 이제 고용주의 폭력에 시달리는 외국인 노동자들을 향한 폭력이 있고, 또 하나는 이 영화의 영남이라는 배두나가 연기하는 영남이라는 인물한테 가해지는 폭력이 있는데, 세 가지 폭력이 영화에 존재하는데, 이 영화가 폭력을 다루면서 제가 아쉽다고 생각했던 지점은 무엇이냐면 실질적으로 이 세 가지 폭력은 동일한 폭력이지만 차이가 존재하거든요. 그것은 폭력을 생산해내는 구조적인 문제에 있어서 어떠한 지점이 더 그 폭력을 생산하는데 크게 작용하느냐. 물론 유일하게 여러 요소들이 배타적으로 작용해서 하나의 원인에 의해서 그 폭력이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 요소들 간에 무엇이 그 폭력을 생산하는데 있어서 큰 역할을 하는가에 있어서 서로 다른 지점에 있는 폭력인데, 그런 폭력은 이 영화는 그 폭력의 동질적인 부분에 포커스를 맞추고 있는 것 같아요. 그리고 그렇게 보여지는 영화적인 장치가 저는 두 가지라고 봤는데, 그 중에 하나는 이 영화에서 인물들을 서로 보여줄 때, 특히 폭력의 피해자가 되는 영남과 도희, 그 다음에 영남과 외국인 노동자 이 사람들이 서로 마주할 때 그 인물들을 보여주는 방식이 마치, 아 내가 받고 내가 어떤 폭력의 피해자인데 저 사람도 어떤 사회적인 폭력의 피해자이다 그래서 그 상대방으로부터 자기의 거울이미지를 보는 듯한 그러한 시각화가 많이 이루어지고 있는 지점을 발견함으로써, 다시 말해서 피해자들을 서로 동일화시킴으로써 이 모든 폭력을 한 가지로 표현하는 지점이 있고, 또 한가지는 이제 이 폭력의 근원이 한 명이거든요. 그러니까 사실은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그 공동체 전체가 그 폭력을 옆에서 방관하는 사람들이기는 하지만 구체적으로 폭력의 행위를 하는 사람은 한 명으로 다 그 세 가지 폭력이 다 집결되어 있거든요. 그러다 보니까 이 폭력들이 다 하나로 동질화되는 일종의 오류같은 것이 범해지고 있다고 판단이 들구요.
또 한 가지는 그런 과정에서 영화가 서사적으로 폭력에 대해서 이야기를 할 때, 사실 영화 전체에서 주가 되는 폭력의 이야기는 도희를 중심으로 흘러가거든요. 그러는 과정에서 나머지 두 가지 폭력의 문제가 하나의 설정으로 축소되는, 도희가 자신의 폭력으로부터 자기 스스로를 지키고 자기를 벗어나게 하기 위한 어떤 사실은 그 영화에도 젊은 남자 경찰이 그런 표현을 썼지만, ‘괴물’ 같은 행위를 하게 되는 설정으로서 나머지 폭력들이 사용이 되는 혐의가 굉장히 짙게 느껴졌어요. 왜냐하면 송새벽이 연기한 그 인물이 경찰서에까지 끌려가게 되는 이유가 그 송새벽이 외국인 노동자를 폭행했기 때문에 바로 끌려가잖아요. 그러면서 자기를 일종의 변호를 하기 위해서 배두나한테 폭력을 가하는 거죠. 배두나를 동성애자라는 이유만으로 미성년자 성추행범으로 몰잖아요. 그래서 이러한 폭력들이 연쇄 연쇄를 일으켜서 결국 도희가 그런 행위를 하게 만드는, 그렇게 사실은 조금 다른 차원을 가지고 있는 차이 나는 폭력들의 민낯이 그런 폭력들이 이루어지는 사회적인 어떤 여건이나 이런 것들이 서로 다른 시각에서 깊게 다루어지는 것이 필요한 서로 동질화하기에는 차이가 있는 폭력들이 같은 맥락에서 다루어지면서 하나의 폭력을 위해서 나머지 것들이 수단화되는 그런 혐의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구요,
또 한 가지는 이 영화에서 폭력을 대처하는 방식에 있어서 철저하게 배제된 것이 공적인 시스템 혹은 공권력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 영화 초반부를 보면서 제일 이해가 안갔던 순간이 뭐냐면 영남이라는 인물 집에 도희가 막 엉망이 되어서 처음 찾아왔을 때, 비를 맞았었나 그래서 이제 너 씻어야 되겠다 하면서 옷을 벗겼는데 등에 엄청난 매자국이 있었잖아요. 그 이전에도 영남은 실질적으로 폭행을 당하는 것을 목격까지 했어요. 그러면 처음 목격했을 때는 그래도 내가 외딴 곳에 왔고, 이 곳 사회를 모르고 자기가 이 곳에 왔으니 어떤 이러이러한 이유 때문에 왔기 때문에 의욕도 좀 덜했을 수 있고 여러 의미에서 경고 정도로 갔다고 한다면 사실은 공권력을 잘 알고 그것을 수행하는 대변자의 역할을 맡은 사람이 그런 상황을 봤을 때 취해야 하는 가장 상식적이라고 할 수 있는 행위는 그것을 사건화 시켜서 시스템 안에서 해결하려는 노력을 취했어야 했는데 이 영화에서는 그런 행위가 단 한 번도 없었다라는 게 굉장히 저는 아 저 장치는 그냥 영화를 계속 이어나가기 위한, 결론을 위한 그냥 저기서 저렇게 하고 가는 것인가 이런 의문이 들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반에 가서 굉장히 대비적인 영남의 행위로서 뭐가 있냐 하면, 송새벽이 외국인 노동자를 막 죽일 듯이 패잖아요. 그 때는 굉장히 단호하게 공권력을 개입시켜요. 그런데 왜 그 사건에서 그렇게 개입시켰던 사람이 도희의 사건에서는 개입시키지 않게 영화를 풀어놨을까. 그것은 이 영화가 너무 이 문제를 공권력이라는 사회적 시스템 안에서 풀거나, 혹은 사회적 시스템 안으로 이 문제를 연결시키면서 그 사회적 시스템이 가지고 있는 부조리함이라든가 무능함 이런 것을 드러내는 것을 너무 무시하지 않았나. 오히려 이 영화는 그러한 사회적 시스템을 배제하는 방식을 취함으로써 그러한 사회적 시스템이 안고 있는 문제점, 우리가 논의해야 할 문제점까지도 동시에 배제해버리는 그러한 어떤 오류에 빠지지 않았나 라는 생각이 들었고, 엔딩도 거기에 연계되어 있다고 봐요. 모든 것이 너무 사적인 영역에서 사적인 방식으로 해결되는 엔딩으로 가져간다는 측면에서도, 저는 사실 이 영화가 가지고 있는 폭력을 대하는 시각에서 지금 그 시스템에 대한 배제를 너무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아까 처음에 말씀드렸던 것처럼 이 영화가 가지고 있는 문제 의식에는 동의를 하고 문제 의식이 영화화 될 가치가 있다고 생각은 하지만 그 부분에 있어서 많은 아쉬움을 보여주는 영화였다 라고 생각이 듭니다.
