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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향] 시각적 재현으로서의 영화 만들기라는 태도-영화 ‘원더스트럭 Wonderstruck’

 
 

토드 헤인즈 감독은 <파 프롬 헤븐>(2002), <아임 낫 데어>(2007), <캐롤>(2015) 등의 필모그래피를 통해 자신의 영화적 지향이 헐리우드의 대중적인 오락성에 있지 않음을 보여준다. 그의 작품들에서는 씨네아스트(Cineaste)이자 퀴어감독으로서의 정체성이 뚜렷하게 드러난다. 이는 50년대 뉴욕 상류층의 분위기, 7-80년대의 히피문화 등 시공간적으로 빛나는 독특한 순간들에 영화사적 궤적을 겹쳐놓고 자신만의 인장을 찍는 과정이기도 하다. <캐롤>에서 더 특별하게 발현된 이 재능은 한 시대를 이루는 분위기에 대한 명민한 감각과 인물에 대한 통찰력, 영화 예술이 가지는 시청각적 가능성에 대한 무한한 긍정으로 나타났다. 요컨대 시대물에 특별히 치중하는 그의 취향은 ‘지금 여기’에 놓인 우리의 시야를 돌리게 한다는 점에서 시각적인 이채로움을 가질 수밖에 없다. 또한 그것으로 영화라는 매체가 지닌 감각으로서의 측면에 더 주의를 기울이게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가령, <벨벳 골드마인>을 통해 70년대 글램룩을 영화화한다는 것은 토드 헤인즈에게 현재의 관성에서 벗어난 독특한 그 시대의 분위기를 잡아내기 위해서인가, 아니면 스타일리스트로서 재현에 대한 집착 때문에 화려한 그 시대를 선택한 것일 뿐인가. 즉, 그에게 영화는 보는 것-시각적 재현에 집중되어 있는 것인가 아니면 이야기되는-스토리텔링에 방점이 찍혀 있는가. <캐롤>이라는 섬광(閃光) 뒤에 제시된 <원더스트럭Wonderstruck>(2017)을 보고 느끼게 되는 뜻밖의 당혹감은 이러한 의문에 대한 답을 통해 해소될 수 있을 것이다.

무성 영화시대의 비의성

1977년, ‘벤’이라는 소년은 밤마다 늑대에 쫓기는 꿈을 꾼다. 엄마와 둘이 살고 있었으나 불의의 사고로 얼마 전 엄마를 잃었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아빠에 대해 엄마가 말해주지 않았기 때문에 엄마의 죽음 이후 아빠의 존재는 영원히 비밀이 되어버린다. 그러던 ‘벤’은 어느날 우연히 엄마의 서랍장 속에서 『원더스트럭』이라는 책과 그 속에서 한 서점의 주소를 발견한다. 그런데 번개가 치던 밤, 전화기를 들고 있던 그는 감전이 되어 그 충격으로 귀가 들리지 않게 된다. 청각 장애를 지닌 채 병원을 빠져 나온 ‘벤’은 아빠의 존재를 찾기 위해 뉴욕으로 떠난다.

 

  
 

한편, 1927년, 부유하지만 엄격한 집안에서 아버지의 통제를 받으며 살던 ‘로즈’라는 소녀가 있다. 그녀는 청각장애로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지만, 극장에 가서 영화를 보기를 즐기며 ‘릴리안 메이휴’라는 여배우를 매우 좋아한다. 어느날 그녀가 뉴욕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가출을 하여 뉴욕으로 향한다.

 

  
 

<원더스트럭>은 1927년의 ‘로즈’와 1977년의 ‘벤’의 이야기를 교차편집 한다. 물론 장면만 교차하는 것이 아니라 무성/유성, 흑백/컬러 등 당대의 영화적 조건과 특징들까지도 교차해서 재현해낸다. 이를 통해 토드 헤인즈는 영화라는 매체의 가장 빛나던 시대들을 애수어린 시선으로 회고하고 있는 듯 하다.

