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용 김수용 감독은 1928년 경기도 안성의 농촌에서 육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구술자는 평화로운 마을에서 근심 없이 어린 시절을 보냈고, 안성과 평택에 있는 학교에서 수학하고 안성공립농업학교를 다니다가 서울사범학교로 진학했다. 1950년 서울사범학교 졸업 직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함께 어울리던 학우들 중에서 좌익 운동하는 친구들이 눈에 띄게 활동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이와 달리 구술자는 소설이나 미술 등의 예술 분야에 관심을 두고 있었고 졸업하면 교단에 서리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용산 폭격 이후, 그는 인공 치하의 서울을 떠나 고향으로 피난 갔다 9.28 수복 후에 징집되어 군에 입대하게 된다.
전쟁 기간 동안 그는 부산에서 통역 장교로 임관하여 대구 통신부대, 제주도 한라산 통신소, 서울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등에서 근무했다. 구술자는 미군을 상대로 하는 영어 통•번역 업무에 상당한 고충을 겪었지만 한편으로는 문맹인 미군 병사들을 위해 편지를 대필해주기도 하고 영문법을 알려주기도 했다.
1954년에 구술자는 국방부 정훈국 영화과에 배속된다. 그의 근무지는 서울 중구 필동의 남산 꼭대기에 위치한 적산가옥에 편집실, 녹음실, 영사실 및 스튜디오 등을 갖추고 있는 군영화촬영소였다. 전후 1950년대 중후반에 민간인 현상소나 편집실 등의 후반작업 시설이 전무했기 때문에, 국방부 영화과 시설에서 군 영화뿐만 아니라 당시 한국영화의 거의 모든 작업들이 이루어졌다. 구술자는 이곳에서 영화인들의 작품 제작 현장을 눈여겨보면서 전반적인 영화 제작 과정을 이해하고 터득한다. 그 무렵 정훈국 영화과는 종전의 군 뉴스 제작에서 한발 나아가 홍보 및 교육용 문화영화를 시도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1955년에 군 교육 문화영화 <잊지말자 6.25>를 감독하며 처음으로 영화 연출을 하게 된다. 그 후 <10분간 휴식>, <윤 중사의 수기>, <해뜨는 마을> 등의 군 영화들을 연출하였는데, 특히 <10분간 휴식>은 영화 속에서 군인들이 행군 도중 휴식을 취하는 10분 동안이 러닝타임인 10분과 동일하고, 등장인물이 이야기하는 장면으로 화면이 전환되었다가 현실로 돌아오는 구조로 선형적인 시공간 구성을 탈피한 영화이다. 이 작품을 회상할 때, 구술자는 매우 생기 넘치고 특별히 애착 있는 것에 관한 기억을 떠올리는 모습이 역력했는데, 이는 마치 후에 그가 자신의 장편극영화에서 자유자재로 구사했던 시공간을 넘나드는 쇼트 연출의 발아를 보는 듯한 인상을 주었다.
한편 장편극영화 제작과정에 직접 참여해보고 싶었던 구술자는 <배뱅이굿>(양주남, 1957)의 조감독을 맡아 영화감독으로서의 소양을 쌓게 된다. 이 작품의 제작자였던 김보철이 이듬해 구술자에게 영화 <공처가> 연출을 의뢰한다. 그리하여 그는 정훈국 영화과 수뇌들의 배려 하에 근무시간 외의 시간을 할애해서 장편극영화 감독으로 데뷔했다. 이후 <3인의 신부>(1959), <청춘배달>(1959) 두 편을 더 연출하여, 구술자가 현역 군인 시절에 감독한 작품들은 총 3편이다. 그는 <청춘배달>을 보기 위해 관객들이 극장 앞에 줄을 선 모습을 보고 군대를 그만두고 영화감독의 길을 택할 결심을 하고 1958년 4월, 육군대위로 제대했다.
