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객센터

customer center

070.8868.6303

[손시내] 빛과 그늘의 노래, 유아사 마사아키의 <새벽을 알리는 루의 노래>

최근 들어 ‘그림체가 다르다’ 혹은 ‘작화가 다르다’는 표현을 종종 들었다. 이는 흔히 지브리, 디즈니, 마블, 순정만화와 같이 고유의 그림체를 가지고 있는 애니메이션 스튜디오나 만화 장르에서 드러나는 작화의 차이를 이르는 표현으로, 배우나 가수의 외모를 분류해 ‘두 사람의 그림체가 다르다’ 혹은 ‘같은 그림체가 주는 안정감’ 같은 표현을 쓰기도 한다. 실제 인물의 외모를 그림체로 상상하고 그것이 동일한 부류인지 아닌지를 나누어 안정감에 대해 이야기할 때, 이는 대체로 장난스러운 표현이지만 한 가지 흥미로운 판단도 여기에 관여하고 있다고 느껴진다. 다른 그림체가 함께 있는 사태를 부자연스럽다고 느끼는 것에 단순히 표면적인 다름뿐만 아니라 일종의 세계의 충돌이 있다고 말한다면 그건 너무 호들갑스러운 일일까. 기억에 남는 그림체를 중심으로 세계관을 쌓고 확장하는 것, 또한 그 세계관의 내적 논리가 얼마간 확고하거나 짐작 가능하다는 것이 앞서 나열한 스튜디오 혹은 장르의 공통점이라는 점을 환기해보고자 한다.

<새벽을 알리는 루의 노래>를 보며 ‘그림체가 다르다’는 표현에 대해 잠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물론 이 영화는 고유의 그림체와 그로 인해 예상되는 세계관에 따라 진행되거나 그것을 의도적으로 비껴나고 비틀어 이물감을 주는 종류의 영화는 아니다. 차라리 애니메이션에서는 장면과 장면 사이에서, 더 나아가 하나의 쇼트 안에서도 작화의 세밀한 차이가 세계의 질감과 감각을 탁월하게 전환해내거나 확장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는 영화라고 하는 편이 더 적절할 것 같다. 종종 잊곤 하지만, 애니메이션 세계의 동력이란 일차적으로 그림 그려짐 자체에 있는 것이다.

영화 초반부의 인상적인 장면이 있다. 도쿄에서 지내다 할아버지가 있는 항구마을 히나시로 이사 온 카이는 마을의 전설인 인어에 관심을 보이다 인어 루의 존재를 눈치 챈다. 루와 카이의 첫 만남에서 루의 세계인 바다는 사각형의 면을 가진 형태로 카이의 다락방에 밀려들어온다. 이 물은 밝고 푸르며 중력의 영향에서조차 벗어나있는 독립적인 세계로 느껴진다. 루가 떠난 후 다락방이 다시 밤의 어둠에 잠기면 그곳은 온통 축축하게 젖어있다. 서로 다른 세계의 기이한 만남과 그 만남이 남긴 현실적이고 물리적인 흔적이 여기에 있고 이는 곧 영화 전체의 탁월한 요약이기도 하다.

 

  
 

햇빛과 그늘, 바닷물, 음악의 파동과 같이 <새벽을 알리는 루의 노래>에는 여러 경계가 등장하고 그 경계를 중심으로 세계가 나뉘고 또 다시 만난다. 히나시 마을에는 예로부터 그늘바위가 있어 인어들이 살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었는데, 그들은 그늘 속에서는 자유롭지만 햇빛에 닿으면 타버린다. 루가 카이를 데려가는 바다 속은 비가 오는 어두운 하늘과 대비되는 청명하고 푸르른, 무한히 평평한 세상이다. 영화에서 가장 재미있는 설정인 음악과 인물들의 관계를 살펴보면, 루는 음악을 들으면 꼬리가 두 다리가 되고 루가 마음대로 조절하는 음악의 파동은 마을 사람들을 의지와 상관없이 춤추게 한다. 햇빛이 시시각각 바뀌고 물결은 넘실대며 인어들이 자유자재로 물을 다루기도 하고 음악은 언제든지 연주될 수 있다. 이처럼 경계는 유동적이며 일시적인데, 오히려 그러한 속성 때문에 세계가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채 확장되고 겹친다는 느낌을 받는다.

