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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숭범] 어제와 내일 사이에서 무엇인가 일어나고 있다 - <패터슨>론

1. 유랑자여, 시를 향해 걸으라

짐 자무시를 어디에서부터 말해야 할까. 관습처럼 ‘미국 인디영화의 아이콘’이라고 말하는 건 너무 식상하다. 그러한 언명은 짐 자무시의 특수한 개성을 단순하게 환원하는(어쩌면 그가 영화감독으로서 그 스스로에게 기대하는 것에서 가장 먼) 표현이다. 당신과 생각이 다를 수 있지만, 짐 자무시는 항상 인디영화라는 범주 안에서도 매우 첨예한 칼끝이었다. 

미리 고백컨대 지금부터 쓰려는 글은 <패터슨>론을 초과한다. 그러나 자무시에 관한 작가론에는 못 미친다. 이것은 비평작업 대상의 범주 혹은 규모 문제를 말하는 게 아니다. 아직 그의 영화작업을 관통하는 글을 쓰기엔 그의 영화들 안으로 흐르는 다종다기한 맥락을 통합체적으로 설명할 단서가 내게 부족하다는 고백이다. 게다가 개별 영화들이 그 시대 미국, 당시의 자무시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에 대한 반영론적 통찰도 충분히 궁구해내지 못했다. 

개인적으로 비평 원고를 쓰는 중, 작가의 인터뷰를 뒤적여 본 적이 거의 없다. 사실상 시집이 출간되거나 음반이 출시되면, 혹은 전시회가 시작되거나 영화가 개봉되고 나면, 해당 작품은 공공재가 된다. 작가가 자기 작품을 세상에 공표한다는 건, 그 순간부터 비평의 주도권을 수용자에게 이양한다는 선언과 같은 것이다. 영화도 예외는 아니어서, 정식적인 개봉절차를 거친 작품에 대한 해석과 감상의 지분은 이제 관객의 몫이라 할 수 있다. 공공재로서 영화는 자신에게 접근하는 모두의 시선에 비배재성(non-excludability)의 원칙을 지켜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글을 쓰기 전, 자무시가 자신을, 그리고 자기가 만든 영화 속 이미지들을 어떻게 설명했는지 궁금해졌다. 우리는 안다. 산업적으로 철저하게 기획된 블록버스터 영화의 경우 시놉시스 단계에서부터 그 시대 대중들과 대화하며 만들어진다는 사실 말이다. 좀 더 솔직하게 말하면, 대다수의 상업영화들은 제작 주체의 대중들에 대한 계산된 말 걸기, 전략적인 보여주기의 결과물이다. 그와 굳이 대조한다면, 짐 자무시의 영화는 가장 우선적으로 그 자신과의 대화를 통해 만들어지고 있다. 벌써 40년 가까이! 이 말에 동의한다면, 당신도 이 질문을 경유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자무시는 자신의 무엇과 대화해 왔는가. 나의 궁금증은 거기에서 출발한다. 
 
“저는 중국 황제에 대한 영화보다 자신의 개를 산책시키는 한 사내에 대한 영화를 만들고 싶어하죠”(뤽 산테와의 1989년 인터뷰 중)

“미국에서 가장 지나치게 과다한 소득을 올리는 직업 가운데 하나가 바로 연예계에요. 아카데미 시상식이라...... 왜 버스운전사 시상식이나 가장 빨리 음식을 만들어내는 주방장 시상식 같은 건 없는지 모르겠어요”(스콧 맥콜리와의 1996년 인터뷰 중)

위의 인용문들은 자무시의 20-30년 전 인터뷰 내용이다. 나는 오래 고민하고 말한 것 같지 않은, 이 자연스러운 문장들에서 <패터슨>이 오래 전부터 ‘만들어져 왔던’ 작품임을 느꼈다. <패터슨>은 결국 ‘개를 산책시키는 한 사내’, 직업적으로는 ‘버스운전사’의 일상에 천착한 영화이지 않는가. 우리가 알거니와, 무심하게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마주하게 되는 소소한 기쁨과 자잘한 곤경들. 희망으로 미화시키거나 정돈된 언어로 윤색시키기 전의 우리네 삶은 거의 모든 순간 그것이 전부다. 그렇다면 <패터슨>은 자무시가 오래 구상한 삶, 그 자체의 호흡을 담은 영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가 밝힌 직접적인 연출 배경은, 패터슨시 출신 시인인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의 시에 이끌려 20여년 전, 패터슨 시를 직접 방문한 경험과 관련된다. 이는 <패터슨>에 대한 영화적 아이디어가 그 낯선 여행을 통해 정리되었다는 설명일 것이다. 여기서 ‘정리’라는 표현은 내가 붙인 것이다. 앞의 인터뷰에서 보듯이 그는 더 오래 전부터 <패터슨>의 내용을 이루는 영화적 영감들과 교유하며 살아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글은 국내 번역된 그의 인터뷰집( 『짐 자무시』, 마음산책, 2013)과 국내 저널에 실린 인터뷰, 영문 인터뷰들 속에 체현된 그의 자의식을 탐색할 것이다. 그리고 그만의 생각과 영감이 영화들 안에 흘러든 흔적을 매만지고자 한다. 하나의 가설을 세우자면, <패터슨>은 자무시가 지향하는 영화 세계의 일면을 다른 경로로 재확인시키는 낯익은, 한편으론 새로운 이정표일 것이다. 당신이 자무시에 관심이 있었다면, 그가 내뱉은 말과 그의 영화가 항상 보조를 같이 했다는 것, 그가 특별하게 강조한 생각이 곧 그가 만든 영화들의 마지막 표정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젠체하는 말투가 없는 그의 인터뷰와 그의 직선적이고 군더더기없는 영화의 뉘앙스는 매우 닮아있다.

재차 말하면, <패터슨> 역시 ‘짐 자무시다움’을 상상하게 하는 영화다. 두 가지 의미에서 이 진술은 타당하다. 첫째, 기존 그의 영화가 내보인 주요한 특질이 <패터슨>에서도 어렵지 않게 발견된다. 일상적 소재의 낯선 활용, 극적 구성을 거부하는 미니 플롯, 발생한 사건에 대해 수동적이고 거의 항상 무표정한 캐릭터, 사소한 세계의 디테일에 집착하는 시선, 합목적적 세계로부터 점점 멀어지는 주인공의 동선, 유랑의 과정 중 예기치 않게 틈입하는 아이러니한 위트까지. 초창기 장편들의 파격은 없을지라도, 감출 수 없는 자유로운 힙스터의 자의식이 <패터슨>에서도 감지된다. 자무시는 그렇게 또 한 편의 ‘시적 축약’이라고 불릴 만한 담백한 시공간을 창조해냈다. 

