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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유랑] <사울의 아들> ㅡ '재현의 윤리'가 아닌 '기념과 기억'의 문제로, 더 나아가선 지금-여기로의 호명을 통해 '삶 변화의 정치성'에까지 옮아가기

 
 

"정말로 재현의 윤리가 문제일까?"


많은 이들이 '재현의 윤리'를 본 영화의 중추적 요소로 바라본다. 논리의 개략적인 핵심은 이러하다. 이를테면 비극적인 참상을 ‘다소 절제된 미감’을 통해 포착하고 그리려는 의도적인 기획이 꽤나 돋보인단 것이다. 그 세부는 다음과도 같다. 분명 어두운 진실에서 피어난 숙연함의 감각을 적절한 수준에서 환기해내었지만, 그와 동시에 분위기에 불필요하게 매몰되지 않도록 과잉하는 정서를 차분히 통제하고 가라앉힘으로써, 결과적으론 윤리적-반성적 의식의 촉구를 효과적으로 꾀하는 데에 성공했다는 해설이리라. 이와 같은 입장에 기대어 선 이들이 주로 동원하는 단서들은 이러하다. 인물들에게 시선을 과도히 드리움으로써 감성적 몰입을 촉발케 하는 클로즈업/전경화의 기법을 가급적이면 지양했다는 점, 그 대신 가능하다면 마치 배경을 묘사하듯이 혹은 멀찍이서 지켜본다거나 한 발 거리를 둔 채 뒤를 밟는 자의 위치에서 존재들의 움직임을 좇아가려 했다는 점이 강하게 부각될 테다. 같은 맥락에서, 유난히 중심인물이 등을 드러내 보이는 쇼트가 많다는 것 역시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가 될 터이다. 반드시 장면 속에 부각되어야 할 인사들, 환언하자면 서사를 주도하는 능동적 기능을 담당하는 존재들이 아닌 한에야 대개는 ‘흐릿한 모습으로 처리되어’ 묘사된 지점 또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한 발 나아간다면, 여하의 오브제들이 리얼리티의 감각을 상실토록 위협받지 않는 범위 내에서라면 꽤나 절제된 모습으로 표현되고 있단 점 역시 주목할 만한 참조점이 될 테다. 가령, 고통스레 죽어갔던 존재들의 신랄한 몸부림을 현상해내는 대신 바닥에 뱉어진 토사물을 힐끗 보여준다든지, 살점이 찢겨나가고 내장이 쏟아져 내리며 골수가 터져 나가는 시각적 자극요소들을 될 수 있는 한 은폐하는 대신에 총성과 단말마의 비명을 들려준다든지 하는 식이다. 아마도 상기의 요소들에 착목하고 열광하는 사람들이라면 영화가 VR로 재구됐다는 소식을 접했을 당시 심심한 우려의 감상을 품었으리라. 의도된 제한을 통해서 신뢰롭게 드러날 윤리적 미덕을 범했다는 까닭에서 말이다. 하지만, 정말로 일부 평자들의 주장처럼 이 영화에서 '절제된 표현'이란 게 그다지도 중요한가? 설령 그렇다 인정한다 한들, 소위 거리두기의 재현방식이란 게 정말 그들이 믿는 바와 같이 윤리감각을 일깨우는 독특한 이미지 현상의 방식으로 복무할 수 있는 걸까?
 
  
▲ <거리두기를 통해 인물을 그리는 방식>        ▲<바닥의 토사물을 닦으며 시체 사이를 누빔>
"절제된 것으로부터의 과잉"

흔히 포르노그라피에 대해선 외설적이라는 꼬리표가 따라 붙는다. 그리고 그와는 정반대로, 에로티시즘에 대해선 예술적이라는 수사어가 '비교적' 큰 무리 없이 동반되곤 한다. 이들 양자의 가장 큰 차이는 정서와 의미의 능동적인 생산가능성을 담보하느냐의 문제라고 말할 수 있을 테다. 생산이라니? 조금 더 자세한 해설이 동반될 필요가 있겠다. 포르노가 전면적인 현시 그 자체로만 종결되는 (그래서 폭력의 압도적인 마주침을 현상해내는) 것과 달리, 에로의 방점은 도리어 일정부분의 공백을 느슨하게 남겨두는 데 찍힌다. '모든 걸 다 보여주진 않겠다는' 나름대로의 논리를 끝까지 고집한달까. 그럼으로써 이 빈 공간의 의미를 상상력을 동원해 벌충할 여지를 확보해낸다. (1) 포르노가 단지 개입의 여지가 차단된 수동적인 감각의 덩어리를 눈앞에 던져놓는 것과는 달리 말이다. 번역하자면 관객을 예술경험의 주체의 위치에 올려놓는 미더운 가능조건이 구비된 셈이다. 그렇다면, 즈음하여 한 가지 질문을 던져봄직도 하다. 대답하기가 결코 어렵지 않으리라. 포르노그라피와 에로티시즘, 혹은 전적인 표현과 절제된 표현 중 과연 어떤 것이 ‘더 강력하고 지속적인’ 정서효과를 수반해낼까? 필경 후자일 테다. 전자가 순간적인 정념의 과잉을 촉발시킨 후 온데간데없이 사그라지는 반면, 후자는 관객들로 하여금 자신의 시각적 무의식의 틈새공간을 열어놓게 함으로써 계속적인 개입과 의미생산의 여지를 확보토록 견인하는 까닭이다. 그러니, 관객의 감각-인지적 능력에 구속의 사슬을 매어놓음으로써 역사적 진실을 한 층 더 섬세히 조명하겠단 기획이란 실상 실패로 돌아가게 되고야 만다.

