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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숭범] 여긴 아닌, 저긴 없는 것(곳)에 도달할 수 있을까 ― <잃어버린 도시 Z>론

망명자, 이민자, 이주자,  
 
떠나온 자가 다시 떠나갈 곳을 찾는다. 만족은 지연되고 세계와의 화해는 불가능해 보인다.  ‘그/그녀’의 주변인들은 이미 죽거나 죽음에 준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그럼에도 그들의 시선은 ‘여기 너머 저기’를 향한다. 도달하고픈 목적지를 향한 ‘그/그녀’의 여정은 항상 악착같다. 그 불가해한 여정에 외적 동기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정확한 내적 동기가 있다고 보기도 어렵다. 그런 까닭에 ‘그/그녀’의 분투는 우리에게 핍진하면서도 기이하다. 그런 역설적 감정을 아직 자가 해명하지 못했는데 그들의 이야기는 끝나버린다. ‘그/그녀’는 자기 욕망으로부터 영원한 타자가 되고 우리는 충족되지 않은 결말에 거리를 둔 채 그들의 세계로부터 타자가 된다. ‘그/그녀’가 여전한 갈등 중에 퇴장(당)하는 마지막 순간은 정말이지 중요하다. 부연하면, 그때의 카메라는 떠나갈 곳을 찾는 ‘그/그녀’의 모습만 담는 게 아니다. 죽거나 죽음에 준하는 수준에 이른 주변인들, 혹은 먼저 그 자리를 떠난 이들의 부재, 그 자체를 환기시킨다. 그처럼 결이 다른 두 가지 애도에 대한 요청이 중첩될 때, 우린 평범하지 않은 ‘그/그녀’의 근미래를 각자의 상상으로 더듬게 된다. 주관화의 위험을 무릅쓰고 말하자면, 제임스 그레이 영화를 서사적으로 체험한다는 건 그런 의미일 수 있다.

제임스 그레이는 거의 매번 뉴욕의 한 시절을 다뤘다. 그러나 그는 우디 앨런이 아니어서 그곳엔 낭만어린 중산층 백인 남성의 시선이 개입할 여지가 없다. 기욤 르 블랑은 국경과 민족의 경계를 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정체성의 전환 문제, 혹은 ‘외국인’으로 통칭되는 자들의 물리적・상징적 거점을 연구한 바 있다. 그의 개념으로 제임스 그레이의 뉴욕을 말하면, 그곳은 떠나온 자(망명자), 들어온 자(이민자), 떠도는 자(이주자)들이 뒤섞이는 혼종적 공간이다. 실제로 ‘그/그녀’는 정체성을 규격화하려는 공동체(국가의 이름이든, 도시의 이름이든, 가족의 이름이든)의 체제인준 절차에 어떤 방식으로든 미끄러진다. 미국으로의 입국이 불허되는 <이민자> 속 타자인 에바(마리옹 꼬띠아르)와 마그다(엔젤라 사라피언)도 정확히 그 상황에 위치한다. 그런 종류의 타자는 블랑의 표현대로 ‘증’이 없는 사람이다. <비열한 거리>의 조슈아(팀 로스)를 두고 말하면 공동체의 내부 규율 체계 안팎에서 “존재하기를 그치는 사람”일 수 있다. 

이런 질문을 던질 수도 있다. 개인의 정체성을 단속하는 공동체의 틀에 합치되지 않는 실존을 실존이라 할 수 있을 것인가. 지금 나는 뉴욕을 누비는 ‘그/그녀’가 단지 러시아계(<비열한 거리>의 조슈아), 유태계(<이민자>의 브루노(호아킨 피닉스)와 올란도(제레미 레너), <투 러버스>의 레너드(호아킨 피닉스)), 폴란드계(<이민자>의 에바)라는 것을 상기시키려는 의도가 아니다.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이 관점을 경유해 봐도 좋겠다. ‘그/그녀’는 사회의 요구로부터 스스로 소외된 것은 물론, 그들 각자가 욕망하는 대상으로부터도 (의도와 무관하게) 멀어지는 자들이다. 심지어 그들은 ‘가족’이라는 울타리 내에서도 유독 정체성의 결함을 가진 자들이다. 마피아가 되어 가족 곁으로 돌아온 조슈아(<비열한 거리>)는 물론이고, 가족 모두가 뉴욕 경찰인 상황에서 마약 거래가 활발한 나이트클럽 매니저로 살아가는 바비(호아킨 피닉스)(<위 오운 더 나잇>)를 떠올려도 좋겠다. 

