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민아 (영화평론가)
카메라는 라핀스 중사의 움직임에 따라 빠르고 경쾌하게 병원 안과 바깥 여기저기를 훑는다. 해외 임무 중 얻은 신경증을 치료하기 위해 재활에 힘쓰고 있는 그는 약을 복용하는 대신, 신비로운 여인 이리나의 자연치유 방식을 비밀스럽게 따른다. 환경주의자이자 대체의학에 심취해 있는 이리나는, 주치의의 판단에 따라 병원생활을 정리하게 된 라핀스를 위해 조용하게 지낼 수 있는 아파트를 알선해 준다. 병원에 들어왔던 모습대로 군복을 차려 입고 민간인 마을에 들어선 라핀스는 가게에 들러 잡지책을 구경하는 것으로 세상살이를 시작한다. 잡지책을 통해 여자친구 이리나가 백만장자 남편과 이혼을 앞두고 있고 누드모델로도 활약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낯선 세상과 조우한다. 이제 민간인으로서의 삶을 시작하는 그는 이리나 주변 사람들과 우연하고도 이상한 관계를 차차 맺게 된다.
젊은 경찰관을 애인으로 두고 있는 아파트 여주인 알리스는 돈을 아끼려고 세입자의 권리와 요청은 쉽게 무시한다. 경찰관 디드지스는 범법자들에게 하찮게 취급 받기 일쑤이며, 분노를 억누르며 임무에 충실하고자 해도 이 나라에서는 기초적인 법과 질서를 유지해나가기가 힘들다. 제멋대인 바람둥이 백만장자 에르빈스는 파산했고, 떠나려는 아내를 붙잡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사소한 오해로 인해 애정관계에 문제가 생긴 알리스는 라핀스의 방에서 위안을 얻으려 하고, 에르빈스는 아내를 되찾을 방법을 찾기 위해 라핀스의 방을 서성인다. 조용한 마을에서 정신적 위안을 얻으려는 라핀스의 계획은 처음부터 자꾸만 어긋난다.
라핀스의 여정을 따라 가면서 우리는 낯선 나라 라트비아의 사회적 현실을 조금씩 들여다보게 된다. 영화는 심각한가 하면 유머러스하게 좌충우돌하는 상황을 즐긴다. 와이드 스크린에 광학적 기법을 배제한 장면전환 방식, 인위적인 클로즈업 보다는 멀리찍기를 고수하며 트래킹 위주로 움직이는 카메라 워킹은 거친 라트비아 생활상을 객관적으로 전달하는 효과를 발휘한다. 그러나 프레임은 신경증이라는 큰 고통을 겪는 주인공의 심리에 따라 세심하게 짜인다. 거울 안에 서있는 주인공을 쳐다보거나, 문이나 창을 통해 바깥을 들여다보면 넓은 프레임이 답답하기 짝이 없게 느껴진다. 이러한 예사롭지 않은 섬세한 솜씨는 <사과>를 촬영하고 <시집>을 연출한 손수범 감독과의 협업에서 탄생했다.
라핀스의 외상 후 증후군의 원인이 드러나는 마지막, 슬픈 운명의 오이디푸스처럼 두 눈에 피를 흘리며 세상을 떠돌 때, 그의 카르마는 여기서 멈추는 것일까. 세상 한 가운데 서 있지만 그의 중얼거림은 우스꽝스럽고 부조리한 세상에서 아무와도 통하지 않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