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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아름] 소년의 미소와 처절한 몸짓의 대위법-불가해한 공존이 가능한 배우 故 장진영

그가 마련해두려던 자리의 흔적들 

언제까지 이 비슷비슷한 영화들을 보아야 하는지 지독히도 피로해질 때 즈음 ‘신데렐라’라는 그 촌스럽고 껄끄러운 레테르로 불리던 배우의 얼굴이 문득 떠올랐다. 미스코리아 출신에 CF 모델로 먼저 얼굴을 알린 배우를 높여준답시고 붙여놓았던 별칭을 모든 이들을 멍한 눈으로 바라보던 부스스한 머리의 501호 여자, 입술이 터진 채로 담배를 입에 물던 <소름> 속 선영을 연기해 냄으로써 그저 스쳐지나가는 것쯤으로 만들어버렸던 장진영. 그의 얼굴이 떠오른 것은 그가 만들어 놓았던 궤적이라면, 그가 변주시켰던 인물들이라면 아마도 지금쯤 여배우들을 위해 늘 마련되어 있는 자리가 한 켠에 놓여있지는 않았을까 라는 막연한 기대감 때문이었다. 오소소하게 쌓인 그에 대한 그리움을 잠시 접어둔다면 찬란한 응전의 흔적들이 겹쳐진 그의 행보는 뚜렷한 빛을 발한다.  

그를 떠올린 것은 어렵지 않았지만, 그것을 설명해야겠다고 결심한 후 너무도 많은 시간을 보냈다는 점을 먼저 고백해야겠다. ‘장진영식’ 연기를 구축하기에 그에게 주어진 시간은 너무 짧았고, 그렇기에 관객들이 볼 수 있는 그의 영화가 많은 편은 아니었다. 꼭 그가 아니어도 될, 그러니까 자신 스스로도 얼떨떨해 원하는 인물을 표현할 수 없었다고 말하던 초기 몇몇 작품에 큰 비중을 두지 않는다면 더욱 그렇다. 그럼에도 ‘장진영의 영화’에 대해, 그리고 그가 구축했던 ‘배우 장진영 스타일’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라 믿게 된 것은 역시 <소름>의 선영 때문이었다. 이 피폐한 여인의 고통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영화를 자신의 첫 주연작으로 선택한 배우. 일종의 선언 같은 이 결심은 이후 분명하게 이어진 장진영식 스타일을 논할만한 경향으로 만들기에 충분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그의 이름이 배우가 아닌 아픈 이의 그것으로 남겨진 것에 대한 불안함 역시 이 글의 시작에 함께 했다. 장진영이 떠난 후 많은 이들은 그의 마지막을 <국화꽃 향기>의 희재와 동일시하려 했다. 위암으로 떠난, 그리고 그를 극진히 간호하는 인하(박해일)의 모습은 마치 장진영의 삶을 그러내는 것처럼 여겨졌다. 그러나 아픈 희재로의 수렴은 배우로서의 선언도, 어마어마한 제작비를 들인 영화의 원톱 여주인공이었던 기록도, 상대역과 드잡이하며 땅을 뒹굴고 싸우던 그 저돌적인 몸짓까지도 모두 지워버린다. 공포스러울 정도로 두려운 일이었다.
 
  
▲ <소름>(2001)
 
그래서 장진영에 대해 다시 이야기하려고 한다. 장진영은 그 큰 눈으로 놀람과 당혹스러움을 가장 잘 표현하는 배우였고, 시원시원한 웃음소리와 욕설을 함께 뱉어내는 배우였다. 말랐지만 큰 키의 이 배우는 애매모호하지만 누구나 구분할 수 있다고 믿는 남성성이나 여성성의 무엇으로 설명할 수 없는 그 중간쯤에 있었다. 쉽게 강한 여성이라는 의미모를 표현을 사용하는 것도, 그렇다고 남자같다는 우스운 표현을 사용하는 것도 장진영에게는 어울리지 않았다. 장진영은 나락까지 떨어지는 처절함을 몸에 새기면서도 소년같은 풋풋함을 함께 만들어나갔다. 장진영은 배우라는 직업으로 조형해 낼 또 하나의 몸 속에 공존하기 힘든 이 두 가지를 오롯이 새겨 두었다. 조금만 더 시간이 있었더라면 확고하게 장진영의 장르가 구축될 터였다. 물론 지금으로도 충분하다. 

