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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호] 위치들의 정치학―다크나이트

1.스크린의 영웅들


우리가 살고 있는 근대(이후)는 영웅이 부재하는 시대다. 헤겔은 개인의 행위를 집합 전체의 운명, 보편적 삶의 맥락과 내적 연관지울 수 있는 자를 가리켜 영웅이라고 말했다. 개별적 행위가 한 집합적 단위(예컨대 민족)의 정신이나 삶의 총체적 모습과 유기적으로 연관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근대사회에서 국가의 제도는 개인을 세계에 대해 단순히 우연적인 존재로 전락시키므로 개인으로서의 영웅은 탄생할 수 없다. 세계의 복잡다단하고 빠른 변화도 개인이 전체를 파악하거나 따라잡을 수 없게 만들어 개인과 전체 사이에는 균열이 발생하고, 행위자를 둘러싼 환경은 총체성이 아니라 국지적 현실, 우연적 일부가 될 뿐이다. 잡다한 삶을 총체성으로 묶어줄 개인은 불가능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설명에 따르면 개인과 전체 사이의 균열을 메워줄 수 있는 행위를 하는 자가 영웅이다. 

하지만 영웅이 이처럼 반드시 개인과 전체의 간격을 메워주어야만 가능할까? 오히려 전체와 구별되는 자리에 놓이는 개인, 집합적인 다수와 구별되는 위치에 자리할 수 있는 누군가가 우리 시대의 영웅이 되는 것은 아닐까? 아무튼 현실에서 영웅이 불가능한 시대가 되자, 그들은 영화의 스크린 속으로 거주지를 옮겼다. 그리스 신화에서 영웅이 하늘로 올라가 별자리가 되듯이 우리 시대의 영웅은 움직이는 이미지들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 속에서 영웅은 출중한 능력과 매력적인 캐릭터로 시민들의 친구이자 보호자 노릇을 한다. 선량한 시민들을 보호하고 범죄자를 처단하며, 사회의 안전을 지킨다. 

그런데 영웅을 위협하는 유사-영웅, 즉 악당이 출현한다. 악당의 출현으로 시민들의 사회는 위험에 처하고 주인공과 악당은 맞부딪친다. 악당은 일그러진 그의 내면성을 표출하며, 흉측한 몰골로 대다수 시민들이 동의할 수 없는 기괴한 주장을 하면서 사회의 안전을 위협한다. 영웅과 사회는 위험에 빠진다. 그러나 우리의 영웅은 악당을 멋지게 물리치고 사회를 다시 안전한 상태로 돌려놓을 것이다. 이것이 일반적인 헐리웃 영화의 전형적인 서사 구도다. 상상적 승리의 판타지 혹은 판타지의 상상적 승리. 영웅은 그렇게 (상상된) 전체가 상상하는 하나의 표상체다.

그런 영웅들은 대개 특별한 능력들을 가지고 있다. 마블 코믹스와 DC 코믹스의 영웅들은 대개 빛의 속도로 날아다니는가 하면(슈퍼맨) 거미줄을 발사하며 빌딩숲을 자유자재로 넘나들기도 한다(스파이더맨). 최근에는 영웅들의 개체수가 다양해졌고 그 성격도 각양각색(스폰, 핸콕, 데드풀, 수어사이드 스쿼드 등)으로 진화했다고는 하지만 무엇보다 초월적인 능력이 있어야 영웅의 계보에 들 수 있다. 그와 더불어 그들은 시민들의 편이어야 한다. 시민과 사회를 위협하면 그는 악당이지 영웅이 아니다. 영웅은 언제나 선의 축(우리 편)에 속해 있어야만 한다. 그는 사회의 지배적인 가치에 동의하고 선량한 행동을 표방한다. 또 가면과 슈트라는 아이템을 필수적으로 구비해야만 한다. 그의 정체가 널리 공개되어선 안 되기 때문이다. 영웅의 조건 가운데 하나는 사회 전체 속에서 그가 누구인지 알려져서는 안 된다는 특징을 갖는다.  
  
그러나 영웅의 결정적인 특성은 그가 집합적 다수와 구별되는 자리에 있어야 한다는 점일 것이다. 그가 가진 능력, 윤리성이나 익명성도 사실 그의 이런 독특한 위치와 관련이 있는 것들이다. 이 점을 부각시키기 위해서 영웅들은 종종 외부에서 온 자들이 맡기도 한다(슈퍼맨, 트랜스포머).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선량한 마음으로 중차대한 임무를 수행하더라도 영웅이란 어쩌면 전체와 맺는 관계 속에 있는지 모른다. 무엇보다 그들은 전체와 구별되는 예외적 존재들이다. 영웅은 전체의 상상된 대리적 표상이자, 전체로부터 불거져 나오는 하나의 돌출현상의 다른 이름이다.

이러한 영웅의 자리를 위협하는 존재가 바로 악당이다. 악당의 출현으로 사회는 위험 속으로 빠져드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진정한 위험은 악당이 야기한 무질서와 혼란으로 시민들의 생존권이 위협받는 것이 아니다. 악당은 기존 사회에서  통용되어선 안 되는 이질적인 가치의 출현, 다른 질서와 더불어 나타난다. 악당이 주장하는 가치가 기존의 사회망에서 통용될 수 없는 가치관이라면 더욱 그렇다. 그러므로 영웅과 악당의 싸움은 하나의 질서와 또 다른 질서의 충돌이기도 하다. 그럴 때 그들 간의 싸움은 상징투쟁으로 의미화 된다. 영화는 대개 영웅의 승리를 통한 기존 가치의 재안정으로 귀결되지만,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헐리웃 영화들의 보수적 이데올로기와 미국적 가치의 끼워 팔기가 아니다.(많은 헐리웃 영화들이 이러한 가치관을 옹호하는 서사공식을 지치지도 않고 반복한다. 영웅 서사물을 비롯한 액션 영화류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전쟁 영화, 범죄 영화, 형사 스릴러 영화 등도 이런 문법을 고스란히 따른다. 현대판 권선징악.) 중요한 것은 시민사회와 영웅, 그리고 악당이라는 이 세 개의 자리들, 이들의 위치에 관한 탐사, 이들 관계들의 놀이, 말하자면 이들의 위상학이다. 이러한 세 관계의 위상학을 잘 드러내 보여주는 영화가 있다. 그것은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배트맨 다크나이트>(2008)이다. 이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앞서 언급한 영웅의 공통점들, 즉 그들의 능력, 윤리성, 가면에 대한 언급이 요청된다. 이제 <배트맨 다크 나이트>를 통해 영웅의 조건들을 확인해보면서 <다크 나이트>가 기존의 영웅서사물과 어떻게 다른지, 또 영웅을 어디까지 발전시키면서 그 정체를 드러내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2. 의지의 강도와 힘의 위치

