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영화와 섹슈얼리티 전략
유지나(영화평론가, 동국대 교수)
1. 섹슈얼리티전략 장치로서의 영화:영화산업이 여배우를 소비하는 방식
한 세기 역사를 가진 영화가 예술적 매체인 동시에 오락산업으로서 자리를 잡게 된 것은 영화란 매체가 갖고 있는 독특한 매혹장치 때문이다. 여기서 매혹장치란 어두운 공간(극장)에서 불켜진 화면을 바라볼 때 느끼는 ‘훔쳐보기’라는 시각적 쾌락을 충족시키는 엿보기의 즐거움에서 비롯된다.
일찍이 산업화에 성공한 헐리우드의 경우 대중의 취향을 가장 정확하게 반영하기 위해 유형화된 이야기 스타일을 갖춘 장르시스템과 대중의 시각 쾌락증을 최대한 소비시키는 스타시스템을 양대 기둥으로 해서 영화산업이란 신전을 세우는데 성공한다.
헐리우드의 스타시스템은 우선 여배우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상황이 그렇게 된 것은 여배우가 남배우에 비해 연기력이 뛰어나기 때문이 아니다. 그보다는 남성중심 사회에서, 그리고 역시 남성이 주도하는 영화산업에서 남성의 시선이 카메라의 시선을 소유하면서 여배우의 상품적 가치를 추구할 수 밖에 없는 섹슈얼리티전략이 개입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시선을 가진 자는 남성이고, 그 시선에 의해 여성(여배우)의 몸을 전시하는 섹슈얼리티 전략이 영화 이야기체 전통에 개입하게 된다. 대중영화에서 특정(남자)감독이 특정 여배우를 스타로 만들어내는 영화들로 큰 흐름을 형성하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 새겨볼수 있다.
추억의 명화쯤 되는 예전 영화들에서 세계인의 가슴을 사로잡은 그레타 가르보, 마를레네 디트리히, 잉그리드 버그만 시대는 여배우의 베일 쓴 아름다움을 상품성으로 이용해 왔다.
시대가 자유로워져서 성적인 표현이 보다 과감해진 2차 대전 후 영화산업은 육체파 여배우군단을 형성한 섹스 여신들-리타 헤이워즈, 지나 롤로브리지다, 마릴린 몬로, 브리지트 바르도, 클라우디아 카르디날레등...-을 끊임없이 발굴해내고 소비해왔다.
최근 <원초적 본능>의 과감한 육체연기로 단번에 스타가 된 샤론 스톤, 심지어 일급 스타라는 데미 무어까지 엉터리 영화 <스트립티즈>에 수십억대 개런티를 받고 출연하는 기이한 풍토의 근저에는 여배우의 몸을 이용해 막대한 부를 축적해온 영화산업의 전통, 그리고 그것을 이용하면서 소위 빠른시간에 명예(?)와 부를 얻기 위해 온몸을 던진 여배우들의 야릇한 포부가 은닉되 있다.
한국영화에도 이런 남성중심 시선에서 여배우의 몸을 상품으로 이용하는 풍토는 어느 문화권 못지 않게 막강한 흐름을 형성하고 있다. 남자배우들에겐 없는 여배우들의 트로이카 시대가 스타시스템이란 명목으로 만들어지고 지금도 엉덩이를 내세운 여배우, 가슴 큰 여배우가 주연으로 캐스팅되어 옐로우 페이퍼를 장식한다. 그리하여 여배우는 연기력보다는 몸으로 혹은 외모의 매력으로만 평가되는 풍토가 남배우에 비해 단명한 여배우의 운명을 만들어 왔다.
곰곰히 과거와 현재를 돌아보면 대중에게 스타로 존재하는 대부분의 여배우란 섹시한 자태를 보여주는 캐릭터를 통해 빠른 시간 안에 스타의 위치에 등극한다. 이런 경향은 여성의 성욕에 관한 야릇한 포르노그래피적 드라마 <애마부인>의 여배우들부터 <젖소부인>류의 비디오스타에 이르기까지, 혹은 일반 장르영화나 A급 대중영화의 이보희, 강수연, 정선경, 김혜수, 신은경 등에서 더 같은 맥락을 갖는다. 이런 구조는 심지어 어느 정도 연기력이 있는 여배우로 하여금 스스로 섹시해져야 살아남는다는 최면을 거는데, 강수연의 경우가 여기에 속한다. 그리하여 영화세상에는 역시 여자는 몸이 잘나야 출세한다는 남성 시선의 지배전략을 증명해 주고 있고 이런 기준에서 선택된 여배우들의 야심이 이에 공모하고 대중은 그것을 소비한다.
