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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숭범] 이 죽음을 어떻게 살게 할 것인가- 구스 반 산트의 ‘레퀴엠 3부작’

 
 
인칭이 다른 죽음들을 향한 미로
 
수많은 영화에서 죽음은 삶의 스승으로 등장한다. 우리는 도처에 편재하는 그 스승을 두고도 잠깐의 각성과 평범한 망각을 거듭해 왔다. 이는 죽음을 소재로 한 영화가 때론 식상하면서도 때론 절실히 필요한 이유가 된다. 지금도 우린 죽은 자들이 물려준 유산 위에서 자기 생을 짓는다. 당신도 쉬이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흔하게 맞닥뜨리는 여러 모양의 죽음마다 고유한 잠언이 새겨져 있다는 사실을. 그러나 우린 여전히 죽음에 대한 이해와 오해 사이에서 길을 잃곤 한다. ‘레퀴엠 3부작’, 혹은 ‘죽음 3부작’으로 불리는 구스 반 산트의 영화들은 바로 그 긴장의 미로를 헤매는 영화체험을 안긴다.   
 
좀 더 부연하면, ‘레퀴엠 3부작’에는 죽음에 관한 이해와 오해를 동시에 중단시키는 압도적인 순간들이 있다. 이를테면 반 산트는 잘 알려지지 않은 우발적 사건으로서 ‘죽음/죽임’을 탐색한 바 있다(<제리>). 그는 어떤 극적 제스처도 없는 죽음과 죽음이 남긴 잔영 속에서 삶과 죽음이 동시에 거주하는 한 방식으로서 ‘인간의 시간’을 하염없이 바라보게 한다. 두 명의 제리(케이시 애플렉, 맷 데이먼 분)가 먼 지평선을 향해 걷는 것을 익스트림 롱쇼트로 잡을 때, 우린 압도적인 자연의 시간을 간섭할 수 없는 그들이 먼지처럼 왜소해지는 것을 보게 된다.  
 
한편 반 산트는 미국인에게 세기말적 충격으로 회자되는 콜롬바인 총기난사 사건을 사회적 애도의 대상에서 격리시켜 놓는다(<엘리펀트>). 반 산트는 그 비극적 사건을 운명으로 귀속될 수 없는 우연한 죽음들의 겹침으로 그린다. 그래서 <엘리펀트>를 경유하고 나면, 살아남은 자들이 사후에 각색한 죽음의 이유나 가치는 의미를 잃게 된다. 어떤 죽음에 대한 추념도 단선화 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게 된다. 이를 위해 <엘리펀트>는 익명에 잠든 죽은 이들의 마지막 동선을 침착하게 계열화한 후, 그들이 모이고 갈라지는 순간의 신비를 극대화한다. 그때 우리는 응당 지녔어야 할 윤리적 태도를 환기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반 산트는 살아서는 역사였고, 죽어서는 신화가 된 존재의 죽음을 매우 특기할 만한 방식으로 소환한 바 있다(<라스트 데이즈>). 영화 속 인물의 이름은 블레이크(마이클 피트 분)이지만, 우리는 그가 너바나(Nirvana)를 이끌었던 커트 코베인의 영화적 현현이라는 것을 안다. 반 산트가 주목하게 한 것은, 고독과 환멸의 세계에서 이미 ‘죽어가고 있던’ 블레이크의 내면, 그것이 전부다. 시간적으로 뒤엉킨 사건들과 그의 종잡을 수 없는 혼잣말과 행동은 이 영화에 대한 안전한 독해를 끊임없이 방해한다. 그런 어떤 순간에 우리는 그가 스스로 자신을 애도하면서 신비한 죽음 앞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결국 <라스트 데이즈>의 결말은 과잉의 의미로 신화화 된 죽음이 여러 갈래의 진실을 허락하는 풍경으로 온다. 
 
그처럼 <제리>, <엘리펀트>, <라스트 데이즈>는 형태가 구별되는 죽음에 대한 각기 다른 탐색이다. 그러면서도 그들 영화는 단 하나의 질문으로 수렴되는 듯 보인다. 그 죽음을 어떻게 살게 할 것인가. 죽음은 생물학적으로 살아있을 때 보장되는 인격과 의식, 고유한 시간이 닫히는 사건으로 온다. 후설의 방식으로 번역하면, ‘과거파지’와 ‘미래예지’ 사이에서 자기 자신을 전유해온 개체의 ‘의식에 대한 현전’이 멈추는 순간이다. 이 틀림없는 해설에 반 산트도 이견이 있을 것 같지는 않다. 다만 반 산트의 죽음에 대한 입장은, 시간이 자신을 간섭하던 한 존재로부터 돌아서는 사건이라는 데 방점이 있다. 죽음에 관해선 인간이 객체인 셈이다. 바로 그 지점에서 반 산트는 우리에게 묻는다. 우리 가까이로 완전한 ‘무’가 찾아온다면, 질적으로 달라져버릴 시공간을 어떻게 견뎌내고 놓아줘야 하겠느냐고. 
 
그리하여 다시 앞서 던진 질문으로 돌아왔다. 그 죽음을 어떻게 살게 할 것인가. 일단 이 문장을 하나의 수사, 혹은 역설로 치부해선 안 된다. 우린 어떤 죽음은 죽지 않는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안다. 가령 제임스 딘, 마릴린 먼로, 지미 헨드릭스, 엘비스 프레슬리는 유령이 되어서도 잠들 수 없었다. 의혹과 논쟁의 자리에 수시로 불려 다니는 망자 중엔 진 세버그, 투팍, 마이클 잭슨 등도 있다. 그들은 생전에 광범위한 팬덤을 움직이던 스타였으며 죽어서는 시대의 아이콘이 되었다. 흥미로운 건, 살아있는 그들을 떠받들던 담론장의 위력이 죽은 그들을 쥐고 흔드는 폭력으로 전환되는 과정이다. 예컨대 사랑하는 스타가 죽고 나면 그를 향하던 거대한 리비도를 전환해야 한다. 그러니까 영원한 부재가 된 이름에 적절한 묘비명을 세워야 한다. 그 지난한 과정에 우리는 불필요한 언어와 논리를 증식시킨다. 커트 코베인의 ‘죽음 이후’에도 그와 같은 폭력적 애도의 과정이 진행된 바 있다. 
 
그런데 비단 사회사적 사건이 되는 죽음만 신비에 둘러싸이는 건 아니다. 야기된 혼란과 슬픔의 규모는 다를지라도, 예기치 않은 순간에 영원한 공백, 불가역적인 소멸, 완전한 무로 사라진 이를 해명하는 건 언제나 난제다. 그렇게 보면, 죽음을 죽음의 자리로 편안히 돌려보내는 일이 불가능할 때, 나만의 상상적 진실에 의지해 그 죽음을 어떻게 살게 할 것인가를 자문하는 것도 한 방법일 것이다. 
 
그래서 지금부터는 죽음을 해명할 수 없는 신비, 그 자체로 인정하고 접근했던 반 산트의 방식을 따라 글을 열어볼까 한다. 가급적 당신도 그러한 태도에 동참하길 권유한다. 지금 당신과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그 누구도 죽어보지 않았기에 죽음은 항상 낯선 저편의 손짓이지 않는가. 물론 우리가 잘 아는 영화들에서 신비를 벗어버리는 죽음을 여러 차례 목격한 건 사실이다. 그러나 하나의 의미로 닫혀버리는 그런 죽음은 계산된 허구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죽음이 합리적 인과관계를 따라 서사의 한 매듭으로 도착한다면, 장담컨대 그것은 이데올로기적 얼룩일 뿐이다.
 
비평작업에 필요한 논지를 구체화하기 위해 구체적인 관점을 제안하기로 한다. 이 글은 ‘레퀴엠 3부작’이 묘사하는 죽음의 다른 형태들에 각기 다른 인칭을 부여할 것이다. 예컨대 <제리>는 외관상 ‘너의 죽음’을 다루지만 너를 죽임으로 감지되는 나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이다. <엘리펀트>는 무인칭의 죽음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자꾸 바로잡는다. <라스트 데이즈>는 공적인 합의의 장으로 옮겨지는 3인칭 죽음에 윤리적 거리를 주문하는 전략이다. 지금부터는 반 산트의 이미지텔링을 따라 세 가지 기묘한 죽음과 그에 대한 이해와 오해 사이의 미로를 파헤쳐보기로 하겠다.  

