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국제영화제 영화비평 세미나 : 주제발표 4
한국영화비평의 위기,그 냉정한 성찰과 극복의 방안
정 민 아 (영화평론가, 경성대 연극영화학부 초빙외래교수)
“후세는 잊어버리거나 기릴 뿐이다. 비평가만이 작가의 면전에서 판결을 내린다.”
“파괴할 줄 아는 자만이 비평할 능력이 있다.”
“예술에 대한 감격은 비평가에게는 낯선 개념이다. 비평가의 수중에 든 예술작품은 정신적 가치를 두고 벌이는 싸움에서 그가 투입할 수 있는 백병(白兵)이다.”
“독자는 언제나 부당하게 취급당하면서 그래도 결국 비평가에 의해 대변되고 있다고 느낄 수밖에 없다.”
- 발터 벤야민, 「비평가의 기법에 대한 13가지 명제」에서 -
영화비평의 위기, 몰락 … 그리고 희망?
한국의 영화비평이 위기라고 진단받은 지 오래다. 고사 직전에 놓인 영화비평 현실을 운명처럼 받아들이고 비평가들은 뿔뿔이 흩어져 각자 살길을 찾아가고 있다. 대한민국에서 전업 영화평론가로 생활을 잘 유지하고 있는 사람을 들라고 한다면 그 수는 한 손으로 세어도 가능할 것이다.
언제 비평이 위기가 아닌 적이 있었으랴만, 기실 한국에서 영화평론이 주류의 위치에서 각광 받을 때도 잠시 있었다. 1990년대 초중반, 문화예술에 대한 대중적 관심의 증폭기에, 1980년대에 축적된 사회과학적 관심이 영화로 대거 옮겨가며 촉발되었던 영화 붐. 이로써 대중은 예술영화를 갈망했고, 한국영화 제작의 합리적 산업화를 둘러싸고 벌어진 다양한 목소리들을 경청했다. 그리고 우리는 한국영화의 르네상스를 목격했다. 그 중심에 영화평론가들이 있었다. 이들은 아카데미에서 최다부문 수상을 자랑하는 <벤허>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가 영화역사상 최고의 영화인 줄 알고 있던 영화관객들에게 <시민 케인>과 <네 멋대로 해라>를 들려주었다. 그 영화들을 볼 도리가 없던 우리들은 조용히 그들이 전해 준 영화평론 글을 읽으며 위안을 받았다. 이런 열기는 TV와 라디오 프로그램에 반영되었고, 이때의 씨네필 문화를 바탕으로 영화전문 잡지들이 창간되었다. 이 시기에, 크고 작은 영화제들이 개최되고, 시네마테크들이 생겨나고, 시민을 대상으로 하는 영화강좌들이 성황리에 열리고, 말로만 듣던 전설적인 예술영화들이 개봉했으며, 왕가위와 차이밍량이라는 아시아 신인감독들의 낯선 등장에 열광했다.
1980년대 초, 검은 뿔테 안경을 쓴 심각한 표정으로, 아녜스 바르다의 <행복>이나 <천국의 아이들>이 방영되는 ‘주말의 명화’를 소개하기 위해 프로그램과 광고 막간에 나와 “이 영화 꼭 보셔야 합니다. 절대로 놓쳐서는 안 되는, 다시 못 올 기회일 것입니다”라고 진지하게 종용했던 고(告)정영일 선생의 이름 뒤 괄호 안의 ‘영화평론가’라는 직함을 기억하던 사람들, 그들에게 인문학적 지식과 생소한 영화이론, 유려한 글발과 말발, 화려한 경력으로 무장한 일군의 영화평론가들은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들은 비비안 리의 <애수>가 아니라 더글라스 서크의 멜로드라마를 봐야 하는 이유, <티켓>이 그저 그런 호스티스물이 아닌 이유, <전함 포템킨>과 <사이코>가 영화역사를 어떻게 바꾸어놓았는가의 이유를 알려주는, 지식의 전파자 및 이미지 해설자였다.