보여지는 대상으로서의 영화는 그 이전에 이미 존재했던 회화나 사진과 이미지의 프레임화(Framing)라는 측면에서 동일하다. 그러나 단일하게 고정된 이미지를 넘어선 ‘움직임’을 포착했다는 점, 즉 동적인 측면을 확보했다는 점에 영화가 가진 근본적인 획기성이 있었을 것이다. 아직 초창기였던 무성영화 시대에는 이러한 ‘움직임’ 자체를 통해 율동감이나 속도감이 표현되었고 이를 통해 이미지로 의사소통이 가능한 시대였다. 그런 의미에서 아직 소리가 입혀지기 전의 흑백 무성 영화들의 시대에 ‘로즈’를 놓은 것은 단순히 클래식하고 기품있는 색채를 덧입히기 위한 것만이 아니다.

이미지와 움직임만으로 전달되는 초창기 영화가 가진 비의성(秘意性)은 ‘말’이라는 의사소통의 언어를 넘어서는 잉여의 것들을 함축하고 있다. 이는 ‘로즈’가 청각장애인으로 설정된 것과도 연결된다. 청각장애인들은 입술과 태도를 읽어 상대의 뜻을 알아채야하기 때문에 비언어적인 몸짓에 민감하다. 때로는 그들 자신도 수화로 전달하는 뜻을 보다 큰 몸의 움직임을 통해 상대에게 어필하기도 한다. 이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의사소통에 있어 말의 편리함이라고 여기는 부분이 놓치는 지점을 설명해준다. 기표는 의사 전달을 위해 온갖 기의들의 일 면만을 겨우 누빌(point of caption)뿐인 것이다. 이를 넘어서서 의미의 다의성을 함축하는 표정의 언어이자 태도의 언어를 보여주는 초창기 무성영화들이 가진 힘을 이 영화는 긍정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이를 실제 청각장애를 앓고 있는 밀리센트 시몬스가 해내고 있다는 것도 유의미하다. 그녀는 인터뷰에서 무성영화가 청각장애인들에게 주는 특별함에 대해 설명한다. 그녀에 따르면 무성 영화시대의 작품들에는 반드시 청각 장애인 배우들이 나와 감성 풍부한 연기를 펼쳤데 유성영화가 되면서 대사를 말할 수 없던 그들이 사라지게 됐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듣지 못하고 자막이 없어도 영화를 볼 수 있다는 점이 무성영화가 특별하다고 설명한다. 무성영화에도 약간의 음향 효과는 더해지지만 이렇듯 주로 시각적 감각에 집중된 것이 무성 영화의 독특함인 것이다. 1927년의 위치에 ‘로즈’를 놓이게 하고, 작품 속에 메이휴의 작품인 <폭풍의 딸>을 ‘1.33:1’의 비율로 필름을 사용하여 촬영한 것도 이러한 시대적인 호흡을 이해하고 좀 더 영화사적 원형의 차원을 구현해내려 했던 시도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50년의 시간의 거리를 둔 ‘로즈’와 ‘벤’이 공통적으로 자연사 박물관 안의 ‘호기심의 방’을 찾아간다는 설정도 흥미롭다. ‘호기심의 방’은 만국박람회장의 축소판 같은 것으로 온갖 환상적이고 신기한 물건, 진귀한 것들을 모아 놓은 곳으로 ‘로즈’와 ‘벤’에게는 그들 자신이 현재 서 있는 고통스런 현실에서 벗어난 곳을 꿈꿀 수 있게 해주는 곳이다. 이는 영화 초반 등장한 “시궁창 속에서도 우리들 중 누군가는 별을 바라본다”는 말과도 연결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는 또한 영화라는 매체를 향한 관객의 시선에도 유비될 수 있다. 스크린 안에서 펼쳐지는 환상의 세계는 이를 들여다보며 호기심을 갖는 소녀와 소년들처럼 관객들에게 흥미를 자극시키고 잠시 다른 시공간에 서 있게 하는 것이다.


우연성과 핍진성의 아이러니

‘로즈’가 무성영화시대의 온기를 재현해낸 인물이라면, 1977년도의 ‘벤’은 교차편집의 또 다른 한 축을 담당하면서 영화의 내러티브의 핵심을 제시한다. 또한 ‘벤’이 등장하는 장면들은 1927년과는 화면의 질감, 색채, 풍겨나오는 분위기까지도 완전히 반대로 제시된다. 영화적 기교의 제한적 사용만이 가능했던 무성영화 시대의 화면 연출에 길항하듯 급속한 줌인(zoom in), 패닝(panning), 카메라 앵글들의 다채로운 사용 등이 돋보인다. 특히 거리의 풍경과 인물들의 의상, 음악에서의 대비가 두드러진다.

