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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곡숙] <더 히어로> ― 영웅의 자화상을 찾아서

 
 
1. 영웅을 꿈꾸며

10대 시절에 루이제 린저의 『생애 한가운데』를 읽고는 매혹적인 니나를 나의 영웅으로 삼았다. 그리고 니나와 대비되는 그녀의 언니를 혐오하며 그렇게는 살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수십 년이 지난 지금 나의 모습은 비범한 니나보다는 평범한 그녀의 언니에 더 가깝다. 케네디 대통령을 동경해 그의 궤적을 따라 백악관까지 입성한 클린턴 대통령 등을 제외한다면, 살아가면서 자신이 꿈꾼 영웅의 궤적을 따라간 이가 몇 명이나 될까? 최근 개봉한 <더 히어로The Hero>(미국, 2017)는 ‘영웅’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보게 만드는 영화이다.

  
 
  
 
2. 네 개의 자화상 

왕년 서부극 스타였던 71살 리 헤이든(샘 엘리어트)은 현재 영웅과는 거리가 먼 인물로 살고 있다. 그는 40년 동안 오디션 제안을 받은 적이 없고 목소리 광고만 하는 한물간 서부극 배우일 따름이다. 그는 아내 발레리(캐서린 로스)와 오래 전 이혼했고 그를 만나려 하지 않는 딸 루시(크리스틴 리터)와도 불화를 겪고 있다. 그는 오랜 친구 제레미(닉 오퍼맨)와 대마초를 피우며 괴로움을 잊으려고 한다. 

<더 히어로>는 영웅에 대한 네 개의 자화상을 보여준다. 첫 번째 영웅은 리가 연기한 서부영화 <영웅The Hero> 속 ‘영웅(Hero)’이라는 인물이다. 꿈에서 리는 카우보이모자를 쓰고 계속 나온다. 나중에 시상식장에서 이 장면이 리가 연기한 영화 속 장면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영화 속 리는 수많은 악당을 처치한 영웅이다. 하지만 꿈에서 리는 자신이 연기한 영웅이 아니라 나무에 목을 매달고 죽은 시체를 계속 바라본다. 영화의 처음부터 끝까지 이 꿈은 계속 반복된다. 암에 걸려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는 리는 자신이 연기한 영화 속 영웅이 아니라 자신이 처치한 시체와 동일시하게 된다. 카메라는 시체의 다리를 뚫어지게 응시하는 허무한 표정의 리를 보여줌으로써 죽음에 대한 그의 두려움을 드러내고 있다. 

두 번째 영웅은 엄청나게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이다. 리는 ‘서부극 감상 및 보존 협회’에서 수여하는 공로상을 받으러 시상식에 참석한다. 리는 자신의 파트너로 참석한 샬롯(로라 프레폰)의 격려(“선생이 “영웅”이예요.”), 샬롯이 준 ‘요정가루’라는 마약의 기운, 자신을 축하하는 시상식 분위기 등에 취하게 된다. 리는 공로상 수상 소감에서 “‘공로’에 대한 뜻을 찾아보았습니다. “엄청난 노력의 결과”로 받는 상입니다. 자신이 엄청나게 노력한 건 사실이지만 나보다 더 노력한 사람이 수두룩합니다.”라고 말한다. 그리고는 객석에 있는 일반 회원 한 명을 불러내 “다이앤이야말로 영웅!”이라고 말하면서 박수를 쳐준다. 

시상식에서 틀어주는 서부영화는 바로 리가 항상 꿈을 꾸는 시체 장면이다. 서부영화 속에서 리는 “자네 목에 걸린 현상금이 8개야. 우리는 당신의 실체를 알아.”라고 말한다. 이런 과거 서부영화 속 리의 대사 사운드와 함께 현재 시상식장에 앉아 있는 리의 심란한 얼굴 영상을 함께 결합시키고 있다. 공로상 시상식과는 동떨어져 외롭게 앉아있는 리의 모습과 이후 약에 취해 평소 자신과는 달리 지나치게 활달한 리의 모습을 대비시켜 보여줌으로써 그의 불안정한 상태를 강조한다. 그는 열심히 노력한 영웅이었지만, 지금은 죽음을 앞두고 있는 암환자이다. 하지만 아무도 그의 이런 실체를 알지 못한다. 