그 흔한 장식들이 지워낸 순간들 

장진영이 영화를 시작했던 1999년, 그리고 가장 활발하게 활동했던 2000년대 중반으로 잠시 돌아가 보자. 1990년대의 기획영화가 하나의 경향으로 나타났다 사라져가던 때, 여배우들은 1990년대의 최진실로 대변되는 젊고 똑 부러지는 아내이거나 심혜진으로 대표되는 커리어우먼이나 도회적인 여성으로 자주 등장했다. 여기에 사랑하는 이의 주변을 맴돌거나 떠나보내며 눈물 흘리는 역할들이 추가되는 정도였기에, 이 시기 여배우가 고를 수 있는 역할은 정해져 있었고 그나마도 많은 수는 아니었다. 이후 한국적 블록버스터로 명명되었던 영화들의 성공은 더더욱 여성인물들의 자리를 좁혀 놓았다. 강한 남성들의 육체가 극장을 지배하면서 비슷한 종류의 영화들을 낳았고, 한국영화의 스크린은 한 쪽으로 기울어 갔다.  

이 사이에서 돌출적으로 등장한 <엽기적인 그녀>(2001)와 <조폭마누라>(2001)가 색다른 여성 인물들을 보여주었지만, 어딘가 억지스러웠다. 실연의 아픔을 감추기 위해 과장된 발랄함을 앞세운 주인공은 장편영화라기보다 콩트의 비현실적인 묘사를 모아놓은 쇼에 더 가 닿은 듯 보였고, 과격한 남성의 외피를 두른 여성을 등장시킨 영화는 여성이 모두가 기대하는 여성성을 요구당할 때의 당혹감을 희화화하는 것으로 스크린을 채웠다. 이 영화들의 역발상은 오히려 성차(性差)가 뚜렷하다는 것을 더욱 강조할 뿐이었고, 이 영화들과 비슷비슷한 영화들이 흥행에 실패하자 한국영화는 다시금 남성들의 육체에 몰입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당시 한국영화는 ‘배우’를 정확히 둘로 나누어, 한쪽은 등장만으로 무게를 지니는 것처럼, 그리고 한쪽은 그 무게에 얹혀 영화의 수혜를 누리는 것처럼 그렇게 배치되었다. 당연히 미비한 쪽은 홀로 영화를 떠받들 수 없는 것처럼 간주되었기에 축의 주변부를 맴돌기만 할 뿐 뚜렷한 제 색깔을 찾을 수 없었다. 장진영이 영화에 얼굴을 보이기 시작했던 그즈음의 인상이 흐릿한 것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다. 장진영은 영화의 주변을 맴돌고 있었다. 아니, 한쪽을 돋보이게 해야만 하는 역할들이 장진영 앞에 주어졌다. 이는 영화에 등장하는 분량이나 주연이나 조연이라는 경계모를 이름 때문이 아니다. 자신의 연인을 죽게 만들었다는 죄책감으로 사라져버린 영은(<자귀모>(1999))은 영화 전체의 흐름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다질 수 없었고, 레슬링 코치로 이미지 변신을 시도했던 민영(<반칙왕>(2000))은 대호가 레슬링에 심취해가면서 더 이상 자신을 발전시켜 나갈 수 없었다. 게다가 두 남자의 긴장 속에서 마치 식물처럼 서 있던 예린(<싸이렌>(2000))에게는 어떠한 선택도 요구되지 않았다. 배우가 영화 속 인물이 되기 위해 필요한 성격은 장진영에게 주어지지 않았고, 그의 몸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 <싸이렌>(2000)
 