배트맨이 다른 영화의 영웅들과 구별되는 것은 그의 힘이 단지 신체적인 능력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슈퍼맨이나 스파이더맨 등은 탁월한 신체 능력을 가졌다. 그러나 배트맨은 초월적인 힘을 내재적으로 소유한 것이 아니다. 물리적인 신체 능력 면에서라면 그는 다른 사람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래서 슈트나 최첨단 보조 장치들을 사용한다. 이는 조커나 투페이스에게서도 마찬가지다. 그들의 비범함은 신체적 능력의 탁월성이 아니라 그들이 다른 이들과 구별되기 시작하면서, 그들 자신만의 윤리와 철학을 실행하면서 부각된다. 어떠한 철학을 가지고 그것을 주장하며 실천하려고 할 때 그는 전체로부터 구별되기 시작한다. 그런 점에서 그들 모두는 고담시의 일반적 욕망을 따르지 않는다.

갱들이 지배하는 고담시는 자본에 포획된 단일한 욕망의 공간이다. 그 욕망은 권력과 자본에 대한 욕망이다. 갱들을 저지해야 하는 경찰은 뇌물에 포섭되었고, 부패한 경찰들은 갱들의 사업을 적극적으로 돕는다. 그러한 고담시의 권력, 자본의 중심에 있는 것은 다름 아닌 고담시의 갱, 그리고 그들의 우두머리인 ‘팔코니’이다. 그러니 팔코니의 욕망이 갱들의 욕망이며, 갱들의 욕망이 고담시의 욕망이다. 고담시 대부분의 시민들은 갱들이 욕망하는 것을 욕망한다. 하지만 배트맨은 다르다. 그는 고담시의 일반적 욕망을 따르지 않는다. 브루스 웨인은 이미 세계적인 기업의 회장이므로 새삼 돈과 권력을 추구할 필요가 없기 때문일까? 그렇다면 그는 왜 배트맨 노릇을 하려고 하는가? 배트맨은 부와 권력을 향유하는 일에 지친 부잣집 도련님이 새롭게 고안한 놀이인가? 아니면 박쥐 코스프레를 하고 고생을 자청하는 마조히스트일 뿐인가? 이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그가 배트맨이 되는 과정 혹은 브루스 웨인이 배트맨이 되려고 한 동기를 점검해 보아야 한다.
 
<배트맨 비긴즈>에서도 드러나지만 고담시는 일종의 절망 상태에 빠져 있다. 고담시를 극심한 경제불황에서 복구시키려 노력한 브루스 웨인의 아버지 토마스 웨인 그 자신도 좀도둑의 총에 죽음을 맞이할 정도로 고담시의 치안은 엉망이었다. 고담시에는 빈민들이 넘쳐나고, 부정의가 판을 친다. 배트맨은 이러한 고담시에 하나의 상징적 존재가 되려고 한다. 정의가 죽지 않았다는 것, 누군가는 범죄자들을 두려워하지 않고 그들과 싸우며, 그리하여 사람들 자신이 지금보다 나은 존재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을 불러일으키려 한다. 이런 점에서 고담시의 일반적 욕망과 배트맨의 욕망은 구별된다. 배트맨은 상징적 존재가 되어 사람들에게 새로운 욕망을 제시하려는 것이다. 

하지만 조커도 그렇다. 조커 역시 고담시민들이나 갱들과는 다르다. 그는 갱들로부터 받은 지폐를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거기에 불을 지르며 말한다. “돈 따위는 중요치 않아. 중요한 건 메시지를 보내는 거지. 모든 건 불탄다는 거.” 조커는 마로니와 도시의 갱들이 추구하는 가치, 돈과 행복을 좇는 자가 아니다. 조커는 은행을 털기도 하고, 갱 두목들에게 배트맨을 처리해주는 일을 자청하지만 조커가 그들의 하수인이 되는 건 아니다. 조커는 욕망의 차원에서라면 차라리 배트맨과 짝패다. 조커 역시 사회에 메시지를 보내려 하기 때문이다. 

조커는 도시를 탈출하려는 시민들과 죄수들의 배를 대상으로 하나의 ‘사회실험’을 준비한다. 폭탄이 설치된 두 배에 각각 승선한 시민들과 죄수들에게 상대편의 배를 폭발시킬 수 있는 뇌관을 나누어 준다. 먼저 누르지 않으면 저쪽이 나를 죽일 것이다. 그러므로 저쪽보다 먼저 버튼을 눌러야 한다. 그러나 내가 살아 있는 한, 저쪽도 아직 나를 죽이기로 선택한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먼저 버튼을 누른다는 것은 살인이다. 이것이 조커가 설치한 딜레마다. 조커는 자기가 살기 위해 남을 짓밟는, 그저 살아남기 위한 생존(투쟁)만이 이 도시의 최후 윤리임을 그들 스스로에게 드러나도록 하려는 것이다. 

이 아포리아를 해결하기 위해 시민들은 상대편 배에 승선한 죄수들은 범죄자들이고, 범죄라는 행위를 통해 이미 생을 포기한 셈이며 따라서 자신들이 살아남을 가치가 있다고 주장한다. 생존을 위한 사고의 합리화를 시도하기. 그러나 그들이 범죄를 저지른 자라고 해서 살 가치조차 없다고 누가 선언할 수 있단 말인가? 그래서 시민들은 ‘민주’시민들답게 어떻게 할 것인지 투표를 한다. 그들은 늘 하던 대로, 자신들이 알고 있는 가장 합리적인 결정방식인 ‘투표’로 정하려 한다. 투표의 결과는 ‘상대를 처치하라’는 다수결이 승리한다. 그러나 ‘민주시민들’의 배에서는 아무도 그 뇌관을 터트릴 자가 없다. 이것이 바로 고담시민들의 윤리 혹은 ‘일반성’이다. “살기는 해야겠으나 남을 죽이지는 못하는 사람들” 즉 ‘평균성의 사람들’이다.