한국영화에 관객이 들고, 해외에 팔리고, 내용과 기술이 세련되어갈 즈음, 작가주의적 비평 태도로 영화를 보던 그들은 놀라운 데뷔작(<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을 들고 혜성처럼 나타난 홍상수를, 낯선 이미지의 향연을 선보인 김기덕을, 한국에도 건강한 퀴어영화가 가능함을 알리는 <내일로 흐르는 강>을 지지하고 구제해주었다. 이는 전적으로 비평가가 문화투쟁가 되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몇 차례의 좌절이 이어졌다. 평론가와 영화감독 간의 논쟁, 이어진 유명 평론가의 절필 선언. 그리고 10년 후, 평론가들은 <디워>를 옹호하는 네티즌의 공격 대상이 되었다. 실상을 들여다보면, 평론가들은 <디워>를 신경도 안 썼다. 비평할 거리가 없는 영화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뿔난 네티즌들은 평론가들을 싸잡아 총공격을 해댔다. <100분 토론>의 토론 주제까지 되었으나, 토론 패널에 영화평론가는 볼 수 없었다. 대신 미학자와 영화제작자가 출연했고, 한국에서 영화평론(가)은 서서히 죽어갔다.
여러 개의 영화전문 잡지가 폐간되고 영화비평지들마저 완전히 사라진 지금, 일간지와 주간지 영화칼럼은 기자나 유명 소설가, 영화감독, 칼럼니스트, 에세이스트의 차지가 되어버렸다. 영화평론가라는 직함은 있지만, 평론 활동은 찾아보기 힘들다. 영화평론가는 개봉 영화에 별점 주고 20자 단평 쓰고, 영화기사에 참고 코멘터로 잠깐 인용되고, 영화제 카탈로그에 원고지 3매 분량의 영화 소개글 쓰는 처지가 되었다. 제도화된 인쇄 매체에 지면도 없고, 주장을 펼칠 장소도 없는 평론가에게, 요즘 제대로 된 영화평론이 없다는 볼멘 목소리는 너무도 가혹한 주문으로 여겨진다. 예리한 분석의 눈으로 영화 텍스트의 심층의미와 영화사적 위치를 매겨봤자(심지어 공짜로) 읽는 이도 없다. 영화제작에는 재능이 없으니 글이나 쓰는 한심한 인간으로 치부받기 십상이다. 참으로 비참한 현실이다. 영화평론가의 위기가 영화평론의 위기를 낳았고, 영화평론의 위기는 시장에만 열을 올리는 영화제작을 아무렇지 않게 수용하는 우매한 관객집단을 낳았다.
한국영화가 르네상스기의 절정을 넘어 잠시 숨 고르고 있는 사이, 영화평론가는 유령 같은 존재가 되어버렸다. <식스 센스>의 브루스 윌리스처럼, <디 아더스>의 니콜 키드만처럼, 영화평론가는 실체는 보이지 않으나 자신은 유령이라는 사실을 몰라서 더욱 슬픈 유령이 되었다. 평론 활동이 없는, 아니 할 수 없는 평론가들이 넘쳐 돌아다니는 세상. 완전히 바뀌어버린 세상에서 아직 건재하고 싶어 하는 슬프고도 미친 타자.
그러나 한탄만 할 때가 아니다. 가쁘게 인공호흡기로 연명하고 있을 바에는 완전히 죽어 다시 태어나는 게 낫다. 이 글은 영화평론가라는 직함을 내밀기도 민망해진, 영화를 몹시도 사랑하는 어떤 사람이 비평이 왜 위기로 치닫고 회생불능이 되어버렸는지를 진단하고, 조심스레 대안을 찾아보기 위한 에세이다.
영화비평 환경의 ‘거대한’ 변화
영화비평 현실이 이전과는 완전히 달라졌다. 1990년대의 평론가와 2010년대의 평론가는 다른 태도로 비평 작업에 임해야 한다. 대세는 바꿀 수 없고, 무엇보다도 평론의 위기를 타개해갈 힘은 평론가들 손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현재 영화비평을 둘러싼 현실을 진단해보자.