전혀 어려운 이야기가 아니다. 가령 쓰러지고 뒤틀리는 수용자들의 신체를 보여주는 것보다 점액질로 끈적이는 누군가의 토사물을 비춰주는 것이, 그리고 굳게 잠긴 문을 마구 두들기는 리듬감 없고 절박한 소음이라든지, 혹 두꺼운 벽을 마구 긁어대는 손톱의 비명을 들려주는 것이야말로 도리어 지옥에 대한 더 강한 이미지를 각인하고 지속적으로 환기하는 계기로 작용할 수 있단 뜻이다. 관객의 내면에 알레고리적인 연쇄폭발작용을 일으킨달까? 예상과는 달리 절제된 표현이야말로 폭발적인 상상력과 사유를 촉발하는 동력이 된다는 해설일 테다. 역설적이지만, 물리적 거리가 멀어지는 만큼 심리적-정서적 거리는 더욱이나 가까워지게 된다. 사실이 그러할진대 어떻게 거리두기의 재현방식이 감정에의 몰입을 제한하고 또 관객이 발산하는 정신의 에너지를 가로막아 옭아맴으로써, 오롯이 윤리적 인식이란 좁은 길로 걸어가도록 견인하는 방편이 될 수 있단 뜻인가? 좀처럼 어려운 일일 게다. 영화의 무대가 되는 아우슈비츠로부터 살아 돌아온 작가 프리모 레비가 남긴 자전적 기록의 서문에서, 그는 자신의 저술의도를 가감 없이 명확하게 밝힌 바 있다. (2) 스스로가 경험한 비극과 폭력에 대한 분노표출이나 고발의 의도가 전혀 없음을, 오히려 인간의 본질적 속성에 대한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연구 자료를 인류에 제공하기 위한 목적에서 책을 기술하였노라고 말이다. 이는 윤리학(인간학)적 고찰이라는 다분히 학문적 의도를 확실히 염두에 두고 있었단 뜻으로 번역 가능하리라.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 저술 본문의 내용은 쉽사리 거리를 두고 들여다보기 어려울 만큼이나 지독한 참상에 대한 생생한 묘사들로 그득하다. 어째서일까. 의도와 표현 사이에 메우기 어려운 간극이 도사리고 있는 건 아닌가? 어쩌면 일부러 표현을 제한하고 진술에 제동을 거는 편이, 도리어 과도한 상상을 개입시킴으로써 본인이 의도한 바로부터 동떨어진 결론을 낳게 만들 것임을 인지하고 있었던 까닭 아니겠는가-.

아무렴 전혀 다른 방식과 틀거지를 동원하여 고찰해본다고 해도, 매한가지의 결론을 얻을 수가 있다. 지극히 당연하게도 ‘윤리란 공동적‘이다. 그것은 개체적 인간이 자신의 존재론적 경계지대를 넘어서서 타인들의 감정과 생각을 적극적으로 공유할 수 있을 때에야, 비로소 최소한의 성립조건을 확보하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윤리적이기 위해선 자기 몸피에 갇힌 내폐적인 고립의 상태를 벗어나 타자에 대한 풍부한 경험 속으로 들어가야만 한다는 뜻이다. (3) 타인의 체온을 보다 더 깊이 감지할수록 공동적 인식과 감각 지평의 두께는 시나브로 두터워진다. 진실이 그러하다면 결론은 분명하다. 의도적으로 영화적 진술의 제약을 고수함으로써 정서적 공감의 제어를 추구하려는 재현의 방식이, 그렇지 않은 것에 비해 윤리적인 가능성을 한층 더 효과적으로 제공해 줄 수 있으리란 해명은 좀처럼 동의하기 어려운 것이 되고야 말 테다. 하지만 재현의 윤리도 아니라면, 그렇담 도대체 영화 『사울의 아들』 속에서 과연 우리는 무엇을 마주해야만 한단 뜻일까?