안숭범: 네. 대부분 동의할 수 있는 내용인 것 같구요. 저도 뭐 다르게 설명은 되지만 비슷한 말들을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저는 일단 기본적으로 이 서사를 잘 이해하기 위한 첫 번째 컨셉은 남해, 순천이라고 나오더라구요. 그 이정표 상으로는. 여튼 그 남해 마을이 우리 한국 사회의 어떤 음흠한 일면을 드러내는 은유적인 공간이다. 거기에서부터 착안을 했어요. 그래서 이영남이 거기로 들어가서 한국사회의 어떤 음흠한 일면을 드러내는 촉매 역할을 하고 있는, 서사적 기능으로 보면요 인물을, 그런 측면으로 봤구요. 두 가지 문제가 있는 것 같아요. 진짜 감독이 하고자 하는 말은 두 가지 차원인 것 같아요. 그것이 약간 성공했냐 실패했냐 하는 것은 뒤에 논하겠지만, 감독이 하고 싶은 의도로 추측하는 첫 번째는 이 배타적 민족주의죠. 배타적 민족주의와 천민 자본주의가 결합했을 때 어떤 문제가 생기는가 예를 들면 한 마디로 그 박용하라는 인물이 소위 양아치죠, 근데 인제 불법체류자 브로커를 하고 있는데, 잘못된 일이죠. 그런데 그 마을 공동체 안에서는 박용하가 없으면 돌아가지 않는다고 사람들이 생각하는 거예요. 그냥 착한 사람들이예요. 그 마을에 사는 사람들은. 근데 지난 시간에도 나왔지만 이게 굳이 약간 비약시켜서 말하면 아렌트가 말하는 악의 평범성을 이야기할 때, 무사유죠. 생각하지 않음이 그냥 잘못인거죠. 왜냐하면 이 불법체류자의 인권이라든지 이런 것들은 그냥 무시되는 거죠. 먹고사니즘이죠. 일종의 천민자본주의와 배타적 민족주의가 결합된 지점이 있어요. 그것이 하나의 문제점인 것 같고, 또 하나는 이제 이성애 중심 문화랑 가부장적 질서가 만났을 때 또 어떤 문제가 드러나는가 이거죠. 그러니까 그 이영남이라는 인물도 그렇고 주인공의 입장에서 보면은, 저는 여기서 수잔 손탁을 생각했어요. 은유로서의 질병을 보면 특정 질병에 대한 정보가 부재하고 연구가 더디면은 그 질병에 대한 과도한 공포가 생기고 제도적으로 그것을 막으려고 하잖아요. 사실 동성애라는 것이 그런 문제인거죠. 우리 사회 안의. 그래서 이영남이 그 마을안에 들어갔을 때 동성애에 대한 혐오와 가부장적인 질서 있잖아요. 박용하와 의붓아버지죠, 도희 사이에 있었던 두 사람의 관계가 그것을 아주 정확하게 보여주는 것인데. 그것이 결합되었을 때의 문제점을 가지고 후반부의 스토리를 다 이어가더라구요. 결과적으로 그런 두 가지 점을 말하려고 했다 라는게 느껴지는데 이제 첫 번째 배타적 민족주의와 천민 자본주의가 결합된 그 지점이 정확하게 설명이 되었는가. 그런데 왠지 욕심은 있는데 예를 들면 인도인 그 박힘이라는 인물도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서 너무 도구적으로 희생된 그 인물은 전혀 입체성을 띄고 있지 않아요. (누구?) 인도인 불법 체류자. 그러니까 그 친구 같은 경우에는 그냥 감독이 의도한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서 도구적으로 사용되기만 하지 어떤 입체성을 전혀 띄고 있지 않기 때문에 영화가 너무 평면적으로 흘러간 측면이 있고. 또 하나는 마을 사람들도 마찬가지죠. 마을 사람들의 캐릭터들도 결국 먹고 사는 문제에 의해서 배타적 민족주의와 천민 자본주의라고 제가 표현했지만, 이 주제를 드러내기 위한 어떤 전제조건으로서의 최소한의 대사, 최소한의 역할만 하고 끝나 버린 거죠. 그래서 이 영화가 활기가 좀 없는 거죠. 이 주제와 관련해서. 그래서 그런 느낌들을 좀 가졌구요. 다른 내용들은 다음에 하겠습니다.
이수향: 네. 말씀 잘 들었는데요, 저는 약간 생각이 좀 다른 것 같아요. 저는 이 작품의 주제가 다 말씀하신 부분들이 포함이 되어 있긴 해요. 공권력, 폭력의 문제, 배타적 민족주의, 천민 자본주의 다 들어 있는데, 제 생각에는, 작품 제목이 ‘도희야’잖아요. 제목은 ‘도희’라는 김새론이 맡은 그 역할에 중점을 둬야 된다고 생각을 하는데. 저는 사실 이 영화에서 감독이 의도한 것이 결코 중심에 이주노동자나 자본주의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문제는 지난 시간에도 이대연 선생님이 얘기했었는데, 호모 사케르라고. 그러니까 벗어나 있는 존재, 규정될 수 없는 그런 존재들이 있는데 그것은 소외되고 예외적인 삶을 살게 되는 그런 존재들인데 그런 사람이 세 명이 등장을 해요. 호모 사케르로. 첫째는 도희죠. 도희는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지켜줄 사람이 없고, 근본도 애매하고, 친엄마조차 없는 그런 도희가 가장 중심에 있고, 그를 같이 협조하고 있는 인물로 나오는 배두나. 이 중에서 그나마 낫긴 하지만 그래도 그 역시 여성 동성애자라는 굉장히 우리 나라에서 예외적인 지점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문제가 되죠. 그리고 세 번째 아까 말씀하신 맥락에서 노예 계약, 요새 신안 성노예라든가 노예계약이나 혹은 또 이주노동자들의 문제가 들어가요. 이 세 가지의 핵심이 이 영화를 관통하고 있는데, 세 번째는 저는 이런 외딴 섬이나 지방을 이야기하기 위한 하나의 곁다리라고 생각하고 중심은 이것에 있다고 저는 개인적으로 보지 않았어요. 그래서 이런 일단계적인 세 맥락을 보여주고, 그 다음에 이 영화에서 제가 제일 재미있었던 부분은 이런 사람들이, 특히 약한 자가 잘못된 방법으로 복수를 하거나 문제를 해결하려 할 때, 그걸 보는 우리의 시선이 어때야 하는가 하는 부분이 제일 문제가 있고 재밌었는데, 그러니까 김새론, 도희가 하는 행동이 되게 신기한거죠. 우리는 누구나 그 아빠가 잘못된 걸 알지만 그 아이가 그 행동을 해서 해결하려고 하는 방식을 어떻게 봐야 하느냐 이게 가장 문제가 된다고 저는 생각을 했고. 저는 여기서 더 재밌었던 게 <한공주>에서 제가 개인적으로 아쉬웠던, 뭔가 공주의 슬픔과 죽음을 모두가 기원하는 상황에서 결국 되게 씩씩하게 맞서지만 뭔가 죽는 것으로 끝나 버리는 그 한계를 이 영화에서는 돌파하고 있는 지점이 있다고 저는 생각했어요. 약자를 문제 삼는 것은 많이 할 수 있죠. 그런데 문제 삼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대로 두지 않고 영남이 손을 내밀었다는 거. 그런데 영남이란 존재가 사실 아까도 얘기했듯이 본인도 상처를 안고 있는 예외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그게 굉장히 피상적인 말일 수도 있는데 일종의 약자의 열매라고 할까요. 그를 구원해줄 수 있는 사람이 같은 예외적인 존재의 상태의 사람일 수밖에 없다 라는게 저한테는 재밌었고, 하지만 그것을 해결하는데 있어서 감독이 굉장히 현실적이라는 생각을 저는 개인적으로 했던 게 영남이라는 사람의 직업이 파출소장으로 나오잖아요. 굉장히 특이한 직업이고 여자가 잘 하지 않는 단곈데 그러한 직업으로 굳이 설정한 이유가 뭐냐고 봤을 때 이들의 이러한 문제점이 있는 삶을 조금이라도 현실 가능성이 있게 만들기 위해서는 그 중의 한 명이 어른이고 그나마 좀 힘을 가질 수 있는 배두나가 공권력 그 다음에 어떤 권력 여기선 제복이나 모자로 표현되죠. 그런 걸로 가질 수 있는 어떤 힘을 가진 사람으로 설정해야 했기 때문에 배두나를 그렇게 설정한 것이 아닌가.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결론에 비가 내리고 도희는 자고 있지만 고민하는 배두나의 표정에서 우리는 뭔가 이 사람들의 미래가 그렇게 밝지 않을 수 있겠다 라는 걸 알게 되죠. 그러니까 저는 이 영화를 보면서 감독이 생각한 부분이 분명 했고, 그 부분을 이루는 데는 어느 정도 성취를 이루지 않았나 라는 측면에서 저는 좋게 봤습니다.
정재형: 네. 저는 인제 좀 비슷한 수향씨 얘기와 비슷한 부분도 있고. 제가 이 영화를 봤을 때 ‘도희야’라는 제목을 보고, 분명히 주인공이 영남인데 왜 ‘도희야’라고 했을까에 의문을 가졌어요.
저는 이 영화가 제기하는 것은 성, sexuality죠, 성과 젠더gender에 관한 주제라고 봅니다. 그래서 주인공 영남은 레즈비언이고 그것을 제복 사회에서 인정하지 않죠. 그러니까 저는 이 영화를 제복과 동성애의 관계로 푼다면, 제복이 법과 정의를 의미한다면, 한국의 법과 정의에서는 동성애가 용인될 여지가 없다. 즉, 이 영화에서 제복 뒤에 숨겨진 영남의 억압된 것이 뭐냐. 그것은 동성애적 성욕이죠. 그것이 억압되었다는 증거는 그녀가 불면증 때문에 항상 술을 마시는 거죠. 불면증은 표피적인 이유고 음주는 영남의 억압된 성욕을 애써 잠재우려는 장치라고 봐야 합니다. 근데 그 영남의 억압이 도희를 통해서 환기되고 살아난다고 봅니다. 하지만 도희와 연루된 사건을 통해서 영남은 자신이 더 이상 관습 속에서 자유로워지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영남은 도희로부터 벗어나고 싶어 하죠. 하지만 결국 그녀는 도희에게 돌아오고 자신이 도희를 보호함으로써 또 자기의 자유를 얻는다는 깨달음을 보여주고요. 자신의 문제는 해결하지 못하지만 도희를 도와줌으로써 자신의 문제를 해결할 실마리를 찾는다라는 이야기라고 보고요. 그것은 문제를 풀려고 하는 사람들끼리 서로 이해하고 도와줌으로써 해결책을 마련한다라는 것이죠. 기존 사회적 관습의 용서를 구하지 않고. 그런 조금 래디컬한 측면도 있다고 봅니다. 레즈비어니즘이 갖고 있는 래디컬리즘이죠. 말하자면, <안토니아스 라인>에서 보여주는 것처럼 남자사회에 살면서 남자에게 구걸하지 않고 자신들의 공동체를 통해서 모녀관계로 대를 이어 가면서 인류가 생존해나갈 수 있다라는 것을 보여줬듯이, 여기서도 도희에게 ‘나하고 갈까’라는 대사를 통해서. 마지막에. 그래서 이 제목과 동성애 코드로 저는 봤는데요, 영남을 취조하는 동료 형사들이 영남을 동성애자이기 때문에 인격무시적 발언을 자행하죠. 그것이 이 사회에 그녀가 기댈 곳이 없다라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는 장면이구요. 영남이 경찰서에서 주위를 둘러보는 장면이 그런 것이죠. 여자 경찰은 한 명도 없죠. 모두 남성이고 그들의 시선은 경찰의 시선이 아니라 사실 남성의 시선입니다. 그래서 영남은 남성 이성애자에게 둘러싸여 있고, 그녀의 편을 들어줄 경찰은 없죠. 영남은 도희가 자신과 같은 처지라는 것을 알고 그녀를 보호하기로 결심을 하죠.