 
  
 

그 관점을 연장하면 제임스 그레이의 인물들은 더 간단하게 설명된다. ‘그/그녀’는 보통의 가족 공동체가 내부 구성원을 끌어안는 익숙한 방식, 그러니까 ‘가족’이란 단어에 내재된 정서적 구심력과 다투는 자들이다. 흥미로운 건, 영화 속에서 ‘그/그녀’의 선택이 쌓여갈수록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으로 들어가는 것도, 벗어나는 것도 위험해진다는 사실이다. <투 러버스>에서 레너드는 약혼녀와 뜻밖의 이별을 경험한 후 자살을 시도하게 된다. 그러나 결국 그는 더 끌리는 여자를 두고 다른 여자를 배우자로 받아들여야 하는 상황 앞으로 나아간다. 그는 ‘가족의 무산’에서 출발해 ‘불편한 가족의 구성’을 앞두고 고통받는 셈이다. <위 오운 더 나잇>의 조슈아는 뉴욕의 밤을 다른 방식으로 책임지는 두 주체 중 경찰 편에 설 것인지, 아니면 러시아 마피아 편에 설 것인지를 종용받는다. 경찰을 택한다는 건, 아버지와 형의 직업을 뒤따르는 의미를 가진다. 반면 러시아 마피아 쪽으로 간다는 건, 범죄에 근접한다는 의미보다도 가족(그 확장된 의미에서 ‘민족’)에 대한 전적인 부정을 의미한다. 어느 쪽을 선택하든 목숨을 걸어야 하는 건 매한가지다. 그처럼 제임스 그레이의 인물들은 가족이라는 울타리 이편에서 저기를 가리키다가 좌절하고, 저편에서 여기를 건네 보다가 절망한다. 

여기까지의 글은 언젠가 썼던 제임스 그레이 작가론의 요약 버전이다. 그러나 그때도 그러했지만, 나는 내가 만든 비평적 구조물을 빠져나가는 의미들 때문에 괴로웠다. 더 말해야 하는 것을 채 말하지 못했을 때 짊어지게 되는 미진함. 그래서 제임스 그레이의 신작 <잃어버린 도시 Z>(이하 ‘<Z>’)에 대한 이 글은 그 미진함의 부피를 줄이려는 목적에서 출발한다. 그 실마리는 <Z>의 주인공 퍼시 포셋(찰리 허냄)의 욕망, 더 정확히 말하면 그를 사로잡은 욕망의 환유적 운동에서 찾고자 한다. 그는 여긴 아닌, 저긴 없는 것(곳)에 매료됐고 그것(그곳)을 향한 세 번의 ‘떠남’을 시도한다. 미리 말하자면, 그는 불가능한 것을 향한 불가해한 도전에 아무 의심이 없다. 그 의심은 지금부터 우리의 몫이다.    

있으면 좋을 곳, 있어야 하는 곳, 없어도 있는 곳 

<Z>의 서사무대는 뉴욕이 아니다. 퍼시는 ‘영국 런던’이라는 기표가 상징하는 합리적 질서와 ‘아마존의 감춰진 도시’라는 기표가 거느리는 초합리적(‘비합리’, ‘불합리’가 아니다) 무질서 사이를 오간다. 퍼시는 기존 제임스 그레이 영화에 득실댔던 떠나온 자, 들어온 자, 떠도는 자의 이미지를 모두 갖고 있다. 영화 초반부의 그는 제국주의 시대 황금기를 구가한 영국 장교의 이미지로 등장한다. 실론 섬, 홍콩, 아일랜드 등에서 근무했던 그의 전력을 떠올리면 아마존은 또 다른 임지에 해당한다. 당시 볼리비아와 브라질이 아마존의 고무를 두고 갈등을 겪고 있었기에 영국은 그들 사이를 중재한다는 명분을 갖고 있었다. 지도 제작을 통해 그곳의 이권에 개입하려는 욕망도 숨기지 않는다. 퍼시는 그 공적 욕망을 대리 실현하는 주체로 ‘떠나온 자’의 자리로 간다.  
 
 
  
물론 ‘떠나온 자’로서 퍼시의 내면 안엔 사적 욕망이 자리한다. 제임스 그레이 영화에서 항상 반복되었으나 다소 간과되었던 논점은 그 사적 욕망의 치명성이다. 이를테면 퍼시는 가족, 혹은 가문과 혈통이 남긴 유산 때문에 그가 꿈꾸는 세계로 진입하지 못한다. 그는 현실에서 유능한 군인이었으나 출중한 자질에도 불구하고 진급 가능성이 차단된 장교였다. 그의 아버지는 매우 중대한 문제(영화 속에선 “술과 도박”이라고 언급된다)로 퍼시의 사회활동에 심대한 타격을 준다. 그 상처는 동급 장교들 중 퍼시만이 훈장을 소유하지 못했다는 표현으로 가시화된다. 명예를 좇는 퍼시에게 그것은 명백한 결핍이다. 이는 <이민자>에서 대서양을 건너 와 미국에 입성한 외국인 에바가 경험했던 최초의 결핍을 상기시킨다. 그녀 역시 스스로의 힘으론 바꿀 수 없는 혈통 문제로 자기 생을 앓기 시작한다. 