본격적인 직업 영화감독의 세계에 들어선 구술자는 <애상>(1959)을 시작으로 왕성한 작품 활동을 펼쳤고 국방부 정훈국 영화과에서 촬영을 담당했던 전조명과 장석준이 구술자의 작품들을 다수 촬영한다. 전조명은 <3인의 신부>(1959)의 촬영감독으로 데뷔하여 <혈맥>(1963), <굴비>(1963), <갯마을>(1965), <일요일의 손님들>(1973), <도시로 간 처녀>(1981) 등의 작품들을 촬영했고, 장석준은 <구혼결사대>(1959)를 시작으로 <버림받은 천사>(1960), <만선>(1967), <안개>(1967), <일본인>(1968), <봄봄>(1969), <토지>(1974) 등의 작품들을 촬영했다.
1962년에는 한양영화공사가 홍콩과 합작한 <손오공(원제 화염산(火焰山)>의 한국 측 감독을 맡아 홍콩에서 칼라 동시녹음 작품을 연출했다. 그는 한국으로 돌아와서 <사춘기여 안녕>(1962), <청춘교실>(1963)과 같은 청춘물을 연출했는데, 에메랄드 빛깔 잉크로 쓰인 신봉승 작가의 시나리오 <청춘교실>1)을 처음 읽었을 때 받은 새롭고 청신한 기운을 생생하게 회상했다. 일본소설을 원작으로 한 작품이었지만 구술자는 그 오리지널리티의 주소에 구애받기 보다는, 연출자가 해당 작품을 자기 색깔과 역량으로 소화해내서 ‘김수용의 영화’로 완성하는 데에 주안점을 두었다. 같은 해, 구술자의 초기 대표작으로 꼽히는 <굴비>, <혈맥>(1963)2)을 연출하는데 두 작품 모두 각기 라디오극과 연극이 원작으로 구술자는 이를 영화적으로 소화하는 데 성공했다.
그는 데뷔작부터 두각을 보인 희극적인 드라마 연출뿐만 아니라 멜로물, 시대극, 청춘물 등의 다양한 장르의 작품들을 소화했고, 해방촌 피난민들의 고단한 인생살이부터 오픈카를 타고 등교하는 최상류층 대학생들의 청춘까지 다양한 소재와 인물들의 이야기를 다룰 수 있는 폭넓은 스펙트럼의 영화연출력을 갖춘 감독이었다. 또한 구술자는 철저한 사전 콘티 작업과 함께 항상 성실한 연출 준비로 주어진 제작 실정 안에서 효율적이고 체계적으로 촬영 현장을 지휘했다. 그는 “치열한 충무로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우선 영화는 재미가 있어야 한다는 것과 제작예산을 엄격하게 지킨다는 신조를 갖게 되었다. 그래서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적당히 어둡고 지루한 영화를 만들면서 제작기간을 지연시키는 일은 하지 않았고, 밝고 빠른 템포의 즐거운 필름을 칼날같이 약속기한 내에 만들어내는 것을 특기로 삼았다.”3) 그는 이와 같이 제작자와 관객 모두를 만족시키는 영화감독으로서, 1960년대 한국영화의 전성기를 이끄는 대표작들을 만들었다.
1965년 작 <갯마을>은 영화전문기자였던 호현찬이 구술자가 연출한 <날개부인>(1965) 제작을 시작으로 영화기획자로 변신한 두 번째 작품이었다. 구술자는 그 무렵, 현대물로 영화화할만한 문학 작품에 관심이 있었기에 애초에는 <갯마을>의 원작에 크게 주목하지 않았다. 하지만 바다에 운명을 맡기고 살아가는 어촌 마을의 이야기에서 한국적인 드라마를 발견하고, 구술자의 바다에 대한 동경을 배경으로 여배우들의 개성 있는 연기를 발현해보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그리고 마침내 한국영화사의 명장면으로 꼽히는 <갯마을>의 아낙네들의 해변가 망중한 시퀀스가 탄생했다. 구술자는 김소희의 창과 아낙네들의 건강한 육체가 서정적인 어촌 풍경을 배경으로 아름답게 어우러진 이 몽타주 시퀀스에 대한 평단의 찬사에 관해 다소 의아해하기도 했는데, 그가 의도한 것은 <갯마을>의 이야기 전개 사이에 쉬어가는 느낌으로 ‘시네포엠’적인 표현을 전개한 것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그가 영화 창작에 있어, 일종의 의도된 야심을 갖고 작가주의적 표현을 노렸다기보다는 자신만의 직관적이고 감각적인 통찰로 한국영화 화술의 지평을 넓혀갔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갯마을>은 관객을 끌어들이는 데 성공함으로써 문예영화의 흥행가능성을 보여준 작품이 되었고, 이후 수많은 문예영화들이 기획•제작되는 데에 영향을 끼쳤다.