그 다음에 저는 이 영화의 아이러니한 부분이, 아이러니한 것이 도희가 거짓말을 하고, 그 거짓말에 의해서 영남이 구출이 된다는 그런 에피소드인데요, 그것은 역사라는 것은 진실한 것만은 아니다 라는 생각을 하게 했어요. 영남을 구속한 것은 동성애를 허용하지 않는 사회의 위선인데, 그 송새벽 용하가 영남의 약점을 이용해서 영남을 구속하고 자신에게 주어진 영남으로부터의 단죄를 벗어나죠.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도희가 용하를 구속하기 위해서 거짓을 꾸미고 그 덕에 영남이 구원이 된다라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벌어지죠. 그래서 이 문제를 어떤 결론이 있다고 보지는 않아요. 그런데 저는 그걸 느꼈어요. 사실은 역사가 픽션이라고 하잖아요. 우리가 역사를 객관적 진실로 보고 싶어하는 욕망이 있지만, 사실은 역사라는 것은 흔히들 말할 때 정복자의 역사다 이렇게도 말하고, 그것을 서술하는 사람의 역사다 이렇게 얘기하듯이 이것을 역사 진술이라는 것으로 확대한다면 과연 그 진술은 진실한 것인가. 그렇지 않은 거죠. 그런데 이것을 조금 비약시켜서 형식적인 문제로까지 비약시켜서 해석을 한다면 이렇게 해석이 됩니다. 우리가 보는 사운드와, 영화에서의 사운드와 화면의 진실은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거짓인가 라고 할 때, 영화라는 것 자체가 하나의 서술이지 않습니까. 그런 측면에서 도희의 거짓말이 통한 것은 그녀가 모습이 아닌 사운드만을 경찰에 내보냈기 때문에 경찰이 믿고 용하를 구속했지 않습니까. 그 사실이 영화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것 같다고 저는 느꼈어요. 그래서 확대 해석이지만, 우리의 현실과 영화적 진실이라는 것을 등치적인 관계에서 놓고 해석했을 때, 분명히 영화 속에서 사운드만을 가지고 했는데 그것이 통한 것이고 그것은 거짓말이고. 그랬을 때 우리가 영화를 본다는 것은 사운드를 듣고 영상을 본다는 것 아닙니까. 그런 것들이 사실은 거짓이지만 우리는 진실로 믿는 것이죠. 그랬을 때, 그러한 사실은 우리 사회의 진실이 어떻게 조작되고 성립하는가의 과정을 아주 함축적으로 담아낸다고 저는 봅니다. 아이러니하죠. 그래서 많은 생각을 하게 했어요.
민병선: 저는 영화를 보면서 이런 유의 영화에서 갖게 되는 기대치가 무얼까 생각했어요. 문명사회와 야만사회의 대립구도를 어떻게 풀까? 결론적으로 좀 실망스런 부분이 있었어요. 그 이유는 신인감독의 과잉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연출이 이런 비유를 했어요. 집에 사는 고양이가 있는데 새로운 고양이가 들어와요. 집에 사는 고양이는 예쁨을 받고 싶어서 주인의 신발에 쥐를 놓아두어요. 주인은 화가 나서 집고양이를 혼내요. 그랬더니 이번에는 쥐의 가죽을 벗겨서 신발에 놓아두니까 화가 나서 집고양이를 내쫓아버려요.
쫓겨난 고양이는 너무나 좋아하는 사람한테 가장 소중한 것을 선물하고 싶었던 거예요. 하지만 오히려 오해와 왜곡을 낳고 모순이 된다라는 건데, 이걸 도희라는 아이에게 심고 싶었던 것 같아요.
문명과 야만이라는 대립구도에서 문명인이 야만사회로 들어갔을 때, 영남(배두나)이 제복을 입고 법과 정의를 상징하잖아요. 그때 예측 가능한 결론이 있어요. 그 안에서 희생이 된다던가, <김복남 살인사건의 전말>처럼 야만 속에 있던 주인공에게 구원이 이루어지지 못한다던지, 저는 이 지점에서 감독이 새롭게 뭘 하고 싶었구나 이런 걸 느꼈다. 그런데 그게 과잉이고 무리수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구원하러 오는 사람, 영남(배두나)이 가지고 있는 결핍이 야만 속에서 이타성을 가지고 구원을 하러 오는 줄 알았는데, 본인이 결핍되어 있기 때문에 도희가 오히려 결핍을 메워주는 방식으로 바뀌면서, 영남의 결핍을 채워주기 때문에 오히려 이기적인 사랑으로 바뀐다고 볼 수 있어요. 그래서 결국은 결론으로 가기 위해서 도희가 구원의 대상에서 구원자로 치환이 되어버려요. 그 지점에서부터 저는 이야기가 과잉이라고 봐요.
구성적인 면으로 볼 때, 극적국면에서 이야기를 발전시키기 위한 행위는 정당한데 과연 핍진성이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후반부로 넘어가면서 아동에 대한 폭력이나 학대, 너무나 다양한 폭력을 심어놓았는데, 알고 보니 폭력이 주가 아니라 장치화 했고 결국에는 동성애를 이야기 하더라. 이런 방식은 엉뚱하지 않나요? 제가 보기에 둘은 연인이에요. 여길 떠나서 도희는 몇 년 안에 성숙해질 테고, 둘은 사랑하는 연인이 된다라는 이야기예요.
저는 렛미인이라는 영화가 떠올랐어요. 결핍으로 인해 보호의 대상인 줄 알았던 상대가 알고 보니 더 센 능력이 있어서 오히려 나를 구원하고, 끝에 가서는 둘이 이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끼리의 삶을 만들자 라고해서 떠난다라는 과정이 비슷했어요.
저는 연출이 하고 싶은 얘기가 너무 많았거나, 혹은 동성애를 얘기하고 싶었는데 무리가 있어서 상업영화로 만들기 위해서 현재의 소재(아동학대)와 구성으로 바꾸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결국은 하고 싶은 얘기는 동성애라고 보이는데, 한쪽은 폭력이라는 구조와 다른 하나는 동성애라는 또 다른 원이 끝에 가서 만나는 게 효과적이었나 의문이 들어요.
정재형: 난 좀 다르게 생각하는데요. 일단 윤성은 씨부터.
윤성은: 총평부터 하자면 전체적으로, 지난번에 <한공주>라는 영화를 다루면서 대체적으로 좋은 영화로 의견을 모았잖아요. 그래서 그런지 독립영화에 대한 기준이 높아진 것 같아서 <도희야>를 보면서 좀 실망스런 부분이 있었습니다.
정재형: 나는 베스트던데. (일동 웃음)
윤성은: 장점이 많은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연출적인 측면에서 이미 지적한 부분들이기는 하지만, 인물들의 케미가 잘 안 살았다 이런 이야기를 했었는데, 결국에는 배우들 각각의 응집력이 부족했다 라는 생각이 들어요. 너무 하고 싶은 말이 많아서 그랬을 수도 있고 아니면 표현하는 방식에 있어서 연출이 부족했을 수도 있는데 어쨌든 총평은 장점이 많지만 전체적으로 봤을 때 작위적인 측면이 도드라지게 보이면서 완성도가 떨어지지 않아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제가 집중해서 하고 싶은 부분은 배두나라는 인물과 도희의 관계에 대한 부분인데요. 배두나의 경우 여성이고 동성애자이고 공권력을 가지고 있는 파출소장이잖아요, 이런 인물은 이때가지 영화 속에서 보기 어려웠던 거 같아요. 항상 소외받는 계층이 권력을 가지지 못한 경우가 많거나, 동성애자의 경우는 주로 예술가나 음악가로 그려져 왔었고, 이렇게 사회 내부에서 권력을 가진 사람으로 그려진 적이 많지 않았던 것 같아서 좀 그런 특수성을 가지고 인물을 구상했던 것 같아요.