  
 
자기 전환으로서 ‘1인칭 죽음’-<제리>
 
  
 
일반적으로 죽음이 3인칭으로 회자될 때 그 사건은 비일비재한 비극, 편재하는 불행에 불과하다. 그러나 죽음이 1인칭 사건이 되면, 그것은 절대적이고 유일무이한 개인적 종말, 혹은 불가역적인 공백이 된다. 이 종말의 사건이 1인칭으로 올 때, 나는 그 사건을 재구할 언어를 박탈당한다. 내가 죽는 사건이란, 사실상 내가 체험하는 게 아니라 내 주변이 체험하는 것이다. 나로서는 이제 모든 것이 불가능해졌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래서 나는 더 이상 해석을 위한 언어의 주인이 아니다. 나의 죽음은 그런 최종적인 ‘무’라고 할 수 있다.
 
그 연장선에서 보면 우리에게 의미있는 죽음은 대게 2인칭임을 인정해야 한다. 나와 시간과 삶을 공유한 가까운 사람, 서로의 이름을 친근하게 불러줄 수 있는 사람의 죽음이야말로 골격과 감정을 갖춘 철학적 문제가 되지 않던가. 실제로 2인칭 죽음은 나의 일부에 대한 죽음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제리>는 결국 살아남는 제리의 입장에서 볼 때, 2인칭 죽음을 다루는 듯하면서 기실 1인칭 죽음에 대한 사유를 유도하는 텍스트다. 불가능한 것(1인칭 죽음)을 이야기하기 위해 2인칭의 죽음을 경유하는 전략을 차용했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언급되어야 했으나 제대로 질문되지 않았던 논제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반 산트가 두 주인공 모두에게 ‘제리’라는 이름을 부여한 이유는 무엇인가. 
 
반 산트는 <제리>를 짤막한 신문기사에서 상상했다고 한다. 기사 속 사건은 두 친구가 사막을 헤매다가 한 친구가 다른 친구를 죽였다는 내용이었다. 이처럼 반 산트가 해당 사건에 관해 손에 쥔 정보량은 매우 미미한 것이다. 비극의 경과나 세부적인 진실은 살아남은 친구, 곧 가해자만 알 수 있는 상황이다. 그런데 반 산트는 그 사건을 가져와 두 인물에게 동일한 이름을 부여한 후, 그들의 마지막 동행을 설계한다. 그러니까 반 산트는 죽인 주체와 죽은 대상이 동일한 이름으로 호명되는 여정, 죽음이라는 수동적 사태와 죽임이라는 능동적 행위가 분간되지 않는 모험을 상상한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사막에서 한 친구가 다른 친구를 죽였다는 신문 기사의 팩트를 영화로 옮겨온 것 뿐일가.   
 
물론 <제리>의 결말을 2인칭 죽음에 주목해 해석할 수도 있다. 어떤 결합의 파괴로서 오는 2인칭 죽음. 이를테면, 길 없는 길을 함께 만들었던 사람, 같은 언덕과 고비를 넘었고 같은  태양과 날씨를 견딘 사람의 죽음은 함께 한 시간들의 최종적인 종말로 온다. 삶을 섞어온 대상의 죽음은 한 세계의 상실이면서 사적이고 내밀한 결합의 파괴인 것이다. 여기서 더 나가면, <제리>의 결말을 애도 작업에 대한 상징으로 읽을 수도 있다. 제리의 제리에 대한 ‘살인’을 물리적 가해로 보지 않는다면, 소중한 타인을 내 안에서 죽게 하는 관념적 실천으로 볼 수도 있는 것이다. 사실상 2인칭 죽음의 최종적 성사란, 그에 대한 애도작업이 끝난 이후라고 할 수 있다. 애도작업의 상징성은 상대와의 연결고리를 스스로 끊는 결단, 나를 반사하는 고유한 한 거울을 깨뜨리는 실천에 있지 않겠는가. 
 
그러나 <제리>는 1인칭 죽음을 상징하는 2인칭 죽음에 대한 이야기라고 할 때, 더 각별한 의미를 갖는다. 반 산트의 의도에 대한 오해일 수 있지만, 이는 <제리>의 이미지텔링을 더 심미적으로 재해석하기 위한 이해에 가까운 오해일 수 있다. 영화 시작부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두 인물이 자동차를 타고 도로를 질주한다. 아직까진 다음 순간을 안내하는 길의 흔적이 있다. 그런데 곧 그들은 차에서 내려 사막에 들어선다. 정확한 이유는 주어지지 않는다. 그때부터 그들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걷고 뛰면서 길도 없는 언덕과 벌판, 산등성이를  지나치기 시작한다. ‘사건’없는 사태의 무한한 나열이 시작되는 것이다. 이때 흘러나오는 음악은 아르보 패르트의 ‘거울 속의 거울’이다. 단 세 개의 음으로 코드만 달리한 채 오르막내리막을 반복하는 선율이 거기에 있다. 사실, 거울과 거울이 마주보면 그 투명한 반사면 안엔 상대이면서 자신이기도 한 이미지들이 서로의 ‘깊이’가 된다. 나이기도 하고 상대이기도 한 이미지들의 무한 반복. 이것은 거대한 힌트다. 반 산트는 <제리>의 시작부터 2인칭 죽음과 1인칭 죽음이 분간되지 않는 길 없는 길을 상상한 것이다.   
 
이 같은 상상의 여정을 신비로 비약시키는 데에는 해리스 사비데즈의 카메라가 절대적 기여를 한다. 재차 말하면, <제리>는 1인칭과 2인칭 사이의 구별이 무화된 죽음을 향해가기까지 사건이라고 언급할 만한 질적 변화가 거의 부재한 영화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 실험적 영화가 끝나기까지 특별한 긴장을 놓을 수 없다. 이 긴장의 기원 중 하나는 왜소한 인물들의 종잡을 수 없는 여정을 절대적 시선주체가 내려 보고 있다는 느낌과 그 시선주체에게 어떤 권능이 부여되어 있다는 판단과 연관된다. 
 
이렇게 설명해볼 수 있겠다. 사막을 걷는 여정 초반부만 보면, 간단한 대사조차 내뱉지 않는다는 점에서 두 명의 제리나 황량한 사막이나 매한가지다. 그런데 극단적인 롱테이크와 익스트림 롱쇼트가 빈번하게 만나는 영상에서 광활한 자연은 인물보다도 하고픈 말을 더 많이 갖고 있는 주체처럼 강조된다. 그래서 영화가 진행될수록 자연을 배경으로 인물이 움직이는 게 아니라 움직이는 인물을 자연이 지켜보며 동행한다는 인상이 강하다. 이는 무한한 자연의 시간과 유한한 인간의 시간이 대비되는 데서 오는 효과만이 아니다. 어쩌면 해리스 사비데즈는 제임스 그레이의 <더 야드>나 데이비드 핀처의 <조디악>을 찍을 때 보여준 계산된 긴장과는 정반대의 방식으로 카메라를 활용한 것처럼 보인다.  
 
틀림없는 사실은, 반 산트의 필모그래피 중 <제리>에서부터 직선적으로 흐르는 시간에 올라탄 인물이 강조된다는 사실이다. 다소 멀리 돌아가겠지만, 기존 반 산트 영화를 떠올려봐도 좋겠다. 반 산트는 데이빗 린치만큼이나 다방면에서 예술적 재능을 과시해 온 인물이다. 그는 CF 감독이면서 회화작가였고 록그룹 멤버였으며 두 장의 싱글앨범을 내기도 했다. 할리우드 시스템 안을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그곳에 들어가서도 아웃사이더의 자의식을 감추지 않았다. 그가 연출한 초기 영화 속에 흥건한 ‘아웃사이더의 자의식’은 기억이나 과거 속에 존재하는 ‘사적 진실의 순간’을 부르는 힘이다. 대략 <아이다호>까지 그의 영화는 부정과 반항의 정신을 여지없이 보여줬으며 기성사회의 도덕률과 규제의 욕망에 직접적으로 린치를 가했다. 규율을 의식하지 않는 10대들을 통해 마약, 동성애, 히피 문화가 동시적으로 그려졌으며 성매매하는 남창이 아웃사이더의 실존을 증언했다. 특히 <드러그스토어 카우보이>, <아이다호> 등은 펑키한 아웃사이더의 질주로 귀결된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인물들은 항상 사적 진실의 순간을 애타게 찾는다.
 