퍼시의 첫 번째 아마존 탐사는 자신의 결핍을 메우려는 퍼시의 욕망으로부터 시작된다. 왕립 지리학회가 건넨 임무는 미지의 땅으로 남아있는 아마존에 관한 지도 제작이다. 그에 대한 대가로는 무공훈장 수여와 가문의 명예 회복이 공지된다. 퍼시는 그 조건을 들고 국가의 욕망과 거래를 튼다. 그래서 퍼시의 첫 탐사는 상징계의 대타자가 남근을 가졌다고 믿으면서 남근을 향해 나아가는 운동처럼 읽힌다. 카메라는 그 운동에 올라탄 퍼시의 내면을 우회적으로 보여준다. 이를테면 아마존 밀림과 강 언저리의 풍경을 트래킹하는 카메라는 이성적인 호흡을 최대한 유지한다. 대타자의 호명에 가장 정확한 자세로 부응하려는 퍼시의 열망이 아마존을 프레이밍하는 방식을 규제하는 셈이다. 그런 까닭에 우리가 <Z>에서 최초로 맞닥뜨린 아마존은 퍼시의 ‘시선/응시’ 사이에서 재구축된 결과물로, 뜨겁다기보다는 냉정하기까지 하다. 

이때의 냉정함을 절박함이라고 말해도 틀리지 않다. 사실 아마존 강 상류를 향한 여정을 제대로 시작하기도 전에 영국 당국은 임무 중단 지시를 내린다. 심지어 퍼시는 총독 연락병으로부터 그 언질을 직접 듣는다. 그러나 그 순간 그의 사적인 결핍에서 비롯된 절박함이 공적인 명령을 밀어내 버린다. 퍼시가 영국으로의 복귀를 거부하고 인디언 가이드를 따라 아마존 강 상류로 나아가기 때문이다. 이 같은 퍼시의 행위는 여기 없는 것(훈장)의 구속력으로밖에 설명 불가능하다. 이 힘을 해명하기 위해 퍼시의 아내 니나(시에나 밀러)가 첫 탐사를 떠난 남편에게 보낸 키플링의 시를 소환하기로 한다. 「탐험가」라는 제목을 가진 이 시는 “더 가는 것은 무의미하다. 경작지의 끄트머리다./ 그들이 말했고 내가 믿으니”로 시작한다. 그러나 마지막은 “뭔가 감춰져 있다. 가서 찾아라./ 가서 경계 너머를 보라./ 경계 너머로 사라진 그 무언가를/ 그것이 그대를 기다리고 있다./ 가라!”로 종결된다. 시작부분은 공적 명령의 합리적 목소리이고, 종결부는 그의 내면 깊숙한 곳에서 잉태된 사적 명령의 비의적인 힘을 떠올리게 한다. 그렇다면 퍼시는 그 시의 문맥을 따라 여정을 이어간다고 할 수 있다.

드디어 퍼시는 ‘경계 너머’에 묻힌 세계의 초입에 도착한다. 아마존을 가로지르는 강의 수원(水原)에 이른 것이다. 거기서 노예출신 인디언은 도망쳐 버린다. 인디언이 사라진 자리엔 황금과 옥수수로 가득한 어떤 곳, 그러니까 영국보다 오래된 아마존의 문명이 존재한다는 그의 말만 남았다. 곧이어 인디언의 말이 사실일 수 있다는 증거가 발견된다. 수원에 도착한 퍼시는 극한의 굶주림을 해결해줄 멧돼지 한 마리를 사냥하려고 했을 뿐이다. 그런데 그 다음 장면에서 그는 사방에 깔린 정교한 토기들, 곧 거대한 문명의 흔적들을 목격하게 된다. 공포와 긴장, 전율과 충격의 그 순간을 은유하는 건 갑자기 나타난 검은색 재규어 한 마리다. 낮은 목소리로 으르렁거리는 그 재규어를 퍼시 내면에 새롭게 움튼 욕망의 현현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새롭게 움튼 욕망’에 대해선 부연설명이 필요하다. 이때부터 지도 제작에 대한 퍼시의 열망은 더 중요한 관심사로 옮겨가게 된다. 미지의 문명에 대한 감당할 수 없는 호기심이 그를 지배하기 시작한 것이다. 복기해 보면, 인디언이 그 문명의 존재를 최초 언급했을 때, 퍼시는 귀담아 듣지 않았다. 미지의 도시도 단지 ‘있으면 좋을 곳’에 불과했다. 그러나 재규어와 맞선 이후 그곳 어딘가에 잠들어 있을 (것으로 믿어지기 시작한) 그 도시는 ‘있어야 하는 곳’으로 전환된다. 그때까지 퍼시는 문명의 중심(영국)을 ‘떠나온 자’였을 뿐이다. 그러나 이제 아마존은 더 이상 야만적인 주변이 아니다. 비로소 그는 푸른 사막이 오랜 시간 감춰온 땅에 ‘들어온 자’가 된다.  