전 배두나를 중심으로 봤을 때 오랜만에 페니미즘으로 깊게 들어갈 수 있는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최근에 사실 본격적인 페미니즘 영화가 많이 등장하지 않는 이유가 사회적인 분위기가 그래서, 여성의 교육 수준이 높아지고, 부부가 가정에서 함께 벌고, 함께 소비하는 주체가 되면서 희미해진 것 같아요.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물어보는 부분이 요즘 가정이나 학교에서 여성이기 때문에 당한 차별이나 불이익이 있냐 물어보면 오히려 역차별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거나 차별 받은 적이 없다고 해요. 많이 달라졌구나 생각하지만 아직 학생이기 때문에 그렇다, 직장인이 되고 사회 구성원이 되었을 때 그 구조에는 여전히 성차별이 존재할 수밖에 없는 구조가 남아있다, 말을 하곤 하는데 이 영화는 그런 부분을 다루죠.
첫 번째 장면에서 소장님(배두나) 오셨을 때 사람들의 표정과 대우는 순수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면에는, 젊은 여자가 계급장 달았다고 얘기를 했었는데, 이런 표현이 들어가면서 여성에게 가해지는 시선들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아이러니라는 부분이 그녀의 남들과 다른 성적 정체성의 구분이라던가, 여성으로서 계급장을 달고 있는 부분들과 대비되는 아이러니가 있는 거죠. 인물 안에. 벌어지는 사건들이 설득력을 얻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무엇보다 도희(김새론)와의 관계에 있어서 작위적이라고 말한 부분은, 도희가 구원자로 치환 되는 과정에서 벌이는 상황극 같은 것들이 붕 뜨면서 비현실적으로 가버려요. 연출이 이때까지 스릴러라던가 이런 부분에서 도희가 했던 역할이 그런 거잖아요. 모습을 바꾸면서 계급장을 달고 영남을 닮아가려는 하는 그런 부분부터 시작해서 조금씩 소름끼치는 행동을 하잖아요. 그런데 의붓아버지를 상대로 벌이는 상황극은 이해하기가 힘들고 들어냈으면 하는 부분이에요. 극적 장치로 어쩔 수 없는 부분이라고 했을 때, 그래도 이 영화의 특징으로 짚을 수 있는 좋은 부분은 도희가 왜 그런 행동을 했을 수밖에 없는가에 대한 지적이 잘 드러나 있어요. 이 아이는 엄마도 없고, 정체도 모호한 의붓아버지와 할머니 밑에서 자라면서 자길 돌봐줄 수 있는 사람에게 찍소리 못하고 맞고만 있어요. 그걸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상황, 그리고 배두나를 만나서 절박하게 매달리면서 어떻게 보면 스스로 보호해야 되는 상황에 놓인 아이잖아요. 그래서 젊은 경찰과 같은 캐릭터는 <방황하는 칼날>에서 보았던 젊은 경찰의 캐릭터와 거의 흡사한 입장이었는데요. 나중에 젊은 경찰이 영남에게 “걔 좀 이상하다”, 어린 괴물이라는 표현을 썼잖아요? 그래서 괴물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배두나는 자기와 동질감을 갑자기 느끼면서 괴물을 구제해 주기로 한 거죠. 그래서 마지막 부분에 이야기 하는 것은 이 사회가 만들어내고 있는 괴물, 괴물이 아닌데도, 괴물처럼 존재하는, 만들어져 가는, 배두나도 마찬가지고요. 그런 과정의 이야기들을 담아내는 데는 괜찮은 영화였다는 생각이 듭니다. 마지막으로 도희의 캐릭터가 연기를 잘했는데도 불구하고 끈끈한 케미, 그런 부분에서 조금 부족했던 거 같아요. 그런 부분이 아쉬워요.
박태식: 영화를 보면서 처음에는 약간 혼란스러웠어요. 거기에는 여러 가지가 들어가 있는데, 가정폭력도 들어가 있고, 외국인 불법체류자의 인권, 동성애, 나중에는 공권력까지 굉장히 많은 코드가 들어가 있어서 어떻게 수습하려고 그러지? 그 생각이 들었어요. 감독은 마지막 한방에 큰 기대를 했던 거 같아요. 마지막 한방으로 다 쳐버리려고.
이 영화의 기본적인 걸 보기 위해서 감독이 무슨 얘기를 하려고 하는가, 그 얘기를 들으려고 노력했어요. 내 선입관 보다는. 먼저 감독에게 들어보자. 감독이 애기하고자 했던 걸 들어보면 상황을 이렇게 본 거 같아요. 마을에 갔더니 그곳에는 폭력이 있어요. 그 폭력이 흘러가다보면 결국에는 송새벽한테 가는 거예요. 그는 폭력을 휘두르는 이상한 남자인데 그로 인해 마을에 질서를 잡는 사람으로 특권이 있어서 폭력을 휘둘러도 눈감아주는 측면이 있어요. 반대편 끝에는 도희라는 아이가 있어요. 이 두 인물을 극단적으로 대비시켜 놓아서 폭력이 가지고 있는 속성을 보여주려고 했던 거 같아요. 한쪽은 아주 강하고 다른 쪽은 당하기만 하는.
저는 영남(배두나)을 아주 재미나게 봤어요. 영남이 서장인 문성근한테 가는 장면이 나와요. “납작 엎드려 있어. 사고 쳤으니까. 일년 있다 올라올 테니까.” 남도로 간 영남은 원래 도희 일에 관련이 되어서는 안 되는 위치예요. 몸을 낮춰 엎드려 있다가 다시 나와야 하는데 도희한테 걸려들잖아요. 세상은 내가 원하는 대로 되는 게 아니다 라는 걸 감독이 좀 보여줘요. 영남이 가다 보니까 너무 지쳐. 그래서 중간에 발을 빼려고 하는 장면이 나오잖아요. 도희 일에 관여 하다보니까 너무 멀리 왔어. 계속 하기에는 힘들잖아요. 그러니 발을 빼려고 비겁한 자세를 영남이 몇 번 보이잖아요. 도희가 가지고 있는 괴물 같은 측면. 이해를 해보려고 했는데 그럴 경우가 있어요. 우리 나눔의 집에 결손가정의 아이들이 있어요. 다섯 살 때 이미 결손가정으로 아무도 도와주지 않고 혼자 살아가야 하는 아이들이 있더라고요. 그 아이들이 굉장히 약아요. 우리가 그 나이에 도저히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들을 생존을 위해서 살아가기 위해서 하는 거예요.
도희는 거기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 건가, 몇 년 동안 계속 맞고, 도저히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 험악한 환경에서 아이가 살려면 괴물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야성만 남아요. 그래서 도희가 가지고 있는 괴물이라는 것도 어느 정도는 수긍이 가더라고요.
<도희야>에서 제일 마음에 들었던 것이 결론이에요. 도희가 경찰서에서 나오잖아요. 인형 가지고 설명을 하면서, 행복에 차서 둘이 얼마나 좋았었는지. 그러나 나오고 보니까 경찰이 이야기를 해주는 거예요. “저 지금 어디가요?”, “집에 가지.” “소장님은요?” “떠나가지.” 집에 가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데? “네 아빠 무죄로 나와.” 그러니까 도희가 다시 아빠랑 살아야 되는 거예요. 살아남아야 되잖아요. 그때 김새론의 표정연기가 좋더라고요. 생각을 해야 하잖아요.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자기가 해결해야할 상황인 거예요. 그때의 감정변화, 상황이 이렇게 되는 거네. 자기가 다시 옛날의 그 지옥으로 돌아가야 되는 상황이란 걸 인식하면서 꾀를 짜내는 거예요. 그 표정이 보이더라고. 감독이 요구를 했겠지. 이때 표정이 만감이 교차하면서 뭔가 꾀를 짜내는 표정을 지어봐라. 그걸 김새론이 맞춰서 하는데 이 아이가 연기를 참 잘한다고 느꼈어요.
마지막 장면에, 처음에 들어가는 날은 햇빛이 환하게 비췄어요. 나오는 날은 비가 왔잖아요. 반대가 되야 할 것 같은데 왜 그런가 했더니 내 추측인데, 김새론을 차에 태우고 나오잖아요. 갑자기 도희가 앉은 창가 쪽이 뿌옇게 되는 거야. 도희가 입김을 내뿜는 거예요. 아 도희가 이제는 편안하게 잠을 잘 수 있구나. 너무나 험한 세상에서 엄마 품으로 돌아와서 이제는 제대로 잠을 잘 수 있는 그 모습을 보여주는 구나. 그런 생각을 해봤어요. 그러니까 입김이 나오면서 그 표정을 보니까 제대로 된 잠을 처음 자보는 거죠. 아까 얘기했듯 동성애 코드나 이런 것들이 어설픈 면이 있어요. 감독이 의욕적으로 너무 많이 집어넣어서 헷갈리는 면이 있어요. 결국 얘기는 그거 같아요. 도희가 결국은 구원을 받는, 그래서 마지막에 해피엔딩으로 가는, 둘이 나중에 동성애가 되든 상관없는 문제인데, 그런 면에서 감독이 신인이라서 표현의 미숙함이 있지만 그래도 상당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잘 만들려고 하는 노력이 돋보여요. 예를 들어 할머니를 네가 죽였느냐? 물을 때 죽였다는 말을 한 적은 없고. 도희의 대답이, “맞지 말라면서요.” 마지막에 가서도 할머니를 네가 죽였냐 묻자 눈물을 흘리는 장면, 도희가 죽였겠죠. 하지만 도희가 살아남으려고 그 안에서 열네 살짜리가 만들어 낼 수 있는 최대한의 작전을 썼구나. 연민이 느껴지면서 결론이 정말 잘 됐다 싶더라고요.