세 번째 영웅은 서부영화 스타이다. 시상식 후 리는 자신의 수상 소감이 매스컴의 주목을 받아 다시 화제의 중심에 서게 된다. 자신감이 충만해진 리는 자신보다 한참 어린 30대의 샬롯과 하룻밤을 보내고 중요한 배역 오디션도 제안 받게 된다. 40년 만에 들어온 오디션을 위해서 리는 제레미와 열심히 대사 연습을 하면서 다시 영화 스타가 되기를 꿈꾼다. 그리고 리는 연인이 된 샬롯의 스탠드업 코미디 공연을 보러 간다. 

샬롯은 관객들 앞에서 “나이 많은 남자들이 좋아요. 능숙하고 서두르지 않아요. 그리고 쌍방울이 내려앉은 모습이 섹시해요. 당장 죽을 수 있는 사람과의 섹스보다 음란한 것은 없어요.”라고 말한다. 리는 자신을 조롱하는 샬롯의 말을 듣고는 자신감을 상실하여, 오디션을 망치고 자신을 취재하는 기자에게도 화를 낸다. 좁은 차에 혼자 앉아 허공을 응시하는 리의 모습은 과거에는 서부영화 스타였지만, 현재 대중에게 잊혀지고 연인에게 조롱당하고 죽음을 앞둔 노인의 절망감을 느끼게 만든다. 다시 반복되는 꿈에서 리는 시체를 보다가 테니스장으로 가서 딸 루시를 보게 된다. 이때 “난 아무 데도 안 가!”라고 외치는 리의 말 속에서 자신의 죽음에 대한 거부감이 묻어난다. 

네 번째 영웅은 자신의 삶과 죽음을 직면할 수 있는 용기이다. 샬롯이 에드나 세인트 빈센트 밀레이 시집을 선물하면서 리를 좋아한다며 진심으로 용서를 구한다. 그러자 리는 자신이 암에 걸려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샬롯에게 고백한다. 두 사람이 화해한 후 샬롯은 리에게 가족에게 말하고 시술을 받으라고 당부한다. 샬롯의 충고를 들은 리는 아내에게 알리고, 딸과 대화를 시작하고, 암 시술을 신청하게 된다. 

꿈은 해변에 혼자 서서 바다를 바라보는 리의 쓸쓸한 뒷모습을 보여준다. 현실에서는 해변에 리와 딸이 나란히 서서 대화를 나눈다. 딸이 이기적이고 항상 떠나는 아버지에 대한 원망을 털어놓자, 리는 상처 줘서 미안하다고 사과한다. 이때 해변에 두 사람이 나란히 서서 “여긴 정말 아름답다”라며 대화를 나누는 모습은 혼자 쓸쓸히 있던 꿈과 대조적으로 그려지고 있다. 이후 꿈에서 리는 들판에서 시체를 바라보다가 마침내 총을 뽑아 들고, 해변에 서서 바다를 바라본다. 이때 항상 바다를 바라보는 리의 뒷모습을 보여줬으나, 이 장면에서는 리의 옆얼굴 클로즈업을 보여준다. 리는 갈등을 겪고 있는 가족과의 화해를 시도하고, 자신의 삶과 죽음을 직면할 수 있는 용기를 보여준다.

영화는 내내 죽음을 생각하는 리와 삶을 말하는 샬롯을 대비적으로 보여준다. 리가 자신이 출연한 서부영화 속 시체를 보면서 죽음을 암시한다면, 샬롯은 에드나 세인트 빈센트 밀레이의 시를 인용하며 삶을 노래한다. 두 번째 만남에서 리가 샬롯에게 “나이 많고 우울한 남자 좋아하느냐?”라고 질문한다. 그러자 샬롯은 “그냥 나이 많은 남자.”라고 답변함으로써, “우울한”을 빼버린다. 영국의 문호 토마스 하디는 미국에서 가장 매력적인 것 두 가지는 하늘을 찌르는 듯한 마천루와 에드나 세인트 빈센트 밀레이의 시라고 말한 적이 있다. 

