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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시내] ‘더 포스트’에 대한 뒤늦은 단상

스티븐 스필버그의 영화에 대해 말하는 건 의외로 어려운 일이다. 그가 연출한 영화만 해도 30여 편이 넘는데, 그 영화들을 단숨에 가로지르는 주제나 스타일을 찾는 일은 쉽지 않을뿐더러 영화들 간의 편차 역시 큰 편이다. 그 때문인지 스필버그의 어떤 영화를 가장 좋아하냐거나 스필버그 영화의 어떤 점을 좋아하냐는 물음에 대한 예상치 못한 답변을 듣는 일은 때로 흥미롭다. 대개의 감독론이 그렇겠지만, 스필버그에 대해서라면 무척이나 다양하고 종잡을 수 없는 복수의 감독론이 쓰여지리라 생각한다. 최근 국내에선 한 달의 간격을 두고 두 편의 스필버그 영화가 개봉했다.(<더 포스트>, <레디 플레이어 원>) 그 중 2월 28일에 개봉해 이제는 상영관을 찾아보기가 힘들어진 <더 포스트>에 대해 늦게나마 적어두려고 한다. 

이미 알려졌듯 <더 포스트>는 1971년 워싱턴 포스트의 ‘펜타곤 페이퍼’ 보도에 관한 일종의 실화드라마이다. 베트남 전쟁에 대한 비밀이 담긴 미 정부의 비밀 문건을 뉴욕 타임스가 보도해 특종을 터뜨리고 이에 곧바로 정부의 보도금지 조치가 내려진 가운데 일간지 워싱턴 포스트의 편집국장 벤 브래들리(톰 행크스)와 발행인 캐서린 그레이엄(메릴 스트립)이 문건을 입수하고 보도를 결정하는 과정이 영화의 주된 내용이다. 스티븐 스필버그는 <더 포스트>의 영화화가 꽤나 긴급한 결정이었음을 밝히면서(실제로 이 영화의 제작은 <레디 플레이어 원> 후반작업 중에 이루어졌으며, 2017년 안에 공개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언론의 자유와 페미니즘을 다루고 있음을 명확히 지목한 바 있다. <더 포스트>는 진실을 보도해 언론자유를 수호하는 일과 자신의 자리에서 성취를 이루어내고 성장하는 여성의 이야기가 탁월하게 결합한 결과이다. 

  
 
문건을 입수하고 기사를 작성하며 최종 발행을 결정하고 그로 인한 파장을 감당하기까지의 일련의 과정을 지탱하는 건, 언론의 역할을 지키려는 사명이나 정의보다는 개인의 야심과 자존을 걸고 또 지키려는 행동들의 연쇄다. 혹은 그러한 선택과 행동들이 언론자유를 지키고 베트남전의 진실을 알려 전쟁에 반대하는 당대의 정의와 맞물렸고 결과적으로 그 정의의 실현을 가능하게 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베트남 현지에서 보고서 작성에 참여했고 그 사본을 만들어두는, 과거 동료였던 바그디키언에 따르면 ‘양심과 신념도 있으면서 자아도 강한’ 댄 엘스버그에서부터 더 크고 강력한 특종을 따라 움직이는 벤과 그를 중심으로 하는 기자들, 여성이기에 발행인으로서 인정받지 못하는 현실 속에서 발행을 결정하고 책임지는 캐서린에 이르기까지 영화의 등장인물들은 개인적이면서도 공적인 선택을 감행한다. 여기에 관계하는 연쇄된 행동들, 선택과 결정, 협력의 과정들이 쌓이고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것을 영화는 동력으로 받아들인다. 