둘째, <패터슨>은 기존 영화들로부터 유의미한 ‘차이’를 만들면서 자무쉬다움을 증언하고 있다. 자무시는 현실에 틈입한 비현실적 공간을 유랑하는 인물들을 묘사해 왔다. ‘상상적인 것’이 벗겨진 뉴욕과 클리블랜드, 플로리다에서 엇갈리는 에디, 윌리, 에바(<천국보다 낯선),  인디언의 안내를 받아 생전 처음 와본 숲속을 헤매던 윌리엄 블레이크(<데드맨>), 자신의 아들을 낳은 20여년 전 옛 애인이 누구인지를 찾기 위해 그들의 거처를 수소문하고 다니던 돈 존스턴(<브로큰 플라워>), 인간 곁에서 그들의 역사와 예술에 관여해 온 ‘인간보다 인간적인’ 뱀파이어들(<오직 사랑하는 이들만이 살아남는다>)을 떠올려도 좋겠다. 그들은 영화가 진행될 수록 안전한 일상 밖으로 더 멀리 떠밀린다. 

그에 비하면 <패터슨>은 정확히 반대다. <패터슨>에는 어제와 다르지 않은 현실적인 동선에 머무는 패터슨(아담 드라이버 분)이 등장한다. 그런데 그는 평범한 생활의 여정에서 특별한 영감을 찾는 습관에 충일한 인물이다. 어디서나 잠재태로 존재하는 ‘시적 영감’을 수소문하며 살아가는 자가 바로 패터슨이다. 물론 이러한 차이는 다시 자무시다움의 한 지점으로 귀속되어 간다. 자무시의 필모그래피를 연대기적으로 훑어보면, <브로큰 플라워>부터 유랑을 시작했던 지점으로 돌아와 여정을 끝마치는 인물들이 나온다. 다시 떠나야 할 가능성이 내포된 ‘돌아옴’. 예컨대 <오직 사랑하는 이들만이 살아남는다>의 주인공인 뱀파이어들의 생애 안에는 긴 세월동안 지속돼온 ‘반복’의 사생활이 피보다 선연하다. 그들의 ‘돌아옴’은 곧 어떤 반복을 의미하는 것이다. <패터슨>에 관한 해석도 그 관점을 견지할 때 훨씬 자연스러워질 수 있다. 

지금부터 자무시를 투명하게 들여다보기 위한 현재적 관문으로 <패터슨>을 놓고, 영화 밖에서 그가 내뱉은 말과 <패터슨>의 장면들을 공명시켜 보도록 하겠다. 이 실험의 프로세스는 네 가지 질문에 대한 실마리를 포착하는 방식으로 진행될 것이다. 가장 초석적인 질문은 결국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그의 영화가 의도하는 긴장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이 질문은 짐 자무시가 일궈 온 영화미학의 일단을 드러낼 것이다. 그 이후 견뎌내고픈 두 가지 의문은 다음과 같다. 반복 속에 미끄러지는 사람, 사물, 사연들이 주는 생동감을 어떻게 해명할 것인가. 그의 영화가 시(예술적 영감)와 관계되는 방식의 비밀은 무엇인가. 그리고 마지막 질문은 자무시 영화미학을 해명하기 위해 필요한 다른 초석적인 논의로 우리를 되돌릴 것이다. 자무시가 만든 공리없는 세계를 우리는 어떻게 마주해야 하는가. 이는 그의 작가적 날인에 대한 다른 각도의 탐색이다. 그렇게 이 글의 흐름은 최근 자무시 영화의 인물들처럼 처음 출발했던 지점으로의 회귀, 곧 재귀적 운동으로 나아갈 것이다. 
 
  
 
0.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음’의 혁명

“존재에 대해서 묻지도 않고 자신을 둘러싼 세상의 모습에 대해서도 묻지 않아요. 그 대신에 그들은 그것을 받아들이는 편이죠. 되는대로, 별다른 목표없이 영화 속 세상을 이리저리 옮겨다녀요. (중략) 전체적인 영화의 포인트가 관객들이 영화를 보며 기대할 만한 것들을 제공하지 말자는 거였죠. 내러티브의 형식 자체가 스스로 그런 식으로 작동해요.” (피터 벨시토와의 1985년 인터뷰 중)

어떤 저항이나 선동의 제스처도 없지만, <패터슨>은 『현대세계의 일상성』 속 앙리 르페브르의 명제를 다시 꺼내놓는다. “일상이 작품이 되게 하라”는 것. 이는 복잡하게 얽힌 현대사회 속 사람과 사물, 상품들과의 관계 안에서 생활의 조건들을 재점검하라는 메시지와 다르지 않다. 반복되는 일상, 그 안에서 주어지는 권태로운 피로에 압착당하지 말라는 독려이기도 하다. 일찍이 르페브르는 ‘작품’이란 단어가 더 이상 예술적 결과물만을 가리키는 것으로 규정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는 현대사회에서는 “자신을 알고, 자신을 이해하고, 자기 자신의 조건들을 재생산하고, 자신의 자연과 조건들- 육체・욕망・시간・공간을 전유하고, 스스로 자신의 작품이 되는 그러한 행위”가 중요하다고 보았다. 그렇다면 <패터슨>의 패터슨은 르페브르의 정언에 산책으로 답장을 쓰고, 시로 주석을 다는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사실상 패터슨이 보낸 영화 속 일주일은 드라마투르기의 관점에서 어떤 극적 사건도 만들어내지 못한다. 이러한 내러티브는 자무시의 영화에서 자주 반복되던 것이다. 좀 더 소상히 부연하면, 자무시는 영화 속 사건들을 인과적으로 줄 세운 후, 감정을 점증시키는 데 골몰하는 방법을 택하지 않는다. 더 중요한 건, 자무시가 의도한 거의 모든 사건들에 주인공이 능동적 주체로 참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수동성’에 관해선 이후 더 논의하겠지만, 기억할 것은, 주인공들이 외부에서 주어진 불편한 상황에 끌려 다니며 유랑자가 된다는 점이다.

다시 <패터슨>으로 되돌아와 그 내막을 들여다보기로 한다. 뉴저지 작은 소도시(패터슨시)의 버스운전사로 살아가는 패터슨은 아침 6시가 지나면 알람 없이도 눈을 뜬다. 반복되는 일상에 생체의 리듬마저 정향된 삶을 살아온 것이다. 잠을 깬 그는 침대 맡에서 아내 로라(골쉬프테 파라하니 분)의 꿈 이야기를 듣고 잠시 대화를 나눈다. 그리고는 혼자 시리얼을 챙겨 먹고는 걸어서 회사로 출근한다. 자신이 책임지는 23번 버스에 올라타 잠시 시를 쓴 후, 익숙한 노선을 따라 승객들을 실어 나른다. 그 과정에서 버스 안 승객들의 자잘한 대화에 귀를 기울이며 시가 될 만한 영감을 줍는다. 아내가 싸준 도시락으로 점심을 먹은 후 일을 다 마치면 다시 걸어서 퇴근을 한다. 집에 와서는 애완견 마빈을 산책시키면서 동네 바에 들러 맥주 한 잔을 하고 종종 지하실에서 시를 쓴다. 이처럼 특기할 만한 극적인 사건이랄 게 없는 그의 7박8일을 다룬 영화가 <패터슨>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패터슨>을 보며 ‘무엇인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게 된다. 언제든 시적 영감을 수소문하며 살아가는 패터슨의 삶. 그것은 우리 각자에게 부딪쳐 오는 세계의 손짓들을 매일 새롭게 마주하는 일이다. 짐 자무시를 ‘작가’로 칭하거나 <패터슨>을 ‘작품’이라고 칭하는 것을 주저하는 이는 드물 것이다. 그런데 르페브르의 관점을 경유하면 <패터슨> 속 패터슨이야말로 르페브르가 권고한 ‘작품’이 되는 자기 행위를 실천 중이다. 그도 그럴 것이, 패터슨은 루틴한 생활 조건을 완전히 받아들이면서 생활과 시 사이의 간격을 읽을 수 없는 수준의 삶을 살아가고 있지 않는가.  