"기념, 애도와 멜랑콜리 사이에서 줄을 타다"

누구도 부인하기 어려운 사실이 하나 있다. 적어도 본 영화가 특정한 문제적 사건의 '기념'을 목적하는, 다분히 기록적인 성격의 영화라는 점 말이다. 물론 마땅히 기념할만한 것을 기록하는 건 필요하다. 특별히 역사적 사건에 대한 기념은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독일의 경우 이미 오래 전부터 소위 '홀로코스트 법'이라는 것을 제정해두고 있는데, 이는 홀로코스트를 부인하는 공적언행에 대한 유죄선언 및 그에 대한 실제적인 처벌의 집행을 통하여 마땅히 기념되어야 할 것이 훼방 받지 않도록 보존하겠다는 맥락의 제도라고 말할 수 있겠다. 기념의 무게감을 시사하는 대표 격 사례라고 말하는 데에 무리가 없을 테다. 그러나 사실 기념과 엮어진 논의지형에서 좀 더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 사안은 무엇(what)을 기념하느냐보다는 어떻게(how) 기념할 것이냐의 문제라고 할 수가 있다. 기념은 그 취해진 방식에 따라 충분히 그릇된 목적에 동원된다거나 심지어는 적극적으로 봉사하게 될 여지를 잠재적으로 배태하고 있는 까닭이다. 이해를 돕고자 좀 극단적인 사례를 제시해보도록 하겠다. 가령 역사의 지면 가운데 커다란 문제를 일으킨 가해자에게 기념이란, 때때로 배상을 동원한 반성이라는 보여주기 식의 실천을 통해 타인들의 용납과 인정을 얻어냄으로써, 스스로의 과를 존재자들의 기억과 뇌리에서 점차적으로 소거하고, 반면 자신의 공과 긍정적 면을 상대적으로 부각하려는 목적에 부역하게 될 수도 있다. 폭력을 휘두른 자의 손에 의해 지어진 멋들어진 기념관이나 조형물 따위를 적어도 한 번 즈음은 의심해 볼 필요가 있는 셈이다. 물론, 이런 식의 행위들이 ‘기념의 본질을 뿌리부터 훼손하는’ 일이 될 것임엔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겠다.
본디 기념의 핵심은, 말하자면 ‘기념하는 주체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점에 놓여 있다. 그건 철저히 ‘기념의 대상을 위한’ 것이다. 대상을 위한 것이라니? 좀 더 적극적인 표현으로 바꾸어 볼 수도 있을 테다. 이를테면 기념의 대상을 잊지 않고 계속해서 간직하며 또 떠올리겠노라는 멜랑콜리적인 선언이라 해설한다면야 꽤 옳으리라. 만일 기념의 본질을 잃어버리게 될 경우, 그것은 손쉬운 애도의 행위로 전락하게 되고야 만다. 여기서 애도라는 단어는 다음과도 같이 번역될 수가 있다. 기념대상을 위한 것이 아니며 도리어 순전히 행동의 주체를 위한, 겉으론 기념의 껍데기를 덮어쓰고 있지만 실상은 대상을 망각하기 위한 도구에 불과한 것이라고 말이다. 좀 더 구체적으론, 대상을 의식 속에서 떠나보냄으로써 더 이상 무엇으로부터도 훼방 받지 않는 편리한 삶을 거든하게 살아 누리겠다는 '속류적인 제의행위'의 실천적 수단이라 말해보는 것도 가능한 일이다. (4) 이런 기만적 기념행위, 내지는 기념의 탈을 쓴 폭력의 연장은 철저히 배격돼야 할 필요가 있다.

허나, 더 심각한 문제가 하나 있음을 또한 기억해야만 하리라. 실상 기념이 본질을 망각한 채로 오염 앞에 노출되기가 너무도 쉽다는 사실 말이다. 어렵게 생각할 이유가 없다. 사람의 속을 면밀히 들여다 볼 수 없는 한에야, 드러난 외양만으론 기념행위의 은밀한 의도를 헤아린다거나 그 선악 간의 동기를 분별하는 일조차 쉽지 않으리란 점을 떠올려본다면, 대답은 지극히 분명해진다. 겉으론 좀체 식별이 어렵단 뜻이다. 설령 혐의가 유효하다고 한들 유죄를 입증하는 건 대단히 까다롭다. 그렇담 구태여 수고를 무릅쓰고서 기념의 순수성을 따르고 지탱해야 할 이유도 없는 셈이다. 내게 이익이 되지 않는 일을 위해 굳이 땀 흘릴 까닭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뿐만이 아니다. 만에 하나, 기념의 주체도 대상도 아닌 어떤 거대한 제3 세력의 개입에 의해 그 의미가 편집되고 윤색될 여지 역시 부인할 순 없다. 역사성과 객관성을 결코 등위선상에 놓을 수 없다는 사실만 떠올려 보아도 이점을 이해할 수 있을 테다. 만일 그럼에도 『사울의 아들』이 진정으로 '기념'의 영화라고 불리기에 합당하다는 명제가 성립한다면, 분명 그 기념이 온전히 기념되기 위한 어떤 '투쟁의 흔적들'을 영화 텍스트가 머금고 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당연하게도 바로 그런 역동적 지점들을 발굴하려는 노력이야말로, 본 영화가 담지한 최선의 미덕과 가치에 한 발 가까이 다가서려는 몸부림이라 말할 수 있으리라-.