아웃사이더의 삶에 사적 진실의 순간이 요청되는 데에는 더 설명이 필요하다. 예컨대 <아이다호>의 주인공 마이크 워터스(리버 피닉스 분)는 여러모로 흥미로운 캐릭터다. 그는 긴장을 하면 기면발작을 하는 인물이다. 반 산트는 기면발작 순간을 묘사할 때, 그의 기억 속 조각난 이미지들을 반복적으로 틈입시킨다. 사라져버린 엄마와의 합일이 느껴지는 파편적 이미지들. 그러니까 어떤 ‘상상적 오인’으로 간주되는 순간들이 희미한 톤으로 되돌아오곤 한다. 점점이 솟는 그 기억의 조각들은 순환하는 영원성을 표지하는 각색된 유토피아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아웃사이더로 밀려나는 중인 마이크에게 현실은 혼돈과 공포, 긴장과 슬픔의 거처다. 그렇다면 엄마와의 사적 진실이 머무는 시공간은 ‘지금 여기’에 대한 초월적 지평이다. 아마도 마이크에게 미래란, 그 초월적 순간에 대한 불가능한 기대로 점철된 시간대일 것이다. 이처럼 ‘레퀴엠 3부작’ 이전의 영화들 중 상당수에는 니체적인 매듭의 순간으로 나아가려는 충동이 넘실된다.
  
그에 반해 <제리>는 데뷔작 <말라 노체>에서부터 이어져 온 반 산트의 이미지텔링, 특히 정서 이상의 의미를 유발하는 자연 이미지가 유난한다. 이는 인간의 삶을 한 방향으로 끌고 가는 시간의 권능을 보여주며 돌아갈 곳을 암시하지 않는다. 예컨대 끝없이 이어지는 산, 광활한 사막, 무정형으로 흘러가는 구름 등은 단순한 설정 쇼트 속 구성물이 아니다. 대부분의 쇼트에서 그들은 개별 인간의 삶에 영향을 받지 않는 시간의 절대적 무상성을 계시한다. 거대한 구릉성 산줄기와 황량하기 그지없는 사막, 가까운 데서 벌어지는 사연을 사소하게 균질화시키는 지평선, 고적감을 키우는 흙먼지 들판, 사물과 사람, 자연의 윤곽을 한꺼번에 지우는 밤의 산 등은 두 명의 제리 사이에서 벌어지는 엇갈림과 불협화음을 모두 덮는 권능이다. 그래서 다양한 각도의 무빙 롱테이크가 잡아낸 두 인물의 면면은 상대적으로 너무 미미한 운동인 된다. 저속촬영으로 올려다 본 구름의 움직임 아래에서 그들은 한없이 왜소한 기표들인 것이다.  
 
<제리>의 카메라는 프레임에서 인물이 빠져나간 다음에도 배경에 선 자연을 한참이나 잡곤 한다. 프레임의 전경으로 인물이 들어오는 것을 기다리면서 공간에 고인 시간을 핍진하게 체감시키기도 한다. 그렇다면 <제리>가 궁극적으로 강조하는 것은, 두 인물을 감싸고 흐르는 절대적이고 선형적인 시간이며 돌아갈 곳이 없다는 전언이다. 과거나 기억 속에서 구원을 찾는다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선언이다. 사실상 제리‘들’은 그 자연의 시간을 나고 들다가 ‘죽음/죽임’의 사건에 동시에 다다르는 일종의 운동처럼 느껴진다.     
 
<제리>의 결말에 얽힌 정보를 표면적으로 판독하면, 한 인물은 죽음으로써 자연의 시간으로 돌아가고 다른 인물은 친구의 죽음이 확인된 직후 나타난 도로에서 구조되어 누군가의 자동차를 얻어 타고 다시 인간의 시간으로 돌아간다. 사실, 도로 위에서 이야기를 시작하고 마무리하는 풍경은 반 산트 영화에서 매우 흔한 일이다. 그런데 <제리>에 등장하는 도로는 지나온 방향과 나아갈 방향을 짊어진 물리적 표지처럼 보이지 않는다. 길의 흔적이 없는 자연의 시공간과의 대조 속에서 이 잘 닦인 도로는 매우 현실적인 시공간, 우리의 일상적인 삶의 무대처럼 느껴진다. 이 말은 길이 없는 황량한 사막과 산등성이는 어떤 비현실적인 시공간, 혹은 관념적 실험의 장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제리>는 매번 속았음에도 저기 어딘가 출구가 있다는 믿음을 다시 품으면서 부유하는 존재의 이야기일 수 있다. 다가가면 그만큼 멀어지는 욕망의 신기루에 포박된 존재를 지켜보게 하는 영화인 것이다. 이를 전제로 보면 <제리>의 삭막한 사막은 시작과 동시에 죽음과 동행해야 하는 우리의 실존적 불안이 비치는 장소다. “우리, 꼭 저기에 가야만 할까”라고 묻는 제리도, “울지마”라고 위로하는 제리도 그 길 없는 길에서 다른 대안을 가지지 못한다. 영화 말미, 결국 인간의 시간으로 돌아가는 제리가 이제 떠나고 싶다는 제스처를 하는 다른 제리를 죽인다. 바로 그때 살아남은 제리에게 도로가 마술처럼 나타나고 그는 그 일상의 시간으로 혼자 들어선다. 
 
요컨대 <제리>를 상징적 차원에서 1인칭 죽음에 대한 영화라고 말할 수 있다면, 영화 속 ‘살인’은 자기 안의 다른 목소리를 제거하는 결단이다. 이 영화는 처음부터 한 명이었던 제리가 자기 안의 타자에 상징적 죽음을 부여하는 이야기로 해석될 수 있는 것이다. 이제 그는 음험한 대타자의 욕망에 쓸려 다니던 지난날과 완전히 절연한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 그 질문에 대한 답은 (반 산트의 의도에 따르면) 우리 각자의 몫이다. 
 
  
 
윤리적 복기의 대상으로서 ‘무인칭 죽음’- <엘리펀트> 
 
  
 
반 산트가 <제리>를 통해 실험한 이미지텔링은 과잉의 의미를 추수하려는 야망을 감추지 않는다. 그 야망을 바라보는 시선에 따라 <제리>에 대한 평가는 매우 넓은 스펙트럼으로 엇갈릴 것이다. 그러나 <엘리펀트>는 관객에게 윤리적 입장을 요청하는 과정이 적확한 심미적 형식을 획득한 매우 드문 경우다 제한된 고등학교 건물 안에서 각각의 인물들에게 주어진 마지막 시간이 정교하게 교직될 때, 우리는 ‘영화적 현기증’의 한 극단을 마주하게 된다. <엘리펀트>는 희생자와 목격자로 분리될 이들이 자신에게 닥칠 운명을 예감하지 못한 채 서로 의미없이 교접하는 과정이 나열된다. 그 나열의 과정은 이전 어느 영화에서도 맞닥뜨리지 못한 시간체험을 안긴다. ‘운명’이란 단어에 단순 환원될 수 없는 작은 우연들이 생생하게 살아있는 풍경이 거기에 있다. 그러다가 모든 개별적인 인생이 엄청난 파국의 사건 안에 다른 모양으로 휘말린다. 그때 우리는 평범한 얼굴을 하고 이미 육박해오던 전율의 실체를 목격하게 된다. 
 
