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을 ‘오늘’로 바꾸는 죄책감
오늘이다. 도무지 명확하게 기억을 해낼 수 없는 오늘이다. 연기가 피어올랐고, 얼굴에 아찔한 화기가 차오른 순간 지척에서 아는 목소리가 비명으로 변했다. 누군가는 창문을 향해 몸을 던졌고, 누군가는 건물에 매달려 불을 피했으며, 누군가는 웅크린 채 연기를 마셨다. 오늘이다. 나는 살아남은 오늘이며 나와 함께하던 이는 살지 못한 오늘이다. 어제도 내일도, 사건 중에도, 그 후에도 그들에게는 그 참담했던 오늘만이 반복된다. 다큐멘터리 <공동정범>(2018, 김일란‧이혁상)은 도무지 놓을 수 없던 ‘오늘’을 반추하며 살아가는 이들의 외로운 생존을 그린다.
9년 전 오늘(2009년 1월 20일) 도시환경정비사업이라는 이름으로 삶의 터전을 잃게 된 철거민들은 아침이 채 밝아오기도 전, 남일당 건물 옥상 위의 망루에 올랐다. 굳건한 듯 보였지만 실상은 약한 골격으로 철거민들의 몸을 가려주는 정도에 머무르던 망루는 철거민들을 ‘격렬한 진군’이라 부르며 망루의 설치와 그곳으로의 진입을 방해하는 경찰의 물대포에 쉽게 출렁였다. 긴 대치를 이어가던 중 망루에서는 연기와 불길이 피어올랐고, 철거민 5명과 경찰특공대원 1명이 사망했다. 거센 물길 사이에서 불길에 죽어간 사람들. 이 참사의 아이러니는 애초에 삶으로서 고통스러워하던 그들의 하루하루, 담담한 이해, 그 속에서 불쑥 치닫던 감정,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얼굴을 맞대어야만 하는 설명 불가능한 상황들을 담고 있었는지 모른다. <공동정범>은 바로 이 불가능한 상황에 다가선다. <공동정범>은 단순하지 않은 시선으로, 조금은 당혹스럽기까지 한 순간까지도 고스란히 담아내면서 우리에게 수많은 질문을 쏟아낸다.
알다시피 <공동정범>은 용산참사를 예리하면서도 찬찬하게 꿰뚫었던 <두개의 문> 이후의 이야기이다. <두개의 문>(2012, 김일란‧홍지유)은 비슷한 시기 용산참사를 다루었던 작품들이 용산 투쟁의 이유를 밝히거나 철거민들의 투쟁과정을 연민어린 눈길로 담아냈던 것과 다르게, 진압작전에 참여했던 경찰 특공대원의 입을 빌어 사건을 재구성하였었다. 망루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한 채 작전에 투입되었다던, 내가 직급이 높았더라면 진압작전을 보류했을 거라던 경찰 특공대원들의 증언은 가해자와 피해자의 이분법에 균열을 가져왔다. 망루가 어떻게 생겼는지, 철거민들이 무엇으로 자신들을 지키려 준비했었는지 아무것도 알지 못한 채 무작정 건물로 투입되었던 경찰 특공대의 혼란과 공포는 국가 공권력이 미치는 방향이 단일하지만은 않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합판 한 장 아래 열 맞춰 서있던 경찰 특공대원들. 그 합판이 자신들을 지키기에 얼마나 어이없는 물건인지를 생각할 겨를도 없이 무전기 소리에 건물로 들어섰던 그들의 모습은 계급적 약자에게는 어떤 방향으로도 뻗칠 수 있는 국가 공권력의 잔인함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공동정범>은 이를 한 꺼풀 더 벗겨냄으로써 이제 감정에 까지 꾸물대며 스며드는 그것의 잔인함을 포착해 우리 앞에 내민다.
공권력이 무너뜨린 조건 없는 연대
<공동정범>은 사건 당일의 상황을 천천히 훑은 후 그 사이에서 포착되는 생존자의 모습과 그들의 현재를 교차적으로 보여주며 이것이 생존자의 이야기라는 것을 드러낸다. 경찰에 의해 연행되거나, 경찰들에게 끌려가면서도 지금 저 불 속에서 단 5명이 살아남았다며 끝까지 외치던, 불길을 피해 건물에 매달려 있던 그들은 공사현장에서 일을 하거나 꽃을 심고, 병원에서 치료를 하며 현재에 놓여 있다. 이들의 모습이 지나간 후 등장하는 “명확한 증거가 없음에도 검찰은 망루 화재 원인을 화염병으로 단정하고, 농성 책임자 이충연 용산 4구역 철거민대책위원장을 비롯 망루에 남아있던 모든 철거민을 공동정범으로 기소한다.”는 자막은 영화 전체에 녹아 있는 인물들의 감정을 이해하는 데에 매우 핵심적인 사실을 꼬집는다. 오프닝 크레디트가 오르기 전 보여주는 이 프롤로그는 그래서 상징적이다.