"이중-기념, 부패를 막는 영화적 투쟁의 장치"

무엇에 대한 매장 역시 그 대상을 기념하는 행위가 된다. 구태여 특정한 장소를 지목하고 그 위치에 대상을 묻음으로써 삶의 흔적을 기록해 두겠다는 건, 그저 단순히 대상을 방기한다거나 대상과 엮인 불편한 감정들을 일소에 편리하게 갈음해버리겠다는 태도와는 분명하게 구분된다. 본 영화의 지면 속에도 이 매장의 행위들이 등장한다. 이를테면 영화는 기념의 행위를 생산적으로 활용해낸다. 다시 말해 기념으로서의 영화 속에 또 다른 기념의 양식이 매설돼 있는 셈이다. 소위 이러한 '이중-기념' 곧 기념 속의 기념이란 영화의 독특한 기법이 특별한 효력을 발산하고 있을 것임을 예측해보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다. 과연 어떤 효과를 머금고 있다는 뜻일까? 우선은 그 효과란 게 ‘기념으로서 영화가 온전히 기념으로 위치할 수’ 있도록 모종의 역할을 수행해내고 있으리란 잠정적인 진단을 내려두고서 논의를 전개해 보는 편이 어떨까? 『사울의 아들』에는 두 번의 걸친 매장의 사건이 나타난다. 이들 각각에 바투 다가서서 그 낱낱의 특성들을 좀 더 분명히 살펴본다면, 정말로 이중의 기념이 과연 영화 속에서 어떤 생산적 에너지를 발산하고 있는지를 실제적으로 확인하고 또 검증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첫 번째 매장은 어떤 소년의 시신을 묻는 (실제로 뜻을 이루진 못하지만) 행위와 관계된다. 좀 더 정확히는 사울(게자 뢰리히 분)이 자신의 아들이라 ‘끈덕지게 주장하는’ 소년의 주검이 곧 기념할 대상이 되는 셈이다. 다른 무엇보다 여기에선 아들이 아니라 아들이라고 '믿었다는‘ 사실을 확실히 해야만 한다. 자칫하면 휴머니즘의 함정에 빠져들어 길을 잃어버리기 쉬운 까닭에, 조금은 조심할 필요가 있다는 뜻이랄까. 사울은 유대교의 장례절차에 따라 (종교적 맥락에서 영원한 안식의 공간인 아브라함의 곁으로 망자를 인도해 들이기 위하여) 소년의 주검을 매장하고자 당분간이나마 유예된 (수용소 부역자로 일하고 있기에 적어도 일정 기간 동안은 쓸모 있는 존재였다) 자신의 목숨을 스스로 사지에 내던지는 위기를 무릅쓰기도 한다. 장례의식을 집행할 종교인(랍비)을 기약된 죽음의 늪지로부터 건져 올리기 위해서였다. 뿐만 아니다. 심지어는 고락을 함께하는 동료들마저 전혀 개의치 않고서, 그들의 생명을 위기상황 속으로 아랑곳없이 내몰기도 한다.

