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 스테이트 오브 존스
미국에서 언젠가 자체적으로 작은 나라를 꾸린 사람들이 있었다. 고등학생 때인가, 세계사 수업 시간에 들어본 말이다. 당시엔 그저 미국이 재미난 나라라는 생각을 했었는데 영화 <프리 스테이트 오브 존스>(Free State of Jones, 게리 로스 감독, 극영화/역사물, 미국, 2016년, )로 단편적인 기억을 확인했다. 불과 150년 전에 이런 나라가 있었다니.
1862년 남북 전쟁이 한창이던 무렵 남군 연합 미시시피 주 존스 카운티에서 뉴튼 나이트(매튜 멕커너히)가 징집되었다. 그는 전쟁 중에 조카를 잃고 탈영을 했는데 고향에 돌아와 보니 꼴이 말이 아니었다. 농장은 폐허로 변했고 아녀자들만 집을 지키고 있었으며 남군 보급대가 그나마 있던 재산들까지 걷어가는 판이었다. 집으로 돌아온 뉴튼은 탈영병이라는 위험한 처지에서 가족을 지키기 시작했으며, 어느 날 아들이 심한 열병에 걸리자 난감한 지경에 처한다. 징집되느라 온 마을에 의사가 사라진 것이다. 그 때 도움을 받은 이가 흑인 노예 레이첼(구구 바샤로)이었고 이로부터 뉴튼의 삶은 달라진다.
뉴튼에게 남부 연합은 조국이 아니라 수탈자였다. 돈 많은 땅주인들은 전쟁 중에도 여전히 호의호식했고 노예들의 삶은 여전히 더욱 피폐해졌으며 서민들의 고혈까지 짜내는 존재였다. 이런 나라는 나라라고 말할 수 없다. 뉴튼은 의용대를 조직해 남부 연합(정확히 말해 보급대)에 대항했고 늪지대로 도망쳐 근근이 살아가는 흑인 노예들의 도움을 받는다. 의용대 조직은 점점 커져 나중엔 남부 연합군을 위협할 정도가 되었다.
전쟁이 끝나도 상황은 그리 나아진 게 없었다. 승리한 북부 연합은 남부를 통치하게 위해 백인 지주들의 손에 다시금 힘을 넘겨주고 말았다. 도대체 무엇을 위해 의용군을 조직하고 남부 연합에 대항을 했을까? 게다가 백인들은 KKK 단까지 만들어 이제는 자유를 얻은 흑인노예들을 살육하고 있었다. 이렇게 자신을 지켜주지 못하는 나라를 조국으로 인정할 수 있을까? 뉴튼 나이트와 그를 따르는 백인, 흑인 동지들이 스스로 나라를 만들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영화에서 승리를 하던 패배를 하던, 정치적인 결정만으로 수탈당하는 서민이 차별의 벽을 허물 수 없다는 비극적인 논리를 알게 되었다. 선거참여를 통해 세상을 바꾸려는 해방 노예 모세(메허샬레하쉬바즈 엘리)는 대낮 길거리에서 처참하게 살해되고 만다. 그리고 뉴튼과 생각이 달라 곁은 떠났던 세레나(케리 로스) 역시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남편의 곁으로 돌아온다. 남편에게는 이미 새 부인 레이첼이 있었지만 살아남기 위해서는 방법이 없었다. 이 두 여인은 각각 낳은 아이들을 함께 키우면서 우정을 다져나간다. ‘프리 스테이트 오브 존스’는 글자그대로 평등이 실현된 이상적인 나라였다.
영화의 앞뒤는 뉴튼의 고손자 나이트가 결혼 유효 소송을 미시시피 법원에 내고 재판에 져 감옥에 갇히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흑인의 피가 1/8 섞여있어 백인여인과 결혼이 불가능한 미시시피 주 법을 어겼기 때문이다. 자유를 향한 인간의 위대한 정신은 그렇게 오랫동안 박해를 받았던 것이다. 여기서 존스자유국가의 원칙들을 살펴본다.
1. 누구의 가난이 다른 이의 부가 되지 못한다.
2. 누구도 다른 이에게 무엇을 위해 사는지, 무엇을 위해 죽는지 강요하지 못한다.
3. 자신이 수확하고자 땅에 심은 것은 누구도 가져가지 못한다.
4. 모든 사람은 동등하다.
뉴튼 나이트와 그의 동지들이 세운 나라 ‘존스자유국가’는 흑인인권운동가 마틴 루터 킹 목사가 남부의 악독한 백인들과 싸우기 훨씬 전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