첫째, 경제위기로 인해 종이매체의 독자들이 점차 사라지고 있다. 독자들은 신문과 잡지를 끊고, 영화전문 잡지들을 포함하여 많은 수의 인쇄매체들이 폐간되었다. 매체들은 독자수를 유지하기 위해 좀 더 대중적인 글을 요구하고, 그러면서 어렵고 분석적인 영화평론 글보다는 쉽게 읽히는 짧은 리뷰를 선호하게 되었다. 평론적 글쓰기가 이론이나 학문적 토대에 기반하여 영화에 대해 가치판단을 내리는 것이라면, 리뷰는 가이드나 큐레이팅에 가깝다. 문학계에 문예비평지가 존재함으로써 문학평론가들이 지면을 가지고 활동할 장소가 있는 것과 달리, 영화계에는 전문 비평지가 부재하다. 간신히 되살려놓은 『계간 영화언어』와 『영화/비평/현실』 같은 영화비평지가 경제적인 이유로 몇 년째 발간이 지연되고 있고, 영화평론가들의 활동 장소는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까이에 뒤 시네마》 전속 평론가인 엠마누엘 뷔르도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되고 유명한 이 영화잡지가 매년 어마어마한 적자를 보고 있는데도 불구, 10년 전 이를 인수한 프랑스의 《르 몽드》지가 비즈니스 목적이 아닌 브랜드 가치를 보고 투자하고 있다고 언급했다. 영화전문지를 고매한 문화로 바라보고 지원하는 입장의 차이가 현재의 갭을 나았다.
현재 우리의 영화 주간지는 몇몇 란만 소수의 영화평론가에게 할당하고 나머지는 모두 감각적인 글을 쓰는 이들에게 맡긴다. 그러나 이도 타개책이 되지 못한다. 유저들의 영화관람 후기가 인터넷에 널려있는 상황에서 굳이 영화 정보를 얻기 위해 굳이 잡지나 신문을 사 볼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사라져가는 독자들을 확보하기 위해 술술 읽히는 쉬운 글로 지면이 채워지다 보니, 영화비평에 열정을 가진 충성스런 독자들 또한 등을 돌리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
둘째, 저널리즘의 문제를 들 수 있다. 이는 한국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현상이다. 《시카고 선 타임즈》의 평론가 로저 에버트는 <영화평론가에게는 죽음을! 연예인종교에는 영광을!>이라는 도발적인 제목의 글에서 외도, 이혼, 마약, 스캔들 등 대중이 보고 싶어 하는 짤막한 연예 뉴스에 초점을 맞추는 신문들이 젊은이들의 병적인 호기심을 충족시키고 초라한 가치관으로 이끄는 현상을 한탄한다. 그리고 그는 며칠 전 트위터에도, 《시카고 선 타임즈》가 자신의 글이 사이트 페이지 한 면에 다 들어가게 하도록 글을 툭툭 잘라낸 것에 대해 유감을 표했다. 영화에 대한 전문적 분석으로 독자들의 지적 호기심을 유발하던 영화평론의 자리에 인기스타의 인터뷰나 단상이 대신 들어섰다. 미디어의 속성상 그 상업성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분석적인 글 보다는 재미있고 쉬운 글을 요구하기 마련이다. 미디어 시장의 엄청난 경쟁 체제 속에서 신문, 잡지들은 시시각각 이슈를 선점해야 하다 보니 쉽게 눈길을 끌고 술술 읽히는 선정적인 글을 요구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현상이 되었다.
또 다른 문제는 저널리스트들이 평론가의 전문가적 공부와 노력을 쉽게 가치절하하고 마치 자신이 평론가가 된 것처럼 가치판단을 하는 기사를 작성하는 것이다. 지면은 곧 권력이고 저널리스트들은 영화계에 큰 영향력을 발휘한다. 그러나 저널리스트들의 가치판단은 영화사적인 맥락과 영화형식적 언어가 갖추고 있는 광대한 의미망을 조목조목 살피는 것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저널리스트로서의 강점이란 급변하는 상황에서 빠르게 현상을 캐치하여 핵심을 전달하고 객관적인 입장에서 이슈에 접근하여 현장의 사실을 전달하는 것인 바, 영화에 대한 가치판단은 영화를 학문적으로 다루어온 전문가에게 맡겨주어도 좋다. 김영진이 지적하듯이, “취재원과 지근거리에 있는 기자들이 영화평을 쓸 때 전문성과 비판정신을 발휘하기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인정적인 이유 혹은 산업적인 이유가 개입되면 취재원을 객관적이고 냉철한 시선으로 판단하는 것은 상당히 곤란해진다.
