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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향] 20대의 귀거래사歸去來辭 - 영화 <리틀 포레스트>

 
 
“돌아왔다, 집으로.”
 
겨울의 눈길을 천천히 걸어 집에 도착한 혜원(김태리)은 마당을 지나 잠겨있는 안채의 미닫이 문을 열쇠로 연다. 커텐을 열어젖히면 온기 없는 집안의 풍경이 고즈넉하게 보인다. 신발을 벗기도 전에 마루에 벌렁 누워버리는 혜원의 모습을 카메라는 측면의 쇼트로 연결한다. 이는 혜원의 심상지리가 서울 혹은 바깥이라는 공간에서 고향집이라는 공간으로 연결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장면이라고 볼 수 있다. 아직 바깥에 발을 둔 채로 집 안에 들어가지도 않고 누워서 “돌아왔다, 집으로.”라고 읊조리는 그녀는 다소 지친 듯 보인다. 이후에도 “나만 돌아왔다, 아무 것도 찾지 못한 채.”라고 반복되는 내레이션은 이 낙향이 금의환향이 아닐 뿐만 아니라 서울에서의 실패로부터 비롯된 침잠의 과정임을 드러낸다. 이렇듯 ‘돌아왔다’라는 말의 선언적 사용은 <귀거래사(歸去來辭)>의 유명한 첫 구절을 떠올리게 한다. 

중국 진나라의 도연명은 41세에 문득 낙향하여 집 주변에 다섯 그루의 버드나무를 심고 스스로 오류선생(五柳先生)으로 칭했다. <귀거래사>에서 그는 “歸去來兮(돌아가리라)”를 매 단 첫 자구(字句)마다 반복한다. 시인이 낙향한 이유는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불확실하다. 다만, “旣自以心爲形役 奚惆悵而獨悲(이미 스스로 마음으로서 육체에 매이게 되었는데 어찌 근심하여 홀로 슬퍼만 하겠는가)”와 “世與我而相違(세상과 내가 서로 어긋나기만 하니)”처럼 그가 작품 속에서 밝힌 몇 가지 소회들로 추측해볼 수 있을 뿐이다. 요컨대 시인에게 고향을 떠나 중앙의 관직에 있는 삶이란, ‘먹고 사는 문제’에 얽매이고 사람들과의 관계와 사회적 의장 속에 나날이 고통만이 더해졌던 것이다. 고향으로 돌아온 시인은 날씨와 풍경의 변화에 주목하며 천천히 순리대로 살면서 죽음을 준비할 것을 다짐한다. 관리로서 입신출세의 길에 서 있다가 전회한 그의 행로는 비교적 자의에 의한 선택이고 지긋한 연배에서 결정된 낭만적인 귀향의 맥락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영화 <리틀 포레스트>에서 제시되는 이십 대의 혜원의 삶은 그리 녹록치가 않다. 돌아오긴 왔으나 무엇인가를 이뤄보지도 못한 채 쫓기듯 내려온 것이다. 표면적으로 그녀가 내려온 것은 몰두하던 시험에 떨어졌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녀의 낙향은 심리적인 열패감의 도피 행각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 영화는 삶이 그렇게 일면적인 것이 아님을 상기시킨다. 오류선생에게 마음이 육체의 부림을 받는다는 것은 육체에 복무해야 하는 정신의 괴로움을 토로하는 것으로 사유하지 못하는 삶의 한계를 자각한 것이라면, 혜원의 경우는 좀 더 원초적인 욕구 자체의 해결이 어렵다는 난망한 상황이 제기된다. 그러므로 그녀가 집에 돌아오게 된 것은 고상한 정신적 위무에 대한 요청이 아니라 생존 자체에 대한 필요 때문인 것이다. 

  
 
“사실 너무 배가 고팠다…”
 
<리틀 포레스트>에서 혜원이 문제의식을 자각하고 해결하는 과정은 서울로의 상경과 귀향의 반복으로 제시된다. 이 영화에서 혜원의 ‘집’ · ‘고향’과 ‘서울’의 공간 구획은 굉장히 중요한 갈등의 분기점으로 작용한다. 도시/지방의 위계는 원작인 일본 영화 <리틀 포레스트: 여름과 가을>(2014), <리틀 포레스트: 겨울과 봄>(2015)에서도 강조되는 부분이지만, 원작에서는 ‘지방’의 위기에 더 포커스가 맞춰져 있었다. ‘열심’인 채로 사는 마을 사람들의 태도가 오히려 쇠락해가는 ‘코모리’의 장래에 대한 반작용이라고 생각하는 ‘유타’의 대사나 ‘이치코(하시모토 아이)’의 폐교에서의 공연 등으로 표현되는 것이다. 그에 반해 이 영화에서는 ‘서울’에서의 삶이 주는 팍팍함에 좀 더 주목한다. 