1977년도의 뉴욕의 퀸즈 거리는 과장되게 부풀은 머리와 육감적인 몸들, 화려한 색감의 의상과 간판들로 가득해서 마치 어둠 속에 있다가 갑자기 빛에 나온 것처럼 시청각적으로 극단적으로 차이를 드러낸다. 특히, ‘벤’이 횡단보도에 서서 신호를 기다리는 장면은 주로 흑인들로 구성된 남녀 어른들 사이에 작고 어린 모습으로 섞여 있어 더욱 도드라지는데, 신호가 바뀌자 일제히 바쁘게 걸어가는 군중의 모습들이 그려내는 율동감과 그들의 몸에서 뿜어내는 엄청난 에너지가 인상적인 장면이다.

 

  
 

그런데 ‘로즈’의 시대와는 달리 ‘벤’의 시대는 풀어야할 수수께끼를 안고 있다는 점에서 영화의 감각적 측면 이외의 부분, 즉 내러티브 구조에 더 무게 중심이 놓인다. ‘벤’은 영화의 시작과 끝을 혼자 이끌어 가며, 특히 영화의 도입부에서부터 기이한 꿈들을 통해 미스터리함을 증가시킨다는 점에서 극적 긴장감을 유발시키는 존재이다. 아빠가 누군지조차 모르는 상태로 부모 모두를 잃었다는 점 게다가 후천적 청각 장애까지 안게 되었다는 점에서 관객들의 동정을 쏠리게 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이 영화는 결국 고아인 ‘벤’의 아비찾기 과정이 핵심이라 할 수 있다. 감독은 인터뷰를 통해 “여러 가지 단서를 쫓아 모험을 하게 되는 미스터리 이야기인데, 영화의 형식 자체가 이 미스터리의 핵심이기도 했다”라고 밝히기도 했다. 즉 이 영화는 ‘해결의 플롯plot of solution’이 핵심인 영화인데 이러한 플롯 진행과정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시간적 질서의식’이다.(S.채트먼, 56쪽; 이하, 면수만 표기) 그러므로 ‘벤’의 아비찾기 모험에서 그에게 순차적으로 일어난 일들이 결국 최종 목표에 기능적으로 작용해야하며 이러한 과정의 진행에 있어 무의미하거나 관련성이 적은 부분은 제거되어야 서사적 일관성을 유지할 수 있다. 채트먼에 따르면 서사적 사건들은 연관의 논리뿐 아니라 위계(hierarchy)의 논리도 지니고 있으므로, 중핵(noyau)이 되는 사건들에 나머지의 위성(satellite)사건들은 복무해야하는 것이다.(61-62쪽) 그런 의미에서 자연사 박물관에서 ‘제이미’와 보내는 부분을 비롯한 여러 장면들에서 지나치게 불필요하게 늘어놓는 쇼트들이 있다. 종종 서사적 구성의 필요에 의한 것이 아니라 감독의 시각적 장면화에 대한 열망이 과시적으로 사용된 부분이 있다.

 

  
 

채트먼은 “이미 제시된 부분들 뒤의 것과 다른 부분들을 이끄는 것 사이의 관계”를 ‘개연성’이라 부르고, ‘우연성contingency’은 “그 존재나 발생, 성격 등등을 확실하지 않은 어떤 것에 의존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한다.(53,54쪽) 그러한 측면에서 영화 속에서 ‘벤’의 아빠에 대해 엄마 ‘일레인’이 입을 다무는 부분의 암시적인 분위기가 결론에 비해 과도하다는 인상을 주며, 후천적 청각 장애가 생기게 된 원인이나 자연사 박물관에 이르게 된 경위, 킨케이드 서점에서 자신의 뿌리를 찾게 되는 과정 등에서 지나치게 우연성이 남발된다고 볼 수 있다. 또한 ‘로즈’가 설명하는 ‘벤’의 가계(家系)에 대해 듣고 나서도 여전히 이렇게까지 에둘러 밝혀지는 이들의 사연에 대해 서사적 핍진성(verisimilitude)의 측면에서 의문이 남는다.

