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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아름] 이토록, 함부로 믿게 하는 존재 - 기울어진 축을 세우는 배우 전혜진

오염된 ‘약속’이 만든 한국영화의 지루한 반복


누구도 원하지 않았고 그럴 필요도 없었는데 굳어진 것들이 있다. 가령 나이에 맞게 성취해 야할 임무가 주어지는 것이 그렇고, 성별에 따라 구분되는 행동이나 태도 등이 그렇다. 엇나간다 해도 큰일 나는 것은 아니지만 으레 그렇다고 믿기에, 이것은 보편이라는 이름으로 강요되며 꽤나 굳건하게 많은 것을 옭아맨다. 한국영화에서 ‘약속’이라는 단어의 쓰임 역시 그렇다. 상대와 앞으로의 일을 정한다는 의미를 지닐 뿐인 약속이라는 단어에는 어느 순간 상하의 관계와 위계의 질서가 스며들었다. 약속이란 단어 그 어디에서도 ‘가하거나’ ‘당한다’는 강제성을 찾을 수 없지만, 누군가 ‘내가 너를 지켜주겠다’며 맺어버린 비장한 약속은 상대를 약속 ‘당하게’ 했다.

강제성이 포함됨으로써 용례(用例)를 벗어나버린 이 단어는 약속을 할 수 있는 이를 강한 자로, 약속을 당하는 이를 약한 자로 위치 지었다. 우리가 강하다고(혹은 강해야 한다고) 믿는 성인‧남성의 약속은 늘 약하다고(혹은 약해야 한다고) 믿는 어린‧여성을 향하고 있었다. ‘지켜주지 못해 미안해’라는 이 촌스럽기 그지없는 대사의 남발을 포함하여,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현재 한국영화의 문제는 바로 여기에서 비롯된다. 약속한 이들이 스스로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분투하는 동안 약속을 당한 이는 그저 기다려야 했기에, 영화 속에서 그들은 자리를 차지하지 못했다. 

그러나 여기, 이렇게 정확하게 분리된 약속의 위계 사이에서 약속을 자신의 것으로 끌어당겨 온 배우가 있다. 분명한 성격을 가진 인물이 되고, 그것으로 상대와의 갈등을 일으켜 사건을 만들고, 종국에는 극의 중심으로 파고들어 그것을 뒤흔드는 배우. 비슷한 배역을 맡았던 이들 사이에서 독보적으로 각인되었던 배우 전혜진이 그이다. 전혜진은 누구도 원하지 않았고 그럴 필요도 없었는데 굳어진 약속을 원래의 그 자리로 돌려놓거나 역으로 이용하면서 극 위에 올라선다. 그는 대부분 피 튀기는 남성들에 둘러싸여 있었음에도 한발 한발 꾹꾹 밟아가며 분명하게 걸었다. 너무도 희소한 이 자취를 살피는 것은 꽤나 신나는 일이 될 것이다.

극(Drama)의 방향을 선회시키는 인물

전혜진은 전문직을 가진 이로 자주 등장했다. 영화 <그놈 목소리>(2007)에서는 성문(聲紋) 분석가, <더 테러 라이브>(2013)에서는 테러 전담반 팀장, <불한당>(2017)에서는 경찰 요직의 팀장 등. 만약 이 역할들 자체가 그를 각인시키는 데에 기여한 것이라 말하는 이가 있다면, 이와 비슷한 역할을 맡았던 동류의 배우들 중 어떤 영화의 어떤 이름으로 활약한 이가 떠오르는지 되묻고 싶다. 전혜진은 자신이 맡았던 역할의 극중 이름을 떠올리게 할 만큼 그 역할에 강한 인상을 심어두는 배우였으며, 이는 그가 역할에 접근하는 방법을 달리함으로써 가능한 것이었다.