사울의 집착은 실로 광기어린 것이었다. 정말로 자신의 아들임이 분명했더라면 이처럼 맹목적인 헌신이 혹 부성애라는 휴머니즘의 알껍데기를 정당하게 뒤집어쓸 수 있었을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텍스트는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영화의 말미에서, 가까스로 수용소를 탈출한 사울은 자신을 추적자들에게 팔아넘길 (자의였는지 혹 스스로가 살아남기 위한 불가항력적 선택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소년 '밀정'에게도 근사한 성격의 감정을 보인다. 이는 '너에게는 본래 아들이 없다'는 동료들의 증언보다도 훨씬 더 충격적이다. 그 기괴한 애착의 대상이 실상 어느 누구가 되었든지 전혀 상관이 없었으리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지시해주는 까닭이다. 말하자면 단순히 주검이 아들이 맞는지 아닌지의 여부 같은 건 본디부터 전혀 중요한 일이 아니었던 셈이다. 만약 여태껏 사울의 휴머니즘적 면면에 사로잡힌바 된 관람객이라면 갑작스런 충격을 안아 들여야만 하리라. 필시 일말의 해석의 여지와 가능성이 상실돼버린 텅 빈 공간으로 내던져진 경험을 하고야 말 테다. 앞으로도 뒤로도 빠져나갈 탈출구를 전혀 찾을 수 없는(aporia) 상태에 직면케 되는 것이다. (5) 그렇담, 어떻게 해야 할까? 이젠 전혀 다른 각도에서 살필 필요성이 요청된다. 이편이 훨씬 더 자연스럽다. 주검의 정체성으로부터 눈을 돌리고 빠져나와, 매장 그 자체의 문제로 한 걸음 내딛어야 하리란 뜻이다. 반복하건대 기본적으로 매장은 기념의 행위다. 그러할진대 전혀 '기념할 이유가 없는 것'을 기념한다는 게 지시하는 바는 과연 뭘까? 두 번째 매장의 사건을 아울러 살펴본다면 그 의미에 조금 더 분명하게 다가설 수 있으리라고 확신한다. 혹 먼저 간단히 일러두자면, ‘사진에 대한 매장’ 정도가 적절할 테다.
 
  
▲ <사울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소년>            ▲<아이를 보고 감정을 감추기 어려운 사울>
실제 텍스트의 배경과 동일한 장소(아우슈비츠)에서 당시의 참상을 기록한 수고들과 더불어 '몇 장의 사진'이 발견된 바 있다. 그처럼 영화 속에도 사진을 찍고 기록물들과 함께 그것을 매장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본 영화에 대한 비평서 『어둠에서 벗어나기』를 저술한 프랑스의 어느 평론가는 『모든 것을 무릅쓴 이미지들 : 아우슈비츠에서 온 네 장의 사진』이라는 좀 더 논쟁적인 저작을 통해서 본격적으로 아우슈비츠 이미지에 대한 미학-정치학적 해설을 자세히 풀어낸 바 있다. (6) 그러나, 본 글에서 좀 더 집중하고 싶은 것은 전혀 다른 측면이다. 위의 평자처럼 사진 이미지에 대한 복잡하고 관념적인 해제를 덧붙이는 게 아니라, 다시 텍스트의 지면 속으로 회귀하여 영화 속에 현시된 '매장의 행위 자체'에 상점을 찍겠다는 뜻이다. 영화 속에서 사울이 기지를 발휘하여 가까스로 건져낸 수용소의 기록사진은 과연 어떤 모습인가? 자욱한 연기로 인해 '무엇 하나 분간해내기' 어렵다. 수용자들이 겪은 뼈아픈 고통도 나치의 잔학함과 폭력성도 이 사진을 통해선 전혀 식별되지 않는다. 심지어는 사진의 무대가 공공 운동장인지, 공장의 작업부지인지, 비참의 절멸수용소인지조차도 좀체 알 수가 없다. 도대체 이런 것을 왜 구태여 기록으로 남기고 또 그것도 모자라 땅에다 묻어야만 할까. 다시 한 번 반복해서 동일한 질문을 던져봄직하다. 어째서 기념할 이유가 없는 것을 기념해야만 하는가?
 
  
▲ <사진에 담긴 분간할 수 없는 풍경>        ▲<기록하지 않아도 될 사진을 남기는 순간>
대답은 명확하다. 행위의 필연적인 이유란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이처럼 무의미한, 또는 설명되지 않는 우연성의 돌발적인 출몰이야말로 영화가 품은 가치를 한층 더 도드라지게 해주는 요소로 복무한다. 좀 쉽게 번역하자면, 영화가 스스로를 기념다운 기념으로 지켜내고 지탱해낼 수 있도록 도와줄 미더운 방패막이가 되어준다는 뜻이다. (즈음하여 기념이라는 것이 본시 속류적인 것으로 전락하기 쉽다는 사실을 다시 상기해 볼 필요가 있을 테다) 무엇보다도 해석불가능성을 머금은 것 곧 해명되지 않는 이물감의 틈입은 영화의 복합적 의미가 어느 한쪽을 향해 가지런히 갈무리되고 포섭되는 폭력을 가로막고 차단한다. 그리곤 성기게 벌어진 틈 사이로 의혹의 시선을 기입하며, 더불어 성찰적인 사유의 개입과 간여를 계속해서 요청해온다. 바로 이 지점이 핵심이다. 비로소 영화를 제 입맛과 구색에 따라 물들이고 오염시키려는 기획이 실패로 돌아가게 된다는 뜻이다. 환언하자면 영화(기념물) 속에 해석되지 않는 잔여물을 매장(기념 속에서의 기념)하는 시도는 마땅히 기억해야 할 만한 것들이 결코 스리슬쩍 지나쳐 잊혀져버리지 않도록, 그저 망각된 채로 흘러가버리지 않도록 견고하게 붙들어낸다. 그것들이 관람객의 의식 속에 깊은 흔적으로 온존하게 남아 계속해서 '간질임'을 유발할 수 있게 말이다. (7) 기억의 반복과 재생을 일구어내는 미더움이랄까? 그렇다면 이 기묘한 영화의 매장을 '불필요하기에-필요한' 것으로 재 정돈해보는 일도 가능하리라. 혹 지나치게 범박한 용어설정이란 비판을 감수한다면 '지속-기억의 장치'라는 언어를 부여해봄직도 할 테다.