개인적인 기억을 더듬어 말하면, 15년 전 <엘리펀트>를 처음 마주했을 때 느낀 긴장의 크기는, 그 무렵 본 영화들 중에서는 오직 <멀홀랜드 드라이브>와 <열대병>에서 경험해본 것이었다. <멀홀랜드 드라이브>의 경우 무의식이 타자의 담론이며, 나를 나 아닌 곳에서 살게 하는 메커니즘이라는 사실을 완전히 새로운 이미지텔링으로 보여주었다. <열대병>은 평범한 사랑 이야기로 출발한 사연이, 온갖 원시적인 힘과 초자연적인 상상이 스며있는 정글에서 영화적 신비로 수렴되는 데까지 나아간다. 각기 다른 경로로 오는 이 영화적 현기증‘들’은 기존 한국영화에서 경험해보지 못한 것이었다.   
 
<엘리펀트> 내부로 들어가 보기로 하겠다. 이 영화는  일곱 개의 자막을 통해 가해자와 목격자, 희생자의 이름들을 정확히 호명한다. 나는 여기에 이 영화의 약속된 태도가 있다고 믿는다. 우리는 이 영화의 모태가 된 불행한 비극을 ‘콜롬바인 총기난사 사건’으로 통칭하곤 한다. 이 충격적 학살극은 미국인의 무의식을 뒤흔든 세기말적 사건으로 회자된다. 13명의 사망자와 24명의 부상자가 발생한 이 사건은 10대 가해자 두 명이 현장에서 자살하면서 끝난다. 충분히 추측 가능한대로, 이후 원인규명에 대한 광범위한 담론장이 형성된다. 예를 들면, 자유로운 총기구입을 허용하는 법률, 자극적이고 폭력적인 게임의 유행, 배타적 또래문화와 따돌림 문화, 10대에게 확산 중인 동성애, 나치즘과 히틀러에 대한 왜곡된 신념, 가정환경의 비정상성, 락앤롤 가수 마릴린 맨슨의 음악 등이 사건에 영향을 미쳤다고 언급된 목록들이다. 살아남은 자들끼리 그 비극적 죽음을 사회 현상으로 소비하면서 살인의 이유를 개발하기 시작한 것이다. 
 
반 산트는 이렇게 생각한 것 같다. 사건의 배경을 파헤치는 담론장이야말로 살아남은 미국인들이 자기 공포와 고통를 벗어나기 위해 만든 비윤리적 출구라고. 합리를 가장한 그 공적 애도작업으로 인해 그 사건에 연루된 비극적 주인공들의 이름이 모두 지워지고 있다고. 그 해석 게임의 장, 곧 책임을 둘러싼 다툼이 벌어지는 언어의 장에서는 죽은 자들의 과거가 임의적으로 각색되기 마련이다. 말 할 수 없는 희생자는 자기 진실이 박탈당하는 상황에서도 전혀 대처할 수가 없다. 나는 이 반성적 사유의 끝에서 <엘리펀트>가 완성되었다고 믿는다. 반 산트는 ‘무인칭 죽음’으로 묻힌 익명의 망자들에게 마지막 ‘생의 순간’을 부여하고, 그것을 윤리적으로 복기하려 한 것이다. 
 
그래서 <엘리펀트>는 콜롬바인 총기난사 사건에서 미국 문화의 야만성을 읽고, 이를 블랙코미디로 풀어낸 마이클 무어의 <볼링 포 콜럼바인>과 완벽하게 다른 결을 유지한다. <볼링 포 콜롬바인>의 경우 참여적 다큐멘터리의 의무에 충실한 카메라가 돋보인다. 특히 사건의 원인을 논증하는 연출자의 정치적 목소리야말로 <볼링 포 콜롬바인>이 줄 수 있는 결정적 쾌감이다. 그러나 반 산트의 <엘리펀트>는 콜롬바인 고등학교에서 벌어진 죽음‘들’에 대한 이해와 오해 사이의 미로를 보여준 후, 명징한 결론없이 영화적 성찰을 중단한다. 이는 영화의 종결과 더불어 이 사건에 대한 우리의 사유 과정을 중단시키려는 기획이기도 하다. 
 
다시 말하지만, <엘리펀트>는 비극에 연루된 인물들의 이름을 모두 호명하면서 그들의 언어화되지 못한 목소리까지 모두 읽히도록 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그들 모두의 평범한 마지막 일상을 담담히 좇으며 우리를 그 옆의 증언자로 세우는 스테디 캠은 매우 적확한 형식이다. 그들의 소중한 마지막 시간을 보존하되, 학교 복도의 공기까지 감지되도록 담아내는 롱테이크 쇼트도 그 자체로 윤리적 입장을 갖는다. 우리는 반 산트가 고안한 그 이미지를 따라가면서 서사화 될 수 없는 고유한 우연들의 흐름을 세심하게 매만지게 된다.  
 
그처럼 <엘리펀트>는 ‘무인칭 죽음’으로 갈 수밖에 없었던 이들의 면면을 앞세워 공적으로 합의된 사건의 의미를 해체해 버린다. ‘무인칭 죽음’으로 묶일 수밖에 없었던 개별 존재의 일상이 곧 실재의 얼룩으로 나타나는 셈이다. 반 산트도 알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시대적 충격으로 회자되는 죽음일수록 숱한 의문과 합리적인 교훈을 동시에 파생한다는 점 말이다. 우리 모두가 그 의문과 교훈을 성찰할 자격이 있고 그에 필요한 제 나름의 경험과 지식을 갖추고 있다. 그런데 반 산트는 딱 거기까지여야 한다고 말한다. 그 죽음에 관해 어느 누구도 가치평가의 주도권을 쥘 수 없으며, 의미를 단선화해선 안 된다는 것이다. 그를 지지하는 입장에서 말하건대 죽음에 답이 하나라면, 종교도 하나여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반 산트의 <엘리펀트>는 “죽음은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비의미(non-sens)”라는 장켈레비치의 선언을 윤리적 태도로 전환하는 힘을 갖는다. 
 
죽음을 사유하는 <엘리펀트>의 미학적 형식에 대해서는 더 궁구되어야 할 논점이 있다. 먼저 음악의 리듬을 타고 반 산트의 윤리적 태도와 미학적 기획이 적확하게 만나는 장면들이 있다. 예컨대 영화초반 운동장에서 미식축구를 하면서 뛰노는 아이들을 잡는 장면이 있다. 이때 배경음악으로 베토벤의 ‘월광 소나타’가 깔린다. 전경에서 천진난만하게 놀던 남학생들은 조만간 중경으로 물러간다. 곧이어 프레임 내로 운동장을 도는 여학생들이 프레임 왼쪽으로 틈입했다가 오른쪽으로 빠져나간다. 그들과 약간의 거리를 유지한 채 혼자 운동장을 돌던 소녀 미셸만이 갑자기 카메라 앞 전경에 멈춰 선다. 천둥소리처럼 들리던 미세한 음향이 하늘을 가로질러 날아가는 비행기 소리로 추정되는 순간의 일이다. 
 
이때 미셸의 행동은 특이하다. 그녀는 프레임 내 인물들 중 유일하게 하늘을 올려다본다. 마치 어떤 소리를 듣고 그 출처를 찾는 것처럼. 그렇다면 그녀만 감지한 어떤 소리, 그녀만 읽어낸 어떤 징후는 무엇인가. 그녀가 끝내 도착할 비극적 사건의 첫 희생자라는 점에서 그 행위는 일종의 복선이면서 그것을 초과하는 심미적 제스처가 된다. 가장 쉬운 답안부터 제출해보면, 그녀는 폭풍우가 몰려오는 하늘이 내는 소리를 감지했을 것이다. 하늘을 가로질러 날아가는 어떤 비행기(이 역시 시적인 해석을 받을 수 있다)의 소리에 귀기울였을 수도 있다. 그러나 더 심미적인 해석도 가능하다. 영화 서사 밖에서 덧씌워져 흐르는 베토벤의 ‘월광 소나타’를 들었다고 할 수도 있지 않을까. 이는 분명 초월적 해석이다. 그러나 ‘월광 소나타’는 영화 중후반, 살인을 주도한 알렉스가 직접 피아노로 연주해 보이는 곡이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쇼트는 똑같이 왕따로 살아왔으나 최종적인 가해자와 첫 희생자로 나뉘는 두 사람을 신비하게 연루시키려는 의도를 숨기고 있는 것이다.  
 