이런 특성 없는 개별자들과 대별되는, 예외적 존재가 바로 조커와 배트맨이다. 그 둘은 일단 어떤 지점을 지나친 주체들이며, 이 사회의 구성과 작동방식에 관한 비밀을 알고 있다. 배트맨-브루스 웨인은 긴 시간의 방황과 어둠의 사도들을 통해서 이 지점에 도달한 반면 조커는 또 다른 경로로 일반성의 임계점을 지나친 듯하다. 조커는 동기 없이 악을 저지르는 ‘무동기적 악한’이 아니다. 조커의 행동에는 분명한 목적과 의도가 있다. 다만 그의 목적이 대다수 범죄자들과 다를 뿐이다. 앞서 말했듯 그는 고담의 욕망을 따르지 않는다. 타인들의 욕망에 포획되지 않고 자신의 가치를 사람들에게 전하려는 그는 이미 일반성의 이탈자다. <다크 나이트>의 첫시퀀스에서 조커는 “내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건 사람들이 극한의 지점을 지나면 괴상해진다는 것이지”(whatever doesn’t kill you simply makes you…stranger)라고 말한다. 이 말은 단지 특정한 경험을 겪은 주체의 왜곡된 내면(상처)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한 인간의 주체적 강도는 특정한 지점(극한의 경험)을 지나칠 때 획득된다는 언술이다. 사실 조커의 이 말은 니체의 “너를 죽이지 못하는 한 모든 것은 너를 더 강하게 만들 뿐whatever doesn’t kill you simply makes you stronger.”이라는 말의 변형인 것으로 보인다. 인간을 극복되어야 할 무엇으로 파악하고 위버멘쉬를 요청했던 니체의 ‘힘에의 의지’는 조커에게 자기 힘의 비밀을 말하는 대사로 바뀐다. 힘을 의지의 강도로 해석하는 조커의 이 말처럼 한 인간 주체가 정신적 강도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언설도 드물 것이다.

이 장면은 하나의 주체란 그를 형성하는 특정한 결절점들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 주체의 강밀도는 타고 나거나 저절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지점들에서 결정된다는 것, 그 결절점들에서 힘의 강도로부터 만들어진다는 것을 역설하고 있는 대목이자 조커가 자신을 스스로 소개하는 언표이다. 즉 그 자신은 누구로부터 태어나거나 사회로부터 부과되는 주체가 아니란 뜻이다. 인간존재의 고유성이 영혼 그 자체에 있다는 선험적 결정론이나 단지 외부로부터 부과되는 힘에 의해 결정된다는 환경결정론을 모두 거부하는 곳에 영웅의 위상학이 있다.   

그런데 이것은 배트맨-브루스 웨인에게서도 마찬가지다. 그 역시 일반성의 임계점을 지나쳤다. 어린 시절 부모의 피살 장면을 목격한 것이 그의 정신적 강도를 확보해 주는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도리어 충격과 상처일 뿐이었다. 이 일로 인해 브루스 웨인은 자기의 불행과 복수심에 치를 떨며 방랑의 길로 나섰다. 이후로 그는 이곳저곳을 떠돌다가 어둠의 사도들 무리 속에서 수련을 한다. 그렇다고 이 수련 과정이 그의 강도를 보증하는 것도 아니다. 배트맨-브루스 웨인의 가장 강한 힘은 그가 배트맨 노릇을 시작하면서 생겨난다. 그의 경험, 그의 신체적․정신적 수련, 그리고 그의 재력 역시 여기에 관여하지만 무엇보다 그가 강할 수 있는 이유는 그가 배트맨이기 때문에 도출된다. 그러나 이것은 Being이 아니라 Doing으로부터 형성되는 것이다. 그가 대중 일반과 달리 새로운 가치를 전달하는 일을 떠맡는 순간에, 즉 배트맨이 되(려)는 순간에 그 힘은 획득되는 것이며, 이 점에 관해서는 조커 역시 마찬가지다. 그가 하려는 일이, 혹은 그가 하는 일(행동)이 그의 존재가 된다. 이는 “네가 하는 일이 너를 정의해”라는 레이첼의 발언을 통해 <배트맨 비긴즈>에서부터 암시된 것이기도 하다. 

배트맨-브루스 웨인의 관심사는 웨인사의 경제적 성장이 아니라 오직 배트맨과 고담시의 정의에 집중되어 있다. 그 역시 조커와 마찬가지로 고담시에 메시지를 보내려 한다. 법이 지켜질 수 있다는 것, 그래서 사회 정의는 실현될 수 있다는 메시지. 그러나 조커는 고담시에 혼돈을 초래하려 한다. 이런 점에서 이들 모두는 사회의 일반적이고 뭉뚱그려진 가치로부터 벗어나 자신만의 윤리를 실행하려는 자들이며, 그럼으로써 상징적인 장에서 싸우는 자들이 된다. 그리고 그러한 점이 이들을 고담시민이나 경찰, 갱들과 다른 존재들로 만들어 준다.

그들의 특별한 능력은 타고난 능력이라기보다는 위치에서 오는 능력이고, 대중들과 구별되는 자리에 자신을 위치 짓는 곳에서 비롯한다. 그들은 열외 존재들(extra-beings)이다. 이 구별은 우선적으로 그들이 각각 평균성의 개별자들과 다른 법(룰)을 가지고 움직이거나, 다른 입지점(위치)에 서 있기 때문에 발생한다. 욕망의 동기나 강도, 그것을 실천할 수 있는 능력-지능과 재력에도 있다고 말할 수 있지만 이 영화에서 강조되는 것은 그들의 포지션(위상들)이다. 그들의 입지점은 그들을 대중들과 구별되게 만드는데, 특수한 임무를 자임하고 그것을 실천하려는 순간에 마련된다. 그렇다면 배트맨과 조커는 같은가? 그럴 리는 없다. 여기서 이들이 각각 추구하는 신념의 방향, 즉 그들의 윤리를 확인해 보아야 한다. 