우리가 어떤 경험이나 행동을 ‘일상적인 것’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상태를 지칭하는 것에 가깝다. 다시 말해 그 표현은 특별할 게 없는 익숙한 생활, 낯익은 상황, 그 자체를 일컫는다고 할 수 있다. 기억으로 내려앉을 만한 순간을 맞닥뜨리기 힘든 권태로운 시공간이 곧 일상이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는 신호와 메시지, 규칙과 규약으로 가득 차 있고 우린 그 안에서 규율되고 인준받는 삶에 익숙해 있다. 대개의 경우 제도가 길들이는 질서 안에서 어제와 같은 내일을 기다리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상태에 평온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지금 여기’에 대한 감각을 날카롭게 벼리며 살아간다는 건, 매우 어려운 일이다. 피에르 상쏘도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에서 현대인의 내면적 습관을 두고, “이미 말해진 것, 이미 본 것, 이미 느꼈던 것들에게 언제라도 오염될 수 있는 위험 속에” 항상 노출된 채 살아간다고 말한다. 그런 식으로 우리는 일상에 머물 때, 우리 자신을 둘러싼 ‘지금 여기’의 순간들에 대해 ‘망각’을 기본으로 한다.

역설적인 말이지만, 그런 진단은 ‘기억’의 특별함, 곧 기억에 남은 대상의 예외성을 상기시킨다. 실제로 일상에 파묻힌 상태의 우리 의식을 지배하는 건, ‘현재’가 아니다. 일상의 순간에 매몰되어 있을 때, 우리의 ‘현재’는 지각되지 않는 무의미한 대상들의 총합으로 존재한다. 그런데 빠르게 망각의 영역으로 멀어지는 것들, 방금까지 ‘현재’를 이뤘던 것들을 예민하게 불러 세우는 촉수를 가진 이들이 있다. 그 부류 중 하나가 시인이다. 그들이야 말로 현재를 살아내는 이들이다. 그렇다면 영화 말미 “당신도 뉴저지 패터슨의 시인입니까”라는 일본 시인의 질문 앞에서 잠시 망설이다가 “아니요”라고 말하던 패터슨의 표정은 지극히 역설적인 순간으로 다가온다. 

자무시의 영화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음’의 혁명으로 언명하기 위해선 그가 창조한 인물들의 동선을 더 세심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우선 자무시의 로드무비를 유랑의 영화라고 칭한 까닭은, 그의 거의 모든 영화가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낯선 상황에 끌려 다니는 인물들, 떠밀려 다니는 인물들을 그리기 때문이다. ‘유랑’이란 단어를 떠올리면 자무시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감독이라 추정되는 빔 벤더스가 먼저 생각난다. 그의 영화 속 인물들에 대해 ‘방랑’이나 ‘방황’이란 표현을 쓰는 경우가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그들은 의지적 주체가 되어 떠도는 법이 없기에 ‘유랑’이라는 단어의 주인들이다. <베를린 천사의 시>나 <파리, 텍사스>의 풍경에 깃든 ‘정처없음’의 폐허는 유랑자의 내면에 비친 황량함을 시각화하지 않던가. 같은 방식으로 말하면 테오 앙겔로풀로스의 영화 중 <유랑극단>의 인물들은 제목처럼 유랑을 한다. 그러나 <안개 속의 풍경>이나 <율리시즈의 시선>, <영원과 하루>와 같은 영화는 합목적적 세계를 복원하려는 의지적 유랑, 곧 방랑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월터 살레스의 <중앙역>은 방랑의 영화이지만 <모터싸이클 다이어리>는 유랑의 영화인 것이다.

정작 중요한 것은, 자무시의 인물들이 유랑의 길 위에서 ‘시적 응대’의 태도를 가시화한다는 사실이다. 이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그의 영화가 의도하는 긴장은 무엇인가’. 곧 앞에서 언급한 자무시 영화를 향한 초석적 질문을 푸는 실마리가 된다. 결국 자무시의 영화는 아이러니한 ‘현재’에 이끌려 다니는 인물들을 설정한 후, 단번에 언어화되지 않는, 아니 끝내 언어화될 수 없는 삶의 비의성을 드러낸다. 그러한 영화적 순간은, 우리가 의심하지 않고 믿어왔던 어떤 것, 혹은 영화 속 인물이 덮어놓고 괜찮다고 생각했던 어떤 것에 균열을 일으키며 온다.

이를테면 <천국보다 낯선>에서 헝가리를 떠나온 에바에게 미국은 상상했던 곳이 아니었을 것이다. 뉴욕에 이제 막 도착한 그녀가 무거운 여행 가방을 들고 지저분한 어느 거리를 지날 때, 벽에 쓰인 문구는 ‘US out of Everywhere, Yankee Go Home’이었다. 젊은 자무시는 이 문구를 통해 ‘상상된 미국’의 축출을 일찌감치 천명한 게 아닐까. 그때부터 미국 아닌 것처럼 보이는 미국의 이미지들이 영화 속 이방인 에바와 영화 밖 이방인인 우리의 선입견을 쑤셔대기 시작한다. 뉴욕은 세련된 메가시티의 풍광으로 다가오지 않고, 클리블랜드는 거대한 공장지대의 활력으로 그려지지 않는다. 낙원과 같은 휴양지일 것으로 기대되었던 플로리다도 무색무취의 모습을 하고 있다. 그처럼 기대가 꺾인 순간, 바꿔 말해 상상된 이미지가 끝내 도착하지 않자 우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음’의 긴장을 느끼게 된다. 긴 암전들을 밟고 점프컷하는 이미지들, 그 67개의 쇼트가 담아낸 황량한 풍경과 황망한 해프닝은 그 미묘한 긴장을 위해 배열된 것이다. 

<데드맨>의 이야기도 주인공이 굳게 믿었던 ‘과거의 약속’이 훼손된 시점으로부터 출발한다. 미국 동부 클리블랜드에 살던 사내는 긴 기차 여행 끝에 서부에 위치한 머신 타운에 도착한다. 그는 디킨슨 철강소에서 회계사로 일할 계획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회계사 자리를 보장했던 편지는, 지금은 무효한 ‘과거의 약속’으로 공지된다. 그때부터 그의 유랑이 시작된다. 곧이어 그는 예기치 않은 살인사건에 휘말리게 되는데, 그때 그를 구원한 건 ‘노바디’라는 이름의 인디언이다. 사실상 ‘노바디’의 대사들 상당수는 그 자체로 시적 직관을 담아낸다. 위대한 시인의 이름을 가진 평범한 주인공 윌리엄 블레이크는 ‘노바디’의 시와 함께 현재를 버텨내게 되는 셈이다. 

