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 왕이 된 남자
조선시대에 반정으로 쫓겨난 왕들에겐 종宗이나 조祖처럼 정식 호칭이 주어지지 않았다. 그 대신에 연산군君이나 광해군君처럼 다분히 치욕적인 호칭을 갖다 붙였는데 특히 광해군은 아버지 나라인 명明을 섬기지 않았다고 하여 괘씸죄까지 더해진 경우이다.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추창민 감독, 극영화, 한국, 2012년, 131분)에서는 광해의 숨겨진 15일을 다루고 있다. 목숨의 위협을 느낀 광해(이병헌)가 밤이면 처소를 옮기는 대신 그와 똑같이 생긴 광대 하선(이병헌)을 자기 침소에 데려다 놓았는데, 꾀를 썼던 광해는 오히려 안가에서 중독된다. 덕분에 대역인 하선이 보름동안 어쩔 수 없이 왕 노릇을 한 것이다. 이를 뒷받침하는 구절은 “숨겨야 할 일들은 기록에 남기지 말라 이르다.”(光海 100卷 8年 2月 28日)라는 기록이다. 이런 영화를 두고 흔히 사실(fact)와 허구(fiction)을 합친, 이른바 Faction이라는 장르로 분류하는데 <광해>는 99% 허구에 가깝다.
이 영화의 초점은 이야기 전개에 있지 않다. 그보다는 광해와 하선, 더 나아가 이 두 사람 사이에서 적절한 균형을 유지하는 도승지 허균(류승룡)의 인물 묘사에 있다. 광해는 전형적인 군주이다. 그는 자신을 떠받드는 사람을 하나의 부속품으로 여기고 오직 정적들과 힘을 겨루는데 정성을 쏟는다. 조선 시대의 군주는 온전한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유일한 존재였으며 나라의 모든 백성은 자유를 저당 잡힌 채 군주의 권력에 종속되어 있었다. 그런 광해가 두려움에 떨어 밤마다 자신의 처소에서 자취를 감춘 것이다. 그에 비해 하선은 비록 광해의 대역을 맡아 언제 목숨이 날아갈지 모르는 한심한 처지지만 군주의 역할에 점차 익숙해진다. 심지어 하선은 새로운 치국治國의 비전까지 제시한다. 왕족으로 태어나 권력투쟁 끝에 군주에 등극한 자와 전혀 다른 사고에서 나온 전망이었다.
전혀 새로운 임금! 백성의 고초를 바닥부터 알아주는 임금, 나라의 자존심을 세우는 임금, 그러면서도 권력엔 눈곱만큼의 미련도 없는 무욕의 임금. 만일 이런 임금이 있다면 군주의 권력을 무력화시키고 공화국을 세운 프랑스대혁명이 일어나지 않았을지 모른다. 이쯤에서 하선을 군주로 모시던 허균의 제안이 귀에 쏙 박혔다. “그렇다면 진짜로 임금이 되어보시든지!”
<광해>를 처음 대할 땐 구로자와 아키라 감독의 명작 <카게무샤1980>의 아류 정도로 간주했다. 그런데 영화를 보고난 느낌은 영 달랐다. <카게무샤>에서 자신의 진정한 모습은 보지 못한 채 누군가의 대역으로 살아가는 인간 내면의 한계를 보았다면 <광해>에선 나라의 운명을 바꾸려는 혁명적 사고를 읽어볼 수 있었다. 특히 이병헌의 연기가 좋았다. 시원한 외모와 매력적인 웃음이 전부였던 그가 이제는 진정한 배우로 거듭난 듯 보였다. 전혀 상반된 광해와 하선 사이에서 멋진 대비를 이루는 연기가 진실했다. 광해와 하선의 인물됨을 받쳐준 김인권과 심은경과 장광의 연기가 든든했고 류승룡은 역할을 절묘하게 소화해냈다. 최근에 <광해>가 700만 관객을 돌파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흥행에 성공을 했다는 뜻인데, 이를 두고 다음과 같은 생각이 떠오르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대선을 코앞에 두고 있다. <광해>를 보면서 그 누구라도 차기 대통령으로 어떤 인물이 적합한지 생각해 보았을 것이다. 어떤 후보가 광해가 아닌 하선이 되어 이 나라를 살맛나게 만들까? 물론 <광해>의 결말은 역사물로서 갖는 한계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얼마든지 하선과 같은 훌륭한 인물을 선택할 수 있다. 그게 바로 군주제 국가가 아닌 민주주의 국가의 장점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