이 역할들을 맡으면서 전혜진은 그 직업을 점유한 성별이 가지고 있다고 여기는 특징들, 그러니까 건들거리며 걷거나 후줄근한 옷을 입고 밤낮으로 뛰어다니는 것, 혹은 짧은 머리에 욕을 입에 달고 마치 그들처럼 보이도록 하는 외적인 유사성을 깨끗이 걷어냈다. 대신 그는 그에게 주어진 역할이 가진 전문성을 최대치로 끌어올릴 수 있는 객관적인 특징들을 확보하는 것으로 자신의 역할에 대한 신뢰를 획득한다. 알맞은 단발머리에 어두운 색 계열의 타이트한 옷을 입고 등장한 그는 정확한 발음과 카랑카랑하면서도 낮은 목소리, 굳게 다문 입술이 주는 진중함과 정확한 템포에 따라 리드미컬하게 운용한 발성으로 그가 자신의 직업을 정확하게, 그것이 갖는 직분을 누구보다 명확하게 수행할 수 있는 이라는 믿음을 주었다.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내뱉는 말들은 그가 자신이 해결해야 할 상황을 모두 알고 있다는, 그렇기에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게 했다.

영화 <그놈 목소리>에서 아동 납치법의 협박전화에 그저 시키는 대로 끌려 다녔던 부모들이 냉정함을 찾고, 범인의 전화에 대응하기 시작한 것은 아들의 목소리가 녹음된 것이라는 그의 한 마디 때문이었다. 주먹구구식으로 수사하던 경찰들에게 목소리 분석으로 새로운 단서가 나올 수 있을 것이라 차분히 주장했던 성문 분석가의 주장은 형사라는 이름을 단 수많은 이들의 추적보다 큰 무게를 지니고 있었다. 그의 한 마디는 사태를 급변 시켰고, 냉정을 찾은 부모들로 하여금 범인을 당황시켰으며, 더 이상 전화가 걸려오지 못할 이유를 드러나게 했다.<그놈 목소리>에서 전혜진은 그리 자주 등장한 인물이 아니었음에도 극적 사태를 전환시켜 사건을 만들어 낸다.

 
  
▲ <더 테러 라이브>
 

<더 테러 라이브>(2013)에서의 전혜진은 완벽하게 갈등의 축으로 뛰어든다. 전혜진이 분(扮)한 테러 전담반 박정민 팀장은 윤영화(하정우)에게 “내가 장담하는데요, 윤영화씨 오늘 정시퇴근 해.” 라며 상대의 눈을 쏘아보듯 응시하며 약속을 한다. 생방송 중 자신의 옆자리에 앉아 있던 경찰청장이 사망하고, 현재 귀에는 폭탄까지 설치되어 있는 이 상대에게 던진 박 팀장의 한 마디는 전혜진이 상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자신들이 지금까지 추적해 온 전화자료를 내밀고 낮은 목소리로 설득함으로써 완성한 것이었다. 인질을 살리고 테러범까지 잡아야 한다는 박팀장, 인질을 죽여 테러범을 매장시킬 기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차대은 국장(이경영), 이 사이에서 갈등하는 윤영화까지를 포함한 세 개의 축은 어느 한 쪽으로도 쓰러지지 않은 채 팽팽히 맞선다. 자신을 못마땅해 하는 차대은 뒤로, 윤영화만 볼 수 있도록 사인을 보내는 전혜진의 행동들은 어느 새 윤영화로 하여금 스튜디오 밖의 박팀장을 끊임없이 쫓으며, 그가 보낸 문자에 기대고, 그의 지시를 기다리게 만든다.

 
  
▲ <불한당>
 

자신이 검거하려는 마약 밀수조직의 사무실에 앉아 담배를 피우며 등장하는 것으로 전혜진은 <불한당>에서의 천 팀장과 이 조직사이의 관계를 확실히 보여준다. 전혜진은 조직원들이 진을 치고 있는 그 사무실에 홀로 앉아 있으면서도, 조직원이 어떤 위협적인 말을 하거나 행동을 해도 자세 하나 흩트리지 않은 모습으로 천 팀장이 어떤 의지를 지닌 인물인지, 얼마나 강단 있는 이인지를 충분히 짐작케 한다. 게다가 이 냉철한 인물, 천팀장의 구상으로 빚어진 인물들의 관계는 천팀장을 따르거나 혹은 그를 배반하는 것으로 <불한당>이라는 영화 자체의 이야기를 쌓아갔다. 그가 이 피 튀기는 싸움에 중심에 설 수 있었던 것은 분노로 폭발한 감정을 순식간에 누를 수 있는 그 침착함을 표현하는 것으로, 인물들의 관계를 본능적으로 알아채는 그 직관을 드러내는 것으로 합당한 일이 되었다. 전혜진이 만든 이 인물들은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던 약속의 수행자를 다른 쪽으로 옮겨 놓기에 충분했다. 

