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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승학] ‘무니’에 대하여: 미래를 향하는 오늘의 뒷모습 ‘플로리다 프로젝트’

이 소녀는 도대체 누구인가. 천진한 모습과 늘 겹치는 현란한 색채의 광고문구와 캐릭터들. 이 소녀는 자본주의의 그 환경 속에 천진하게 살고 있는 [블루 라군]의 에믈린(브룩쉴즈)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녀의 엄마가 자신이 처한 현실의 메마름을 외마디 절규로 보여주는 마지막 즈음의 순간, 소녀는 ‘자본과 소외’ 사이에 ‘순수’라는 잔상을 얹어 놓는 희생양으로 돌변한다. 물론 다큐와 영화는 ‘이야기’만으로 어떤 의미를 온전히 보여줄 수는 없다. 그러나 그 소녀의 등장만큼은 영화와 다큐가 이야기로 말해줄 수 없는 것들을 모두 보여주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이 소녀가 등장하는 모든 씬은 모두 옳다. 더욱이 그 소녀의 등장은 영화가 끝나는 순간 삶 속으로 되돌아온다. 그 소녀는 영화[플로리다 프로젝트]속에서 ‘무니’(브루클린 프린스)라고 불리지만 단순히 한 소녀의 이름이 아닌 이유이기도 하다. 

  
 
영화[플로리다 프로젝트] 속 ‘무니’는 동심이라는 판타지를 구걸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본과 소외라는 빤한 이야기 속에서 마치 야생을 관통하는 원주민과 같은 캐릭터로서 이 영화가 갖는 메시지의 층위를 천진하게 넘나들 뿐이다. 단순히 이야기를 뒤섞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무니의 등장 자체만으로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자본주의 고발 다큐의 전략적 효과를 그 자체로 폐기시켜 버리면서 또 다른 진중한 질문과 고민 속에 우리를 빠트려 버린다는 말이다. 도무지 2018년 미국의 현재 모습이라고 볼 수 없는 화면 속에서, 그나마 이따금 등장하는 대형마트의 브랜드와 디즈니랜드 캐릭터 혹은 칼리그라프를 통해 미국임을 알게 되는 그 일상의 풍경을 지나가는 장난기어린 걸음걸이를 통해 당대의 소비사회의 질환을 진단하는 그 천진한 꼬마소녀는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모르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정확한 메시지를 품고 있는 메시아의 뉘앙스마저 풍긴다. 

‘무니’가 동심의 상징도 아니고 소외어린이의 슬픔을 재현하는 캐릭터도 아니며 비행소녀의 일탈을 그려내는 인물도 아니라면 그녀는 그저 하나의 ‘질문’이 된다. 무니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에 대해 이 영화가 내놓는 상황은 우리 사회가 늘 고민해야했던 어떤 질문을 끄집어내게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회와 ‘우리’는 이 질문과 정확히 대응하는 데 항상 실패한다. 아니 ‘무니’와 ‘무니의 엄마’를 온전한 가정으로 만들어내는데 실패한다. 무니의 엄마는 처절하게 타락한 것으로 여겨지고 그녀의 모성은 오히려 폄훼되거나 오해된다. 그리하여 무니라는 ‘질문’으로 시작해 무니 엄마에 대한 ‘오해’로 끝나는 이 영화는 필연적으로 ‘무니’라는 질문에 늘 오답을 내놓을 수밖에 없는 사회를 향해 (무니 엄마의) 외마디 절규만을 남기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무니는 자신을 엄마와 떼어놓으려는 사회규칙을 피해 무지개 끝 ‘금’이 있는 환상의 나라로 도망치게 된다. 

  
 
그렇게 영화는 무니를 통해 세상이 감추려하는 성공할리 없는 ‘실패’를 보여준다. 무니는 세상의 순수와 사랑을 인정할 수밖에 없을 만큼 ‘동심’으로 가득하지만 세상의 편견과 오해를 부각할 수 있을 만큼 ‘속물’적 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래야만 무니는 사랑스러운 메신저가 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영화가 무니를 통해서 자본주의 사회의 부조리를 밝히려 했다고 말하는 것은 무익한 일이 될 뿐이다. 오히려 이 영화는 부조리의 고발을 위해 무니를 기능적으로 소비하고자 했으나 브루클린 프린스의 연기에 의해 그 의도는 그만 실패하게 되고 만 영화다. 하지만 오히려 이 실패가 영화[플로리다 프로젝트]의 의미를 더욱 부각시키게 된 것은 너무나 다행스러운 일이다. 이것은 이 영화에 대한 극한의 찬사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이 영화는 감독의 연출능력이 아니라 ‘무니’ 역으로 브루클린 프린스를 발굴해낸 그 심미안 덕에 가치를 얻었고 그 덕에 자본주의로 인한 균열과 상처에 동의하기는 훨씬 더 쉬워졌다는 말이다.