지금 우리가 떠올릴 수 있는 장진영의 모습과 다르게 장진영은 이 영화들에서 모두 긴 생머리를 늘어뜨리고 나왔었다. 상처를 가진 채 그저 자신을 숨겨야 하고, 혹은 늘 죽음을 향해 뛰어드는 이에게 무조건적인 사랑을 보내야하며, 겉으로는 강한 척 하지만 슬쩍 상대의 아픔을 이해하고 품어줘야 하는 이 인물들에게 필요한 것은 상대에게 위안을 줄 수 있는 예의 그 고정된 이미지의 긴 생머리 여성이었는지 모른다. <싸이렌>에서 준우(신현준)와 현(정준호)의 강한 몸싸움 바로 다음 컷에 처음 등장하는 예린은, BGM <Fly me to the moon>으로 둘러싸인 채 장을 보고 음식을 한다. 예린의 등장과 함께 시작된 BGM의 가사도 그렇지만, 남성들의 긴장 직후에 배치된 이 상반된 분위기의 장면이 예린에게 원하는 바는 명확하다. 예린이 해야 할 것은 이 영화에서 자신을 밀어내는 준우를 끝까지 믿어주고, 결국 그의 친구와 관련된 사고로 시력을 잃지만 어떠한 원망도 절규도 없이 눈물 흘리는 것일 뿐이다.
 
  
▲ <반칙왕>(2000)
 
물론 같은 해 개봉한 <반칙왕>에서 장진영 어떤 변화를 시도하고자 했었다. <반칙왕>에서의 민영은 트레이닝복을 입은 채 머리를 질끈 올려 묶으며 등장했고, 몇 번의 트레이닝 장면에서는 능수능란한 기술을 가진, 관장까지도 무서워하는 여자 코치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는 대호(송강호)와의 관계로 넘어가면 더 이상 유효하지 않았다. 대호가 백드롭을 받아달라며 찾아왔을 때 민영은 링 위에서 대호에게 호통을 치며 그를 다그치지만, 연습 후 대호와 산책할 때에는 스웨터에 롱치마를 걸친 채 그가 불쑥 건네는 들꽃을 보며 수줍어하는 이로 갑작스레 바뀌어 버린다. 영화의 말미, 병상에 누운 대호에게 줄 음식을 쟁반에 받쳐 들고 들어왔을 때 역시 장진영은 결코 자유로운 움직임을 허락하지 않는 롱치마가 만들어놓은 그 이미지에 완전히 갇혀 있었고, 자리를 비운 대호를 다소곳이 기다리며 그렇게 묻혀버렸다. 

이 영화들에서 장진영이 그의 얼굴을 각인 시킬 방법은 거의 없어 보였다. 그가 내뱉는 대사는 터져 나오면서도 저음의 울리는 듯한 그의 목소리와도 어울리지 않았고, 그나마 그의 입을 거쳐 나온 말들은 영화의 진행에 어떠한 힘도 보탤 수 없었다. 영화의 전반부에 괄괄함을 배치하는 척하다, 영화의 후반부 조신함을 강요하며 그의 힘을 누르려던 영화들의 반복되는 내러티브에서 그는 얼굴을 감춘 채 웅크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듬해 그는 짧게 자른 머리로 스크린에 나타났고, 이후 어떠한 영화들에서도 간신히 묶이는 길이 이상으로 머리를 기르지 않았다. 그러니까 그는 자신의 얼굴을 가리던 모든 것들을 잘라내며 스크린과 마주했다. 

끔찍이 각인된 고통을 말하는 몸  

배우에게 변화는 큰 결심이지만 의외로 쉽게 이루어지는 것이기도 하다. 배우가 그저 스크린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관객들은 의미를 만드는 것에 익숙하기에, 외형적인 변화를 시도하는 것은 곧 관객들이 만들어갈 의미를 변화시킬 수 있다. 장진영은 머리를 잘랐다. 이후 <자귀모>나 <반칙왕>, <사이렌>에서의 갈 곳 잃은 역할들은 더 이상 장진영의 것이 아니었다. 장진영은 머리를 짧게 잘랐을 뿐 아니라 아예 생기조차 모조리 쳐낸 것처럼 부스스한 머리와 창백한 얼굴로 돌아왔다. 손 담배를 끼운 채 <소름>(2001) 속 선영이 되어 나타났다. 그제야 그의 얼굴에 큰 눈과 부드럽지만은 않은 턱선, 입술을 지그시 누를 때 드러나는 고집스러움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이, 공허함과 절망을 펼쳐낼 수 있는 곳이라는 것이 드러났다. 
 