그런데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면, 단순한 고유명사로 호명되는 것을 거부하는 존재로서 ‘노바디’는 그 자체로 시적 영감에 대한 은유일 것이다. 그 때문에 우린 그의 이름과 영화 속 여러 사물, 공간을 대차대조해볼 필요가 있다. 이를테면 디킨슨 철강소는 그 자체로 ‘개발’, ‘개척’의 뉘앙스를 가진다. 서부개척 시대, 땅의 주인을 묻지 않고 밀려들어 온 백인들의 욕망을 상징하는 셈이다(자무시는 처음부터 그 세계를 그로테스크하게 그리며 평가절하 한다). 그렇다면, ‘노바디’는 ‘거기서는 존재하지 않는 자’, 혹은 ‘거기서는 존재할 수 없는 자’일 것이다. 윌리엄 블레이크는 ‘노바디’와 말해지지 않은 세계를 유랑하며 당위적인 것으로 수용되었던 여러 층위의 신념들을 찢는다(심지어 서부극의 익숙한 내러티브 관습까지). 결국 그는 인디언 문명과 대자연의 세계를 경유해 삶과 죽음의 경계 너머에 있는 초월적 지평으로까지 나아간다. 떠밀려 출발한 이상한 여정 속에서 그는 하나의 시가 되는 셈이다.

<브로큰 플라워> 역시 전혀 다른 경로를 밟아 신비한 삶의 비의성을 누설하는 경지로 나아간다. 왕년의 바람둥이 돈 존스턴에게 배달된 핑크색 편지엔 발신인이 없다. 다만 자신이 20여년 전 존스턴의 애인이며, 당시 몰래 낳아 키운 존스턴의 아들이 드디어 아빠를 찾아 나섰다는 주장만 있다. 예기치 않은 공포로 당도한 그 편지 때문에 존스턴은 이상한 여행을 떠난다. 그 무렵 사귀었던 옛 애인들을 만난 후, 편지의 발신인을 추리해보는 유랑을 시작한 것이다. 이 터무니없고 괴상한 여행은 평온한 현실에 점착된 과거의 위력을 보여주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사실 존스턴은 옛 애인 중 누구에 대해서도 각별한 감정을 지녀오지 않았다. 바꿔 말해, 그 여정은 존스톤의 추억 여행이 아니다. 생각조차 해본 적 없는 익명의 아들이 평온한 자기 세계에 구멍을 내며 도착할지도 모른다는 현재의 공포로부터의 도피, 곧 들이닥칠지 모르는 고통에 대한 지연일 뿐이다. 그리하여 편지의 발신인을 특정하지 못한 채 일상으로 돌아온 존스턴이 맞닥뜨리게 되는 건, 과거와 미래를 단번에 균열시키는 불가지한 어떤 것이다. 이는 다분히 언어화될 수 없는 긴장, 언어화 될 수 있다면 불가피하게 ‘시’라는 형식을 빌릴 수밖에 없는 낯선 감흥이다.  

그래서 주어진 현실을 ‘시’로 응대하며 살아가는 <패터슨> 속 패터슨의 모습은 매우 낯설지만 아주 새로운 것은 아니다. 요약하면, 알 듯 모를 듯한 문장들을 뱉어내던 ‘노바디’(<데드맨>), 발신인에 대한 정보와 현실적 단서가 완전히 생략된 기묘한 편지(<브로큰 플라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음’의 세계에서 주인공에게 시적 응대를 요청하는 기표였다. 덧붙여 1953년에 죽은 위대한 시인으로 회자되지만, 실제로는 지금까지 생존해온 뱀파이어 크리스토퍼 말로우(<오직 사랑하는 이들만이 살아남는다>)도 동일한 기능을 수행한다고 할 수 있다. 오염된 피로 가득 찬 좀비(인간)의 세계에서, 좀비가 일궈가는 포악한 역사 속에서 그는 아담과 이브에게 마지막 ‘순수 혈액’을 건네는 존재이지 않던가. 

그 때문에 일상을 유랑하며 자기를 둘러싼 삶의 비의성과 ‘시’로 대화하는 패터슨의 면면은 어떤 기시감을 불러일으킨다. 한편으론 패터슨을 통해 자무시가 르페브르의 정언을 강조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작품이 되는 행위를 습관화할 수 있다면, 시적 영감으로 충만한 숨겨진 현실을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속삭임이 <패터슨>에 있기 때문이다. 결국 애완견 마빈에 의해 그의 시작(詩作) 노트는 모두 찢기고 말지만, 자무시는 문제될 게 없다고 말한다. 완전히 훼손된 시작 노트의 복사본은 어디에도 없지만, 다시 원본으로서의 삶을 전유할 수 있다면 괜찮다고 말한다. 바로 이 전언이 ‘아무 것도 일어나지 않음’의 혁명을 다뤄 온 자무시의 의도라고 할 것이다. 
 
  
 
1. ‘차연’의 리듬: 미니멀리스트의 취미

“나는 반복을 사랑한다. 더 정확히는 무엇인가 반복되는 가운데서 일어나는 변주에 흥미가 있다. 앤디 워홀의 프린트나 바흐의 음악을 좋아하는 것도 그래서다. <패터슨>을 구상하며 나는 이 영화의 구조를 일상의 메타포로 만들어보고 싶었다. 우리가 사는 하루하루는 그 전날의 변주이지 않나.”(「“폭력이 난무하는 영화에 대한 해독제가 되길” - <패터슨> 짐 자무시 감독 인터뷰」, 『씨네 21』 , 2016.5.30.) 

“아무튼 두 영화(<천국보다 낯선>, <데드맨>)에는 유사성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둘 다 스토리 자체에서 파생하는 고유의 리듬을 지니고 있죠.(중략) 각각의 신들이 그 자체로 귀결되게 하자고요. 다음에 이어지는 이미지에 의해 결정되는 일 없이 말이에요”(조너선 로젠바움과의 1996년 인터뷰 중)

<천국보다 낯선>에는 도박과 경마를 즐기며 목적없이 살아가는 두 청춘 윌리와 에디가 등장한다. 확신없는 세계 속에서 지루하게 살아가던 그들은 에바가 머물고 있는 클리블랜드로 즉흥 여행을 떠난다. 그런데 색다른 풍경을 기대하며 도착한 클리블랜드에서 에디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봐, 이거 웃기잖아. 우리 여긴 처음인데 다 똑같은 거 같아” 

그렇다. 자무시는 뭔가 유사한 상황과 사물, 사람, 사연을 변주해가며 맥락적으로 도착하는 미세한 차이에 멈춰 서게 한다. 그런데 이때의 ‘반복’과 ‘차이’는 우리에게 거의 동시적으로 다가온다. 자무시는 ‘디페랑스(differance)’, 곧 ‘차연’으로 도착하는 쇼트들을 통해 “현재가 스스로 그 내부에서부터 만들어내는” 미끄러지는 과정으로서의 해석을 의도하는 것이다. 자무시는 여러 영화에서 의미의 규합과 지연이 동시에 발생하는 ‘반복’을 즐겨왔다. 그 때문에 우리는 차연의 이미지가 좀 전의 기억과 다투는 순간에 사로잡혀 우리 감각이 팽팽해지는 경험을 해야 했다. 