 
  
 

이제 퍼시의 두 번째 아마존 탐사를 이야기하기로 한다. 첫 번째 탐사는 여러 가지 사정상 재규어를 만난 그 자리에서 접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아마존에서 가져온 문명의 흔적들은 퍼시를 영국 왕립 지리학회 내 우상으로 만들어준다. 그는 학회 공식 연설 자리에서 인류 역사의 마지막 퍼즐을 풀어줄 문명도시를 발견했다고 선언한다. 그리곤 그 도시를 ‘Z’라 가칭한다. 우리는 아직 ‘Z’가 푸른 사막 속 오아시스인지, 아니면 신기루에 불과한지 확신할 수 없다. 그러나 그는 예견된 운명이었다는 듯이 ‘Z’에 대한 자기 확신에 점차 포로가 된다. 영국엔 단지 몸이 머물 뿐, 영혼은 욕망의 소실점 끝에 자리한 ‘Z’를 배회하게 된 것이다. 기욤 르 블랑은 ‘들어온 자’, 곧 이민자에 대해 “자신의 중심에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주체, 다시 말해 예전의 자기로 돌아갈 수 없는 부재로 짜인 주체”라고 말한다. ‘Z’를 향한 삶을 시작한 퍼시의 상징적 위치는 정확히 그 부근 어딘가다.  

두 번째 탐사가 시작된 1912년 즈음엔, 당대 국제 정세의 변화를 암시하듯, 아마존 탐사의 주도권도 영국에서 미국으로 넘어가기 시작한다. 그래서 퍼시가 이끄는 영국 탐사대는 국가적 자존심을 고려한 왕립 지리학회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게 된다. 재차 말하면, 이제 그의 열정은 지도 제작과 같은 단순 임무를 초과하여 흐른다. 퍼시가 꿈꾸는 ‘새로운 고고학적 발견’은 그 자신에게서 인류사적 사건이 될 것으로 숭앙된다. 눈여겨 볼 대상은, 퍼시의 탐사대에 합류한 한 낯선 인물이다. 제국주의 시대 영광스러운 영국을 상징하는 인물, 그의 이름은 제임스 머레이(앵거스 맥페이든)다. 전설처럼 전해지는 그의 남극탐험 이야기는 앞선 시대 영국이 품었던 야망을 적확하게 환기시킨다. 그 때문에 그와 퍼시의 면면을 대차대조해 보는 작업은, 두 번째 탐사의 내밀한 의미를 읽는데 매우 중요하다. 

두 사람의 ‘차이’를 파악하기 위한 목적이라면, 결코 놓쳐선 안 되는 씬이 있다. 첫 번째 탐사처럼 아마존의 강을 거슬러 올라가던 퍼시 일행은 빗발치는 원주민들의 화살에 목숨을 잃을 뻔한다. 배를 버리고 모두가 강물에 뛰어드는 상황에서 가장 먼저 강물 너머 저편으로 도망친 사람은 제임스다. 그에게 아마존의 모든 풍경은 ‘야만적’이었고 거기서 만난 모든 사람은 ‘야만인’이었다. 여기(영국) 아닌 저기(아마존)에서 그는 처음부터 부적응자였고, 탐사대의 가장 큰 짐이 된다. 그런데 퍼시는 살기어린 눈빛으로 활을 들고 서 있는 원주민들 쪽, 그러니까 제임스의 정반대편으로 나아간다. 원주민들은 자기가 쏜 화살에 구멍난 탐험일지를 든 퍼시를 숲속으로 데리고 사라진다. 

그들의 ‘사라짐’은 우리에게 자연 그대로의 아마존을 ‘출현’시킨다. 퍼시 일행 중 한 명의 시점 쇼트로 추정되는 프레임 안엔 아마존의 나무들과 강가 모래의 이미지, 그리고 숲속 짐승들과 강물이 흐르는 소리만 있을 뿐이다. 얼마 후, 추장 일행과 퍼시가 사라졌던 숲속 그늘 쪽에서 나타난다. 퍼시는 지금 원주민들 속에 섞여 강물 이편의 탐사대(그들은 퍼시 쪽으로 총을 겨누고 있다)를 향해 평화롭게 나아온다. 이 장면이 중요한 까닭은, 스스로 ‘들어온 자’가 된 퍼시를 아마존이 승인했다는 해석을 낳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퍼시의 시선으로 바라 본 아마존엔 이전 같은 긴장이 사라진다. 퍼시 내면의 냉정함과 절박함을 짐작케 하던 카메라도 그 즈음에서 안색을 바꾼다. 무공훈장이나 가문의 명예를 회복하려는 퍼시의 열망도 이제 “깃털처럼 가벼워진”(이 표현은 <위 오운 더 나잇>의 결정적 순간에 등장한다)다. 제임스에겐 절대적인 ‘영국/아마존’, ‘문명/야만’, ‘합리/비합리’ 사이의 가로막대는 퍼시에게서 그렇게 휘발된다. 