  
 
3. 세 개의 윤리들

배트맨이 고수하고 실현시키고자 하는 정의, 선의 이념에 대해서는 손쉽게 파악 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그는 사회의 질서와 안정을 추구하며 법을 수호하고자 한다. 그가 사람들에게 불러일으키려는 희망도 이와 멀어 보이는 것이 아니며, 그가 상징적인 존재가 되려는 것도 이런 종류의 정신들과 가까운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그가 갱들에게 매수되지 않은 고든 반장과 좋은 협력관계를 갖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더구나 고담시민들의 일반성을 생각해 볼 때, 그의 지난한 싸움, 투사로서의 충실성 등은 그를 영웅시하는데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배트맨의 슈트가 멋있어서 영웅이 아니고 조커가 흉측해서 악당이 아닌 것이라면, 또 배트맨이 법과 정의를 수호하기 때문에 영웅이고, 조커가 단지 혼돈을 조장하려 하기 때문에 악당이라고 치부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이 둘의 위치는 애매할 수밖에 없다. 자신들이 믿고 있는 가치와 비슷해 보이는 주장을 하는 측이 무조건 좋은 편이라고 생각하는 편파적인 사람이 아니라면, 배트맨과 조커(영웅과 악당, 선과 악)를 바라보는 시선은 전복될 수도 있다. 게다가 배트맨과 고담시민들의 윤리는 사실상 공통점이 별로 없다. 

따라서 배트맨과 조커의 정체는 그들이 주장하는 신념과 가치의 내용을 따지는 방법으로는 결정될 수 없다. 배트맨은 법질서를 통한 정의가 실행되기를 바라고, 조커는 혼돈을 주장한다. 혼돈과 파괴를 지향하는 조커의 대사를 들어보자. “이 세사응ㄹ 사는 유일한 묘책은 규칙 없이 사는 거야.” “모든 건 불타버린 다는 것.” “일이 계획대로 되면 아무도 놀라지 않아. 그 계획이 끔찍해도 말이야. (…) 작은 혼돈을 소개할게. 정해진 질서를 뒤엎으면 모든 것이 혼돈에 빠지지. 난 혼돈의 대행자야. 아, 그리고 혼돈에 대한 거 아나? 혼돈은 공평해” 등등. 사법질서가 언제나 옳은 것이라는 가치관의 편에서야 당연히 배트맨이 영웅이 될 것이지만, 조커가 주장하는 혼돈이 사회나 사물의 본질이라고 생각하는 입장에서는 배트맨이 도리어 보수적인 가치의 옹호자로 비칠 수도 있다. 따라서 이 둘이 일반 시민들에게 주장하는 가치와 신념의 내용뿐만 아니라 이들이 어떤 방식으로 대중에게 메시지를 보내려 하는가에 대해 고려해야만 한다. 

배트맨은 그 자신의 존재를 언젠가는 사라져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그는 고담시가 더 이상 자신을 필요로 하지 않게 될 날을 위해 투쟁한다. 그러나 지금으로서는 배트맨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런 날이 도래하지 않은 지금으로서는 사법적 질서와 사회의 정의로운 작동을 위해서 그 자신은 수배자로 활동해야만 한다. 이런 점에서 그는 체계의 변혁을 위해 불법자가 될 수밖에 없는 혁명투사와 같은 위치라고도 할 수 있다. 도래할 진리를 위해 분투하는 진리의 투사. 그리고 그가 시민들에게 바라는 것은 사람들이 지금보다 더 나은 존재로 발전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하는 것이다. 

이 점에 관해서라면 조커 역시 다를 바 없다. 다만 조커의 진리-내용이 혼돈이라는 것일 뿐이다. 그리고 어떤 것이 승리하느냐에 따라 선과 악은 당연히 재규정될 것이다. 그러므로 조커의 혼돈이 무엇인가를 파악하기보다는 조커가 그 혼돈을 사람들에게 어떻게 발견하도록 하는가가 중요하다. 배트맨이 그 자신을 집합적 다수와 구별지으면서 자신의 소멸을 유도하는 방식, 그리하여 사람들을 자신의 위치로 끌어올리려 한다면, 조커는 사람들이 자기 내부의 어둠과 혼돈을 직시하도록 해 사회 그 자체가 내파되도록 하는 방법을 택하는 것이다. 어떤 경우든 지금 이대로의 사회가 존속해야 한다는 명제가 그 자체로 참일 수 없다면, 조커의 철학이 관철되는 사회도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조커는 사회 그 자체의 내파를 목적으로 하고, 배트맨은 사회의 초월적 지양을 목표로 삼는다. 조커는 사회(질서)의 소멸을, 배트맨은 그 자신의 소멸을 유도하는 방식으로 투쟁한다. 

그리고 여기서 그들 투쟁-게임의 중요한 매개가 ‘하비 덴트-투페이스’다. 사람들이 정의를 위해 투쟁할 수 있고, 현재보다 더 나은 인간이 될 수 있도록 하는 희망의 증거로 배트맨은 하비 덴트를 중요하게 여긴다. 그 자신은 할 수 없는 것을 하비 덴트는 해줄 수 있다고 믿는다. 배트맨은 집합적 다수와 구별되는 위치에 있는 반면 하비 덴트는 그 집합 내부의 존재이면서, 사회 내부에 자리를 가지고서도 정의를 위해 싸우는 모델이 될 수 있다. 하지만 하비 덴트가 중요한 것은 조커에게도 마찬가지다. 조커가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것은, 고담의 백기사로 불리우던 하비덴트조차 얼마나 추악한 두 얼굴의 범죄자가 될 수 있는지, 인간이란 삶의 가혹한 운명 앞에서 허약하기 짝이 없고, 사회의 본질이 얼마나 허구적이고 보잘 것 없는 것 위에 토대해 있는가를 가르치려 한다. 
 
조커가 폭로하는 인간의 나약성 앞에서 그 판단의 근거란 허약하고 일시적인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우리는 조커를 나쁘다고 판단할 준거를 잃게 된다. 조커를 악이라고 치부할 수 없게 된다면 우리의 가치관은 급작스레 혼돈에 빠져든다. 그러한 가치들의 회오리에 빠져들게 되는 것, 그것이 바로 조커가 바라는 바다. 그래서 조커는 혼돈의 숭배자다. 조커는 혼돈을 자신의 절대적인 진리로 상정한다. 조커의 목표는 고담시를 혼돈의 장으로 만드는 것. 그러한 계획의 일환으로 그는 빛의 기사 하비 덴트에게서 투페이스라는 악을 소환해 낸다. 

  
 
하비 덴트는 갱들의 손안에서 놀아나고 있던 고담시를 구출해내려는 정의로운 지방검사이다. 그는 다른 부패한 판사, 검사, 경찰들과는 달리 ‘범죄 없는 고담시’를 외친다. 팔코니가 사라진 이후 고담 갱들의 새로운 두목이 된 말로니를 피고석에 앉혀놓고 재판을 하며, 고담시 갱의 절반을 기소하는 성과를 거두기도 한다. 갱들과, 부패한 경찰들의 표적이 될 거라는 시장의 조언에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다크 나이트>초반의 하비 덴트는 배트맨/브루스 웨인보다도 더 확신에 차 있고, 정의감이 투철해 보인다. 