장난과 슬픔을 소복이 담은 얼굴

흥미로운 것은 그가 지니고 있던 냉철함이나 단호함 등이 감정으로 옮겨갔을 때에는 그만큼이나 깊고 저돌적인 마음으로 전환된다는 점이다. 한 사람에 대한 집요함은 그가 전문직 역할을 하며 보여주었던 그것들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상상할 수 없는 온도차가 그 둘을 전혀 다른 것으로 구분하게 한다. 아마도 전혜진은 배우의 얼굴에 감추어 진 온도를 가장 잘 활용하는 배우일 것이다. 온도의 고저에 따라 표정의 경직성이 결정된다면, 낮을수록 딱딱해졌던 그의 얼굴은 앞서 말한 그 역할들에 적합할 것이고, 높을수록 풀어지는 그의 얼굴은 한 사람을 향해 돌진해가는 사랑하는 자의 그것으로 더할 나위 없다.

 
  
▲ <시인의 사랑>
 

경직되었던 그의 얼굴이 풀어졌을 때, 그의 얼굴에는 꽤나 다양한 곡선들이 볼록하게 솟아있다는 것이 드러난다. 조금은 부은 듯 휘어지는 눈꺼풀, 동글동글한 코끝과 콧방울, 봉긋해지는 광대는 딱딱했다고 생각했던 그의 얼굴에 장난기를 한 가득 심어놓는다. 조금은 뚝뚝하다고 생각했던 그의 말투가 이 곡선들을 만나는 순간 그것은 시원시원하고 짓궂은 자의 것이 된다. <시인의 사랑>(2017)에서의 전혜진은 바로 이 얼굴로 자신의 남편을 열렬히 사랑한다. 그 어떤 것도 눈치 보지 않고, 그 무엇으로도 저지할 수 없는 그의 사랑은 절대적인 것이다.

현택기 시인(양익준)은 자신의 작품을 강평하는 자리에서 그의 시가 너무나 말랑말랑하다는,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는 혹평을 듣는다. 현실의 아픔이나 슬픔을 전혀 반영하고 있지 못하다는 그의 시는 아마도 전혜진이 분(扮)한 그의 아내 강순으로 인한 결과일 것이다. 강순은 자신의 남편이 돈을 벌어오지 못해도, 시를 잘 쓰지 못해도, 게다가 아이가 갖고 싶으나 정자수가 모자란다고 해도 늘 그를 귀엽다는 눈빛으로 감싸 안는다. 이는 “난 죽어. 당신이 없으면. 이런 게 사랑이야.”라는 말로, 당신을 사랑하겠노라고 약속했던 강순이 그 약속을 지키는 법이다. 강순은 택기에게 조금은 동화같은 일상을, 그래서 괴로울 것 없는 무난한 삶을 선사한다. 
 
 
 
 
  
▲ <시인의 사랑>

전혜진은 늘 택기만을 향하는 몸짓과 눈빛으로, 그의 감정과 마음의 변화를 예민하게 알아차리며 그를 빤히 바라보는 것으로 택기를 자신의 곁에 두려는 강순의 사랑을 그려낸다. 그가 잠자리를 거부할 때에도, 자신은 아이를 갖는 것이 부담스럽다며 투정을 부릴 때에도 전혜진은 그의 몸에 더 딱 달라붙어 장난치거나, 다소곳이 옆에 앉아 그를 빤히 바라보며 그가 쉽게 강순을 놓지 못하도록 한다. 택기가 자신의 시에 결여된 그 무엇을 찾아 헤매던 중 슬픔과 궁핍함 속에 허덕이는 소년 세윤(정가람)을 만나면서 강순의 마음엔 균열이 생길지언정 그가 택기를 바라보는 시선에는 변화가 없다.