그가 2003년에 편집을 끝낸 단편 모음 영화 <커피와 담배>는 그의 그런 성향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표지다. 17년에 걸쳐 연출한 단편들을 엮은 이 영화는 결국 카페 등 제한된 실내에서 커피와 담배를 즐기며 수다를 떠는 사람들의 모습을 반복해서 보여줄 뿐이다. 상당수의 단편들은 아예 커피와 담배를 주요한 대화 소재로 다루는 바, 이 영화는 인물들의 대화에서 빚어지는 ‘차연’의 순간들을 지켜보는 것만으로 흥미진진한 영화체험을 안긴다. 

철학적 사색을 대사와 이미지로 변론하는 데(예컨대, 테렌스 맬릭의 영화) 관심이 없는 자무시의 영화들을 떠올릴 때, ‘차연’과 같은 무거운 단어를 들이대는 건 실례일지 모른다. 그러나 그의 영화 이미지 안에서 상황, 사물, 사람, 사연 등이 반복될 때 “현전에 균열을 내는 동시에 현전을 지연시키는 차이”가 작동하고 있음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예컨대 ‘쌍둥이’가 등장하는 단편은 말할 것도 없고, 패턴 무늬로 둘러쳐진 카페에서 이야기가 펼쳐질 때, 포인트가 다른 격자무늬 테이블보가 눈에 들어올 때, 던질 때마다 같은 숫자가 나오는 두 개의 주사위가 주목을 끌 때, 우리는 잠깐의 시적인 휴지를 경험하게 된다. 한 배우가 1인 2역을 하며 사촌지간의 갈등을 그려낼 때, ‘리’라는 인물을 반복적으로 ‘루’라고 발음하는 인물을 지켜볼 때, 어색한 순간에 틈입하는 건배제의의 풍경을 계속 마주할 때, 똑같은 각도와 거리에서 출발하는 부감쇼트가 등장할 때, 우린 영화체험의 측면에서 동일성과 타자성, 반복과 차이, 귀속과 연기가 동시적으로 요청되는 순간을 피할 수 없다.  

이미 밝힌 대로 ‘차연의 영화’라는 명명에 가장 적확하게 들어맞는 영화는 <커피와 담배>일 테지만, 여타의 자무시 영화들도 정도 차를 두고 그 관점에서 재해석이 가능하다. <다운 바이 로>의 주인공 이름이 잭(Zack)과 잭(Jack)인 것만 생각해 봐도 그러한 주장은 신빙성을 갖는다. 앞에서 설명한 <브로큰 플라워> 속 존스턴의 옛애인들도 편지 발신인의 혐의를 입고 벗으면서 순차적으로 차연의 기표가 되지 않던가. 영화 말미에 존스턴의 숨겨진 아들이라 추정되었던 한 소년도 의심의 자리를 미묘하게 이탈하면서 비슷한 상징적 지위를 점유한다.

흥미로운 건, 자무시의 필모그래피를 통시적으로 보면, 영화와 영화 사이를 건너뛰는 차연의 순간들도 상당하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커피와 담배> 속 흑백 프레임을 수놓았던 무수한 패턴 프린트와 격자무늬 사물들은 자무시의 거의 모든 영화에서 중요한 미장센 요소로 반복된다(일단 패턴 프린트, 격자무늬 자체가 시각적 ‘반복’을 전면화한다는 걸 환기해볼 필요가 있다). <패터슨>에서는 아내 로라의 패션과 각종 예술작업들, 예를 들어 집안 장식부터 남편 도시락 데코에 이르기까지 그 같은 자무시만의 아트 디렉션이 강조되어 있다. <커피와 담배>에 등장했던 쌍둥이 이미지는 <패터슨>에서도 여러 차례 틈입하는 바, 일상의 핵심적 속성인 반복의 의미를 상기시키는 한편 등장 자체로 차연의 미학을 시각화한다. 여기까지 왔다면, 우리는 자무시가 의도한 <패터슨>의 메타포를 들춰볼 수 있는 문턱에 다다른 것이다. 일상에서 시를 건져 올리는 행위란, 아무런 감흥을 일으키지 않는 ‘같음’의 세계에서 차이의 현전을 감지하고 언어화하는 작업이지 않던가. 

이 같은 자무시의 미학은 단순 소박한 영화 세계 내에 생동감을 불어넣는 계기로 실천된다. 주목할 것은, ‘차연’의 이미지가 도착할 때 우리가 어떤 리듬감을 느끼게 된다는 사실이다. 르페브르의 마지막 책 『리듬 분석』은 여러모로 흥미롭다. 그는 여기서 특정한 시공간 속에서 양화된 반복의 사건이 어떤 리듬으로 다가오는 순간을 성찰한다. 사실상 리듬의 속성 안에는 차이와 반복이 동시적으로 내포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반복’에는 새로운 시간대에 다시 도래한 행위나 사건이 전제되어 있다. 패터슨의 일주일도 연속적으로 흘러가는 시간을 분할하며 인상적인 ‘간격’을 베푸는 행위와 사건으로 가득 차 있다. 그 안에서 그는 긴장과 이완의 리듬이 만들어지는 것을 실험하거나 실현한다.

르페브르는 우리가 일상에서 접하게 되는 리듬을 감춰진 리듬(생리적·심리적 리듬), 공적 리듬(달력·의례 등의 리듬), 가상의 리듬(‘상상적인 것’과 관계된 언어적 리듬 등)으로 분류한 바 있다. 이를 의식하고 보면, <패터슨>이 그 세 가지 리듬의 교차로 탄생된 영화임을 알게 된다. 이를테면 <패터슨>에는 패터슨의 심리적 리듬, 곧 감춰진 리듬이 존재한다. 자무시의 인물답게 패터슨은 좀처럼 자신의 감정을 표정으로 나타내 보이지 않지만, 그 때문에 그의 감정이 읽히는 순간들은 특별하다. 두 번째로 패터슨이 찬 손목시계의 시분침, 요일을 알리는 영화 자막 등은 우리에게 공적 리듬의 존재를 확인시킨다. 그의 일상 외부로 흘러가는 객관적인 시간을 일정한 간격으로 마주하게 하는 셈이다. 마지막으로 ‘상상적인 것’이 빚어낸 리듬, 특히 상상적 이미지들의 언어화 과정이 일정한 리듬을 보탠다. 패터슨이 써내려가는 시구절이 점멸할 때의 리듬, 곧 일상에서 주운 시어들이 작품의 완성을 향해 증축되는 순간의 리듬은 자무시 영화를 통틀어 <패터슨>만의 진경이다.  