정재형: 제가 본격적으로 얘기를 할게요. 저는 <도희야>를 굉장히 좋게 보고요. 동의하는 부분은 처음에 중반정도까지는 혼란스럽게 봤어요. 그래서 왜 혼란스러웠던가 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제 스스로는 잘 모르지만 나중에 혼란이 수습이 되면서 이 영화는 섹슈얼리티의 코드로 풀어나가야 되는 영화라는 것을 제가 분명하게 읽었어요. 젠더 섹슈얼리티에 대한 부분은 메타포를 많이 사용을 했기 때문에, 그리고 두 번째로는 그것이 한국 사회 자체를 정치적 억압, 사회적 억압의 문제로 건드리기 때문에 역으로 다양한 주제로 해석될 수 있는 혼란을 주었구나 이렇게 생각을 했죠. 결코 이것이 젠더 섹슈얼리티 문제에서 벗어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을 중심으로 놓고 봐야겠다, 라는 점에서. 예를 들면 이런 거죠. 괴물은 메타포죠. 사실은 퀴어라고 하지 않습니까? 섹슈얼리티 문제에서. 섹슈얼리티는 동성애와 이성애의 갈등을 그린 것인데, 이성애에 대해서 동성애의 질서를 퀴어라고 부르기 시작했지요. 이상하다는 것, 기괴하다는 것. 그래서 동성애자들을 흔히 괴물이나 전염병으로 비유를 했어요. 거의 에이즈에 가까운 전염병, 인류를 멸망에까지 이르게 할 수 있는. 사회에 위협적인 질병으로 규정하는 메타포가 있었죠. 그것으로 해석이 되어지고요. 영남의 제복은, 미국영화 캐서린 비글로감독의 <블루 스틸>을 보신 분은 아시겠지만, 제복이란 것은 법과 정의를 상징하는 일차적인 상징을 떠나죠. 여성이 경찰이 되었다는 것은 남성 가부장 사회에 있어서의 도전을 의미하는 겁니다. 이미 미국영화에서 처음으로 제대로 보여준 것이 제이미 리 커티스 주연의 <블루 스틸>이죠.
그 영화의 완성도를 떠나서 여자는 경찰이 되어도 법과 정의로부터 보호받지 못하는 걸 보여주죠. 굉장한 아이러니를 갖고 있는 거죠. 이 여자가 제복을 입었다는 사실은 하나의 상징이거든요. 남성권위에 도전하는 영역이라는 것이죠. 법과 정의는 남성만이 휘두를 수 있는 권위인데, 그 성역에 여성이 도전하고 있다는 거예요. 라깡의 정신분석이론이 그대로 설명이 되죠. 남근(권력)을 취하고 있다는 행동을 보여주고 있는 거예요. 여성이 그 자리를 갖는다는 의미는 이런 거죠. 남성들이 그 여자를 가만이 두지 않는다는 것은 상대적인 리액션을 동반한 겁니다. 이 여자를 어떤 방식으로 퇴출시키냐 하면 동성애, 즉 레즈비어니즘이라는 한국사회에 서 허용하지 않는 코드를 적용해서 영남을 퇴출시키죠. 굉장히 절망적인 상황에 봉착해 있습니다. 자기가 원하는 지위를 얻지 못하고 계속 퇴출되죠. 하향되어 지방에까지 오게 되는거죠. 중심의 위치에 가질 못해요. 법과 정의를 휘두르려 하지만 번번히 좌절하죠. 이 영화속의 폭력은 가부장의 폭력입니다. 가부장사회는 이 여성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네가 제복을 입었다해도 너는 우리 영역에 들어올 수 없다, 라는 갈등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 사회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감독이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 영화의 주제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죠. 영남의 절망은 거기에 있고, 그녀는 현재 절망합니다. 영화는 절망의 상태에서 시작합니다. 자신의 애인으로부터 떨어져 있고, 영남은 남성사회에서 퇴출되어 있죠. 어떠한 희망도 갖지 못하고 있는데, 도희라는 여자와 우연히 조우하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영남은 도희가 자기와 같은 경로를 겪고 있다는 걸 문득 깨닫게 됩니다. 그렇지만 도희를 구원할 생각을 하지 못합니다. 무능력한 어른이죠. 영화와 직접 관련은 없지만 이 영화를 보면서 세월호의 참사를 떠올렸어요. 영남이 어른이지만, 어린 도희를 구원하지 못하는 무능력함이라는 공통지점에서 말이죠.
그러나 마지막에 “같이 갈래?"라고 구원의 손길을 내미는 데서 끝납니다. 둘이 이후 어떻게 될 지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합니다. 영화는 물음표를 남기고 끝나지, 도희를 구했다,가 아닙니다. 이 영화는 작게 보면 여성의 절망적 상황을 그리지만, 크게 보면 한국가부장사회를 비판하는 멧세지를 정확하게 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걸 풀어나가는 방식에서 동성애를 적용했다는 점이 다른 영화와는 달리 높게 평가할 만한 점입니다. 한국의 페미니즘 영화라 하면 퀴어적인 배경을 갖지 않았습니다. 이 영화는 한국 가부장사회를 비판하면서 동성애의 근거를 갖다 대고 한국사회를 치유하려는 방법론을 적용했기 때문에, 대단히 놀랍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영남이가 주인공이지만, 제목이 왜 ‘영남아’가 아니고 ‘도희야’인가, 라고 생각하는 데에 끝없는 의문을 가졌습니다. 도희는 영남과 같이 숨겨진 코드, 메타포를 갖고 있습니다. 도희가 폭력을 당하는 원천은 도희의 욕망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도희의 욕망을 억압하는 데서 가부장적 폭력이 시작됩니다. 용하와 할머니가 도희를 억압하는 것은 도희의 도발성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영화에서 감독이 암시한 장면은 다음과 같습니다. 백화점에 영남과 도희가 갑니다. 백화점에서 옷을 삽니다. 영남이 옷을 사주는데 도희는 그 옷을 마다하고 대단히 야한 비키니를 선택합니다. 해수욕장에 갑니다. 그곳에서 영남과 도희는 썬그라스를 끼고, 이 공간이 시골의 해변가라는 것을 완전히 잊어버릴 것처럼 굉장히 도시적이고 소비적인 공간에 두 여자가 위치되어 있는 것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도시의 여자들이 즐길 만한 유희적인 장면을 보여줍니다. 썬그라스를 끼고 선정적이기까지는 않지만, 도시여인적인 욕망을 드러냅니다. 대단히 누리고 싶다는 욕망, 소비하고 싶다는 욕망을 드러냅니다.
도희가 가장 직접적으로 자신의 내면의 욕망을 드러내는 장면은 방파제에서 홀로 추는 춤입니다. 춤은 메타포적으로 축약된 도희의 욕망으로 봐야 합니다. 영남이의 억압된 성적 욕망은 술로 나타납니다. 또 영남이는 애인과 직접 키스를 함으로써 직접적으로 성적 욕망을 드러냅니다. 영남이의 욕망을 읽어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으나, 도희의 욕망을 읽어내는 데는 상징을 읽어야 하는 어려움이 놓여 있습니다. 도희를 이해하지 못하면 영남과 도희가 실은 똑같은 억압된 성적 욕망을 소유한 자들이라는 것을 이해하는 데에 도달하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도발성이란 즉 남성가부장적 시선에서 그렇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영남같이 동성애적인 것은 더 말할 것도 없구요. 도희가 비록 어린애긴 하지만, 머리를 부딫친다든가 하는 이런 것들이 남성가부장적 시선에서는 용납하기 어려운 도발성으로 읽히는 것이죠.
이 영화속의 폭력은 거친 남성이 여자를 지배하려는 그런 폭력이 아닙니다. 용하는 도희의 도발성을 참지 못하고, 도희가 이상한 행동을 한다는 대사를 합니다. 그런 대사들이 다 남성의 시선을 반영하는 것이죠. 여자는 수동적이어야 한다는 남성지배적 관념에서 볼 때 남성의 권위에 조금이라도 도전적인 여성의 행동은 수용되기 어렵습니다. 남성적인 시선을 받는 ‘그’의 이야기입니다. 그의 이야기를 객관화시켜 보면, 도희입장에서 보면, 이 좁고 답답한 가부장적 사회에서 여성적 욕망을 펼치고 싶어하는 조숙한 아이인 겁니다.