분명 어떤 영화가 품고 있는 메시지가 정밀하게 이 세상을 겨냥하고 있는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기준 중 하나는 그 영화가 취한 배경과 메시지가 얼마나 확고하게 연동되어가는 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플로리다 프로젝트]는 확고한 문화사회적 배경이 사실상 매우 허약할 수 있다거나 작위적이라는 점을 냉정하게 직시하고 이러한 혼란을 그대로 드러낼 수 있는 배우를 잘 발탁하는 것만으로 절반의 성공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대표적인 사례라고도 볼 수 있다. 적어도 사회적 혼란을 다루고자 하는 ‘프로젝트’라면 경계적 사유를 일으킬 수 있는 이중적 모습을 본능적으로 담고 있는 배우 발탁에 그 방점을 둘 필요도 있지 않을까? 이 말에 따른다면 ‘무니’역의 브루클린 프린스는 그 자체로 타고난 연기자일 수밖에 없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영화라는 장르는 ‘이야기’라는 요소에 완전히 장악될 수는 없다. 그렇다고 이야기와 관련 있는 요소, 즉 연출력, 혹은 무대미술, 대사, 캐릭터 등이 무의미하다는 뜻은 아니다. 궁극적으로 이야기는 캐릭터가 이끌어 나간다고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좋은 캐릭터가 있다면 그것은, 앞서 얘기했듯이, 영화가 끝나는 순간 삶 속에서 부활하느냐 마느냐에 따라 결판이 날지도 모를 일이다. 이야기나 메시지를 압도하는 캐릭터. 그 캐릭터는 이야기의 여운보다 훨씬 더 중요하게 다가올 수 있기 때문에 ‘부활’이라는 단어가 아깝지 않다. 그 부활을 영화[플로리다 프로젝트]에서 나는 보게 되었다. 젠시(발레리아 코토)가 무니의 눈물을 보고 ‘금이 있는 환상의 그 성’으로 무작정 뛰기 시작하다가 갑작스러운 영화의 끝을 보았을 때 나는 무니의 이 부활을 경험하게 되었다. 영화 마지막 그 어두운 화면을 뚫고 젠시와 무니가 그대로 뛰쳐나올 것만 같았던 그 느낌, 아니 뛰어나와주길 바라는 그 마음은 다른 어느 때 보다 강력했었기 때문이다. 

  
 
이 순간은 젠시와 무니, 무니와 젠시의 드물지 않은 ‘뒷모습’의 등장이 이해되는 순간이기도 했다. 그 아이들의 뒷모습은 달려 나갈 방향을 이미 암시하고 있는 일종의 엠블럼 같은 것이었고 그것은 모텔의 문구이기도 했던 그 말, “오늘, 미래에(서) 머무르세요”라는 문구에서 아마도 이미 예견되어 있었던 것처럼 미래를 지칭하는 오늘의 뒷모습이기도 했던 것이다.

  
 
 ‘무니’는 ‘야생의 캐릭터’로서 영화(오늘, 뒷모습)와 현실(미래, 달려 나갈 방향)을 가볍게 넘나드는 마법을 나에게 그렇게 부려댔고 그 마법은 ‘무니의 뒷모습’으로 현현하여 여전히 우리의 현실로 튀어나오길 영원히 기다리고 있음을 알려준다. 이 마법은 바로 ‘무니’를 발견한 기쁨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영화 한편 속 작은 꼬마소녀에게서 마법처럼 지금의 문제를 깨닫게 될 줄은 그 누구도 알지 못했을 것이다.

글·지승학
현 고려대학교 연구교수, 문학박사, 201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영화평론부문 등단. 

* 글 출처: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 르몽드 시네마 크리티크

http://www.ilemonde.com/news/articleList.html?sc_sub_section_code=S2N40&view_type=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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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자서성희

등록일2018-05-08

조회수6,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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