  
▲ <소름>(2001)

선영이 긴 회색 점퍼에 자신의 몸을 둘둘 감았을 때나 남편에게 손찌검 당하며 악다구니를 질러댈 때, 예뻐야 한다거나 사랑받고 싶다는 느낌 따위를 완전히 삭제해 버릴 수 있는 것도 그라는 사실이 발견되었다. 그가 <소름> 전 해왔던 역할들은 선영에게 단 한 점도 묻어있지 않았다. 당시 갓 서른이 되었을 장진영은 허름하다 못해 으스스한 아파트로, 아이 엄마로, 그것도 죽은 아이를 묻고 남편까지도 죽이는 처참한 여성으로 돌아왔던 것이다. <소름>을 통해 장진영은 드디어 자신의 이름을 알리고 그의 영화 생의 첫 상으로 여우주연상을 받지만, 그에게 이보다 중요한 것은 앞으로도 이어나갈 명확한 자신의 색깔을 발견했다는 것이었을 테다. 이는 선영이 보여주었던 참혹함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더 이상 그에게 다른 이를 위한 긴 머리가 요구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의미했다.

남의 눈을 전혀 의식하지 않은 듯 부스스한 모습으로 편의점에서 깨져버린 주스를 멍하니 바라보던 선영의 첫 등장은 이전 작품들에서 보여줬던 모습을 완전히 소거하겠다는 어떤 의지처럼 보였다. 도무지 생기있는 사람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소름> 속 인물들 중에서도 선영은 가장 멍한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어두컴컴한 복도에서 그가 담배에 불을 붙일 때, “아쭈, 머리봐라 머리. 예술이다. 아, 고거.”라는 비아냥거림이 따라붙을 정도로 선영은 제멋대로인 모습이었다. <소름> 전까지 얼굴에 피멍이 들고 머리를 쥐어뜯기면서도 살겠다고 악다구니를 쓰는, 누구를 이용하던 끝까지 살아남겠다고 발버둥치는 여자 캐릭터는 없었다. 단 한 번 등장하는 섹스신 조차 창백하고 뻣뻣했던 이 영화에서 장진영은 자신이 아니면 대체할 이를 찾을 수 없는 역할을 연기해냈다. 
 
  
▲ <소름>(2002)

머리가 가벼워진 만큼이나 그는 자유로워졌다. <소름>에서의 선영은 전과는 다르게 다양하지만 피폐하기만한 공간들을 넘나들었고, 그곳이 어디든 자신의 모습을 신경 쓰지 않는 것이 어색하지 않았다. 용현(김명민)이 왜 자신에게 다가오는지, 주변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에 대해서도 그는 눈을 돌리지 않은 채 고집스럽게 살아남으려는 집념으로 그의 몸을 삶을 위한 응전의 터전으로 전환시켰다. 선영이 용현에게 죽임을 당하는 장면. 5분 24초에 달하는 롱테이크 안에서 벌어지는 선영과 용현의 몸싸움은 고통과 공포라는 것조차 없을 것 같은 건조함 속에서 이루어진다. 서로 상처주기 위한 말이 가득 차 있는 소리들은 이를 악물고 늘어놓아 무겁게 가라앉고, 그들의 몸짓은 불안 그 자체에 놓인다. 용현 아래에 깔려 말려 올라간 치마 밑으로 적나라하게 드러나 버린 하반신이 발버둥 칠 때, 용현이 목을 조를수록 비명이 높아질 때, 장진영은 곧 선영의 고통을 고스란히 받아내고 있었다. 장진영은 <소름>으로 배우로서의 전환점을 맞았고 이후 이와는 조금은 다른 감정들을 슬그머니 내밀었다. 