공간의 메타포를 통해 이러한 과정이 드러납니다. 딱 두 번 등장하는 장면입니다. 영남이가 좁은 골목을 지나가면서 도달했을 때, 끝에는 도희가 있습니다. 방파제에 서있습니다. 그리고 도희앞에는 바다가 펼쳐져 있습니다. 바다라는 것은 한국사회의 절망을 벗어날 수 있는 이상적인 공간을 상징하는 거라고 읽었습니다. 처음에 조우하는 장면을 보면, 차가 도희에 게 물을 끼얹고 도희가 멀리 도망가죠. 한 없이 펼쳐진 밭의 롱숏이 나오죠. 그 밭의 롱숏은 이후 나오는 바다로 연결되는 동질의 이미지라고 생각되어집니다. 그렇게 도희가 도망을 가고, 영남은 도희를 좇아가는 구조를 갖고 있습니다. 그 서사 자체가 하나의 메타포죠. 그래서 영남은 도희를 발견하게 되는 겁니다. 도희를 발견하게 되면서 도희를 구원한다가 아니라, 자기 절망의 한 조각 희망을 발견한다는 것이죠.
화면밖 소리공간에 대한 부분입니다. 화장실 장면이 있죠. 영남이 도희와 화장실에서 같이 있는 장면이 여러 차레 나옵니다. 한 장면에서는 도희가 방뇨하고 영남이 그 소리를 듣는 화면밖 소리공간이 등장합니다. 화면은 영남의 얼굴이 클로즈 업 되어있는 상태에서 영남은 도희의 방뇨소리를 화면 밖 소리롤 통해 듣는 장면입니다. 대단히 에로틱한 장면입니다. 동성애의 문맥이 아니라면 아무렇지 않을 장면이지만, 영남이 레즈비언이라는 설정을 알게 되면서 이 장면들이 영남의 억압된 성적인 욕망을 드러내는 장면이라고 알 수 있습니다. 섹슈얼리티를 표현하는 대표적인 상징입니다. 또 도희의 벗은 몸의 상처를 어루 만지는 장면이 있습니다. 카메라는 단지 한 성인 여자가 어린 애의 몸에 난 상처를 보는 일상적인 장면이 아니라, 만질까 말까 망설여대는 묘한 분위기를 감지케 하는 클로즈업 영상으로 관객에게 제시됩니다. 그것 역시 떨어져 있는 동성친구와 둘 사이를 방해하는 한국사회의 엄한 처벌의 분위기 때문에 강제로 억압되어 있는 영남의 성적 욕망을 드러내는 내면적인 장면입니다. 영남에게 있어 도희의 벗은 몸은 어린 애의 몸이 아닌 다른 여성의 몸으로 전환되어 동일시된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영남이 도희를 사랑한다는 해석은 표피적이고 문맥도 없고 멀리 간 해석이므로 그렇게 보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보다는 영남 자신의 억압된 욕망이 도희 몸을 통해 발현된다고 봐야 합니다. 욕조에 같이 들어왔을 때 영남은 도희의 등의 상처를 바라보면서 만질까 말까 머뭇거리는 시선을 보여줍니다. 이런 머뭇거림의 시선을 섹슈얼리티 시선으로 해석합니다. 현실적인 섹슈얼리티의 장면이 아니라, 영남에게 동성애적 성욕이 도희의 몸을 통한 시선을 통해 상징적이고 간접적으로 발산되고 있음을 알게 합니다.
후반부에 가면 영남이 마을 사람들의 핀잔을 듣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것 역시 화면밖 소리기법으로 처리하는데, 약간 변형되어서 영남의 모습이 전경에 나오면서, 후경에 주민들의 모습을 잡음으로써, 같은 공간에 있는 것으로 묘사한다는 것입니다. 같은 공간이긴 하지만 분명 전경의 영남은 시선을 정면으로 하고 있으므로, 보이지 않는 후경의 주민들 소리만을 들을 뿐입니다. 화면밖 소리의 변형된 장면구도입니다. 그 소리의 내용은 영남이 서장일지라도 아무 소용이 없다는 비판입니다. 계급장 보다 높은 것은 남녀의 서열이라는 점을 각인시킵니다. 용하가 그간 영남을 무시하는 장면이 많이 나왔었지요. 상대가 영남이 아니고 남자서장이었다면 감히 할 수 없었던 그런 행동을 영남에게 해댔던 거지요. 마지막엔 주민들 마저 그런 분위기에 동참하는거죠.
이처럼 화면밖 소리는 이 영화에서 중요하게 작용했습니다. 섹슈얼리티적 억압을 환기한다든가 한국사회를 상징하는 가부장적 억압을 소리로 들려준 것입니다. 바같 세상은 젠더적으로 가부장적이고 억압적이어서, 도저히 살아갈 수 없는 것으로 그려집니다. 섹슈얼리티와 젠더의 관계성이 어떻게 작용을 하는가. 젠더가 남성가부장을 의미한다면, 거기서 폭력이 발생합니다. 이 영화는 폭력이 주가 아니라, 남성가부장제하에서의 폭력이라는 것이고, 폭력은 섹슈얼리티적 배경을 또한 갖고 있습니다. 이성애를 거부하는 동성애의 권위 때문에 그런 것이거든요. 퀴어이론에 의하면, 동성애와 가부장제도가 어떻게 결합이 되는가를 보여줍니다. 동성애질서에서 남성의 권위가 없는 부드러운 남성, 온순함을 벗어난 강한 여성이 갖고 있는 동성애적 코드가 남성가부장의 권위를 해치기 때문에 결국 섹슈얼리티에 대한 문제는 젠더와 뗄레야 뗄 수가 없게 되는거죠. 바로 이 영화가 잘 보여주고 있는 겁니다. 용하는 대한민국 가부장의 폭력을 가장 대표적으로 보여주고 있고, 폭력은 이성애적 질서를 흐트러 놓은 것 때문이지, 다른 어떤 이유에서의 폭력이 아닌 겁니다. 그것은 확장될 지언정, 바로 한국사회가 그렇다는 것이지요.
성과 젠더의 문제에 있어서 그러하듯이 결국은 그것이 한국사회를 지탱하는 코드일 수 있다는 것을 감독은 섹슈얼리티와 젠더 코드로만 풀은 것이죠. 다른 사회적 폭력을 개입시킬 여지는 없습니다. 용하가 도희를 때린 것은 이성애질서에 대한 남성의, 가부장제도의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도희를 때린 것이고, 영남을 가둔 것입니다. 거기에 대해서 도희는 마지막에 영남의 편에 섭니다. 영남은 이 사회에서 유일하게 자기를 이해해 줄 수 있는 파트너라고 생각하고 영남을 잡은 것이고, 거기에서 거짓말 서사의 아이러니가 발생하는 겁니다. 이것을 어떻게 판단할 것인가는 관객의 몫입니다. 이들이 어떻게 마지막을 갈 것이냐에 대한 것도 관객의 몫입니다. 사실 영화는 거기서 끝납니다. 희망으로 해석하고 싶진 않지만, 암시 정도라고 생각합니다. 그건 대단히 받아들이기 어려운 결말이죠. 왜냐하면 아직 우리 사회가 동성애 질서를 받아들일 만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사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영화를 보는 내내 관객들이 어렵고 혼란도 생긴 게 아닐까 생각이 듭니다.
이수향: 저는 영화를 비슷하게 좋게 보는 입장이어서, 덧붙이자면, 이 영화에서 배우의 소리나 몸짓 등이 하나의 오브제처럼 작용하잖아요. 영화에서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영남과 도희가 굉장히 말랐어요. 영남이 제복을 입고 모자를 쓰고, 공권력의 강인함을 갖고 있는 여잔데, 그런 여자치고는 유약하고 키도 작지요. 세게 보이는 여자를 캐스팅 할 수도 있었을 텐데 말이죠. 그런데 그 여자가 가진 외부적인 강인함 안에는 연약한 내면이 있다는 것을 하나의 오브제로 표현한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들어요. 그 연약함과 괴로움의 내면에는 당연히 우리가 알고 있듯이 동성애적인 코드가 있는 것이죠. 술을 무척 마시는 행동이 너무 인상적이었어요. 생수통에다 술을 넣어서 먹잖아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죠. 경찰이니까 수시로 술을 사기가 그러니까 한 번에 사다가 먹고, 말 그대로 물처럼 마시는 거예요. 배두나가 연기를 과장되게 하지 않는데, 행동 하나가 인물 내면을 설명하며 저에게 강하게 다가왔어요. 물처럼 술을 마시지 않으면 잠을 잘 수도, 살 수도 없는 그 괴로움의 깊이가 뭔가. 괴로움을 잊기 위한 행동이 아니었을까, 생각이 들어요. 그 괴로움의 근원에는 동성애적인 코드가 있고, 자신이 사회적 지위를 취하고 있지만, 끊임없이 밀려나는 이해받지 못하는 것에 대한 고통을 그렇게 표현한 것이 아닌가 생각을 했어요.