시상식장으로 가는 리무진 차 안에서 샬롯은 “내 초는 양쪽에서 타들어온다. 그러나 물론 오늘밤을 넘기지 못하겠지. 그러나 아, 나의 적들이여, 그리고, 오, 내 친구들이여. 이 불빛이 지금은 아주 아름답지 않은가!”(‘첫 번째 무화과’)라는 시 구절을 읽는다. 이때 리가 “당신이 스무 살만 더 나이 들어도 키스할텐데.”라고 하자, 샬롯은 “이십 년을 기다리라고요? 그러면 당신은 무덤에 있을텐데요.”라고 답변한다. 결말 부분에서 샬롯은 리의 72세 생일을 축하하며, “난 굳은 땅이 사랑하는 심장을 가두는 것을 멈추지 않으련다.”(‘음악 없는 만가’)라는 시 구절을 들려준다. 영화는 이 시를 듣고 눈물을 글썽이는 리의 모습과, 72세 생일 케이크와 함께 샬롯의 생일축하를 받고 기뻐하는 리의 모습을 교차편집으로 보여준다.  

영화의 첫 장면에서 광고 목소리 녹음을 하는 연출가가 좋다고 말하면서 “한 번 더!”라고 계속해서 말하자, 리가 짜증난 표정을 지으며 대사를 말한다. 마지막 장면에서도 연출가가 좋다고 말하면서 “한번 더!”라고 반복해서 말하지만, 리는 초탈한 표정을 지으며 대사를 말한다. 수미상관법을 통해 보여주는 똑같은 일상적인 장면이지만, 우리는 리와 죽음의 여행을 마치고 왔기 때문에 죽음과 삶이라는 상반된 느낌을 받게 된다. 

  
 
  
 
  
 
  
 
  
 
  
 
  
 
  
 
  
 
3. 삶과 죽음에 대해 직면할 용기

<더 히어로The Hero>는 ‘영웅(히어로Hero)’가 영화 제목, 영화 속 영화의 제목, 영화 속 영화의 인물로 세 번 반복되면서 중의적 의미를 내포하게 된다. 영웅(英雄)은 “지혜와 재능이 뛰어나고 용맹하여 보통의 사람들이 해내기 어려운 일을 해내는 사람을 일컫는 말”(위키백과)이다. 전반부에서 리는 갈등하고 있는 가족과 화해할 지혜가 없고, 다시 배역을 맡을 재능도 없으며, 자신의 병과 죽음을 받아들일 용기도 없다. 하지만 후반부에서 리는 가족과 화해하기 위해서 말문을 열고, 암 시술을 결심하고, 한참 어린 연인과의 사랑에 도전한다. 영화는 보통의 사람들이 해내기 어려운 일을 해내는 사람뿐만 아니라, 자신이 해내기 어려운 일에 용기를 내는 보통의 사람들도 영웅이라고 말하고 있다. 

인생에서 ‘굵고 길게’는 욕심이니까, ‘굵고 짧게’와 ‘가늘고 길게’ 중에서 하나를 택해야 한다. 예전에는 굵고 짧게 살고 싶었다. 불꽃처럼 살다가 30살이 되면 죽고 싶었다. 지금은 가늘고 길게 살고 싶다. 살아보니 30대는 30대의 끔찍한 맛이 있고, 40대는 40대의 쓰디쓴 맛이 있다. 각각 그 나이에 맞는 인생의 맛이 있어서 앞으로 어떤 맛이 펼쳐질지 궁금하다. 

  
 
  
 
  
 
진 출처: 네이버 - 영화 - 더 히어로 - 포토

글: 서곡숙
영화평론가. 비채 문화산업연구소 대표, 세종대학교 겸임교수, 한국영화평론가협회 기획이사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코미디와 전략』, 『영화와 N세대』등의 저서가 있으며, 현재 장르 연구에 매진하고 있다. 

* 글 출처: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 르몽드 시네마 크리티크

http://www.ilemonde.com/news/articleList.html?sc_sub_section_code=S2N40&view_type=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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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자서성희

등록일2018-05-08

조회수5,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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