부풀어 오른 생기를 머금은 웃음들

<소름>의 선영은 종종 큰 소리로 웃었다. 물론 이때의 웃음은 정말 즐거워서라기보다는 실소를 과장한 소리일 뿐이었다. 그러나 선영을 보낸 후 장진영은 정말 웃음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생기를 되찾은 장진영의 얼굴은 발랄함과 환희, 장난기를 모두 포함시키며 탱탱하게 부풀어 오른 배우의 그것으로 변해 있었다. 짧은 머리는 큰 눈망울이 담고 있던 신선함과 터지듯 시원했던 웃음, 턱을 끌어당기며 깊게 새기던 장난스러운 미소, 시원한 목선, 그 덕에 훌쩍 커버린 것 같은 그의 몸을 부각시켰고, 그 홀로도 충분할 것이라는 점을 기대하게 했다. 장진영은 정체모를 환상을 부추기는 이미지에서 벗어나 자신의 현실을 표현할 수 있는 발랄함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이러한 장진영의 모습은 툭툭 내뱉는 말투가, 혹은 누군가를 그러쥐고 흔들어댈 수 있을 만큼의 그악스러움이 어색하게 보이지 않게 했다. 
 
  
▲ <오버 더 레인보우>(2002)

<소름> 이후 <오버 더 레인보우>(2002)의 연희로 분한 장진영은 대학을 졸업한 후 오랜만에 만난 진수(이정재) 앞에서 어색하게 웃었다. 기억을 잃어버린 진수가 자신의 첫사랑을 찾는다며 도움을 청했을 때 연희는 조심스럽게 받아들였다. 물론, 연희의 이 차분한 모습들은 과거의 대학생활과 교차되면서 세월이 만든 변화일 뿐이었다. 대학시절 사진부였던 연희는 진수와 단 둘이 동아리방에 남았을 때에도 먼저 툭하니 말을 거는 동기였고, 장난스레 웃고 떠들 수 있는 친구 중 하나였다. 진수는 연희의 말에 기대어 그리고 연희는 일반적인 첫사랑의 이미지에 기대어 진수의 첫사랑을 찾아주고자 했지만, 정작 진수가 찾고 있던 것은 연희의 밝고 장난스러운 그 모습이었다. 그렇게 장진영은 새로운 첫사랑이 되었다. 아련하고 연약해서 지켜주고 싶은 첫사랑의 이미지가 아닌 자신을 웃게 해 준 활기가 좋아서 다시 찾고 싶은 내 친구 같은 첫사랑. 바로 거기에 장진영이 있었다. 사실 <국화꽃향기>(2003)의 희재 역시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 <국화꽃향기>(2003)

인하(박해일)는 처음 희재를 보았을 때의 당당함을 기억한다. 크게 말하고 웃던 그 모습은 늘 희재와 함께 다니던 조신한 정란(송선미)과 비교되면서 훨씬 도드라지기도 했다. 인하는 한 아이와의 약속 때문에 그렇게 무서워하던 바다로 천천히 걸어 들어가던 희재를 보면서 조금은 무모하지만 결코 자신을 꺾지 않는 고집을, 또 한편으로는 어린 아이의 치기를 이해할 수 있는 순수함을 사랑했을 것이다. 그래서 인하는 위암을 앓던 희재의 곁을 지킨다. 인하는 자신이 없으면 안 될 것 같은 여인을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병을 알았음에도 뱃속의 아이를 지키려던 희재의 강인함과 그가 자신에게 남겼던 그 고집스러움을 최대한 지연시켜주기 위해 노력했던 것이다. 전체적으로 눈물이 가득 찬 영화이긴 하지만 너무도 씩씩했고 이를 악물었던 이가 스러져가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이 연민을 앞섰다. 

이러한 변화 사이에서 그의 발성이 더욱 명확하고 발랄해진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장진영의 목소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여배우들의 목소리 톤보다 낮았고, 여기에 그의 정제되지 않은 몸짓이 더해지는 순간 장난스러운 느낌을 발산해 냈다. 이것이 가장 단적으로 드러나는 영화가 바로 <싱글즈>(2003)이다. 앞서 이야기했던 영화들이 과거를 통해 장진영의 현재를 드러내는 방식이었다면, 절대 그가 아니라면 상상할 수도 없는 <싱글즈>의 나난으로 그의 현재가 스크린에 그려졌다. 나난은 어디서도 소곤대는 것을 배워본 적 없는 사람처럼 담을 넘는 목소리로 웃고 떠들며, 또 운다. 큰 눈을 굴리며 크게 크게 입을 벌려 자신의 감정을 말하는 나난은 마치 어린 아이가 투정을 부리는 것 같은 모습이다. 행동과 표정이 너무도 솔직하게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고 있지만, 정작 자신은 이 사실을 모르는 어린 소년처럼 귀여웠고, 그만큼 나난의 얼굴에는 생기가 돌았다.
 