 
  
 

그런데 탐사대를 위험에 빠뜨려온 제임스의 결정적 훼방 때문에 퍼시는 ‘Z’의 또 다른 초입에서 귀환을 결정하게 된다. 암석 틈 사이로 난 길에서 그가 본 문명의 흔적은 첫 번째 탐사에서 본 토기 조각보다 좀 더 구체적이고 완전했다. 그곳에서 그는 재규어를 맞닥뜨리는 대신 물벼락을 맞고 온몸이 젖는다. 이 씬을 두고 영민한 관객이라면, 아마존에 의해 남은 일생이 젖게 될 퍼시를 예감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처럼 ‘Z’는 퍼시의 입장을 또 다시 불허했지만, 오히려 퍼시는 더욱 확연하게 ‘Z’의 포로가 된다. 이제 ‘Z’는 퍼시에게서 ‘있어야 하는 곳’을 넘어 종교적 신앙의 대상이 된다. 그 날부터 그에게 ‘Z’는 ‘없어도 있는 곳’이다. 
 그러한 전환의 증거는 도처에서 발견된다. 재차 영국으로 돌아와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게 된 퍼시는 생사가 갈리는 전장에서도 ‘Z’를 생각한다. 물론 그는 프랑스 송 강 전투에서 용맹한 군인으로서의 자질을 빈틈없이 보여준다. 그는 전투의 위험한 고비를 지날 때에도 부하들 뒤로 숨지 않는다. 적의 치명적인 가스 공격 앞에서도 후퇴하지 않는다. 그가 진짜 두려워하는 것은 다른 데서 밝혀진다. 전투 중 눈부상을 입은 그는 병원 침대 맡에서 의사의 단호한 통보를 듣게 된다. 더 이상 아마존 탐사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 말은 ‘있어도 없는 곳’이 된 ‘Z’를 영원한 신기루로 만들어버린다. 그때서야 비로소 붕대에 감춰진 퍼시의 눈에서 고통과 두려움의 눈물이 터진다.   

전투에서 그가 보인 용맹함 덕분에 그는 중령으로 진급하는 데 성공한다. 아마존으로의 여정을 추동했던 최초의 결핍이 드디어 해소되는 순간이다. 그러나 카메라는 기쁨을 잃어버린 그를 보여준다. 그의 욕망이 재배열한 소실점 끝, 그러니까 맹목화 된 목적지엔 오로지 ‘Z’만 있기 때문이다. 전장 지하 벙커에서 러시아 점쟁이가 그의 미래를 예견하며 건넸던 말이 있다. 

 “그 환영을 외면하지 마세요. 당신이 찾으려는 것은 아주 위대한 곳이요. (중략) 그곳을 찾기 전까지 영혼의 안식을 찾지 못해요. 그게 당신의 운명이에요. 그 운명으로 세상을 밝히게 될 거예요.” 

사실 이 말이 등장하는 씬은 매우 기이하다. 전투가 벌어지는 최전선에 의뭉스러운 표정의 여자 점쟁이가 등장한다는 것 자체가 현실감을 소거하지 않는가. 그 씬이 퍼시의 실체험이라는 전제를 하더라도, 그녀가 뱉은 진술의 진짜 주인은 퍼시의 무의식일지도 모른다. 러시아 점쟁이의 말은 ‘Z’와 퍼시 사이를 오가는 주술적 언어의 신비한 현장음인 셈이다. 

결국 ‘Z’를 향한 세 번째 탐사 가능성을 단념한 퍼시에게 새로운 가능성이 예상치 않은 방향에서 열린다. 아마존을 떠도느라 가족을 제대로 돌보지 않는 퍼시를 원망해온 첫째 아들 잭(톰 홀랜드)이 애써 억누른 퍼시의 ‘Z’에 대한 열망을 폭발시킨 것이다. 소년에서 청년으로 성장한 잭은 그만의 육성으로 러시아 점쟁이의 언어를 번역한다. “아버지와 함께 가길 원하는 것뿐이에요.” 그간 남편의 ‘Z’를 향한 열정을 마지못해 허락했던 아내 니나도 잭의 결심을 그녀만의 언어로 지원한다. “하지만 두려움이 미래를 결정하게 내버려둘 순 없지. 다녀오렴.” 