마을 사람들은 대체로 이러한 경계와 다른 세계의 가능성에 무심한 듯 보인다. 인어는 이미 오래 전 전설 속에나 등장하는 존재로, 노래로 뱃사람들을 홀려 잡아먹곤 했다는 무서운 이야기로만 남아있다. 그런데 바로 그 인어인 루는 경계를 가로지르며 경계를 통해 세상을 감각하려 노력한다. 루와 카이가 밤의 거리를 산책하는 장면은 유독 감정의 잔상을 남긴다. 루가 걸을 수 있도록 카이가 틀어둔 카세트테이프에서 흘러나오는 음악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밤거리의 불빛들과 거기에 반응하는 루의 모습 때문이기도 한 것 같다.

마을 곳곳에는 인어가 무서워하는 해를 본 따 하얗게 칠한 성게가 걸려있고 루는 그것을 무서워한다. 그러나 이 밤 산책에서 우리가 종종 볼 수 있는 것은 장막 뒤에서 은은하게 빛을 내는 자동차의 헤드라이트, 시야를 가로로 가로지르는 전철의 창이 내뿜는 빛, 높은 곳에서 바라본 도로의 불빛들과 같이 어떤 빛들의 아름다움에 이끌리는 루의 모습이다. 장막이 바람에 펄럭여 빛이 시야에 가득차면 이내 두려움에 휩싸이지만 그럼에도 루는 빛을 감각하기를 포기하지 않는 것 같다. 루가 그날 밤 생각했던 소원이란 마을 사람들 모두와 ‘사이좋게’ 지내는 것이었다. 어떤 경계, 서로 다른 세계에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그 경계를 결코 외면하지 않은 채로 타인의 세계를 바라보며 관계 맺기를 원하는, 또한 그것을 용감하게 시도하는 캐릭터가 바로 루인 것이다.

마을 사람들의 루의 존재를 알게 되고 마을의 인어 랜드가 재개장을 하는 등의 한바탕 소동이 지나가고 난 후 잠깐 스쳐지나가는 장면이 있다. 이목은 모두 루에게 집중되고 그 들뜬 열광이 카이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가 바다에 버린 핸드폰을 루가 다시 가져다두는데, 핸드폰에는 루가 찍어둔 몇 장의 사진이 있다. 학원에서 공부를 하는 저녁과 귀갓길의 카이를 찍은 사진이다. 그의 곁을 맴돌며 다시 모두와 ‘사이좋게’ 지내고 싶은 루의 바람이 드러나는 것 같아 마음을 울리기도 하지만 이 사진의 형식이 눈길을 붙든다. 카이는 학원 안에 있고 루는 그 바깥을 지나는, 건물과 건물 사이에 흐르는 물속에서 떠올라 창 밖에서 사진을 찍은 것이다. 그들 사이에 창문이 있기에 루의 사진에는 카이의 모습 뿐 아니라 창문에 비친 루의 모습이 함께 찍혀있다. 둘 사이에 놓인 창문이라는 경계, 그리고 ‘너를 바라보는’, 혹은 ‘너를 찍고 있는’ 나의 모습이 사진에 모두 드러나 있다.

 

  
 

그러나 마을은 이처럼 경계가 뒤섞이고 침범되는 것을 용인하지 못한다. 마을 주민들이 보는 인어란, 사람을 잡아먹는 두려움의 존재이거나 마을의 부흥을 꾀하기 위한 홍보의 수단일 뿐이다. 결국 루는 위기에 처하고, 마을은 ‘그늘 신’의 벌이 내려 서서히 물에 잠기는 사태에 처하게 된다. 이를 타개하는 것은 카이의 기타연주로 시작된 파동의 전달이며 루의 아빠와 루를 비롯한 인어들은 마을 사람들을 안전하게 높은 곳으로 대피시킨다. 서서히 새벽이 다가오고 인어들이 모두 지쳤을 때, 카이가 다시 한 번 노래를 시작한다. 인어들은 그늘 바위 안쪽으로 차오르는 물을 몰아내기 위해 힘을 내고, 마을 사람들은 우산과 파라솔을 펼쳐 햇빛으로부터 인어들을 보호한다.