이 영화에도 단점이 있다면, 첫 번째는 도희가 의붓 아버지를 유혹해서 성폭행같은 상황을 만드는 장면이 작위적이었어요. 좀 더 잘 찍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어요. 조금 자연스럽고 잘 찍을 수 있었을 것 같은데, 일차원적으로 찍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문제가 되는 것은, 김새론이 아직 자기의 영화를 못 본다고 하잖아요, 19금 이라서. 아주 어린 배우한테 그런 역할을 시킨다는 것에 저는 아주 비판적인 입장입니다. 어린 아이에게 성폭행 당하는 장면을 그대로 시연하게 할 필요는 없으니까. 그런 점에서 보기가 약간 힘들었어요. 두 번째는, 누가 보더라도 단순하게 생각하는 것은 영남이가 그런 문제로 서울에서 좌천되어 내려왔는데, 선배 말대로 일년만 얌전히 있으면 되잖아요. 도희가 난리 피우고 이런 상황을 공권력의 매뉴얼대로 하면 되는데, 그걸 개인이라는 사적인 공간으로 받아들이잖아요. 다른 방법을 찿을 수도 있었겠죠. 내밀한 공간인 집으로 받아들인다는 거예요. 여자친구라는 존재가 나타났을 때 술기운인지 갑작스런 감정때문인지 갑자기 키스를 하죠. 그것도 이 여자 입장에서는 상당히 조심스러운 상황인데 느닷없다는 생각을 했어요. 조금 어색했지요. 세 번째 문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희가 왜 처음에 영악하고 똑똑한 애라는 걸 잘 알잖아요. 근데 서장님이 이렇게 만졌어요, 라고 왜 얘기를 했을까 생각해보면 결론적으로는 트릭이 아니었을까 생각이 들어요. 도희 입장에서는 영남이야 말로 자기 입장을 이해해 주고 보호해 줄 수 있는 유일한 대상자고 나랑 똑같다고 생각해서 정말 사랑했는데, 발을 빼려고 하는 거예요. 그런 장면들에서 본인도 대단히 상처를 받았겠죠. 그래서 뭔가 그런 식으로 고통의 기제를 준 게 아니었을까 생각이 드네요. 트릭처럼 의사(疑似)처벌한 거죠. 하지만 결국에는 구원해주는 방식을 취하는 게 아니었을까. 저도 이 영화를 젠더고, 동성애에 관한 내용이라고 생각합니다. 앞에 나왔던 외국인 노동자나 폭력이나 여러 가지 문제가 나오는 것은 배제되고 소외된 사람을 그 사람 눈으로 밖에 못 보는 거예요. 자기가 배제된 삶으로 밖에 못 보는 거죠. 마을 사람들은 문제가 있고 행복하지 않아요. 그걸 볼 수 있는 시선을 가진 사람은 같이 소외될 수 밖에 없는 사람이 아닌가. 많이 들어와서 좀 난삽하다는 느낌은 주지만 그 자체가 불필요하지는 않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민병선: 소주를 꼭 왜 병으로 사는지 모르겠어요. 페트병으로 사면 되거든요.
일동: 정말 예리한 지적이네요.(웃음)
윤성은: 어쨌든 그 술은 굉장히 중요한 작용을 한다고 생각해요. 대사에서도 술이 문제야, 라고 계속 얘기하죠. 술 때문에 폭력이 일어나잖아요. 아빠가 술 안 마실 때는 안 때려요, 이렇게 얘기하고, 술을 마시면 애를 때리죠.
정재형: 저는 술이 문제야, 라는 대사가 바로 남성 가부장적 시선에서 말하는 이중적인 언어라고 보죠. 그것의 반대 지점에 있는 게 영남이고, 남자처럼 그렇게 술을 마시죠. 그렇지만 영남이는 전혀 폭력적이지 않죠. 술 먹으면 문제야, 라는 것은 남자들이 말하는 이중적인 언어죠.
윤성은: 영남이는 술을 마셨지만 그렇게 폭력을 휘두르지 않죠,
정재형: 남성들이 내면의 폭력성을 제대로 고백하지 않고 얘기하는 이중적인 언어라고 보고 싶어요. 난 수향씨가 얘기한 부분에서 일정 정도 가벼운 반론이 있어요. 세 가지를 얘기하셨는데, 너무 합리화되면 영화가 성립하기 어렵다, 라고 생각해요. 역설적으로 얘기하면 허술한 게 영화죠. 예를 들어 김기덕의 영화를 보면, 이러한 지적 이상으로 작위적이고 말이 안 되는 것을 끝까지 끌고 가서, 결국 말이 되게 할 수 있나, 하는 생각을 하죠. 이 영화는 김기덕의 영화에 비하면 옥의 티를 지적하신 거라고 보고 싶거든요. 그런데 그런 것들이 영화의 재미를 주죠. 영화가 너무 정직하거나, 현실을 똑 같이 그리고, 상식을 따라가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봅니다. 오히려 작위적이고, 거슬리는 부분들이 있고, 관객들이 그걸 느껴가면서 보는데, 결과적으로 김기덕 영화처럼 마지막에 보고 나면, 결코 욕을 하지 못하죠. 상황속에서 부분의 잘못을 용서해주는 미덕이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윤성은: 이 영화는 어쨌든 전체적인 맥락에서, 그러니까 김기덕 영화는 사실 처음부터 끝까지 그 결이 있거든요? 이 영화라는 그것과는 좀 다른 결을 가지고 있는 영화인데 사실 김기덕 영화가 가지고 있는 여러 불편한 지점, 여러 성향, 성격과 달리 가다가 갑자기 그 지점부터…
정재형: 예, 그건 분명해요. 예를 들어 잘 만들어진 앞뒤가 완벽하게 잘 수학적으로 떨어져야하는 계산적인 추리영화가 있는데 거기서 작위적인 부분이 나타날 때 그것은 옥의 티로 넘길 수 없는 그런 부분이 있다고 할 수 있죠. 그건 저도 동의를 하구요.
민병선: (어린이가 아니라) 중학생 성폭행 삼당을 할 때도 그렇게 인형을 가져다 놓고 '어딜 만졌어?' 이렇게 하는 건가요?
박태식: 우리 장애인 센터에도 그러한 일이 있었는데 실제로 그렇게 해요. 경찰은 확실하게 하기 위해 녹화도 하고 그러잖아요. 이 증언을 위해 가장 정확한 방법을 동원하는 거죠. 그런데 도희는 거기에서 처음에 이걸 무엇을 뜻하는지,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잘 모르고 장난스럽게 하는 것 같지 않아요?
윤성은: 저도 이수향씨가 얘기한 그 부분은 일부러 그랬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이수향: 네, 왜냐하면 그런 것 치고는 안했던 부분까지도 과장되게 싱글싱글 웃으면서 얘기하는 부분이 이상했거든요. 안한 것까지도...
윤성은: 네, 저도 그 부분이 좀 의문이긴 했는데, 일부러, 영남이 자기 손에 달려있다는 것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 아닐까요?
이수향: 오히려 거기 계신 상담하는 여성분들이 도희보다 더 저차원처럼 느껴졌어요.
(일동 웃음)
정재형: 맞아요.
이수향: 애가 훨씬 더 영악한 앤데, 굉장히 고단수인데 모르고 있구나 하는 느낌을...ㅎㅎㅎ
정재형: 그래서 저는 이 영화를 섹슈얼리티 젠더의 문제로 푼다고 할 때 이 영화의 주제는 한 사회가 갖고 있는 고정성에 대한 유동적인 변화를 촉구하는 그런 메시지를 갖고 있다고 보거든요. 이 영화의 진정한 주제는 바로 일군의 한국사회가 변화되어야 된다, 그게 바로 이 소재가 갖고 는 이성애적인 질서의 엄격함, 고정성, 변하지 않으려고 하는 고집스런 엄격성이 한국의 근대화를 오히려 굉장히 후퇴시키는 아주 후진성을 갖게 되는 한국사회에 대한 문제이다. 그걸 성과 젠더의 소재로 풀었다고 보죠. 그래서 성학자인 주디스 버틀러가 주장하듯이 성의 정체성이란 것은 기본적으로 유동적이다라고 보거든요. 한국사회에서 선택이거든요 사실은, 그런 의미에서 한국사회가 너무나 오랫동안 억압적으로 가부장제를 고수하고 있다라는 그 딱딱한 껍질을 건드려, 균열을 냈는데 그것이 관객들에게 어떻게 깊은 사례를 촉발하면서 파장을 가질지는 모르겠습니다.
물론 김조광수의 결혼만큼은 아니겠지만, 저는 사실 그런 메시지를 줬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이런 레즈비어니즘은 한국사회에서 아주 대담한 용기처럼, 금기처럼 느껴지거든요. 제가 피부적으로 느낄 때도 경찰이나 제복을 입은 여자가 키스를 했다라고 할 때, 그것은 시골 원시적인 마을뿐만 아니라 서울 같은 도시에서도 허용되지 않을 거예요. 그렇다면 이 영화는 굉장히 민감한 문제를 다루는 현실적인 영화거든요. 그런 측면에서 문제작이 될 수 있는 영화라고 생각이 듭니다. 왜냐하면 여러 가지 어려움은 있지만 파격적인 메시지만큼 주는 영화다라고 생각합니다.
안숭범: 그런데 사실 이렇게도 생각이 듭니다. <흡연모녀>라고 단편 독립영화가 있잖아요.
정재형:아, 있어요.
안숭범: 처음엔 엄마가 남편한테 두드려 맞고, 딸도 그 남자친구한테도 성정치학적으로 보면 남자에 예속되어 있죠. 근데 나중에 서로 맞담배피면서 연대하잖아요. 물론 이 영화에서 레즈비언 코드는 별로 없지만, <도희야>의 마지막 부분이 유사 모녀관계이기도 하고 연인관계이기도 하죠, 그런 걸 둘 다 암시하는 것인데 그런데 이러한 약자간의 연대가, 이러한 결말이 여러 번 있었던 결말인 것 같아요. 물론 여기에 레즈비언코드가 들어있어 신선하기 하지만.