  
 
이 영화에서 일본 원작이 가진 느리고 차분한 경작과 수확의 과정, 요리 재료를 손질하고 만드는 과정의 세세함을 줄이고 추가한 것은 혜원이 실로 ‘배가 고팠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다. 서울에서의 혜원의 삶은 어떠했는가. 4년제의 사범대를 나왔지만 시험 합격은 요원하고, 편의점 알바나 식당의 서빙 등으로 생계를 유지한다. 날짜가 지난 편의점의 도시락이나 냉장고 속의 시들어 빠진 과일들이 그녀의 주식이며, 오랜 남자친구가 있지만 시험의 당락 앞에서 거리감만을 느낄 뿐이다. ‘서울’에서는 어떤 것도 그녀의 육체적-심리적 ‘허기’를 든든히 채워주지 못한다. 이 영화에서는 인간이 가진 ‘배고픔’이라는 원초적 욕구가 결코 육체적인 차원에만 일면적으로 작용하는 것이 아님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 원작의 이치코도 해결되지 않는 문제들을 외면하고 농사일에 땀 흘리고는 있지만, 그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문제인지에 집중하지는 않는다. 혜원도 마찬가지로 자신의 문제를 외면하는데, 특히 서울에서 쫓겨났다는 것 즉, 어디에서도 자기만의 자리를 만들지 못했다는 자책이 좀 더 뚜렷하게 부각된다. 그런 의미에서 요리에 대한 주인공들의 태도는 두 영화의 주제적 차이를 드러내는 장치로 기능한다. 

일본 원작은 각각의 계절에 7가지의 요리를 만들어 가는 과정을 중심으로 진행된다. 이치코에게도 그 요리들은 과거의 기억들의 매개체가 되기는 하지만, 보다 근원적으로는 힘들여 고생해서 얻은 원재료들을 요리로 만들어 농사의 과정을 완성시키는 형태에 가깝다. 모종을 던지고 피를 뽑고 벼를 베는 과정을 거쳐 빻아서 힘들게 얻은 쌀로 밥을 짓는 것은 밥 자체가 아니라 공들여 얻은 자연의 재료들을 가장 좋은 형태로 조형시켜나가는 작업인 것이다. 그러나 혜원에게 요리는 먹어도 먹어도 허기만이 가득했던 서울에서의 삶을 털어내고 자신이 태어난 곳의 온기와 밀도를 다시 되살리는 과정처럼 보인다. 그 사이에 그녀에게 깨달음을 주는 엄마와의 추억이나 친구들과의 정담이 끼어들기도 하지만 혜원에게는 ‘배고픔’이라는 것을 온전히 해결해 나가는 과정이 치유의 과정이 되는 것이다. 

“포기가 아니라 선택한 거야”
 
<리틀 포레스트>는 원작 영화에 비해 인물들의 성격적 특징이나 소소한 갈등 요소들이 덧붙여졌다. 이는 사계절을 한 영화에 압축하고 좀 더 집중할 만한 서사적 요소들을 채워 넣기 위해서일 것이다. 그러나 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원작 영화 정도의 나이브함으로 20대 청년의 삶을 포지셔닝하기에는 한국의 현실이 가진 복잡다단한 문제들이 영화적 개연성의 측면에 있어 부족해 보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특히 기존의 청년담론 안에서 또 다른 하위적 영역을 구성하고 있는 지방 출신 청년에 대한 문제들이 영화에 추가되고 있는 점이 흥미롭다. 고향이 지방인 청년들이 진로의 선택에 있어 일차적으로 겪는 남을 것이냐/떠날 것이냐의 문제, 그리고 떠나서 도시에서 정착할 수 있느냐의 현실적인 어려움, 고향에 남은 청년들이 가지는 복잡한 심경 같은 것들이 영화 속 혜원, 재하(류준열), 은숙(진기주)의 캐릭터들의 사연에 잘 배합되어 있다. 이 영화는 도시/지방의 위계 속에서 지방에 남은 청년들의 삶을 경쟁에서의 낙오나 가족으로의 소극적인 도피 정도로 취급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혜원의 문제 해결 과정이란 “넌 뭘 그렇게 어렵게 사냐”라고 스스로 되묻고, 다른 사람이 결정하는 인생을 살기 싫다는 깨달음을 통해 주체적으로 선택해 나가는 삶으로 변모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혜원이 그 과정을 겪는 동안 이를 지켜보는 관객들의 시선을 이끌어 가는 것은 사계절의 아름다운 풍광과 ‘예쁜’ 요리들의 향연이다. 혜원은 신선한 채소를 넣은 파스타에 치즈를 갈아 넣거나 밤의 개울가에서 헤드라이트가 달린 모자를 쓰고 다슬기를 줍고, 밤을 삶아 설탕을 넣고 조려 밤조림을 해먹거나 은숙과 화해하기 위해 크렘 브륄레를 만든다. 