위기 앞에서 마을 사람들과 인어들이 일시적으로 연대하는 이 장면은 감동적이고, 과거에 인어로 인해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던 주민들은 오해에서 벗어난다. 그러나 이 장면의 끝에 필연적으로 그늘 바위의 부서짐이 있다는 점을 생각해봐야 한다. 예로부터 인어를 햇빛에 태워 죽인 대가로 벽 안쪽 마을에 물이 가득차곤 했다는 ‘그늘 신’의 벌. 마을에 큰 그늘을 드리우는 그늘 바위는 인어를 살게 하고 마을에 벌을 내리기도 하는, 경계를 만드는 존재였다. 인어들이 몰아낸 물은 그늘바위를 부수고 재난을 돌파한 마을 사람들은 인어들과 함께 춤을 추지만 그늘바위가 없이는 인어도 살 수 없다. 결국 그늘바위가 사라지면 인어들도 사라지며 영화 역시 끝난다. 경계너머, 다른 세계와 존재의 가능성이 기묘한 현상과 두려움으로 나타날 때 결국 ‘쇠퇴한 항구도시’였다는 영화의 배경 히나시 마을은 그러한 세계의 중첩이나 확장을 견디지 못해 그늘바위가 사라지는 결말을 택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니 이 영화의 끝은 인물들의 밝은 표정과 모든 고난이 지나간 후의 화창한 날씨에도 불구하고 마냥 낙관적인 것만은 아니다. 겹쳐지고 확장되는 세계를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고 활력이 가득한 몸짓으로 그것을 버티곤 했던 루는 이제 마을의 마스코트, 인어랜드의 상품이 되어 납작하고 단일한 의미로만 존재할 뿐이다. 그러나 카이와 함께 밴드 ‘세이렌’의 멤버였고 루에게만 몰린 관심을 질투했던, 그리고 다시 루를 구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던 인물 유호의 마지막 말이 이 결말을 체념이나 망각으로부터 벗어나게 한다. 이제 곧 중학교를 졸업하면 마을을 벗어나 도쿄로 진학하리라 말하고는 “이제 해가 드는 마을이 되었네!”라고 인사를 전하는 유호. 인어를 살게 하는 그늘과 빛이 오가는 경계의 형성, 곧 영화 속 세계가 작동하는 조건을 누구보다 명확히 인지한 이 소녀는 영화의 마지막에 이르러 마을의 경계인 터널의 문턱을 넘어간다.

 

글 : 손시내
2016년 영평상 신인평론상 수상. 한국독립영화협회 비평분과에서 활동 중.

 

* 글 출처: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 르몽드 시네마 크리티크

http://www.ilemonde.com/news/articleList.html?sc_sub_section_code=S2N40&view_type=sm

 

0

추천하기

0

반대하기

첨부파일 다운로드

등록자서성희

등록일2018-05-08

조회수6,319

  • 페이스북 공유
  • 트위터 공유
  • 밴드 공유
  • Google+ 공유
  • 인쇄하기
 
스팸방지코드 :
번호제목등록자등록일조회수
272[송아름의 시네마 크리티크] 소비되는 청춘과 곡해되는 청년 - <버닝>의 공허한 칼날에 대해

서성희

2018.10.097,228
271[손시내의 시네마 크리티크] 아녜스 바르다와 JR이 찾은 얼굴들과 장소들,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

서성희

2018.10.097,563
270[정재형의 시네마 크리티크] 여성들이 누리는 통쾌함을 위하여 - <오션스8>(2018)

서성희

2018.10.096,743
269[지승학의 시네마 크리티크] 공포로 사랑 그리기

서성희

2018.10.096,087
268<숨바꼭질: 어둠의 속삭임> ― 사라지는 아이들과 복수의 제의

서성희

2018.10.097,229
267 [남유랑의 시네마 크리티크] 영화 ‘거룩한 분노’ ㅡ “짙은 암흑 속에서 핀 작은 불씨, 점점이 타올라 어둠을 삼키고, 마침내 제 얼굴을 배꼼이 들이밀다”

서성희

2018.10.096,675
266[정동섭의 시네마 크리티크]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 청춘은 노년을 지켜낼 수 있는가?

서성희

2018.10.096,447
265[이대연의 시네마 크리티크] 선의로 가득한 메르헨의 세계 ‘프린스 앤 프린세스’(미셸 오슬로, 1999)

서성희

2018.10.096,510
264[서성희의 시네마 크리티크] ‘밤쉘’(Bombshell) : 과학자와 섹시한 여성 사이

서성희

2018.10.096,009
263 [최재훈의 시네마 크리티크] 누가 더 나쁜 인간인가에 대한 지옥도 ‘사이비’

서성희

2018.10.096,9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