"기억을 움키고 붙든다는 것의 의미"  

‘계속해서 기억한다는’ 것은 기념이 순수성을 잃고 오물을 덮어쓰지 못하도록 이끄는 저항의 계기로 충실하게 복무한다. 마치 물길에 나뭇잎을 흘려보내듯, 그저 진실을 잊어버리고 또한 잃어버리기만을 학수고대하는 어두운 그림자 속에 한 점 빛을 기입하고, 나아가 더 깊숙이 아로새겨 놓는 행위라고 비유해볼 수 있을 테다. 이 빛을 끈덕지게 놓치지 않고서 눈을 들어 꾸준히 바라보게 될 때, 스멀스멀 스며와 반성적 지각을 잠식하고 흩어 놓으려는 오염에 자기를 빼앗기지 않을 수 있으며, 본시 기념해야만 할 것이 무엇인지를 의심치 않고 굳게 붙들 수 있게 된다. 칠흑 같은 동굴을 끝까지 돌파하도록 기댈, 쉬이 꺼지지 않는 등불을 움킨 셈이다.

또한 ‘무엇인가를 기억해낸다는’ 건 하나의 역사와 또 다른 역사가, 과거의 세계와 현재의 세계가 겹쳐지는 위상공간을 예비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이처럼 이질적인 시공간들이 촘촘히 얽어지는 교차국면을 바라볼 때, 예기치 않았던 신비로운 현상이 발생한다. 단지 과거를 되짚어 호명해 들이는 것뿐만 아니라, 지금여기의 세계가 과연 어떤 모습을 취하고 있는지 역시도 돌이켜 사유할 수가 있게 된단 뜻이다. 기념하는 사건의 무대와 현사실적인 삶의 토대가 어떻게 같고 다른지를 살핀다는 건, 단순한 비교와 대조의 의미를 지시하지 않는다. 여전히 횡단하고 극복하여야 할 것으로 남겨진 실정적인 문제들을 감지하고 간파하며, 더 나아가선 변화의 바람을 일구어낼 혁명적 실천의 걸음들을 내딛도록 존재자들을 추동한다고 본다면 옳을 테다.

"무엇을 돌이켜 기억해야 할까?"

이처럼 영화 『사울의 아들』은 지속-기억의 장치를 가동시킴으로써 마땅히 기념하여야 할 것이 온전히 기념되도록 이끌 뿐만 아니라, 이질적인 시공간 속으로 소환된 기억과의 격렬한 부대낌을 통해 현실 가운데 기념의 의미를 다시 되새기고, 또 새로운 삶의 형태를 지향하도록 추동하는 정치적 욕구를 촉발시킨다. 정말로 옳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상찬 받을 만하다. 하지만 영화의 가능성을 온전하게 논하겠다면, 마지막 남은 진액 한 방울에 대한 짙은 갈증에 허덕이고 있다면, 비단 여기에서만 그쳐선 안 될 테다. 좀 더 구체적일 필요가 있다. 이를테면 영화적 경험을 통해 지금-여기 우리의 시공간을 찢고 침습해 온 영화의 돌파력이, 과연 21세기 한국 사회 가운데 어떤 종류의 에너지를 흘려보내고 있는지를 예리하게 벼려진 비평적 감식안을 통하여 헤아려 볼 필요가 요청된단 뜻이다. 조금 달리 말해볼까? 글을 닫기 전에 마지막으로 되묻고 싶은 한 가지가 있다. 혹시 우리 사회에서 ‘지속-기억의 장치로 삼아’ 기억하여야 할 만한 것이 어디에 있을까, 그렇담 그건 과연 무엇이란 이름으로 불리고 있을까?