흥행에 있어서는 구술자가 같은 해에 아역 배우들의 열연을 이끌어낸 <저 하늘에도 슬픔이>(1965)가 28만 명이 넘는 관객을 동원하면서 크게 히트했다. 또한 이듬해 이를 능가하는 32만 명의 관객수를 기록한 1966년 최고 흥행작이 등장했는데, 바로 구술자가 오디션을 통해 발탁한 배우 남정임이 주연을 맡은 <유정>(1966)이다.
<유정>은 구술자가 처음으로 일본 로케이션 촬영을 한 작품으로, 세관의 필름 세금 부과를 피하기 위해 북해도의 설경을 담은 필름을 배우 김진규의 겨울 코트 안에 말아서 귀국했다고 한다. <유정> 촬영 당시만 해도 일본 로케이션 촬영을 허가 받기 어려운 제작 환경이었다. 그러나 재일교포 북송을 다룬 반공영화 <망향>(1966) 제작 시에는 국정원과 주일대사관의 협조 하에 일본 로케이션 촬영이 진행되었다. 제작자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연애탐정>(1966)이라는 작품 또한 <망향> 일본 촬영시 함께 제작했다. 이후 한일국교 정상화가 이루어진 후에, 정식으로 일본 로케이션 촬영을 허가받고 여러 작품들을 연출하게 되었는데 <잘 있거라 일본땅>(1966), <일본인>(1968), <동경특파원>(1968), <추격자>(1969), <설원의 정>(1970), <저것이 서울의 하늘이다>(1970) 등이다. 일본 로케이션 촬영의 경우 주로 재일교포 이노우에 강(이병우)이 촬영을 담당했고, <추격자>와 <설원의 정>은 재일교포 사업가가 제작을 맡았다.
1967년에는 구술자가 데뷔 9년차 감독으로서 이제껏 그의 연출작들에서 함께 일해 왔던 스태프들과 이상적인 호흡을 자랑하는 일종의 ‘드림팀’을 갖추게 된다. 이러한 팀워크를 바탕으로 만든 <만선>, <어느 여배우의 고백>, <산불>, <안개>, <사격장의 아이들>, <까치소리> 등은 한국영화사에 길이 남는 수작으로 꼽힌다.
특히 구술자가 아끼는 작품 <만선>(1967)은 현재 필름이 유실되어 작품을 볼 수 없는 점이 안타깝다. 그는 바다를 테마로 한 삼부작(<갯마을>(1965), <만선>(1967), <물보라>(1980)) 중 한 작품인 <만선>에 대한 애정을 표현했다. 역시 구술자가 애정을 갖는 <어느 여대생의 고백>(1967)에 관해서는, 후대의 평가에 따라 감독이 자신의 작품에 대한 인식에 변화가 생기고 이전의 판단을 재고할 수 있는 면모를 볼 수 있었다. 그가 이 영화를 연출할 당시에는 남다른 작품성이나 이슈가 있는 작품으로 여기지 않았고, 당대 한국영화계에 대한 풍자적 소재 정도로 의식했으나 후대에 이 작품에 대한 영화사적, 기록적 가치를 인정받게 되자 자신의 영화를 다른 각도에서 재평가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고 한다. 1960년대 한국영화계에 관한 자기반영적 장면들을 볼 수 있는 이 작품에는, 영화감독 역할로 출연하는 구술자의 모습도 확인할 수 있다. 이 작품을 선택한 지방흥행사가 감독이 영화에 출연하는 것을 조건으로 투자했다는 일화도 들을 수 있었다. 이는 관객들의 영화에 대한 관심이 스크린에 펼쳐지는 영화뿐만 아니라 스크린 너머에서 작품이 만들어지고 있는 한국영화계 자체에까지 확장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어느 여대생의 고백>에서 한성이라는 신인배우가 주연 남정임의 상대역을 맡았는데, 구술자는 이와 같이 소수의 스타들이 독식하는 한국영화계의 배우층을 넓히고 기성 배우들의 아성에 도전하는 신인배우들을 육성하고자 의식적으로 노력했다. 그가 영화배우로 육성한 남정임은 여배우 트로이카 중 한 명이 되었고 최난경, 이훈, 한성, 주연, 김정철, 임지운 등이 구술자가 주목한 신인배우들이었다.
