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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섭] <그녀에게> ― 희생과 부활의 메타모르포시스

 
 
<내 어머니의 모든 것>(1999)에 이어 <그녀에게>(2002)가 자기 필모그래피의 최고봉에 위치할 것을 알모도바르는 알았을까? <그녀에게>는 <내 어머니의 모든 것>이 끝나는 지점에서 태동한다. 그 핑크빛 커튼이 내려오고 걷혀지면서 모성의 멜로드라마는 남성의 러브스토리로 변신한다. 막이 오르면, 관객이 만나게 되는 낯선 두 여인은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눈을 감은 채 쓰러졌다 일어섰다를 반복하며 방황한다. 그리고 볼품없어 보이는 한 남자가 한 여인의 흑기사가 되어 방황하는 여인의 길을 인도해 준다. 남자의 얼굴은 ‘세상에서 가장 슬픈’ 모습. 뇌사 상태의 알리시아를 대신해 피나 바우쉬(Pina Bausch)의 <카페 뮐러>를 보고 그 육체의 언어를 다시 자신의 언어로 풀어내는 베니그노는 다가올 미래와 자신의 운명에 무지했던 알모도바르판 오이디푸스이다. 

알리시아와 베니그노

여성들의 세계와 여성성에 경도돼 있던 알모도바르가 여성이 아닌 남성을 주인공으로 기용하는 건 흔치 않다. 그리고 그가 자신의 작품 속에 그 닮은꼴인 작품들을 배치하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다. 감독은 이 미장아빔의 미학을 <그녀에게>에서 극대화시켰다. 세계적인 무용수 피나 바우쉬와 말루 에이로도(Malou Airaudo)가 연기하는 <카페 뮐러>에서 두 몽유병자 여인은 알리시아와 리디아로 치환되고, 사랑에 온 몸을 던지는 남자는 영화 세계의 베니그노로 육화된다. 아침이 되어 몽유병이라는 저주의 마법이 풀리면 이 남자는 잊혀지리라. 그리고 베니그노는 다시 고독의 세계로 들어갈 것이다. 죽음만큼 고독한 것은 없나니.  
 
  
 
극중 알리시아의 발레 선생님인 카테리나(제랄딘 채플린 분)는 발레공연을 준비한다. 그녀가 준비하는 공연인 ‘참호(塹壕)’의 내용은 한 병사가 죽고, 그 시체에서 나온 그의 영혼이 발레리나가 되는 것이다. 죽음에서 생명이 탄생하고, 남성적인 것에서 여성적인 것이 나오며, 지상(地上)의 것에서 천상(天上)의 것이 탄생하는 예술. 그것은 바로 베니그노가 이끌어 가는 죽음의 변주에 다름 아니다. 그가 죽어 알리시아로 부활하는 희생의 순애보는 <그녀에게>의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위대한 플롯이다. 
 
  
 
알모도바르의 열네 번째 장편 상업영화는 베니그노의 희생과 메타모르포시스를 노래하는 장엄한 합창곡이다. 오케스트라의 맨 앞줄에는 피나 바우쉬와 제랄딘 채플린(찰리 채플린의 딸)이 보이고, 그 다음 줄 정도에 브라질의 국민 가수 카에타누 벨로주가 자리한다. 카에타누 벨로주는 멕시코 민요 스타일의 ‘쿠쿠루쿠쿠 팔로마’를 가슴 아프게 열창했다. 한 여인을 사랑하던 남자가 그 열정과 상심으로 인해 죽지만, 하늘은 그의 사랑에 감동한다. 그래서 애달픈 영혼이 된 남자는 죽어서도 사랑을 노래한다는 내용. 이 유명 인사들은 알모도바르가 지휘하는 교향악의 단원이 되기를 기꺼이 수락했다. 

<애인이 줄었어요>라는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또 다른 소품과 마이클 커닝햄의 소설 『세월』도 빠뜨릴 수 없다. 알모도바르의 이 흑백 무성영화는 원래 독립적인 작품으로 구상되었으나, 어찌하다가 <그녀에게>의 스토리 내에 삽입되었다. 남자의 희생, 그리고 죽음을 초월한 영원한 사랑을 다룬다는 의미에서 이 영화는 또 다른 미장아빔이며, 베니그노의 운명을 결정하는 중요한 작품이 되기도 한다. 베니그노가 자기처럼 “좀 뚱뚱하지만 마음씨 좋은” 사람으로 묘사한 이 영화의 주인공 알프레도는 또 다른 모습의 베니그노일 뿐이다. 