구태여 복잡하게 생각할 이유란 없다. 정력을 소진하며 그리 멀리까지 거슬러 오르지 않더라도, 한 가지 가능한 대답을 찾아내고 길어내는 데엔 충분할 것이기 (그 밖의 남은 부분들은 독자들의 몫으로 남긴다) 때문이다. 일 년이 조금 더 흐른 시점의 지난겨울, 추위를 무릅쓰고 전국의 광장에 모인 허다한 무리들이 있었다. 자신에게 직접적인 이익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의 시간과 물질과 힘을 아낌없이 낭비하던 지극히 비상식적인 움직임들은 좀처럼 이해하기가 어려운 성격을 품고 있었다. 허나, 이해되지 않는 게 그저 그 뿐만은 아니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그들은 공통적이고 단일한 슬로건을 가진 자들이 결코 아니었다. 대학생 연대, 여성주의 모임, 노동자 총회를 위시하여 '아재개그 연구회'라는 유쾌한 기치를 내걸기까지 하며 광장으로 스며든 이들의 다성적인 목소리는, 그네들의 손아귀로부터 여기저기 피워 올린 색색의 미광들이 뿜어내는 무한의 동세 그러니까 산발 단속적으로 그렁대는 붉고 노란 파도의 꿀렁임과도 같이, 무어라고 개념 짓고 규정하기 까다로운 모습이었다. 분명히 다수적인 동력을 머금고 있으면서도 하나의 움직임을 지향하고 있었달까? 그건 도저히 논리적인 도식 안에 포섭하고 소명하는 게 불가능하지만, 그럼에도 그 존재를 부인할 수 없을 만치 강렬한 에너지를 머금은 것이었다. (8) 마치 유령(사실 유령이란 말 대신 영화의 중심인물인 사울의 이름을 대입시킬 수도 있다)과도 같이 말이다. (9) 하지만, 어떤가? 지속-기억 장치가 되기에 차고 넘치는 체험을 공유했던 우리들이 과연 그것을 지금여기의 무대 가운데 적실하게 호명해 들이고 있으며, 또 충분하게 되새겨 기념하고 있는지를 좀처럼 확신할 수 없다. 정녕 지난겨울의 광장은 고유한 리듬과 호흡을 유지한 채로 생생하게 살아 선연히 제 존재감을 발하고 있는가? 기실 꽤나 불투명하다. 어쩌면 이미-벌써 간단없는 역사의 뒤안길로 흐르고 흘러 그 윤곽을 흐릿하게 잃어버리게 된 것일는지도 모른다. (그렇담 그저 서글픈 시선으로 가만히 머물러 있어선 안 될 터이다) 이처럼 설령 다소 쓰라린 감각을 끌어안는 고통을 감내해야 할 순 있을지언정 감긴 눈을 열어 세계에 대한 성찰적 지각과 변화의 계기를 마주토록 견인해준단 점이야말로, 확실히 영화 『사울의 아들』이 우리에게 안겨다 줄 수 있는 최대한의 기여라고 말해봄직 하지 않겠는가?


[글 읽기를 위한 참조점들]

(1) 에로티즘과 포르노그라피를 바라보는 입장과 관점은 정말 다양해서, 단순히 한 두 저작만을 소개하는 수준에선 그 섬세한 논의지형을 파악하기가 불가능하리만치 까다롭다. 그렇다고 해서 여기에서 국내외에서 저술된 굵직한 전문서적들을 낱낱이 일별할 순 없다. 지면의 한계도 있을 뿐더러, 또 첨예한 철학적 사고실험 속으로 뛰어드는 일은 자연 현실로부터의 단절감을 빚어내기에, 비평의 본질로부터도 꽤나 멀어지게 되는 까닭이다. 대신 (필요하다면) 이성복의 예술론 『무한화서』에 소개된 몇 줄짜리 짤막한 단락을 여러 번 음미해서 곱씹어 보는 것만으로도, 이 글에서 제시하고 있는 두 개념의 결 차이를 어느 정도 이해하고 
감각하는 데엔 충분한 보탬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71쪽 참조)

(2) 프리모 레비의 저작 『이것이 인간인가』를 의미한다. 

(3) 마사 누스바움의 저술 『시적 정의』 중에서도, 특히 13-17 페이지를 살펴본다면 그럭저럭 참조가 될 것이다.

(4) 우울(멜랑콜리)와 애도의 관계에 대한 이 글의 견해는 자끄 라깡과 슬라보에 지젝, 발터 벤야민, 조르조 아감벤의 저작들에 대한 입체적인 비교연구를 통해 얻은 필자 나름대로의 정리와 해설에 기대고 있다. 다만 개략적인 이해를 위해서라면, 기중에서 아감벤의 『행간』 1부(특히 56-59쪽)를 참조하길 권한다. 애도와 멜랑콜리의 차이를 대략적으로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5) 아포리아(aporia)의 의미는 '출구 없음' 이다. 말하자면 교착의 상태를 지시하는 표현이다. 더 손쉬운 언어를 동원한다면 (물론 아주 정확하진 않다) 진퇴양난이라는 사자성어를 가져올 수도 있겠다. 모호와 실패라는 단어를 고리로 연결해본다면, 그 뜻을 조금 더 선명하게 이해할 수 있을 테다.
   
