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레단 ‘베자르 발레 로잔’ 예술감독인 발레안무가 질 로망은 스승 모리스 베자르의 전설적 발레 안무작 '합창’ 탄생 50년(2014)을 기념하여 이 작품을 재현할 파트너를 찾게 된다. 도쿄발레단이 간택되었고, 주빈 메타 지휘의 이스라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섬세함과 웅장함을 보태면서, 새 밀레니엄에 발레 '합창’은 화려하게 만개하였다. <댄싱 베토벤>이 포착한 화려함 이면에 가볍게 내려앉는 예술가들이 우울을 극복하고 인상적인 작품을 만들어가는 과정의 비료화(fertilization) 작업은 냉정하며, 종교의식 같은 인류애를 부각시킨 가을 시퀀스의 '환희의 송가'는 관객들과 감동적인 느낌을 공유한다.
<댄싱 베토벤>은 스위스 로잔과 일본 도쿄를 오가며 공연 준비 전 과정을 담아낸다. 이름만 들어도 숨이 멎을 듯한 전설이 된 예술계 거장들의 작업을 오마주(獻)하는 작업 자체도 사건이다. 겨울 발레교실에서 가을 공연으로 결실을 거두는 영화는 발레 장르를 대상으로 영화작업을 하는 기록 영화의 정석을 밟고 있다. 파리국립오페라발레단의 모든 것을 담은 프레드릭 와이즈먼 감독의 <라 당스>(La Danse: The Paris Opera Ballet, 2009)를 보면 발레영화의 공식을 찾을 수 있다. 공연 못지않게 과정의 소중함을 묘사하고 있는 영화는 일상의 고민에서부터 발레의 향방을 조심스럽게 진단하고 있다.
최절정의 몸이 좋은 음악을 만나 예술이 된다면 그것보다 더 좋은 일은 없다. 기발한 상상력으로 소수 향유의 실내 발레를 대중친화적 대형 공간으로 이동시킨 발레혁명가, 현대무용의 전설이 된 프랑스의 안무가 모리스 베자르(1927∼2007)는 이 세상의 모든 작곡가 가운데 베토벤을 경외의 대상으로 삼는다. 이 느낌으로 지휘한 주빈 메타와 발레 무용수들 모두는 또 다른 전설이 되었다. 1964년, 브뤼셀에서 베자르는 베토벤의 교향곡 9번 ‘합창’을 주조 음악으로 안무작을 발표한다. 기하학적 조형의 발레리나, 발레리노의 군무 구성은 넘치는 현대성을 부여하였고, ‘파격’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한국에서 발레 속에 숨겨진 현대철학의 상층부를 찾아내고, 그 상징적 의미를 헤아리는 작업은 시간과 고통을 수반한다. 이즈음의 ‘발레블랑’이 보여주는 작업들의 상당수는 철학적 함의와 상징성에서 난해한 으로 가득 차 있다. 고전 발레나 낭만 발레의 향수를 기대한 관객들을 당황하게 만드는 현대 발레의 난해함은 현대무용에 가깝다. <댄싱 베토벤>은 형식적 난해함을 극복하고, 인간 존엄과 공감을 중시하는 무용수를 부각시킨다. 감독은 베자르가 주창했던 ‘전통적인 틀에서 벗어나 모든 종류와 조건의 사람들에게 와 닿을 수 있는 안무 구성‘에 집중한다.
아기레 감독의 탐미적 연출력을 보여준 <댄싱 베토벤>은 최고의 예술집단이 전설의 무대를 재현하여 깊은 감동을 주는 다큐멘터리 이다. 와이드 앵글로 잡힌 동, 부동(動, 不動)의 피사체들은 현실에서 환상까지의 장면들을 자연스럽게 연기해내고 있다. 이 점에서 이 영화는 극성을 띈다. 드라마로의 임계점을 경계한 영화는 다음 장면에 대한 호기심으로 팽팽한 긴장감을 견지한다. 관능미, 역동성, 화려한 안무 등 초연의 감흥을 그대로 분출시킨다. 기록영화의 핵심인 감독의 관점과 주장은 경탄을 자아낸다. 내레이터 말리야 로망은 안무가와 무용수들, 지휘자들의 인터뷰이로서 감독의 의중과 자신의 생각을 전달한다.
<댄싱 베토벤>의 리듬과 구조는 베토벤 교향곡 9번처럼 4개 악장이 영화의 4개의 시퀀스와 일치된다. 아기레 감독은 베자르가 추구한 춤의 아름다움, 예술, 삶, 사랑이란 주제를 골고루 영화에 포진시키면서 '고뇌에서 기쁨으로, 어둠에서 빛으로'라는 베자르의 이상을 실현시킨다. 허구와 사실의 경계가 적절히 조화되도록 허구적 요소들은 자연스럽게 처리된다. 베토벤 교향곡 9번 4악장처럼 영화에서도 마지막 시퀀스는 타 악장보다 다소 길게 구성되며 이전의 내용과 구성을 해결한다. 리듬은 등장인물들의 다양한 성격과 주제별 시퀀스를 반영하고 있지만 ‘무제감’(無題感)을 살린다.