북한 중앙통신사 부사장이었던 이수근의 귀순 실화를 영화화한 <고발>(1967)은 제6회 대종상영화제 남우주연상(박노식), 반공영화각본상(조문진) 등을 수상했지만 1969년, 이수근이 이중간첩으로 사형당하면서 상영이 중지되고 상훈이 반납되는 해프닝이 있었다. 그러나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2007년 1월 ‘이수근 간첩사건’을 중앙정보부의 ‘조작사건’으로 결론 내렸다. 따라서 이수근을 간첩으로 볼 수 없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구술자는 이번 구술에서 면담자를 통해 이와 같은 사실을 알게 되었고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분단과 반공, 실화와 영화만들기라는 것의 역사적 왜곡과 진실의 행방에 관해 반드시 짚고 논의해야할 한국영화사에 드리워진 어두운 그림자를 마주했다고 할 수 있다.
한국 모더니즘 영화의 대표작으로 평가받는 <안개>(1967)는 서울대 출신들(이어령, 김동수, 황혜미, 김승옥 원작•각본)이 모여 한국영화의 혁신을 목표로 기획했다고 한다. 구술자는 기존의 한국영화를 세차게 비판하는 이들이 내심 괘씸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그간의 영화연출 경력을 통해 그가 쌓아온 모든 역량을 제약 없이 발휘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여겼다. <안개>는 입도선매 없는 자체 제작이었고, 제작자들의 간섭도 없었기 때문에 감독이 비교적 구애받는 바 없이 작품에 몰두할 수 있었다. 구술자는 <안개>의 영화적 스타일이 안토니오니 영화의 모더니즘과 비교되는 것을 달가워하지는 않았는데, 그 이유는 본인이 굳이 유럽 영화들로부터 어떤 영향을 받을 필요를 못 느끼는 것이며, 무엇보다 구술자 스스로 소화하고 구축해나가는 영화 스타일의 세계가 갖는 창의성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미 <안개> 이전에 촬영한 <까치소리>에서도 의식의 흐름을 표현하는 영상기법과 ‘시네포엠’적인 장면들을 접할 수 있다. 일찍이 구술자는 <굴비>(1963)를 감독할 당시부터 기존의 인습적인 한국영화 표현 방식에 회의를 느끼고 이를 탈피하는 연출을 강구하기 시작했다고 술회한 바 있다. 문예영화를 다수 연출한 구술자는 그의 조감독을 구성하는 데 있어서도 문학과 글쓰기에 대한 이해가 풍부한 인재를 발탁했고, 그들이 장차 감독이 되기 위해서는 시나리오 집필 실력을 인정받을 것을 당부했다. 그리하여 조문진, 이원세, 나소원, 정지영, 장길수 등의 구술자의 조감독들이 시나리오 집필 능력을 갖춘 감독들로 성장하였는데, <수전지대>(1968)는 이원세 감독의 시나리오 당선작을 구술자가 연출한 작품이다. 또한 일본 유학에서 돌아온 나소원 작가의 시나리오인 <주차장>(1969)을 연출하기도 했다. 두 영화 모두 이제껏 구술자의 다른 작품들에 비해 언급되지 못한 면이 있지만 향후 재조명 받아야 할 가치가 뚜렷한 작품들이고, 실력 있는 신진 영화인을 배출하고자 했던 구술자의 후배 양성책을 확인할 수 있는 작품들이다.