각 인물들의 과거와 현재를 교차하는 그 자리에는 인물들의 이름과 함께 그들이 다양한 지역의 철거민이었다는 사실이 떠오른다. 이 자막을 쉽게 보아 지나칠 수 없는 것은 우리가 용산참사라고만 뭉뚱그려 이야기하기에는 그곳에 생존이라는 절박한 뜻을 함께하기 위해 한 사람, 두 사람, 작은 한 지역, 두 지역들이 모여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서울 용산 4구역으로 달려와 준 성남 단대동 ‧ 서울 신계동 ‧ 서울 상도4동 ‧ 서울 순화동 철거민들은 생의 터전을 빼앗기거나 빼앗길 위기에 처해있다는 것이 어떤 고통인지를, 얼마나 절박한지를 알기에 당연히 함께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달려왔을 것이다. 여기까지는 우리가 예상할 수 있는 그것이다. 노동이나 주거 등 생계의 위협에 대응하기 위한 그들의 연대. 우리의 환상은 대부분 여기에 놓인다.
‘함께 공감할 이들을 찾았으니 그들은 외롭지 않을 것이다’, ‘저렇게 모였으니 그들의 세력은 엄청나며 폭력적일 것이다’ 혹은 ‘그들은 하나로 똘똘 뭉쳐 그들의 적인 사측이나 국가를 향해 달려 나갈 것이다’와 같은 추측. 우리가 막연하게 그려냈던 이 과정은 그들의 생존 과정을 ‘저들끼리의 것’으로 두어도 괜찮은 것인 듯 보이게 만들었다. 이러한 환상은 연대하는 이들은 폭력 짙은 경찰들의 강압, 비인간적인 사측 혹은 국가의 말들이나 판단 등을 이겨낼 것이며, 혹은 좌절한다 해도 함께하는 힘으로 굳세게 추동해 나갈 것이라는 믿음을 강하게 했다. 많은 다큐멘터리들에서 가해자와 피해자를 분명하게 나누어 피해자들의 한 목소리를 전달해왔던 것 역시 이러한 생각에 기여한 바 클 것이다. 만약 피해자들의 갈등을 비춘다 할지라도 그 내용은 아직 그곳에 남아 있는 이들의 입을 통해 설명된다. 대열에서 벗어난 이들에 대한 좋은 기억들, 그들이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에 대한 이해는 곧 남아있는 자가 자신으로부터 멀어진 이들을 이해하는 과정이었다. 이러한 묘사는 오랫동안 힘든 일을 겪어온 이들에 대한 연민과 아직 그곳에 남아있는 이들에 대한 존중과 헌사이겠지만, 그들 사이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일어나고 있다면 그 원인은 무엇인지, 그것이 얼마나 강력하고 공포스러운 것인지를 우리에게 미처 알리지 못했다.
<공동정범>은 현재까지도 9년 전 ‘오늘’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5명의 생존자들이자 공동정범으로 복역했던 이들을 천천히 쫓으며, 그들의 고통이 자신만이 생존했다는 죄책감뿐만 아니라 공동정범이라는 이름으로 동료와 경찰관을 죽인 범죄자가 되었다는 억울함까지가 녹아있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준다. 용산에 도착하기 전까지 미처 망루에 올라야한다는 사실을 몰랐던 이들의 당혹스러움, 망루의 구조와 활용에 대한 이해의 불명확함에 대해 따져볼 새도 없이 물대포에 대비할 수밖에 없었던 그들은 결국 범죄자가 되었다. 그들은 각기 다른 의견에 대해 서로 이야기할 시간도, 합의를 하거나 거부를 하거나 또는 다른 대안을 찾아볼 시간을 가져보지 못했다. 풀리지 않은 의문도 감정도 꽁꽁 묶인 상황에서 결국 명확한 증거를 제시하지도 않은 채 당신들이 준비한 화염병으로 당신들의 동료를 죽였다는 죄목을 덮어씌운 국가 공권력은 그들 사이를 완벽하게 해체한다.