2. 90년대 영화, 섹슈얼리티 전략의 뒤집기
한편 대중영화에서 여성의 몸을 상품화시키는 것에 대한 공식적 비판이 제기된 것은 60년대 서구에서 시작되었다. 대중문화 중에서도 다른 분야보다 여성의 상품화 전략이 두드러진 영화는 집중포화를 받았고, 그 동안 무의식적으로 남성중심 시선을 대신해온 카메라의 시선, 현실적 여성상보다는 남성의 성적 환상에 맞게끔 만들어진 여성상의 문제 등이 적나라하게 폭로되었다.
대중영화에서 이런 여성시선의 도입은 그 동안 잘된 영화라고 여겨져 온 것들을 3류영화로 재평가하게 만들기도 했으며, 영화 비평이론에서 관객시선 중심의 수용자 이론을 만들어내는데 공헌하기도 했다.
그리하여 이제 인종차별과 성차별극복이 인류 최대의 과제로 주어진 21세기 문턱에서 세계의 대중영화에선 이런 문제에 관한 화두를 이야기 소재와 주제로 설정하는 커다란 흐름이 형성되고 있다. 기존의 인종차별적 성차별적 영화를 뒤집는 전복의 테스트들이 주류 이데올로기를 전파하고 강화하는 대중상업영화의 틀에서 마치 패션처럼 퍼져나가고 있는 현상은 눈여겨 볼만하다.
우선 세계 영화흥행을 주도하는 헐리우드의 최근 명세서를 보자.
가장 남성적인 장르라고 볼수 있는 서부극에서 총잡이 여성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더 퀵 앤 더 데드Ths Quick and the Dead>, 못된 남성(성과 폭력을 결합시키는 남자)은 법의 힘이 아닌 여성의 기지로 해치워야 한다는 못된 남자 죽이기 전략이 담긴 영화 <돌로레스 클레이본>과 <디아볼릭>... 특히 여기서 두 편 이상의 주연을 맡은 샤론 스톤이 <원초적 본능>으로 유명해진 섹스 스타임에도 불구하고 이후 그녀 이미지는 거친여자 증후군(Tough Girl Syndrom)의 단면을 보여준다. 이런 90년대식 섹스 스타(여배우)는 남성의 사랑과 보살핌을 필요로 하는 수동적이고 나약한 섹스 여신과는 다른 섹슈얼리티 개념을 보여준다.
뛰어난 흑인 연기자 포레스트 휘테이커는 남성임에도 불구하고 감독 데뷔작으로 흑인 여성의 삶, 더 정확하게 말하면 남성에게 기대했다가 좌절을 겪은 후 자매애로 자기만의 삶을 발견하는 <사랑을 기다리며>로 백인 여성중심 헐리우드 영화에 도전장을 내 호평을 받았다.
헐리우드뿐만 아니라 최근 유럽과 호주, 뉴질랜드의 영화에서도 여성 시선의 영화가 대중영화 주류에서 만들어지고 있다. 남편의 폭력과 폭력적인 남편 친구들에게 시달린 아내의 투쟁을 원주민 정신의 회귀로 그린 <전사의 후예>, 뚱뚱한 여자가 백마탄 기사의 환상을 극복하고 자기만의 생을 발견하는 호주영화 <뮤리엘의 웨딩> , 애인이 없어 우울한 삶을 살며 주위의 놀림감이 된 29세 여성이 죽음에 집착하다가 흑인친구를 만나 자신의 삶을 사랑하게되는 멋쟁이 독일 영화 <파니 핑크>등...
한국영화도 예외는 아니다. 지난해 가장 많은 여성들의 공감을 얻어낸 <개같은 날의 오후>가 한국에서 여성으로 산다는 것에 대한 분노를 코믹하게 그려내 비평계와 극장 흥행가에서 큰 성공을 거둔후 지금 세계시장에서 가장 잘 팔리는 한국영화가 되었다. 같이 대학시절을 보낸 야심만만하고 똑똑한 30대 세 여성이 남편과의 관계에서 겪는 삶의 좌절을 그려내 남성중심 사화에 싸움을 걸었던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도 있다. 그런가 하면 최근 한국영화 <코르셋>은 남성 시선의 쾌락을 위해 여성이 입었던 코르셋을 현대판 여성의 족쇄-내적, 정신적 성장보다 외모가꾸기에 치중하는 여성의 남자잡기 전투-로 상징하는 코메디로 공감을 얻어냈다. 두 여성의 관계를 내세워 음식문화를 여성억압기제로 다룬 박 철수감독의 <301, 302>는 국내보다 미국에서 더 큰 인기를 얻기도 했다.