역시 주목해야 할 인물은 캐서린이다. 그는 극의 진행과 함께 변화하고 성장하며 서사적으로도 극의 중심 사건에 방점을 찍는 주요한 인물이다. 영화의 초반 캐서린이 주식공개와 그에 따른 발언을 위해 사업설명서를 통째로 공부하면서 투자 철회를 설명한 조항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여 근심하는 장면이 있다. 이는 영화의 후반부, 보도를 감행할 경우 법적인 책임을 피해갈 수 없으며 이는 사업설명서에 명시된 ‘재난’에 해당한다는 것을 두고 공방을 벌이는 장면으로 이어진다. 캐서린은 잠시 생각한 뒤 닉슨 시대에 언론이 진실을 보도하지 못하는 것은 모든 신문사가 함께 처한 문제이며 이에 대한 언론의 역할은 이미 사업설명서에 제시된 것이라는 논리를 근거로 발행을 최종 결정한다. 이 장면에 이르러 캐서린은 충돌하는 논리들의 교집합을 찾아 논리를 재조합하며 새롭게 해석해 길을 제시한다. 또한 그는 영화에서 시선의 규칙을 이해하고 대화 중 분기의 순간마다 카메라로 하여금 상상선을 넘게 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이른 아침 찾아온 벤과의 대화, 그리고 맥나마라의 집에서 이루어지는 대화 장면을 유심히 보면 이러한 순간들을 찾을 수 있다.)

  
 
이처럼 <더 포스트>는 역사적 사건을 통해 자신의 자리에서 역할을 다하는 것으로 공동의 정의를 실현하고 이제 막 공적 영역에 발을 디딘 여성의 자존과 성취를 구현할 수 있는 영화의 장소를 발견한다. 그러나 이러한 감상뿐이었다면 ‘뒤늦게’ 이 글을 쓰지는 않았을 것이다. 끊임없이 맞물려 작동되는 영화의 충만한 활동이나 도덕적 승리를 이뤄내고 스스로 서는 캐서린의 모습이 감동적인만큼 이 영화는 난감하다. 이에 대해 말하기 위해선 우선 스필버그의 전작들을 잠시 언급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가장 가까운 전작이라 할 수 있을 <스파이 브릿지>(2015)와 <마이 리틀 자이언트>(2016)는 소재나 장르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매우 비슷한 특징을 한 가지 공유한다. 서로 다른 세계에 속한 두 인물의 우정을 다루고 있다는 점이 그것으로, <스파이 브릿지>에서는 소련 스파이 에이블과 미국의 변호사 도노반의 관계가, <마이 리틀 자이언트>에서는 거인 세계의 꼬마 거인과 인간 세계의 소피의 관계가 등장한다. 서사의 굴곡을 거쳐 영화의 막바지에 이르면 이들은 각자 자신들이 속한 세계로 돌아간다. 다른 세계에 속해서도 마주볼 수 있는가, 혹은 타인의 세계를 바라볼 수 있는가가 이들 영화의 숨은 주제이다. <더 포스트>는 물론 필요 이상으로 가까워지지 않는 인물들의 믿음과 상호작용으로 구동되는 세계를 다루고 있지만, 이 영화에서 진정한 타인의 세계는 영화 안으로 진입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지점들이 그러한 감상을 뒷받침한다. 닉슨 정부에 맞서 쟁취해낸 언론의 자유와 정의를 지탱하고 있는 건 다름 아닌 가족 경영으로 운영되는 신문사를 소유한 캐서린 개인의 결정이다. 혹은 베트남 전쟁의 양상과 경과가 조작되었다는 사실에 등장인물들이 갖는 최대치의 근심과 배신감은 미국의 젊은이들(아들 때로 남자형제)이 쓸데없이 자행된 전쟁에서 소모되고 있다는 사실 정도인 것 같다. 가끔 반전집회를 여는 히피들이 등장하기는 하지만 시대적 배경을 환기하는 이상의 역할을 하고 있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 영화가 미국 시민들의 자유와 정의의 회복을 이야기하기 위해 그 바깥의 것들을 너무도 간단히 축소시켜 세계를 구성하고 있다고 말한다면 그건 너무 과도한 감상이 될까. 