홍콩 쇼브라더스사에서 구술자에게 연출을 의뢰하여, 그는 홍콩에서 <와와후링(娃娃夫人)>, <우중화(雨中花)>를 감독하고 이후 1970년대 초반 미국으로 건너가서 할리우드와 미국영화들을 접하고 돌아온다. 구술자는 당시 홍콩, 미국 영화계를 방문하고 영화자본 측면에서 동시대 한국영화계와의 격차를 절감했다고 한다.
그는 1973년 <일요일의 손님들>, <야행> 등을 연출하는데 <야행>은 “시간과 공간이 항상 유동적이고 주인공이 잘 흔들리고 있다.”는 점에서 <안개>와 비슷한 시나리오라고 회고했다. <야행>의 ‘시네포엠’적인 위트와 프리즈 프레임을 통한 비약, 점프컷의 활용 및 의미 등에 관한 술회는 매혹적인 작품의 속살을 들여다보는 즐거움이 있는 구술 면담의 순간이었다.
1970년대 중후반, 구술자는 그의 조감독 출신인 나소원 작가가 각본을 맡은 새마을영화 및 문화영화들도 다수 만들었는데, 당시 한국영화계 불황기에 일이 줄어든 영화계 스태프들에게는 이와 같은 단편영화작업이 긴요한 아르바이트가 되었다고 한다. 즉, 이 영화들은 구술자와 더불어 숙련된 전문 영화 스태프들이 만들어낸 공익 단편영화들이었고, 내무부 우수영화 등에 선정되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구술자는 1970년대에도 소설을 원작으로 한 <토지>(1974), <극락조>(1975), <황토>(1975), <내일은 진실>(1975), <내 마음의 풍차>(1976), <발가락이 닮았다>(1976), <웃음소리>(1978), <사랑의 조건>(1979) 등을 연출하는 한편 1979년 ‘세계 어린이의 해’ 기념 아동영화 <달려라 만석아>, <빨주노초파남보> 및 당시 해외파견 근로자들을 주인공으로 국내 기업 홍보 효과를 노렸던 중동 로케 촬영작인 <아라비아 열풍>(1976) 등을 감독한다.
<가위 바위 보>(1976)는 정일성 촬영감독이 촬영한 작품으로, 베트남에서 서울로 피난 온 아이들이 엄마를 잃고 고아가 되어 뿔뿔이 흩어지게 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러나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주인공이 베트남 국기를 꺼내들고 달려가는 모습이, 베트남 패망을 이유로 검열에서 삭제당하고 감독의 연출의도와 다르게 엉뚱한 컷으로 대체되었다. 검열로 인한 당국의 작품 개입은 계속되었는데 <망명의 늪>(1978), <도시로 간 처녀>(1981), <삐에로와 국화>(1982), <허튼 소리>(1986)로 이어졌다.
<망명의 늪>은 “70년대라는 특수상황 속에서 그것도 영화라는 간섭 심한 장르를 통해서 위선적 지식인을 비판한 것은 감독이 아직 작가로서의 한 가닥 맥박이 뛰고 있음을 증명한 것이다.”4)라는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당시 군사문화에 익숙한 지식인을 통해 ‘인간의 양심을 묻는 영화’라는 이유로 상영 제재를 가한 당국의 권유로 인해 제작비만 보상받고 창고 속에 묻혀있었다고 한다.5)
<도시로 간 처녀>는 버스안내양들의 열악한 근로환경과 비인간적인 처우 등을 고발한 작품이었는데 관제노조의 압력으로 상영중지 및 당국의 검열 수정, 재상영 등의 고초를 겪었다. 당시 영화평론가협회는 ‘<도시로 간 처녀>의 상영중지에 대한 우리의 주장’이라는 성명을 발표하는 등 영화 창작의 자유에 관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삐에로와 국화>는 영화 속에서 그려진 북한의 모습이 “너무 잘 그려졌다.”는 이유로 용공 시비에 휘말려 당국으로부터 재촬영을 강요받았으며, 이와 같이 연이어 작품 연출에 제약을 받는 상황에 지친 구술자는 차기작으로는 의도적으로 서정적인 작품을 선택하여 검열 제재를 피하고자 했는데, 이 작품이 1981년 작 <만추>이다. 이 영화는 주연을 맡은 배우 김혜자의 호연6)과 더불어 늦가을이라는 짧은 시간을 배경으로 정일성 촬영 감독의 수려한 화면이 더해져, 지금은 볼 수 없는 이만희 감독의 <만추>(1966)와 함께 수작으로 꼽힌다.