셋째, 달라진 영화문화의 문제이다. 개봉 첫 주 며칠 안에 영화흥행 결과가 입증되는 속도전의 시장 상황에서 시간을 두고 고심해서 쓰는 평론은 영향력이란 측면에서 볼 때 이미 그 효용가치를 상실했다. 이제는 평론이 아니라 마케팅만 살아남은 세상이 되었다. 영화사의 마케팅용 홍보문구가 평론보다 훨씬 위력적이다. 다음 인용 글들은 영화 보도자료에서 발췌한 것이다.
각기 다른 계절로 표현된 집은 단순히 공간으로서의 목적이 아니라 인물들의 상황을 드러내는 상징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한정된 장소가 주는 답답함과 표현의 제약을 상쇄하고, 집중도 있는 인물들의 묘사와 세밀한 연출력으로 더욱 밀도를 살린 미장센은 제한된 공간을 오히려 풍부하게 만들어 시너지 효과를 발휘한다. - 영화 <계몽영화> 홍보자료 中 -
마음 둘 곳 없던 두 사람이 소통하는 이야기가 선사하는 따스한 감성, 그 과정에서 보여주는 내밀한 심리묘사와 섬세한 드라마 연출은 <아저씨>에서 탁월한 힘을 발휘한다. 감수성 짙은 드라마에 강도 높은 액션을 덧입혀 드라마에 긴장감을 더한 것.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액션 또한 이야기를 더욱 풍부하게 하는 요소로 작용한다. - 영화 <아저씨> 홍보자료 中 -
영화사에서 작성한 보도자료는 일방적 입장 하에 수사학을 동원하여 ‘객관적’ 글쓰기를 하려 하지만, 여기에는 영화적 질에 대한 객관적 분석이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촌각을 다투는 마케팅 전쟁에서 영화사는 세세한 기사 매뉴얼을 미디어에 제공하고, 산업과 공모한 미디어는 영화의 마케팅 도구로 활용된다.
게다가 더 없이 무력화된 문자언어 대신 영상언어가 점령군의 모습으로 사람들을 유혹한다. 영화를 진지한 지적 대상으로보다는 가볍게 소비하고 마는 소모품으로 여기는 사회에서 영화평론은 영화관람으로 가는 선택지가 아니다. 화려한 영화광고와 잘 만들어진 트레일러가 더욱 중요한 선택의 기준이 된다. 허나 그보다는 포털 사이트의 네티즌 평가가 영화흥행에 결정적 요소로 작용한다. 각 포털마다 네티즌 별점 평가란이 있고, 그 평균이 영화사이트 대문에 시시각각 업데이트 된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영화사는 관객시사회 때 포털에 별점 잘 부여해 달라는 말을 대놓고 한다. 공짜로 영화를 보았으니 그 정도는 ‘보은’ 차원에서 해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기도 하고, 영화관계자들이 나서기도 하면서 네티즌 별점 평가는 쑥쑥 올라간다. 단 한 줄짜리 단평과 함께 달린 별점은, 그걸 올린 유저에게는 공정한 평론가가 된 듯한 기분을 부여해주고 읽는 유저들에게는 개봉된 영화 관람의 소감을 빠르게 평균치로 잡아낼 수 있는 도구로 작용한다. 이 모든 것은 디지털 시대로 패러다임이 바뀌었으므로 가능한 일이다. 영화가 좋다는 건지 나쁘다는 건지 애매모호하게 표현한 어려운 문자 텍스트로 나열된 평론가의 글보다는 ‘강추’와 ‘비추’로 확실히 표현하여 눈에 쏙쏙 들어오게 평가한 네티즌들의 입소문이 더 신뢰할만한 것이 되었다. 이때 “평론이란 영화평론가 개인의 의견에 지나지 않게 된다.