이후 미셸의 움직임은 슬로우 모션으로 변한다(<엘리펀트>는 이런 영화적 시각체험의 순간을 몇 군데 배치하고 있다). 다시 운동장을 뛰기 시작한 미셸을 프레임이 붙들지 못한다. 그녀가 프레임을 빠져나간 후에야 우리는 이 장면이 ‘아무 것도 일어나지 않는 순간’이면서 ‘무엇인가 일어날 것 같은 순간’임을 알게 된다. 미셸이 빠져나가고 나면, 그 자리로 또 다른 희생자로 기억될 나단이 걸어온다. 그는 전경에서 빨간색 ‘Lifeguard’ 후드티를 천천히 입는다. 그리고는 비극의 현장이기도 한 문제의 학교 안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간다. 카메라는 그를 따라나서는가 싶더니 차마 더 다가가지 못하고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그를 멀찍이 본다. 여기서 커팅이 이뤄진다. 지금 나는 신비로운 단 하나의 쇼트를 설명한 것이다. 
 
이처럼 반 산트는 음악의 선율 안에 불균질한 인물들의 처지를 쓸어 담은 후 비극의 경과를 큰 그림으로 조망하게 한다. 사실 가해자에 의해 연주되는 ‘월광 소나타’는 비극의 전조이면서 죽은 자(자신을 포함한)들을 향한 미리 띄우는 레퀴엠이다. 죽은 자를 데리고 갈 최후의 죽은 자가 되겠다는 선언이 그 선율에 쓰여 있는 것이다. 시종일관 담담하게 움직이던 카메라가 이런 중층적 수사의 설계자였다는 점은 영화를 다 본 후에야 느낄 수 있는 놀라움이 아닐 수 없다. 
 
둘째, <엘리펀트>에서 가장 고양된 감정이 실리는 순간은 비동시적인 것의 동시성이 계시되는 순간이다. 목격자, 희생자를 개별적으로 따르던 카메라는 전혀 다른 성격의 신비한 순간을 만들어 낸다. 그 순간 역시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이들의 마지막 교차를 담아내는 바, 이를 ‘비동시적인 것의 동시성’으로 언명한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우린 카메라를 들고 다니는 일라이가 복도를 지나던 존을 불러 세운 후 사진을 찍는 순간을 영화 초반 만난다. 그 찰나는 미로 같은 복도를 지나 건물 밖으로 나가는 존을 카메라가 뒤쫓는 길고 긴 롱테이크 쇼트의 시작부분에 위치한다. 복도를 잡은 프레임 후경에서 일라이가 걸어오고 존이 그의 앞으로 걸어 들어가면서 두 사람은 잠시 마주치게 된다. 그때 일라이의 요청으로 존은 포즈를 취한 채 일라이의 카메라에 담긴다. 얕은 심도 때문에 그들 곁으로 미셸이 뛰어갔다는 정보를 우리는 쉽게 놓치게 된다. 어쨌든 이 장면이 처음 등장했을 땐, 아무 힘도 실리지 않은 일상의 사소한 순간으로 지나간다. 이후 카메라는 존을 따라 건물 밖으로 나가는데, 그때 저 앞에서 총을 들고 건물 안으로 들어가려는 알렉스와 에릭이 나타난다. 영화를 다 본 이후 생각해 보면, 이 우연한 엇갈림 덕분에 존은 이름을 가진 인물 중 유일한 생존자가 된다.  
 
영화 초중반 즈음, 이번엔 일라이의 동선을 따라가는 쇼트가 등장한다. 먼저 밝힐 것은, 우리의 영화관람 행위가 직선적 시간 체험에 대한 관성에 기초한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일라이가 주피사체로 오는 이 장면은 존을 따라가던 앞의 쇼트보다 시간적으로 더 늦은 것으로 인지하게 된다. 그러나 카메라의 위치가 복도 저 반대편으로 바뀌었을 뿐, 우리는 앞에서 설명한 순간으로 되돌아가게 된다. 이번엔 일라이의 뒤를 따라가던 카메라 안으로 저 멀리서 존이 틈입한다. 결국 카메라의 위치 때문에 구도만 바뀌었을 뿐, 포즈를 취한 존을 일라이가 사진에 담는 아까 그 순간임이 확실하다. 이제 이 순간은 각별한 의미를 불러 모으게 된다. 이를테면, 죽음이 예정된 일라이를 향해 이제 정서적 입장이 생기기 시작한다. 근본적으로 이 순간은 죽은 자가 죽지 않은 자를 기억(기록)하는 마술적 순간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 장면은 영화 말미 또 한 번 되돌아온다. 이번엔 미셸을 주피사체로 뒤쫓던 카메라가 ‘일라이-존’의 촬영 장면을 다시 한 번 불러낸다. 미셸은 일라이와 존의 행위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 그들의 배경으로 뛰면서 지나간다. 아마도 우리 대부분은 이 장면이 세 번 반복되고 나서야 왕따였고 첫 희생자가 된 미셸의 ‘거기 있음’을 인식하게 된다. 이로써 카메라의 얕은 심도가 영화적 트릭이면서, 미셸의 실존에 대한 해석이었다는 것이 밝혀진다. 앞서 언급한 ‘비동시적인 것의 동시성’은 그러한 카메라 전략에서 읽히는 반 산트의 심미적 혜안을 지칭하는 말이기도 하다. 
 
이처럼 반 산트는 우리를 과거로 되돌리는 장면들을 통해 목격자, 희생자, 가해자로 분기될 이들의 ‘분기 이전’에 감정을 싣게 한다. 안타까움으로 허물어질 평범한 일상이 어떤 소중한 아름다움으로 격상되는 신비는 그렇게 발명된다. 미셸을 따라 ‘일라이-존’이 있는 복도를 지나친 카메라는 이후 학교 도서관으로 들어선다. 그곳은 미셸이 아르바이트를 하는 곳이다. 이 쇼트의 커팅은 총기를 장전하는 소리가 도서관에 들어선 미셸에게 정확히 들릴 때 이뤄진다. 그러니까 미셸은 근거없는 전조를 처음 듣는 자이면서 근거를 가지는 전조를 처음으로 확인하는 자가 된다.
 
이 영화의 마술 같은 시간 편집을 펜로즈 부자가 고안한 불가능한 착시의 계단, 이른 바 ‘펜로즈의 계단(Penrose stairs)’ 구조로 비유할 수도 있을 것이다. 3차원에서 실현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시각의 역설을 이용해 2차원에서 구현한 불가능한 계단. 주지하다시피, 그 그림은 계단을 밟아 올라갈수록 다시 처음의 출발점으로 되돌아가는 순환의 기적을 구조화한다. 결국 반 산트의 마술같은 편집에 의해 우리는 ‘아무 것도 일어나지 않은 평범한 순간’의 아름다움을 어떤 윤리적 태도로 재차 마주하게 된다.  마주하게 되는 것이다. 지속되고 연장될 줄 알았던 모두의 안녕이 보장된 시공간을 반 산트는 그렇게 보존하려 한다. 이는 영화만이 해낼 수 있는 윤리적 보존이며 반 산트여서 가능한 기획이었다고 생각된다.  
 
그럼에도 <엘리펀트>는 그 인상적인 순간들이 처참하게 무너지는 시간대로 빨려 들어가는 영화다. 역시 세 번 반복되는 먹구름 가득한 하늘은 그 비극의 사태를 보듬고 흘러가는 절대적 시선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보면 이 영화는 운명이란 말로 환원할 수 없는 개별 존재들의 고유한 표정이 선명하지만, 그 모든 것이 예외가 허락되지 않는 거대한 불행에 덮였음을 강조한다. ‘콜롬바인 총기난사 사건’ 이라는 공적 표지 아래에 익명으로 잠든 이들을 한 명, 한 명 부활시킨 후 그들의 동일한 최후를 쥐고 우리의 윤리적 입장을 되묻는 영화인 것이다. 
 