  
▲ <싱글즈>(2003)

그의 영화 중 관객들이 가장 많이 찾았던 <싱글즈>로 장진영은 30대로 넘어가는 여성의 불안함과 발랄함을 보여주었고, 사회에서 차마 자신의 성격을 다 까발릴 수는 없지만 결국에는 소심한 복수를 해내고야 마는 모습으로 공감을 샀다. 극장에서 조차 자신이 놀랐다는 것을 감추지 못하고, “준이랑 잤어?”라고 외쳐버리는 그 솔직함에서, 결국엔 자신을 성추행했던 직장 상사의 머리채를 쥐고 흔들고야 마는 그 성격에서 사람들은 장진영의 얼굴을 다시 찾았다. 귀 옆으로 뻗친 짧은 단발머리는 장진영이 만든 나난만의 것이었고, 헐렁한 트레이닝복을 입고 침대 위를 구르거나, 깔끔하게 차려입은 검은 정장바지 밖으로 삐져나온 흰 셔츠와 같은 그의 소소한 실수들은 마치 나난의 명랑함을 그가 그대로 입은 듯했다. 나난은 장진영이 자신만의 소년같은 이미지를 완성해 스크린에 편안하게 안착했다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주었다. 생기 넘치던 첫사랑과 맞닿는 소년으로의 이행, <싱글즈>의 나난은 아니 장진영은 제 옷을 입은 듯 행복해 보였고 이것이 <청연>으로 이어질 수 있는 힘이었다.
 
  
▲ <청연>(2005)

<청연>에서의 장진영은 그 모습부터 소년의 그것처럼 보인다. 소리를 내지르며 남자들 틈에서 훈련받는 모습, 눈 쌓인 도로를 자전거를 타고 지나며 거세게 숨을 몰아쉬던 경쾌함 등은 비행사가 되기 위해 자동차 정비를 하고, 택시운전을 하는 경원의 모습에 너무도 쉽게 녹아 내렸다. 경원은 치혁(김주혁)과의 관계에서도 늘 당당했고, 두 사람은 사랑보다 우정을 나누는 친구처럼 보였다. 장진영이 그려낸 박경원은 영화 밖에서 받아들여지지 못했지만, 영화 안에서는 충분히 관객들을 설득하면서 그가 잘 할 수 있는 역할이 무엇이었는지를 다시 한 번 확인시켜주었다. <청연>은 처음 시도되는 항공 촬영영화, 해외로의 로케이션과 특수촬영 영화의 무게를 여배우에게 모두 맡긴 한 유일한 작품이었다. 장진영은 그것을 감당할 수 있을 배우가 되어 있었고, 홀로 남았을 때에야 두려움을 고백할 수 있었던 경원은 장진영을 통해 가장 적절하게 새겨져 기억에 남았다.

처절함으로 토해냈던 그악스러움

생각해 보면 장진영은 영화 속에서 늘 이성과 함께 했지만 절절하게 사랑을 주고받는 역할을 하지 못했다. <국화꽃향기>에서 인하에게 받았던 사랑을 제외한다면 그에게 사랑은 없(어야 하)는 것이거나 찾아야 내야하는 것이었고, 조금은 코믹한 것이기도 했으며, 우정처럼 머무르는 것이기도 했다. <소름> 이후 장진영은 장진영 스타일의 사랑을 넓은 스펙트럼으로 그러냈지만, 조금도 로맨틱하다고는 볼 수 없었다. 그리고 장진영은 <연애, 그 참을 수 없는 가벼움>(2006)을 통해 다시 한 번 그 범주를 조금 넓혀 놓았다. 연아와 영훈의 완전한 순애보라고도 할 수 있는 이 영화가 두 사람의 사랑을 그리는 방식은 너무도 찌질하고, 바닥까지 떨어져 내린 진창 같았다. 영훈에게 결혼상대가 있다는 것이 영화의 초반에 알려진 이상, 두 사람이 떨어지지 못하는 이유는 장진영이 설득해야 하는 몫이었다.
 