그런데 영화에 깃든 세 가지 리듬을 읽는 것도 필요하지만, 패터슨이 자기 일상의 리듬을 읽고 분석하는 자라는 사실을 이해하는 게 더 중요하다. 실제로 그는 매일 마주하는 풍경 안에 약동하는 일상의 리듬들을 포착하고 그것을 기록하는 자다. 르페브르의 언어를 빌리면 일종의 ‘리듬 분석가’에 해당하는 것이다. 여기서 <패터슨>을 향해 물어야 할 두 번째 질문 ‘반복 속에 미끄러지는 사람, 사물, 사연들이 주는 생동감을 어떻게 해명할 것인가.’에 대한 답안이 구상될 수 있다. 르페브르에 따르면 리듬 분석가는 체험과 일상 속으로 들어가 리듬들의 뒤얽힘과 상호작용의 배후에서 개별 리듬을 가려내 포착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는 각각의 리듬을 구별된 ‘존재’로 읽어내야 한다고 말한다. 그것을 전제로, 르페브르는 리듬분석가가 시인처럼 “미학적 힘을 갖는 언어적 행위를 수행한다”고 단언한다. 르페브르의 진술과 만나는 <패터슨>의 장면을 하나만 예로 들면, 버스 씬을 언급할 수 있겠다. 그는 뒷자리의 승객들이 동시적으로 내뱉은 말들의 리듬에 휩싸여 생활한다. 그러나 결국 의미있게 다가오는 몇몇 대화를 가려내 그 발화된 문장에 실린 이미지를 시적 영감으로 변환하곤 한다. 패터슨은 리듬 분석가로서의 자질을 직장에서도 실천하는 인물인 셈이다. 

이처럼 자무시는 매우 분명한 수준으로, 패터슨이 마주한 풍경 속 리듬을 우리가 같이 느낄 수 있도록 배려하며 이미지를 배열한다. <패터슨>을 본 당신도 자칫 놓쳤을 수 있는 차연의 이미지를 지금부터 일부만 나열해 보겠다. 이들은 <패터슨>을 차연의 영화이자, 리듬의 영화로 재호명케 하는 목록들이기도 하다. 아침 출근길에 패터슨이 만난 쌍둥이 할아버지, 패터슨 집 거실을 장악한 애완견 마빈과 벽에 걸린 마빈의 초상화, 블루 팁 성과 다이아몬드표 성냥, 핑크빛 옷을 입고 나란히 하품을 한 쌍둥이 소녀, 비슷한 헤어스타일을 한 할머니 승객들, 기상할 때마다 6시 10분에서 20분 사이를 지나고 있는 손목시계의 시분침, 아내가 들려주는 지난 밤 꿈 내용의 미세한 차이들, 23번 버스에 시동을 켜기 전 시를 쓰는 패터슨, 그 타이밍에 다가와 말을 건네는 직장 동료, 패터슨이 출퇴근길에 다른 각도로 마주하게 되는 옛 공장 건물, 항상 폭포가 내다보이는 곳에서 도시락을 먹으며 자기 시를 음미하는 패터슨, 낯선 여자가 자기를 유혹했다고 믿는 두 남자 승객의 똑 닮은 신발, 패터슨이 좋아하는 시인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를 카를로 윌리엄 카를로스라고 발음하는 로라, 퇴근 시 다시 곧추세우곤 하는 우편함, 아내 몸에서 컵케이크향을 읽는 패터슨과 남편 몸에서 맥주향을 읽는 로라, 비슷한 타이밍에 바 안으로 들어와 패터슨의 옆자리에 앉는 마리라는 여자, 남편에게 시작 노트 복사본을 만들라고 반복해서 말하는 로라의 표정, 패터슨에게도 있는 시집을 들고 불쑥 말을 건네는 일본 시인 등등.

<패터슨>은 단순하기 그지없는 자무시의 영화 중에서도 가장 소박한 작품에 속한다. 그럼에도 당신이 어떤 생동감을 지속적으로 느꼈다면, 그건 바로 흥미롭게 기획된 차연의 이미지와 거기서 파생된 리듬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자무시는 그들 이미지 뒤에 앉아 반복은 지루하고 아무 것도 일어나지 않는 일상은 답답하다는 우리의 어떤 태도를 문제 삼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하여 <패터슨>에 묻어나는 자무시의 정언을 대신 전하면 이쯤 되겠다. 생의 감각을 깨우는 리듬이란 반복이 없으면 존재할 수 없다! 이 표현이 역설적이라면, <패터슨>은 그런 영화다.  
 
  
 
2. 다른 ‘태도’로서 시: 어제와 같은 길 위에서 시 쓰기

“시는 무척 아름다운 형식이죠. 시 형식에서는 페이지의 빈 공간 또한 중요한 부분이에요. 텍스트가 어디에 자리하느냐도 마찬가지고요. 마치 마일스 데이비스가 연주를 멈추고 있을 때 느껴지는 그 애절함 같은 거죠.”(제프 앤드루와의 1999년 인터뷰 중)

“저는 저 자신을 그저 소소한 시를 쓰는 마이너 시인쯤으로 생각해요. 거창한 서사영화 같은 걸 만들고 싶은 생각은 없죠”(뤽 산테와의 1989년 인터뷰에서)

레미 드 구르몽의 말처럼 우리가 글을 쓰는 이유를 단 한 가지로 요약하면, “자기라는 한 개성의 거울에 비쳐진 어떤 특수한 세계를 타인에게 제시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가장 예민하게 언어를 다루는 시를 창작하는 원리도 그로부터 출발한다. 일단 시를 창작하기 위해선 존재하는 어떤 대상을 표상하거나 암시하고픈 일차적 욕망이 있어야 한다. 혹은 지시하고픈 어떤 의미나 묘사하고픈 어떤 이미저리를 가져야 한다. 때로는 자연발생적으로 시를 쓰고 싶은 충동에 이를 수도 있다. 이를테면 공유하고픈 어떤 감정에 완전히 사로잡혔거나 대상과 언어 사이의 관계를 미학적으로 규명하고픈 고양된 순간에 다다랐을 때, 시는 스스로 태어나기도 한다. 물론 좋은 시를 쓰려는 자에게는 긴장성을 배가하는 각별한 어휘 배합 능력도 요청될 것이다. 

그렇다면 패터슨은 시인으로서의 태도와 최소한의 자질을 동시에 가진 인물처럼 보인다. 여기서 영화 밖 정보를 보태도록 하겠다. 패터슨이 영화 속에서 쓴 시 중 일부는 현실 속 실제 주인이 있다. 예컨대 “우리 집에는 성냥이 많다”로 시작되는 ‘사랑 시’는 론 패드젯이라는 미국 시인이 쓴 시다. 그 때문에 ‘등단’이나 ‘출판’이라는 어떤 관문을 거치지 않았음에도 패터슨은 시인의 향기를 머금는다. 흥미로운 건, 영화 속 패터슨이 쓴 여려 시들이 자무시의 영화를 닮았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는 점이다. 잘 안 알려진 사실인데, 그런 추측은 현실적 근거를 가진다. 론 패드젯의 시선집은 미국 시인협회로부터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상을 받은 적이 있다. 그러니까 영화 속 패터슨은 영화 밖을 사는 론 패드젯의 분신이며, 더 결정적으로는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의 시를 좋아하는 자무시 자신의 페르소나다. 결국 패터슨은 언제든지 영화로 옮길 시적 영감을 찾는 자무시 자신의 실존이 반영된 결과인 것이다. 심지어 자무시는 왕년의 문학도로 스스로를 마이너 시인(때때로 ‘세미 비음악인’이라고 칭하기도 한다)이라고까지 부르지 않았는가. 