마이클 커닝햄의 소설은 베니그노의 집에 살던 마르코가 휴대 전화를 놓던 침대 곁 테이블에 놓여 있던 책. 눈썰미가 좋은 사람이 아니라면 그냥 흘려보낼 수 있는 그 짧은 쇼트에도 알모도바르는 정성을 다했다. 버지니아 울프의 삶과 그녀의 『댈러웨이 부인』을 둘러싼 커닝햄의 작품은 결국 울프의 소설을 무대 위에 올려놓는다. 중요한 것은 울프의 자살이 아닌, 소설 속 인물 셉티무스의 죽음. 소설 속 주인공인 댈러웨이 부인이 잘 모르는 청년 셉티무스는 1차 세계대전 참전 용사로 전쟁 휴유증을 겪고 있다. 참호전으로 유명했던 1차 세계대전은 이렇게 카테리나의 발레 작품과 연결된다. 그 모르는 청년의 죽음이 묘하게도 무기력했던 댈러웨이 부인으로 하여금 삶의 의욕을 되찾게 해주는 인생의 아이러니. ‘모르는 이의 죽음도 나를 감소시킨다.’는 존 던(John Donne)의 시 구절을 비웃는 세상의 잔인함. 또는 아무도 아닌 이의 죽음이 새로운 활력으로 전환되는 오묘한 신비주의. 베니그노를 위한 진혼곡으로 마르코의 테이블에는 다른 책이 놓여 질 수 없었다. 

리디아와 마르코, 그리고 알리시아
  
베니그노는 뉴턴이나 아인시타인 등이 구축한 논리의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가시성의 세계 그 너머의 진실을 믿는 믿음의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는 뇌사 상태에 빠진 여인을 위해 그녀가 사랑하던 것들을 대리 경험시켜주었다. 베니그노 이외에는 아무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발레리나를 꿈꾸던 알리시아가 사랑한 것은 발레와 무성영화, 그리고 여행. 그는 그녀의 눈이 되어 발레공연과 무성영화를 보곤 했다. 그리고 그가 본 것들은 살아있는 언어가 되어 알리시아에게 전달되었다. 영화의 원제목인 ‘Hable con ella’는 ‘그녀와 이야기해 봐요’라는 의미로 영어 제목인 ‘그녀에게 이야기해 봐요(Talk to Her)’와는 미묘한 의미 차이가 있다. 베니그노는 ‘그녀에게’ 일방적으로 말을 건 게 아니다. 그는 죽어 있는 알리시아와 교감, 소통함으로써 ‘그녀와’ 이야기한 것이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방식을 유일한 친구 마르코에게 알려주었다. “여성의 뇌는 미스터리한 거예요. 특히 이렇게 아플 때는...”, “그들이 존재한다는 사실과 살아 있다는 사실, 중요한 존재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해요. 내 경험으로는 그게 유일한 치료법이죠.” 그러나 마르코는 리디아와 이야기하지 않았다. 의식 불명의 리디아에게 말을 하는 것은 그녀의 옛 애인 니노 발렌시아였다. 리디아는 처음부터 마르코의 여인이 아닌, 투우사의 연인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인생의 아이러니가 시작된다. 마법에 걸린 숲 속의 공주를 깨우기 위해서 왕자님은 언제나 문제들을 해결해야 하는 법. 알리시아를 깨우기 위해 발레공연과 무성영화, 그리고 여행은 잘 맞춰져야 하는 큐빅 같은 것이었다. 틈틈이 발레공연과 무성영화를 보고 알리시아에게 이야기하던 베니그노였지만, 그녀를 간호하기 위해, 곁에 머물며 그녀를 보살피기 위해 여행을 떠날 수는 없었다. 그러나 리디아로 인해 상심한 마르코는 짐을 꾸린다. 그는 본디 여행자였다. 그리고 엉뚱하게도 알리시아의 마법이 풀린다.
 
  
 
알모도바르는 <그녀에게>의 마지막 역시 피나 바우쉬의 작품으로 장식한다. ‘마수르카 포고’를 관람하기 위해 각자 공연장을 찾은 마르코와 알리시아. 죽은 리디아를 회상케 하는 장면을 보면서 눈물을 흘리는 마르코. ‘카페 뮐러’ 공연을 보며 우는 그를 발견했던 베니그노의 영혼은 이제 알리시아가 되어 ‘마수르카 포고’의 마르코를 목격한다. 베니그노가 그랬던 것처럼 마르코에게 주목하는 베니그노의 알테르에고(Alter ego) 알리시아. 

인터미션 다음의 공연은 생명력과 희망으로 충만하다. 탱고와 삼바, 포르투갈의 파두와 재즈 등이 어우러진 다채로운 춤과 음악은 삶의 행복과 환희를 표현하는데 적합하다. 여러 쌍의 남녀가 관능적인 음악에 맞춰 군무(群舞)를 추며 등장했다가 새로운 파트너를 찾는다. 뒤를 돌아보는 마르코. 미소 짓는 알리시아. 두 사람 사이에는 객석이 하나 비어있다. 그 자리에서 베니그노를 발견한 이는 이미 훌륭한 관객이다. 

  
 
* 사진 출처: 네이버 - 영화 - 그녀에게 - 포토


글: 정동섭
영화평론가이자 영화연구자. 현 전북대 스페인중남미학과 교수. 서울대 교류교수, 미국 노스캐롤라이나대학 초빙교수, 전북대 인문학연구소장 역임. 『돈 후안: 치명적인 유혹의 대명사』, 『20세기 스페인 시의 이해』등의 저서와 『바람의 그림자』, 『돈 후안 테노리오』, 『스페인 영화사』등의 번역서가 있음.

* 글 출처: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 르몽드 시네마 크리티크

http://www.ilemonde.com/news/articleList.html?sc_sub_section_code=S2N40&view_type=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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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자서성희

등록일2018-05-08

조회수7,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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