박쥐가 배트맨의 상징이고, 트럼프의 조커 카드가 조커의 상징이라면, 하비 덴트의 상징은 그가 항상 가지고 다니는 25센트짜리 동전이다. 1922년에 주조된, “In God We Trust”라고 새겨져 있는 그 동전은 뒷면이 없다. 양쪽이 다 앞면이다. 하비 덴트는 그 동전의 앞뒷면을 걸고 타인과, 그리고 자기 자신과 내기를 하곤 한다. 항상 자신의 예상대로 앞면이 나올 수밖에 없는 그 동전을 가지고서 말이다. 그 동전은 확신에 차 있는 하비 덴트의 자신감을 의미하기도 하고, 어떠한 상황이 닥치더라도 ‘계속해야 한다’는 의지의 표현이기도 하다. 항상 앞면만을 보이던, 하비 덴트의 상징인 그 동전에, 조커에 의해 뒷면이 생기게 된다. 

그가 사랑하던 레이첼의 죽음을 막지 못하고, 자신의 얼굴도 화상으로 흉측하게 일그러지자 정의감 넘치던 검사 하비 덴트는 이제 투페이스로 변해버린다. 자기에게 벌어지는 일을 받을 만한 사람이 되지 못한, 운명애적 강도의 문턱을 넘지 못한 하비 덴트는 분노와 복수심에 사로잡혀 악의 화신이 된다. 그런 투페이스는 배트맨과 고담시에게 조커보다도 더 위협적인 존재다. 배트맨을 포함한 고담시의 대부분이, 배트맨과는 다른 방식으로 고담시를 구해낼 인물로서 하비 덴트를 믿었기 때문이다. 조커는 이제 하비 덴트의 추락을 고담시에 증명할 수 있게 되었다. 하비 덴트의 투페이스화는 결국 조커의 작품이며, 조커의 연출이다. 그리고 그 덫에서 하비 덴트는 빠져 나오지 못하고 스스로 투페이스가 되기를 선택한다. 

하비 덴트는 개인적인 불행을 당하자 그가 주장하던 공평에의 의지(즉 그가 생각하던 정의)는 곧바로 상실감, 억울함과 분노로 화한다. 복수와 원한의 주체! 스스로를 운명의 피해자로 규정하고 원한에 사로잡힌 복수심에 불타는 주체일 뿐이다. “정의는 복수심 이상의 것”이지만 그렇게 고담의 희망, 빛의 기사 하비 덴트 마저 악의 형상으로 변해버린다. 이것은 고담시민들에게는 심각한 추락이다. 악과 싸우던 영웅이 하나의 괴물 투페이스로 전락했을 때 그들이 겪게 될 절망감. 이것이야말로 조커가 의도하는 바였다. 결말 쇼트에서 배트맨이 시민들에게 하비 덴트라는 상징적 자리를 지켜주기 위해 스스로 범죄자의 역할을 뒤집어 쓰고 경찰들에게 쫓기는 장면은 사물과 사태가 우리의 인지와는 거리가 있음을 보여주기도 한다. 배트맨에게는 그것만이 조커의 승리를 막는 길이기도 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제 배트맨은 조커와, 투페이스가 되어버린 하비 덴트, 그 둘을 모두 상대해야 한다. 

  
 
4. 얼굴과 가면 사이

앞에서 우리는 이 예외자들이 어떻게 전체로부터 불거져 나와 자신의 자리를 확정함으로써 영웅 혹은 악당이 되는가를 살펴보았다. 하지만 아직 조커가 악당인 이유는 밝히지 못했다. 배트맨과 조커가 고담 시민들과 구별되는 이유, 그리고 원한에 사로잡힌 투페이스와 어떻게 다른지 구별하기는 했지만 아직 배트맨과 조커가 다른 지점을 식별해 내지는 못했다. 이제 배트맨과 조커를 구별하기 위해서는 그 둘의 가면에 대해서 고찰해야만 한다. 

사실 배트맨의 힘은 그의 익명성에서도 나온다. 배트맨이 작동하기 위해서 사람들은 그가 누군지 몰라야 한다. 이것은 언뜻 생각해 보면 기이한 일이다. 사람들이 배트맨이 브루스 웨인이라는 것을 안다고 해도 바뀔 것은 별로 없어 보인다. 그는 여전히 막강한 배트맨 슈트로 범죄자들을 포획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그것은 더 이상 신비롭지도 공포스럽지도 않다. 그가 브루스 웨인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이는 그가 누구인지 알려졌기 때문이 아니다. 만일 사회 내부에서의 그의 정체가 드러나게 되면 배트맨은 전체 다수로부터 구별되는 그의 위치를 더 이상 지킬 수 없게 될 것이다. 그가 구성원 내부와 아무런 구별점을 갖지 못한다면, 그는 고작 실력이 뛰어난 경찰에 지나지 않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시금 배트맨의 힘이 이같은 그의 익명성, 종국적으로 그의 위치에서 나오는 것이란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조커 역시 이 비밀, 배트맨 가면의 힘을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배트맨에게서 가면을 벗겨버리려고 하는 것이다. 가면 속의 얼굴(정체)이 드러나는 순간 배트맨은 힘을 잃는다. 그때 배트맨은 법 아래 놓인, 사회 내부로 돌아와 버린 브루스 웨인일 뿐이다. 배트맨에게 가면이란 이처럼 타인들과 구분되는 위치를 창출한다. 배트맨이라는 가면은 배트맨을 배트맨이게 만드는 신성한 가면이다. 그래서 배트맨-브루스 웨인은 이중생활을 하느라 분주하다. 하지만 이와 달리 조커는 이중역할을 하지 않는다. 

조커는 누구인가? 조커는 이름 그대로다. 트럼프 게임에서 조커는 게임의 룰에서 벗어나 있는 카드다. 게임에 참여하면서도 게임의 룰에 얽매이지 않는 자. 그것이 조커의 정체다. 그래서 그는 다른 자들보다 강하고, 게임 내부로 들어와 게임의 구성요소와 기능인 나머지 카드들(시민들)을 조롱한다. 게임 내부에 자리를 갖고 있으며 그 게임을 지속시키려는 배트맨조차도 조커에게는 비웃음의 대상이다. 그가 조커인 한에서 그의 변화무쌍하고 능수능란한 변신은 당연하다. 조커는 어떤 상황에서든 그 무엇이건 될 수 있는 자가 아니던가.