  
▲ <연애, 그 참을 수 없는 가벼움>(2006)

맑은 눈망울을 굴리며 짧은 머리의 발랄함이 주는 이미지로 역할들을 설득했던 장진영은 <연애, 그 참을 수 없는 가벼움>에서 <소름>에 가까운 어떤 피폐함을 온몸으로 설득해야 했다. 물론 <소름>에서는 무조건적으로 생에 대해 갈망하는 누군가였다면, 이 영화에선 사랑을 위해 달려드는 억척스러움은 필수였다. 그런데 이러한 연아의 모습은 그리 낯설지 않다. 무모하게 온몸을 사랑에 던지는, 우악스럽기까지 한 연아는 장진영이 구축해두었던 <소름>의 선영과 소년의 모습들이 만난다면 충분할 것이었다. 장진영은 연아를 통해 그들의 사랑을 설득해냈고, 그에게 조금만 더 시간이 주어졌다면 사랑의 새로운 경향을 완성시킬 수 있을 터였다.

<연애, 그 참을 수 없는 가벼움>에서의 연아는 가장 찌질하고 바닥까지 떨어진 사랑을 붙잡고자 분투하고 악을 쓴다. <연애, 그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을 영훈(김승우)에 대한 연아의 사랑이라고 쉽게 정리할지도 모르지만, 사실 가장 정확한 표현은 씨발년과 씨발놈의 연애이다. 연아에게 선물을 받으러 나가면서도 왜 전화를 했느냐며 연아를 씨발년이라 칭하는 영훈과, 자신의 선물을 받고 트집 잡는 그에게 씨발놈이라 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 연아는 그렇게 사랑한다. 이 영화에서 영훈은 늘 연아를 떼어놓으려 하고 연아는 영훈에게 끝까지 들러붙는 것처럼 보이지만, 연아는 비련의 여주인공이 되어 버림받거나 영훈의 사랑을 축복하며 그의 곁에서 사라지는 일 따위는 하지 않는다. 연아는 영훈에게 끝까지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필요하다면 따귀를 치며, 그의 아내에게 전화해 영훈과의 섹스이야기를 한다. 서로를 칭하는 이 별스러운 호칭들은 서로가 밀어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붙잡고 싶은 질척임을 가장 직설적으로 보여주는 언어인 것이다. 
 
  
▲ <연애, 그 참을 수 없는 가벼움>(2006)

당연히 이 영화에서 장진영은 입에 욕을 달고 살았다. 영훈의 한 마디에 연아는 열 마디 욕으로 답할 수 있는 이였다. “나 아저씨 꼬시러 왔어.”라고 영훈에게 솔직하게 다가간 연아는 이미 영훈에게 약혼녀가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뛰어든다. 영훈에게 술집에서 일하는 연아는 잠시 스쳐가는 인연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오히려 영훈이 안식을 찾는 것은 연아이다. 늘 자신의 곁을 맴돌면서도 영훈이 자신의 기분을 상하게 할 때는 그만큼 되받아 치고, 몸싸움도 가리지 않는 연아지만, 영훈에게 일이 생겼을 때 맨발로 뛰어들어 식칼을 들고 덤비면서 영훈을 지켜내는 것 또한 연아였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고래 고래 소리를 지르고, 상대가 누구건 영훈을 위해선 거리낌 없었던 연아를 통해 보호받는 것은 오히려 영훈이었다. 그렇기에 그렇게 밀어내려 노력했으면서도 자신을 떠난 연아를 결국 찾아가는 것도 결국 영훈이었다.