 
  
▲ <시인의 사랑>
 

택기가 세윤과 점점 가까워지고 강순 역시 이를 알아차렸음에도 택기를 자신의 곁에 두려는 강순의 마음은 오롯이 전혜진이 설득해야 할 몫이었다. 전혜진은 자신이 느끼는 모든 감정을, 하고 싶은 모든 말을 삼키지 않고 내뱉는 것으로 이를 상황을 설명하고자 한다. ‘닥치고 쭈구리고 살’라며 화를 내는 순간, 택기의 바짓가랑이를 붙잡으며 떠나지 말고 그냥 너하고 싶은대로 하고 살라며 울부짖는 순간에 생으로 드러나는 감정들은 마치 본능인 것처럼 꿈틀거린다. 자신의 감정에 대해 한 치의 거짓이나 포장도 없는 강순의 모습은 가끔은 쩌렁쩌렁 울리는, 또 가끔은 흐느끼는 전혜진의 목소리에 녹아들었다. <시인의 사랑>이 제주도를 배경으로 하면서도 그곳의 아름다움을 굳이 전시하지 않는 것처럼 강순 역시 자신의 사랑을 굳이 치장하지 않았고, 전혜진도 역시 그랬다.

홀로도 가득 찼던 공간 그 자체의 배우 

연극 <꼬리솜 이야기>에서 보았던 전혜진은 깨끗하게 머리를 뒤로 묶고 해사한 얼굴로 마금곱지 할머니를 연기했었다. 어떠한 분장도 하지 않았고, 굳이 할머니의 목소리를 흉내 내지 않았음에도 전쟁이 끝나고 30년 가까이 기지촌에서 살아온 할머니의 고통은 잔잔한 목소리에 실려 정직하게 전달되었다. 사투리에 무심한 듯 섞여 나오는 농담들, 과거를 회상하는 듯한 그 눈빛, 자분자분 발과 손을 흔들면서 천천히 이야기를 읊어나가는 전혜진의 모습은 이 독백극을 끌어나가는 배우의 존재가 얼마나 무대를 꽉 채울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전혜진에 대한 이 기억은 그의 이름이 적힌 역할에 대해서는 그 어떤 의심도 할 필요가 없다는 확신을 가져다주었다.

 
  
▲ 연극 <꼬리솜 이야기>(2015)
 

스크린에서 본 전혜진은 역시 그가 가진 모든 것으로 연기하고 있었다. 화를 내며 머리를 쓸어 올리거나 턱을 치켜들어 비아냥거리는 것, 껄껄 소리 내 웃거나 입꼬리를 한껏 올려 미소를 짓는 것 등 그의 모든 것은 그 자체로 의미를 만들어 냈다. 그리고 그렇게 자신의 이름을 스크린에 깊게 새겨 넣었다. 정확하게 자신의 의견을 전달하는 것이 너무도 적절한, 설사 그것이 욕지거리가 될지라도 어떠한 흔들림도 없이 전달할 수 있는 배우, 한편으로는 발랄함과 환희, 장난기를 모두 지닌 자유로운 감정의 배우, 물론 이 이상의 것, 그러니까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는 그 미묘한 것까지가 모두 전혜진에게 부여할 수 있는 수식일 것이다. 조금 더 자주 그의 작품들을 볼 수 있길, 그리고 그것을 적절히 표현할 많은 단어들을 찾을 수 있길 고대한다.

<더 테러 라이브>(2013)
<불한당>(2017)
<시인의 사랑>(2017)


사진출처-네이버 영화, 

글: 송아름
영화평론가. 한국 현대문학의 극(Drama)을 전공하며, 연극·영화·TV드라마에 대한 논문과 관련 글을 쓰고 있다. 

글 출처: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 르몽드 시네마 크리티크
http://www.ilemonde.com/news/articleList.html?sc_sub_section_code=S2N40&view_type=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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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자서곡숙

등록일2018-05-05

조회수5,7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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