<엘리펀트>의 제목은 아마도 ‘방 안의 코끼리’라는 서구 속담에서 온 것이라 추측된다. 가해자 알렉스가 자기 방에서 사건을 벌이기 전 날, 피아노로 ‘엘리자를 위하여’를 연주할 때 카메라가 잠깐 잡은 코끼리 그림은 그 속담을 연상시키는 시각적 기표다. 그 속담이 내부의 중차대한 문제를 인식하지 못하는 것을 꼬집는 말이라고 보면, 이 영화는 다분히 미국인을 향한 강렬한 메시지라 할 것이다. 한편 반 산트가 그 속담에서 제목을 뽑은 더 결정적인 이유는, 어느 누구도 이 사건의 부분만을 안다는 확신에 기인한다. 파편적인 정보에 의지해 사건 전반에 대한 상상을 할 수는 있지만 원인과 가치에 대한 공적 합의가 가능하겠느냐는 입장이 담겨있는 셈이다. 
 
그런 식으로 <엘리펀트>는 이 거대한 사건, 곧 코끼리의 귀, 발가락, 꼬리 등을 디테일하게 담아내는 것으로 자기 책무를 한정한다. 이것이 1.33대 1의 화면비, 표준 카메라로 TV 다큐멘터리를 찍는 듯한 형식을 차용한 이유일 수 있을 것이다. 엔딩씬에서 반 산트는 앞서 두 번이나 보여준 하늘 씬, 그러니까 먹구름이 무정형으로 퍼져나가는 장면을 보여주며 다시 정색하고 묻는다. 그들을 ‘무인칭’의 죽음 아래로 돌려보낸 후, 그들을 향하는 폭력을 우리 자신을 위해 계속할 것인가. 
 
  
 
스스로 완성한 부재로서 ‘3인칭 죽음’- 라스트 데이즈
 
  
 
<라스트 데이즈>는 ‘레퀴엠 3부작’ 중 서사 정보가 가장 혼란하게 뒤엉키는 영화다. <제리>가 무플롯에 가까운 안티플롯으로 서사를 소멸시키는 실험이었다면 <라스트 데이즈>는 인과의 고리, 시간적 선후의 연결점을 흐트러뜨리면서 ‘서사’를 해체하는 실험의 결과물이다. 그 실험의 종착점에서 <라스트 데이즈>는 이미 죽어온 자가 이제 완전히 죽었다는 선언을 내린다. 그런데 그때 등장하는 이미지는 반 산트의 기존 영화에서 마주할 수 없었던 차원을 열어젖힌다. 죽음에 도달한 블레이크(커트 코베인의 화신)의 영혼이 가시화되기 때문이다. 이는 <라스트 데이즈>에서만 볼 수 있는 반 산트의 또 다른 영화적 마술이다. 
 
그 장면부터 설명해보기로 한다. 대저택을 정비하러 한 사내가 프레임 앞 전경으로 걸어온다. 그러다가 방금 지나친 온실을 향해 되돌아가 그 안을 들여다본다. 우린 이미 사내의 시선이 머무는 곳에 블레이크가 쓰러져 있다는 것을 안다. 그 다음 쇼트에서 카메라는 온실 앞에 바짝 붙어서 유리문 안 온실에 블레이크가 누워있다는 것을 확인시킨다. 그때 아까 그 사내가 나타나 유리문 너머로 블레이크를 살피는가 싶더니 곧이어 화면 오른쪽으로 빠져나간다. 쓰러져 있는 블레이크와 우리 사이엔 다시 얇은 온실 유리문 하나만 놓이게 된다. 이 공허감, 긴장감을 채우는 건 작게 재잘거리는 새소리다. 그 청각적 기표는 지금 보고 있는 광경이 현실의 시공간에서 좌표값을 갖는 사건임을 공지한다. 
 
바로 그때 불가능한 이미지가 틈입한다. 누워있는 블레이크에게서 앙상하게 벌거벗은 영혼이 빠져나와 보이지 않는 사다리를 타고 프레임 위로 서서히 올라가는 것이다. 청각으로 확인되는 현실감과 시각을 교란하는 죽음 이미지의 충돌. 다분히 주관적인 해석이지만, 이 역설적 순간은 깊은 우울과 혼란, 번민과 슬픔의 집(육체)에서 빠져나온 영혼이 자연의 시간으로 돌아가는 풍경으로 다가온다. 
 
이로써 <라스트 데이즈>는 커트 코베인이 떠난 후 생긴 부재를 들쑤시는 ‘왜’, ‘어떻게’, ‘누가’에 대한 질문을 초월해버린다. 블레이크의 영혼은 완전한 3인칭(혹은 ‘순수한 3인칭’)의 죽음을 표지하면서 해석에의 의지를 단념시키는 이미지다. 그럼에도 궁금증이 남는다. 블레이크의 영혼이 프레임 바깥으로 사라지면서 현실의 ‘무엇’을 초월한 것인가. 
 
그 질문으로 들어가기에 앞서, 우리는 <라스트 데이즈>의 연출이 커트 코베인의 최후가 2인칭 죽음으로 과잉 각색되었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그래서 <라스트 데이즈>의 카메라는 서사적・정서적・의미론적으로 블레이크를 낯선 위치에 두려고 노력한다. 이를테면 서사적 측면에서만 보더라도 <라스트 데이즈>는 낯설다 못해 어색한 플롯진행의 영화다. 서사에 맥락을 부여하기 위해 필요한 시간적 선후관계, 인과적 연결관계가 거의 깨져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매우 적확한 기획이기도 하다. 이 영화를 약물중독자 블레이크의 혼란한 기억과 현실성을 상실한 지각능력에 반사된 이미지라고 본다면, <라스트 데이즈>의 플롯진행은 오히려 핍진한 묘사의 일환이지 않겠는가.
 
블레이크의 상황에 집중해서 보면, 그는 의사소통 기능이 소거된 언어에 갇힌 존재다. 비정상성을 그대로 드러내는 혼잣말의 세계에 압착 당해 있는 것이다. 그는 끊임없이 중얼거리지만, 우린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아들을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리고 환각에 가까운 음향들이 프레임을 채우는 경우를 빈번하게 만나지만, 그 음원의 출처를 시각적 기표들과 합리적으로 매칭하기 어렵다. 마지막으로 가는 여정을 이미 들키고 있는 자의 혼몽한 상태. 굳이 ‘이해/오해’를 시도한다면, 블레이크의 상황은 그렇게 요약된다. 
 
그래서 그는 자기만의 우주를 자전하는 행성처럼 느껴진다. 그러면서 그는 그 주변의 모든 사람, 사물, 공간과 거리를 유지하며 공전한다. 대화 불가능의 간격 속에서 절대적 타자가 되는 삶에 침윤되어 있는 것이다. 그 때문에 우리는 커트 코베인이나 너바나의 음악을 어떤 형태로 소비해 왔든, 블레이크를 2인칭으로 호명하는 데 실패하게 된다. 바로 이 거리와 간격이 반 산트가 우리에게 요청하는 근본적인 태도다. 
 
그렇다면 그가 현실의 ‘무엇’을 초월했는지, 더 정확히는 그를 간섭하는 ‘무엇’과 담을 쌓았는지 본격적으로 탐색해보자. 먼저 약물치료 감호소에서 탈출해 자신의 숲속 저택으로 돌아온 블레이크에게 찾아 온 첫 번째 외부인은 옐로우페이지 영업사원이다. 그는 사업 광고에 대해 장황한 설명을 한다. 그런데 블레이크는 그의 언어가 도착한 지점에서 자기 언어를 출발시키지 않는다. 심지어 자신이 과거에 옐로우 페이지를 이용했는지의 여부도 알지 못한다. 소파에 마주보고 앉은 그들은 안정적으로 프레이밍되지만, 정장을 입은 영업사원이 내놓은 다음 주 화요일 약속은 여성 슬립을 입은 블레이크에게 인지됐을 리 만무하다. 결국 옐로우 페이지와의 대면에서 블레이크가 거절한 것은, 성공을 연장하는 미래에 대한 청사진이다. 
 