한편 97년 <접속>의 성공 이후 다시 돌아온 멜로드라마에도 섹슈얼리티 전략과 관련하여 흥미로운 변모를 보여준다. 과거 한국의 멜로드라마는 여성용 영화로 (‘고무신 관객’이라는 여성관객을 폄하하는 말로 불리운다) 주로 어떤 남자를 만나느냐에 여성의 운명이 달려있다는 남성중심 세게관에서 남자를 잘못 만나 망가지는 여자의 인생을 가련하게 그려내는 것(여성 학대담론)이 컨벤션이었다. 그러나 90년대 후반 돌아온 멜로드라마에선 오히려 여자보다 남자가 내러티브를 이끄는 주인공이 되고, 사랑을 만들고 책임지는데 더욱 집중한다. 이제 더 이상 사랑은 여성의 전공이나 전유물이 아니라 남성 역시 여성만큼이나 혹은 여성보다 더 사랑에 매달리는 정서적인 주인공으로 복원된다. 심지어 <편지>에선 여성의 출세를 위해 생명을 받치는 헌신적인 남성상이 등장해 조악한 영화장치에도 불구하고 흥행에 성공하는 일도 벌어진다.
3. 구성주의적 섹슈얼리티 전략, 혹은 여성성의 쾌락을 찾아
여성시선의 대중 상업 영화가 등장하기까지에는 60년대 이후 탈중심, 탈식민문화의 영향력이 토대가 되었다. 서구사상계는 60년대 이후, 두 번의 세계 전쟁을 거치면서 그 동안 서구문명의 발달이 결국 인간이 많은 인간을 빠른 시간 안에 죽이는 폭력과 파괴의 문화이자 문명인걸 만들어냈다는 데 대한 반성, 즉 그 동안 중심이 되어 온 것들(서구인, 백인 남성)의 해체와 함께 주변으로 밀려난 것들(비서구인, 유색인, 여성)에 대한 관심을 보이게 된다.
그런 점에서 여성시선의 새로운 섹슈얼리티 전략은 세게와 교류할수 있는 포스트 모던한 화두이자 무궁무진하게 개발할 영화적 관건인 동시에, 한국사회의 뜨거운 감자이기도 하다. 그러나 지금도 한쪽에선 여전히 여성을 남성 시선의 대상으로 삼으며 상품화하는 퇴행적인 한국영화들-<투캅스1,2>, <피아노맨>, <진짜 사나이>, <나에게 오라>, <맥주가 애인보다...>등...-이 만들어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98년에 나온 <투캅스 3>는 이런 섹슈얼리티 전략의 퇴행성과 관련해 매우 시사적이다. 한국 오락영화의 상징인 <투캅스>시리즈는 워낙 이전의 두 편도 여성혐오증을 노골적으로 들어내 최악의 여성관객상을 받기도 한 경험이 있다. 그래도 1,2편은 두 남자 주인공을 중심으로 풀어가는 버디무비라고 치자. 이번에는 마치 세상의 흐름을 반영한 듯 여형사를 파트너로 내세운다. 그런데 정작 관객이 보는 것은, 성폭행범에게 끔찍하게 시달리거나 동료남형사들의 커피 심부름과 성차별적인 반응에 엄청나게 스트레스를 받는 여형사, 그러면서도 출렁이는 큰 가슴과 온몸의 윤곽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현장을 뛰는 형사에겐 매우 불편해 보이는 노출증 환자같은 여형사이다. 이야기 설정을 배신하는 이런 캐릭터만들기는 당연히 남성시선만을 주체로 상정한 데서(그것도 모든 남성이 아니라 여성을 일단 그런 식으로 보려드는 못난 어떤 부류의 남성적인 섹슈얼리티 관행) 자충수를 둔 것이다. 결과는? 1, 2편에 비해 엄청나게 관객이 안 드는 망신을 당했다. 세상은 변했고, 어떤 영화도 변했다, 이런 영화를 보고 이런 세상에 적응하거나 더 큰 변화를 바라는 관객은 그렇지 않은 고가 본질주의적 섹슈얼리티 관습에 젖어 구성주의적 섹슈얼리티 전략을 못받아들이는 영화를 거부한다. 바로 그 점을 <투캅스 3>는 증명한다.
그래도 지구는 돈다는 말처럼 아무리 섹슈얼리티의 본질론자들이 존재해도 이제 대중영화의 섹슈얼리티 전략이 변한 것만은 사실이다. 늘 현실과 교류하며 영향을 주기도 하고 받기도 하는 영화의 이런 변화는 우리 삶의 환경의 변화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