모든 인물들이 개별 인터뷰 안에서만 솔직한 자신의 감정을 드러낼 때, 생존자 5명이 함께 모여 있을 때에는 터져나갈 것 같은 긴장감이 감돌 때. 이 상반되는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원인을 찬찬히 찾다보면 바로 그들 사이를 교묘하게 비집고 들어가 있던 국가만의 논리와 또 그것만의 논리로 만들어진 죄명이 드러난다. 그들의 순진했던 연대를 너무도 잔인한 긴장으로 바꾼 것, 서로 간의 미움을 생길 수밖에 없던 그 상황, 그것은 공동정범이라는 죄명이 만들어낸 결과였다.
생존을 위한 감정들의 인정
생존을 위해 모인 이들은 생존을 이유로 범죄자가 되었다. 국가는 그들이 생존을 위해 벌인 모든 과정을 범죄로 규정했다. <공동정범>은 이것을 드러내는 것에서 멈추지 않는다. <공동정범>은 이것으로 상처받고 와해된 이들이, 즉 ‘그날’을 ‘오늘’로 사는 이들이 어떻게 생존하고 있는지를 솔직하게 드러낸다. 당연히 무슨 일을 하며 돈을 벌고, 무엇을 먹고, 어떤 집에 사느냐를 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이 단지 연명하는 것을 넘어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분출하는 그 모든 것, <공동정범>은 이것을 드러내는 것에 예의를 갖추면서도 어떠한 희석도 가하지 않는다.
출소 후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몰라 집에서 꽃을 키우기 시작했다는 김주환은 인터뷰 중 과거에 대해 말하는 것을 가장 힘들어 한 이이다. 그는 가장 많이 머뭇거렸고, 가장 자주 숨을 고르면서 과거를 말하는 것에 대해 망설였다. 화분에 흙을 담으며, 조용히 담배를 태우며 생각에 잠긴 그는 어느 순간 화를 폭발시키기도 했다. 소리를 지르며 경찰서에서 화를 내는 그의 분출은 결국 그렇게 해서라도, 이 울분을 잠시나마 터트려서라도 살고자 하는 몸부림처럼 보인다. 그들에게 도저히 찾을 수 없었던 9년간의 흔적은 그렇게 꾹꾹 눌러 담다 결국엔 곪아터져 버린 모습으로 자리하고 있었다. <공동정범>은 이렇게 힘겨워하는 이들에게 굳이 다가가 다독거리거나 이해시키려는 일 따위는 하지 않는다. <공동정범>은 그들이 현재의 자신을 지키기 위해 발화하는 그 모든 방식을 그저 고스란히 담아낸다. 그들이 겪었을 일들, 그들의 억울함을 아는 이들이라면 그 폭발적 감정의 원천을 알 수 있도록 <공동정범>은 그저 그 감정에 대해 관객들이 다가갈 수 있도록 놓아둘 뿐이다.
<공동정범>은 그들이 멈칫대는 순간들, 누군가를 지목하고 싶어 하면서도 다물어 버리는 굳은 입,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는 목소리, 죄책감으로 떨군 머리, 시니컬하게 웃어 보이는 얼굴 등을 고스란히 담아낸다. 이 장면들은 그들이 어떠한 감정을 표현하고 있고, 또 그것이 어디에서부터 기인한 것인지에 대해 곰곰이 생각게 한다. 관객들은 이들이 어떤 일을 겪어왔는지를 찬찬히 보았기에, 자신이 수의를 입고 있었던 것을 기억하는 딸에게 그런 옷을 입긴 했지만 아빠는 나쁜 짓을 한 게 아니라고 말해주기까지 얼마나 많은 감정이 오고 갔을지를 알며 왜 이런 상황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가에 대해 생각한다. <공동정범>은 이렇게 인물들의 감정을 고스란히 보여주면서 그들이 이렇게 괴로워질 수밖에 없는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그날’을 ‘오늘’처럼 살고 있는 그들에게 자신의 기억은 누군가의 잘못으로, 그리고 그 누군가의 잘못이 누군가의 죽음으로 연결될 수밖에 없다. 삶으로 인한 죄. 국가가 씌워놓은 그 프레임은 그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감정의 폭발과 긴장을 촉발시킨다. 그들은 같은 상황을 바라보며 다른 기억을 말할지라도 그 어떤 기억이라도 붙잡기 위해 필사적으로 애쓴다. 죽은 이들을 위해, 그리고 살아남아 있는 자신들의 억울함을 위해. 그러나 원하는 것만 떠올릴 수 없는 것이 기억이기에 알고자 하는 발화의 지점이나 원인보다는 먼저 빠져나가려 했던 이들과 누군가가 살아있을 수도 있던 상황들이 희미하게 교차한다. 