그래서 조커에게는 지문과 DNA, 치열기록도 존재하지 않는다. 심지어 그의 옷에는 상표조차 없다. 즉 그는 체계에 등록된 규정성들을 모두 지우고 그 자신 전체 조커가 되어버린 인물이다. 조커라는 가면이 그의 전존재가 되어버린 존재. 그것이 조커다. 배트맨에게 알프레드나 레이첼, 루시우스와 같은 조력자가 있는 반면, 조커에게는 가족도, 친구도 없다. 상황과 욕망(의지)만이 있다. 이것이 배트맨과 조커의 결정적인 차이다. 브루스 웨인이란 존재는 배트맨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배트맨에게는 브루스 웨인이라는 자리가 필요하다. 때론 거추장스러운 이 브루스 웨인이란 존재는 바로 배트맨의 안식처다.

브루스 웨인과 배트맨은 서로 갈등하지 않는다. 브루스 웨인은 배트맨으로 지내기 위한 위장, 가면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브루스 웨인은 껍데기이며 그의 진짜 가면은 배트맨이 아니라 브루스 웨인이라는 얼굴이다. 하비 덴트와 레이첼을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서도 배트맨은 추호의 망설임도 없이 레이첼을 택한다. 배트맨은 항상 브루스 웨인이기 때문에 선택은 간단하다. 그는 배트맨 마스크를 쓰고 레이첼을 구하러 가지만 그 순간에도 그는 여전히 브루스 웨인으로 선택하는 것이다. 

조커와 달리 배트맨은 게임을 지속시키고, 유지시키는 게임의 수호자다. 조커는 게임의 내부에 참가하면서 게임의 규칙 밖에 있다. 하지만 게임이 유지되지 않으면 조커 역시 무의미하다. 조커는 게임 외부적 존재지만 내부가 없어지면 의미가 없어진다. 반면 배트맨은 외부가 필요 없어지면 더욱 좋다. 그는 스스로 소멸하는 그 날을 위해 움직인다. 그것이 조커가 배트맨에게 “넌 날 완성시켜”라고 하는 말의 의미다. 게임(사회)이 유지되어야만 자신이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규칙대로 움직여야만 하는 배트맨을 조커는 비웃는다. 예외적, 탈법적, 우발적 존재인 조커에게 계획대로 움직이는, 게임의 룰 안에 종속된 존재들은 가소롭기 짝이 없다. 그럼에도 조커는 배트맨을 완전히 비웃을 수 없다. 왜냐하면 배트맨은 게임 내부에 있지만 동시에 조커와 같은 위치-외부에도 머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배트맨은 조커보다 불리하지만, 조커보다 유리하다. 그것이 바로 조커의 슬픈 표정의 의미다. 

내부에 자기 자리가 없는 자의 슬픔, 게임을 망쳐야만 하는 존재, 그럼으로써만 자기 존재가 의미 있고 유지되는 존재. 따라서 조커는 유쾌하게 게임을 하면서도 자기 자리가 없음을 슬퍼한다. 경찰서 유치장에서 탈출해 달리는 차 밖으로 얼굴을 내민 조커의 표정은 알 수 없는 페이소스로 가득하다. 내부에 그의 자리가 마련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내부에서 스스로를 삭제하고 외부에서 내부로 들어와 그것을 파괴하는 자가 조커다. 배트맨이 자기 얼굴을 감추고 배트맨으로 활동하는 것과 달리 조커는 화장을 하고 있다는 점도 이것을 의미한다. 조커는 얼굴에 화장을 해서 조커의 얼굴을 가진다. 배트맨은 원래의 얼굴을 감추고 박쥐의 가면을 쓴다. 

내부와 외부에 동시에 있는 자, 그 둘의 관계를 유지하며 그 경계선을 계속적으로 사고하는 자, 그 경계들을 넘나들며 계속 게임을 진행시키는 자, 그것이 배트맨이다. 한편 게임을 혼돈의 장으로 만들려던 조커는 그 자신이 중지당한다. 주지하다시피 조커는 하나의 게임에서 중복해 사용될 수 없다. 반면 배트맨은 지속적으로 요청된다. 게임이 지속되는 한, 게임의 룰은 계속 작동하고 그것을 유지하려는 힘 또한 계속 필요하기 때문이다. 게임이 지속되고, 룰이 작동하며, 그것을 어기려는 자가 있는 한 배트맨은 필수적이다. 따라서 조커를 완성시키는 것은 배트맨이지만, 배트맨을 탄생․유지시키는 것은 조커다.  

이것은 조금도 흔들림이나 회의가 없는 조커의 태도에서도 드러난다. 배트맨이 자신의 정체를 밝히려고 하거나, 레이첼의 죽음에 상실감을 갖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배트맨의 고뇌는 배트맨에게 사회 게임 내부의 자리가 있기 때문에 발생한다.  반면 조커에게는 내부에 자리가 없다. 조커 없이도 게임은 진행될 수 있지만 규칙의 작동 없이 게임은 진행될 수 없다. 없어도 되는 존재(조커)와 있어야 하는 존재(배트맨)의 대결. 그것이 게임 속에서 그 둘의 위상차이다. 즉 배트맨은 ‘내부 국외자’(inside-outsider)이며 조커는 엑스트라, 여분, 넘침이다. 
 
조커는 게임의 파국, 게임의 중단, 게임 장의 쑥대밭을 목표로 한다. 그러나 그가 목표로 하는 것은 게임의 파국이지 그것을 통한 자기 위치의 소멸은 아니다. 게임은 조커 없이도 진행될 수 있다. 배트맨은 게임 내부에서 생겨났으며, 게임 내부에 브루스 웨인으로서의 자리를 갖고 있다. 내부에서 생성되고 내부에 자리가 있으면서 외부에 거하며, 내부에서 활동하는 자 배트맨과 내부에 자기 자리가 없어도 되는, 엑스트라로서 게임의 흥미와 의외성, 변수를 위해 존재하는 카드 조커가 배트맨을 이기기는 힘들어 보인다.