여기서 좀 더 근본적인 질문으로 들어가 보자. 매일 같은 시간 마주치게 되는 풍경 속에서, 혹은 항상 비슷한 상황으로 엮이는 관계들 안에서 시가 솟을 수 있는가. 혹시 시란 평소에 대면하지 못했던 상황, 사물, 사람 앞에 섰을 때, 언어적 기적으로 오는 ‘무엇’이 아닌가. 먼저 후자의 질문을 긍정하고자 한다면, 이창동의 <시>에 등장하는 시를 다시 읽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영화 속에서 미자는 여중생 성폭행 사건에 가담한 손자를 낯설게 바라봐야 하는 상황 속에서 시를 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자기 손자로 인해 상처받고 끝내 자살한 여중생의 부재를 해명하는 과정에서 시가 솟는다. 시가 일상을 찢는 충격과 혼란의 자식인 셈이다. 그 때문에 <시>의 종결부에서, ‘아네스의 노래’라는 시가 미자의 목소리로 낭송되다가 어느 순간 죽은 여중생의 목소리로 읊어질 때, 우린 시의 비장미와 숭고미를 동시에 느끼게 된다. 이때 우리가 마주하게 되는 건, 첫째, 진실을 보는 데 성공한 미자가 결국 윤리적 입장을 가진 애도의 시를 언어와 삶으로 써냈다는 사실이다. 둘째, 미자가 진심과 양심 사이에서 길을 찾으면서 그 이름(언어)에 합당한 미자(美子)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셋째, 한 편의 시가 불가해하고 부조리한 세계의 진실을 꿰뚫는 힘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이다. 

그러나 시는 일상을 찢는 특별함 속에서 ‘발명’될 뿐만이 아니라, 일상의 평범함에 얹혀 ‘발견’되기도 한다. <패터슨>에 삽입된 시들이 그렇다. 자무시는 그와 같은 관점에서 이미지와 시의 화음을 연출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그러한 생각이 자무시의 것만은 아니다. 

“예각적 의식은 경험론적 환경과는 전혀 무관하게 다양할 수 있다. 가장 평범한 사물들, 일상적 상황들, 그리고 가장 별 볼 일 없는 개인들까지도, 적절히 어떤 ‘감응적-상상적인 행위’로부터 자극을 받았을 때, 즉각적이고도 놀랄 말한 예각적 가능성을 드러낸다.” (필립 윌라이트, 『은유와 실재』 중)

2008년 가을 계간 『시인세계』에 실린 기획특집 글을 보면, 시인들이 정의하는 시란 이런 것이었다. “미지의 실체이고, 환영의 실체이며, 부재의 실체”(김행숙), “멀찌감치 물러나서야 눈에 들어올 뿐, 다가갈 수는 없는 것”(손택수), “내 뼈 안에서 울리는 내재율”(신달자), “내 삶의 단독정부”(천양희), “빈방에 꽂히는 햇빛”(강은교), “내 삶의 궁기를 베껴 적은 것”(문인수).

그러나 윌라이트의 말에 따르면 두 가지 에너지의 교류를 즐기는 태도만 있다면 시는 운명적이거나 신적인 영감의 결과가 아니다. 선택된 자들의 것도 아니고 구별된 순간들의 산물도 아니다. 그 두 가지 에너지란, 먼저 바깥을 향해 가는 정신적 에너지로서 ‘감응력’이고, 다른 하나는 안으로 고이는 정신적 에너지로서 ‘상상력’이다. 그런데 이 두 에너지를 품지 않고 살아가는 이는 없다. 그렇다면 이제 필요한 건 두 에너지의 접촉 과정을 포착하려는 의지적 행위다. 발터 벤야민식으로 표현하면 자기를 확인하며 안을 보는 산책자와 밖을 보다가 자기를 잃어버리는 구경꾼 중에서 전자의 삶을 희구하는 것이 중요하단 말이다. 여기에 절약적 언어로 기록의 습관을 이어가려는 노력이 뒷받침된다면, 우리는 시인의 삶에 접근할 수 있다.  

그렇게 보면 바슐라르를 잘 알든 모르든 자무시는 바슐라르주의자에 가까워 보인다. 일상의 도처에서 피어나는 몽상의 능력을 믿은 바슐라르는 ‘상상적인 것’으로서 이미지의 권능을 가열차게 설파해 왔다. 바슐라르는 우리 내면에 반사된 이미저리에 기대어 기하학적인 이미지들에 기초한 존재론보다 더 확실한 존재론을 정초할 수 있다고 믿은 사람이다. 그러니까 <데드맨>에서 노바디에게 이끌려 윌리엄 블레이크가 사라진 시공간은 바슐라르를 통과했을 때 훨씬 더 강력한 존재론적 사건이 된다. 사실상 ‘실재’의 사건(혹은 ‘데드맨’)이 된 윌리엄 블레이크가 당도한 초월적 지평을 다른 방식으로 설명하는 게 더 어렵기도 하다. 

시를 쓰는 입장에서, 또 시를 오래 앓아온 한 명의 독자로서 말하건대, 시로부터 사상을 발견하려는 태도만이 능사는 아니다. I. A. 리차즈의 충고대로 “경험 그 자체, 즉 마음속을 스쳐 닫는 충동의 조류가, 말의 원천”이라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다. 오히려 사회적 의식을 담은 사상이나 공리적인 교훈과 반성에 기댄 언어에서 ‘시적인 것’을 발견하기가 더 어렵기도 하다. 확실한 것은, 시에 내재된 “전달의 신비”란 가장 평이한 경험의 꾸밈없는 언어화에서도 확보된다는 점이다. 우리가 평소 쓰는 언어의 상징작용을 적절히 이용하기만 한다면, 흩어지는 충동, 달아나는 영감에 질서를 부여하는 힘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여기에 <패터슨>의 이미지와 패터슨의 시가 관계되는 방식에 대한 자무시의 믿음이 있다.   
 
  
 
3. 공리없는 세계 속 우리 각자의 짐 자무시
 
“저에게, 각 씬의 정수는 그 장면에서 무엇이 중요한가 하는 점이지, 시나리오와 똑같은 대사가 아니에요.”(피터 키오그와의 1992년 인터뷰 중)

“하지만 저는 늘 희망을 버리지 않아요.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힘을 믿기 때문이죠”(마조리 바움가텐과의 1997년 인터뷰 중)

다시 자무시의 영화를 향해 던져야 할 초석적 질문으로 돌아가기로 하자. ‘자무시가 만든 공리없는 세계를 우리는 어떻게 마주해야 하는가’. 이 질문은 ‘그의 영화 속 인물들이 왜 하염없이 떠도는가’로 바꿔 물어도 된다. 자무시의 인물들이 정처를 마련하지 못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직관으로 가닿을 수 있는 이상적인 세계가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엔 진리이면서 동시에 다른 명제들의 전제가 되는 자명한 명제를 영원히 만나지 못할 것이라는 자무시의 신념이 담겨 있다. 그래서 그의 영화를 관람하는 체험은, 우연과 불확실성의 구조로 얽힌 세계에서 수동적이 될 수밖에 없는 인물들의 안간힘을 보는 행위다.