이 기억들을 가지고 격론을 펼치는 중 튀어나오는 분노들은 서로의 탓을 하는 것이라기보다 차라리 대충 수습하여 그들을 죄인으로 만들어버린 상황에서 빠져나가고 싶은, 죄책감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생존 욕구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고통스럽게나마 기억을 맞춰가기 위해 한 자리에 앉는다. 과거의 그 고통을 마주한다는 것은 결국 그들의 생존을 위해, 그들이 생계를 위해 싸워왔던 흔적을 지키기 위해 피할 수 없는 일이다. 그들은 종종 얼굴을 붉혀가며, 언성을 높여가며 서로를 괴롭히기도 하지만, 이는 결국 회복을 위한 방법이다. <공동정범>의 후반 인물들 사이의 불안한 긴장을 배치할 수 있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이들이 ‘오늘’을 넘어 앞으로를 살아가기 위해 벌이는 이 감정적 사투는 단순한 미움일 수 없기 때문이다. 어떤 죄명으로 옭아매더라도 그들은 그렇게 다시 한 자리에 앉을 것이며 삶을 살기 위해 다시금 ‘오늘’을 떠올릴 것이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에 대한 나아간 시선
대표적인 후일담 소설이라 할 수 있는 『살아남은 자의 슬픔』에서 살아남은 자들은 그 슬픔을 자신들 안으로 삭히며 스스로를 미워했다. 그렇기에 서로가 서로를, 자신이 자신을 비난하기에 바빴고, 이는 꽤나 감정적인 방식들로 그려질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왜 서로를 미워하게 되었는지, 왜 죽어야만 했는지, 왜 요절을 진정성과 등가에 두었었는지에 대해 작품 내부에서는 굳이 그 이유가 찾아지지 않는다. 이들의 슬픔은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역사적 배경들로 해석되는 것이기에 그 인물들은 책속에서만 오롯이 숨쉬고 있었다.
<공동정범>은 그들의 죄책감을 차라리 드러냄으로써 그것의 이유를 묻는다. <공동정범>은 고름이 흐르고, 진물이 나도록 허물어져 있는 그들의 상황을 숨기거나 그들만의 감정소모로 남겨두지 않음으로써 우리 앞으로 다가선다. 이들의 괴로움이 현재진행형이라는 것은 솔직한 감정을 퍼부어대는 인물들의 절규로 생생하게 살아난다. 용산참사는 결코 마무리 되지 않았으며, 아직까지도 고통 속에 살고 있는 이들이 있다는 것, 지금은 의미 없는 풀숲으로 내던져진 그곳이 누군가에게는 절실한 삶의 터전이었다는 것 등에 현재성을 부여한다.
<공동정범>은 상당한 감정적 소모를 요하는 작품이다. 이는 이 영화가 용산참사라는 현재진행형인 사안을 다루기 때문만은 아니다. <공동정범>은 우리가 수많은 생존권 투쟁을 얼마나 단선적으로 생각해왔는지에 대해 날카로운 질문을 함으로써 보는 이들을 당혹스럽게 한다. 살아남은 자들의 죄책감, 이 취약해진 마음을 뚫고 들어오는 서로에 대한 원망. 원망을 만들어냈던 공동정범이라는 죄명. 그리고 그것에서 벗어나고자 몸부림치며 튀어나오는 감정들. <공동정범>은 이 모든 것들로 우리가 환상처럼 생각했던 생존권 투쟁 사이에 침입해 들어간 공권력의 피해들을 여지없이 드러낸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다시 ‘함께’ 살아가야한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온 힘을 다해 서로를 이해하고 싶어 몸부림치는 그들, <공동정범>은 이 현실 속에 이제 우리가 이해할 몫도 남아 있다고 이야기 한다.
<공동정범>(2018.1.25. 개봉)
사진출처: 네이버 영화
글: 송아름
영화평론가. 한국 현대문학의 극(Drama)을 전공하며, 연극·영화·TV드라마에 대한 논문과 관련 글을 쓰고 있다.
* 글 출처: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 르몽드 시네마 크리티크
http://www.ilemonde.com/news/articleList.html?sc_sub_section_code=S2N40&view_type=s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