게임 자체가 발생시키는 잡음, 그것이 배트맨이다. 배트맨자경단은 이 소음의 소음이다. 고담시에 정화의 바람과 희망을 일으키려던 배트맨이 의도했던 것은 이들 자경단과 같은 조직의 발생 아니었는가. 그런데 배트맨은 그들을 반기지 않고 오히려 체포하여 묶어둔다. 왜 그런가? 영웅노릇을 독점하기 위해서인가? 배트맨에게 저지당한 자경단원은 “당신과 나의 차이가 무엇이냐?”고 따진다. 배트맨은 “나는 하키 보호대 따위는 입지 않는다”고 답하지만 그들은 배트맨의 위상학에 대해 아무 것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하키 보호대를 입을 수밖에 없는 시민 자경단과 최첨단 과학기술로 만들어진 배트맨슈트에 결정적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니다. 정의를 실행할 수 있는 능력―경제력이든 기술력이든―의 차이? 그런 답은 왠지 치사해 보인다. 그렇다면 배트맨이라는 존재를 처음으로 고안하고, 갱들에게 과감히 맞서기를 시작한 선도성? 즉 창조성과 모방이 그들 간의 차이인가? 자경단원이 배트맨과 달리 총기를 사용하기 때문도 아니다. 그것은 바로 그들이 배트맨을 모방함으로써 사회 전체와 구별되는 곳에 자신의 자리를 창출해 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외부의 외부는 결국 내부가 아닌가? 자리는 모두 3개다. 전체집합으로서의 사회, 그리고 그것의 작동을 보호하려는 자와 그것을 위협하는 자. 나머지 자리는 모두 이 3개의 자리에 귀속된다. 갱들이 결국 사회 전체의 일원이며, 조커의 하수인들이 조커의 수족에 지나지 않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렇다면 배트맨의 자리는 과연 어떤 자리이며, 이 자리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5. 세계에서 바라보는 영웅-국가

영웅, 이 예외자는 어떻게 구성되는가? 그가 보호하거나 수호하려는 집단과의 관계를 통해서다. <다크 나이트>에서 이 집단은 고담시다. 배트맨은 어떻게 탄생했는가? 고담시에 만연한 범죄를 소탕하고, 범법자(갱)들에게는 공포의 심볼로, 시민들에게는 법과 정의가 살아있음을 보여주기 위해 탄생한 것 아닌가? 그러므로 배트맨은 탄생에서부터 ‘법’과 관련해 등장한다. 고담시는 법이 형성하는 하나의 집합적 단위이며 고담시민들은 이 법과 관련해 형성된 개별자들의 집합이다. 아무런 공통점도 없는 개별자들을 하나의 단위로 묶어주는 집합의 조건이 이 영화의 경우에는 법이고, 거기서 고담시민들이 형성된다. 

고담시는 법 아래 포섭된 주체들이 어떤 형상을 가지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무대다. 법이 존재하는 한, 사람들은 거기에 순응하거나 위법자가 되는 수밖에 없다. 법 아래에서 가능한 두 가지 형상은 착실한 준법자가 되는 것과 그것을 어기는 자가 되는 것이다. <다크나이트>에서는 일반 시민들과 갱들이다. 법 아래에서 법을 어기는 자들, 그들은 고담의 갱들이며 그 대표가 팔코니의 뒤를 이은 마로니와 갱들의 두목들이다. 

그리고 바로 이런 점 때문에 사람들은 하비 덴트에게 남다른 희망을 건다. 법 밖에 있는 존재인 배트맨(또 다른 의미에서 범법자인 배트맨)이 법 안에서 살아가야 하는 주체들에게 제시할 수 있는 것은 결국 상징적인 존재로서의 역할에 국한된다. 배트맨은 상징적 투쟁의 수행자이며 하비 덴트는 실천가능한 정의실현의 수행모델이다. 이것이 배트맨과 하비 덴트의 다른 존재위상이다. 우리는 여기서 법 안에 있는 고든과 하비 덴트 그리고 위법적인 갱들과 마로니(팔코니)라는 대립쌍을 발견한다. 그러나 이들 모두 법안에 있다는 면에서는 공통된다. 법을 수호하거나 집행하는 자들과 그 법을 어기는 자들로서의 갱들. 이 둘의 싸움은 법의 수행과 위법이라는 축으로 전개된다.

반면 배트맨과 조커는 둘 다 법 외부적인 존재이다. 물론 법은 어떤 식으로든 그들을 정의한다. 배트맨이 법을 수호하기 위해 범법자가 되어 있는 것처럼 조커 역시 ‘탈-법ex-law’적 존재로서 법 밖에 있는 자다. 법은 조커에게도 적용되지만 조커 자신에게 법은 별 의미가 없다. 조커는 법은 물론 계획과 규칙, 모든 규정성들로부터 벗어난다. 법 밖에서 움직인다는 점에서 조커는 단순한 위법자가 아니라 법의 추문을 발가벗기려 하는 자, 즉 탈법자다. 대중들을 “문명이 허락한 만큼만 충실한 자들”이라고 부르는 조커에게 법의 준행을 주문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 그리하여 조커와 배트맨의 대결은 법 밖에서 법의 허약성을 드러내려는 자와 법을 수호하고 지키기 위해 법 밖에서 활동하는 자의 대립으로 요약된다. 그럼에도 그 둘 존재의 특개성이 법 밖에 위치한다는 점에서 둘은 공통분모를 갖는다. 

하지만 이 둘은 대극적이다. 조커가 법의 허약성을 드러내기 위해 어떤 수단과 방법도 마다하지 않는다는 점이 조커를 악한으로 부르게 하지만, 사실상 그런 이유로 조커를 악당이라고 부를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런 규칙과 법 자체를 인정하지 않고, 그 법의 추함을 알고 있으며, 그것을 메시지로 전하려 하는 자는 단순한 위법자로서의 악당과 구별되며 그것만으로 그의 정체성이 규정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보자면, 배트맨이 조커를 만든 것이다. 하나의 선, 더 정확히 말해 선을 수호하겠다며 법 밖에서 출현하는 자는 자신의 대립쌍을 생성시킨다. 법의 경계를 먼저 넘은 것은 배트맨이다. 팔코니와 마로니가 법 안에서 법을 어긴다면, 배트맨은 법의 경계 밖으로 들어서기 때문에 법의 경계선을 알려준다. 그러므로 그를 뒤따라 법을 이탈하는 자가 생기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배트맨이 조커를 낳았다면 이 악을 완성시키는 것도 배트맨이다. 자신이 불러낸 괴물과 싸우며 퍼즐을 완성하는 것, 그것이 배트맨이 하는 일이다. 그것이 바로 고담시에 배트맨이 필요 없는 날은 오지 않을거라고 말하는 레이첼이 알게 된 것이었다. 즉 법이 존재하는 한, 범죄는 있을 수밖에 없으며, 범죄가 있는 한 배트맨 또한 사라질 수가 없는 것이다. 