  
 
만약 이 영화를 보고 어딘가 찜찜함을 느낀 관객들이 있다면 이런 부분들에서 일 것이다. 오랫동안 비어있던 집은 바로 생활을 해도 될 만큼 깨끗하고 정리되어 있고, 무심한 듯 세련되게 꾸며진 집과 잘 갖춰진 요리 도구들이 있으며, 서울에서 제대로 된 식사도 못할 정도로 경제적으로 어렵던 혜원이 시골에서 경작하지 않는 재료로도 날마다 ‘예쁜’음식을 음식을 만들어 낸다. 열심히 땀을 흘리며 일하지만 여전히 완전히 촌부(村婦)같아 보이지는 않는 혜원의 스타일링 등도 어딘가 이 영화를 인공적으로 느껴지게 만든다. 삼시 세끼 밥만 해먹으며 시간을 보내는 <삼시세끼>가 진짜 시골 생활이 아니고, 유명한 여가수가 주인과 알바로 있으며 서로 세세한 사연을 나누는 민박집이 <효리네 민박집> 말고는 없는 것처럼 말이다. 

일본 원작에서는 이치코의 엄마가 비중이 적었고 툭툭 선문답처럼 던졌던 말들로 집을 불쑥 떠나는 행동에 나름의 알리바이를 만들었다. 이에 비해 좀 더 비중이 큰 혜원의 ‘엄마(문소리)’가 남편의 죽은 이후에도 고향에 남아 생계를 유지한 방편 등에 관해서도 설명이 필요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시골에 남은 이유를 혜원에게 얘기하는 부분-“혜원이가 힘들 때마다 이 곳의 흙냄새와 바람과 햇볕을 기억한다면 언제든 다시 털고 일어날 수 있을 거라는 걸 엄마는 믿어.”-은 지나치게 설명적이다. 작품 말미에 제목인 ‘리틀 포레스트’가 의미부여 되는 부분도 다소 급하게 정리하듯 제시된다. 

  
 
다만 이러한 한계들은 혜원이 서울 생활을 '포기'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선택'한 것이라는 결말에 이르게 하는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낭만적인 환타지로 처리한 부분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혜원의 삶의 향배에 있어 진로든, 연애 문제이든 열린 결말로 끝낼 수밖에 없었던 것은 여전히 산적해 있는 현실적인 문제들이 녹록치 않기 때문이다. <리틀 포레스트>의 미덕은 먹방이나 시골 체험 리얼리티 예능이 ‘가짜’로 ‘설정’된 것임을 알면서도 어쨌거나 잠시나마 시선을 돌리고 시야를 트이게 만들어 준다는 점에서 우리에게 주는 긍정적인 정화작용과 근본적으로 같다. 그리고 무엇보다 배우 김태리가 주는 신선하고 자연스러운 매력이 영화의 이러한 의도에 크게 일조한다고 볼 수 있다. 

* 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리틀 포레스트>
* 이수향: 영화평론가. 2013년 영평상 신인평론상을 수상, 웹진 문화다 편집 동인. 공저로 『영화광의 탄생』(2016), 『1990년대 문화 키워드 20』(2017).

* 글 출처: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 르몽드 시네마 크리티크

http://www.ilemonde.com/news/articleList.html?sc_sub_section_code=S2N40&view_type=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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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자서성희

등록일2018-0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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