그런데 제임스 그레이 영화를 꾸준히 봐온 관객이라면 이들 장면에서 서사적 긴장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의 인물들은 결정적인 선택의 순간에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으로 들어가는 것도, 벗어나는 것도 위험해지는 경험을 하게 되지 않던가. 그렇다. 이제 퍼시는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으로 들어가 구성원 모두의 동의를 얻었다. 이는 제임스 그레이 영화에서 좀처럼 볼 수 없었던 장면이다. 주인공이 가족 구성원 모두와 화해하며 정신적・정서적 평화를 얻은 셈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제 그는 이편(영국)에 아내와 둘째 아들, 셋째 딸을 남겨둔 채, 첫째 아들만을 데리고 저편(아마존)으로 건너가려 한다. 물리적으론 가족과의 위험한 결별을 준비하는 셈이다. 그렇게 보면, 이 장면들엔 가족 울타리 안팎으로 멀어지는 두 개의 힘이 공존한다고 말할 수 있다. 퍼시가 지금부터 더 크고 결정적인 위험 앞에 서지 않을까 하는 기시감은 그렇게 주어진다. 

 
  
 

다시 정리하면, 세 번째 탐사는 퍼시와 연관된 그 누구도 반대하지 않는 첫 번째 탐사이기도 하다. 가장 믿을 만한 탐사대원으로 전장까지 함께 누볐던 코스틴(로버트 패틴슨)이 가정을 꾸리게 되면서 마지막 탐사를 포기한다는 점은 아쉽다. 그럼에도 퍼시가 모험을 감행하는 데엔 아무런 장애가 없다. 위험천만한 푸른 사막에서 아들을 책임져야 한다는 부담, 탐사대원이 아들 하나뿐이라는 불안, 육체적 노쇠화에 대한 우려가 퍼시의 표정에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역시 종국에 가서는 ‘Z’에 대한 더 강력한 의지로 비약할 뿐이다. 그때 왕립 지리학회는 퍼시에게 가졌던 사소한 오해를 풀고 학회 최고의 영예인 창립 황금 메달, 곧 훈장을 선사한다. 이 장면에 이르러 그의 첫 탐사를 추동했던 내적 동기는 모두 사라진다. 진급과 훈장, 가문의 명예 회복이라는 최초의 결핍이 적확한 결과물로 모두 메워지지 않았는가.

그 때문에 이번 탐사는 그에게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여정이다. 이제 ‘Z’는 더 이상 의미로 구성되는 세계가 아니다. 그 자체로 주체를 성립시키는 초월적 질서와 다르지 않다. 그렇다면 ‘Z’를 향한 또 한 번의 반복은 상징계의 본질적 성격을 가시화하는 신비가 아닐 수 없다. 상징계의 구조 내엔 훈장 등으로는 도무지 메울 수 없는 결핍이 존재하는 바, 반복은 그 결핍을 채우고자 존재가 벌이는 불가피한 운동이다. 이제 그는 영원히 ‘떠도는 자’, 곧 이주자가 된다. 그의 안식처는 영국에도 아마존에도 없다. 안식을 갈구하는 여정이 이곳저곳에서 지속될 뿐이다. 기욤 르 블랑의 표현대로라면, 그는 고국(영국)과 도착한 나라(아마존)의 합법적인 삶의 형식들을 자의적으로 변경(해야)하는 자이기도 하다. 망명자(떠나온 자)와 이민자(들어온 자) 사이의 미묘한 차이, 혹은 해석 가능한 이중의 텍스트를 불일치하게 만드는 쪽으로 그렇게 그는 설명 불가능한 이주자가 된다. 제임스 그레이의 영화를 과거에 한 편이라도 보았다면, 우린 이 같은 퍼시의 집착이 만족의 계속적인 지연으로 이어질 것임을 예감할 수 있다. 지금 퍼시는 영원히 잃어버린 대상에 대한 욕망 덩어리, 혹은 그에 점착된 죽음충동, 그 자체다.  

상상계보다 우월한 상징계의 질서를 대면하고도 그것을 넘어서려는 자는 현실논리에서 파생된 긴장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가령 첫 오프닝씬에 등장한 이상한 아마존 부족의 제의를 담은 쇼트는, 세 번째 탐사지에서 퍼시에게 들이닥친 난경으로 확인된다. 그러나 이때 퍼시의 표정은 차라리 평온하다. 아마존 부족의 제물이 되어 머나먼 밀림에서 사라질 운명에 처했음에도 그의 표정은 정확히 이중적이다. 지금 그를 빨아들이는 것은 해명할 수 없는 구심력을 가진 ‘Z’의 신비한 빈 구멍이다. 우린 그 상황에서 여기(영국)의 법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저기(아마존)의 초월적 힘에 그가 오래 전에 귀의했음을 알아차리게 된다. 벌써 긴 시간, 퍼시는 환각적 형태로 상징계에 침투한 실재, 균열이 없는 충만이 머무는 곳 ‘Z’를 살았던 것이다. 에로스와 타나토스가 함께 뒤섞인 불가능한 그곳, 그러니까 상징계의 이면을 배회하는 죽음 충동의 힘은 이제 퍼시를 데려가려 한다. 우린 이미 알고 있다. 그 힘에 포로가 된 안티고네도 크레온을 등 뒤에 두고 오빠의 시신을 짊어진 채 현실의 강력한 회유를 거부했다. 코카서스 산의 프로메테우스도 제우스의 목소리에 귀 닫은 채 절대적 숭고의 길을 택했다. 