집합적 다수로 만들어 버리는 기제들가 이 영화에서는 법이다. 법은 사실 예외를 통해 작동하는 것이긴 하지만, 법의 예외지대에 놓인 사람은 두 가지 방식으로 불거진다. 하나는 호모 사케르, 또 다른 하나는 배트맨이나 조커와 같은 자들이다. 배트맨과 조커가 법과 관련하여 동일한 위치는 어디이며 갈라지는 지점이 어디인가는 앞에서 살펴보았다. 법의 경계에서 법을 수호하는 위치, 그것이 배트맨의 위상이다. 법의 경계를 감시하는 자, 그럼으로써 자기 자리를 만드는 사람. 그것이 배트맨이다. 그런데 법은 형식상으로 그런 예외자를 허용하지 않는다. 법은 그래서 배트맨을 통해서 작동하면서 배트맨을 위법자로 간주해야만 한다. 따라서 이 영화는 법과 탈법자의 투쟁, 혹은 법과 법을 수호하는 자간의 갈등으로 볼 수 있다. 더불어 법 안에 머무는 주체들과 그 법을 수호하는 자가 어떤 관계를 형성하고 있는가를 보여준다. 따라서 “네가 날 완성시킨다”는 조커의 발화는 고스란히 배트맨의 것이다. 만일 조커(탈법자)가 없었다면, 법의 수호자 배트맨 역시 작동할 수 없다. 배트맨이 조커를 불러냈다면 그건 배트맨의 위상이 법의 경계를 지시해주었기 때문이다. 조커를 완성시키는 것이 배트맨이라면 배트맨을 작동시키는 것은 조커다. 

고담시민들의 희망에 불을 끄지 않기 위해 하비 덴트의 죄를 자신이 대신 지고  범죄자가 되어 어둠 속으로 쫓기는 배트맨은 단순한 해피엔딩을 거부하며 이번에는 숭고한 희생자의 모습까지 취한다. 배트맨, 그는 정녕 고담시에 도래할 미래를 위해 스스로 저지르지도 않은 죄를 뒤집어 쓰는 숭고한 희생자, 타인들의 인정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는 진정한 진리의 투사인가? 하비 덴트와 같은 이들이 희망의 증거가 되어준다면, 고담시에 미래는 밝아올 것인가? 배트맨은 이를 위해 자신을 희생한다. 그는 고담시민들에게서는 추악한 범죄자로 기억될지 모르지만 그 서사를 바라보는 관객들에게는 더없이 숭고한 영웅으로 등극한다. 

이상의 논의를 종합하자면 영웅이란 어떤 ‘가능성들’의 이름이다. 그리고 이 가능성들이 방향성을 잃거나(하비 덴트) 그 이름이 부여될 때(조커) 혹은 어떤 힘에 나포되어 버릴 때 악이 된다. 그러나 영웅은 빠져나가야 한다. 하나의 단위로부터 빠져나가는 것의 이름 그것이 영웅이고, 이 영화에서는 배트맨이다. 배트맨은 경찰견에게 쫓기면서 배트포드에 올라탄다. 마지막 장면에서 그는 고담의 도로를 질주하며 화면 밖으로 빠져 나간다.  

누가 이 전체로부터 빠져나갈 수 있는가? 배트맨-브루스 웨인은 고담시 모든 사람들의 휴대폰을 도청할 수 있는 장치를 개발했다. 물론 영화에서 배트맨의 조력자인 루시우스는 그러한 감시와 통제의 도구개발과 사용에 반대한다. 배트맨은 현재 고담시의 절대적 악, 최대혼란을 일으키는 조커를 잡기 위해 그것을 사용한다. 물론 단 한 번만 사용하고는 그것의 파괴권을 루시우스에게 넘겨준다. 영웅의 도덕적 위험성이 아슬하게 정당화되려 한다. 고담시에 혼란과 파괴를 일으키는 조커를 잡는데 사용되기 때문이다. 그것이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은 바로 시스템을 유지한다는 목적 때문이다. 이것이 배트맨의 위치이다. 그렇다면 게임의 내부에 자기 자리를 가지고 있으며, 어떤 의지를 가지고 외부에 거하는 자, 게임의 규칙을 파괴하려는 자를 찾아내 처벌하는 자를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시민들을 보호하고 유지할 수 있기 위해서는 어떤 장치든 사용할 수 있고, 어떤 위치에도 도달할 수 있는 존재. 그리고 작금의 현실에서 그러한 위치가 가능한 것은 국가밖에 없다. 주지하다시피 사회와 국가는 다른 것이고, 국가는 사회를 보호하려고 한다. 이로써 우리는 헤겔이 근대를 왜 영웅이 불가능한 시대라고 파악했는지 알 수 있다. 영웅의 자리는 개인이 아니라 국가라는 그 실체가 불분명한 단위가 차지해 버렸기 때문이다. 이제 영웅이 어떤 새롭게 돌출하는 개인이나 집단이 될 것인지, 아니면 점점 더 강력해지는 국가가 여전히 그의 자리를 확보할 것인지 지켜보는 일이 우리에게 남겨져 있다.

  
 
부기: <배트맨 다크나이트>는 법이나 하나의 단위를 둘러싼 위치들의 놀이를 보여주기도 하지만 오늘날 국제질서의 상황에서 보자면, 세계 속에서 미국의 위치에 대한 영화이기도 하다. <다크나이트>는 미국이 선전하는 자기 이미지다. 미국을 세계 전체 위치에서 미국인 스스로가 바라보는 방식에 관한 영화, 그것이 배트맨이다. 고담시는 세계, 배트맨이 지키려는 것은 신자유주의적 질서, 갱들은 별 볼일 없는 국가, 조커는 테러리즘을 감행하는 불량국가. 이것은 미국의 신화다. 높은 빌딩에 홀로 서서 세상을 굽어보는 배트맨, 그것은 미국이 상상하는 자기들의 위치다. 알프레드 역을 맡은 마이클 케인도 한 인터뷰에서 “슈퍼맨이 미국을 바라보는 자신의 모습이라면, 배트맨은 미국을 세계에서 바라보는 미국”이라고 말한 바 있다. 

* 글 출처: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 르몽드 시네마 크리티크

http://www.ilemonde.com/news/articleList.html?sc_sub_section_code=S2N40&view_type=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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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자서성희

등록일2018-0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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