(6) 조르주 디디-위베르만을 지칭한다.

(7) 이와 같은 '간질임'은 정신분석학적 의미에서 실재의 징후로 설명 가능하다.
  
(8) 정동(affect)에 대한 논의와 밀접히 관계된다. 정동에 적실하게 다가서기 위해서는 바루흐 스피노자와 질 들뢰즈의 저술들, 또한 브라이언 마수미를 위시한 소위 정동적 전회론자들(affective-turnists)의 논문을 필히 참조해야만 한다. 특히 이들 정동적 전회론자들의 소논문 모음집은 국내에 『정동이론』이란 제목으로 번역돼 (번역의 질도 그다지 나쁘지 않다)있다. 뿐만 아니라, 정동에 대한 사유를 좀 더 예각화하기 위해서는 안토니오 네그리와 빠올로 비르노 등속의 인사들을 포함하는 자율주의 그룹의 책들, 더 나아가서는 앞서 소개한 디디-위베르만 등 다양한 논자들의 저작을 함께 병행하여 읽을 필요 역시 요청된다. 허나, 전공자가 아닌 한에야 구태여 복잡한 일에 몰두할 필요는 없는 일이다. 대신, 스피노자에 대한 해석에서 한 두어 가지 중요한 오류를 수정해야 할 필요가 있지만 (이는 박사논문을 통해서 바로잡을 예정이다), 본격적인 정동론에 해당하는 필자의 석사논문에서 '1장 2절'과 '1장 3절' 그리고 말미의 '보유'를 참조한다면, 정동의 문법과 속성을 나름대로 이해하는데 적절한 도움을 얻을 수 있으리라고 확신한다. 물론, 인문학의 범주를 벗어난 포괄적 정동이해에까지 나아가기 위해서라면 트라우마, 신경생리학, 뇌-인지과학, 솜-에스테틱(몸미학),진화심리학, 기억과 재생의 문제에 대해서까지 모두 일별해야 함을 덧붙여두도록 하겠다.

(9) 영화에서 구태여 랍비를 찾아 장례의식을 부탁하려는 점에서 미루어 보건대, 헝가리인 사울은 유대인이다. 유대인이란 말은 이중의 의미를 갖는다. 작게는 이스라엘 민족을 뜻하며, 확장된 의미에선 (할례를 받고 모세 율법인 토라를 받아) 유대교에 편입된 사람을 지시하는 표현이기도 하다. 그 어느 쪽에서건, 기본적으로 유대교 전통을 가진 이들에게 사울이란 이름은 구약성서의 사울왕을 (이들은 신약성서를 인정하기 않는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표상한다. 사울왕은 분명 왕직을 박탈당하고 유기되었지만, 애초에 신의 손길이 닿은 자(기름부음 받은 자)라는 이유로 인해 그 누구도 감히 해할 수 없는 존재인 것 역시 사실이다. 비천과 존귀, 또는 없음과 있음의 속성을 동시에 지닌 개념화 할 수 없는 '예외상태’의 존재라고 정돈해볼 수 있겠다. 아우슬랜더(Ausländer) 역시 이방인, 나그네, 외국인 등 을 지시하는 표현이다. 여기 머물고 있지만 소속되지 않은, 국민으로 계수되지 않는, 있지만 없는 것으로 취급되는 존재를 지칭한다고 말할 수 있겠다. 가볍게 여기기엔 의미심장한 의미를 머금고 있는 이름인 셈이다.


글·남유랑

평론가. 2017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미술평론 부문 당선 및 2017년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에서 신인평론상을 수상하며 등단했다. 현재 연세대학교 일반대학원에서 비교문학을 전공하고 있다. 다른 영역들과는 달리 '과연 비평이 무엇을 할 수 있으며 또 무엇을 감당해야만 하는가?'라는 의문에 답하려고 늘 고민하는 중이다. 요컨대 비평의 비평다움 내지는 비평의 고유한 위치에 대한 문제의식이 삶의 중요한 화두다. 더불어 정치철학적 거대담론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연대적 구원과 대안적 혁명의 가능조건으로서의 예술’에 관해 치열히 사유하는 노정에 있다.

* 글 출처: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 르몽드 시네마 크리티크

http://www.ilemonde.com/news/articleList.html?sc_sub_section_code=S2N40&view_type=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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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자서성희

등록일2018-0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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