또 하나의 장진영식 사랑은 어떤 대가도 필요 없으니 그저 너의 사랑만 달라는 처절함 속에 적절히 녹아들었다. 그것을 표현하는 것은 그의 온몸이었다. 영훈과 있을 때 행복해 하던 그 표정, 맘에 들지 않을 때는 팔짱을 끼고 노려보던 눈빛과 어두컴컴한 방에서 홀로 술잔을 기울이던 뒷모습, 영훈에게 맞으면서도 피하지 않고 달려들던 객기어린 몸과 꽉 다문 입술은 상처받은 자의 것이면서도 사랑하는 자의 것이었다. 장진영은 왜 저렇게까지 해야 하는 지에 대한 의문이 필요 없을 만큼 연아의 사랑을 이해시켰고, 가장 찌질하고도 강렬했던 사랑의 모습을 완성해 냈다.    

기대하고 싶은, 그가 마련하려던 스크린

장진영의 영화들을 보면서, 그리고 그의 영화에 대해 고민하면서 더욱 확고해진 것은 ‘여배우’라는 레테르의 무용성에 대한 것이었다. ‘여배우’라는 용어 자체가 함의하고 있는 것, 혹은 그것에 포함되거나 포함되지 않는 배우로서의 역할이 너무도 많기에 배우와 여배우를 구분하여 서술하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이 글에서도 여배우라는 단어를 최대한 사용하지 않고자 했지만, 한국영화 안에 서 있던 장진영의 위치를 고를 때, 이 배우의 어떤 인상을 말하기 위해 비교항을 설정할 때, 또 한국영화의 어떤 경향들을 말할 때 이를 대체할 수 있는 적절한 용어를 고르기가 힘들었다. 장진영이 선택한 영화들, 그리고 그 안에서 펼쳐진 장진영의 연기를 보면서 그에게 배우가 아닌 다른 무엇을 덧붙일 이유는 없어 보였다.

물론 배우 장진영을 다시금 떠올려야 하는 것은 소년 같은 매력을 가졌다거나 억척스러운 모습, 그러니까 여성적인 무엇과 거리를 두고 있었기 때문은 아니다. 장진영은 그저 배우로서 변화를 꿈꿨고, 그의 앞에 놓인 익숙한 것들과 빠르게 거리를 두며 자신만의 방식을 쌓아갔다. 인터뷰에서 파하하 웃던 그의 웃음이, 놀란 듯한 눈망울이 영화에서 그대로 드러나기도 했으니, 아마도 이러한 변화들은 그 스스로를 보여주기 위한 노력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영화로서는 유작인 <연애, 그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을 보면서, 과거를 가정하는 것은 너무도 무의미한 일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잠시 그가 연기할 수 있었을 역할들을 떠올려 손에 꼽아보고 나서야, 그에게 어울리는 역할이 고를 수 없을 만큼 많다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그의 부재는 갑작스레 다가왔다.   

스크린의 안과 밖, 즉 표정, 말투, 옷차림과 같은 선택의 문제에서 결코 바꿀 수 없는 출신, 체형, 목소리 등에 까지 알리바이가 필요한 배우의 삶 속에서 장진영은 다른 무엇도 아닌 ‘배우 장진영’으로 자리했다. 장진영이 투병을 시작하면서 다른 무엇보다 먼저 떠올렸던 것은 <국화꽃향기>에서의 자신의 연기가 어딘가 잘못되었다는 점이었다. 지금처럼 좀 더 알았었다면 더 좋은 연기를 할 수 있을 것이라며 아쉬워했다는 회고는 그가 가장 원했던 것은, 그의 노력이 보여줬던 만큼이나 당연하게 배우라는 직업인으로서의 인정이라는 것이 명확해 진다. 장진영이 궁금하다면 그가 잠시간 디뎠던 고통의 순간이 아닌, 그가 만들었던 그 세계에 빠져보길 간절히 권한다.


장진영이 등장했던 모든 영화들

사진출처: 네이버 영화, 영화 내 이미지

글: 송아름
영화평론가. 한국 현대문학의 극(Drama)을 전공하며, 연극·영화·TV드라마에 대한 논문과 관련 글을 쓰고 있다.

글 출처: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 르몽드 시네마 크리티크

http://www.ilemonde.com/news/articleList.html?sc_sub_section_code=S2N40&view_type=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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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자서곡숙

등록일2018-05-05

조회수5,8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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