물론 스필버그가 언제나 미국 소시민들의 평범한 풍경들로 영화를 구성해왔으며 그 자체로는 아무 비판거리가 되지 않는다는 것에 동의한다 해도 <더 포스트>의 이러한 지점에 대해선 복잡한 심경을 갖게 된다. 어떤 면에선 이 영화가 최근 목격하게 되는 일련의 ‘미국영화’의 한 면모를 보여주기 때문이리라 짐작한다. 굳이 시기를 따지자면 트럼프 당선을 전후로 제작된 미국영화들이 느슨하게 공유하는 미국의 풍경이라는 게 있는 듯하다. 한편으로 그것은 적나라한 폭력과 가난의 풍경이다. 최소한의 법조차도 작동하지 않는 세계에서 가난한 사람들은 폭력에 맞서 폭력으로 자신을 지켜야 한다. <로스트 인 더스트>나 <쓰리 빌보드>같은 영화들이 그러할텐데, 그처럼 적나라한 동시대성을 다루고 있다는 자의식이 종종 영화를 뚫고 돌출된다.

다른 한편으로 미국적인 무언가를 회복하려 애쓰는 영화들이 있다. 그것은 자유와 정의이거나, 휴식, 성장과 같은 것들이다. 이들은 변질되거나 침해된 것들을 회복하고 지키며 보존한다. <패터슨>, <더 포스트>, <레이디 버드>와 같은 영화들이 그러한 인상을 공유한다. 근면한 노동과 전문성, 국민국가를 사는 시민으로서의 의무, 지난하지만 따뜻한 일상이 바깥의 위험과 폭력, 귀찮음과 방해로부터 차단된 공간을 가득 채운다. 물론 이러한 인상들은 좀더 면밀하고 섬세하게 발전되고 분석되어야 하는 것이다. 다만 이와 같은 영화들이 현재 당면한 나쁜 세계의 모습 그러니까 폭력과 혐오와 가난, 노동이 곧 고통이 되어버린 풍경들을 누적된 위기의 결과가 아닌 일시적인 침해와 변질로 인식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을 지우기 어렵다. 그것이 회복되고 보존되기만 하면 되는 것일까. 미국 영화들은 그러한 꿈을 꾸고 있을까.

<더 포스트>에 나타난 직업인으로서의 성취와 참전한 아들들의 안위를 걱정하는 지극히 개인적이고 적당히 세속적인 동기들이 결과적으로 정의를 구현한다는 서사의 함의를 모르는 바는 아니다. 이를테면 미국이 벌이는 전쟁에 대해서라면 다짜고짜 전쟁의 참혹함이나 휴머니즘적인 수사에 의존하기보다 이 편이 더 합리적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전략의 순진함 역시 이제는 지적해야 할 것이다. (두 태도가 과연 완전히 다른 것일까?) 이 글을 쓰는 동안 미국의 시리아 공습 소식을 들었다. 여전히 세계의 해결자를 자임하고 있는 미국의 힘과 폭력의 논리가 그 모습과 작동방식을 조금씩 바꾸었을지언정 베트남 전쟁으로부터 완전히 변화하거나 벗어나있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영화가 현재의 문제들에 긴급하게 반응하려 할 때 발생하는 문제들이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을 섣불리 지적하려는 욕망들이, 영화가 다룬 소재나 현실의 모순들에 대해 말하는 것으로 영화에 대해 말했다고 착각하는 문제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고도 생각한다. 그것이 이 영화에 대해 한동안 말하지 못했고, 또 뒤늦게나마 말하는 이유이다. 

글 : 손시내
2016년 영평상 신인평론상 수상. 한국독립영화협회 비평분과에서 활동 중.

* 글 출처: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 르몽드 시네마 크리티크

http://www.ilemonde.com/news/articleList.html?sc_sub_section_code=S2N40&view_type=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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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자서성희

등록일2018-0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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