아마존 부족에 둘러싸인 채 의식을 잃어가던 퍼시는 유서를 읽는 아내의 목소리를 소환해낸다. 그 목소리는 아마존으로 떠난 남편 때문에 홀로 둘째를 출산할 때 니나가 써둔 내용을 담아낸다. 

 
  
 

“꿈을 잃지 말고 미지를 탐험하고 미를 추구하는 보람을 아는 아이로 키워줘. 잊기 쉬운 말이지만 이 말은 기억해줘. 인간이 지각하는 범위는 이해의 범위를 넘어야 한다. 천국은 왜 있겠는가?”
 
‘없어도 있는 곳’을 향하던 퍼시의 도착적 신념은 거기에서 영원히 잠든다. 퍼시는 욕망의 자유를 찾아 진격했고 희열과 죽음이 착종된 주이상스로 나아갔다. 같은 시기, 탐사작업에 대규모 군대와 비행기까지 동원하기 시작한 미국인들도 퍼시의 ‘Z’엔 도착할 수 없다. ‘Z’는 오로지 퍼시만의 믿음 체계로 들어갈 수 있는 불가능한 관문이기 때문이다. 

유령들의 신비한 회합

여기(영국)의 관점에서 퍼시의 탐사는 실패했다. 그러나 우리는 퍼시가 사라진 자리를 음미하면서 우리 자신을 보게 된다. 대타자의 욕망에 예속되어 살아가는 우리지만, 자각할 수 없는 어떤 순간에 여기와 저기, 대상과 주체의 구분이 사라지는 신비한 관문을 두드리게 되지 않던가. 이에 동의한다면, 우리가 함께 음미해야 할 씬이 하나 있다. <Z>의 마지막 여운을 완성하는 이 기이한 씬을, 나는 유령들이 회합하는 순간으로 기억하고자 한다. 그 씬에서 원래 가족이었던 그들은 여기(영국)와 거긴(아마존) 사이 어딘가를 떠도는 유령이 된다. 질적으로 전혀 다른 가족을 이루게 된다.

이와 유사한 성격의 장면은 제임스 그레이 영화 말미에 거의 항상 도착했다. 나는 이들 장면이야 말로 할리우드의 외곽에서 자기만의 서사 세계를 개척해 온 제임스 그레이의 날인이라고 믿는다. 예컨대 그에게 ‘천재’라는 수식어를 붙여준 첫 번째 영화 <비열한 거리>(베니스 영화제 은사자상을 거머쥔 이 영화를 만들 때 그는 불과 20대 중반이었다.)의 종결부도 예외가 아니다. 청부 살인을 하며 떠돌던 마피아 행동대원 조슈아에게도 일찍이 가족이 있었다. 물론 조슈아와 아버지는 서로가 죽기를 바랐다. 아버지는 오랜만에 집에 돌아온 조슈아에게 “오직 바라는 건 루벤(조슈아의 동생) 곁을 떠나달라는 거다”라고 말한다. 반면 조슈아에게 마지막 남은 희망처럼 존재하던 어머니와 루벤은 조슈아 곁에서 죽음의 순간에 이른다. 두 사람 중 시한부 인생을 살던 어머니가 “동생을 보살핀다고 약속해다오”라고 말한 이후 먼저 죽는다. 뒤이어 형의 주변에 도사리던 범죄의 그물에 걸려 루벤이 죽는다. 그간 어떤 감정도 드러내지 않던 조슈아는 동생의 죽음에 이르러 내면의 통증을 숨기지 못한다. 결국 그는 아버지, 어머니의 상반되는 부탁과 동생의 자신을 향한 애정을 모두 위반하게 되지 않았는가.  

<비열한 거리> 마지막 시퀀스에서 카메라는 루벤의 시신을 불태우는 조슈아의 모습을 비춘다. 그러다가 난데없이 ‘유령들이 회합하는 순간’이라고 말한 특유의 쇼트가 출현한다. 이미 죽은 엄마가 무표정한 얼굴로 침대에 앉아있다. “엄마, 형이 왔어요”라는 외화면의 목소리는 루벤의 것이다. 그리고는 곧바로 죽은 루벤이 살아 돌아와 엄마 왼편에 앉는다. 이 프레임에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자는 조슈아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평소와 같은 얼굴로 그는 엄마의 오른편에 앉는다. 이 쇼트는 조슈아가 미처 다 끝내지 못한 애도작업이 지난한 국면에 봉착해 있음을 상상하게 한다. 그런 식으로, 목숨은 붙었으나 현실을 초탈한 조슈아 곁에 두 가지 죽음, 두 명의 유령이 합석한다. 이후 <비열한 거리>는 단 하나의 쇼트로 종결된다. 그 마지막 쇼트는 자신의 차 운전석에서 미동도 않고 저기 어딘가를 응시하는 조슈의 얼굴을 확대한다.  이때 이 글의 제목이 된 질문이 이미 도착했었다. 그가 여긴 아닌, 저긴 없는 것(곳)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인가.