그 다음으로 대저택을 방문한 이들은 젊은 몰몬교 전도자들이다. 그들은 지금 우리의 현실에서부터 내세의 구원을 준비해갈 수 있다는 확신을 보여주는 이들이다. 그들은 몰몬교의 교리와 지식을 전달하려 하고, 예수를 만난 14살 아이의 일화를 통해 영적 체험의 가능성을 이야기한다. 궁극적으로 그들이 전하려 한 것은 신의 완전무결하고 절대적인 사랑이다. 이 지점에서 우린 “죽음은 대표적인 문제이자 어떤 의미에서는 유일한 문제다”라는 장켈레비치의 명제를 탐색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 ‘유일한 문제’를 아버지로 둔 하고 많은 자식들 중 종교가 있고, 그 안에 몰몬교도 있지 않겠는가. 사실상 몰몬교도 방정식이 다른 죽음에 대한 한 태도다. 그런데 이런저런 풀이법을 따라 죽음을 생각하지만, 그리고 그 생각이란 것을 다시 생각해보지만 문제는 유일한데 답은 유일하지 않을 수 있다. 답을 찾고 싶은 관성이 있을 뿐이다. 스피노자조차 죽음을 지혜와 철학의 영역에서 다룰 수 없는 불온한 대상으로 치부하지 않았는가. 
 
반 산트는 이와 유사한 성찰을 블레이크에게 투영한 것처럼 보인다. 교차편집을 통해 확인되는 정보는, 몰몬교 전도자들의 방문 시 블레이크가 다른 방에서 ‘보이즈 투 맨(Boyz II Men)’의 ‘온 벤디드 니(On Bended Knee)’ 뮤직비디오를 봤다는 사실이다. 이 곡의 가사는 이미 떠나간 연인에게 사랑을 다시 시작할 수 없느냐고 간절히 애원하는 내용을 담는다. 흥미로운 건, 블레이크가 TV를 켜고 그 뮤직비디오를 흐르게 하지만, 곧이어 프레임 밖으로 빠져나간다는 것이다. 그때 텅 빈 방을 채우는 TV 속 음악은 ‘공허’라는 단어로 다 담아낼 수 없는 감정에 가닿는다. 곧이어 블레이크는 환각 속에 쓰러져 정신을 놓아 버린다. 그 순간까지 뮤직비디오가 뱉어내는 음악은 끝나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이 쇼트는 절대적인 신의 사랑, 절대를 지향하는 인간의 사랑을 모두 거절하는 블레이크를 보여준다. 현세에서도, 또 내세에서도 그에게 출구는 없어 보인다. 사람들과의 수평적 관계망 안에서든, 신과의 수직적인 관계망 안에서든 그는 화해 가능성을 완전히 잃어가는 중이다. 그래서 이 쇼트가 끝날 무렵, 그는 장총을 쥐고 대저택을 나가버린다. 이는 대저택에 몰몬교 전도자들과 뮤직비디오가 흐르던 TV가 아직 남겨진 상황에서 그것을 등지는 행위로 읽힌다. 반 산트는 블레이크가 무엇을 거절했는지를 정확하게 거론하고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가 떠나버린 외부 세계는 엄마와 음악, 음악으로 친구가 된 동료들이 있는 세계다. 대저택을 방문한 음반제작자 킴 고든도 그와 의미있는 대화에 도달하지 못한다. 블레이크의 시간 안에서 언제 발생한 사건인지 알 수 없는 엄마의 방문 장면도 그가 긴 시간 ‘혼자됨’에 익숙해져 있다는 것을 알린다. “대체 왜 이러고 있니?”, “네가 나랑 같이 가 줬으면 좋겠구나”, “아무도 없잖니?” 라고 묻는 엄마를 향해 그는 “끝낼 일이 남아 있어요”라고 중얼거릴 뿐이다. 끝낼 일! 이 의미없이 뱉어진 듯한 혼잣말은 이 영화의 마지막을 정확히 겨냥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블레이크가 대저택을 자기 집처럼 드나드는 친구들, 곧 음악적 동료들을 등지는 방식도 이채롭다. 블레이크는 그들의 곁을 시종일관 공전한다. 혼잣말의 세계, 자기 환각의 세계에 매몰되어 있기에 그들에 대한 공전은 사실상 불가피한 결과다. 그런데 영화 후반부 블레이크가 한 친구의 이야기를 긴 시간 들어주는 장면이 있다. 그는 블레이크에게 일본 투어에서 하룻밤을 보낸 여자 이야기를 하며, 그녀에 대한 미안함을 고백한다. 그리고는 데모 테이프를 건네면서 그녀를 위한 곡을 만들고 싶은데 가사를 써달라고 말한다. “네가 여기 가사를 입혀서 날 좀 구원해 줬으면 좋겠어.” 곧이어 다른 친구들과 함께 그마저 블레이크의 곁을 떠나버린다. 이제 그 어두컴컴한 공간에는 데모 테이프와 소리를 내지 않는 악기와 블레이크만 남겨진다. 
 
그때 블레이크가 기타를 쥐고 혼잣말같은 노래를 시작한다. 그 노래는 블레이크 역을 맡은 마이클 피트가 커트 코베인을 기리며 만든 ‘데스 투 버스(Death to birth)’다. 공간 내 모든 사물의 윤곽, 심지어 블레이크의 윤곽도 희미한데 노래가 끝나가기까지 카메라는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고 블레이크의 어두운 절규를 더욱 캄캄하게 잡아낸다. 그는 “It’s a long, lonely journey, from death to birth”라고 울부짖으며 틀림없는 진실을 스스로에게 강요한다. 영화 속 쇼트들이 시간적으로 뒤죽박죽이지만, 개인적으로 이 쇼트만큼은 틀림없이 자살 전날 밤의 상황이라고 믿는다. 지금 블레이크는 친구를 구원하기 위한 노래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한 레퀴엠을 만들어 부르고 있는 것이다. 바꿔 말해 블레이크는 자신에 대한 애도작업을 음악으로 미리 행하며 다음 날을 각오했다 할 수 있다. 
  부연하건대, 이 장면과 그의 영혼이 등장하는 온실씬은 연결된다. 그는 이미 자기 음악을 통해 완수된 스스로의 애도작업을 통과한 사람이다. 그래서 그가 온실에서 평안히 잠든 것처럼 죽은 건 매우 적확한 연출이라고 느껴진다(실제로 커트 코베니는 엽총 자살을 통해 머리와  흥건한 피를 흘리며 죽었다고 한다). 그는 자신을 따라다니는 외부세계의 모든 것이 틈입하는 대저택을 떠나 마치 초식동물처럼 숲속을 헤매던 자였다. 그는 성공에의 욕망에 있어서도, 사람들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초식동물처럼 이미 수동적 상태에 놓여 있었다. 지난 밤, 스스로의 음악으로 완수된 애도작업까지 ‘행한/받은’ 상태였기에 그는 초식동물처럼, 혹은 화초처럼 순순하게 현실을 등질 수 있었을 것이다. 이 죽음은 타살도 아니고 엄밀한 의미에서 자살도 아니다. 말장난 같지만, 자신이 죽어야 할 자리, 죽어야 할 순간을 정확히 찾아들어가 자연사한 것이다. 
 
이로써 반 산트는 죽은 후에 더더욱 ‘시대의 대변자’가 된 커트 코베인을 놓아주자고 말한다. 그의 죽음을 두고 그의 음악을 사랑했던 이들이, 그 사랑을 명분으로 행하는 일들을 경계해야 한다고 말한다. 아마도 반 산트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2인칭 죽음으로 기억되는 커트 코베인이 사후에 엄청난 폭력을 입었다는 것을 알았다. 커트 코베인이 영원한 결핍이 된 이후, 거기서 생긴 분노나 슬픔을 투사할 사람과 사연이 개발되고 있음을 직시했다. 반 산트의 생각대로 우린 그 아닌 곳에서 그를 추모할 필요가 없다.  
   