위에 열거한 비평을 둘러싼 환경의 변화는 세상이 확실히 변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변한 세상에서 예전의 직업적 방식으로 활동을 해나갈 수는 없다. 그러나 변화가 영화평론가들에게 나쁘게만 돌아가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어쩌면 좋은 징조일 수도 있다. 독자들이 사라지는 문제, 저널리즘의 문제, 영화문화의 문제는 각각 이면에 또 다른 기회를 담고 있다. 데리다 식으로 말하면 부정이 긍정을 담고 있고 긍정은 부정을 담고 있다는 것, 어느 측면에서 바라보는가에 따라 다른 해석이 가능할 수 있다. 많은 독자들이 떠난 자리에는 더욱 엄밀한 영화비평을 기다리는 충실하고 진지한 독자들이 남는다. 선정적인 방향으로 흘러가는 죽어가는 저널리즘을 넘어 전문가적인 비평이 살아 숨 쉬는 새로운 대안 공간을 만들면 된다(이를테면 웹). 부박해진 영화문화를 극복하기 위해 영화평론가들이 할 일은 많다. 선정적이거나 결정적인 장면만 뽑아서 보는 천박한 수용 형태보다, 지루한 것을 참아내며 영화 한 편을 온전히 보면서 나누는 ‘지적 유희’의 뿌듯함이 훨씬 크다는 사실을 직접 실천해야 한다.
대안을 찾아서 - “비평의 영년을 맞는 자세로”
이제 대안을 말할 때이다. 문제는 내부에서부터 찾아 해결해야 한다. 세상은 바뀌었는데 평론 방식은 예전의 것을 고수하고 있다면 결코 문제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동안 평론가들이 서로 치열하게 논쟁을 한 적이 몇 번이나 있었던가를 반문한 강성률의 지적은 타당하다. 그는 이어서, “서로의 의견을 두고 치열하게 논쟁하는 비평"이 등장해야 함을 주장한다.
우선 비평가는 비평가로서의 역할, 특히 좋은 영화의 가치를 매기고, 좋지 않은 영화의 문제점을 엄밀히 지적하는 올바른 정치적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비평가가 산업과 대중에 영합한 비평으로 불신을 받는다면 이는 곧 한국영화산업에도 부정적 영향을 미치게 된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1950년대 프랑스 평론가들이 누벨바그 영화운동을 이끌고, 1960년대 젊은 평론가들이 ‘앵그리 영 맨’ 집단을 결성하며 영국영화의 부흥을 이끌었던, 역사의 훌륭한 선례들이 있다.
몇 해 전 데릭 엘리는 인터뷰를 통해, 한국 영화산업 성장기에 영화저널리즘이 산업의 진흥을 지원해야 한다는 암묵적인 전제 아래 한국영화에 대해서는 호의적인 평론을 해왔다는 사실에 대해 말하며, “영화비평은 어떤 영화가 나쁘고 끔찍하다고 할 때, 왜 그것이 나쁘며 왜 효과적이지 않은지를 잘 써야 건설적인 비평”이라고 지적한다. 전찬일은 “이제는 관객과 싸우는 게 평론가의 중요한 비중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말한다.《필름2.0》 24호에서 김영진은 “영화비평이 객쩍은 소리의 공해로 추락하지 않으려면 살 길을 찾아야 한다. 재담을 쏟아 내며 시장에 오락을 제공하거나 시장에선 환영받지 못하되 정확한 문장으로 영화 속 삶의 표정을 찾아내거나” 해야 할 것임을 주문한다. 유운성은 “비평이 당대의 대중을 당황하게 만들고 불편하게 만들지 않는다면 그것의 존재의의는 현재에서 멈출 수밖에 없다”며 대중과 거리를 두는 것에서 진정한 비평이 이루어질 것을 말한다. 미술평론가 반이정은 “평론가는 그릇된 다수의 견해에 맞서 전문가의 양식과 입장을 고수할 필요가 있다. 평론이 대중의 힘을 외면하기란 어렵지만 전문가적 확신이 있다면 힘겨운 싸움에 임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제 비평가로서의 자세를 가다듬을 때이다. 1930년대에 벤야민이 초현실주의 예술을 보며 “비평가들에게 상위의 심급은 직업동료이지 독자가 아니다” 라고 단언한 것처럼, 이해관계에 사로잡히지 않고 홀로 외로이 정진하는 진정한 비평가 자세로 돌아가야 할 때이다. 이렇게 하여 비평가가 영화계 전체에 활발한 논쟁을 이끌어내어, 비평계를 사멸한 공룡의 장소가 아닌 분주히 기계가 돌아가는 생산적인 장소로 환골탈퇴시켜야 한다. 비평이 죽었다면 영화제작자도, 영화도, 관객도 죽을 것이다.