이젠 <Z>의 마지막 씬으로 돌아가야 할 차례다. 퍼시와 잭이 세 번째 탐사 중 실종된 지 오랜 시간이 흘렀다. 그런데 니나는 그들의 죽음을 믿지 않는다. 그녀는 왕립 지리학회 수장의 방에서 남편과 잭이 죽지 않았다고, 꼭 찾아주셔야 한다고 강변한다. 그리고는 아마존에서 브라질인이 발견했다는 퍼시의 시계를 건넨다. 그것은 그녀의 애도작업을 불가능하게 하는 유령으로부터 온 편지다. 할 말을 마친 니나는 이제 그 방을 빠져나와 고풍스러운 영국식 저택을 연상시키는 왕립 지리학회 건물 내부 계단을 내려온다. 그녀가 1층 거실에 발을 내딛을 무렵, 바로 그 ‘유령들이 회합하는 순간’이 등장한다. 계단을 다 내려온 니나의 뒷모습이 거실 벽난로 위 거울에 비치는가 싶더니 그녀가 지금 아마존 밀림으로 들어가고 있다는 사실이 공지된다. 니나는 살아있으되, 그렇게 죽은 남편과 아들 곁을 헤매는 삶에 갇힌 것이다. 그 때문에 이 장면엔 여긴 아닌, 저긴 없는 곳으로 간 두 명의 유령이 있고, 그들의 뒷모습을 신기루 삼아 자기만의 여정을 떠나는 유령 같은 여자가 있다. 영국풍 저택과 신비한 아마존이 평화롭게 공존하는 그 풍경에 대해선 이렇게 첨언할 수도 있겠다. 쇼트 내 피사체들의 불균질한 언어성이 변증법적으로 통합되는 진경이라고. 개인적으론, 이 언캐니한 진경을 품은 채 제임스 그레이의 다음 영화를 기다리게 될 것 같다.

니나가 아마존의 빈 구멍으로 사라진 이후, 우리의 눈과 귀를 간질이는 것은 자연 그대로의 아마존이다. 나뭇잎들 사이로 쏟아지는 햇살과 풀벌레 소리가 거기 있다. 조금 전, 그녀는 왕립 지리학회 수장에게 ‘Z’에 대해, 혹은 ‘Z’를 품고 죽은 퍼시에 대해 “이제 와서 의심할 순 없어요”, “제게도 일생의 업이 된 걸요”라고 말한 바 있다. 그쯤 되면 우리도 자막(“니나는 1954년에 죽을 때까지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의 여운과 무관하게 ‘Z’의 매력, 혹은 마력을 수긍하면서 그곳으로 사라진 이들의 열망을 추념하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각자의 ‘Z’ 앞에서 다른 얼굴의 퍼시로 살아온 우리 자신을 애도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 글은 제임스 그레이의 영화에 관한 기존의 비평작업이 어딘가 미진했다는 진단에서 출발했다. 그가 만든 어떤 이미지와 사건들은 ‘가족’, ‘가문’, ‘혈통’, ‘국가’와 같은 키워드로 짠 촘촘한 그물망을 유유히 빠져나가곤 했었다. 그래서 이 글이 택한 전략은 공적인 요구 바깥으로 나아가는 ‘그/그녀’의 신비한 욕망, 그 불가능한 궤적을 읽어보는 것이었다. 그 목표에 견주어 보건대, 또 한 번의 실패를 인정해야 할 것 같다. 이 글 역시 어떤 신기루를 좇다가 더 멀어지는 진실 앞에 서는 과정만 전시했을 것이다. 

아주 사적인 생각을 첨언하면, 미국영화를 통해 동시대성을 성찰할 때 나는 폴 토마스 앤더슨과 대런 아로노프스키, 그리고 제임스 그레이 세대라는 생각을 하곤 했다. 그 마음으로 <Z>를 평한다면, 제임스 그레이에 대한 기대에 값했다는 표현은 차마 하지 못하겠다. 다만 전작들과는 다른 ‘기이한 무난함’을 지녔다는 것, 그리고 이 ‘기이한 무난함’도 또 하나의 창조적 진화라는 것을 설득하고 싶을 뿐이다. 

사진 출처: 네이버-영화-비열한 거리, 투 러버스, 이민자, 잃어버린 도시 Z
 
 
글: 안숭범
영화평론가. 한신대학교 인문콘텐츠학부 교수, 시인. EBS <시네마천국>을 진행했으며, 문화콘텐츠 기획 및 인문학적 비평에 매진하고 있다.

글 출처: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 르몽드 시네마 크리티크
http://www.ilemonde.com/news/articleList.html?sc_sub_section_code=S2N40&view_type=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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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자서곡숙

등록일2018-05-05

조회수6,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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