그런 까닭에 자무시의 인물들은 문학가의 이름을 갖거나 끊임없이 문학 작품을 이야기하고, 음악에 기대거나 그 스스로 음악인이다. ‘예술 하기’란 자족적으로 완결되는 어떤 세계상(世界像)을 소유하고자 하는 나약한 인간의 출구전략이 아니던가. 그리하여 자무시의 인물들은 자신을 수동적으로 만드는 환경, 그 공리없는 세계를 버티기 위해 불가피하게 예술과 동행한다. 틀림없는 추측을 말하면 자무시도 그가 만든 인물들처럼 현실을 버텨왔으리란 점이다. 이를테면 뉴올리언스 음악에 취해본 적 없는 자가 <다운 바이 로>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이기 팝, 존 루리, 톰 웨이츠, 스크리밍 제이 호킨스와 같은 음악인 친구들이 그의 영화 안에 계속 등장한다는 사실도 그와 관련해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에 대한 정보를 더 밝히면, 그는 컬럼비아대학 벤치에서 온종일 소설과 시를 읽던 청년기를 거쳤다. 대학 4학년 때에는 한 학기동안 체류할 목적으로 들른 파리에서 거장들의 영화에 취해 1년 동안 눌러앉는 경험을 한다. 파리의 시네마테크에서 그를 유혹한 영화감독의 목록에는 지가 베르토프, 장 비고, 로베르 브레송, 라울 루이즈, 장 르누아르, 자크 리베트 등이 있다. 펠리니의 초기 영화들과 파졸리니, 베르톨루치의 영화에도 빠졌었다고 고백한 적 있다. 니콜라스 레이, 사무엘 풀러와 같은 미국 영화를 재발견한 것도 파리 시네마테크에서였다. 그렇게 그는 문학을 하다가 이미지적인 산문시를 썼고, 급기야 다른 장르에서 받은 영감이 혼종적으로 묻어나는 영화를 만들기 시작한다. 미국에 돌아와 뉴욕대 대학원에서 영화를 배우던 무렵에는 밴드음악에 녹아있는 시대의 목소리에 취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여기서 더 나아가 그의 영화들에서 받은 다소 주관적인 인상을 밝히면, <천국보다 낯선>을 보며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붉은 사막> 속 어떤 풍광을 연상한 적 있다. 윌리의 어떤 행동과 표정에서는 고다르의 <네 멋대로 해라> 속 미셸의 한 순간이 만져졌다. 윌리의 방 안 풍경 어딘가에서 오즈 야스지로의 냄새를 맡기도 했다. <데드맨> 속에 등장하는 숲속과 들판에서 미조구치 겐지의 한 장면을 떠올리기도 했다. 이처럼 자무시의 필모그래피를 거슬러 올라갈수록, 그를 뒤흔든 예술적 영감이 더 풍부하게 감지되는 게 사실이다.

그래서 그의 초기작들이 그의 젊은 날의 초상을 담은 것으로 신화화 되는 건 어쩔 수 없다. ‘작가주의’라는 호칭에 연연하지 않으면서도 ‘작가’일 수밖에 없는 하고많은 이유를, 그가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야망은 영화를 수단으로 삼아 얻을 수 있는 ‘어떤 것’과 관련이 없다. 그 ‘어떤 것’과 거리를 지키려는 염결주의, 그것만이 그의 야망이었다. 이는 그의 초기 영화에 비치는 안티 스노비즘적인 태도, 포스트 펑크에 어울리는 의식, 자유분방한 힙스터의 생활을 어느 정도 설명해준다. 그는 정색하는 법 없는 심드렁한 인물들을 통해 한 칼을 가진 하위문화적 감성을 드러낼 줄 알았다. 그러면서도 그는 시적이라고 느껴지는 위트를 잃지 않았다. 

사실 이 글을 쓰는 내내, <패터슨>에서 느껴지는 아쉬움이 자무시의 초기작에 대한 향수 때문인지를 의심했다. 그만큼 패터슨은 젊지만, 그는 젊은 시절 자무시의 재기발랄함을 머금은 캐릭터는 아니었다. 그래서 <패터슨>으로부터 얻은 어떤 허전함은, 패터슨의 평범하고 착한 얼굴이 자무시의 계산된 기획이란 것을 알면서도 잘 해소되지 않았다. 이제 <데드맨>에 등장했던 무시무시한 현상금 사냥꾼 콜 윌슨과 같은 캐릭터를 더 이상 못 볼지도 모른다. 무람없이 죽은 보안관의 머리를 짓밟아 으깨고, 방금까지 동료였던 자를 죽인 후 삶아서 손을 뜯어먹는 장면을 만나지 못할지도 모른다. 

부연하면, <데드맨>에는 영국 낭만주의 시인이었던 윌리엄 블레이크(주인공 윌리엄 블레이크가 아니다)의 ‘지옥의 잠언’ 속 구절, 이를테면 “독수리는 결코 많은 시간을 허비하는 일 없이 까마귀로부터 뭔가를 배운다”같은 문장이 등장한다. “쟁기를 실은 수레를 끌고 죽은 자들의 뼈 위를 지나가라”와 같은 문장도 <데드맨>의 백미다. 그런데 <패터슨>은 그런 패기 넘치는 문장이 있던 자리에 다음과 같은 문장을 갖다 놓는다. “이제 벽에 우울한 푸른 회색빛 빛이 옅게 비쳐 난 구두끈을 매고 아래층에 내려가 커피를 만들어”.

그럼에도 <패터슨>과 같은 영화를 마다할 이유는 없다. 가만히 보고 세심히 들을 줄 아는 인물의 느린 걸음만으로도 뼈를 가지는 영화. 자무시는 당신에게 이 말을 하고 싶었던 것 같다. ‘천천히 음미해 봐. 어제와 내일 사이에서 무엇인가 일어나고 있어.’ 나는 할리우드의 엄청난 원심력을 견디면서 자기 영혼을 지켜 온 자, 할리우드를 움직이는 비즈니스맨들의 하청을 받아 기술자(?)로 살아가는 걸 끔찍하게 여겨 온 자의 내일을 끝까지 응원할 것이다.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글: 안숭범

영화평론가. 한신대학교 인문콘텐츠학부 교수, 시인. EBS <시네마천국>을 진행했으며, 문화콘텐츠 기획 및 인문학적 비평에 매진하고 있다. 

글 출처: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 르몽드 시네마 크리티크

http://www.ilemonde.com/news/articleList.html?sc_sub_section_code=S2N40&view_type=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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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자서곡숙

등록일2018-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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