특히 뉴욕 도시를 미니어처화한 디오라마 구조물이 문제적이다. 영화에서는 가족들의 얼굴 사진을 붙인 종이 인형들을 디오라마 위의 공간들에 위치시키면서 짧은 몽타주들로 ‘벤’이 알고 싶던 부모의 내력을 제시한다. 이는 결국 이 영화에서 중점을 두고 있는 부분이 개연성의 여부나 내러티브적 핍진성보다는 감독이 가진 시각적 효과의 이채로움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의 서사는 다수의 관객들을 공감하게 하는데 실패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 영화의 목적이 가 닿는 방향이 관객에게 영화적 이야기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영화라는 예술과 그 예술의 역사와 표현 방법에 대해 보여주는 것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영화의 성좌와 창작자의 주관적 의지

영화 <원더스트럭>은 창작자의 주관적 의지와 관객의 능동적인 지각 사이에 놓여 있다. 이는 영화 예술에 대한 헌사(토드 헤인즈는 <벨벳 골드마인>으로 칸 영화제에서 ‘예술공헌상’을 수상하기도 했다!)로서 영화와 세속적 오락물로서의 영화의 지난한 싸움이기도 하다.

현재 영화 <원더스트럭>이 한국에 놓인 자리는 그 자체로 의미심장하다. 5월 황금 연휴를 맞아 어마어마한 규모의 헐리우드 블록버스터-미국중심적이며 독과점이라는 물량 공세 자체에서 엄청난 자본의 위력을 재확인 시키는-가 대부분의 극장을 차지하고 있다. 그런데 전통적인 고급예술/대중예술의 구분법으로 이러한 영화가 관객들을 수준 낮게 만든다고 비판할 수 있는가. 반대로 난해하고 실험적인 방식으로 영화라는 매체를 예술을 위한 예술에만 복무하게 하는 것이 옳은가.

 

  
 

이 영화의 원작 작가이자 각본을 맡은 브라이언 셀즈닉은 마틴 스콜세지의 <휴고>(2011)의 원작자이기도 했다. <휴고>는 조르주 멜리에스가 <달세계 여행A Trip the Moon>(1902)를 통해 현실 너머의 상상력과 환상에 대해 꿈꿨던 영화사적 반짝임의 순간을 보여주는 영화이다. 마찬가지로 <원더스트럭>이 보여주는 영화적 언어들에 대한 천착은 원작이 가진 영화 예술의 역사에 대한 애정에서 기인한 것이다. 토드 헤인즈 감독의 시도 역시 창작자의 주관적인 의지가 관객에 대한 설득력보다 앞서있다.

대량생산과 복제로 예술원본이 가진 아우라의 제의적 기능을 잃어버린 상태에서 영화는 등장했다고 벤야민은 설명한다. 영화가 가진 오락성도, 작가주의도 모두 영화를 즐기는 관객들을 매개로 연결된다. 한편, 사적 공동체가 사라져 가는 도시에서 익명의 사적이지 않은 대중들을 오히려 옆자리에서 친밀하게 만날 수 있는 곳이 극장일 수 있다. 영화적 환상의 재현을 위한 각기 다른 태도를 가진 고군분투들이 벤야민의 ‘성좌’ 개념처럼 펼쳐져 있다. 실상은 서로 먼 거리에 떨어져 있어 다른 가치들을 강조하지만, 그 자체로 빛나서 도래하는 미래를 도모하고 있는 별들의 조합이 현재의 영화 예술을 이루고 있다고 볼 수 있다.

※ 참고문헌: 시모어 채트먼, 『이야기와 담론』, 푸른사상, 2003.

* 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원더스트럭>
* 이수향: 영화평론가. 2013년 영평상 신인평론상을 수상, 웹진 문화다 편집 동인. 공저로 『영화광의 탄생』(2016), 『1990년대 문화 키워드 20』(2017).

 

* 글 출처: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 르몽드 시네마 크리티크

http://www.ilemonde.com/news/articleList.html?sc_sub_section_code=S2N40&view_type=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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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자서성희

등록일2018-05-08

조회수51,3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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