그래서 저는 결말이 아주 빛나는 영화였다 꼭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아요. 또 대중과의 타협지점도 들어있다고 봐요, 어떤 거냐면 아까 바닷가가 이상주의적인 곳이라고 하신다고 본 것과 반대로 이 바닷가는 남쪽마을까지 왔는데 벗어난 끝이예요. 더 이상 갈 곳이 없는 끝이예요. 바닷가에 잇는 춤추는 장면이나 마지막에 도희가 남겨진 장면을 잡을 때 마을에 카메라가 위치하고 롱솟으로 잡잖아요. 여기서 볼 때 그는 거기서도 벗어나 있는, 더 갈 데 없는거죠.
저는 이 장면에서 <사백번의 구타>가 생각났거든요. 애가 소년원을 탈출해가지고 더 이상 갈 곳이 없으니까 바닷가를 한 번 두 번 정도 첨벙첨벙하다가 바다를 본 적이 없기 때문에 가보고 싶고 자유의 장소이고 그렇지만 가봤더니 더 이상 갈 데가 없어서… 과연 이 아이를 누가 어떻게 할 것이냐 기성세대가. 이런 질문들을 던지잖아요. 그런데 사실 거기서 프리즈 프레임으로 끝내면 그럼 더 강력한 질문이 된다고 봐요,
그런데 이 영화는 가던 영남이 되돌아 와가지고 서로 대응샷 나오면서 서로 연민하고 공감하고 같이 떠나잖아요. 그러면서 날씨는 비가 오면서 두 사람 사이에 연대는 했는데 이것이 우리 한국 사회에서 받아들여질 것인가 이런 부분에 대해서 어두운 전망을 보여주는 거거든요. 그래서 이것은 사실 영민한 관객이라면 누구나 해석을 다 할 수 있도록 정확하게 짚어주고 끝낸, 물론 그것이 미덕일순 있지만 제가 보기에는 그건 좀 뭐랄까 더 강력한 질문을 갖고 가기에는 좀 약한 결말이 아닌가. 이런 생각이 들어요.
박태식: 그럼 뒤에 되돌아오는 건 빼고 바닷가 장면에서 끝냈어야 했다?
안숭범: 뭐, 여러가지를 생각할 수도 있겠죠.
박태식: 뭐, 그래도 좋았을 뻔 했네요.
안숭범: 그 외에도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겠죠. 사실은 아까 제가 생각했을 때 이성애 중심문화와 가부장제 질서가 결합된 지점을 물어요. 그런데 이것을 말하기 위해 사용되어있는, 배타적 민족주의가 (주된 것은 아니지만) 이게 어는 정도 의도된 바는 있다고 봐요. 왜냐하면 바킴이 감옥에 갇히고, 이용남이 감옥에 갇히는데, 둘 다 법망을 벗어난 게 문제가 되는데, 문제는 동성애를 부각시키기 위해 이 지점을 희생시키는 거죠, 이후로는 이 문제는 이것은 등장하지 않죠. 이성애중심주의와 가부장제 질서의 주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서 그 앞의 인물들이라든가 여러 이야기가 너무 많이 희생된 거죠. 그렇게 봉합하고 끝내면 자기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전하는 거지만, 조금 완벽한 결말은 아니다 그런 생각도 들어요.
그리고 처음에 도희가 사태 파악을 못하고 인형을 가지고 하는 장면은 그냥 아이스러운 장면이라고 생각해요, 아이가 영남을 좋아하니까. 그 다음 장면에서 치밀하게 계획해가지고 남자 경찰에게 전하고 이런 장면은 앞의 장면들에 비해서 핍진성의 문제에서 너무 비약이 있는 것 같아요. 그런데 그 장면이 들어가야 마지막 장면이 오는 것이지만, 그 사이 단계를 꼭 그렇게 그려야 됐나 이런 생각은 들어요.
박태식: 폭력에 아주 오래 노출된 아이는 굉장히 영악해지기 때문에 본능적으로 그렇게 할 수 있어요. 그 짜낸 아니디어가 내 생각에는 너무 비약적인 장면은 아닌 것 같아요.
안숭범: 그러니까 제 생각에는, 뒷장면이 아니라 앞장면이 이상해요.
박태식: 인형갖고 이렇게 보여주는.
안숭범: 네, 이미 그 정도로 영악하고 치밀한 아이는…
이수향: 그러니까 제가 그걸 파악한 거 잖아요.(웃음)
안숭범: 근데 또 이렇게 생각하면 그 영화가 극적이지가 않아요.
이수향: 그러니까 저도 처음에는 도희가 순진한 마음에 저랬나 보다, 거기까지 봤을 때는 그렇게 생각했는데, 그런데 갑자기 뒤장면 나오니까 그 앞 장면이 너무나 이해가 안가는 거예요. 그렇게까지 치밀할 수 있는 아이가 그렇게까지 순진한가?
박태식: 그러니까 그대로 갔다가 그 순간에 딱 어른이 되는 거죠. 아, 이거 상황이 이렇게 끝나서는 안 되는 거 아냐? 그런 생각이 들지 않겠어요? 자긴 집에 가서 송새벽을 만나야 돼, 그리고 자기는 신나게 얻어터질 거야, 그 여자는 가 버렸어 그러면 꾀를 짜게 될 거라구요.
그래서 나는 비약이 없다는 것은 아니지만, 이건 중요한 게 아니고. 나는 감독 마음을 이해하려고 노력을 한다니까요. 감독 마음은 김새론이 딱 변하는 장면에서 그걸 좀 잘 봐줬으면 하는 바람이 막 오더라구요. 차안에서 몇 마디 들으면서 김새론이 표정이 바뀔 때 '여기 잘 봐야돼'하는 그런 외침 같은 게 들리더라구요, 제 개인적으로는.
안숭범:그럼 이제 넘어가봐야죠, 시간이.
박태식: 전체적으로 이 영화가 좋았다는 건가요? 좋았다는 사람이 셋이고 안 좋았다는 사람이 셋 인거죠?
(일동 웃음)
안숭범: 안 좋았다는 것은 상대적인 거죠.
윤성은: 와- 막 반발한다.
민병선: 좋았다에 비해서는.
정재형: 저는 굉장히 좋게 봤어요. 굉장히 좋게 본 영화는 나쁜 부분에 대해서 용서하게 되요. 저는 사실 그렇거든요. 굉장히 진지하지도 않고 기본이 안 되어 있는 영화의 여러 문제들은 정말 문제라고 생각을 하는데 적어도 이 주제가 던져주는 바가 신선하고 많은 것들을 주고 영화적 성취도고 중간 이상의 점수를 갖고 있기 때문에 여러 가지 문제들, 작위적인 요소라든가 말이 좀 안 되는 것들이 있다 할지라도 좀 용서하고 싶은 마음이 있어요. 예를 들면, 둘 중에 하나겠죠. 감독이 도희라는 애의 성격을 잘못 연출하거나 성격을 잘못 이해했기 때문에 충분하게 설득력을 갖지 못하는 표현을 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고 아니면, 이 정도의 상황이라면 아주 특별한 아이이기 때문에 선생님처럼 저도 도희라는 애의 성격을 이해해주고 싶은 마음이 있어요. 어떻게 남자 관객이 여자의 성적인 욕망을, 열 몇 살짜리의 분출하는 성적 욕망을 이해한다고 할 수 있겠어요. 저는 겸허하게 그것을 제 스스로 그것을 인정하고 놔두고 싶은 거예요. 애가 굉장히 영악하기도 하면서 굉장히 소녀적인 훈육된 면이 있다, 왜냐하면 애가 방에 와가지고 맞지 않으면, 견디지 못하는 그런 변태적인 성격을 보여줬을 때 그 코드를 어떻게 읽었냐면. 가부장 사회에서 여성이 가지고 있는 매저키즘을 보여주고 있거든요, 걔는 거기에서 하루라도 폭력을 행사당하지 않으면 정상적인 사고를 할 수 없을 정도로 길들여져 있는 거죠, 근데 거기에서 걔가 계속 그렇게 가는 것이 아니라 끝없이 반항하죠, 도발하고. 그러면서 폭력의 관계가 남성에게 주어지죠. 사실은 그런 걸 보여주는 장면도 있어요. 사실은. 그런 부분도 굉장히 재밌죠. 주된 부분은 아니지만, 관객이 어떻게 생각하기에 따라서 많은 부분을 생각할 수 있게 해주는. 근데 좋은데, 흠으로 보면 그 장면을 왜 그렇게 강조하냐? 라고 물으면 할 말 없지만, 그래도 그렇게 단편적으로 들어간 장면들이 저에게는 너무 좋았거든요. 많은 도발적인 것들을 우리 가부장 사회에서 여성의 매저키즘적 성격도 보여줬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거든요. 그런 측면에서 저는 빈 공간도 많이 놔두고 싶어요. 저는 굉장히 좋게 봤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