베자르 안무의 정점을 찍은 현대 발레 연기자들의 격정 연기를 찾아가는 여정에서 발레와 음악에 대한 친밀감을 느끼게 한 영화는 예술의 각 장르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개별적 아름다움을 넘어서는 일체된 통일감의 절대미를 생산한다. 팔십 여명의 무용수, 합창단, 교향악단까지 삼백 오십 여명이 참여한 무대는 주제와 색이 조화롭게 어울리고 있고, 베토벤의 음악에 헌무(獻舞)하는 무용수들의 열정이 녹아있는 춤은 인류는 하나임을 밝힌다. 환희와 인류애의 메시지를 담은 베토벤 교향곡 9번 4악장 '환희의 송가, Ode to Joy'가 울려 퍼진다. ‘하나 됨’으로 전쟁 없는 ‘환희의 송가’를 듣고자 했던 성현들의 소망, 현자 베토벤의 꿈은 사숙한 모리스 베자르에 의해서도 영원히 이루어질 수 없기에 더욱 간절하다.
악장, 주제, 주조색은 계절, 장소, 춤과 조우한다. 겨울 시퀀스(로잔), 1악장은 대지에서 솟아나는 생명력을 묘사한다. 갈색 의상은 대지를 상징한다. 수행에 버금가는 기념 공연의 연습 과정 속에 베토벤과 베자르의 초월적 의지와 사랑이 담긴다. 베토벤의 '합창' 교향곡이 여든에 이르는 발레 연기자들과 어우러진다. 봄 시퀀스(도쿄), 2악장 스케르초 속의 열정과 기쁨을 표현한다. 빨갛게 피어나는 꽃, 겨울을 이겨낸 끈질긴 생명, 에너지, 불굴의 힘이 강조된다. 블루, 화이트, 레드 중에서 프랑스가 간과한 레드(박애, 협동)가 강조되며 설원을 넘어 봄꽃의 아름다움을 넘어서는 베자르의 인간 존중의 이야기가 담긴다.
여름 시퀀스(로잔), 3악장의 흰색은 겨울과 시련을 상징한다, 조화와 사랑을 이루는 물이 주제이다. 무용수들은 이질적 요소와 난관을 극복하고 힘든 상황들을 접하면서도 열정과 헌신으로 조화로운 무대를 완성한다. 가을 시퀀스(도쿄), 노랑은 자유의 상징이며 빛과 환희를 나타낸다. 성악가의 노래에 맞추어 춤추는 오스카 챠콘과 집단은 '모든 인류는 형제이다'임을 밝힌다. 춤은 지휘자의 느린 진행을 따라 고뇌에서 기쁨으로, 어둠에서 빛으로 이동한다. 실러의 시는 인류애를 시각화하는데 쓰인다. 춤은 예술가들이 기쁨을 줄 수 있고 행동하고 존재하는 방식으로서의 선물임이 입증된다.
아란차 아기레 감독이 듣게 된 내면의 소리, 베토벤의 ‘합창’은 마음 속 풍요로움을 일구었고, 영감의 원천으로 기능한다. 무용수들은 도구적인 존재가 아닌 지성과 용기로 가득 찬 인간이었다. 영화는 다양한 인터뷰를 통해 도전을 통해 긍정과 희망을 표현한 베자르와 베토벤의 공통점을 찾아 간다. 감독은 객관적 관점 하에 허구를 첨가하여 새로운 해석을 만들었다. 감독의 눈에 비친 모리스 베자르의 안무작들은 서사적인 분위기를 창출시키면서 삶, 사랑, 죽음이라는 세 가지 주제에 귀착되고, 무용수로 하여금 인간으로서 자신을 발견하게끔 만든 안무가였다. <댄싱 베토벤>은 영화 부문에서의 완벽한 성취 뿐 만아니라 자연스럽게 위대한 예술가들의 삶과 예술을 깊이 성찰하게 하는 훌륭한 교본이었다.
글: 장석용
영화평론가. 무용평론가. 시인. 유현목, 김호선 감독의 연출부를 거쳐 한국영화평론가협회 회장, 국제영화비평가연맹 한국 회장, 한국영화학회 총무이사, 대종상/부산국제영화제/예술실험영화/다양성영화/청소년영화제/이태리 황금금배상/다카국제영화제 심사위원, ‘문화저널 21’ 문예비평주간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 한국예술평론가협의회 회장, 글로벌이코노믹 문화전문위원으로 동국대 문화예술대학원을 거쳐 서경대 대학원에서 문예비평론을 강의하고 있다.
* 글 출처: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 르몽드 시네마 크리티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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