그래서 반 산트는 <라스트 데이즈>의 오프닝곡과 엔딩곡으로 킹스 싱어즈(The King's Singers)의 ‘전쟁(La Guerre)’을 들려준다. 살아서도 그는 전쟁과 같은 일상을 견뎠지만, 죽어서도 전쟁을 치르는 중이지 않는가. 사실 그의 전쟁은 스스로 온실을 향했을 때 끝났어야 옳다. 영화가 보여주지 않기에 우리도 볼 수 없었으나 그를 끊임없이 간섭하던 환영이나 환각도 거기서 닫혔을 것이다. 알아들을 수 없는 중얼거림도 더 이상 불필요해졌을 것이다. 영화 속에서 자기의 껍데기를 벗고 맨몸이 된 블레이크의 영혼은 보이지 않는 사다리를 올라 사라졌다. 이제 그가 사라진 프레임을 있는 그대로 직시해야 한다. 거긴 스스로 완성한 부재로서 3인칭 죽음이 있을 뿐이다. 그가 사라진 프레임이 환기시키는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더 이상 말을 아끼고자 한다. 반 산트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한다.   
 
  
 
불가능한 아이다호를 등진다는 것
 
  
 
“저는 한 운명이 끝이 나고 닫히면 그 어둠 속에는 의미가 비어 있는 일종의 메시지가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거기에서 우리는 만족스러운 답을 얻었다고 말할 수 없더라도 이해하려는 시도를 중단하게 되겠지요” (장켈레비치, 변진경 역,  『죽음에 대하여』, 돌베개, 2016, p.35.)
 
반 산트의 전작 중 매우 흥미로운 영화로 <아이다호>를 꼽고 싶다. 앞에서도 잠깐 언급했지만, 이 영화의 주인공 중 한 명은 마이크다. 그는 어머니가 정부를 살해한 이후, 어머니와의 행복했던 시절이 내려앉아 있는 아이다호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이후 그는 집도 없이 거리를 떠돌다가 급기야 포틀랜드 사창가에서 남창으로 전락한다. 긴장하면 혼수상태에 빠져 잠이 드는 기면발작증까지 앓게 된다. 그런 그에게 어머니 품에서 마냥 행복했던 순간은 다시 없을지도 모른다. 모든 문제가 출발하기 전의 상태로서 아이다호 시절은 사실상 불가능하기에. 
 
불가능한 아이다호. 어쩌면 우리도 극심한 긴장과 공포의 순간에 초월적 유토피아로서 그것을 불러내는 데 익숙한 사람들이다. 주변 누군가의 죽음은 우리 각자의 아이다호를 불러내게 하는 극단적인 사건일 수 있다. 때론 2인칭으로 가깝게, 때론 3인칭으로 멀리서, 죽음은 내게도 닥칠 비극을 공지한다. 내게 유의미한 누군가의 죽음은 의식과 육체 활동의 한 연장이 끝났다는 표지에 그치지 않는다. 생전의 그와 얼마나 가까웠는지에 따라, 그와 함께 동시대를 살아내던 우리는 어떤 심각한 ‘불연속’을 경험할 수밖에 없다. 그때가 되면 ‘애도작업’이라는 표현을 굳이 쓰지 않더라도, 우리는 한 미래의 닫힘을 어떻게든 이겨내야 한다.  
 
반 산트는 정확히 알고 있다. 죽음에 가치를 부여하는 행위가 어디까지나 산 자들의 취미라는 것 말이다. 분명한 건, 죽음에서 오는 충격을 흡수하기 위해 상상적으로 우리 각자의 아이다호를 불러내볼 수 있지만, 망자에게나 나 자신에게나 도움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죽음은 ‘은폐성’을 본질로 하기에 때로는 그 사건 앞에서 우리 각자의 언어가 오염원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해내야 한다. 그래도 그 죽음을 지켜 본 내가 아직 살아있음에 갖게 되는 감정과 충동, 이를 재료로 구축되는 논리와 명분이 생겨날지 모른다. 살아남은 나를 위한 애도의 유습에 이끌릴지 모른다. 반 산트의 ‘레퀴엠 3부작’은 그 메커니즘을 작동시킨 후, 그 미학적 이미지텔링 안에 윤리적 입장을 요청하는 질문을 기입했다 할 것이다.  
 
그렇게 반 산트는 다른 성격의 죽음, 다른 인칭의 죽음들을 예거하며, 우리의 이해와 오해를 동시에 중단시키는 시도를 꾀했다고 믿는다. 영화를 통한 이 같은 시도가 과거에도 있었다고 믿지만, 반 산트의 작업은 그 이전의 기억을 지울 만큼 적확하고 참신하다. 죽음의 의미와 역할을 두고, ‘레퀴엠 3부작’을 다시 정리하면, <제리>는 자연의 무한성에 기대어 나의 상징적 죽음을 검안하는 영화다. <엘리펀트>는 ‘우연의 겹침’으로 살아난 안타까운 죽음들이 서사화・의미화의 욕망을 부검하며 우리 각자의 윤리성을 되묻는 영화다. <라스트 데이즈>는 미스터리한 신화에서 한 죽음이 빠져나와 자신의 진실을 스스로 염하는 영화다.
 
세 영화를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면 각각의 군더더기가 여럿 발견되는 것도 사실이다. ‘레퀴엠 3부작’ 중에서 가장 훌륭한 작품이라고 말하고픈 <엘리펀트>조차도 실수라고 느껴지는 쇼트가 존재한다. 단 하나만 예로 들면, 알렉스와 에릭의 동성 키스 장면을 들 수 있겠다. 영화 초반 토론이라고 명명하기 민망한 동성애 주제의 대화 수업이 학교 내에서 있었다. 오리건주 숫양들 다수가 호모여서 사육자가 깜짝 놀란다는 등의 자극적인 정보를 주고받는 대화 수업. 이는 동성애자들을 호기심의 대상으로 외부화하는 폭력의 현장이었다. 그런데 이 장면을 총기난사 직전 ‘알렉스-에릭’의 키스씬과 연결해 보면, 어떤 논리 맥락이 허용될 수 있다. 알렉스와 에릭의 살인을 ‘응징’의 제스처로 읽게 하는 논리가 성사되는 것이다. 
 
사실 <엘리펀트>는 등장인물 중 알렉스와 에릭에 한해 사건 발생 하루 전 모습을 보여준다. 그들이 예외적으로 총기에 관심이 많았고, 자극적인 총기 게임에 빠져 있었으며 나치즘 영상을 돌려보곤 했다는 정보도 그때 주어진다. 그러나 그 장면들조차 ‘이것이 총기난사 사건의 이유야’라고 말하지 않는다. ‘이것이 총기난사 사건의 이유야?’라고 되묻는 태도를 취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 때문에 동성 키스씬은 다소 불편한 해석에 힘을 실어줄 수 있다. 반 산트의 성정체성이 그의 거의 모든 영화에 각인되어 있지만, <엘리펀트>의 그 장면은 다소 불필요한 사족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반 산트의 ‘레퀴엠 3부작’을 지나치고서 죽음을 다룬 영화의 진경을 봤다고 말하긴 어려울 것이다. 죽음에 대한 온전한 추모나 애도는 부재에서 비롯된 질문들을 견디는 행위가 전부일 수 있다. 바라건대, ‘레퀴엠 3부작’ 속 다른 인칭의 죽음들을 경유해 이미 당도했거나 앞으로 당도할 죽음들을 우리가 온전히 살아가게 할 수 있길 기도한다.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글: 안숭범
 
영화평론가. 한신대학교 인문콘텐츠학부 교수, 시인. EBS <시네마천국>을 진행했으며, 문화콘텐츠 기획 및 인문학적 비평에 매진하고 있다. 
 

* 글 출처: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 르몽드 시네마 크리티크

http://www.ilemonde.com/news/articleList.html?sc_sub_section_code=S2N40&view_type=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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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자서성희

등록일2018-0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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