구술자는 1983년 <만추>가 하와이영화제에 출품되어 호놀룰루를 방문했을 때 중광 스님을 알게 되었는데, 만나자마자 그의 자유분방한 성품에 매료되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구술자는 중광의 삶을 다룬 <허튼 소리>(1986)를 연출했지만 공연윤리위원회의 심의 과정에서 무려 10여개 장면이 잘려나갔고, 그는 이에 항의하는 뜻으로 영화계 은퇴를 선언했다. 이후 약 10년간 메가폰을 잡지 않았던 구술자는 1995년 일본영화 <사랑의 묵시록>의 연출을 맡아 다시 감독으로 복귀하고, 1999년 김지헌 작가와 정일성 촬영 감독과 의기투합한 ‘K.J.K필름’이란 이름으로 제작한 <침향>을 연출했다. 그는 이 작품을 끝으로 감독 생활을 마치고 2005년까지 영상물등급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했다.
구술자는 전후 1950년대에 영화계에 입문하여 1999년까지 109편의 영화를 연출한 다작 감독이다. 그는 코미디영화, 청춘영화, 사극영화, 멜로영화, 문예영화뿐만 아니라 반공영화, 새마을영화, 국가 장려 정책영화까지 당대 관객에게 소구되거나 당대 영화정책 제작 환경이 요청했던 작품들 모두를 다양하게 만들었다. 그 시대 격변의 세월을 관통하고 견디어온 구술자의 영화 경력 장수 비결은 무엇일까?
네 번의 면담으로 구술자의 영화 인생을 모두 짚어보기에는 무리가 있었지만, 그가 어떤 상황에서 무슨 작품을 만들게 되었든 주어진 실정 안에서 각 작품마다 합리적으로 자신이 구사할 수 있는 가장 영화적인 목표를 향해 매진해왔다는 점을 알 수 있었다. 흥행적인 재미가 있거나 추구하는 의미가 있거나 혹은 새로운 표현을 시도하거나, 항상 일정 수준 이상으로 작품의 완성도와 영화적 매력을 성취한 구술자의 행보는 단연 독보적이라고 할 수 밖에 없다.
그는 구술 면담을 마친 사석에서 “감독은 엉뚱한 데가 있어야한다.”고 했다. 이는 구술자만의 영화적 개성을 유추할 수 있는 표현이라 여겨진다. 그가 ‘시네포엠적인 조크’라고 표현한 쇼트들을 비롯하여 극의 휴지기에 무거움을 상쇄하고 분위기를 전환하는 연출이나, 악보를 그리듯이 한 소절 단위로 영화의 리듬과 템포감을 구성해나갔던 ‘김수용 영화’들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가는 것이다. 영원히 시들지 않을 구술자의 영화적 위트와 재치는 후대의 관객들에게도 변치 않는 즐거움을 주는 “맵시 있는 영화”로 향유될 것이다. ----------------------------------- 1) 일본 작가인 이시사카 요지로의 인기소설『그놈과 나(あいつと私)』가 원작이고, 1961년 일본에서 나카히라 코우 감독에 의해 영화화된 바 있다 2) <혈맥>은 1963년 제1회 청룡상 작품상, 남우주연상, 여우주연상, 남우조연상, 각본상, 기술상과 1964년 제3회 대종상 작품상, 남우주연상, 여우주연상, 각본상 그리고 1964년 제7회 부일영화상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3) 김수용,「연출기: <혈맥>과 나」, <혈맥> DVD 소책자, 한국영상자료원 제공, 블루키노, 2012, 6쪽. 4) 영화평론가 정용탁,「79 문화회고 <6> 영화」,《동아일보》, 1979년 12월 27일. 5)『김수용 감독 회고전』책자, 한국영상자료원, 2010, 22쪽 참고. 6) 제2회 마닐라국제영화제(1983) 여우주연상 수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