둘째, 웹에서 길을 찾을 수 있다. 웹에서는 다양한 포맷의 비평 공간이 가능하다. 평론가는 영화평론을 실어줄 지면을 기다릴 것이 아니라 가능한 모든 매체를 통해 비평 활동을 전개해 나가야 할 필요가 있다. 디지털 시대가 많은 경박한 현상들을 불러오지만, 최고의 덕목은 자유로운 소통의 가능성이라는 점에 있다. 예전에는 볼 수 없는 영화에 대한 갈증을 평론가의 글에서 해소하는 일방적 방식이었다면, 지금은 다양한 영화들을 얼마든지 바로 찾아볼 수 있다. 훨씬 자유롭게 선택적으로 영화를 비평할 수 있는 좋은 환경이 조성되었다는 의미이다. 화제를 몰고 오는 영화와 상호텍스트적으로 관련을 맺는 영화사적 텍스트들을 찾아 즉각적으로 들려주고 피드백 받을 수 있다. 그럼으로써 훨씬 더 다양하고 깊이 있는 영화 분석이 실행될 것이다.
비평이 허약해진 실정에서 직업 평론가와 아마추어 블로거는 경쟁하는 사이가 되어버렸다. 블로거들은 제도화된 미디어의 지면에서 활동하는 평론가에게는 없는 절대 자유 발언이 언제든 가능하다. 그들에게는 직업적 책임감도 없으며, 정책적 개입도 없다. 그렇다면 직업적 책임감과 정치적 사명감을 가진 평론가의 장소에서 “웹은 영화비평의 또 다른 황금광 시대를 연다." 또한 특정한 분야에 전문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는 블로거들의 저장고는 영화 텍스트를 풍성하게 의미화 하는 데 커다란 자산이 될 것이다.
예로 미국의 indieWIRE나 호주의 Sense of Cinema 혹은 개인 블로그인 Aquarello의 Strictly Film School 등이 있다.
셋째, 시네마테크를 중심으로 새로운 시대의 시네필 문화를 만들어나가야 한다. 잘 나가는 영화가 아니라 잊히지 말아야 할 영화를 위해 평론은 존재할 필요가 있다. “평론의 개입을 간절히 원하는 영화들에 대해서는 별다른 글을 쓰지 않고, 대중의 관심을 끄는 화제작들에 대해 첨언하는 형태의 주류 부스러기로 머무는 평론의 역할”은 이제 더 이상 존재할 가치가 없다. 정성일은 “황량한 영화를 위해서는 담론이 넘쳐 나는 동안 위대한 영화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그러므로 우리 시대의 영화에 관한 담론들이 빈곤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라고 일갈하며, 시네마테크에서 비평이 다시 출발할 것을 제안한다. 평론가는 현재 영화의 가치와 과거 영화의 가치를 나란히 놓고 분석하며, 영화역사 쓰기의 관점에서 영화들의 가치를 판단해야 한다. 그리고 영화산업의 주류적 흐름에 대항하는 영화들에 의미를 부여하고 영화사 안에서 그것들의 존재가치를 매기려는 노력을 이어나가야 한다. 이는 주류 영화관이 아닌 시네마테크에 모인 관객과 평론가 중심으로 가능한 일이다.
영화 붐이 형성되고 영화산업이 함께 성장하면서 누구나 영화에 관심을 가졌고, 신문과 잡지들이 영화평을 실었으며, 쉽게 영화평론가가 될 수도 있었다. 영화에 대한 영화 팬의 열띤 일상적 관심이 식고 산업의 파이가 줄어들었을 때, 이제 진정한 영화 애호가들이 독자층을 두껍게 형성하게 될 것이다. 그들은 리뷰가 아닌 비평을 원한다. 이 비평의 위기에서 진정한 독자와 진정한 영화평론가 중심으로 다시 판이 짜이며, 이 새로운 그림은 새로운 영화문화를 형성할 원동력으로 자리 잡을 수 있다.
위에서 언급한 것들은 새로울 것도, 새로울 수도 없는 대안이다. 늘 그렇듯이 영화비평을 되살리는 힘은 바로 좋은 평론가에게 달려있다. 끊임없이 비평가의 과제를 상기하고 문화투쟁의 전략가가 될 때, 정치적으로 올바른 영화비평은 그리고 건강한 씨네필 문화는 재탄생할 수 있다. 지금이 비평의 영년이 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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